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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ㅡㅣㅁㅏㅇ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6-10-29
  • 조회수 863

ㅎㅡㅣㅁㅏㅇ

시험이 끝난 날로부터.

 

머리가 아프다, 눈이 뻑뻑하다, 손가락이 흉하다, 자고 싶다, 상기 나열된 어떠한 감정 하나가 나를 특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저런 부류의 구름이 뚝 뚝 떼어져 인간 모양으로 형상화 된 것이 나라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다. 숨 쉬는 행위가 바쁘다. 초침을 이백사십이조각 내어 한 조각 삼킨다. 나는 숨을 열 번 쉬었는데 고작 일 초가 지났을 뿐이다. 모든 것이 끝났나? 드디어 그토록 염원하던 종말이 도래했나? 애당초 끝을 나타내는 체언에 긍정을 나타내는 용언의 수식이 적합하던가? 생각의 흐름은 유체로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는데 나는 자꾸만 멈추어 있는 기분이 들지?

 

그러니까 나는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인간인 것이에요. 노래를 들으며 세상과의 단절을 꿈꾸고 그러면서도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누구하고든 온기를 나누려 하고 또 침대 속에서 한없이 가라앉고 있으면서도 이불을 돛 삼아 무모한 항해를 감행하는 사람인 것이에요. 흐르기를 바라면서 멈추어 버리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존재가 나밖에 또 있을까요. 남자치곤 높은 목소리와 밴드 음악이 함께 흘러나오고 있는 이어폰 밖에서는 룸메이트가 전화기를 붙들고 있어요. 새로 산 이어폰의 성능이 문제인 걸까요. 노래 사이로 통화 내용이 전부 들려오는데 시험이 쉬웠다, 라는, 그런, 내용, 나는, 숨을, 쉴, 수, 없어요.

 

분명 이번 시험은 굉장히 쉬웠지,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에게서 나를 분리하고 분리한 나에게서 나를 지운다. 주마등이 지나가는 것을 보니 곧 죽으려나, 하고 빛을 차단한다. 쉬웠다. 쉽다. 부정할 수 없는 불변의 법칙이다. 영어 문법에서 현재형을 써야만 하는. 상상할 수 없는 숫자가 앞자리에 자리하는 기분을 알고 있니. 여덟 시간 전에는 빨간색 색연필이 두 동강 났다. 기숙사 카페트에 묻은 색연필 쪼가리를 나는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내가 예상했던 건 비가 오는 날이 아니었어. 왜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서 눈이 아니라 비가 내리나요?

 

차라리 비라도 왔으면 좋겠다. 아니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걸 보세요 나는 이렇게나 모순적인 사람이야. 인간이란 전두엽이 발달된 영장류로 분류되지, 그럼 이성적인 사고회로가 마비되어 버린 나는 사람이 아닌 걸까? 만일 비가 온다면 나는 흰 티에 청바지를 입고 그 위에는 검은색 후드집업을 눌러쓰고 빗속을 거닐 작정이다. 감정은 친수성일까 소수성일까, 아직까지 확인된 바가 없다. 이왕이면 친수성이기를 기도한다. 소나기를 맞으며 걷고 걷고 걸으면 흘러들어오는 상냥한 일본어와 영어가 함께 섞인 감정이 전부 흘러내려버리기를 바란다.

 

햇살이 가장 따가울 때부터 가장 뜨거울 때까지 우리 기숙사 맞은편에서는 예방접종이 진행 중이었다. 예방접종을 독촉하는 방송이 울리곤 했다. 나는 채점된 시험지를 한쪽으로 모아 놓고 이불로 몸뚱이를 감싼 채 종이더미를 바라보았다. 저것은 언젠가 손을 댄 적이 있던 관동별곡 프린트. 저것은 가장 어렵다고 했던 일반사회 프린트. 이것은 목이 쉬도록 외워대었던 영어 단어장. 이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야. 일순간 저 종이 쪼가리들을 전부 찢은 다음 드럼통에 와르르 쏟은 후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이 타오른다. 성냥팔이 소녀가 그랬듯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보고 싶다는 염원에 젖는다. 예방접종을 맞지 않은 사생들은 지금 가서 접종하시기 바랍니다……. 불은 머릿속에서 나고 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다. 그 다음에는 나무들이 불쌍해지기 시작한다. 나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에게 가서 가치 있는 자료가 되지 그랬니.

 

나는 언젠가부터 큰 신발을 신고 언젠가부터 큰 옷을 입고 언젠가부터 큰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지만 상관없었다. 몸이 클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지금 성장이 멈추는 건 비정상적인 일이라고. 월경을 시작한 후로도 여자아이들은 성년이 되기 전까지 조금씩은 자란다고. 그런데 왜 지금까지도 신발과 옷의 낙낙한 품 때문에 여기저기 물집이 잡혀 있나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나는 한 번에 100mm가 자라는 삶보다 하루에 1mm가 자라는 삶을 살고 싶어요. 농부가 잡초를 뽑을 때 나까지 딸려나가는 일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우리는 언제나 최선과 최악을 생각해야 한다, 고, 누군가 말했었다. 생각한 것이 전부 이루어지는 능력이라면 나는 지금쯤 이 기숙사에서 소등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존스홉킨즈 대학교에서 동맥경화의 두 가지 모델에 대하여 비교분석모델을 발표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있잖아요 아직도 통화는 계속되고 있어요 나는 그 끔찍함에 몸부림치고 울음을 삼켜요. 공부하지 않은 것으로 타협을 보자. 나는 공부하지 않았고 그래서 원하는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은 거야. 나의 만족척도는 하향곡선을 그립니다. 세계와 타협하는 법을 배우고 나를 낮추는 법을 배우고, 사람을 살리는 법 대신 죽이는 법을, 배우고, 마카롱 대신 타이레놀을 삼키는 것에 익숙해지고…… 마치 어떠한 숨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만 같이…… 한정된 공간에서의 요람은 무방비하게 노출되고 있어요. 이곳은 인큐베이터, 아직 미숙한 수정란들을 보관하는 곳. 이곳에서 자존감은 무차별적으로 가공되고 깎아내어지고 다듬어지고 뭉그러져 결국에는 사회의 순종적인 시스템에 가장 부합한 공산품으로 찍혀 나온답니다. 수공예품으로 태어났으나 맞이한 말로는 싸늘한 공장 기계 위의 시체라고. 자아를 분실한 본체는 생각보다 잘 운용되고 있는걸요. 저기 저 하늘을 보세요. 상실감을 품고 비행에 최적화된 사람들이 비상하고 있잖아.

 

그래서 나는 나를 아무것도 하지 않은 목각인형으로 여기기로 했어요. 아직 나는 저 끈을 건드리지 않았을 뿐이야. 관절에 꼼꼼히 매듭지어진 마리오네뜨는 움직이지 않았어. 나는 무엇도 시도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락으로 떨어진 거야. 그것뿐이야.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뿐. 아직 날개는 펼쳐지지 않았어. 내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어. 판도라의 상자처럼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지만 그 열쇠는 내가 쥐고 있어, 그러니까 아무 문제없어. 그러니까…… 아무…… 문제……

 

그래요 사실 나는 알고 있었던 거예요, 한계에 부딪혔다는 진실을 눈 뜨고 보기에는 살이 찢기는 것만 같아서, 마주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애써 진실을 회피해 왔던 거예요. 내가 심연을 들여다보는 순간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는 니체의 말이 나를 삼켜요. 심연이 나를 집어삼킬까 봐 무서워요. 두려워요. 나는 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요. 두려움은 내 입안으로 선악과 대신 달콤한 포도알을 밀어 넣어 왜곡된 평면을 내밀고, 나는 위상수학에서나 다룰 법한 곡면을 평면이라 칭하며 왜곡된 관념을 나의 우상으로 섬겼습니다. 언젠가 소논문에 덧붙였던 방어기제의 발현이 또렷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왜,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없, 어요? 더듬거리며 간신히 발음하는 음절들은 비참하다.

 

다시 연필을 잡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숨을 들이키고 울음을 마시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되어 길거리를 떠도는 부랑자로 전락하고. 없는 신을 헤매는 것은 하루의 마지막 일과였다. 과거형의 활자들 속에서 나는 현재형을 본다. 교과서 속 수필들의 결말을 떠올린다. 해피 엔딩. 내가 쓰는 소설들의 결말에서는 모두가 죽어가고 있는데. 삶은 소설과 더 가깝다. 극히 일부를 전부인 양 포장하여 성급하게 일반화시키는 흔한 오류가 만연하다. 희망이라고 하는 관념을 붙잡으려 들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다. 관념이니까. 관념이거든.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야. 나에게도 희망이라는 게 있나요? 입구가 닫힌 탄광에서 빛을 좇는 나에게도 희망은 있나요? 내가 폐부 속으로 밀어넣고 있는 이 공기 속에 애초에 희망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던가요? ㅎㅡㅣㅁㅏㅇ, 같은 음운이 하나도 없는 이곳에서 나는 열쇠를 찾아 걷는다. ㅎㅡㅣㅁㅏㅇ, 하나의 음운이 한 음절이 되어 히으이마아앙으로 발음된다. 희망을 잃은 단어의 좌절. 아주 길게 내빼는 단어의 꼬리에는 볼썽사나운 조각이 매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에 종결어미를 희망으로 점철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너무 힘들어. 그저 비극으로 끝나는 삶의 종말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 것도 견디기 어려워. 그래서 나는 인간의 본성에 충실히 탐욕스럽게 행동한다. 조금만 이기적으로. 아주 조금만 나를 되돌아볼게. 하드웨어에 딱 들어맞는 소프트웨어가 되기 위해 커튼을 걷는다. 창문 너머에는 디스토피아가 있다. 어둠으로 귀결되는 디스토피아 안에서 나는 바벨탑을 본다. 무너져 있는 바벨탑은 적어도 내가 다시 쌓아올려야 할 유토피아의 사다리. 검게 물든 하늘 위로 떠 있는 달이 맑다. 바벨탑의 잔해와 달 사이의 간격을 어림한다. 곧 포기한다. 미리 어림짐작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이제, 아니, 이제야. 나는 파편을 손가락에 단단히 얽는다.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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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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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 2018-03-31
연극이 끝나기 전에*

연극이 끝나기 전에* 어쨌든 공연은 올려야 한다. 그게 이학년들끼리 비상회의를 소집해 나온 결과였다. 축제까지는 이제 고작 이 주밖에 남질 않았고, 원래대로라면 소품까지 전부 준비되어 들고 동선을 맞춰야 하는 시점이었다. 박스도 몇 번만 더 주우면 그만 주워야 할 정도로 꽉꽉 차 있어야 했다. 그러나 대본조차 나오지 않은 상황은 전년도 축제를 준비한 입장에서 보자면 축제에 공연을 올리고 싶기는 한 건지, 귀신의 집을 운영하려고 하는 건 맞는 건지 의문을 품기 충분했다. 저녁에 삼학년 선배들이 내려왔다. 동아리 시간에 삼학년 기장 선배가 내려와 한바탕 혼이 난 후였다. 수능까지 남은 기간도 동일하게 이 주일이었다. 이학년 기장 Y에게 문자를 받은 순간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머리에 직격했다. 삼학년뿐 아니라 이학년들도 거의 개입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이학년들이 매달려 도와주는 것도 모자라 삼학년 선배께서 직접 내려와 상황을 체크하고 최선의 방도를 함께 강구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선배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본래 회의를 소집하면 텅텅 비어 있곤 하던 큰 강의실은 어쩐 일인지 이학년과 일학년들로 꽉 차 있었다. 차가운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학년 기장 Y가 울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이년간 걱정 될 정도로 연극부를 위해 헌신한 건 Y였고, 맨 땅에 헤딩을 하려던 일학년들에게 완충작용을 한 것도 Y였고, 의욕 없는 일학년들을 어르고 달래 그나마 대본을 쓰게 시키고 지속적으로 찾아갔던 것도 Y였다. Y는 할 만큼 했고, 짊어질 만큼 짊어졌다. 우리는 둘로 갈라졌다. Y를 위로했고, 그 후의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남자작가 H와 배우장 G와 부원 J를 비롯해서 대여섯 명이 모였다. 일학년들은 학교 편의점 앞의 공간에서 저들끼리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일학년들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 이상 볼 수 없을 법한 벽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울하게 타일을 불규칙적으로 밟는 소리만 들렸다. “대본도 아직 안 나왔다며.” 내가 운을 뗐다. “일단 장면 전환 아홉 번은 미친 짓이야. 절대 못 올려.” “너희가 계속 같이 봐 주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봐 줬지, 봐 줬는데…….” 약속하기라도 한 듯 우리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 뒤에 나올 이야기는 안 봐도 뻔했다. 우리는 그 전 주 일요일 아침에 모여 비상회의를 했던 적이 있었다. 일학년 기장 S와 다른 부원들 간의 불화에 대한 문제가 주 안건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 힘 빠진 논쟁이 오갔고, 연극부 특성상 이번 무대를 어떻게든 올린다고 하더라도 불화가 지속된다면 당장 다음 무대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그 애들이 자생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라면 오리엔테이션 무대를 올리지 못하고 동아리는 폐동되고야 말 것이다. 아찔한 감각이 목 뒤편부터 꼬리뼈까지 타고 내려갔다. “Y는 이제 우리가 손 댈 수 있는 거 없다고 했지.” “그렇다고 놓고 있을 거야?”

  • 윤별
  • 2017-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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