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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6-06-22
  • 조회수 427

생을 연명하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루에 한 번, 종종 두 번, 이따금씩 세 번, 그리고 아마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시간에는 수도 없이. 나는 내 목에 올가미가 걸려 있다는 생각을 이따금씩 한다. 언젠가는 그 올가미가 내 목을 옥죄어 내 목을 댕강 끊어내어 버릴 것이라는 생각은 실은 생각이 아니라 사실이다. 단언이다. 나는 그것을 내가 조절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쯤 조절할 수 있다. 당기고, 밀고, 당기고, 밀고. 당길 때는 하염없이 끌려왔다가 밀기 위해 온 힘을 쏟으면 꿈쩍도 하지 않는 바위마냥 들어서 있는 것이 얄팍한 목을 칭칭 감아낸다.

나는 단명할 것이다. 죽지 못해 사는 삶이 윤택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바람이었는데.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궤도를 달리고 있는 다리는 멈출 생각을 않는다. 뇌와 심장은 그만 달리라며 명령을 내리지만 이미 세뇌되어 버린 운동신경은 자신에게 하달된 신호를 차단한다. 아마 빌어먹을 이 새끼는 내가 죽어 버리고 싶다고 할 때 죽지 못하게 방해할 것이었고 죽지 않고 싶다고 빌 때 나를 죽음으로 인도할 개새끼일 테였다. 청개구리 같은 놈.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나는 내 나사 풀린 다리를 향해 항상 욕을 내뱉는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타인에게서 소리 없는 욕을 들었던 만큼.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내가 지쳐서야 나가떨어질 가망 없는 놀이.

수도 없이 겪어온 폭력과 폭언은 어디에서든 계속되었다. 환각과 환청은 나를 반쯤 미치게 만들었고, 마지막 도피처인 글마저 빼앗길 뻔 했을 때는 목구멍 아래쪽에서 치밀어 오르는 참을 수 없는 구역감이 붉게 물들었다. 만들어진 년. 나는 그저 다른 사람들의 마리오네뜨였지. 나의 소망대로 살아가는 주체적인 당찬 소녀로 포장된 마리오네뜨. 나는 내 몸 어딘가를 쓸어 보면 손가락에 툭 걸리는 실이 있을 것이라는 망상을 한다. 사람 몸에 무기물이 심겨 있을 리 없을 텐데도. 그것은 나를 어린 왕자의 장미처럼 뾰족한 가시를 두르게 했고 그것마저도 모자라 유리 박스 안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갔다. 비참한 것은 한없이 비참하다. 가시는 한없이 투명하다. 꽃은 볼품없이 시들고 말라붙었다. 가시만이 윤기를 머금은 채로 삐쭉하게 튀어나와 있다.

실로 지쳤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나를 향하던 무자비한 공격성은 타인을 향한다. 가련하기 짝이 없는 손길은 이곳저곳을 부유하다가 죽음을 택하고. 한순간의 오차는 모든 블록을 우르르 망가뜨리는 도미노의 트리거처럼 기폭제가 되어버리고야 만다. 쌓아 온 모든 것이 전부 허수아비처럼 무너져 버리는 날은 반복되고, 반복되어 끝내는 다시 쌓아 올리려는 집념과 희망마저 송두리째 빼앗아 버린다.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든 합리화하려고 했던 완벽주의자 계집아이는 이 땅에 없다. 폭력을 다른 이들이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일로, 폭언을 어리다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다며 단념하는 것으로 버텨내려고 했던 나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한순간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곪고 곪아 터지기 직전에 식도로 삼켜져 몸 안을 떠돌고 있다. 그것은 아직도 결정을 이루며 온몸에 박혀 살갗을 찢어내고 있다. 내가 모든 행동에 조심성을 부여한 것은 그 때문일 테였다. 나는 타인에게 이것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팠으니 너도 아파야 한다는 개념은 비뚤어진 마음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했다. 새빨간 핏물은 더 이상 안으로만 남지 않았다. 밖으로 새어나와 입고 있던 흰 속바지를 적시고야 멈추었다. 생각했던 말은 오해를 낳고, 오해를 낳고, 또 오해를 낳고. 그저 생각의 연장전상 속에서 나와 닮은 한 사람에게 다시 비수를 꽂아 넣고. 용서는 불가능하다. 타인이 나를 용서하는 것과 내가 나를 용서하는 것은 다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을 타인에게 저지르는 것은 내가 회개하고 말고를 떠나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한 사람 때문에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했던 것도 같다. 나라면 그러지 않을 거라고도 생각했던가. 나의 허벅지에는 다시 물감이 녹았다. 허벅지 안쪽에는 동맥과 정맥이 나란히 있다. 제법 중요한 신경도 허벅지 안쪽에 있다. 물론 뒷목에 가장 중요한 중추신경이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부분은 실패했을 경우 외관상으로도, 삶의 질적으로도 떨어진다. 택한 곳은 허벅지였다. 택할 수 있는 곳은 허벅지뿐이었다. 언제나, 망할 놈의 다리. 가장 만만하고 가장 말을 듣지 않는 이기적인 새끼. 팔목이나 목, 가슴과 같은 노출이 쉽게 되는 부위는 이례적인 더위가 찾아온 올 여름에 칭칭 감고 있기에는 너무 리스크가 컸다.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상처는 패여서 아문다. 갈라진 살이 제대로 붙지 않은 상태에서 붙으면 그렇게 된다고 했다. 이것은 의사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아니다. 제대로 된 사고방식을 취할 수 없는 다리가 어련히도 병원에 찾아갔을까. 이미 비틀린 신경망은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태로 침잠한다. 내가 이곳에 남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라는 질문은 누구에게든 녹아들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심장에 칼을 박아 넣을지 말지의 대답이 결정된다. 나는 주저 없이 전자를 택할 것이다. 비틀렸으므로. 작은 몸뚱이를 지키려는 최소한의 방어망조차 파괴되어 보강되지 않았으므로.

내게 인간관계는 갈라진 살점과도 같았다. 가만히 놓아두어도 깊게 베여 피가 뚝뚝뚝 떨어지는데 손을 대거나 한 번 더 날붙이가 오가면 걷잡을 수 없이 터져버리는. 나 또한 나 자신을 제어하지 못했다. 충동이 터져 나오는 방식은 여러 가지였는데, 그것들은 대체적으로 많이 아파서 나는 차라리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끊임없는 악순환 속에서 혼자 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편을 택하려고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서로 맞닿은 부분이 두꺼워지면 두꺼워질수록 분리될 때 죽음에 가까워지게 된다. 고개를 돌리는 편이 나에게도, 어쩌면 내가 만날 뻔했던 이들에게도 나았다. 그러면서도 쓸데없이 외로움을 잘 타는 다리는 누군가를 늘 갈구했고.

아마 내가 사람을 한 번 움켜쥐면 잘 놓지 않는 이유였겠지. 손에 쥐고 놓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 비참하기까지 했으나 삶의 마지막 순간을 놓지 않으려는 발악이었다, 그것은. 나는 내가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차라리 이해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속물이라면 모를까.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을 포용할 만큼 마음이 넓거나 행복한 년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차라리 곪아터진 고름덩어리라고 해. 더러운 년이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린다.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으므로. 가식적인 사랑이라도 좋으니까. 그저 의미 없는 문자의 나열로 이루어진 애정이라도 좋으니까. 그저 그것을 내게 들키지 않게만 만들어 줘. 그럼 아무 문제없어. 나는 허영으로 가득 찬 사랑을 진실로 받아들여 품을 테였고, 공허한 애정을 삼키고 차갑던 몸을 따뜻하게 데울 것입니다ㅡ 그러니, 그러니.

그러나 그것들이 전부 하나의 점으로 뛰어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명멸해 버리는 순간이 있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달콤한 선악과처럼. 나는 이브가 되어 선악과를 베어물고 에덴에서 쫓겨난다. 아담, 아담. 나의 뱀은 어디에 있지? 나의 발뒤꿈치를 깨물어 살점을 취할 뱀은 어디에 있지? 순간의 정적은 모든 것을 정지시킨다. 공기마저도 흐르지 못한다. 나는 시간의 정지 속에서 고개를 돌린다. 먼지조차 멈추어 있는 곳에서 나는 혀를 내밀어 무의미함을 맛본다. 파동에서 정적으로 변화하는 삶의 간극에서 오백 미터 깊이의 크레바스에 빠진 채로 가라앉아 간다.

나는 매일 밤 눈을 감는다. 더 이상 생의 연장을 원치 않는다. 투견 주제에 겁쟁이인 나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신께 기도한다. 나의 피를 당신의 능력으로 거두어 가 주세요. 나의 남은 생은 저기 북유럽 콘크리트 바닥에 허기져 쓰러져 있는 저 어린 난민들에게.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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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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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 2018-03-31
연극이 끝나기 전에*

연극이 끝나기 전에* 어쨌든 공연은 올려야 한다. 그게 이학년들끼리 비상회의를 소집해 나온 결과였다. 축제까지는 이제 고작 이 주밖에 남질 않았고, 원래대로라면 소품까지 전부 준비되어 들고 동선을 맞춰야 하는 시점이었다. 박스도 몇 번만 더 주우면 그만 주워야 할 정도로 꽉꽉 차 있어야 했다. 그러나 대본조차 나오지 않은 상황은 전년도 축제를 준비한 입장에서 보자면 축제에 공연을 올리고 싶기는 한 건지, 귀신의 집을 운영하려고 하는 건 맞는 건지 의문을 품기 충분했다. 저녁에 삼학년 선배들이 내려왔다. 동아리 시간에 삼학년 기장 선배가 내려와 한바탕 혼이 난 후였다. 수능까지 남은 기간도 동일하게 이 주일이었다. 이학년 기장 Y에게 문자를 받은 순간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머리에 직격했다. 삼학년뿐 아니라 이학년들도 거의 개입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이학년들이 매달려 도와주는 것도 모자라 삼학년 선배께서 직접 내려와 상황을 체크하고 최선의 방도를 함께 강구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선배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본래 회의를 소집하면 텅텅 비어 있곤 하던 큰 강의실은 어쩐 일인지 이학년과 일학년들로 꽉 차 있었다. 차가운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학년 기장 Y가 울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이년간 걱정 될 정도로 연극부를 위해 헌신한 건 Y였고, 맨 땅에 헤딩을 하려던 일학년들에게 완충작용을 한 것도 Y였고, 의욕 없는 일학년들을 어르고 달래 그나마 대본을 쓰게 시키고 지속적으로 찾아갔던 것도 Y였다. Y는 할 만큼 했고, 짊어질 만큼 짊어졌다. 우리는 둘로 갈라졌다. Y를 위로했고, 그 후의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남자작가 H와 배우장 G와 부원 J를 비롯해서 대여섯 명이 모였다. 일학년들은 학교 편의점 앞의 공간에서 저들끼리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일학년들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 이상 볼 수 없을 법한 벽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울하게 타일을 불규칙적으로 밟는 소리만 들렸다. “대본도 아직 안 나왔다며.” 내가 운을 뗐다. “일단 장면 전환 아홉 번은 미친 짓이야. 절대 못 올려.” “너희가 계속 같이 봐 주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봐 줬지, 봐 줬는데…….” 약속하기라도 한 듯 우리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 뒤에 나올 이야기는 안 봐도 뻔했다. 우리는 그 전 주 일요일 아침에 모여 비상회의를 했던 적이 있었다. 일학년 기장 S와 다른 부원들 간의 불화에 대한 문제가 주 안건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 힘 빠진 논쟁이 오갔고, 연극부 특성상 이번 무대를 어떻게든 올린다고 하더라도 불화가 지속된다면 당장 다음 무대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그 애들이 자생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라면 오리엔테이션 무대를 올리지 못하고 동아리는 폐동되고야 말 것이다. 아찔한 감각이 목 뒤편부터 꼬리뼈까지 타고 내려갔다. “Y는 이제 우리가 손 댈 수 있는 거 없다고 했지.” “그렇다고 놓고 있을 거야?”

  • 윤별
  • 2017-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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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게시판 잘못 올린 거 아니고 수필 맞습니다......

    • 2016-06-24 00: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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