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조연의 잘못된 심폐소생술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6-06-19
  • 조회수 644

나는 이름들을 기억한다.

세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를 한 자 한 자 되짚을 때마다 손목이 욱신거린다. 손 전체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손가락 끝까지 빳빳해져 내 자신이 내 몸을 통제할 수 없게 되어서야 나는 앞으로 픽 고꾸라진다. 망각이 인간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했던가. 신이시여, 당신께서 저 위에 계시다면, 왜 인간들에게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은 주시질 않았습니까. 거머리 같은 기억은 내 뇌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피를 빨린다. 그저 나는 책상 위에 엎어져 몇 분 동안 발작적으로 밟힌 애벌레처럼 꿈틀거릴 수밖에 없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눈을 감으면 기억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대개 꿈은 기억에서 추출된다. 무의식 아래 가라앉혀 둔 아주 아픈 기억까지도 끄집어내어 눈앞에서 흔들어대는데, 마치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장면만 잘라내어 영화화 시켜 놓은 것만 같다. 표정들이 클로즈업된다. 나는 1인칭으로 나를 둘러싼 아이들을 보고 있다. 곧 그들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비틀린다. 주춤거리면서 뒤로 물러난다. 꿈인데도 아픈 것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갈비뼈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여전하다. 꿈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이것이 끝났다는 것을 안다. 더 이상 이들은 내 앞에 없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다. 그러나 깰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 눈을 감지도 못한 채 뻑뻑한 눈에 눈물을 줄줄 흘려가며 모든 장면이 나아가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들의 멸시가, 비난이, 조롱이 느껴진다. 나는 이곳에 있고, 저들은 저곳에 있다.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지만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나의 영화가 끝나면 조연들이 바뀐다. 주인공은 여전하다. 주마등처럼 모든 것이 스쳐지나갈 때까지 나는 무기력하고 비참하게 바닥에 얼굴을 맞대고만 있다.

내가 신을 믿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선을 추종하고 악을 벌해야 할 신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반복되고 되풀이되는 일에 나는 넌덜머리가 나 주저앉았다. 처음에는 신께 울면서 기도를 드렸고, 그러다가 지쳐 잠드는 날이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닐 만큼 일상적으로 변모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던 기억은 무수히 많으나, 벗어나 평범하게 웃을 수 있었던 기억은 단 한 번도 없다. 그저 나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지쳐 쓰러지며 나는 결론지었다. 신은 없다. 적어도 신은 선하지 않다. 실수라고 치부하기에는, 그것이 한 번이 아니었으니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많은 이들은 잊으라고 했다. 날더러 그저 잊고 새 삶을 살아가라고 했다. 그 애들은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스쳐가는 인연이었을 뿐이었다고 했다. 그것이 네게도 훨씬 더 이득이라고 했다. 과거 속에 갇혀 있으면 발전할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은 곧 왜곡되고 변형되어 나의 뇌로 도달했고 나를 나락으로 추락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지. 아마 스위치를 누른 것은 나일 것이다.

증오의 대상은 나를 장난이라며 죽도록 미워했던 그 아이들로부터 내 자신에게 옮겨갔다. 내 몸 하나조차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나에 대한 혐오와 멸시. 증오. 무력감. 말의 위력은 총탄보다도 더했다. 한 번 싹을 틔우면 그것은 이끼와도 같이 상상을 초월한 속도로 번식한다. 그것은 마치 역병과도 같았다. 다만 달랐던 점은 시름시름 앓고 나면 항체가 생겨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것과는 달리, 내가 앓고 있는 병은 시시때때로 생각나 나의 목을 졸라 죽여 버리려고 들었다. 흉포한 괴물은 차라리 낫다. 이것은 마치 백사白蛇처럼 내 척추를 타고 스며들어 림프와 신경을 타고 퍼져나가 온몸을 잠식한다. 그러는 동안 나는 무기력을 경험한다. 중독되는 동안 나는 비명을 지르는 아주 단순한 방어조차 할 수가 없다.

나는 생각했다. 내 이름을 잊고 싶다, 고. 나의 본질을 전부 지워버리고 싶다, 고. 그만 하고 싶다, 고. 이제 지쳐 버린 것 같다, 고. 이제는 미련이 없다, 고. 세상에 태어날 수 없는 더러운 존재였다, 고.

공격성은 독으로부터 기인했다.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뭇잎을 갉아먹는 벌레처럼 나의 뇌를 파먹기 시작했다. 머리가 끔찍하게 아파오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 나는 나를 해했다.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어떻게든 끝내려고 발악하는 일상이었다… 나는 내일을 위해 살았던 것이 아니라, 오늘을 버텨냄으로서 내일을 맞이했다. 눈을 뜨자마자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깨물면 그제야 나는 또 이 빌어먹을 현실에 도달했구나, 하고 손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난도질하고, 조르고, 붉게 물들고… 망설이던 주저흔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질 않았다. 손목에서 피어나던 피안화는 점점 다른 곳으로 전이되어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육체였다. 아프다고 느꼈던 통점은 사라졌는지 무감각해졌고, 자아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져 원초아에 가까워져만 가고, 아직 모든 것이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나는 내 스스로 만들어낸 서투른 방어기제 속에 갇혀 버리고야 말았다.

믿는 것은 죄악이요, 네가 파멸하는 지름길이다. 마음속에 새기고 사는 말은 헌신보다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이해타산적이었다. 내보이는 것은 끝없는 선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끝없는 악이 깔려 있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이라. 어둠은 삼키고 빛은 뱉어내는 것이 내가 가장 자신 있는 행위였다. 처음에는 어떻게 하면 상처를 덜 받을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연구가 실패한 후에는 토해내기 직전까지 모든 것을 욱여넣고 묵묵히 고행을 계속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모조리 선으로 포장하여 내어놓는 것을 사람들은 진정한 선이라고 불렀다. 배려라고 불렀다. 그 따위 알량한 연습으로 인간의 본성을 전부 억압해 버리는 것이 배려라면 나는 차라리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만 그러지 못했지.

원천은 성격이었다. 폭력과 폭언과 린치가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낸 성격은 어느새 다른 일의 원천이 되어 있었고 나는 그것을 내가 온당히 받아야 할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버겁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것을 내어준다. 그러나 늘 가식이 입가에는 걸려 있다. 너무 오래 정착해 있어 이제는 가면인지 아닌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네가 나를 떠나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말은 속에서만 되뇌어진다. 기도에서 턱 막혀 버리는 공기에 나는 겨우 숨만 내뱉을 뿐이다. 그저 나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끊임없이 속으로 기도할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나머지, 나는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나머지 더더욱 나를 감춘다. 내가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 또한 여기에서 발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이 빌어먹을 뇌는 온통 편도체에서 나오는 본성에 휩싸여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처럼 느끼게끔 만든다. 처음에는 그저 내가 눈치가 빠른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멀어져 갔다. 지금, 조금이나마 자란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저 나의 헛된 망상일 뿐이라는 것을. 그러나 받아들일 수가 없다.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더럭 드는 생각은 전두엽으로 전달되기도 전에 멈칫하여 소산해 버리고. 인간을 존재케 하는 이성적 사고는 내게 존재하지 않는 마냥 그저 감정에 사로잡혀서 두려움에 떠는 어린아이마냥 그 자리에 주저앉기 일쑤다.

나는 완벽한 아이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면 적어도 다른 이들이 나를 깔보고 무시하지는 않을 테니까. 비단 미시적인 부분에서뿐만 아니라 거시적인 관점에서도 완벽해야 했다. 완벽하게 밸런스가 맞아야만 했다. 모든 조직도가 치밀하게 짜여졌다. 나는 하나의 캐릭터를 완성해냈다. 내가 상상하는 이상 속의 인물을. 이 여자아이는 유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웃음을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도 항상 모든 방면에서 뛰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이였다. 하나라도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나는 그 인물이 상황에 따라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했다. 어떻게 말할지를 분석했다. 그리고 내가 그 인물이 되어 갔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껍데기를 쓰고 살아가는 셈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걸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완벽하도록. 그렇게 나는 몇 년을 버텼다. 지금도 버텨 나가고 있다.

그 아이들은, 내가 여전히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이따금씩 궁금해질 때가 있다. 나는 누구일까. 나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왔을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만든 것인지, 아니면 그저 이 자체가 나인지. 나와 타인을 잘 분리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어디로부터 도래했고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타인 또한 어디로부터 도래했고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을지도 상관없다. 그저 나를 안아줄 수 있으면 된다. 욕심 많은 내가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이기심에 더, 더, 더 많은 것을 원한다고 해도 그저 묵묵히 안아 줄 수 있으면 된다. 그러면 나는 산다.

그러면 나는 산다.

윤별

추천 콘텐츠

B minor

B minor         1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첫 문장으로 이별을 했어¹. 이렇게나 지루하고 무료해도 괜찮은 걸까. 오래 잡았던 걸 이렇게 놓아 버려도 괜찮은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어. 이불에 힘없이 엎어져 있다가 흐물거리는 몸을 애써 일으켰어. 지루해도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건 아니었는데 해야 할 일이 생겼거든. 책장 앞에 다가섰어. 빈틈없이 꽂혀 있는 책장이 반듯했어. 원래 네 명이 한 방을 쓰는데, 우리 방에는 학기 초부터 세 명이 배정되었고, 룸메이트 중 한 명이 학기 중에 퇴사를 해서 네 명 분량의 책장을 두 명이서 쓰고 있는 꼴이었거든. 학교에도 책상 옆 바구니며 사물함에 책들이 빼곡했지만, 이건 정말 어디서부터 어떻게 치워야 할지 모르겠더라. 대부분의 책들은 버려야 했어. 아무리 일 년을 더 하겠다고 했어도 이미 다 풀린 책으로 공부를 할 수는 없었거든. 연습장에 풀었던 책들은 죄다 다시 풀지 않아도 될 책이었고, 다시 풀어봐야 할 기출은 이미 몇 번이나 풀어 너덜너덜한 상태였어. 아래층에 쌓아 둔 기출문제집부터 정리를 시작했어. 책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넘겨보는데 꾹꾹 눌러 쓴 글씨들이 눈에 띄더라. PT 일정 → 부피비 = 몰수비, 분자량비 = 밀도비. PVT 일정 → 몰수비 = 분자량비 = 밀도비. 한참이나 책을 넘겨봤어. 다 기억이 나는 거야. 이 날 어떤 펜이 고장나 다른 펜으로 필기했었는지, 이해가 안 돼서 강의를 몇 번이나 돌려 봤었는지까지 전부. 그렇지만 연민에 빠져 있기에는 시간이 없어서 머리를 비웠어. 버릴 책들을 쌓으니 기숙사 방 한쪽을 가득 차지할 것 같아서 반쯤은 기숙사 계단참에 가져다 두었어. 남은 책들 중 반쯤은 다시 볼 거라서 맨 윗칸에 옮겼고, 나머지 반에는 기숙사 호실과 이름을 적은 포스트잇을 두 개 붙인 후에 책장 맨 아랫칸에 꽂았어. 삼 년 내내 꽉 차 있던 책장이 두 칸을 제외하고 비워지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침대에 다시 누워도 책장 쪽으로 눈길이 가더라. 정말로 이렇게 쉽게 털어내도 괜찮은 걸까. 다시 무료해지기 시작했어.     2 레이스를 마치고 다시 학교에 돌아온 날, 모두가 각자 억눌러 왔던 일들을 실행에 옮기고 있더라. 누군가는 미디를 배우러 버스로 이십 분 거리를 착실하게 오갔고, 누군가는 그간 앉아만 있어 망가진 체력을 다시 기르겠다며 헬스장에 등록했어. 누군가는 버킷리스트를 수험기간 내내 적어두고 하나씩 취소선을 긋기도 했고. 너는 뭘 하고 싶냐는 물음에 의외로 별 생각 없이 대답이 나왔어. 잘 모르겠어. 잘 모르겠어. 돌이켜 보면 빼곡하게 새겨 두었던 습관이었지. 무엇도 확실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확신해서는 안 되었던 나날들. 날아오는 질문들은 하나같이 대답하기 곤란한 것들이었으니까. 성적과 대학, 소문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 그런 질문들을 들을 때면 꼭 첫 전국대회를 앞둔 피겨스케이트 선수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어. 이번 점프는 잘 뛸 수 있겠지? 어, 음…… 어쩌면요, 못 뛸 수도 있고요. 잘 모

  • 윤별
  • 2018-12-27
사이코

사이코     백일장에 요즘 사이코 있대. 사이코? 어. 이과인데다가 문창과도 안 갈 거 같은 앤데, 자꾸 나가서 상 뺏어 온다더라. 미치겠어. 문학특기자 점수로 다 들어가는 건데 솔직히 양보해야 하는 거 아니야? 누구는 절박해 죽겠는데 참.     Y는 토요일마다 어딘가로 떠났다. 어느 주말에는 기숙사에서 통 보이지 않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가지런히 개어 두어야 마땅할 이불은 늘 구겨져 있었고, 낡은 문제집이나 연습장 따위가 침대 위에 어지럽게 놓여 있기도 했다. Y는 숨을 몰아쉬었다. 계단과 내리막길을 위태롭게 뛰어내려온 Y는 기다리고 있는 택시의 문을 익숙하게 열었다. 안녕하세요. Y는 늘 택시에 오를 때마다 조급하게 구는 습관이 있다. 기사님, 최대한 빨리 가 주세요. 고속버스터미널이요. 평소였다면 삼십 분 하고도 조금 더 기다려야겠지만 한산한 새벽에는 십오 분도 걸리지 않는다. Y는 익숙하게 택시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바깥을 응시했다. 매주 보는 길의 순서를 외우지는 못했지만, 교차로는 차례로 읊을 수 있다. 사거리, 로데오, 다시 사거리, 그리고 삼거리. 제대로 빗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부스스한 반곱슬 머리카락은 곧 다른 창문으로 옮아갔다.   고속버스 좌석에 간신히 앉은 Y는 남청색 백팩을 뒤적였다. 그럴 때마다 Y는 톱톱하고 붕 뜬, 자신이 썼던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된다. 눈썹이 묘하게 치켜올라간 Y의 손에 보라색 시집이 딸려 나왔다. 나오기 직전 서둘러 고르는 시집의 표지는 명도가 높고 채도가 낮은 색상이 대부분이었다. Y는 자신이 무채색이기 때문에 너무 쨍한 색깔은 자신을 부술 테고, 그렇대서 색깔이 없다면 우울이 얼룩처럼 짙어질 거라는 독백을 징크스처럼 상기했다. Y는 책의 앞부분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몇 장을 넘겼다. 핏기 없는 입술이 우물우물 움직였다. 버스가 출발한 후로 Y가 책을 다시 펼치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것이 마치 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른손으로 쥐다가, 왼손으로 옮기다가, 이따금 품에 껴안기도 하면서 잠을 청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Y의 입속에서는 금세 까 넣은 초콜릿 하나가 달콤하게 녹아갔다.     원고지를 받아들었다. Y는 강당의 불편한 의자에 앉은 채 학교와 이름을 차례로 원고지 오른쪽에 기재했다. 아무리 고속버스에서 잤다고 해도 잠의 질이 아주 뛰어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짐을 챙기고 지하철을 갈아타면서 시간을 매번 확인했기 때문에 Y는 눈을 연신 비빌 수밖에 없었다. 눈을 꾹 눌렀다가 떴다. Y의 시야가 서서히 트이자 세미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럼 시제를 발표하겠습니다. 시 부문 시제는……. Y는 화면에 크게 띄워진 시제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쁜 발자국 소리들이 강당을 꽉 메웠다. Y는 그제야 원고지와 펜을 꽉 쥔 채 강당에서 벗어나는 무리에 합류했다. 대부분의 백일장에서 그러했듯 서정을 종용하는 시제였다. Y는 손톱이 손바닥에

  • 윤별
  • 2018-03-31
연극이 끝나기 전에*

연극이 끝나기 전에* 어쨌든 공연은 올려야 한다. 그게 이학년들끼리 비상회의를 소집해 나온 결과였다. 축제까지는 이제 고작 이 주밖에 남질 않았고, 원래대로라면 소품까지 전부 준비되어 들고 동선을 맞춰야 하는 시점이었다. 박스도 몇 번만 더 주우면 그만 주워야 할 정도로 꽉꽉 차 있어야 했다. 그러나 대본조차 나오지 않은 상황은 전년도 축제를 준비한 입장에서 보자면 축제에 공연을 올리고 싶기는 한 건지, 귀신의 집을 운영하려고 하는 건 맞는 건지 의문을 품기 충분했다. 저녁에 삼학년 선배들이 내려왔다. 동아리 시간에 삼학년 기장 선배가 내려와 한바탕 혼이 난 후였다. 수능까지 남은 기간도 동일하게 이 주일이었다. 이학년 기장 Y에게 문자를 받은 순간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머리에 직격했다. 삼학년뿐 아니라 이학년들도 거의 개입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이학년들이 매달려 도와주는 것도 모자라 삼학년 선배께서 직접 내려와 상황을 체크하고 최선의 방도를 함께 강구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선배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본래 회의를 소집하면 텅텅 비어 있곤 하던 큰 강의실은 어쩐 일인지 이학년과 일학년들로 꽉 차 있었다. 차가운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학년 기장 Y가 울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이년간 걱정 될 정도로 연극부를 위해 헌신한 건 Y였고, 맨 땅에 헤딩을 하려던 일학년들에게 완충작용을 한 것도 Y였고, 의욕 없는 일학년들을 어르고 달래 그나마 대본을 쓰게 시키고 지속적으로 찾아갔던 것도 Y였다. Y는 할 만큼 했고, 짊어질 만큼 짊어졌다. 우리는 둘로 갈라졌다. Y를 위로했고, 그 후의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남자작가 H와 배우장 G와 부원 J를 비롯해서 대여섯 명이 모였다. 일학년들은 학교 편의점 앞의 공간에서 저들끼리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일학년들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 이상 볼 수 없을 법한 벽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울하게 타일을 불규칙적으로 밟는 소리만 들렸다. “대본도 아직 안 나왔다며.” 내가 운을 뗐다. “일단 장면 전환 아홉 번은 미친 짓이야. 절대 못 올려.” “너희가 계속 같이 봐 주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봐 줬지, 봐 줬는데…….” 약속하기라도 한 듯 우리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 뒤에 나올 이야기는 안 봐도 뻔했다. 우리는 그 전 주 일요일 아침에 모여 비상회의를 했던 적이 있었다. 일학년 기장 S와 다른 부원들 간의 불화에 대한 문제가 주 안건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 힘 빠진 논쟁이 오갔고, 연극부 특성상 이번 무대를 어떻게든 올린다고 하더라도 불화가 지속된다면 당장 다음 무대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그 애들이 자생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라면 오리엔테이션 무대를 올리지 못하고 동아리는 폐동되고야 말 것이다. 아찔한 감각이 목 뒤편부터 꼬리뼈까지 타고 내려갔다. “Y는 이제 우리가 손 댈 수 있는 거 없다고 했지.” “그렇다고 놓고 있을 거야?”

  • 윤별
  • 2017-11-30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참치군

    신은 언제나 인간이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을 준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게 과연 옳은 말일까요. 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이 신을 사랑한다면 지금쯤 인간은 아무런 걱정근심없이 유토피아같은 곳에서 살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혹자는 신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렇다지만 너무나도 고통스러울 삶이라면 전 차라리 자유의지가 없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해본 적도 있습니다. 들님의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글 정말 즐겁게 읽었어요.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남들이 나를 깔보고 무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꾸며낸다는 부분, 많이 공감갔습니다. 좋은 글 언제나 재밌게 읽고 있어요. ♥

    • 2016-07-27 11:01:59
    참치군
    0 /1500
    • 0 /1500
  • 가역

    강렬한 생명력이네요 그런 두려움이 강렬했을 때만큼 치열하게 살았던 때가 언제 있나 싶어요. 어쨌든 불안은 진화를 거쳐서 선택된 아주 기능적인 생존방법이니까요

    • 2016-06-19 01:53:31
    가역
    0 /1500
    • 항상 좋은 평 감사드립니다. :)

      • 2016-06-20 13:11:07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