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에세이

  • 작성자 파란색스머프
  • 작성일 2014-12-22
  • 조회수 331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작년의 일이었다. 문득 더는 미루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써야 할 글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래도, 라는 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할아버지의 죽음이 내 잘못이 아니고 나는 살인자가 아니라고, 죄책감 따위 느낄 필요 없다는 걸 논리적으로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나는 할아버지에 대해 잘 모른다. 아빠나 엄마에게 주워들은 이야기 몇이 내가 아는 할아버지의 전부다. 어렸을 적에 집이 부자였다던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 집이 망해 외할아버지를 따라 먼 곳으로 이사를 했다고 했다. 그 후 월남전에 참전해 고엽제 후유증으로 청각장애 2급 판정을 받아 항상 보청기를 끼고 다녔다. 이불에 구멍을 낼 정도로 담배를 자주 피웠다. 불같고 심하게 가부장적인 성격이었다. 불교였다가 중간에 천주교로 개종해 친가 전체를 천주교인으로 바꾸기도 했다. 노년에는 카트에 비둘기 모이를 담고 길가에 뿌리는 습관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매일 카트를 끌고 공원으로 나갔다. 오 년 전 무단횡단을 하다가 차에 치인 후 계속 투병생활을 하다 작년 9월 꽃동네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셨다. 생전에 나를 정말 예뻐하셨다고, 엄마는 말했다.

기억나는 것도 몇 없다. 내가 유치원 때 할아버지가 아현동 문방구에서 레고를 사줬던 것,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바람에 친척들이 다 모인 곳에서 아빠의 인사를 듣지 못해 왜 집에 왔는데 인사를 하지 않느냐며 불같이 화를 낸 것, 내가 할아버지 방에 누워 작은 TV로 애니메이션 채널을 보고 있는데 문을 살짝 열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간 것. 그 외의 기억은 모두 병원에 있는 모습이다.

돈이 할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성모병원에 입원해 계셨던 할아버지는 여러 번 병원을 바꾸더니 꽃동네에 들어가셨다. 친가는 육 남매였고 그중 세 분이 성직자였다. 나는 부랑자나 보호자 없는 사람이 오는 곳이 꽃동네였다, 라고 습작에 썼다.

병원비에 간병인 월급까지 합하면 매달 나가는 돈이 너무 컸다. 그래서 점점 시설이 좋지 않은 곳으로 할아버지를 옮겼다. 몇 년이 지나자 휠체어를 타고 옥상정원을 돌아다니실 수 있었던 할아버지는 팔다리가 완전히 굳어버릴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다. 굽어 펴지지 않는 할아버지의 무릎을 주무르며 사람의 몸이 이렇게 변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한 달에 한 번 꽃동네에 찾아가면 나와 엄마가 할아버지의 몸을 주무르고 있을 동안 아빠는 1층 로비에 내려가 있거나 동생과 장난을 쳤다.

그때는 아빠가 많이 미웠다. 친가 친척들도 미웠다. 할머니 집에서 육 남매가 모두 모였던 날이었다. 어쩌다 할아버지 얘기가 나왔다. 큰아버지인 신부님은 자신이 신부가 된 이유에는 할아버지에게 벗어나려고 했던 것도 있다고 했고, 고모는 할아버지 때문에 고생을 참 많이 했다고 했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그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할아버지 때문에 아빠가 내 나이 때부터 가게 일을 돕고 건물 청소도 하는 등 고생을 했던 것은 알고 있었다.

투병하며 오래 사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찍 돌아가시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아빠가 말했다.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내 기억 속에서 왜곡되었을 수도 있지만 저런 뉘앙스의 말이었던 것은 확실했다. 언젠가 아빠에게 물었다. 왜 저런 말을 했냐고. 기억하고 있냐고. 나는 아빠가 저 말을 했을 때, 너무 무서웠다고.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고. 아빠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했다. 그런데 딱 잡아 말한 것이 아니라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한 뒤 약간 핀트를 달리 나가는 식으로 찜찜하게 해명을 해서,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빠가 정말로 그렇게 말 한 적이 없는지.

투병하며 오래 사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찍 돌아가시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 말이 맞는지 틀렸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찍 죽고 싶다는 것 하난 확실하다. 60이 되기 전에 죽을 거다. 목에 구멍이 뚫려 말도 하지 못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침대에만 누워 보내는 하루를 상상할 수 없다. 할아버지는 지금 흑석동 성당 평화의 쉼터에 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날들을 병원에서 보냈고 성당에서도 보낼 것이었다. 가끔 평화는 무슨 엿 같은 소리, 하고 생각한다.

할아버지는 이 년 정도 꽃동네에 계셨다. 말만 꽃동네지 실상은 그 많은 후원금을 어디다가 썼나 싶을 정도로 관리가 정말 거지 같았다. 커다란 방 안에 환자 열 명이 넘게 들어가 있는데 막상 그곳에 배당되는 간호사는 채 세 명도 되지 않았다. 간호사들은 환자 가족이 와야 슬그머니 모습을 비쳤고 침대나 화장실 같은 시설도 열악했다. 이런 거 따질 처지가 아니란 거 안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꽃동네에 가지만 않았으면, 돈을 더 투자해서 재활 치료만 받았으면 몸이 그렇게 굳는 일도 폐렴으로 허망하게 돌아가시는 일도 없었을 거다.

할아버지 문제에 대해서는 남 잘못을 따지다가 결국 내 탓을 하게 된다. 그때 학원이니 영어 과외니 해서 내 교육비로만 한 달에 백 만원이 나갔다. 이런 생각을 하면 밑도 끝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그런다. 엄마에게 이 얘기를 한 적 있었다. 내가 할아버지를 죽인 것만 같다고.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충분히 사실 수 있지 않았냐는 내 말에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엄마는 말했다. 열아홉 살 먹은 지금, 조금은 알겠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나는 엄마의 말을 전부 이해하기에는 아직 많이 어리다.

정말 오랜만에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고 휠체어를 타고 계신 할아버지 사진을 정리하며 아빠는 말했다. 삼촌도 똑같은 말을 했다. 아빠와 할아버지는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부모 자식 사이의 진지한 대화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고 했다. 고압적이고 가부장적인 모습. 아빠한테도 할아버지의 모습이 남아있다. 나는 그게 싫어 집을 나간 적도 있었고 아예 아빠를 없는 사람 취급한 적도 있었다. 아빠도 그랬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은 목요일이었다. 사망통지서에 적힌 시간을 보니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무렵이었다.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동생이 문자 못 봤냐고 물었다. 그제야 핸드폰을 켰다. 고모는 내 옷을 보더니 따로 갈아입을 필요 없겠다고 했다. 나는 검은 색 옷을 입고 있었다.

아빠의 눈이 빨겠다. 그런데 목소리만큼은 참 담담해서, 살짝 떨리지만 않았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방에 들어가 한참을 펑펑 울고 나니 고모가 밥을 먹고 가자고 했다. 퉁퉁 부은 얼굴로 밥을 먹었다. 처음엔 이걸 어떻게 먹지 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아현동 성당 별관이 장례식장이었다. 주일에는 발인을 할 수 없고 별관에서 결혼식이 잡혀있는 바람에 이 일장을 치러야했다. 난생처음으로 상복을 입었다. 상복이면 뭔가 특별할 줄 알았다. 이를테면 그냥 한복보다 입는 법이 더 복잡하다던가. 오히려 몇 초 만에 입을 정도로 간단했다. 머리에 꽂는 하얀 핀도 그렇고 음식들도 그렇고 너무나 일상적인 것들뿐이어서, 이게 뭐야, 싶은 맘도 있었다. 학교에서 야자를 하던 도중 주머니에서 장례식장에서 꽂았던 리본 핀이 튀어나온 적도 있었다.

별관은 2층까지 있었다. 장례식장은 1층이었고 나는 상복을 입은 채로 아무 생각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여니 온통 하얀색 투성이었다. 다음날 있을 결혼식을 위해 직원들이 가구를 옮기고 있었다. 황급히 문을 닫고 장례식장으로 뛰어갔다. 서러웠다.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새벽 세 시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다. 할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했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은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왔고 음식을 가져다주고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만히 있는 것 보다는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음식을 나르고 손에 생선 찌꺼기를 묻혀가며 그릇을 정리하다 보면 잡생각이 싹 날아갔다. 그날 효녀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겉으론 멋쩍은 듯 웃었지만 모두가 나를 욕하는 것만 같았다.

조문객이 오면 신부님(큰아버지)이 간단한 미사를 드렸다. 남의 장례식에서 미사를 드린 적은 있어도 아버지의 장례미사를 드릴 줄은 몰랐다고 신부님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새벽 두 시였나. 상에 남아있는 음식을 치우다 할아버지 영정 앞에 앉아있는 삼촌(신학생)을 봤다. 구부정한 어깨로 삼촌은 오래도록 할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불 꺼진 방에 촛불 혼자 타들어 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세상에는 내가 어림할 수도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한때는 사이비라고 느낄 정도로 혐오했던 천주교를 존중하게 된 것도 그때였다.

조용한 장례식이었다. 소리 내서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삼촌과 신부님, 수녀님(큰 고모)는 울지도 않았다. 우는 대신 다들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했다. 그것이 너무 무서웠다. 올해 외할머니 장례식장에서 곡소리를 내는 것을 듣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긴 했지만, 그래도 그땐 차라리 소리 내서 울었으면 했다.

태어나서 아빠가 우는 걸 딱 두 번 봤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 꽃동네 입원 일로 신부님이 곤경에 처했을 때. 우울증에 걸려서 한창 고생했을 때도 울지 않았던 아빠였다. 나는 울고 있는 아빠의 옆으로 다가가 팔짱을 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런 것뿐이었다.

장례 미사 때 참 많은 사람이 왔다. 염수정 추기경님(장례식에 왔던 작년에는 서울 대주교님이셨다)부터 해서 신학교 학생들, 수녀님들. 그렇게 많은 성직자는 처음 봤다. 연단 앞에서 신부님은 오 년이라는 시간 동안 할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다고 했다. 처음 보는 신부님은 할아버지를 육 남매 중 세 명을 성직자로 키워낸 훌륭한 분이라고 했다. 뭐라 더 말하기는 했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발 자기가 뭘 알길래 저딴 말을 해. 나도 잘 아는 것은 없었으면서, 저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

화장을 기다리는 작은 방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위령 기도를 드렸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제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 쉬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떨림도 없이 이 말이 반복됐다. 중간에 방을 나왔다. 나는 아직도 파수꾼이- 이 말만 들어도 힘이 풀리고 토할 것 같다.

누군가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데 오 년은 충분한 시간이었나. 아니면 할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어서 그랬나. 친가는 생각보다 빨리 담담해졌고 할아버지 얘기도 곧잘 했다. 담배 냄새가 가득하던 할아버지 방이 창고가 된 것은 몇 년 전이었다. 그 방에는 곰팡이가 자주 슬었다. 공기 청정기를 가져다 놔도 곰팡이는 계속 자라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상이지만 알고 보면 반지하인 집안 구조 때문에 무슨 짓을 하든 계속 곰팡이가 생긴다고 아빠는 말했다.

아파하는 건 괜찮은데 다른 사람에게, 특히 가족에게 피해 주지 마라.

이런 말을 하는 남자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 아빠는 엄마에게도 할아버지에 관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게는 할아버지 얘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아현동에 갈 때마다 아빠에게 산책을 하자고 졸랐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아빠는 옛날 얘기를 들려줬다. 여기서 할아버지가 장사를 했다- 할아버지를 따라 건물 청소를 한 적도 있다- 어렸을 적에는 맨날 쌈박질만 하고 돌아다녔다- 나는 가만가만 얘기를 들으며 응 응, 맞장구를 쳤다. 할아버지 얘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기보다는 말을 할 때 묘하게 들뜬 아빠의 얼굴을 계속 지켜줘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었다. 아빠는 할아버지와 하지 못한 말을 나에게 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작년의 일이었다. 문득 더는 미루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써야 할 글이었지만 쓰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 담담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파란색스머프
파란색스머프

추천 콘텐츠

불 꺼진 방안에서 바닥을 더듬거리는 습관이 있다. 눈앞에 손을 가져다 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 분명 이 자리에 책상이 있었는데, 하며 손을 뻗어도 닿지 않으면 방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디가 문이고 창문인지 알 수 없는 한없이 낯선 공간. 그 아득한 느낌이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몰래 울고는 했다. 그러면서도 마냥 무섭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거의 매일 깜깜한 밤중에 손을 휘저었다. 무언가 닿으면 안심이 되면서도 문득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방. 가구 배치며 자잘한 소품 정리까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공간. 소유격 조사 ‘~의’가 붙는 것이 참 좋았다. 그래서 나는 아 이건 내가 봐도 인간적으로 좀 아니다 싶을 정도로 방을 더럽게 썼다. 공부고 뭐고 다른 건 안 바라니 제발 방만 치우라는 부모님의 말보다 내 방만큼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내 방에 대해서는 부모님이든 누구든 제발 신경 쓰지 않았으면 했다. 괜한 화풀이라는 거 알고 있다. 사람들과 관계 맺으면 항상 이리저리 끌려 다니니까 내 방에서만큼은 맘 놓고 쉬고 내 멋대로 하고 싶었다. 밖에 나가 애들하고 노는 것보다 방 안에서 혼자 컴퓨터를 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다른 충고는 다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지만 방 치우라는 말만큼은 죽어도 안 들었다. 인간 된 도리상 어느 정도 치우긴 해야겠지만 앞으로도 될 수 있는 한 그러고 싶다. 아빠가 있을 때는 항상 방문을 닫아 놓는다. 어질러진 방을 보이면 혼나서이기도 하지만 닫고 있는 게 더 편하다. 동생도 아빠가 오면 방문을 닫는다. 아빠도 그렇다. 나와 동생과 대화하기 싫을 때 아빠는 방문을 닫고 문을 잠근다. 거칠게 문고리를 돌리면 찰칵,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방문을 두어 번 두드리다가 내 방으로 돌아간다. 잠긴 문은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열려 있다. 나는 가끔 좀 열어보라고 문을 세게 두드리며 울다가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가고는 했다. 나무 문짝은 생각보다 튼튼했고 부모님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거나 TV 혼자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마음 안에도 방이 있다면 나는 그 문을 자주 잠갔다. 남들이 복도까지만 들어왔으면 했고 더 들어오려고 하면 아예 철벽을 쳤다. 정도 것 친한 사이. 이런 관계가 제일 좋고 편했다. 겁쟁이처럼 거절하면 남들이 나를 싫어할까 봐 싫다는 말도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닌 기억이 많아서 그럴 바엔 그냥 정도 것 지내자, 이런 마음이었다. 이를테면 내가 널 위해 선물 주고 울고 위로해주고 칭찬해주고 이런 것들 다 진심인데 그렇다고 우리가 친한 사이는 아냐, 이런 것들. 친구와 함께 춘천에 있는 절로 친구의 아버지 제사를 지내러 갔을 때도, 십년지기 동네 친구들과 모여 곱창을 먹으며 낄낄댈 때도 그랬다. 친구의 정의를 내려 보라는 상담 선생님의 말에, 나는 십 분 정도 고민하다 경계를 넘어오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 남이 나한테 기대는 것은 당연했지만 내가 남한테 기대

  • 파란색스머프
  • 2014-12-22
커밍아웃

  가면과 가식이 같은 것이라고 착각했던 작년 겨울에, 5년 지기 친구한테 나는 가족 외의 널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가식적으로 대했다고 전화로 말한 적이 있다. 싸운 뒤 서로 무시하며 지내다 삼 개월 만에 하는 통화였기에 나와 친구는 그동안 섭섭했던 것을 털어놓으며 그간의 오해를 풀고 있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말하겠나 싶기도 했고, 언젠가는 걔도 알아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한 말이었는데 친구가 울면서 배신감을 느낀다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 년에 한두 번 울까 말까 한 애였다. 난 너 진심으로 대했어. 진짜 실망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원망 섞인 목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날아왔다.   내겐 일종의 커밍아웃 같은 말이었기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제 누구한테도 이 얘기를 할 수 없겠구나. 평생 입 다물고 살아가야지’와 ‘그동안 잘 속이며 살아왔구나’ 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울면서 이 말만 되풀이했고, 친구도 울면서 그게 아님 뭐냐고 말을 해보라고 쏘아붙였다. 제대로 변명도 못 한 채 핸드폰을 붙잡고 지하철 승강장을 빙빙 돌며 울고 있는데 친구가 뭐라 하더니 전화를 끊었던 것 같다.   너희 아빠 기일에 같이 절 가서 제사 지낼 때 운 건 정말 진심이었어. 가면을 썼던 건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 그때 입안을 맴돌던 말이 참 많았는데 결국 아무것도 꺼내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그동안 내가 웃은 게 진짜 웃겨서 웃은 건지 그냥 웃은 건지, 운 게 정말 슬퍼서 그랬던 건지, 그동안의 내 모든 감정을 의심하고 있었다. 한 번 의심하니 걷잡을 수 없었다. 내 모든 감정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란 애는 뭘까. 좋아하는 건 뭐고 싫어하는 건 뭐고 어떨 때 웃고 슬퍼하고 화내는지, 그동안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이 죄다 깨져버린 느낌이었다.   웬만하면 나쁜 일이 있어도 최대한 신경 끄고 밝게 지내려고 하는데 이때는 그게 잘 안됐다. 그 주에만 결석과 조퇴를 두 번씩 했고 가족하고 일주일간 말을 안했다. 사람하고 만나서 얘기하는 게 너무 부담스럽고 어려워졌고, 거의 대화를 안했던 만큼 빠져나가지 못한 말들이 머리에서 산만하게 돌아다녔다. 예전엔 병신 같고 바보 같은 나도 좋았는데 뭘 하든 내가 참 밉고 싫었고 그 친구가 ‘너 정말 말 안할 거야?’라고 묻고 나는 입을 다물고만 있는 꿈을 꿨을 정도였으니, 엄마랑 얘기하면서 마음이 풀리기까지 일주일간 정말 생고생을 하며 지냈다.   가끔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타긴 하지만 지금은 나름 잘 지내고 있다. 어쩌다 다른 친구한테 이 얘기를 했는데 친구가 자기도 가면을 쓰고 산다고 해서 많이 기쁘기도 했고, 지금은 서로 무시하는 사이긴 하지만 그 애에게 난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렵다고 주절주절 말하다 솔직해 지겠다고 손을 붙잡으며 꽁꽁 감싸고만 있는 태도를 바꾸려고 노력한 적도 있었다. 사람 대하기 힘들었던 것도 많이 나아졌다. 1년이 지났지만 뭐가 진짜 난지 혼란스러운 건 여전하긴 하다. 그래도 아주 조금씩, 천천히 제 자

  • 파란색스머프
  • 2014-11-21
백지 앞에서는

  백지 앞에서는 솔직해 져야 한다.   *   중학생 때 일은 되도록 기억하고 싶지 않다. 솔직히 이 글도 그다지 쓰고 싶지 않다. 깊게 들여다보면 아프니까. 그냥 그땐 그랬거니 하면서 없던 일인 척 덮어두는 것이 제일 편하고 마음이 가벼워서 3년 동안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정신과 상담 선생님이 덮어뒀던 기억들을 자꾸 꺼낸다. 정말 상처 들여다보기 싫은데, 그렇다고 계속 피하기엔 한 번에 11만 원인 상담 비용이 진짜 더럽게 아까워서, ‘아오 씨 진짜 너무 싫고 무서운데 돈이 아까워서라도 내가 상처 제대로 마주한다’ 뭐 이런 마음으로 적는 글.   선생님이 학교폭력 당한 사람 손들어보라고 하셨을 때 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이것도 폭력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누구한테 맞은 적 없고 왕따도 아니었다. 워낙 헤실 거리고 먼저 말 걸고 남 얘기에 웃는 건 참 잘해서 아는 사람도 많았다. 다만 3년 내내 심하게 까였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려니 참 뭐 한데,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동네북이었다. 야 이 멍청아ㅋㅋㅋㅋ 이런 수준으로 까는 거면 나도 반사ㅗㅗㅋㅋㅋㅋ 이러고 웃으며 넘겼다. 이렇게 까고 노는 건 재밌기도 했고. 그런데 도를 넘어선 것들. 내가 실수할 때마다 넌 원래 그렇지 뭐, 나쁜 일이 생기면 ‘아 기분 파란색스머프 같아’ 이런 말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너 왜 살아?였다. 자살 충동이 정말 심했을 때 머릿속에서 이 말이 들렸다. 그 아이가 했던 말투 그대로 너 왜 살아? 왜 살아? 왜 살아? 구간 반복 테이프처럼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데, 뭐라 대꾸할 수가 없어서 상상 속에서 나를 계속 죽였다. 여하튼 말로 하는 것 말로도 내 물건 집어던지는 거라던가 뭐 가지가지 있다만 기억하기도 싫고, 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3년 동안 지냈다.   사람들과의 경계. 이를테면 넘지 말아야 할 선들. 사람들이 이 선을 넘어오려고 하면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해야 하는데 나는 그걸 못 해서 사람들이 아 얘는 막 대해도 되는구나, 이렇게 낙인찍은 거라고 상담 선생님이 그랬다. 나중에 싫다고 발버둥 쳤을 때는 이미 낙인이 찍힌 후라 늦었단다.   왜 처음부터 단호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솔직히 깊게 파고들기 싫었다. 지금까지는 내가 쌍욕 하면서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남이 안 들었으니 내 탓이 아니라 남 탓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피해자니까, 남을 그냥 미워하기만 하면 되니까 내 잘못은 없다고 여겼다. 근데 제대로 들여다보니 아니었다. 내 잘못도 분명히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초면인데 거절하면 좀 그러니까 그냥 싫어도 웃으면서 알겠다고 했다. 이게 계속되다 보니 어느 순간 굳어졌다. 이때 싫으면 싫다고 바로 얘기했어야 했는데, 애들이 좋아하는 내 모습은 이건데 갑자기 다른 모습 보여주면 싫어하지 않을까, 시도해 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어버렸다. 사족 집어치우고 그냥 본론만 말하면 혼자되기 싫었던 마음에서 그랬던 것 같다. 애들이 좋아하는 내 모습은 웃는 건데

  • 파란색스머프
  • 2014-11-04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익명

    저도 스머프님 글을 읽으며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저는 너무 죄송해서 글조차 못 쓰겠더라구요. 많이 뉘우쳤습니다. ㅠ.ㅠ

    • 2015-01-20 21:26:50
    익명
    0 /1500
    • 0 /1500
  • 익명

    파란색스머프님의 아버님을 통해서 들었던 할아버지 이야기가 쓰였으면 좋겠네요. 저도 할머니를 잃는 기분을 경험해봐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 할머니도 치매에 걸리셔서 엄마가 할머니를 모시는 걸 많이 힘들어 하셨죠. 다른 가족들도 그랬어요. 어쩌면 일상이 되어버린 엄마, 아빠 등의 가족들을 우리는 사랑하면서도 밀어내는 것 같아요. 여러 핑계나 변명을 대면서 말이죠. 누군가를 잃고 나서 그 소중함을 느낀다는 아이러니함. 이 글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난 것 같은데, 좀 더 경험의 깊이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요소를 배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2015-01-03 21:51:35
    익명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