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 작성자 파란색스머프
  • 작성일 2014-12-22
  • 조회수 209

불 꺼진 방안에서 바닥을 더듬거리는 습관이 있다. 눈앞에 손을 가져다 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 분명 이 자리에 책상이 있었는데, 하며 손을 뻗어도 닿지 않으면 방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디가 문이고 창문인지 알 수 없는 한없이 낯선 공간. 그 아득한 느낌이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몰래 울고는 했다. 그러면서도 마냥 무섭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거의 매일 깜깜한 밤중에 손을 휘저었다. 무언가 닿으면 안심이 되면서도 문득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방. 가구 배치며 자잘한 소품 정리까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공간. 소유격 조사 ‘~의’가 붙는 것이 참 좋았다. 그래서 나는 아 이건 내가 봐도 인간적으로 좀 아니다 싶을 정도로 방을 더럽게 썼다. 공부고 뭐고 다른 건 안 바라니 제발 방만 치우라는 부모님의 말보다 내 방만큼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내 방에 대해서는 부모님이든 누구든 제발 신경 쓰지 않았으면 했다.

괜한 화풀이라는 거 알고 있다. 사람들과 관계 맺으면 항상 이리저리 끌려 다니니까 내 방에서만큼은 맘 놓고 쉬고 내 멋대로 하고 싶었다. 밖에 나가 애들하고 노는 것보다 방 안에서 혼자 컴퓨터를 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다른 충고는 다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지만 방 치우라는 말만큼은 죽어도 안 들었다. 인간 된 도리상 어느 정도 치우긴 해야겠지만 앞으로도 될 수 있는 한 그러고 싶다.

아빠가 있을 때는 항상 방문을 닫아 놓는다. 어질러진 방을 보이면 혼나서이기도 하지만 닫고 있는 게 더 편하다. 동생도 아빠가 오면 방문을 닫는다. 아빠도 그렇다. 나와 동생과 대화하기 싫을 때 아빠는 방문을 닫고 문을 잠근다. 거칠게 문고리를 돌리면 찰칵,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방문을 두어 번 두드리다가 내 방으로 돌아간다. 잠긴 문은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열려 있다. 나는 가끔 좀 열어보라고 문을 세게 두드리며 울다가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가고는 했다. 나무 문짝은 생각보다 튼튼했고 부모님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거나 TV 혼자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마음 안에도 방이 있다면 나는 그 문을 자주 잠갔다. 남들이 복도까지만 들어왔으면 했고 더 들어오려고 하면 아예 철벽을 쳤다. 정도 것 친한 사이. 이런 관계가 제일 좋고 편했다. 겁쟁이처럼 거절하면 남들이 나를 싫어할까 봐 싫다는 말도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닌 기억이 많아서 그럴 바엔 그냥 정도 것 지내자, 이런 마음이었다. 이를테면 내가 널 위해 선물 주고 울고 위로해주고 칭찬해주고 이런 것들 다 진심인데 그렇다고 우리가 친한 사이는 아냐, 이런 것들. 친구와 함께 춘천에 있는 절로 친구의 아버지 제사를 지내러 갔을 때도, 십년지기 동네 친구들과 모여 곱창을 먹으며 낄낄댈 때도 그랬다. 친구의 정의를 내려 보라는 상담 선생님의 말에, 나는 십 분 정도 고민하다 경계를 넘어오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 남이 나한테 기대는 것은 당연했지만 내가 남한테 기대는 것은 당연하지 못했다. 고 3 5월에 친구 앞에서 처음 내 얘기를 하면서 울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다고 말하며 기대도 되냐고 나는 친구에게 물었고 친구는 뭘 그런 걸 묻느냐고 했다. 후에 상담했을 때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나도 울어도 되고 아파해도 되고 기대도 되냐고. 남의 방에 들어간 적은 많아도 누군가를 내 방에 들인 적은 없어서, 그렇다는 대답을 들은 후에야 나도 그래도 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내가 널 위해 선물 주고 울고 위로해주고 칭찬해주고 이런 것들 다 진심인데 그렇다고 우리가 친한 사이는 아냐, 가 정말 멍청한 말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나의 친하다는 기준이 많이 이상해서 그런 거지 저 정도면 좀 친한 거였다.

요새 나밖에 없던 방에 사람을 초대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북적북적한 것도 꽤 괜찮다고 자주 생각한다. 예전에 내가 꿈꾸던 미래의 내 집 안에는 나밖에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남편도 없는 이층집에서 혼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전에는 이상한 걸 몰랐다. 혼자면 참 편하겠다 따위의 실없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혼자가 좋아서 남에게 연락하는 일이 정말 손에 꼽았다. 말도 없이 한 달 동안 잠수 타는 것은 기본이고 핸드폰 요금의 대부분은 게임 결제로 사용했다. 남의 연락은 잘도 무시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연락하고 답장을 기다리는 것이 정말 싫었다. 남들이랑 문자하는 걸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ㅋㅋㅋㅋ도 쓰고 ㅗㅗㅗㅗ도 쓰면서 시시덕대는 거. 그동안 인터넷 돌아다니며 익명 사이트에서 모르는 사람들하고만 했던 일이 이렇게 재밌다는 걸 몇 주 전부터 느끼고 있다. 실기 시험이 다가와서 딴짓하는 게 재밌어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고.

어쨌든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우울증 걸렸다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이니 너한테 힘이 되는 친구가 돼주고 싶다는 얘한테도 꺼내지 못하는 말이 많다. 하지만 그래도, 라고 생각한다. 갈 길이 멀지만 아예 끝이 없는 건 아니니 몇십 년 계속 걷다 보면 될 테니까. 이래봬도 나름 노가다 하난 자신 있다.

파란색스머프
파란색스머프

추천 콘텐츠

에세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작년의 일이었다. 문득 더는 미루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써야 할 글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래도, 라는 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할아버지의 죽음이 내 잘못이 아니고 나는 살인자가 아니라고, 죄책감 따위 느낄 필요 없다는 걸 논리적으로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나는 할아버지에 대해 잘 모른다. 아빠나 엄마에게 주워들은 이야기 몇이 내가 아는 할아버지의 전부다. 어렸을 적에 집이 부자였다던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 집이 망해 외할아버지를 따라 먼 곳으로 이사를 했다고 했다. 그 후 월남전에 참전해 고엽제 후유증으로 청각장애 2급 판정을 받아 항상 보청기를 끼고 다녔다. 이불에 구멍을 낼 정도로 담배를 자주 피웠다. 불같고 심하게 가부장적인 성격이었다. 불교였다가 중간에 천주교로 개종해 친가 전체를 천주교인으로 바꾸기도 했다. 노년에는 카트에 비둘기 모이를 담고 길가에 뿌리는 습관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매일 카트를 끌고 공원으로 나갔다. 오 년 전 무단횡단을 하다가 차에 치인 후 계속 투병생활을 하다 작년 9월 꽃동네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셨다. 생전에 나를 정말 예뻐하셨다고, 엄마는 말했다. 기억나는 것도 몇 없다. 내가 유치원 때 할아버지가 아현동 문방구에서 레고를 사줬던 것,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바람에 친척들이 다 모인 곳에서 아빠의 인사를 듣지 못해 왜 집에 왔는데 인사를 하지 않느냐며 불같이 화를 낸 것, 내가 할아버지 방에 누워 작은 TV로 애니메이션 채널을 보고 있는데 문을 살짝 열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간 것. 그 외의 기억은 모두 병원에 있는 모습이다. 돈이 할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성모병원에 입원해 계셨던 할아버지는 여러 번 병원을 바꾸더니 꽃동네에 들어가셨다. 친가는 육 남매였고 그중 세 분이 성직자였다. 나는 부랑자나 보호자 없는 사람이 오는 곳이 꽃동네였다, 라고 습작에 썼다. 병원비에 간병인 월급까지 합하면 매달 나가는 돈이 너무 컸다. 그래서 점점 시설이 좋지 않은 곳으로 할아버지를 옮겼다. 몇 년이 지나자 휠체어를 타고 옥상정원을 돌아다니실 수 있었던 할아버지는 팔다리가 완전히 굳어버릴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다. 굽어 펴지지 않는 할아버지의 무릎을 주무르며 사람의 몸이 이렇게 변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한 달에 한 번 꽃동네에 찾아가면 나와 엄마가 할아버지의 몸을 주무르고 있을 동안 아빠는 1층 로비에 내려가 있거나 동생과 장난을 쳤다. 그때는 아빠가 많이 미웠다. 친가 친척들도 미웠다. 할머니 집에서 육 남매가 모두 모였던 날이었다. 어쩌다 할아버지 얘기가 나왔다. 큰아버지인 신부님은 자신이 신부가 된 이유에는 할아버지에게 벗어나려고 했던 것도 있다고 했고, 고모는 할아버지 때문에 고생을 참 많이 했다고 했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그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할아버지 때문에 아빠가 내 나이 때부터 가게 일을 돕고 건물 청소도 하는 등 고생을 했던 것은 알고 있었다. 투병하며 오래 사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찍 돌아가시는 것이

  • 파란색스머프
  • 2014-12-22
커밍아웃

  가면과 가식이 같은 것이라고 착각했던 작년 겨울에, 5년 지기 친구한테 나는 가족 외의 널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가식적으로 대했다고 전화로 말한 적이 있다. 싸운 뒤 서로 무시하며 지내다 삼 개월 만에 하는 통화였기에 나와 친구는 그동안 섭섭했던 것을 털어놓으며 그간의 오해를 풀고 있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말하겠나 싶기도 했고, 언젠가는 걔도 알아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한 말이었는데 친구가 울면서 배신감을 느낀다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 년에 한두 번 울까 말까 한 애였다. 난 너 진심으로 대했어. 진짜 실망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원망 섞인 목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날아왔다.   내겐 일종의 커밍아웃 같은 말이었기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제 누구한테도 이 얘기를 할 수 없겠구나. 평생 입 다물고 살아가야지’와 ‘그동안 잘 속이며 살아왔구나’ 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울면서 이 말만 되풀이했고, 친구도 울면서 그게 아님 뭐냐고 말을 해보라고 쏘아붙였다. 제대로 변명도 못 한 채 핸드폰을 붙잡고 지하철 승강장을 빙빙 돌며 울고 있는데 친구가 뭐라 하더니 전화를 끊었던 것 같다.   너희 아빠 기일에 같이 절 가서 제사 지낼 때 운 건 정말 진심이었어. 가면을 썼던 건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 그때 입안을 맴돌던 말이 참 많았는데 결국 아무것도 꺼내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그동안 내가 웃은 게 진짜 웃겨서 웃은 건지 그냥 웃은 건지, 운 게 정말 슬퍼서 그랬던 건지, 그동안의 내 모든 감정을 의심하고 있었다. 한 번 의심하니 걷잡을 수 없었다. 내 모든 감정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란 애는 뭘까. 좋아하는 건 뭐고 싫어하는 건 뭐고 어떨 때 웃고 슬퍼하고 화내는지, 그동안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이 죄다 깨져버린 느낌이었다.   웬만하면 나쁜 일이 있어도 최대한 신경 끄고 밝게 지내려고 하는데 이때는 그게 잘 안됐다. 그 주에만 결석과 조퇴를 두 번씩 했고 가족하고 일주일간 말을 안했다. 사람하고 만나서 얘기하는 게 너무 부담스럽고 어려워졌고, 거의 대화를 안했던 만큼 빠져나가지 못한 말들이 머리에서 산만하게 돌아다녔다. 예전엔 병신 같고 바보 같은 나도 좋았는데 뭘 하든 내가 참 밉고 싫었고 그 친구가 ‘너 정말 말 안할 거야?’라고 묻고 나는 입을 다물고만 있는 꿈을 꿨을 정도였으니, 엄마랑 얘기하면서 마음이 풀리기까지 일주일간 정말 생고생을 하며 지냈다.   가끔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타긴 하지만 지금은 나름 잘 지내고 있다. 어쩌다 다른 친구한테 이 얘기를 했는데 친구가 자기도 가면을 쓰고 산다고 해서 많이 기쁘기도 했고, 지금은 서로 무시하는 사이긴 하지만 그 애에게 난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렵다고 주절주절 말하다 솔직해 지겠다고 손을 붙잡으며 꽁꽁 감싸고만 있는 태도를 바꾸려고 노력한 적도 있었다. 사람 대하기 힘들었던 것도 많이 나아졌다. 1년이 지났지만 뭐가 진짜 난지 혼란스러운 건 여전하긴 하다. 그래도 아주 조금씩, 천천히 제 자

  • 파란색스머프
  • 2014-11-21
백지 앞에서는

  백지 앞에서는 솔직해 져야 한다.   *   중학생 때 일은 되도록 기억하고 싶지 않다. 솔직히 이 글도 그다지 쓰고 싶지 않다. 깊게 들여다보면 아프니까. 그냥 그땐 그랬거니 하면서 없던 일인 척 덮어두는 것이 제일 편하고 마음이 가벼워서 3년 동안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정신과 상담 선생님이 덮어뒀던 기억들을 자꾸 꺼낸다. 정말 상처 들여다보기 싫은데, 그렇다고 계속 피하기엔 한 번에 11만 원인 상담 비용이 진짜 더럽게 아까워서, ‘아오 씨 진짜 너무 싫고 무서운데 돈이 아까워서라도 내가 상처 제대로 마주한다’ 뭐 이런 마음으로 적는 글.   선생님이 학교폭력 당한 사람 손들어보라고 하셨을 때 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이것도 폭력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누구한테 맞은 적 없고 왕따도 아니었다. 워낙 헤실 거리고 먼저 말 걸고 남 얘기에 웃는 건 참 잘해서 아는 사람도 많았다. 다만 3년 내내 심하게 까였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려니 참 뭐 한데,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동네북이었다. 야 이 멍청아ㅋㅋㅋㅋ 이런 수준으로 까는 거면 나도 반사ㅗㅗㅋㅋㅋㅋ 이러고 웃으며 넘겼다. 이렇게 까고 노는 건 재밌기도 했고. 그런데 도를 넘어선 것들. 내가 실수할 때마다 넌 원래 그렇지 뭐, 나쁜 일이 생기면 ‘아 기분 파란색스머프 같아’ 이런 말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너 왜 살아?였다. 자살 충동이 정말 심했을 때 머릿속에서 이 말이 들렸다. 그 아이가 했던 말투 그대로 너 왜 살아? 왜 살아? 왜 살아? 구간 반복 테이프처럼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데, 뭐라 대꾸할 수가 없어서 상상 속에서 나를 계속 죽였다. 여하튼 말로 하는 것 말로도 내 물건 집어던지는 거라던가 뭐 가지가지 있다만 기억하기도 싫고, 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3년 동안 지냈다.   사람들과의 경계. 이를테면 넘지 말아야 할 선들. 사람들이 이 선을 넘어오려고 하면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해야 하는데 나는 그걸 못 해서 사람들이 아 얘는 막 대해도 되는구나, 이렇게 낙인찍은 거라고 상담 선생님이 그랬다. 나중에 싫다고 발버둥 쳤을 때는 이미 낙인이 찍힌 후라 늦었단다.   왜 처음부터 단호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솔직히 깊게 파고들기 싫었다. 지금까지는 내가 쌍욕 하면서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남이 안 들었으니 내 탓이 아니라 남 탓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피해자니까, 남을 그냥 미워하기만 하면 되니까 내 잘못은 없다고 여겼다. 근데 제대로 들여다보니 아니었다. 내 잘못도 분명히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초면인데 거절하면 좀 그러니까 그냥 싫어도 웃으면서 알겠다고 했다. 이게 계속되다 보니 어느 순간 굳어졌다. 이때 싫으면 싫다고 바로 얘기했어야 했는데, 애들이 좋아하는 내 모습은 이건데 갑자기 다른 모습 보여주면 싫어하지 않을까, 시도해 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어버렸다. 사족 집어치우고 그냥 본론만 말하면 혼자되기 싫었던 마음에서 그랬던 것 같다. 애들이 좋아하는 내 모습은 웃는 건데

  • 파란색스머프
  • 2014-11-04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익명

    저도 노가다 하나는 자신 있어서 대학생 때 과외 알바 보다는 우체국에서 편지 분류하기, 주차 단속 요런 것을 했답니다. 호호..

    • 2015-01-20 21:24:50
    익명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