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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온도

  • 작성자 몽포르
  • 작성일 2010-12-10
  • 조회수 364

드디어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이제는 학교조차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쪽이 지금의 내 심정을 보다 가깝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굳이 나이를 계산하자면 19.8세 정도 될 것이다, 수능을 치루고 난 뒤의 우리는. 20일이 지나고, 나머지 2할이 채워지면 스무살이다. 고작 스무살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2할의 시간, 미성년과 성년의 나이 사이에서 하릴없이 어정대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런 자기성찰적인 질문과는 별개로 나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다. 여전히 떨리는 마음으로 담배와 술을 사고,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피고 마시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사실은 그보다 더 많이 텔레비전을 보고 잠을 잔다. 이렇게 나의 일상의 요목조목을 늘어놓다보니 아무 것도 안하고 있다는 말은 사실 과장일지 모르겠다. 분명 무언가는 한다. 그러나 여전히 영양가 없는 하루하루인 것만은 분명하다. 단 한 번도 하루의 말미에서, 침대에 몸을 뉘였을 때, 포만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늘 속이 더부룩했고 뒤이은 꿈들은 방귀처럼 고약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두 개의 문장들 사이에서 자주 헷갈린다. ‘드디어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된 것’인지 ‘이제는 학교조차 가지 못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얼핏 보면 두 문장은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런 오해는 당연하다. 아니, 오해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차피 두 문장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내용은 ‘학교를 갈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동일하니까.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뉘앙스의 차이다.

드디어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드디어’라는 부사는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한 느낌을 준다. 나의 학창시절을 빗대어 설명하자면 대략 이렇다. 얼마 전 건네받은 나의 생활기록부는 무척 처참했다. 전교 하위권을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내신 성적은 뭐 그렇다손 치고라도, 무단결석과 지각, 조퇴로 거의 도배되어 있다시피 한 출석부는 솔직히 남들 보여주기에는 조금 민망한 수준이었다.

나는 수업을 하다가 종종 마음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짜증이었다. 아,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선생님은 대체 뭐라고 지껄이시고 계신 거야. 쓸모도 없는 인수분해는 왜 배우고 앉아있는 건데. 나는 선생님과 반 아이들을 통째로 인수분해 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으므로, 그 대신 주저 없이 밖으로 나섰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런 기분이 들면, 나는 그런 수고를 덜기 위해 아예 학교를 가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것이 내 출석부가 처참해진 이유였다. 그리고 말하자면, 그렇게 교실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기를 짜증냈던 내가 ‘드디어’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제 ‘드디어’라는 부사의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한 느낌이 조금은 와 닿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제는 학교조차 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이제’라는 명사와 ‘학교’라는 또 다른 명사에 따라붙는 ‘조차’라는 조사, 마지막으로 ‘못하다’라는 보조형용사의 서술방식에 주목해보자. ‘이제’의 의미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대략 이러하다.

[Ⅰ][명사]

바로 이때. 지나간 때와 단절된 느낌을 준다.

그렇다. 나는 학창시절과 단절되었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

(체언 뒤에 붙어)

이미 어떤 것이 포함되고 그 위에 더함의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

위는 ‘조차’에 대한 국어사전의 설명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차’라는 조사는 반드시 체언 뒤에 붙는다는 사실이다. 결국 ‘학교조차 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문장은 어떤 체언을 생략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 체언은 대체 무엇일까? 국어사전에는 ‘조차’가 사용된 예문으로 ‘비가 오는데 바람조차 부는구나.’라는 문장을 들고 있는데, 이 문장의 형식을 빌려서 답을 할 수 있겠다. ‘내 앞길에 비가 오는데 학교조차 못 가게 되었구나.’ 여기서 체언은 ‘내 앞길에 비가 오는데’가 되겠다.

‘못하다’라는 형용사는 ‘안하다’라는 형용사와 비교했을 때, 덜 주체적이다. 문장의 주체가 어떤 외부적인 상황에 의해서 할 수 없이 관둔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런 예시들을 종합해보면, ‘이제는 학교조차 가지 못하게 되었다’라는 문장은 학교에 갈 필요성이 없어짐에 따라 홀가분 하다기 보다는, 아쉽고 발목이 잡히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앞에서는 분명 반 아이들과 선생님을 죄다 인수분해 시켜버리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번번이 학교를 뛰쳐나갔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저것 설명을 주절주절 늘어놓았지만, 결론은 이 모든 게 다 모순이라는 소리다. 두 개의 문장은 한꺼번에 양립될 수 없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는 두 개의 문장은 단지 뉘앙스라는 사소한 차이점만으로도 양 극단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19.8세라는 다소 애매한 위치에 서있는 나의 심정이 그런 식이다.

뉘앙스의 차이. 좋든 싫든, 미성년의 나이로 아직 2할의 시간을 더 살아야하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학창시절의 꽁무니를 흘겨보게 된다. 그런 매 순간순간마다 감정의 뉘앙스가 달라진다. ‘드디어’와 ‘이제는’ 사이를 오간다. ‘학교를’과 ‘학교조차’ 사이를 오간다. ‘않아도’와 ‘못하게’ 사이를 오간다.

돌이켜보면 나의 학창시절은 불행했다고 생각한다. 남들과는 다른 삶의 모양을 스케치하고 있는 나는 외로웠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나 자신에게 소홀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몸도 마음도 병들어 있었다. 그 시퍼런 멍자국이 아직도 욱신거려서 거듭 숨을 고르며 멈춰 서게 된다. 하지만 불행했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은 기억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종종 행복했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 점점이 박힌 별들처럼 그것은 티끌만한 빛으로 어둠을 견디고 있다. 그래서 함부로 기억들을 버릴 수 없다.

그러므로 무턱대고 홀가분해 할 수도, 아쉬워 할 수도 없다. 욕조에 몸을 담근 채로 온수와 냉수를 번갈아 틀고 있는 느낌이다. 이제 곧 몸을 일으켜야 할 텐데, 그 전까지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은데, 적절한 온도를 못 찾겠다.

이제 곧 스무살이다. 나는 떨지 않고 담배와 술을 사게 될 것이고, 그것들을 피고 마시면서도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 익숙치 못한 느낌들은 이내 습관이 될 것이다. 어쩌면 더 나아가 나 또한 남들처럼 일상의 타성에 젖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나에 대해서 자책조차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런 백수. 재수생. 비정규직 노동자. 밥벌이 인생, 등등.

그 반대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나의 작은 바람이 있다면, 되도록 그런 어른이 되기 전에 나의 기억들과 예쁘게 작별하고 싶다는 것이다.

나머지 2할은 그것을 궁리하는 데에 쓰고 싶다. 제발, 그래야할 텐데.

아, 이별의 온도라.

몽포르
몽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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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갈게요~. 안 내키시면 댓글달아주세요!^^(http://minihp.cyworld.com/53143795/217313498)

    • 2010-12-13 20:53:4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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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블랙피에로님의 글에는 울림이 있어서 좋습니다(제가 뭘 안다고 감히 '울림'을 얘기 하겠습니까만). 늘 본받고 싶어요. 폭넓은 사고, 풍부한 표현. 그리고 울림까지. 잠시 멈추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멋진 글티너.

    • 2010-12-12 00:30:2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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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이어서, 차마 별을 드릴 용기가 안납니다. 별 하나에서 다섯의 범위 안에 이 글을 넣고 싶진 않습니다. 조금은 달큼하기도, 그러나 조금은 쌉쌀하기도... 이 글의 뒷맛이 그래요. '티끌만한 빛으로 어둠을 견디고 있다'는 표현이 눅눅히 남습니다. 나의 스무 살엔 티끌만한 빛이 조금은 커질지 생각해보고 있어요. 답은, 없네요. 하긴, 정해져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테니까..

    • 2010-12-12 00:27:56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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