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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본다

  • 작성자 포르투칼
  • 작성일 2010-12-09
  • 조회수 118

3

 

그 당시의 나는 뭐랄까 알 수 없는 흥분에 붙잡혀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3학년이 된다는 것 그것은 고1,2때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기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2학년 겨울방학을 정말 의미 없게 보냈다. 집에서 하루 종일 tv를 보거나 아니면 아무 게임이나 붙잡고 퍼펙트클리어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 내 하루의 일과였다. 그런 내가 3월이 되고 학교에가 선생님들의 충고를 듣고 형의 조언도 듣고 하며 현실 즉 수능을 인지하기 되었다.

새로운 출발을 할 때에는 무리해서든지 무언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 같은 경우는 그 목표가 야자와 보충수업이었다. 야자도 매일반을 신청하고 보충도 꼬박꼬박 나가며 한걸음 한걸음 걷고 있었다.

 

4

 

3월은 아직 겨울의 잔재가 남아있어 춥기도 하고 몸을 웅크리는 시기였다면 4월은 본격적으로 날씨가 풀리며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때이다. 나 역시 그랬고 내 주변 친구들 역시 3월에 세웠던 목표들 혹은 다짐들을 지켜가며 보냈다. 개인적으로는 4월 모의고사가 3월보다 안 나와 우울했었다. 원래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만은 자신 있었는데 그 당시 3등급이 떨어져 낙담했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 충격을 받아서 그나마 5월에 공부를 했었다고 생각한다.

 

5

어린이날, 개교기념일, 어버이날, 석가탄신일, 학생회장선거등 상당히 행사가 많은 해였다. 우리학교같은 경우는 개교기념일과 어린이날이 붙어있어서 이틀 연속으로 쉬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예상치 않은 휴일이 생기면 좋아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었는데 평소와 똑같이 12시에 일어나 3시까지 tv를 보고 5시까지 컴퓨터를 하는데 뭐가 좋은거지?란 생각이 듣다. 좀 더 생산적인 예를 들면 독서라든지 비디오게임을 즐겨야 했었는데 아쉽다. 하여튼 수많은 행사 때문에 공부에는 전달들처럼 그렇게 투자를 못했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하면서 자위해보지만 결국은 내가 게을러서가 아닌가?

 

 

6

모든 수험생들에게 6월하면 떠오르는 날이 있을 것이다 6월 평가원 모의고사 말이다. 3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공부해라고 그것과 세트로 많이들은 말은 ‘6,9월 모의고사가 중요하다이었다. 아닌 사람은 말구. 6월 모의고사를 보고 난 솔직히 충격을 먹은 상태였다. 왜냐하면 살면서 가장 많이 공부를 한시기가 3,4,5월 달이었고 그것들을 평가해보는 시험이 6월 모평이었는데 이럴 수가 더떨어진 것이다. 그 당시의 나는 수능을 상당히 얕보았었다. 재수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들은 열심히 안해서 그런걸 거야라고 생각하곤 했더니 이제 내가 저 사람들이 된 것이다. 몇몇 분들은 3달 공부하고 오르면 그게 말이되냐라고 하실 테지만 과거의 나는 오른다는 마음으로 가득차있었기 때문에 적잖은 충격이었다.

 

7

방학. 그 설레던 이름이 이제는 공부를 좀 더 할 수 있는 시기정도로 정의할 수 있는 이름이 되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학교 앞에서 나눠준 여름방학 계획표를 책상에 피고 언어 하루에 몇 문제풀기 수리 30문제 풀기 등등의 지금생각해보면 지킨 날이 반도 안 되는 계획들을 짜고 있었다. 앞서서 말했지만 고3되고 가장 많이 듣던 말들 공부해라’ 6,9월이 중요하다에 견줄만한 여름방학이 역전의 기회다란 말을 믿은 채 아니 믿고 싶었다. 열심히 공부했었다. 물론 계획은 잘 못 지켰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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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축제가 8월에 있었는데 9월 모평이 바로 다음 주에 있어서 고3들은 찌그러져 있고 공부만 했다. 1,2학년 때도 열심히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못하게 되니 더 그리운 것 그게 나에게는 축제였던 것 같다. 친구들이 이글을 보면 비웃겠다. 제일 먼저 집에 간 놈이 그런 말 하냐고말이다. 그렇게 축제는 즐기지도 못하고 그대로 모의평가 준비를 하면서 보냈는데 솔직히 인정하자면 8월의 나는 4월의 나의 비하면 정말 노는 놈이었다. 야자도 관두고 보충도 신청하지 않고 집에 일찍 가서 컴퓨터좀 하다가 책피고 공부 약간하고 잤는데 난 잠이 부족하면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지고 인간이 힘이 없어진다. 그런 핑계를 대면서 혹은 수면을 더 많이 취한사람이 능률이 좋다는 통계들을 보면서 다가오는 거사에 도망치고 있었다. 아마 난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8월로 가도 그렇게 보낼 것 같다. 회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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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역시 많은 행사들이 있다. 앞서 말한 모의평가, 추석, 중간고사 그리고 나의 생일. 난 솔직히 내 생일이 언젠지 16날까지 알고 있었다. 근데 17일 날 까먹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 후다닥 학교에 가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잊고 지냈다. 근데 18일 날 아침에 생각해보니까 내 생일이 어제고 난 그냥 지난 거다. 더 중요한건 아무도 몰랐다. 그 사실을 깨닫고 그냥 지나간 것 보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은 것이 약간은 슬펐다. 9월 모평이야 망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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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핸드폰에 D-day해놓는데 내 핸드폰 같은 경우는 D-day가 바탕화면에 안 떠서 내가 직접 수첩 메뉴에 들어가서 확인을 했는데 확인해보고 한 달도 안남은걸 봤을 때 3월 달에 피부로 수능을 느꼈다면 10월에는 뼈가 수능을 느꼈다.

그 당시 나온 ebsfinal을 막풀고 친구들끼리 서로 놀자고 하기도 뭐하니까 놀지도못하고 공부만 하고 그런 시기였다. 2학기 들어서는 가장 열심히 했던 기간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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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전날에 수험표를 나눠주고 시험을 보는 고등학교에 미리 한 번씩 가볼 때 그때부터 사람이 긴장을 느끼는 것 같다. 아니 난 미리 시험장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탓을 때 그리고 버스에 교복을 입고 긴장한 고3들이 보일 때 그때 실감했다. 내일은 수능이고 내일은 내가 1년 동안 했던걸 평가하는 거고 그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가 엇갈리겠지? 라고 생각한 순간 뇌속에서 내일수능 내일수능 이런 생각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 다음날 어머니가 해주시는 아침을 먹고 친구어머니의 차를 타고 시험장에 일찍 도착했다. 교실에는 나보다 먼 저온 몇몇 학생들이 책을 피고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내 옆자리에 있던 놈은 자고 있었다. 속으로 너 이 자식 좀 멋있다. 라고 말하고 나 역시 책을 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언어영역, 수리영역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밥을 먹는데 친구들이랑 같이 먹어야 겠다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긴장에 압박감에 쫄 아서 혼자 맨 뒷자리에서 꾸역꾸역 음식을 씹어 넣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외국어, 사탐시간이 끝나고 방송에서 수험생 여러분들은 잠시 착석해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란 말이 나왔을 때 뭔가 해방감, 이제 공부는 끝이다! 란 생각보다는 너무나 허탈했다. 지금 이글을 쓰면서 그때의 감정을 무엇에 비교해야할지 어떤 표현을 써야할지 계속 고민했는데 결국 떠오르지 않아 허탈이라는 표현을 썼다. 탄탄대로는 아니었지만 그다지 굴곡도 없었던 나의 인생에 수능이 끝난 직후에 허탈감을 비유할 수 있는 표현은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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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시간. 한마디로 말해서 내 기분은 매우 우울하고 더욱 우울해지기 전에 글이라도 써보는 것이다. 사실 내년에도 이런 수필을 쓰게 될까 우울하기보다 매우 두렵다.

포르투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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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을 보낼수 없는 이유

 내 주위 사람들을 보면 이메일을 사용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친한 사이에서는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통화를 하면 되니 이메일을 사용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이메일을 외국친구와 펜팔을 한다는 얘기는 들어보았으나 내 친구 중에는 그렇게 낭만적인 애는 없다. 그런 내가 이메일 함을 열어 보게 된 것은 초등학교시절의 추억이 떠올라서이다. 초등학교 5학년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년 전에는 인터넷 카페가 상당히 유행했었다. 지금은 카페보다 미니홈피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지만 그 당시에는 인터넷 카페가 전성기를 구가 하던 시절이었다. 나 그리고 우리 반-5학년 4반 아이들-역시 카페를 만들었다.  그 이름 5학년 4반 놀이터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유치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하여튼 나는 그때 시절이 생각나 카페 들어가 보았으나 가장 최신 글은 2007년 5월 14일. 2007년 까지 나 말고 접속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그 최신 글의 내용은 담임선생님과 정모를 하니 많이들 와달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과연 몇 사람이나 이글을 보고 모임장소인 초등학교 뒷문으로 모였을까? 단언하건데 글쓴이와 글쓴이의 친구들밖에 모이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도 그 당시 친구들과 몇몇은 연락을 하고 지내는데 아무도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아이디어를 본 사람이 한명도 없다니 슬픈 일이다. 과연 정모는 잘됐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5학년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서 담임선생님과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싶었으나 담임선생님얼굴은 희미하게 기억나고 친구들은 남자애들은 몇 명 기억이 나지만 여자애들은 전혀 기억이 나질않았았다. 좀 친하게 지냈어야 했는데 멍청한 나 자신을 탓해본다.   담임선생님과의 추억중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맞은 기억이다. 중학교 미술선생님이 말씀하시길 ‘나중에 어른이 돼서 기억나는 선생님은 잘해준 선생님이 아니라 많이 때린 선생님이다.’라고 하셨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참 학생들은 많이 때린 분이셨다. 어쨌든 다시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왜 맞은 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의 절친한 친구 한명과 돌아가면서 한 명당 열대씩은 맞은 것 같다. 초등학생을 그렇게 때리다니 담임선생님은 인권운동가는 아니시구나. 그 외의 기억은 나질 않는다. 내가 기억을 못하는 것이 이상한가 생각해서 친구들에게 초등학교 기억이 나냐고 물으니까 그 친구는 어제일도 기억이 가물가물한다고한다. 그건 네가 멍청해서 그런것같아라고 해주려다 참았다. 기억이 안나는것이 굉장히 안타까웠다. 나의 초등학교 생활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비온 날 하굣길에 우산이 없는것많큼 안타까운 일이다.   카페에서 죽도록 많은 것만을 추억하며 나는 메일함을 뒤지기 시작했다. 메일이 3000통 가까이 있는데 그것이 다 스팸이라니 서글퍼졌다. 다행히도 스팸과 같이 친구들과 선생님과 어린 시절 했던 메일들을 지우지는 않았는지 첫 페이지에 친구의 메일이 남아있

  • 포르투칼
  • 2009-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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