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

드디어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이제는 학교조차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쪽이 지금의 내 심정을 보다 가깝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굳이 나이를 계산하자면 19.8세 정도 될 것이다, 수능을 치루고 난 뒤의 우리는. 20일이 지나고, 나머지 2할이 채워지면 스무살이다. 고작 스무살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2할의 시간, 미성년과 성년의 나이 사이에서 하릴없이 어정대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런 자기성찰적인 질문과는 별개로 나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다. 여전히 떨리는 마음으로 담배와 술을 사고,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피고 마시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사실은 그보다 더 많이 텔레비전을 보고 잠을 잔다. 이렇게 나의 일상의 요목조목을 늘어놓다보니 아무 것도 안하고 있다는 말은 사실 과장일지 모르겠다. 분명 무언가는 한다. 그러나 여전히 영양가 없는 하루하루인 것만은 분명하다. 단 한 번도 하루의 말미에서, 침대에 몸을 뉘였을 때, 포만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늘 속이 더부룩했고 뒤이은 꿈들은 방귀처럼 고약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두 개의 문장들 사이에서 자주 헷갈린다. ‘드디어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된 것’인지 ‘이제는 학교조차 가지 못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얼핏 보면 두 문장은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런 오해는 당연하다. 아니, 오해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차피 두 문장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내용은 ‘학교를 갈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동일하니까.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뉘앙스의 차이다. 드디어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드디어’라는 부사는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한 느낌을 준다. 나의 학창시절을 빗대어 설명하자면 대략 이렇다. 얼마 전 건네받은 나의 생활기록부는 무척 처참했다. 전교 하위권을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내신 성적은 뭐 그렇다손 치고라도, 무단결석과 지각, 조퇴로 거의 도배되어 있다시피 한 출석부는 솔직히 남들 보여주기에는 조금 민망한 수준이었다. 나는 수업을 하다가 종종 마음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짜증이었다. 아,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선생님은 대체 뭐라고 지껄이시고 계신 거야. 쓸모도 없는 인수분해는 왜 배우고 앉아있는 건데. 나는 선생님과 반 아이들을 통째로 인수분해 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으므로, 그 대신 주저 없이 밖으로 나섰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런 기분이 들면, 나는 그런 수고를 덜기 위해 아예 학교를 가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것이 내 출석부가 처참해진 이유였다. 그리고 말하자면, 그렇게 교실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기를 짜증냈던 내가 ‘드디어’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제 ‘드디어’라는 부사의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한 느낌이 조금은 와 닿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제는 학교조차 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이제’라는 명사와 &

• 몽포르
• 2010-12-10

레디, 액션? 9월인데 하늘이 공활하기는커녕, 정신없이 쏟아지는 직사광선 탓에 정신이 혼미했다. 나도 모 톱 가수처럼 멋지게 선글라스를 쓰고서 열심히 태양을 피해보고 싶었지만, 무리였다. 하여튼 간에 간만에 친구들과 거리로 나섰다.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개봉하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엉클 분미>를 보기 위해서였다, 고는 하지만, 아트하우스 건물은 이화여대 지하층에 자리 잡고 있었고 우리는 그 사실만으로도 마침내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물론 여대생 누나들의 애정 어린 시선을 담뿍 받고자 하는 사춘기 소년들의 근거 없는 망상 때문은 절대 아니다. 일단, 아니라 치자. 오전수업을 마치고 시간이 한참 남아서 일단 대학로 모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기로 했다. 사실 남자들끼리 그런 장소는 낯간지럽다. 하지만 막상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대체 누가 아메리카노를 시켰느니, 설마 이거 한약은 아니겠지, 시럽 좀 줘봐, 넌 지금 설탕물을 마시는 거니 아니면 커피를 마시는 거니, 라며 서로에게 닦달을 하는 동안 어느새 한참 남았던 시간은 금세 지나가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대생 누나들 아니, 영화를 보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이대역으로 실려 가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시끄럽게 떠들었다. 사실 글로 제아무리 침묵은 사금석이었고 아무도 원치 않으니 제발 앙코르 좀 그만 부르라고 자조를 해봐도, 사실 나는 이 소란함이 좋다. 아무래도 나라는 인간은 언젠가 세상에 종말이 찾아온다 해도, 허둥지둥 사과나무를 심고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장난을 걸다가 삽으로 얻어맞아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터무니없는 상상을 잠깐 동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계속 실없는 농담을 던졌고 나머지는 바늘 없이 웃었다. 실도 바늘도 없는 우리는 서로의 입에 손수 바느질을 해주지 못했다. 침묵이여, 안녕. 여대생 누나들의 애정 어린 시선도, 기대한 적도 없었지만 하여튼 간에 안녕. 그렇게 우리의 정수리 위에 무수한 말풍선들을 매달고서야 간신히 이 길고 긴 여정의 목표 비슷했던 아핏차퐁의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안에 나란히 착석할 수 있었다. 감독의 전작인 <열대병>을 이미 곤욕스런 마음으로 감상한 바 있는 우리들은 아메리카노를 리필해서 두 잔씩이나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졸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내가 생리현상이 급하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좌석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영화는 시작되었다. 조명이 꺼지고 극장 안에 진한 커피색의 어둠이 엎질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나의 이 지난한 인생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프랜차이즈 커피숍과 애꿎은 리필 문화를 진심으로 저주했다. 얼마 후, 영화는 끝이 났다. 나는 우리는, 어느새 나의 커피 잔에 쏟아 넣은 설탕의 입자들처럼 어둠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간만에, 영화를 보게 돼서 기쁘다는 생각을 했다.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다시 밝혀진 조명이 서둘러 어둠을 닦아낼 때까지,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렇게 영화는 실도 바늘도 없이 우리들의 입과 나의 방광을 능숙한 손길로

• 몽포르
• 2010-09-19

앵콜요청금지 친구들과 함께 하굣길에 오를 때면 나는 부쩍 말이 많아진다. 학교 안에서 반나절 동안 묵혀온 피로들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내가 알고 있는 온갖 언어적인 유희들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두서없이 입을 뻥긋 거리다보면 정작 해야 할 말은 넘쳐흐르고 남은 말들은 얕게 출렁인다. 그러니까 곧잘 밑바닥이 드러나 보인다. 내뱉다보면 시간은 마냥 흘러간다. 어쩌면 침묵은 금이 아닌 것만 같다. 친구들도 들뜬 어조로 대답하고 우리가 지나친 골목마다 소란함이 묻어난다. 그럴수록 나는 나의 감정을 쉽게 내색하게 된다. 말을 길어 올리던 도르래에도 점차 속도가 붙고 무슨 영화를 보았느니, 거기서 어떤 장면이 마음에 와 닿았느니, 수시는 어디에 넣을 것이고, 나는 합격을 하던 하지 않던 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 그렇지만 원서 비 6만원은 아까울 따름이고, 역시 대학은 날강도니 뭐니 하면서 없던 말도 지어내고 있던 말도 꾸며내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철이 도착하면 그 요란한 소음 앞에서마저 대립각을 세우고 우리의 목소리로 그것을 덮으려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런, 지경이다. 하지만 그렇게 마냥 흘러가던 시간이 문득 멈춰서는 순간이 있다. 친구들이 모두 지하철에서 내리고 나 홀로 열차 칸에 남겨졌을 때, 물론 주위에는 나의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여고생들과 아침 일찍 배부된 일간지를 아직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아저씨와 난간에 머리를 기댄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혹시 아들의 원서 비 6만원이 내심 아까워 눈을 감은 채 분을 삭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주머니 등이 드문드문 서 있기는 하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 때, 시간은 제동을 건다. 정말이지 그런 순간이 오면 마음 한편에서 시린 바람이 새는 것만 같다. 나의 친구 놈들 중 하나가 손가락에 침을 묻혀 구멍을 뚫어놓고 내린 것도 아닌데, 그렇다. 우두커니, 흘러가는 차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의 틈새인지 구멍인지는 점차 벌어지거나 커지거나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다. 과연 침묵을 한낮 돌덩어리로 여겼기 때문인가. 생각 없이 주절대다 보면 절로 침묵을 외면하게 되고 그러다가 마침내 입을 꾹 다물게 되는 순간이 오면 그때서야 그 돌덩어리에 묻어있던 사금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빛나는 조각들. 그 투명한 미덕. 침묵이 금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최소한 사금석인 것만은 분명하다는 생각. 그러나 노다지다, 라고 외치기엔 어딘지 모르게 쑥스러운 기분. 그에 비해 피로를 쫓기 위해 거의 살포되다 시피한 말의 향연들은 얼마나 저렴한가. 그것들을 다 싸잡아서 경매에 붙인다 하더라도 최고가는 6만원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것들을 매물로 내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날강도로 몰리지나 않을까. 하는 물음들조차 이제는 소란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내일은 기필코 내 입을 봉해버리리라 비장하게 다짐을 하더라도, 막상 내일이 오면 재봉 선은 허무하게 터져버릴 것을 안다. 말이란 그런 것이다. 침묵 앞에선 한없이 보잘 것 없어지지만, 때로는 보잘 것 없는 것들이 거

• 몽포르
• 2010-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