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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空白)

  • 작성자 몽포르
  • 작성일 2009-11-01
  • 조회수 101

 

공백(空白) 


짙은 어둠 위에 새벽의 날빛이 어슴푸레하게 번져나갈 즈음, 나는 어김없이 등굣길에 오른다. 전기장판에 달궈진 내 몸뚱어리의 온기를 탐내는 바깥 공기들이 삽시간에 밀려와 옷자락 사이를 파고든다. 팔뚝 위에 돋아난 솜털들이 갑작스런 한기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등허리를 곧추세운다. 어느새 겨울이 시간의 능선을 타고 가까이에 다가왔다. 내가 토해낸 깊은 한숨이 차가운 공기 중에 무심히 흩뿌려진다. 겨울엔, 각자의 삶에서 응집된 고통들이 희뿌연 입김으로 뿜어져 나온다. 내면 근저에 암약해있던 상념들이 증발하며 피어오른 물안개는 금세 자취를 감춘다. 나는 여전히 고통의 갈피를 잡지 못한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지하철 역 쪽으로 유유히 발걸음을 옮긴다. 몇몇 무표정한 얼굴들이 허공을 맴돌다가 바람결에 의지하며 내 곁을 스쳐지나간다. 목덜미 아래에 힘없이 늘어져있는 넥타이 때문인지 그들의 모습은 흡사 놀이공원 안을 정처 없이 배회하는 바람 빠진 풍선 마냥 우스꽝스럽다. 순간적으로 각종 공과금 납부서와 카드 값 청구서들이 순진스런 아이의 표정을 하고서 그들의 턱주가리 끝에 매어져 있는 넥타이 끈을 한손으로 꼭 부여잡고 있는 기괴한 광경이 연상된다. 불온한 욕망의 공기들이 주입된 풍선들. 착각이려니 하고 그 무표정한 얼굴들을 머릿속에서 지운다.


도회지는 점차로 퍼져나가는 독기 때문에 사지가 마비되고 있다. 적어도 나 혼자만은 그렇게 느끼고 있다. 도로 위는 언제나 그렇듯이 온갖 종류의 자동차들을 한데 우겨넣어 소화불량인 상태다. 속이 더부룩한 자동차들은 배기관을 통해 연거푸 트림을 해댄다. 공기가 혼탁하다. 사람들은 오로지 제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그 난장 속에 뒤엉켜 있다. 자신의 자동차 뒤편에서 날선 경적소리를 울려대는 볼썽사나운 운전자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자신의 주위에 둘러쳐있는 자동차들의 바리케이드는 그저 한낱 응축된 배설물 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며, 끝끝내 설사약을 집어삼켜서라도 그것을 억지로 뱃속에서 게워내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 남아있는 한줌의 당위는 결국 무단으로 차선변경을 해서라도 당장에 이 경직된 도로상황을 탈피하고자하는 어느 변비환자의 비장함뿐이다. 모두의 혈관 속에 무관심이란 이름의 콜레스테롤이 구석구석 파고들고 있다. 각자의 삶에 치열하다보니 차마 주위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마침내 역사에 다다른다. 스크린도어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서서 열차를 기다린다. 유리벽 너머엔 칠흑 같은 어둠이 팽배해있다. 그 속을 무심히 가로질러 뻗어있는 철로 한 쌍이 휑하니 안쓰럽다. 서로를 곁에 두고서도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만 보아야하는 저 철로들의 서글픈 운명. 오로지 열차의 소란스런 기척만으로 서로의 존재를 잠시나마 가늠해볼 수 있다.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선. 문득 반대편 플랫폼에 횡렬로 늘어서 있는 무리들을 건너다본다. 유리벽 너머의 칠흑 같은 어둠이 우리들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공간에서 서로를 마냥 건너다보지만, 결코 서로의 존재만은 의식하지 못한다. 언젠가 그들과 우연히 옷깃을 스치게 될 날이 올까. 만약 그 날이 온다면, 우리들은 과연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러기엔 서로간의 공백이 너무나 멀고도 어둡다.


그러한 잔상들 위로 유리벽에 비친 나의 희끄무레한 형체가 떠오른다. 빛의 그림자, 그림자 속의 빛은 그저 말없이 허공 속에 붙박여있다. 생기 없는 얼굴로 나의 두 눈을 응시하고 있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이 더없이 처연해 보인다. 문득 거리에서 마주친 바람 빠진 풍선들의 몰골을 상기한다. 삶에 대한 무력감을 누덕누덕 기워 입은 자들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참담했다. 혹시나 그렇지 않을까. 반대편 플랫폼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이 건너다보는 나의 얼굴 표정도 그들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나의 넥타이 끈을 꼭 쥐고 있는 욕망들의 모습은 과연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 비춰지고 있을까. 알고 싶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가가 몇 번이고 되묻고 싶다. 나 또한 너희들에게 그리도 무심했었느냐고.


역사에 열차의 도착을 알리는 요란한 안내방송이 울려 퍼진다. 사람들이 동요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상념의 한토막이 툭하고 끊겨 차디찬 바닥 위로 떨어진다. 곧이어 어둠 저편에서 빛의 한 점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유리벽 너머의 경직된 공간 속에 균열이 인다. 한 쌍의 철로들이 다시금 서로를 의식하며 흘낏거리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열차가 맹렬한 속도로 들이닥쳐 그들의 애정공세에 심술궂게 훼방을 놓는다. 스크린도어가 활짝 열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 빠진 풍선들은 유유히 열차 속으로 날아든다. 반대편 플랫폼은 열차의 육중한 몸체에 가로막혀 더 이상 건너다보이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내 얼굴을 응시하지 못한다. 나는 여전히 고통의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리고, 나 역시도 지하철에 몸을 싣고서 인파 속에 부대낀다. 열차가 출발한다. 차내 어딘가에서 시끄럽게 통화를 해대고 있는 여자의 앙칼진 음성이 울려 퍼진다. 오늘 하루 일정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에게 읊어대고 있다. 주위 사람들의 입가에서 비어져 나오는 불쾌감 섞인 탄식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나는 언성을 높여 화내기는커녕, 그저 귓전으로만 흘려들으며 침묵하고 있다. 그녀도, 나도 차마 주위를 둘러볼 겨를이 없다. 빨리 학교에 도착했으면 좋겠다.


몽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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