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작성자 요마yohma
- 작성일 2008-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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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구가 해결책을 발명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출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대게는 무의식적인)요구, 사람의 출현에 선행하는 요구의 제2단계에 불과하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을 빚어내며, 우리의 욕망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구체화된다." -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의『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중에서.
사회의 통념이 빚어낸 위험의식이 내재 된 채로 한 달을 보냈다. 따가운 눈초리 속에 나를 숨기며 지내지도 않았고, 모두의 걱정(혹은 비열한 조소를 감추지 못하며 비추었던 경멸)과는 달리 상상했던 것과 다른 현실에 방황하지도 않았다. 내 또래의 사람들이 시덥잖은 규율에 얼 맞춰 지낼 때면 나는 나에게 주어진 자유에 행복해 하고, 그 자유를 나의 용기로 쟁취했다는 것에 대해 뿌듯함을 느꼈다. 다만, 스스로 소수자가 됨으로 인해 느꼈던 만족감과 남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은 미구에 식어버려서 마치 대한민국의 모든 자퇴생을 대표하는 양 부끄럽지 않기 위해 만나는 사람마다 나의 포부와 용기를 자랑처럼 떠벌리던 당당함은 어느덧 수많은 질문 공세 속에서 귀찮음으로 바뀌어 이 시간에 왜 여기 있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그렇게 경멸하던 학교를 이용해 상황을 회피하게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개교기념일만 해도 이미 법정 공휴일은 뛰어넘을게다.
목욕탕과 슈퍼 가는 것에 제법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 외엔, 새벽에 누워서도 잠 못 들어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잠들고 마는 불면증까지,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오후 2시 즈음 녹아버릴 듯한 땡볕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낑낑거리는 일상마저도 나만이 누릴 수 있다는 특권이라는 생각에 웃음 짓게 했다. 그리고 간절히 바라지 마지 않던 고독과 외로움도 다시금 찾았다. 어버버 거리던 바바리안의 소굴 속에서 그렇게도 원하던 것들. 음악과 시詩와 영화로 나를 끊임 없이 자학하며 쾌락을 느끼던 마조히스트의 일상을 다시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어느 것과도 비견될 수 없는 커다란 기쁨이였다.
그렇게 여전히 이소라의 노래에 팔딱팔딱 뛰는 내 감성을 끌어안으며 지내왔다. 그리고 언제였던가, 이제 충분히 이기적으로 살아도 상관없다는 다짐을 부질없게 만든 한 설치류의 천박한 삽질로 인해 내 나이 열일곱에 처음으로, 인터넷 알바들과 맹렬히 싸웠던 키보드를 놓고 광장으로 나섰다. 촛불을 들고서, 우매하다고 경멸했던 대중들을 우러러보며 온몸이 달아오르는 구호의 낯뜨거움에도 꿋꿋이 버텼다. 처음으로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이 괴롭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전경들의 방패에 휘둘리며 피를 흘리던 서울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죄의식을 떨쳐버렸다고 자부하면서 나는 계속 자리를 지켰다. 사람들을 만났다. 청소년 인권 단체였다. 무슨 정신이였을까. 사실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경멸하던 단체라는 것에, 그것도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학생들의 인권에 대해서, 스스로가 발을 쑥 담궈버렸다.
그때 부터였던 것 같다. 슬며시 수면 위로 드러나던 외로움의 한계. 야금야금 갉아먹던 내가 다 사라지고 난 뒤에 더이상 촛불집회는 촛불집회로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이만큼 외로워요, 나는 요로코롬 시니컬하여요 하며 밖에서 나를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모일 때면 나도 스스럼없이 그들 틈에 끼어 열심히 나의 욕구를 채워나갔다. 나는 여태까지 타인에 의해 상처받았습니다, 내가 사랑하면 사랑 할수록 그들은 멀어져갔어요 취미도 달랐고 관심도 달랐죠, 그러나 당신네들은 다를 테지요 당신들은 나와 같은 관심과 감성을 공유할거에요 그럼 내가 사랑해도 되겠지요, 라고.
그러다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내가 여태껏 찾아오던 이상형과 가장 닮아 있었다. 이소라의 노래를 듣고 좋아할 줄 알았고, 이따금은 삶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고전古典에 대한 상투적인 얘기를 할 때도 성심껏 들어주었으며, 내가 끊임없이 아파하면서도 끝끝내 찬미할수밖에 없었던, 타인에게서 받은 상처로 인한 외로움에 대해서도 이해해주었다. 몇 날 며칠 끙끙 앓아가며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는 나처럼 커피를 좋아할테고 가끔은 노래방에 혼자 들어갈 뻔뻔함도 갖췄을 것이다. 왜 새벽 늦게까지 깨어 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푸른 밤의 가치를 충분히 알 테고 혼자 지내는 시간의 즐거움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처럼 홀로 지내는 시간들을 위해 주위 사람들을 떨쳐버릴 만큼 차갑지도 못했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12시가 넘어서면 -내일의 일상을 위해- 잠에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이 한 말대로 그 사람의 출현은 사랑하고 싶은 요구의 제2단계에 불과했다. 나는 이소라를 좋아하고 커피를 마시며 혼자 있는 것을 즐기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다른 타인에게 또 다른 나의 모습을 투영시키며 자꾸만 최면을 걸어댈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결국에 나는 그녀도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또다시 혼자 아파할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든, 사랑하고자 하는 나를 사랑했던 것이든. 그러나 이것이 어차피 깨어나야 할 최면에 불과하다면 그 기간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 알랭 드 보통의 말대로라면 어쨌든 지금, 나는 사랑에 빠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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