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내식물!
- 작성자 해강
- 작성일 2024-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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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나는 공부에 미쳐있었다.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들은 그게 어떤 가치를 지니더라도 모두 쳐내는 단호를 몸에 꽁꽁 두르고선
나를 향한 호의조차도 시간을 뺏어갈까 노심초사 날선 상태로 받아들이곤 했다.
고3 새학기 3월, 학교에선 텃밭인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붙었다. 반별로 지원자를 뽑아서 텃밭에 씨를 심고 가꾸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고3이 무슨 텃밭이야 공부할 시간 뺏기게..저걸 누가 해 하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지원자가 꽤 있었다. 작년에 같은반이었던 친구들과 새로 같은반이 된 애들이 텃밭 농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벛꽃과 함께 찾아온 중간고사 시험기간. 나는 점심을 거르고 공부했다. 그 1시간이 부족해서라기보다 밥을 먹지 않음으로써 내가 나태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했다는것을 꼬르륵 소리로 자각하고자 하는 의도가 컸다. 또 점심을 거르면 길고 긴 7교시가 일찍 끝나는 것도 같아서 좀 마음이 덜 괴로웠다. 그렇게 점심마다 창문 옆 스탠딩 책상에서 영어 본문을 외웠다.
머릿속으로 읽어보는 영어 문장에 하나 둘 들려오는 웃음소리 물 호스소리. 창문 바로 아래에는 텃밭이 있었고 나는 거기서 호스 끝을 쥐고 무지개를 뿌려대는 광경의 목격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너무 즐거워 보였다.
지금 사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말하는 홈쇼핑처럼
날 저 십대의 청춘에 탑승시킬 막차가 눈앞에 엎질러지듯 급정거한 것이다.
애써 무시하려는 생각조차 날려버린
광경은
비이성적인 판단이 앞서게 만들었다.
샤프를 책상에 내동댕이치고
창문 아래 풍경으로 뛰어들어가기로 했다.
과거의 나라면 비웃을 선택을 내지른 채로
반에서 나와 복도를 지나치고 계단 두 층을 연속적으로 뛰어 내려가 스터디카페같은 자습실에 들어가서 반대편 바깥이 통하는 문에 달린 드르륵 탁 하면 열리는 방충망을 틱 열고서 친구들에게 손 인사를 했다.
그러나 시작부터 완전히 반해버렸다고는 할 수 없었다.
소개팅에서 처음만난 두사람이 아무리 첫눈에 반하더라도 사랑고백부터 하진 않듯이 나는 텃밭과 초면이라 마음을 아껴두고 기본적인 말부터 시작했다. "물 내가 줘봐도 돼? 이건 무슨 식물이야? 모종삽 달라고? 아, 응 여기! 쌤 안녕하세요, 아 저는 텃밭 아닌데 그냥 구경하러 온 거에요"
심지어 나는 속으로 고3이 무슨 텃밭이냐며 불평까지 한 전적이 있기에 더욱 쭈뼛거렸다. 그런 마음이 무색하게 텃밭과 친구들은 성큼 내 마음으로 들어와 앉았다.
영어지문은 나 없이 퍽 쓸쓸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당시 내 눈엔 그런 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점심시간마다 물을 주는 친구들을 따라 나도 텃밭에 들르게 되었다.
텃밭이라는 단어는 19살과 잘 안 어울린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텁텁해보이는 인상의 그 이름이 숨긴 어떤 청춘이 텃밭의 흙속에 알차게 박혀 자라나고 있었음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다시는 그런생각을 못 할 거라고 장담한다. 시인들은 자신의 시에 청춘 대신 텃밭을 쓸 거란 말이야. 아아! 그것은 바야흐로 여름. 뜨거운 텃밭이었다. 찬란하고 빛나는 너와 나의 텃밭. 멜론차트 위 우효의 텃밭, 시집속에도 난사된 텃밭의 잔해. 10대의 마지막 봄의 텃밭,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텃밭을 텃밭으로 꾸려나가고 있었다.
중간고사는 잘 끝났다. 진작에 잊은 점심시간 공복영어가 무색하게 시험을 잘 봤다. 가벼운 마음으로 달려나간 텃밭. 잡초를 뽑는 친구들과 함께 잡초를 뽑았다.사실 식물의 식자도 잘 몰랐던 내게는 웬만큼 유명한 식물이 아니면 다 잡초로 보였기에 친구가 뽑는 풀을 보고 그것과 같은 종류 만을 골라 뽑았었다. 그래서 뽑혀나간 잡초들은 머릿속에서 분류되었다. 땅에 붙어자라는 청록색의 동글동글한 잎, 세잎 클로버들, 이름모를 줄기만
새빨간 잡초, 삐죽빼죽하게 나는 만화에서 나오는 풀같이 생긴 잡초, 노란 꽃을 피우는 잡초, 대부분이 살고자 하는 의지가 무지 강했다.
엄지손가락만한 이름 모를 줄기만 새빨간 잡초를 살살 흔들어 뽑았을 땐, 뿌리가 너무 통통해서 죄책감이 들었다. 땅을 끌어모은 그 생명력이 펄떡펄떡 손에서 뛰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를 살려야만 했다. 이대로 던져놓아 햇빛아래 건조되어 한줌 흙으로 돌아가게 둘 수 없었다. 잡초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게 시뻘건 줄기가 질질 흘리는 삶의 열망이 나를 더 부추겼다. 나는 그대로 잡초를 들고 계단을 두칸씩 뛰어올랐다.
재활용통에서 페트병을 찾아 잘 씻고. 잡초의 뿌리도 살살 씻어주었다. 식물광인인 엄마에게 전화해보니 수경재배를 하려면 뿌리에 흙을 모두 씻어서 깨끗한 물에 담궈야한다고 그랬다. 세면대에서 둑 두둑 벗겨져나오는 흙과 그의 하얀 뿌리. 잎은 초록색, 줄기는 빨간색, 뿌리는 하얀색. 그건 날 매료시켰고 나는 뻑이 가버렸다. 페트병에 물을 끝까지 채우고 그를 꽂아주었다. 이름도 지었다 '기내'라고. 기내는 식물이니까 기내식물, 붙여 말하니 기내식에서 제공하는 물이라는 것처럼 들려 더 마음에 들었다. 문제집 가생이에 '기내'라고 쓰고 보니 글자를 다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면 HILL이 나오기도 했다. 모두에게 비밀로 한 기내의 두번째 이름 뜻은 언덕이 되고..
요즘 기내는 교실 바로 앞 복도 창가에서 잘 지낸다. 처음엔 다들 잡초를 키운다며 웃었지만 지금은 다들 바람이 부는 날이면 기내를 걱정해준다. 기내는 내 정수리에서 쇄골까지정도의 키가 되었다. 크면서 붉은 줄기는 연해지다가 사라졌고 완연한 여름이 되자 하늘색과 보라색이 섞인 잎에 노란 술을 가진 꽃을 피웠다. 그의 줄기는 대나무같기도 했다. 학문에 빠진 선비의 올곧음을 21세에 재현하고 있었다. 그는 해가 뜨는 날이면 잎을 활짝 펴고 비가 오는 날이면 풀죽어있었다. 밖에 못나가 해를 못보고 사는게 나같아서 가끔은 기내를 데리고 해를 쬐러 테라스에도 나갔다. 가끔 구름이 없는 날엔 해는 우리를 닭처럼 쪼아먹기도 했다. 아침을 먹고나서 이를 닦으며 기내의 물을 갈아주는것도 하루의 루틴이 되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정식으로 텃밭의 일원이 되었다.
아침엔 물을 갈고
점심시간에는 물을 주러 나간다
나의 광합성시간이자 다른 작물들의 수분보충시간이다
무, 당근, 감자, 깻잎, 봉숭화, 해바라기, 상추들 눈을 감으면 그들의 땅 위 배열이 훤히 외워져 눈앞에 보일 지경이 되었다. 호스의 끝을 세게 잡으면 무지개가 생겼다. 물뿌리개로 주기 귀찮을때는 너도 너도 허공에 무지개를 만들었다. 야자시간에 공부하다 마음이 심란해지면 나는 매일 텃밭에 다녀왔다. 자습실과는 같은층에 붙어있어서 다녀오고 나면 5분정도가 흘러있었다. 매일 봐도 색다른 저들의 생명력 앞에서 매일 나도 각성하게 되는것이다. 그들이 나의 미약한 삶의 의지를 다잡게 만들었다. 모의고사를 망친 날에도 그들을 보면 울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고3이다. 고3의 반을 달려왔지만 내안엔 똬리튼 괴로움이 없다. 이건 순전히 나의 청춘,텃밭 덕이다. 걱정많고 탈도 많던 내 생활이 햇빛 아래 건조된 흰 천처럼 세탁 된것 만 같다.
여름에 그들과 함께 마지막 내신을 준비하며 쑥쑥 자라서 가을에 뿌듯할 모의고사의 결실을 맺고 나면
수능을 앞둔 겨울에 그들과 나와 친구들은 인간과 식물, 그 각자의 이유로 함께 메말라갈 예정이지만, 괴로움을 이겨가며 고운 책갈피처럼 물기 하나없이 싹 메말라 건조되고 나면 그 다음 봄이 팡파레를 불며 성대한 행진으로 우리를 찾아온다는건 공식만큼 명확하다.
그리고 요즘 나는
빛나는 텃밭의 기억에 절대 후회의 얼룩이 지게 하고싶지 않아서 더 확실하게 공부에 매달리게 되었다.
자꾸만 지키고 싶어져서
처음으로 무얼 위한 공부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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