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의 순수함이 사라지고
- 작성자 송희찬
- 작성일 20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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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 붉고 작은게 귀엽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웃기게도 사랑을 말한다. 작고 귀엽고 붉어서 심장과 사랑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앵두는 앵두일 뿐인데 사람들은 이런 사소한 것에 의미를 둘까? 작가가 꿈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앵두를 사랑으로 엮고 의미를 두는 것은 솔직히 꼴사나워 보인다. 그래서 난 앵두를 보면 사랑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앵두는 앵두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몇 초 후에는 "추억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5살부터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수원에 있는 낡은 아파트에 살았다. 그 아파트는 크게 가동과 나동으로 나뉘었다. 가동은 1층이 주차장과 이어져 있었고 내가 살던 나동은 1층이 주차장 아래에 있었다. {그렇다고 나동이 반지하는 아니다. 모두 지상이다. 다만 경사진 골목에 자리 잡고 있어 단차가 있었을 뿐이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있던 주차장에는 나무들과 텃밭들이 있었다. 나동은 작은 텃밭이었고 가동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이 길은 무척 인간적이었고 자연적이었다. 한마디로 자연과 인간 그 사이의 경계에 있는 곳이었다. 조금 돈이 있었을 때 살았던 안양의 아파트 단지, 그리고 약간 어려운 상황에서 살고 있는 수원의 빌라까지 봤을 때 모두 이 아파트보다 좋지 못하였다.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던 낡은 아파트에서의 생활보다 행복을 느끼는 횟수가 적었다. 그만큼 그 당시 나는 순수하고 순진했고 행복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함께 놀 이웃들이 많았다. 1층과 6층에 살던 동생들과 그들의 누나들까지 나는 친하게 지냈다. 특히 1층과는 자주 왕례가 오갔다. 하루는 우리집에 테레비가 고장났을 때 1층 집에 가서 좋아하던 애니메이션 마지막화를 봤던 기억이 있었다. 6층과는 떡집 단골로 지냈다.{6층 동생의 부모님이 떡집을 운영했다.} 심지어 내가 혼자 학교가는 것을 두려워 하니 1층과 6층 누나들과 동생들과 함께 초등학교 등교를 하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 가족들은 끈끈한 마음을 가지고 생활했다. 이들과 많은 추억들이 있지만 제일 크게 기억남는 것은 동생들과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서 앵두를 따고 축구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특히 1층은 남자아이여서 식식하고 나와도 잘맞았다. 그래서 우리 둘은 자주 놀았다.
앵두 열매가 피고 익는 계절이 되면 우린 순진한 마음으로 앵두를 따러갔다. 앵두나무는 가동 앞에 있었지만 아파트를 사는 모두의 것이었다. 특히 이 앵두나무의 소유는 아이들 것이라 말을 해도 과한 말이 아니다. 나와 1층 그리고 6층은 앵두를 따서 집에 가져가 엄마와 이웃들에게 자랑을 했다. 나는 이 앵두를 집에서 요리하겠다며 별의 별 이상한 레시피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나를 보고 있으면 엄마는 웃으며 핫케이크를 구워줬다. 이 때 먹은 핫케잌은 잊을 수 없다. 우리 엄마의 레시피는 가루와 우유와 달걀만 놓고 토핑 없이 구운 것으로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그냥 먹어도 맛있는 음식을 앵두를 따는 노동과 음식으로 만드는 고된 행위를 해서 그런지 그 때의 맛은 달콤하고 땀에의해 짭짜롬했다.
앵두나무가 있는 주차장 끝에는 경비사무소가 있는데 그 곳에는 두 분의 경비 할아버지들이 경비를 봐주셨다. 한 분은 주름이 조금 많은 분이었고 한분은 통통한 분이었다. 이 두 분은 앵두나무를 따고 있는 나와 1층, 6층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로 보곤하셨다. 내가 앵두를 따서 보여 준 사람들 중에도 경비 할아버지들을 뺄 수 없었다. 통통하신 분은 약간 외향적이고 다정하신 분이었다. 그 분은 잘 받아주셨다. 그러나 다른 한 분은 "그래"라고 말을 하며 무뚝뚝하게 일을 보셨다. 이 분은 내게 "울면 침 놀거야."라고 하신 분으로 엄청 이성적인 분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속은 따뜻하셨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커서 생각하니 그 분만큼 따뜻한 분이 없었다.
그러나 내 나이 초등 2학년 떄였나 가동의 앵두나무가 배어졌다. 함께 요리하고 놀이하던 추억은 한 만큼이었지만 그가 배어지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감정이 오묘했다. 나무가 없어지니까 무엇인가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이 감정이 공허함인가? 아직도 모르겠다. 이 때의 감정을. 나는 내 추억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이는 많은 앵두들의 따뜻함이 나이 먹어 노화 되는 것 같았다. 그 뒤 1층이 이사를 가게 되었고 6층도 떡집을 접게 되었다. 나 또한 초등학교 4학년 후반 때 안양으로 이사를 가게 되며 우리의 추억들도 잊어져만 갔다.
그러던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그 아파트가 아닌 빌라로 이사오게 되면서 나와 부모님 그리고 동생과 함께 그 집 위에 있던 놀이터에 갔다. 놀이터는 모래가 사라지고 그네가 사라지고 미끄럼틀이 진화하고 방방과 그물망이 생겼다. 이는 그 아파트도 똑같았다. 앵두나무가 빈 자리는 더 이상 자연스러운 멋이 사라지고 인간적인 모습만 남았으며 경비 할아버지들의 머리는 흰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 분들께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나도 많이 바뀌었고 마음도 많이 달라졌가에 이를 표현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앵두의 붉음 익어감이 사라지면서 나의 마음은 검게 물들었다. 그들과의 따뜻한 익어감은 이제 사라져간다.
앵두를 보면 그들이 머릿속에 스쳐가고 나는 잠시 봄잠에 들어 그들의 익어감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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