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작성자 송희찬
- 작성일 202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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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사는 방식이 다르고 살아온 방식이 다르다. 그래서 각자의 성격, 취향, 행동들이 다른 것이다. 한 마디로 개인이라는 내면적 국가가 있고 사회는 이 국가에 들리는 타국인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사람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사람들에게 있어 효율적이고 기쁨이겠지만 나처럼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너무 힘들다. 특히 남들과 달리 지병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 이는 더 잔인하고 무서운 상호작용 방식이다. 나는 나와같이 내향적이고 남들과 다른 사람을 외향, 내향이 함께 어울리는 개인 국가 사이의 어울리지 못하는 이방인이라고 말을 한다.
이방인의 사전적 개념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방인은 남들과 다른 모습과 생각을 가진 사람, 즉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까뮈의 <이방인>은 남들과 달리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은 뫼르소가 겪는 일을 서술한 책이다. 여기서 이방인의 개념은 타국인이 아닌 대중적인 사고와 생각이 다르거나 보통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난 이방인은 단순 외국인이 아니라는 것과 평범하지 않은 비평범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사고적 개념을 확립했다. 그래서 난 남들과 다른 나를 이방인이라 칭한다.
올해 3월 본례 지병인 기침이 있던 나는 고등학교 적응이 힘들었다. 이방인이라는 자의적 인식 때문일까? 나는 반 친구들과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개학 첫날에는 소화도 되지 않고 미친듯 몸이 떨렸다. "떨지마, 눈치 보지마, 어깨 펴."라는 엄마의 말도 솔직히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내가 그당시 의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책 뿐이었다. 그래서 그 주간에는 은유의 <해방의 밤>을 읽었지만 그 내용들은 스쳐지나가 지금은 책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다음날도 그 다다음날도 나는 친구들이 무섭고 두려워 말을 잘하지는 못했다.
3월은 매일,매일 힘들어 지옥같은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3월 13일 글틴에 잠시 들어왔는데 2월달에 쓴 시 <숲 속 민초 아이스크림 집의 창을 닦으면>이 장원이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시는 내향적인 사람이 살아가는 마음을 서술한 시로 지금의 내 모습을 과거에 본듯 그린 것 같았다. 반 친구들이 무서웠지만 또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방인이라는 생각에 쉽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이 모습이 내가 과거에 쓴 시에 잘 담아져 있어 보는동안 신기했다. 그리고 잠시 내가 이방인이 아니었다면이라는 우울감도 함께 몰려왔다. 이후 19일날은 내 문우 필명 김희수가 글틴 소설부분 장원을 했다는 소식에 기뻤다. 그러나 이 기쁨도 학교가 끝나고 난 이후 피로를 이기지는 못했다. 31일 나는 박서련 멘토의 책 <더 셜리 클럽>을 읽고 독후록을 작성했다. 위 책에는 내가 알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 바로 "가끔 생각나요. 나에게 차가운 얼굴을 보여 준 사람들. 그렇지만 사실은 그냥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사람들이 내게 냉담한 표정을 지었던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그런게 아니었을까"라는 구절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다. 특히 내가 이방인이라는 생각에 빠져 나에게 다가오는 친절을 보지 못한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후 잔인한 계절 4월이 왔다. 나는 친구들과 조금 친해지려고 노력을 생각으로만 했고 실천은 하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내가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그런 이방인이라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이 생각의 깊이는 3월처럼 깊지는 않았다. 그저 잠깐의 우울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때마침 수학부장인 친구 K{개학 첫주에 나온 K와 다름} 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와 일상적인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하게 되었다. K는 일명 인싸라고 불리지만 MBTI가 I형인 친구였다. 그래서 우리 둘은 나름 잘 맞았다. 사실 5월 말인 지금 생각을 해보면 K가 나에게 다가온 것은 3월 중순부터였다. 그러나 3월인 그 때도 그렇고 나는 이방인이라는 생각에 잠겨서 그를 외면하고 혼자 있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 둘은 서로 이야기 하면서 서로 잘하는 분야와 못하는 분야가 딱 맞게 떨어지는 것을 알았다. K는 수학을 잘하고 국사를 어려워했고 나는 국사를 잘하고 수학을 어려웠기에 서로의 약점을 보안을 했다. 우리 둘이 더 친해질 수 있었던 배경은 4월 말 미술 모둠 프로젝트 수행 때 K가 날 부조장으로 선택함으로서 우린 더 친해졌고 나도 남에게 피해만 주는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부셨다.
4월 마지막 주부터 시작된 1차 지필이 끝나고 나는 피해를 주는 이방인이지만 다른 친구들에게도 다가가려고 생각 뿐 아니라 노력을 하는 중이다. 국어 독서 논술 수행 때 친구들이 읽을 도서를 고르지 못하면 진로와 사회문제를 이어서 추천해 주고 친구들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나름 반 친구들과 친해졌다. 그리고 미술 프로젝트 발표 수행 때 내가 쓴 대본과 K와 다른 조원의 발표로 우리 조가 발표 공동 1위를 먹었다.
지금 3월과 4월을 생각하면 날 너무 이방인이라는 것에 가둔 것 같다. 친구들이 나에게 다가오려고 했던 신호를 내가 외면을 했던 것이다. 지난 5월 24일 반 친구들은 에버렌드에 갔다. 나는 기침이 시작한 곳이 이 곳이라 가지는 않았지만 우리 반의 K와 또 다른 한명도 가지 않아서 학교에서 나름 편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K와 웃으며 다음주에 있을 수행을 이야기 했다. 앞으로의 우정도 함께 이어갔으면 좋겠다. 이제는 더 이상 날 이방인이라는 벽에 가두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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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말, 담임 선생님께서 조용히 부르셨다. "희찬아 잠깐 나 좀 보자." 나는 선생님의 말씀에 순간 겁이 막 올라왔다. 나는 분명 잘못 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 진지하게 부르셔서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선생님을 따라 교무실에 갔다. 교무실은 시험기간이라 조용하고 엄숙했다. "희찬아 3년을 버틸 수 있겠어?" 선생님의 첫 마디가 정적을 깼다. 대화는 10 정도였지만, 대화의 깊이는 상상 이상이있었다. 나는 이 말이 "이제 버티기 힘들 것 같다. 희찬아."라고 들렸다. 한 마디로 자퇴를 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말이다. 나는 놀랐기 보단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침 때문에 학교 생활을 오래 할 수 없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러나 이 생각 뒤에는 약간의 서운함과 억울함 그리고 속상함이 가득했다. 내가 기침을 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닌데. 나는 22년 10월부터 다양한 원인의 기침을 앓고 있다. 정신과에서는 틱으로 보고 대학 병원에서는 알레르기성 천식으로 보고 있다. 23년에는 증상이 줄었다가 고등학교 입학을 하고나서 다시 심해졌다. 그러다가 6월에 감기가 들어오면서 기침이 악화됬고, 6월의 절반 이상을 조퇴, 결석, 지각으로 보냈다. 2학기가 시작된 8월에는 상황이 더 심해졌다. 매주 조퇴를 2~3번 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님이 자퇴 이야기를 하신 것은 이해가 갔다. 선생님께서 하신 말의 끝자락을 물고 온 말을 듣고 나는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었고 기침이 더 심하게 나왔다. 선생님은 "이러다가 네가 너를 잡겠다."라고 말씀하셨다. 몸에서 땀이 계속 흘렀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상황에서 이명과 함께 수업 종이 울렸다. 다음 시간은 부담임 선생님이신 국어 선생님의 수업이었다.나는 급히 상담을 마무리 하고 빨리 교실을 향했다. 내 몸은 몸살에 걸린 것처럼 더 힘들었고 마음 역시 몸살에 걸린듯 무거웠다 수업에 들어가자 국어 선생님이 나에게 "희찬아 무슨 일이야? 왜 늦었어?" 라고 물으셨다. 나는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무겁게 답을했다. "담임선생님과 상담이 있어서요."그렇게 시집을 읽었지만 시의 내용이 들어오지 않았다{수업 시작 전 5분은 시집 읽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답답했지만 어찌저찌 이 날의 모든 수업을 끝냈다. 수업이 끝난 후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우리가 생각했던 것을 해야되나 봐." 엄마에게 이 말을 할 때 내 감정은 억울함, 허무감, 우울함, 배신감 등이 몰려왔다. 버스를 기다리며 눈물이 흐를 것 같았지만 나는 꾹 참았다.엄마는 의외로 덤덤했다. {아니면 내 앞에서 덤덤한 척을 한 것이다.} 나는 엄마의 반응에 다시 무너졌다. 그렇지만 울지는 않기로 다짐했다. 집에 도착하니 선생님에게서 카톡이 왔다. "희찬아, 잠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주말동안 쉬렴." 선생님의 문자에 나는 한 번 더 흔들렸다. 결국 나는 위센터에 가서 상담을 받고 여러 감정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감정 정리는 어려웠다. 우울함이 더 몰려왔다. 엄마는 이런 내가 안쓰러웠을까? 상담
- 송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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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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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저도 은연중에 제가 이방인 같은 존재라고 느꼈던 적이 있었는데, 묘하게 위로가 되기도 하네요. 이방인이라는 말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발전하고자 하는 태도가 정말 감동적이에요, 송희찬님 글은 늘 변함없이 순수함이 묻어나서 보기 좋습니다
@예리 님 오랜만이에요~^^ 제 이야기로 위로를 받으셨다니 기쁘네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숨김없고 훈훈한 글이라, 보는 내내 기분 좋게 감상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이방인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는데, 이 말처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그 형태가 어떻든 간에 전부 다르고, 결국 우리 모두는 다르기 때문에 세상에 즐겁고 설레는 일들이 많은게 아닐까 싶어졌어요. 어쩌면 '이방인'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좋은 말일지 모르는 것이, 작가님처럼 주변 사람들과 함께하면서도 본인이 좋아하는 것, 본인만의 개성 등을 놓치지 않는다면 오히려 다채롭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문이 되어주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해보았습니다. 한편 최근 한국 문학을 자주 읽고 있는데, 작품 속에서 언급된 <더 셜리 클럽>도 시간이 날 때 꼭 읽어보겠습니다. 인용해주신 문장이 너무 맘에 듭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
@글조 님 안녕하세요~^^ 박서련 멘토님의 작품은 문채 하나,하나 음미하는 맛이 있어서 추천해요.^^ 그리고 좋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