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기다린다는 것
- 작성자 김희수
- 작성일 202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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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기다린다는 것
나는 언제나 오늘을 살았다. 수많은 학원 숙제에 시달릴 때도, 재미있는 책을 읽을 때도, 이르게 찾아온 사랑을 잃었을 때도. 나의 태도는 결코 바뀌지 않았다.
오늘은 산다고 하는 것은, 나는 갇혀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그 말은 옳다. 나는 오늘 안에 갇혀 어떻게든 오늘만을 넘기는 사람이다. 그것이 나중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는 오늘을 넘기는 것에만 집중해 왔다. 이것은 그 사실을 내가 발견하기 전부터 이미 내 마음속에 내 감정들과 혼재되어 온 본능이었다. 나는 그것을 찾아냈고 규정했을 뿐,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내일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과거에 사는 사람은 언제나 후회와 회한만에 빠져 산다. 미래를 사는 사람은 오늘을 돌보지 않는다. 현재에 사는 사람을 현실에 목매며 산다.
그랬기에 나는 오늘을 살면서도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내일을 기다린다는 것은 나는 오늘에 산다는 뜻이 되었고, 자연스레 나는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완성되었다.
사실 완성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정한 것은 오로지 방향성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나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결정을 내린 셈이 되었다.
내일을 기다린다는 것은 미래만을 보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나는 나의 미래를 보면서도 나의 현재에 집중하는, 무한히 반복되는 지금의 순간에 사는 사람이 되었다. 그랬기에 나는 적어도 지금에 진심이며 동시에 이상을 바라보는 몽상가가 될 수 있었다. 내일을 기다린다는 건 내게 이중성이 아닌 일관성을 부여해 주었다.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은 내일을 아름답게밖에 볼 줄 모른다. 그래서 그 사람은 이상만을 좇는 몽상가가 되었다. 나는 그걸 나쁘게 보지 않는다. 나의 내일을 기대하며 오늘을 살고, 그 내일은 곧 오늘이 되어 또 집중하는 삶을 산다. 나는 현실 속에서도 몽상할 수 있고 몽상 속에서도 현실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의 삶의 자세로 나는 다소 과격한 결정을 내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을 버텨냈고 또다시 내일을 기다릴 수 있었다.
이건 내가 한 번 무언가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성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하나에 꽂히면 그것에 온 집중이 몰려 다른 것들에는 눈을 두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학업에도 지장이 다소 많았다.
가령 꽃처럼 아름다운 아이를 보았을 때처럼 말이다. 그 아이는 정말로 눈꽃 속에서 태어난 것처럼 아름다웠다. 지금도 가끔 그 아이를 마주치곤 하는데, 볼 때마다 알아보지 못하고 그 아름다움을 속으로 뇌까리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게 됐다.
나의 이런 점은 한때 깊이에 대중이 없어서 그녀에게 과도할 만큼 빠져 버렸고,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한 마디라도 건네 보고자 했다. 그것은 곧 집착이 되었고 나는 집착을 보답받지 못한 사랑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음을 나는 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이라 나는 그것에서 배울지언정 그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았다기보다는 후회할 시간 따위 내겐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했다.
마음 속에 피어난 눈꽃이 지고 내게 사랑다운 사랑이 다가왔다. 그녀는 수줍은 꽃처럼 다가와서 제멋대로 날아다녔고 내가 다가가면 물러서곤 했다. 그녀는 그저 가끔 다가올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이번의 사랑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녀와의 시간은 행복했고 설렜으며 짧았다. 현재만을 살아서 다소 과격한 나를 그녀는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나를 떠나고 말았다. 나는 차마 울지 못했다.
말이 샜다. 결과적으로 나는 짧고 굵게 살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였다.
수필은 처음이라 어색하다. 어투는 소설 같이 변하기도 하고 자조적인 일기가 되기도 한다. 나는 사실 이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갈 자신이 없다. 그저 늘어놓고 싶어서 말하기 시작했을 뿐, 나는 그 끝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그냥 계속 적기로 했다. 할 말이 더 없어 끊어질 때까지, 새벽 2시의 지금을 이어 가보고자 한다.
두 번의 사랑을 지나는 동안 나의 우울증은 악화되었다. 이것은 현재를 사는 사람의 부작용인데, 미래마저 막막한 청소년들에게 주로 나타나는 증상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청소년이기에 그 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다만 조금 남들보다는 깊은 감이 있었다. 짧고 굵은 줄기마저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지자 나는 버틸 수 없었다. 어느새 칼을 손에 댔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진부하다.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글틴에 와서 나와 같은 친구들, 선배들, 후배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은 생각이 깊어서 자신을 찾기 어려워했고 그래서 자신을 조각내보기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보며 동질감을 느꼈다. 그것이 내가 매일 단편소설 한 편씩을 쓰고 있는 이유다.
게시판에 친구를 구하는 글을 올려 봤다. 고맙게도 한 사람이 응답해주었고 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오랜만에 일궈낸 성공이었다.
반복하지만 수필은 이상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나열할 뿐인데 그것이 잘 쓰고 말고 할 것이 있나? 나는 그저 진심만이 담긴다면 그것이 무엇이더라도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반복하지만 수필을 내게 낯설다. 진심을 잘 써내는 것이 중요한가? 역시 산문은 어렵다.
우적우적, 아이스크림을 뜯으며 생각한다. 나의 삶이 수필이 된다면, 어쩌면 소설도 될 수 있지 않을까. 결말마저 내가 정할 수 있는 꿈 같은 삶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또 이야기가 샜다. 우울증으로 돌아가 보자면, 나는 그것을 나 자신을 발견한 순간부터 삶의 동반자처럼 지녀 왔다. 수많은 것들을 고민하고 떠올리고 구체화하며 하나의 이야기로 재단하는, 어쩌면 하등 쓸모 없는 일을 일평생 머릿속으로 해 왔기에. 나는 온갖 고민과 힘듦을 제대로 겪어 보지도 않고 깊게 느꼈다. 그러다보니 핵심이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만 뽑아 보는 인간이 되었고 그것은 아직도 애석한 일로 생각한다. 글을 쓰기 어려워지기도 했고, 삶이 어려워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런 고민들이 나를 살아 있다는 기분 속에 놓이게 한다. 나를 어지럽히는 아무 의미 없는 질문들이 내 삶을 긍정하고 사유하는 나 자신이 죽지 않았다고 느끼게 한다.
수필은 보통 경험을 적으니 나도 경험 한 줄 해볼까. 이것은 내가 첫 자해를 한 이야기다. 다만 들어도 아마 거북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해는 상처와 고통을 내지만, 결국은 인간이 별 이상한 이유로 해대는 행위의 일종일 뿐이니까.
한 학원이 있었다. 그곳은 중학생에게 고등학생의 역할을 요구하는 곳이었고 많이 엄했다. 손을 들고 서 있는 체벌이 있었고 숙제는 무궁무진하게도 쏟아져 나왔다.
선생님은 마치 아이들을 괴롭히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같았다. 그 사람은 우리 중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고 누구보다도 적게 잤다. 그건 그 사람만의 삶에 대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속에서 공부에 집중하지 않는 나 자신을 보며 회의감을 가졌다. 공부에 뜻이 없는데 공부만을 위해 살고 있는 이 삶은 잘못되지 않았나?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문득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궁금했다. 나의 구성 물질은 나의 정신이고 영혼이지 나의 육체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박혀 있는 이 고깃덩어리의 내부를 보기로 했다.
칼은 생각과는 달리 시원하기보다는 찢어지는 고통이었다. 가끔 고통 중에서도 시원함이 동반되는 고통이 있는데, 이건 그것과는 달랐다. 훨씬 더 날카로웠다.
송송 피어나는 붉은 꽃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의 육체의 난 흠집은 내 정신을 집중시켰다. 정신의 아픔을 잊고 그것만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래서 나는 내 손에 상처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내 첫 자해였다. 자해라는 단어는 왠지 어감이 안 좋아서 쓰기가 거북하다. 아무튼 나에 대한 혐오와 일종의 현실 도피로 이루어진 상처는 그때를 회상하도록 하는 영광의 상처로 남았을 뿐이다.
지금은 정신과를 다니며 상담을 받고 있다. 약도 먹는다. 비록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천 개의 단어에 가까워졌다. 아마 중간중간의 이런 잡설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참 클 것이다. 엇, 천 단어를 넘었다.
아무튼 나는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죽어서도 난 살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내 삶의 방식이라면, 나는 죽기조차 내 삶의 일부로, 그리고 그저 하나의 사건 정도로만 취급할 것이다. 나의 결말이 아니라.
나는 살아가서 그렇게 또 살아가겠다. 아마 어떻게든 되겠지, 싶다.
두서없는 글이었다.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 또한 과정이기에. 그리고 그것 또한 오늘이기에. 나는 또 글을 쓰고 있기에. 나는 계속 쓸 것이고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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