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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3-07-23
  • 조회수 995

울음소리가 사그라졌다. 여름 장마철의 습기가 거실 가득 축축히 내려앉았다. 나는 한 동안 불면증에 시달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직장에서 시체가 되다시피 집으로 들어올 때에, 물에 빠진 오징어 마냥 흐물히 몸을 일으킬 때에, 영롱한 수면 알약을 타는 목구멍으로 꿀럭꿀럭 삼켜낼 때 까지도 몰려오는 건 졸음뿐이었다. 잠을 자면 조금은 피곤이 가시려나. 이럴 때면 허구한 날 풍수지리와 가당치 않는 미신을 읊조리는 엄마의 말이 맞지 않을까 싶다. 정말로 귀신이 나의 몸에 붙어있는 건 아닐지 싶다.


어느 날은 새벽녘부터 푸른 잎새와 열렬히 부딪혀대는 빗줄기에 오랜 잠을 깨었다. 세게 내리는 빗줄기에 잎들이 견고치 못하고 위아래를 왔다 갔다 한다. 눈을 감으면, 빗소리에 어느 어둠 속 심연이 나를 짓누른다. 눈을 떠야만 모든 것이 원활히 돈다. 그러다 빗줄기가 유리창으로 붙어 흐른다. 오늘은 꼭 피곤이 가실 듯한 예감이 든다.

아침의 예감과는 다르게, 그날따라 피가 머리로만 쏠려, 걸을 때마다 출렁거렸다. 컴퓨터 화면을 바라볼 때면 눈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좀 체 뇟속의 피가 내려갈 생각을 않는다. 나는 물로 속을 게워내려 직원 휴게실로 향하였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도 다리가 휘청 거렸다. 

휴게실에는 나뿐이었다. 부장이 지나가다 한마디 한다. 

"허, 이렇게 놀고 있으면서 급여는 올려달라?" 

지난 연봉 협상 때의 일을 트집이다. 

입고리를 시멘트 마냥 굳게 굳은 광대뼈에 걸쳤다. 

"오늘따라 조금 피곤하네요. " 

부장은 한심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에잉, 니미럴. 원래 회사 일에, 가정일에, 사회 일까지 있으면 잠 하나 자지 못 하고 사는 게 사회란 거야. 잠 까짓것 입사할 때 내다 버렸어야지. " 

여전히 쓴웃음으로 부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탐탁지 않는 자네를 위해 한 가지 팁을 알려줄게. 가장 쉬운 방법은 생각하지 않는 거야. 졸음을 잊기 위해 일을 한다. 일을 하므로서 생각을 않는다! 이런 생각으로 살면, 인생은 금방이고, 잠은 잊혀지는 거야. 잠은, 옛날이나 꿈꾸었던 개인국의 보물 제1호로 남겨지는 거지." 

부장 놈은 그것을 정말 대단한 것으로 알고 있는지, 내가 자신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기를 원했다. 그러나 내가 원한 것은 잠이지, 잠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뇟속의 피가 꿀럭거렸다. 입을 닫았다. 한참 동안 나의 말을 기다리던 부장은 그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고 자리를 떠나며 말했다. 

"오늘까지 리포트랑 프레젠테이션 가지고 와" 

저 놈 때문에 어지럼이 도지지.


나는 그날, 반차를 쓰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부장의 말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회사에 피해되는 것 보다야, 어떻게든 이 졸음을 몰아내는 것이 더욱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출렁거리는 머릿속을 쥐어잡고서 소파에 누었다. 흔들리는 눈을 감고 잠들 때까지 버틴다며 오기를 부렸다. 그래야만 어지럼이 가실 것 같았다. 그러자 몸은 분명히 누워있는데, 속은 일어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다리는 소파 끝 허공으로 쭉 뻗어 있지만 발은 분명히 무겁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필사적으로 꾸릿한 발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그것은 몸 전부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었다. 양말 새로 그것의 무거운 촉감이 느껴졌다. 무엇이더냐. 어지러움을 감내하고 눈을 뜨었다. 그러나 양말 사이로는 가벼이 바람만이 통했다. 곧 소파 속 파묻다 한 몸이 아스팔트 벽에 기댄 듯 빧빧해져 버렸다.


장마의 습기가 내 위로 내려앉았다. 물방울들이 몸에 달려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 여름의 더위에 물방울들이 지글히 끓는다. 더위를 삭히려 에어컨 리모컨 찾아 팔을 휘적거렸다. 

그러다가 문득이 생각났다. 

기슴 안팎으로 송글히 맺힌 땀방울들이 생각났다. 여름이면 동네 골목골목으로 뛰놀던 아이들이 계곡에서 첨벙거리던 어느 옛날이었다. 선우가 스쳤다. 장마 날, 우리는 비에 젖은 옷으로 그렇게 신이 나게도 뛰어놀았다. 집으로 돌아와 함께 수박도 먹었다. 이빨로 시원한 과즙이 흘렀나. 우리는 밤날을 보내며 함께 잠을 잤다. 그것이 선우의 집이던 나의 집이던 상관없었다. 그저 선우와 내가 같은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동네는 집집들이 서로 마주 보았고, 그래서 사는 사람은 달라도 쓰던 수저와 젓갈 장독대의 무게는 같았던 까닭이다. 모두가 함께였던 까닭이다.

여름밤, 선우와 나는 농에서 깨똥벌레를 잡아다가 조명 삼았다. 개똥벌레의 뒤 똥꾸멍은 노란빛을, 암컷과의 교미에서 그 광을 내었다. 선우와 내가 함께 방으로 들어가는 날, 그 방에서도 노란 조명등이 우리가 잠들 때까지 강렬히 빛을 내었다. 노란등이 희미해질 때, 

우리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었다. 선풍기를 머릿 춤으로 놓았다. 

탈탈탈탈탈 

먼지를 털어가며 돌아가는 선풍기는, 그 한 줌의 먼지마저도 부드럽게 우리 사이로 떠 내렸다. 

나는 허공을 바라보는 선우를 손가락 한마디 한마디로 이루어 만졌다. 비어있는 어둠 속에서 선우는 속삭이듯이 내게 말했다. 

"선풍기를 틀고 자면 사람은 죽는다고 해." 

나는 말했다. 

" 늙어 죽을 때까지도 우리가 함께 누워 있을 수만 있다면 난 죽어도 무어래 상관없어" 

그러고는 서로 바라보며 피식이 웃는다. 그건, 그 어느 여름밤 우리만이 어둠 속에서 바라볼 수 있는 어느 빛을 내었기 때문일 터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 생각을 않으려 보이지 않는 천장을 향해 팔을 뻗고 괜스레 없는 것을 손아귀로 쥐려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옆새로 유리병에 담긴 개똥벌레가 보였다. 어두운 밤에도 빛났다. 가슴을 어루었다. 우리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에 뻗은 팔은 조용히 내려앉는다. 

선풍기 소음 속에서 선우는 조용히, 그리고 말했다. 

"이제... 자는 거야.... 그만... 자고야 마는 거야... " 

스르륵. 그 말을 듣고 나면 최면에라도 걸린 듯 자연히 눈이 감겼다. 머릿속이 청명히 막을 내렸다.



손바닥으로 굳게 쥔 딱딱한 에어컨 리모컨을 놓았다. 옛 생각에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에서 이불을 빼고, 베개와 함께 바닥에 깔았다. 오랫동안 열어본 적이 없던 창고를 열어 조명과 선풍기를 꺼내었다. 누운 후에 머리밑으로 놓았다. 서늘한 공기를 쐬어, 여름 낮잠을 청한다. 땀방울들이 조심스레 멀어져 간다. 오랜만이다. 생각할 새도 없던 것을 스치게 하는 것이 정말이지 반갑기 그지없다. 

탈탈탈탈탈 

선풍기 소리가 너무 큰가. 약풍으로 바꾸었다. 

탈탈탈탈탈 

너무 더운가. 강풍으로 바꾸었다. 

탈탈탈탈탈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다. 그 옛날처럼 편히 잠을 청하고 싶어서 두 눈을 감고 오기로서 버텼다. 그러나 졸음만이 있을 뿐이다.



엄마의 권유로 만나게 된, 어딘가 힘없어 보이는 박수무당은 걱정스레 말했다. 

"혹시...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거나... 몸이 무겁지는 않은가?" 

입을 열면, 헛구역질이 쏟아질 것 같은 탓에 힘들게 고개만 끄덕였다. 노인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귀신이 들었구먼. 붙어있는 놈도 아니고 들어가 있는 놈이여" 

그는 엄마로부터 받은 나의 생일과 주민등록증 그리고 그 외의 많은 것들을 조합하고 모으고서는 한참 동안 나를 자리에 내버려 두었다. 오래 왔다 갔다 하더니 말했다. 

"오늘 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거든 절대로 열어주어서는 안 되네" 

나는 또다시 고개만을 끄덕거렸다. 머릿속을 꽉 매운 채 일렁이는 어지러움이 심해질 것만 같았다. 

"내 말 잘 듣게나." 

무당박수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자신의 손을 내 팔에 얹었다. 

" 이 귀신이라는 것은, 사람의 것이라네.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지. 다만 모두가 귀신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까닭에, 자신에게 붙어있는 귀신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 뿐이야. 지금까지는 모두가 그래왔어." 

박수무당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나, 요즈음 들어 이 무당촌에 사람들 발길이 끊이질 않는 거 있지.어느 날은, 한 청년이 찾아왔었어. 머리가 어지럽고, 몸덩이가 매사 축 처지는 것이 꼭 귀신에 씌인 것 같다는 거야. 당연히 요것은 귀신이 붙은 것이로다 싶어서, 부적이며, 굿이며, 제사며 안 해본 것이 없었지. 근데, 온갖 짓을 다 해도 귀신이 떨어지지를 않는 거 있지? 내 예상컨대 허주 중의 허주였을 거라고. 나는 괜한 욕심이 부러 그 악귀를 잡겠다고 몇 달을 붙잡아놓고 별별 것들을 다했어. 그건 굿을 하는 사람에게도, 굿을 받는 모두에게도 괴로운 일이지. 어느 날은 내가 막 제사를 하고 돌아오는데, 그 청년이 홀로 마루에 앉아 허공만 바라보는 것을 보았네. 그 앞 음복에는 파리가 쌓여있었네. 파리를 부른 건 귀신이 아니었어. 청년의 의지였지. 청년의 의지가 허공만을 바라보았어. 얼마나 불쌍하던지, 나는 그 청년에게 포기하라고 하였고,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라고 했어. 귀신은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이라고. 내가 괴로워서 두고 볼 수가 없던 것 있지?  그리고 난 그 청년이 이 무당촌을 영영히 떠날 때, 처리되지 않는 귀신 때문에 화를 당할 수 있으니 그날 밤은 누군가 문을 두드려도 절대 열지 말라고 했어. 그런데 그 웃긴 놈이 하는 말이 무언지를 아는가? "회삿일에, 자식일에, 친구일에, 세상일 까지, 이미 하는 일이 짐더미로는 산이고, 몸으로는 어둠인데, 그까짓 허상일 하나 붙어보았자 무엇이 대수이겠습니까." 나는 안심했지. 그래, 어쩌면 그건 귀신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구나. 그 청년을 옥죄었던 건, 세상이었겠구나. 그리고 어제, 그그 청년은 좁은 오피스텔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어. 현장에는 청년의 정장과 속옷 서너벌, 돌아가던 선풍기, 켜져 있던 탁상의 조명 뿐이었네. 그 뿐이었어.

경찰은 청년의 죽음을 자살로 종결지었고, 가족들은 그것이 타살이라고 믿고있다네. 그러나 현장에는 목을 멘 흔적도, 누군가가 침입한 흔적도 없었어. 그건 타살이나 자살이 아니야. 내가 알아. 마지막 목격자로서, 영안실에서 마주한 그의 시체를 마주했을 때, 나는 알 수 있었단 말이야. 비록 핏기는 없었지만, 그의 얼굴에 이전에는 볼 수 없던, 편안히 올라간 입고리가, 온 영혼으로 내게 말했네. 그건 자연사였다고. 그 청년은, 어느 여름날, 선풍기 바람을 쐬며 행복하게, 괴로운 세상에서 자연사를 한거야."

무당촌에는 비가 내렸다. 한옥을 나서는 나를 마중으로 나온 박수무당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혹시, 오늘밤, 누군가 문을 두드리거든 자네의 결정에 따르게나. 어둠을 보려고 해봐. 자네는 더 이상 힘들지 않을걸세. 내 예감이 그래 "


무당촌을 나선 이 후로는 계속이 정신이 좋지 못했다. 발을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망치가 뇌를 때리는 듯하였다. 속은 메스꺼우나 트름도 생리현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액체가 뇌를 채우고 출렁거렸다. 술에 취한 것 마냥 거동이 심심치 않았다. 집에 와서는 바닥에 대자로 뻗어 누웠다. 거실은 어제 놓은 이불과 선풍기로 어질러져 있었다. 전화로는 왜 오늘 결석하였냐는 부장의 메시지들이 가득하다. 박수무당을 만났느냐고 묻는 어머니의 전화가 가득하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냐 묻는 박수무당의 메시지도 가득하다. 저놈의 핸드폰.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바닥에 머리를 맞대었다. 코로는 방안에 내려앉은 장마 공기를 조금이라도 들이마시기 위해 숨을 고르지 않았다. 몸에는 땀들이 맺혔다. 주머니 속에 놓인 핸드폰이 계속 울려댄다. 장마의 빗줄기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스치어 마구잡이로 뒤집어 댄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부디 이 고통을 없애줄 수만 있다면, 잠시만이라도 멈춰 줄 수 있다면 무어래도 좋겠다. 부디. 조금의 잠이라도 잘 수 있게. 파란 밤이 되어서 유리창으로는 비가 더욱 거세게 내리치었다.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또렸하다. 

'똑똑똑' 

잘 못 들은 것이 아니다. 정신을 맑게 해 주었으니 문을 열어달라는 것이렸다. 노크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박수무당의 말을 떠올리며 애써 무시했다. 핸드폰을 확인하려고 할 때 

"오랜만이야, 나 선우인데... 기억하니?" 

숨이 막혔다. 떨리는 목소리로 선우의 이름을 되뇌었다. 어느 옛날 우리의 입가에 차 있던 웃음이 떠올랐다. 선우가 다시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 비가 너무 많이 오고 있어, 개똥벌레도 전부 숨어버렸네...." 

선우의 목소리에는 어느 그리움이 묻혀있었다. 그것은 분명 존재하지 않는 것의 소리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것이 눈을 감으면 나를 짓누르던 무거움과 같은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옛날 선우와 바닥에 누웠을 때 어둠을 가루었던 바람과 같은, 공기 속에서 들려오는 우연의 음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다시 들려올 그 목소리가 문을 열게 할까 두려워 두 귀를 막았다. 그러나 음성은 접힌 귀 너머로 너무나도 자세히 들려온다. 

"오늘은, 계곡에 갔어. 왜, 여름방학 때마다 애들이랑 놀러 갔었던."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눈이 뒤집힌 채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 계곡 말이야, 이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더라. 산들은 다 밀어버린 모양이야. 그때 참 재미있었는데..." 

드러누운 채 거실 전부를 괴롭게 뒹굴었다.. 

선우의 숨기 하나하나가 차게 목을 타고 내렸다.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신음 소리만 입 밖으로 새었다.

"왜, 우리 예전에는 개똥벌레 모아다가 조명으로도 쓰고, 그랬는데. 생각나?" 

숨을 쉴 수가 없다. 목 주변을 더듬으며 몸부림을 쳤다. 발길질을 하자 유리 장식품들 탁자에서 쏟아졌다. 또다시 발길질을 하자 거실 스탠드가 쓰러졌다. 조명등이 깨진 유리 조각들에 비추어 빛들을 반사해 내었다. 

"그곳에 갔는데 갑자기 너가 생각난 거야. 너나 한번 보려고 들렀어. 그냥 어떻게 지내나 하고 " 

무수한 노란빛이 눈알을 뚫고 뇌 속을 훑어 내렸다. 두 눈을 쥐어 잡고 경련하였다. 

"예전에 우리 밤마다 뭐 했는지 기억나?" 

다리를 베베 꼬아대며 머리를 내저었다. 

"나는 매일 바닥에 이불 깔고 누우면 여름 생각이 나" 

유릿조각을 집어 이불더미를 향해 미친 듯이 휘둘렀다. 천 조각들이 널브러졌다. 

"시원한 바람을 쐬면은, 그게 우리의 여름밤이었어." 

나는 머리 밑으로 놓인 선풍기의 전선을 움켜쥐고서는 팔이 끊어질 듯 끌어당기며 신음 소리를 내질렀다.

"나... 우리가 너무 보고 싶어...." 

창문으로 밤비가 쏟아붇는다. 그 빗방울이 하나하나 떨어져 내릴 때마다 몸이 구타당하듯 마구잡이로 쑤셔왔다. 나는 팔을 막무가내로 휘둘렀다. 핸드폰의 진동음이 느껴진다. 핸드폰을 주먹으로 으스트렸다. 천 조가리와 깨진 유리, 엉켜버린 선풍기 전선. 부서진 물건들. 

한 참을 어질러진 집안에서 몸을 베베 꼬아가며 울음을 삼켰다. 그러다가는 어느새 비에 젖은 채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릴 선우가 그려졌다. 나는 감히 미친 듯한 빗줄기 속 두려움에 떨고 있을 선우를 내버릴 수 없었다. 집 밖에는 선우가 있다. 홀로 나를 기다리는 선우는 지금 젖어가고 있다. 숨을 헐떡이며 막힌 목소리로 울먹였다. "선우야 - 선우야 -". 선우의 말이 들렸다. 

"우리가,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쓸쓸한 선우의 한마디에 결심이 섰다. 나는 코 앞의 문고리를 잡기 위해 일어섰으나, 이내 고꾸라졌다. 뒤엉켜버린 선풍기의 전선이 마구잡이로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눈물을 흘리며 애꿎은 전선을 연속이 붙잡고 흔들었다. 선우가 더 이상 침묵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했다. 그러나 가슴속에서 나오는 것이 울음뿐이랴 호흡 조차 할 수가 없었다. 

"너는 나에게 더 이상 없을지 모르겠지만 - " 

선우의 말에는 울음이 묻어있다. 유리창이 점점 하얗게 밝아왔다. 나는 아침이 밝아와서는 아니 된다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너가 나를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거야."

속으로 '안돼, 안돼' 수십 번이고 외쳤으나 끙끙거리는 소리만이 거실을 매웠다. 선우의 발목 을 대신 선풍기 전선에 묻힌 나의 발목을 비틀었다. 선우의 발걸음이 완전히 사그라졌을 때, 뇌 속을 가득 채웠던 액체가, 씁쓸하고도 뜨겁게 타오르는 그것들이 구토로 터져 나왔다. 머리가 차츰 개운해지고, 몸을 옮겨 매던 것이 풀어졌다. 나는 그제야 전선을 헤쳐서 엉금엉금 현관으로 기어나갈 수 있었다. 현관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간 밤 비에 바닥이 젖어있었다. 오직 한 곳만이 옹졸한 원을 그린 채 그 색이 밝다. 선우였다. 귀신이 아니었어. 선우가 나를 기다렸구나. 나는 그곳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맑은 정신이 자꾸만 선우를 떠올리게 한다. 다 잊어버리고서는 자고 싶다. 피곤이라도 좋았다. 이 괴로운 소리를 떨쳐내야만 일을 하고, 전화를 하고, 자식 노릇을 할 수 있다. 선우의 이명이 나를 휘감는다. 

선우의 목소리가 영원할 것처럼 뇌리에 머문다. 

'나는 너가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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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마지막 소설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씁쓸하다. 그것이 무슨 이야기든지 간에 끝난다는 건 씁쓸하다. 왕자와 공주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통속적이고 관념적인 여느 이야기 마저 그렇다. 처음 글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꺠달은건, 황순원 작가님 덕분이었다. 초등학생이었을 때를 보고 내 영혼이 젖어버림을 느꼈다. 이 후 씨의 작품을 열렬히 사모하게 되었다. '막은 내렸는데', '눈', '우산을 접으며' '땅울림'등등의 것들을 읽으며 나는 곧 소설이 사람의 영혼을 담아낼 수 있는 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멜라씨의 소설을 읽을 때도 그러했다. 와 , 와 을 읽을 떄, 그곳에서 내가 만난 것은 나의 어떠한 깊은 심장이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 것은 김현 평론가의 글을 읽으면서이다. 와 을 읽으며, 나도 이런 평론가의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게 소설로 방향을 튼 것은 아마 권여선 작가의 책을 읽고나서 일 거다. 어떤 연상작용이었는지 몰라도 나의 비평은 소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솔직히 하자면 태어나서 세계문학전집같은 걸 눈에 담아본 적 없다. 누군가 톨스토이와 카뮈와 카프카를 이야기 할 때, 나의 좁은 식견으로는, 그들의 무거운 글들을 잡아서 소화해낼 마음이 서지 않았고,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폴 드 만과 데리다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외국 작가였다. 또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어디 가서 부끄럽게도, 하고 있는 일이 없습니다, 라는 말을 꺼내기 싫어서, 억지로 토해내듯, 글 써요, 하는 말을 내뱉을 때, 난 수치심을 느꼈다.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런 내가 부끄러웠다. 그러면 주변에서 대치동 강남에서 학원받으며 과학고 간 친구들은 콧방귀를 뀌고, 누군가는 한심하게 쳐다본다. 초등학교 떄 별볼일 없던 친구가 예고의 문예창작헉과에 들어간 것을 보면, 알 수 없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너도 글 써? 나도 글 쓰는데...하고 말하면 듣는 말이, 좋아하는 작가 누구야? 카프카? 톨스토이? 글 보여주면 좋겠다...등의 것들이다. 난 사실 정지용과 황순원과 김멜라와 권여선을 사랑한다, 라고 말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어떤 연상작용이었는지 모른다. 그 곳에서 뽐내기 위해 아는 척 했다. 톨스토아보단 도스토예프스키지 않아? 사실 난 그 누구의 작품도 읽어본 적 없다. 이건 고해성사가 아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하고 있는 말의 의중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당신들은 알까? 마지막으로 쓴 글은, 작년 11월에 글틴에 기고한 다. 그건 내 전부다. 나는 그 글을 쓰며 나에게 글이란 무엇인지 알았고, 이 후로는 글을 쓸 수 없었다. 내 모든 걸 쏟아부었다. 이 후 알게 된 사실은, 결국 글이란 세상이란 거다. 문장이란 것을 조립, 배치하며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재미다. 근데 그 세상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가장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었다. 결국 내 세상은 어떠한 욕망의 발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 조립된 세상의 이면에는, 그 어떤 계기나 동력도 존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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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21
가을 소나타

디귿씨는 요몇칠 동안 인력 사무서를 전전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모 기업에서 사무부장을 지냈다는 디귿씨는, 회사 내부평가에서 “당신은 이 회사에 무얼해주실수 있나요?”라는 대표이사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내부평가 다음날, 디귿씨의 책상에는 각종서류들과 필기구, 타자기 등이 대용량 상자에 담긴 채, 한쪽 구석으로 치우쳐져 있었습니다. 지저분했던 자신의 자리에는 오랜 직장동료 임 차장이 앉아있었지요. 임차장은 대용량 상자를 아무렇지 않게 디귿씨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날 디귿씨는 해고통보를 받았습니다. 회사를 위하지 않은 사람은 필요없으니, 이제 그만 퇴직하시라는 대표이사의 통지서와 함께 말이지요. 집에 돌아가는 길, ‘당신은 아무래도 회사를 위하지 않고 있군요.’라는 대표이사의 말이 자꾸만 눈에 걸렸습니다. 30년 동안 뼈빠지게 오로지 한 직장에 몸담아온 디귿씨는, 자신이 버텨원 세월들이 부정당한 것만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이 회사에 무얼 해주실 수있나요아무리 그 질문을 상기시켜본다해도 디귿씨는 답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이 질문이 임 차장에게 돌아갔다면 임차장은 답 할 수 있었을까요? 이사 본인조차 이 질문에 답은 하지 못할 것 같은데. 나는 그냥 돈을 위해 회사를 다닌 것 뿐인데. 디귿씨는 잠시 상심했습니다. 이제 자녀들의 대학비와 식비, 자취비, 아내의 용돈,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월세와 세금은 어떡하나요. 그는 그 모든 것을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가족들에게는 해고통보를 차마 말할 수 없어서 비밀로 부치던 참이었지요. 해고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디귿씨는 사람들이 즐비한 인력 사무소에 들어섰습니다. 형광등이 나란히 마주 앉은 사람들 위로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디귿씨는 형광등의 끝자락에서 처음으로 놓여진 등에 다다를 때까지 오래간 기다렸지요. 그렇게 해가 저무는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상담원에게 닿을 수 있었습니다.막노동이라도 할 참이니 아무거나 주시오. 디귿씨의 말에 상담원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제 환갑을 바라보시는 분이니 막노동도 힘들 것 같다고. 애 쓰지 마시고 집에서 편히 쉬시라고. 디귿씨는 억울했습니다. 무릇 인간이라면 늙기 마련인데. 나이를 먹는다는게 디귿씨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이 녀석들은 꼭 디귿씨를 노인 취급입니다. 디귿씨는 이만 나가보라는 상담원에게 자신이 앉아있던 접이식 의자를 집어던졌습니다. 홧김은 아닙니다. 눈에는 타오르는건 분노가 아니라 억울한 울음이 일그러져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모두 디귿씨를 쳐다봅니다. 이 것을 시작으로 벌써 삼주 동안 인력 사무소만 드나들었습니다. ***이른새벽부터 디귿씨는 정장차림으로 버스에 몸을 욱여 넣었습니다. 아내는 아직도 자신이 사무부장을 지내는 줄로만 알아서, 입으나 마나인 정장을 답답하게 걸치고 있습니다 . 요 몇달간은 퇴직금으로 여차저차 월급을 메꾸었다지만, 이제 퇴직금도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버스 창문으로는 여러 직장인들이 스칩니다. 디귿씨는 ‘회사를 위해 무얼해주실 수 있나요’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자신 스스로가

  • 화자
  • 2024-01-10
검은세상, 하얀 겨울

세연에게 가고 있다. 겨울이었지만 눈은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눈이 내리지 않았기에 노동자들은 폭설로 인해 공사를 잠정중단하거나, 일당을 미지급받을 일도 없었다. 그런 일이 없었기에 하루에 붙들릴 일도 없다. 서울역 노숙자들은 눈 오는 날보다 따수운, 그러나 여전히 찬 겨울을 감사하며 보낼 수 있다. 늘 막히는 한강대로도, 눈으로 인해 교통체증을 빚을 일이 없었고, 택시나 버스가 운행을 중단하는 일도 없다. 눈을 녹이기 위해 도로에 뿌려질 염화칼슘이 세연에게 가기를 괴로워하는 나를 설득하듯,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발믿서 오독오독 비명을 지르며 부숴질 일도 없었고, 그게 신경은 좀 쓰이겠지만, 나를 멈춰세울 일이 없었다. 눈사람을 만들려고, 또는 어느 벽 담장에 메달린, 산성비가 굳게 되어버린 고드름을 핥으려 안달난 아이들만 아니었다면, 눈은 우리를 막는 병폐로 존재할 뿐이었다. 아이들은 눈이 얼마나 많은 어른들을 괴롭히는, 비효율적인 자연재해인지 알 턱이 없다. 그들은 교통체증으로 피해 볼 일이 없고, 노동을 할 일도 없으며, 노숙을 할 일은 더욱이 없었다. 누군가를 괴롭게 만나러 갈 일도 없다. 아이들은 그것을 모르기에, 여전히 추운 겨울을 피해 집으로 들어가, 만화영화를 보다가 힐끔, 창 밖을 확인하며 눈이 내리길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찬 눈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아이들은 유리창 앞에 서서, 언젠가는 눈이 내릴 거라는 희망을 지닌다. 어른들은 출근하기 전 창 밖을 보며 눈이 내리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지닌다. 교통체증으로 직장에 늦을지는 않을지, 날씨가 추워서 하루가 고되지는 않을지 걱정 하며, 눈이 내리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을 지닌다. 나는 눈이 내리지 않기를 바란다. 눈이 내리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을 사람은 나다. 나는 구질구질한 어른들의 세계에 살아서, 눈이 내리고 나버리면, 나를 가로막을 하얀 얼음, 그 모든 것들 때문에 도저히 세연에게 갈 수 없을거다. 세연은 눈이 내리길 바라고 있을테지. 그녀에게는 나를 만나는 것 보다 눈이 내리는 것이 더욱 중요할까.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적어도 하나를 알고있다. 이 세상은, 겨우 동심 하나로 어른들의 세상을 덮어 버리기엔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세상이다. 이 세상은, 그런 세상이다. ***세연에게로 가고있다. 세연을 만난 건, 눈 내리지 않는 육년 전 겨울이었다. 당시 초임 영화 평론가였던 나는, 삼류 독립영화 감독들을 취재하기 바빴고, 광화문에서 한 신인 감독이 저예산 영화를 찍고 있다고 해서, 잡지사는 촬영지 근처 살고 있던 내게 신인감독 인터뷰를 맞겼다. 영화촬영장은 굉장히 지저분했고 스태프도 대여섯명 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감독이라는 작자는 꽤 단아하고 청순한 여인이었는데, 어림잡아 이십대 중반, 나와 엇비슷한 또래 같아 보였다.안녕하세요, 신인감독 이세연입니다.그녀는,기운이 밝고 흔쾌해서 늘 깐깐하게 굴던 여타 중견감독보다 훨씬 좋았고, 질문에 답을 빙 돌려대서 말하는 어느 예술감독에 비해 시원시원한 답들과 기상천외한 담론들을 꺼내 들어서

  • 화자
  • 202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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