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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과 인간

  • 작성자 ㅇㅎㅇ
  • 작성일 2022-11-10
  • 조회수 334

추운 겨울이 수백 년간 이 땅 위에 군림하고 있다. 모든 생명을 얼려 죽이는 이 길고도 긴 겨울은 사람들의 신앙, 즉 두려움과 사랑이 공존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먹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 사람들의 믿음이 변치 않는 한 이 겨울은 영속할 것이다. 그 폭정에 온 인민은 고통받으면서 제각기 만의 방식으로 상처 입은 삶을 연명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겨울에 그저 고통받으며 생을 연명하기도 하고, 어떤 자들은 이 겨울을 찬양하며,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하고, 누군가는 헛되이 저항하거나 그도 아니면 그저 삶을 포기하거나 신에게 빌어 이 겨울이 끝나기를 기원한다.

연명하는 자들과 착취하는 자들은 하나로 연결 지어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의 집단을 이루며 겨울을 숭배한다. 강 위에 얼어붙은 얼음과 눈을 이 겨울의 상징물로 여기며, 그 속에서 생명들의 얼어 죽어감을 찬양하는 것이다. 특히 착취자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겨울은 인간 과잉의 재앙을 해결해줄 유일한 방법이며, 겨울의 존재는 인류의 생존에 필수 불가결하다. 이 구원과도 같은 자연법칙 속에서 순응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다른 인민들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다수 인민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거부하며 그들의 언어 속의 저열함을 대개 저들의 본성 문제로 치부한다. 그러나 그런 분석은 틀렸다. 그들 역시도 자신들이 내뱉는 말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겨울의 항구적 존속에 해가 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오히려 생명을 사랑한다. 그들은 강 위의 얼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강 아래를 흐르는 물과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물고기를 진정으로 추구한다. 그들이 얼음을 캐내어 그것을 조각해내어 경애를 자아내는 신의 형상을 빚어낸다는 둥, 그분을 기리는 웅대한 첨탑을 세운다는 등의 짓들이 실상은 그 얼음을 캐고 난 자리에서 신선한 물과 고기를 잡아들이려는 속셈인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 겨울이 불러일으키는 죽음의 심상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겨울의 추위와 황폐함은 치명적인 것이고, 그들은 거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들의 휘하에 있는 자들을 부려 먹으며 그들이 구해오는 땔감과 식량을 그들의 품에서 앗아가서는 그걸로 불을 때워 자신들의 몸을 녹이고, 배를 불린다. 즉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또 자신들의 수족이 발하는 죽음에 가까워지는 순간 더욱 타오르는 그 생명의 열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즉 그들의 말은 모순적이고, 더러운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실제로는 믿음 없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아래에서 착취당하는 수많은 이들 역시 그들의 모순을 감각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옭아매는 그들의 지배를 파괴할 생각은 품지 못한다. 그들이 그토록 떠들어대는 그 하찮은 논리에 자신들도 모르게 지적으로 수용하게 되면서, 내적으로 부조화 상태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생활과 그들 외부의 더욱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 죽어가는 보다 비참한 생을 비교하면서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부조화를 겪는다. 그것이 바로 착취자들이 피착취자들에게 바라는 궁극적인 상태이다. 이런 환경적 상황과 결부한 그와 같은 내적 혼돈에서 비로소 진정한 신앙이 생긴다. 그들은 그런 물리적, 정신적 불안정 상태에서 자신들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모순에 대한 분노를 족쇄를 부수는 데로 연결 짓지 못하고 그 분노의 근본적인 원인에 자신들의 생명을 바칠 뿐이다.

그러다 어떤 이유로 그 분노가 한순간 폭발적으로 타오르는 경우가 있다. 그들의 분노는 이 역사라는 것의 근간에 자리 잡고 있는 환경의 모순에 거대한 일련의 흐름으로 볼 때 아주 사소한 듯한 우연성이 가해지면서 모든 것을 불살라버릴 듯한 화광을 자아낸다. 그런 분노의 배후에는 바로 저항자들이 있다. 그들은 육신과 정신에 모두 족쇄를 찬 인민들이 내면에 감춘, 혹은 잃어버린 힘을 한순간 끌어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그렇게 되찾은 힘이 인민들 안의 어떤 혼돈에 의해 와해되거나 변곡되지 않도록 하며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끌어내는 지도적 역할을 수행한다. 고로 모든 저항자는 모든 착취자의 적이고, 착취자들은 언제나 저항자들의 색출에 열과 성을 다하나 그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피착취자의 일원, 심지어는 착취자 자신들 중 누군가이기 때문이다. 즉 저항자란 본질적으로 다른 집단에 종속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집단 전체의 절멸을 각오하지 않는 한, 그들만을 색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더군다나 착취자란 존재는 타 집단을 매개로 해야만 존재가 가능하기에 저항자들을 소거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저항자들의 이러한 특성은 그들의 약점이기도 하다. 그들 역시도 그 속의 일원인 만큼, 그 안에 내재한 가치, 믿음에 종속되기 쉽다. 그런 관계로 그들은 대게 자연 질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인민들에게 자연 현상으로서의 겨울을 이해시킬 수 없다. 겨울은 분명 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시키지 못하며 겨울의 존재를 부정하고 만다. 하지만 존재의 부정은 그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의 시도는 새로운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로 전락한다.

한편 어떤 이들은 이 겨울의 한복판에서 단지 삶을 포기하기 위해 숨어 살기도 한다. 아주 깊은 굴을 파고, 그 안에서 자신의 몸을 숨긴 채, 그곳을 자신의 집으로 삼으며 살다가, 죽으면 그곳을 무덤으로 삼아 묻힌다. 그렇기에 혹자는 그들에 대해 언급할 가치를 못 느끼기도 한다. 그들은 단지 세상이 싫어서 도피할 뿐이며, 그러한 도피는 그저 현재의 환경과 그들 자신의 원자적 성격이 결합한, 하나의 병리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결코 세상과 유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이유인즉슨, 그들은 세상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착취와 피착취, 그리고 그를 용이하게 하는 질서가 철저하게 자리 잡은 집단 내에서도 그에 부적응하는 개인들이란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앞서 말한 그러한 집단은 부적응자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먼저 부적응자는 기본적으로 착취할 이익을 바로 생산해낼 수 없기 때문이며, 특히 이런 겨울이라는 환경에서는 착취자는 더더욱 즉각적인 생산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고로 부적합하다고 낙인찍힌 자들은 제 몸의 안위를 위해 직접 굴을 파고 들어가든가 아니면

이미 형성된 굴속으로 들어갈 것을 요구받는데, 그것이 세상이 그들에게서 취하는 이익이다. 집단은 먼저 그러한 자에게 들어갈 최소한의 재생산을 위한 노력과 자원을 아껴 착취분을 늘릴 수 있고, 또한 다른 피착취자들을 훈계하는 예시로 들며 그들의 생산성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굴속에서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굴을 천착한다. 눈과 바람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먹이를 찾으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굴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이 하얀 세상의 주위에 널린 수많은 구멍이 바로 그들이 이 세상에 남기고 간 흔적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도자들이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위에서 말한 자들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충분히 겨울의 진실과 착취자들의 본질을 간파해낼 수 있고, 이미 간파했을지도 모르며, 조금의 행동만 취하더라도 인민들의 정신을 일깨우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럴 재주가 없다. 그들은 ‘겨울이 지나가기를 빌면 언젠가 지나가리라.’라는 공상과 같은 믿음을 지닌 채, 자신들의 믿음에 천착한다. ‘겨울이 지나가길 믿는 마음’이란 것 자체가 겨울을 유지시키는 수단이란 것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착취자들과 연대하고 있다. 그들이 제공하는 떡고물에 취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들 역시도 허황한 믿음을 체화한 상태인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들의 본질이 착취자이거나 정말 순수한 내면을 지닌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가 어찌 되든 간에, 그들은 착취자들의 부역자나 다름없고, 이 겨울의 동반자나 마찬가지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충분히 능력을 갖추고 있다. 진실을 깨닫고 진실을 밝힐 능력이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일상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검열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혹시나 자신의 기도문이나 설교문 하나하나에 무의식적으로 진실을 밝힐 만한 요소가 들어있는지 없는지를 찾고, 반성한다. 그들은 착취자들의 명령으로 피착취자들이 동원돼서 건립된 거대한 얼음 구조물 속에서 얼음 단상에 올라 피착취자들에게 설교하고 기도를 강요한다. 그들이 내려다보는 것은 오로지 피착취자 뿐이다. 착취자들은 애초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거나, 그들보다 위의 자리에 가 있는다. 기도의 방향은 사실상 착취자들인 것이다. 실로 충직한 시녀들이라 할 수 있겠다.

오늘도 겨울바람은 매섭게 불어닥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 겨울바람에서 고통을 받다 견디지 못해 숨졌으며, 여전히 많은 이들이 고난 속에서 생을 연명하고 있다. 이 겨울의 끝은 결국 모든 생명의 소거일 것이다. 겨울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다. 너무 오랜 시간 이 세상에 군림했다. 언제든 끝나야 한다.

오늘도 이 동토에는 한 남자가 씨를 심고, 물을 주고 있다. 그는 기다린다. 이 씨앗은 지금은 너무나 여려서 땅속 깊이 뿌리를 뻗고 대지 위로 새싹을 내어선 힘차게 하늘 끝까지 솟아오를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실현될 것임을. 그것은 단순한 희망도, 간절함에서 피어난 열망도 아니다. 이것은 순환이라는 질서에 대한 이해에서 발아하는 확신이다. 이 씨앗이 열매를 맺으면 그는 또다시 새로운 씨앗을 심고, 새로이 물을 주며, 새로운 싹을 기다릴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리 말한다. ‘이 추운 땅에서 씨앗을 심으려는 건 헛수고이다. 그 씨앗이 무엇인 줄 알고 심는가? 설령 자라난다 해도 금방 얼어 죽어버릴 것이다.’ 또 누구는 이렇게 말한다. ‘나무가 자란다고 해도, 이 땅에 생명의 가능성을 보인다고 해도, 금방 죽어버린다면 그 가능성이 불어넣은 희망은 금세 시들어버릴 것이다. 차라리 그 한 나무를 따뜻하게 하고, 물을 줘서 오래 가꾸지, 왜 한 번의 요행일지도 모르는 성공에 취해 그 노력을 반복하려는가?’ 물론 새로이 씨를 심고 보살피는 사이에 나무는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또 심으면 된다. 무엇이 자랄 것이진 모른다. 아무 상관 없다. 이 땅의 생명의 가능성을 온 인민에게 보일 수 있다면, 그것이 죽었든, 살았든의 여부, 그것의 외적 모습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이 선보이는 생명력이 전 인민의 내적 전진을 끌어낼 수 있다면 되는 것이다. 무의미한 시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증명하면 된다. 천 번, 만 번의 시도가 실패한다면 만 한 번의 시도를 시작하면 된다. 귀납적으로 그릇됨 없는 것이다. 한 번의 시도가 성공한다면 이후에도 그것은 성공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틀린 가설이 된다. 그렇기에 그는 괴로움이 없다. 슬픔 역시 없다. 그는 오늘도 정성을 다한다. 땅에서는 누구도 감지하지 못할 미세한 진동이 발생한다.

ㅇㅎ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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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여정

‘바다에 빠진 아이는 우는 법이 없다. 우는 법조차 잊어버린 채, 그저 한없이 빠져선 귀신이 되어버린다.’ 그는 항상 이 구절에서 막혔다. 그의 능력상으로도 염치의 측면에서도 그는 이 구절의 뒷부분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아예 지워버릴 수는 결코 없었다. 이걸 지우는 순간, 자신이 진정으로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버려버리게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저 두 문장과 씨름했으나 이는 마치 수백 년 동안 깊이 뿌리박은 상서로운 거목을 두 손으로 뽑아서 엎어뜨리려는 시도와 같았다.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렇게 몇 개월을 허송세월했다. 오랜만에 그가 달력을 보았을 때, 그날은 일주년 전날이었다. 그는 아직 동이 트기 전인 새벽에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타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한 치도 피곤이 들어설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길, 어둠이 가득한 길을 작은 전조등 한 쌍이 가르며 나아갔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바다의 동틀 무렵은 언제나 슬픈 정서가 요동치게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서늘한 비수처럼 스치는 해풍이 모래사장을 덮고, 해송림을 스치며 인간의 땅으로 몰려드는 것이 마치 저승에서부터 영혼들이 그리운 고향, 그리운 사람, 그리운 노래를 찾아 돌아오려는 것 같았다. 그는 그곳에서 마치 하나의 이정표처럼 서 있었다. 개 중 하나가 자신을 알아보고, 자신의 품에 안기길 바라면서, 이윽고 눈을 떠보면 그 어린 얼굴이 이 품 안에서 고요히 들숨과 날숨을 쉬며 잠들어있기를, 그런 가망 없는 희망을 품으며 그의 다리는 부동을 유지했다. 얼마간 바람이 불고 곧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이 두 손에 그 한미한 숨이 꿈틀대는 것 같다고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보며 그렇게 느꼈다. 그리곤 다시 눈을 돌려 끝 모를 바다를 쳐다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벅차오를 성싶던 슬픔이 거품처럼 사라졌다. 햇살이 너무 눈에 부신 까닭이었다. 저 태양은 그날을 목도하였을 것이며, 저 뜨거운 얼굴에는 그날의 기억이 결코 지워지지 않은 채 생생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끊임없이 세상을 돌고 돌아 빛을 비추고 또 거둘 것이다. 그런 섬뜩할 정도의 무상함에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봄에는 시간을 내서 동네의 하천을 거닐면서 온갖 예쁜 꽃들이 만개한 풍경을 즐기고 여름에는 날을 잡아서 바다와 깊은 산 속 계곡을 찾으며 싱그러움을 만끽하고 가을에는 멀리까지 나서 단풍으로 유명한 산들을 돌아보며 자연이 그려낸 울긋불긋한 수채화를 감상하고 겨울이 오면 산 높은 곳에 올라서 온 대지가 하얗게 덮인 모습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는 것처럼, 자연을 사랑할 수 없었다. 어느덧 해가 자리를 잡고, 하늘에서 어두운 기운과 붉은 기운이 자취를 감췄다.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는 이제 막 7시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는 막 성당에 뛰어가는 젊은이를 보았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문득 자신의 팔에 차고 있던 묵주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 ㅇㅎㅇ
  • 2022-11-04
장미와 십자가

별이 밤하늘에 가득 피어오른 밤이었다. 그 날에 어느 청년은 사랑을 고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의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창가에서 마냥 창밖만을 내다보았다. 차마 당당히 이야기할 용기가,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그런 사나이다운 고백을 할 용기가 없었다. 그런 그였기에, 그는 자신이 창가로 들어오는 별빛들을 볼 낯이 없다고 생각했다. 창가에 놓인 화분에 심어진 붉은 장미 한 송이의 꽃잎에 앉은 달빛이 이슬처럼 흘러내렸다. 그는 전부 잊고 싶었다. 잠이 오지 않지만, 꿋꿋이도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잠 따위는 자고 싶지 않다는 게 현재로선 그의 생각이었다. 머리에서부터 시작된 과부하가 온 몸으로 퍼져나가며, 그는 몸이 뜨거워짐에 차마 몸을 가만히 이불로 감쌀 수가 없어서 이불을 걷어차고 계속 몸을 뒤척였다. 사랑. 언제나 사랑이 문제였다. 그는, 순간,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지고,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얼마나 오래 전인지도 이제는 까먹었건만, 그 순간의 모독만은, 주위의 시선만은 선명하게 그에게 박혀서 그를 괴롭혔다. 유년의 상처, 이제는 흉터가 되었지만, 여전히 쓰라리긴 매한가지였다. 그는 다시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가, 창틀에 팔을 걸친 채, 몸을 기울여 창문 밖으로 목을 빼서 바깥 풍경을 살피었다. 그가 바라보는 풍경은 모든 게 작아 보였다. 마치 인간이 개미를 바라보는 구도가, 그에게는 주위 풍경을, 인간 세상을 바라보는 구도였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사는 공간에서 이렇게 내려다보면, 그저 멋진 풍경에 감탄을 자아내거나, 어쩌면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섰다는 근거 없는 오만함이 차오르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에겐 이 모든 게 헛되었다. 그에게 이 풍경은 라푼젤이 자신이 갇힌 탑에서 내려다보는 풍경과 같았다. 내려가고 싶다. 그것은 그날 이후로 상실한 그의 권리이자, 그날부터 여태껏 간절히 바라온 그의 권리였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죄는 사면되고 권리는 회복될 수 있으나, 그의 것은 결코 그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의 죄는 그의 탄생 자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 죄를 심판하는 것은 이 세상의, 적어도 이 사회의 전원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지엄한 만인의 사법부의 재판소에서 피고인석에 앉아있는 채로, 이미 유죄는 정해진 채, 그 처벌의 강도만을 저울질할 차례만 남은 상황에서,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 최대한으로 거세하고 검열하여 그들의 자비를 구해야만 하는 처지인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는 차라리 우리에 갇힌 한 마리의 매우 특이하고 이색적인 동물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 옛날에 사람마저도 동물원에 가둬서 전시하였던 오랜 전통이 오늘까지도 재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낫게 느껴질까? 찬바람이 불어와서, 공기가 촉촉하여서, 뭐 그러한 잡다한 이유들로 그는 밖이 차갑게 느껴졌다. 창가에 놓인 화분에서 예쁜 자태를 뽐내는 붉은 장미도 추운지 몸을 떨었다. 하늘에 있는 별들도 몸이

  • ㅇㅎㅇ
  • 2022-03-11
그들을 기리며

2022년 3월 2일의 일입니다. 때는 오전 5시 40분쯤, 아마 화이트칼라 계층의 평범한 노동자라면, 여전히 잠을 자고 있거나, 혹여나 근무지까지의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슬슬 일어나서 출근을 준비하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당진에 소재한 H사의 제철소 제1 냉연공장의 도금 포트, ‘철판 등 코팅을 위해 바르는 고체 상태 도금제를 액체로 만들기 위해 가열하는 데 쓰이는 설비’로 도금제로 쓰기 위해 뜨겁게 끓고 있는 400도가 넘는 아연이 담긴 그 용기 안에선, 발견되어선 안 되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사람이었습니다. 50대가 넘는 한 가장이, 도금 과정에서 생기는 드로스, 용해된 금속이 산소와 결합하여, 표면과 바닥에 생기는 잔여물로, 찌꺼기, 혹은 줄여서 찌끼라고 불리는 것을 제거하던 한 명의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2022년 3월 5일의 일입니다. 때는 오후 1시 40분이고, 위치는 동일 업체의 예산 공장입니다. 원래라면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이거나 그 직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마저도 보내지 못한 이가 있습니다. 추락하는 1톤의 금형, 그 바로 아래에는, 역시나 있어선 안 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역시도 50대의 가장, 해당 업체의 2차 하청업체에서 파견된, 해당 금형을 수리하던 노동자였습니다. 똑같은 날의 오전 7시 20분 즈음에는, 포항에서는, 어느 공과대학교의 캠퍼스 건축 공사장의 골조 2층에서 어느 60대 건설노동자가 콘크리트 잔재물을 정리하는 작업 중 추락하여, 끝내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이 죽음의 너머에서 서 있는, 그들을 욕할 생각까지는 없습니다. 아니, 사실은 욕하고 싶습니다. 어째서 이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서, 죽음을 무릅써야만 하냐고. 사실,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줄타기해야 하는 일은 사실 모든 인간이 겪는 일로, 삶과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 거의 유일하게 평등한 것입니다. 아니, 정정하겠습니다. 이었습니다. 직접적인 죽음에 처할 수 있는 순간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의 불평등과 이러한 현실에 대해 외치는, 그러고 그런 목소리가 세상에 전달되는 정도의 불평등. 이러한 불평등들을 단순히 선택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선택과 자유는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 서 있고, 동등한 조건을 지니고 있을 때, 비로소 성립될 수 있을 겁니다. 조건이 다르고, 위치와 환경이 다르다면, 그 하나하나의 차이들은 매 순간 각기 다른 변수가 되어서, 개인의 삶에 개입할 터이고, 우리는 그런 수많은 변수와 그 여파로 인해 파생되는 추가 변수들을 고려할 지적 능력이란 없거나, 설령 존재한다고 할지언정 부족합니다. 설령 고려할 수 있다고 해도, 어떤 조건들은 무조건적입니다. 경제적 조건과 사회적으로 절대적인 지위를 가진 인식, 이른바 헤게모니라고 불리는 것들, 사회적으로 행동을 장려하고, 규제하는 관습과 법제, 물론 이 역시 헤게모니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실제 구속력이 있는 수단으로, 이러한 요소들의 개입에 개인이 저항하기란 힘든 일입니다. 특히 현대의 행정부 비대화 국가에서는 더더욱 말입니다. 그렇기에 현실에선 개인의

  • ㅇㅎㅇ
  • 2022-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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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지현

    ㅇㅎㅇ님 안녕하세요. 추운 겨울이 수백 년이나 지속되는 풍경이 잘 그려진 글이라고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추위를 싫어하는 저에게는 너무 무서운 세상이었거든요. 풍경에 대한 묘사나 그 안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문화는 잘 설명되어있지만 사건이 되는 이야기가 부족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마 새로운 세계관을 표현할 때 설명이 가장 편리한 방법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혹시 퇴고를 하신다면 한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보시면 어떨까요? 그럼 다음에도 풍경이 그려지는 새로운 세계의 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2022-12-08 19:05:03
    송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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