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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여정

  • 작성자 ㅇㅎㅇ
  • 작성일 2022-11-04
  • 조회수 323

‘바다에 빠진 아이는 우는 법이 없다. 우는 법조차 잊어버린 채, 그저 한없이 빠져선 귀신이 되어버린다.’

그는 항상 이 구절에서 막혔다. 그의 능력상으로도 염치의 측면에서도 그는 이 구절의 뒷부분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아예 지워버릴 수는 결코 없었다. 이걸 지우는 순간, 자신이 진정으로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버려버리게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저 두 문장과 씨름했으나 이는 마치 수백 년 동안 깊이 뿌리박은 상서로운 거목을 두 손으로 뽑아서 엎어뜨리려는 시도와 같았다.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렇게 몇 개월을 허송세월했다. 오랜만에 그가 달력을 보았을 때, 그날은 일주년 전날이었다.

그는 아직 동이 트기 전인 새벽에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타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한 치도 피곤이 들어설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길, 어둠이 가득한 길을 작은 전조등 한 쌍이 가르며 나아갔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바다의 동틀 무렵은 언제나 슬픈 정서가 요동치게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서늘한 비수처럼 스치는 해풍이 모래사장을 덮고, 해송림을 스치며 인간의 땅으로 몰려드는 것이 마치 저승에서부터 영혼들이 그리운 고향, 그리운 사람, 그리운 노래를 찾아 돌아오려는 것 같았다. 그는 그곳에서 마치 하나의 이정표처럼 서 있었다. 개 중 하나가 자신을 알아보고, 자신의 품에 안기길 바라면서, 이윽고 눈을 떠보면 그 어린 얼굴이 이 품 안에서 고요히 들숨과 날숨을 쉬며 잠들어있기를, 그런 가망 없는 희망을 품으며 그의 다리는 부동을 유지했다. 얼마간 바람이 불고 곧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이 두 손에 그 한미한 숨이 꿈틀대는 것 같다고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보며 그렇게 느꼈다. 그리곤 다시 눈을 돌려 끝 모를 바다를 쳐다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벅차오를 성싶던 슬픔이 거품처럼 사라졌다. 햇살이 너무 눈에 부신 까닭이었다. 저 태양은 그날을 목도하였을 것이며, 저 뜨거운 얼굴에는 그날의 기억이 결코 지워지지 않은 채 생생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끊임없이 세상을 돌고 돌아 빛을 비추고 또 거둘 것이다. 그런 섬뜩할 정도의 무상함에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봄에는 시간을 내서 동네의 하천을 거닐면서 온갖 예쁜 꽃들이 만개한 풍경을 즐기고 여름에는 날을 잡아서 바다와 깊은 산 속 계곡을 찾으며 싱그러움을 만끽하고 가을에는 멀리까지 나서 단풍으로 유명한 산들을 돌아보며 자연이 그려낸 울긋불긋한 수채화를 감상하고 겨울이 오면 산 높은 곳에 올라서 온 대지가 하얗게 덮인 모습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는 것처럼, 자연을 사랑할 수 없었다.

어느덧 해가 자리를 잡고, 하늘에서 어두운 기운과 붉은 기운이 자취를 감췄다.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는 이제 막 7시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는 막 성당에 뛰어가는 젊은이를 보았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문득 자신의 팔에 차고 있던 묵주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짧은 기도와 그 순간 어떤 미지의 감정, 아마도 독실함이라 일컫는 것이 솟아오르는 그 짧은 한때가 지나면 마음은 급격한 고독을 맛봤다. 그는 자신의 이 믿음이란 것도 순간적인 환상, 아마도 그 주위의 물리적 환경, 예컨대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햇빛이 만들어내는 만색의 향연, 그 순간을 메우는 정면의 설교대 옆에 위치한 작은 피아노에서 울려 퍼져서, 앞서 흘러나온 소리의 잔향과 섞여 결코 그치지 않을 듯한 찬송의 노래, 그리고 그의 주변 사방으로 가득한 진정 독실한 이들의 기도 소리와 그들의 손에 쥐어진 묵주가 한 알씩 굴러가는 모습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존재로서 영향받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와 같은 사회적 환경, 이 모든 것들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에서 깨어나서 다시 현실을 마주하면, 마치 더운 온탕이나 찜질방에서 몸을 덥히다가 밖으로 나오면, 원리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바깥의 공기가 더 차갑게 느껴지는 것처럼, 현실은 더 무겁고 혹독하게 이 육신을 옭아맨다고 느낀 건 덤이었다.

차를 타고 국도를 따라 이윽고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길 위에는 차 몇 대만이 드문드문 놓여있었다. 그는 도중에 갈증이 생겼고, 그래서 잠시 차를 세우고 싶었다. 겸사로 갑자기 몰려오는 피곤을 해결할 겸 말이다. 그런 그의 앞으로 몇백 미터 앞의 휴게소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지나갔다.

평소라면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얼음 담긴 아메리카노를 마실 그의 손에 웬일인지 작은 자기로 된 잔이 쥐어져 있었다. 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한 모금을 입에 머금으며 오감을 동원해 입 안의 액체의 맛과 향, 질감, 온도, 입에서 출렁거릴 때의 소리, 커피가 잔에서 출렁이는 모습 등을 즐기고자 하지만, 어째서인지 평소에 먹던 것과 똑같은 종류로 시켰음에도 평소처럼 무저항적으로 삼킬 수 없었다. 잔에 남은 커피를 들여다보니, 마치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 찻잔의 태풍이란 것이 마냥 은유만은 아닐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창밖을 바라보니 온갖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딘가로 출장을 가거나 그 출장에서 돌아가는 걸로 보이는 서두르는 기색의 양복쟁이, 무슨 연유에서인지 말을 안 들으며 떼를 부리는 아이와 그런 아이를 끌고 가다 지친 듯한 부모,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며 또다시 펼쳐질 일상을 생각하는 것처럼 여행복 차림이지만 얼굴은 잿빛인 한 일가 등 온갖 이들이 눈에 보였지만 현재의 그로서는 그들 모두 받아들이기 버거웠다. 그의 눈에는 그 사람들 각각이 고유성 없는, 마치 인간의 눈에 보이는 개미와 같은 존재 같아 보였다. 그에 따라 그는 자신이 이 거대한 개미굴에 홀로 떨어진 인간처럼 생각되었다. 아마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이리라 생각하니 머리가 어지러워 이 좁은 곳은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였다. 그는 차의 좌석을 뒤로 젖히고 잠시 눈을 붙였다. 차 안은 히터를 틀어 따뜻한 공기가 감돌았다.

거친 파도가 그를 집어삼킨다. 검은 하늘과 난폭하게 쏟아지는 비바람, 맹렬하게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그 속에서 아무런 구원의 손길도 기대할 수 없고, 빛 한 줄기조차 찾아볼 수 없다. 아무리 이 상황에서 발버둥을 쳐보아도 마치 무거운 족쇄가 매달린 것처럼 계속 지쳐가며 끝내 이 끝을 알 수 없는 밑으로 가라앉고 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꿈임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아무런 고통도 없을 곳이며, 이 모든 상황이 단지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임을 지각하고 있다. 그러나 고통이 여실히 느껴진다. 숨은 가빠져 온다. 온몸에 힘이 빠져간다. 뱃속으로 물이 밀려 들어온다. 눈을 뜨기에도 벅차다.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저 깊은 어둠 속으로, 침묵 속으로, 죽음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다.

잠에서 깼을 때, 시간은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어둠이 동쪽에서 물 밀려오듯 덮쳐오고 있었다. 가로등도 서서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도로에는 벌써 수많은 차로 메워졌고, 하얀 전조등과 붉은 꼬리등이 좌우를 나란히 채우며 기묘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때는 오후 6시 반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굶주린 배를 채우기로 했다.

라면 한 그릇이 김을 내뿜고 있다. 그는 면 한 줄기를 천천히 불어서 열기를 어느 정도 가시게 하고 가져다 대고 호로록 흡입했다. 면을 입에서 오물거리며 뜨거운 면발과 그 속에 밴 국물의 맛을 느꼈다. 그렇게 입에 이 느낌을 적응시키고 뇌가 자극받게 했다. 면을 삼킨 후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짭짤하고 얼큰한 국물이 그의 입과 혀에서 출렁이다 곧장 목구멍으로 흘러 내려간다. 조용히, 조금씩 그렇게 한 입 한 입을, 마치 그 어느 때보다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먹다 보니 이윽고 국물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참으로 비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열한 식사를 하고 있다는 생각. 그는 한때 참 재밌게 읽었던 만화의 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얼마 안 가 그의 입에서는 자그맣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물거리던 입에서 튀어나오는 오물오물한 웃음.

식당 밖으로 나왔을 때, 때마침 밖에서는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살아야겠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시구가 떠올랐다. 그는 차의 시동을 걸고, 휴게소를 빠져나왔다. 갈 길은 아직 멀었다.

ㅇㅎㅇ
ㅇㅎ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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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이 수백 년간 이 땅 위에 군림하고 있다. 모든 생명을 얼려 죽이는 이 길고도 긴 겨울은 사람들의 신앙, 즉 두려움과 사랑이 공존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먹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 사람들의 믿음이 변치 않는 한 이 겨울은 영속할 것이다. 그 폭정에 온 인민은 고통받으면서 제각기 만의 방식으로 상처 입은 삶을 연명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겨울에 그저 고통받으며 생을 연명하기도 하고, 어떤 자들은 이 겨울을 찬양하며,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하고, 누군가는 헛되이 저항하거나 그도 아니면 그저 삶을 포기하거나 신에게 빌어 이 겨울이 끝나기를 기원한다. 연명하는 자들과 착취하는 자들은 하나로 연결 지어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의 집단을 이루며 겨울을 숭배한다. 강 위에 얼어붙은 얼음과 눈을 이 겨울의 상징물로 여기며, 그 속에서 생명들의 얼어 죽어감을 찬양하는 것이다. 특히 착취자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겨울은 인간 과잉의 재앙을 해결해줄 유일한 방법이며, 겨울의 존재는 인류의 생존에 필수 불가결하다. 이 구원과도 같은 자연법칙 속에서 순응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다른 인민들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다수 인민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거부하며 그들의 언어 속의 저열함을 대개 저들의 본성 문제로 치부한다. 그러나 그런 분석은 틀렸다. 그들 역시도 자신들이 내뱉는 말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겨울의 항구적 존속에 해가 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오히려 생명을 사랑한다. 그들은 강 위의 얼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강 아래를 흐르는 물과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물고기를 진정으로 추구한다. 그들이 얼음을 캐내어 그것을 조각해내어 경애를 자아내는 신의 형상을 빚어낸다는 둥, 그분을 기리는 웅대한 첨탑을 세운다는 등의 짓들이 실상은 그 얼음을 캐고 난 자리에서 신선한 물과 고기를 잡아들이려는 속셈인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 겨울이 불러일으키는 죽음의 심상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겨울의 추위와 황폐함은 치명적인 것이고, 그들은 거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들의 휘하에 있는 자들을 부려 먹으며 그들이 구해오는 땔감과 식량을 그들의 품에서 앗아가서는 그걸로 불을 때워 자신들의 몸을 녹이고, 배를 불린다. 즉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또 자신들의 수족이 발하는 죽음에 가까워지는 순간 더욱 타오르는 그 생명의 열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즉 그들의 말은 모순적이고, 더러운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실제로는 믿음 없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아래에서 착취당하는 수많은 이들 역시 그들의 모순을 감각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옭아매는 그들의 지배를 파괴할 생각은 품지 못한다. 그들이 그토록 떠들어대는 그 하찮은 논리에 자신들도 모르게 지적으로 수용하게 되면서, 내적으로 부조화 상태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생활과 그들 외부의 더욱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 죽어가는 보다 비참한 생을 비

  • ㅇㅎㅇ
  • 2022-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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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ㅎ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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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지현

    ㅇㅎㅇ님 안녕하세요. 하루의 살아감을 통해 마음이 달라지는 소설을 저도 좋아합니다. 특히나 이런 식으로 산책을 하며 여러 풍경들을 마주하는 순간들이 인물의 감정을 대신 나타내준다는 생각도 들고요. 이런 제 취향에 입각하여 말씀드리자면 장면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지면 주인공의 감정선에 훨씬 더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각 외의 여러 감각을 활용할 수 있겠지요. 지나가다 보이는 사소한 글자들을 묘사해 줄수도 있을 거고요. 그럼,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2022-12-08 18:38:09
    송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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