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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의 사망에 대하여 - 3일 (미완성)

  • 작성자 소묘
  • 작성일 2022-05-01
  • 조회수 224

- 3 -

 

이미 차들은 떠나고 없어서, 지루한 태양이 몸을 움츠리고 있다가 하품하며 허리를 곧게 피는 것인데, 기지개를 뻗치느라 그동안 소맷자락에 감추어 두었던 것을 다시 환하게 여니, 그리 덥지도 않아야 할 이 주민시설 안에선 아우성치는 소리가 잦아지고, 결국은 창을 뚫고 뛰쳐나올 듯이 햇볕이 내리쬐며, 콧잔등에 땀이 볼록 돋는 것이었다.

밖에 잔디빛 푸른 땅은 싸돌아다니는 바람을 잡아 매질하기라도 했는지, 불룩 솟아오르며 숨을 거칠게 후욱대다가도, 바람이 파란 멍울진 채로 사무실 벽에 기대면, 사이에 끼어있는 나도 냉랭한 기운을 금세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차가워지기 일쑤였다.

어미와 아들! 어찌나 신기한 관계인가. 인연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며, 그럭저럭한 생활에서 그럭저럭 무언가를 일구어 낸 영웅이랍시고 국가를 대변하는 조그만 직책이 맡겨진 나에겐, 특별한 사회성을 기를 전차도 없었으며, 또 미묘한 눈빛과 움직임을 잡아내는 능력조차 현저히 떨어져서, 뒤에서 어수룩한 말주변으로 둘러대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이런 백면서생이 어떻게 손님을 상대하고, 웃어대며 화답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업무도 가당치 않기만 한데, 하물며 불길이 타오르는 공간에서도 아이를 붙들며, 폼페이의 수많은 영혼들처럼, 때 묻지 않은 부모의 사랑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사실 다 사람 사는 일인지라 누구나 함부로 비관은 못 한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게다가 오늘은 이 주장에 힘을 실어주듯이, 행운의 여신처럼 휘적휘적 걸어오는 사람이 있으니, 그녀가 바로 최 씨 부인이다.

정오가 불어터진 으슥한 시간에 자주 오던 그녀는, 오늘만은 무얼 해서라도 목적을 이루어내겠다는 건지, 아니면 사람이 북새통일 때 하소연에 하소연을 거듭 해 상대를 곤경에 처하겠다는 건지, 늘 구부정하던 몸을 곧추세우고 당당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채 열 발자국도 안 돼 텅 빈 공간을 스윽 둘러보더니, 그녀는 상기의 목표 두 가지 모두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좌절감 때문인지, 걸음걸이를 원래대로 고쳤다. 발을 끌고, 머리는 귀 밑으로 허옇고 듬성듬성하게 내놓으면서, 그녀는 가장 끝자리에 놓인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그녀는 왜인지는 몰라도 항상 끝자락에 걸터앉는 것을 끔찍이도 좋아했다. 항상 귀신처럼 다가와서는, 주위를 훑어보고는 눈에 제일 띄지 않는 그림자에 숨어 있다가, 그 앞으로 불쌍한 직원이 한두 명 지나가면 팔을 붙잡고 눈물을 그렁그렁 매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일주일쯤 전에 경고를 받고 나서는 못하게 되자, 발을 구른다든지 기침을 한다든지 등의 큰 소리를 내 주의를 끈 다음, 불쑥 튀어나와 창구로 가는 일을 반복했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에서 만족을 얻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예전부터 지속되어온 지독한 버릇이라고 으레 짐작은 해왔으나, 매번 온몸의 장기가 들썩하는 기분과 뒤따르는 성가심은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는 달랐기에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상냥한 말투로 그녀를 접대했다.

 

“안녕하십니까.” 제길, 고객님, 고객님, 한 단어.

 

“젊은 양반, 내 이야기 좀 들어보게. 이렇게 매번 찾아오는 것은 미안하지만, 내 정말 억울한 속사정이 있어서 그래.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조금 길긴 하니, 내 마음만 최대한 이해해주게. 그래서 이게 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거냐면...우리 가족 이야기부터 해야겠구먼그래. 그래 우리 부부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지,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일이 시작되었어. 그야 똑같은 밤이었고, 나는 그때 음식을, 내 딸이 먹지 못할 음식을, 만들고 있었지. 무엇이었는지도 기억해. 애호박, 된장, 이런 것들로 만든 찌개, 반찬은 멸치복음이랑 김치, 그리고 장조림이랑 쌀밥이었지. 보게나,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니...그러나 이건 중요한 건 아니고...아무튼 밤이 늦어 가는데 오지를 않는 거야.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지. 김나는 된장찌개를 보며 식기 전까진 돌아오겠지 하고 말이야……. 결국에는 어디 놀러가기라도 했나 해서 친구들 집에 전화를 걸어봤지. 여기 있나, 하니 집에 갔다고 하고, 저기 있나, 하니 오늘 하루 종일 못 봤다 하고, 이렇게 줄전화를 빙빙 돌리고 나서야 실감이 오고야 말았지. ‘기어코…….’ 그래서 그토록 피해 다니던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지. 역시나 반응이 냉담하고, 전화기를 손에서 놓자마자 실감이 나기 시작했지. 전단지를 돌리고, 테이프를 붙이고…….”

 

여기서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안경을 벗은 뒤, 손가락으로 눈을 몇 번 훔쳤다. 암만 나였어도 그랬을 것이었다. 석문에 기대어 있는, 모습은, 곧 그녀도 먼지처럼 으스러지려나, 생각하며 나는 황혼 어스름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래서, 그래서……. 못 찾고야 말았지. 지금까지, 도대체 어디로 간지도 몰라. 다시 만나기야 한다면 붙들어서라도 오겠지마는, 차마 그럴 운명이 아니었나 보구먼. 그 날 아침에도, 아하, 머리카락 가지고 입씨름하다가 나가는 경우가 태반이었는데, 이번도 역시 다르진 않았어. 그게 제일 후회되는 일인 것 같네. 그때, 집 밖으로 나가는 걸 뜯어말렸다면……. 그리고 또 우리 부부에게는 아들도 한 명 있지. 딸보단 댓 살 적고, 머리가 단단한 아이야. 자기 일을 우직하게 해나가고, 남 말 듣기 싫어하는, 왜 황소 같은 아이들, 그런 아이들 중 하나. 그렇다고 아이가 어디 모자란 구석이 있는 것이 아니고, 눈이 아주 반짝거리고 말귀를 잘도 알아먹어. 그렇지만 애가 열둘, 열셋도 안돼서 자기 누나를 잃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어. 그때부터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서 종이 한 장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리고, 공부도 도무지 하지를 않으니까, 결국은 남편과 사이가 안 좋아질 수밖에 없는가봐. 건넌방에서는 고함이랑 소음이 막 울리고, 나는 부엌에 서서 조용히 하고 있다가 갑자기 주저앉아버리는 게 일쑤였지. 딸애 방은 애 아버지가 주말마다 청소하고, 아직 살아있다고…….”

 

두 번째였다. 어미와 아들……. 궤적에서, 멀어져 있으나 서로 끌어당기는, 돌아가고 돌아가는, 서로 자기만의 원을 그리고 덧입히는, 역시 몹시도 힘들었다.

 

“그러다 일이 터지고야 말았지. 하루는 아예 나가버린다고 소리를 치는 거야. 물론 애 아빠도 진짜 나가버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잠자던 틈에, 조용히 문 사이로 빠져나갔지. 애도 머리가 좋으니까, 눈 내리는 시간을 골라서 도망을 치더래. 찾으려는 노력이 다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남편은 화병을 얻어서 네다섯 해 살다가 그만 떠나버렸어. 가세가 자연히 기울어버리니까, 무엇이라도 해야 하고, 그래서 무엇이라도 했지. 돈 되는 건 무엇이라든지……. 그러다 눈 내리는 날, 생각이 나고야 말았어, 아들내미가 만지작거리던 종이, 그 종이 한 장이 갑자기 기억에 박혀오더라고. 사실 문을 살짝 열어서야 어디서 꺼내고 어디다 넣는지는 보았기 때문에, 새로 옮긴 곳에 쌓아놓은 가구 더미 한 무리를 헤치게 뒤졌지. 그리고 결국은 찾아냈어.”

 

읽어보아, 하고 그녀는 종이 한 장을 내게 건넸다. 발렌티노, 그러나 군대는 아닌, 반지도 아닌, 초콜릿도 아닌, 애매하였다.

 

살어리랏다거늘 따르리랏다거늘 무엇이나하랴

가로수길이나 모르는 가로수나 무엇이나하랴

가오리 가자

돌아서 가자

차디찬 풍경폭 아래에서 무엇이나하랴

 

리머릭, 섬나라. 리어 왕의 간섭이었다. 참회의 에드워드. 둘 다 켈트는 아니었다.

 

“애가 아예 가버렸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젠 진짜 없는 거구나……. 그래서 결국 돈을 타냈지, 그리옵고 미운 조국에게서. 현재도 받고 있는데, 더 이상 일을 하면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아예 돈을 빼버리는데, 이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수개월 동안 빼버리니까, 내가 어디 직장을 얻지 않으면 그 돈만으로는 생활하기가 영 안 되는 거야. 어떻게 힘 써줄 방법이 제발 있으면 하고 여러 번 찾아오는 거지, 내가 막무가내로 뛰어오는 게 아니야.”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기초생활을 보장한다니, 보장하는 것은 그들의 식탐이었나. 플라톤, 손바닥을 비비며, 거리를 쏘다니며, 왈, 철인은 더 나은 것을 보아야 한다는 기초에 착안하여 변함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구분을 절망적으로 하며 앎과 삶의 기쁨을 노래해야 한다는 호메로스의 구절처럼 어느 철학의 왕이 말하듯이 물과 불과 흙과 공기에 의해 이루어져 올라가고 내려가는 한 산에서의 40일 동안의 숙면을 통해 아이의 마음을 통달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하나의 극단적이고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초월은 머리에 터번을 쓰고 불과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종족의 양심을 보장하는 한 논리와 미학에 의해 존재와 존재가 돌아가는 명제를 거역하거나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 글로 쓰인 칼의 본질적인 내용이다. 그에 반하여, 지도자 왈, 우리는 무엇과도 부딪히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우리를 따를 것이며, 우리는 우리를 우리로 여길 것이며, 우리는 기뻐하고 더 이상의 슬픔을 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마음껏 즐길 것이며, 우리는 우리와 다른 우리를 끌어들일 것이며, 우리는 우리를 잡을 것이며, 우리는 우리를 휘잡을 것이며, 우리는 질 것이며, 우리는 뜰 것이며, 우리는 탈 것이며, 우리는 뛸 것이며, 우리는 튈 것이며, 우리는 갈 것이며, 우리는 영원히 사죄와 슬픔을 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기억에 고질적인 문제가 생길 것이며, 우리는 떵떵거릴 것이며, 우리는 우리 사이에 생긴 미세한 간극을 사이에 두고 다리로 밀어낼 것이며, 우리는 목을 썰 것이며, 나무 목을 썰 것이며, 우리는 잘 것이며, 우리는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참으로 그게 옳쏘냐. 나야말로 어떤 강령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손바닥을 마주 대며 전기라도 통하는 듯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은 찾아보겠습니다만,”

 

“잠시만 내 말 좀 들어봐.”

 

잠시 동안 불과 화염이 나를 감쌀 뻔했지만, 그녀는 그저 소양강에 서있는, 석문에 기대 있는, 으스러지려나, 소양강은 으스러졌었다.

 

“제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줘, 제발, 약속이야.”

 

제길, 한 마디, 한 마디.

기본적으로, 우리는 모두 어머니와 아들로 이루어져있다. 아들은 그 안에 어머니와 자신을 품으며, 어머니는 그 안에 아들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클림트의 별로 유명하지 않은 그림 한 폭을 통해 우리는 누가 누구를 안고 있는지, 누가 누구에게 입맞춤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자기 전에의 관습 같이, 그것은 같게도, 그리고 다르게도 우리에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없어졌는지도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사라져버렸고, 누이는 사라져버렸고, 남동생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품어져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그런 가족상이 완성되는 것이다. 꽃밭 위에서.

그녀는 꽤 실망한 듯 보였다. 언제나 한결같은 자세로,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다. 행운의 여신은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 * *

도대체 어떤 이유이길래 하늘은 그리 무심한 색을 띌 수 있는지 나는 자책했다. 지금 들고 있는 이것도 무심해 보이기는 했다. 횟벽. 곱씹어보니 도벽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모두 습관이었다. 나는 증기 기관차가 되어 내 안에 있는 열을 내뿜듯이 기둥으로 연기를 내뱉었고, 다시 급한 걸음으로 어기적어기적 건물로 돌아갔다. 선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낡은 몸뚱아리.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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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이야말로 바다와 거친 폭풍의 후계자, 강철과 그 급을 같이 하는 단단한 눈매의 황제, 오똑 꺾어올린 부리와 다리의 미인, 그 외 여러 경외를 갖춘 호칭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일 것이다. 어찌 이리 아름다울 수 있는지! 아아, 호수를 지나며, 다리로 물살을 가르며 유영하는 자태는 그 어떤 이도 홀리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호수에서는 기름으로 얼룩진 오리들을 마주치기에, 짐은 강보다는 어느 푸릇푸릇한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미물들의 조잡한 속세를 내려다보며, 고고히 날개를 싸매어 둥지에서 우수에 젖은 옛 기억들을 다시 펼쳐보고 있었다.   짐의 어미도, 아비도, 우뚝 솟아있는 최상을 낳을 것이라고는 차마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회색 털이 채 마르기도 전에 짐은 이미 빛을 내뿜고 있었나니, 광휘에 휩싸여, 놀라면서도 시기하여, 짐의 형제자매들은 짐의 먹이를 매번 탐하였다. 그럼에도 짐은 높은 긍지에 힘입어, 그들에게 관대한 선행을 자주 베풀었다. 짐의 발육은 그때부터 이미 기대치를 넘어, 저 멀리 어느 봉황의 것에 준할 정도였으며, 정신은 지구의 넓이로 포용할 수 없어 붐비며 터져나가고 있었다.   이런 추억들을 다시 만끽하여 느껴보며, 짐은 아직도 잠에 기운 해가 눈을 차마 뜨기도 전에, 모든 몸단장을 마치었다. 이 몸의 윤기 좌르르 흐르는 깃털의 빛을 하늘이 탐하고 있었다. 검은 안개에서 서서히 보랏빛으로 넘어가며, 하늘은 짐의 빛깔을 어설프게 따라하고 있었다. 짐은 코웃음을 치며 날갯짓을 해보였다.   '보아라...이것이...이것이, '본질', 이다...'   넌지시 핀잔을 주며 짐은 다시 속물들의 세상에 진입했다. 그들의 궤도는 짐의 넓은 아량에도 극히 단순해 보였고, 가끔씩 작은 조무래기들이나 몸만 늙은 것들이 언짢은 행위를 해댈 때 짐은 그들에 대한 남은 애정도 내던질 뻔하였다. 이 몸의 강림에도, 길을 비키지 않으며, 심지어는 짐의 발자국을 그 더러운 발로 덮는 행각을 벌이다니, 참 미개한 종족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짐은 잠시 낙엽들 사이로 피신했다. 낙엽들이 파리한 손가락을 팔락거리며 짐을 반겼다.   '오냐, 오냐, 나의 백성들아, 그동안 잘 있었느냐.'   짐은 형보다 먼저 날아갔다는 동생의 슬픈 인생사를 경청하고 함께 끌어안아 통곡하기도 하고, 이번에 새로 들어왔다는 댁의 안부를 묻기도 하며, 짐이 한평생 보살핀 원로의 험난한 옛이야기들엔 미소 짓기도 하며, 이 군집을 지극히 정성을 다해 자식들처럼 보살폈다. 그들과 우리들, 모두 같은 말이라 감히 지칭할 수 있었다.   돌담 뒤에 곱게 놓여 짐의 통찰과 광대한 안목 하에, 계속하여 몸집을 불리는 마을을 뒤로 하고, 이 몸께서는 때마침 짐에게 바쳐진 달콤한 밀가루 덩어리 조공을 한 움큼 음미하며, 뒤쫓아 따라온 바람에 몸을 실어 편안히 여정을 시작했다.   호수 옆 풀밭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제법 위로 치솟아 있었다. 불어온 다른 바람의 선망과 질투를 한 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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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묘
  • 2022-02-26
갈림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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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묘
  • 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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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지현

    소묘님 안녕하세요. 소묘님의 글을 읽으며 소묘님의 취향을 짐작해 봅니다. 아마도 고전 소설을 좋아하시는 게 아닐까 하고요. 모든 문장에 공을 들인 티가 나 꼼꼼히 읽어내려갔습니다. 본인의 색이 담긴 문장을 쓰시다니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다만 이야기에 있어 소묘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좀 불명확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정말 소묘님께서 지금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인지도 궁금합니다. 현재의 글도 충분히 좋지만 그런 부분이 보완된다면 소묘님만의 색이 좀 더 드러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2022-06-13 13:24:07
    송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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