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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십자가

  • 작성자 ㅇㅎㅇ
  • 작성일 2022-03-11
  • 조회수 327

별이 밤하늘에 가득 피어오른 밤이었다. 그 날에 어느 청년은 사랑을 고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의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창가에서 마냥 창밖만을 내다보았다. 차마 당당히 이야기할 용기가,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그런 사나이다운 고백을 할 용기가 없었다. 그런 그였기에, 그는 자신이 창가로 들어오는 별빛들을 볼 낯이 없다고 생각했다. 창가에 놓인 화분에 심어진 붉은 장미 한 송이의 꽃잎에 앉은 달빛이 이슬처럼 흘러내렸다. 그는 전부 잊고 싶었다.

잠이 오지 않지만, 꿋꿋이도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잠 따위는 자고 싶지 않다는 게 현재로선 그의 생각이었다. 머리에서부터 시작된 과부하가 온 몸으로 퍼져나가며, 그는 몸이 뜨거워짐에 차마 몸을 가만히 이불로 감쌀 수가 없어서 이불을 걷어차고 계속 몸을 뒤척였다.

사랑. 언제나 사랑이 문제였다.

그는, 순간,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지고,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얼마나 오래 전인지도 이제는 까먹었건만, 그 순간의 모독만은, 주위의 시선만은 선명하게 그에게 박혀서 그를 괴롭혔다. 유년의 상처, 이제는 흉터가 되었지만, 여전히 쓰라리긴 매한가지였다.

그는 다시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가, 창틀에 팔을 걸친 채, 몸을 기울여 창문 밖으로 목을 빼서 바깥 풍경을 살피었다. 그가 바라보는 풍경은 모든 게 작아 보였다. 마치 인간이 개미를 바라보는 구도가, 그에게는 주위 풍경을, 인간 세상을 바라보는 구도였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사는 공간에서 이렇게 내려다보면, 그저 멋진 풍경에 감탄을 자아내거나, 어쩌면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섰다는 근거 없는 오만함이 차오르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에겐 이 모든 게 헛되었다. 그에게 이 풍경은 라푼젤이 자신이 갇힌 탑에서 내려다보는 풍경과 같았다.

내려가고 싶다. 그것은 그날 이후로 상실한 그의 권리이자, 그날부터 여태껏 간절히 바라온 그의 권리였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죄는 사면되고 권리는 회복될 수 있으나, 그의 것은 결코 그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의 죄는 그의 탄생 자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 죄를 심판하는 것은 이 세상의, 적어도 이 사회의 전원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지엄한 만인의 사법부의 재판소에서 피고인석에 앉아있는 채로, 이미 유죄는 정해진 채, 그 처벌의 강도만을 저울질할 차례만 남은 상황에서,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 최대한으로 거세하고 검열하여 그들의 자비를 구해야만 하는 처지인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는 차라리 우리에 갇힌 한 마리의 매우 특이하고 이색적인 동물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 옛날에 사람마저도 동물원에 가둬서 전시하였던 오랜 전통이 오늘까지도 재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낫게 느껴질까?

찬바람이 불어와서, 공기가 촉촉하여서, 뭐 그러한 잡다한 이유들로 그는 밖이 차갑게 느껴졌다. 창가에 놓인 화분에서 예쁜 자태를 뽐내는 붉은 장미도 추운지 몸을 떨었다. 하늘에 있는 별들도 몸이 젖었는지 떨어대는 모양이었다. 그런 까닭인지, 별빛들이 울렁거렸다. 그는 얼른 화분을 방 안으로 들이고, 창문을 닫았다.

그 화분은 돌아가신 그의 할머님이 남기신 것이었다. 꽃을 좋아하셔서 집의 한 편에 온실까지 만드시곤 온갖 꽃이며 수목들을 혼자 힘으로 정성으로 길러내셨으니, 떠나시기 전, 마지막으로 그가 온실을 보았을 때, 그 종류가 수십 가지였었는데, 그 중 할머니께서는 로즈마리나 백일홍, 상사화 따위를 많이 좋아하셨는지, 유독 많이 있었다.

그런 할머님께서 손자를 위해 손수 기르신 장미꽃 한 송이이다. 분명 손자를 위한 마음이셨을까? 그러나 그는 이걸 보아도 어느 순간 마음이 침울해진다. 자신의 할머니가 만일 진실을 알게 되어도, 여전히 이와 비슷한 마음을 품어주셨을까? 그런 생각에 그는 쉽게 긍정의 답을 떠올리지 못한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할머니는 자애롭고 언제나 손자를 살갑게 대해주시는 분이 아닌, 마치 마녀나 마법사를 재판하는 심문관과 같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그는 현실에서의 심판과 동시에 곧장 지옥으로 떨어져서, 미노스가 그를 적절한 층으로 내던지면, 그는 그 뜨거운 사막 한 가운데를 불의 비를 맞으며 발광하며 뛰어다닐 터이다. 그런 생각이 물씬 들면서 괜히 두려워져, 이 화분은 언젠가 갔다 버렸어야 한다고 매일같이 생각하였지만, 언제나 차마 그러지를 못하고 그렇게 얼마가 지났는지 모른다.

그는 피곤해졌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도 어느덧 밤을 넘어, 새벽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그의 피곤함은 일반적인 인간의 생활 방식에 맞는 반응으로, 즉 지극히 자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이것만으로 그의 피곤에 대한 설명을 마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게으른 사고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차라리 자신이 어떤 중대한 병에 걸렸다고, 사회적으로 그렇게 낙인이 내려졌으면 하고 괜한, 소망 아닌 소망을 품는다. 그는 이제 지쳤다. 그는 힘없이 침대에 누워서 자신의 수족과 사지를 봤다. 자신의 상처 한 점 없는 멀쩡한 몸은 언제나 원망스럽기만 했다. 차라리 어딘가 크게 문제가 있었으면 그는 이렇게 사랑에, 존재에 고통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런 원망에 자신의 몸을 해할 수백여 가지의 방법들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면서도, 금세 그 모든 게 두려워져서, 그리고 자신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이란 사람이 불쌍해져서,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부끄러움이란 것이 문득 고개를 든다. 무슨 부끄러움인지는 그도 알지 못한다. 언젠가의 어떤 순간이 부끄러울 수도 있고, 그 자신이 총체적으로 부끄러운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됐든, 부끄러움을 떠올리다 보면 언제나 그는 한 젊은이를 생각한다. 그는 어느 범죄자, 사람들을 선동하여 혹세무민한 자를 둘러싼 성난 군중들에게서 벗어나려고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나 그 군중 중 어느 한 여인이 그를 알아본다. 그는 저 군중들 속에서 욕보고 있는 자의 제자인 것이다. 그러나 그 사내는 그를 부정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한다. 그는 이 순간이 오기 전, 누구보다도 자신의 지조를 떠들어대던 자였다. 여인의 또 한 번의 물음에 그의 대답은 역시나 부정이었다. 그 순간에 멀리서 닭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역시나 같은 물음이 들려왔지만, 그 목소리는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군중들 틈에서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에 그는 결국 끝끝내 부정하고 마니, 그 순간 저 멀리에서 울려 퍼지는 닭 울음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리나니, 수탉의 방향으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 장면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는 그 빛이 너무나도 두려워서, 어떨 때는 그저 몸을 웅크린 채, 땅에 엎드려 눈물만을 흘리기도 하고, 또 다른 때는, 그 빛을 피해서, 아직 빛이 채 도달하지 않은 깊은 골목 속으로 뛰어가기도 한다만, 그의 회개는 상상되지 않는다.

아마도 그에게는 그 사랑의 빛이 와닿지 않기 때문일지어다.

그는 다시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앞에 바로 들어온 것은 그의 침대 맞은편에 있는 벽에 걸린 십자가, 이 역시 그의 할머니께서 선물해주셨던 고급 원목으로 만들었다는 십자가였다. 유리창을 넘어 들어오는 푸른 달빛이 십자가에 걸렸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다. 자신에게 만일 저 십자가가 허락되어서, 과거의 한 사내가 모두에게 죄 사함을 선사한 것처럼, 자신 역시도 모두에게 구원을 약속하며 저 십자가를 짊어지게 된다면, 자신 역시도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지만, 그는 자신이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그럴 용기가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더욱이 그는 자신에게 그런 일 자체가 주어질리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문득 십자가 쪽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돌아보니, 십자가에 걸려있는 나무로 된 작은 예수의 모형이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아서, 그것이 마치 이런 형편없는 자신을 보고 눈웃음 짓는 것 같았다. 지금의 그에게 저 예수는 예수가 아니었고, 그 형상은 마치 눈 녹듯 녹아서 악마로서의 본모습을 들어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저것은 여전히 예수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여전히 자신에게 조소에 가까운 웃음을 짓는 것 같았다. 그는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저렇게 자신을 웃음거리로 취급하는지, 적어도 옛날에 자신의 할머니에 의해서 몇 번 읽어보거나, 주워들은 그 얄팍한 기억에 근거하면, 예수는 저렇게 사람을 비웃을 자로는 상상되지 않았다. 당신은 어째서 저를 비웃으시나이까. 그대도 악마에게 조롱당하고, 수많은 이들에게 모욕당하고, 저주 받고, 끝내 죽임당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어찌 보면 그대와 동류가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저를 그렇게 광대를 보시듯 하십니까? 그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도리어 악마가 아닌가, 그런 생각과 함께 얼굴을 만지자 얼굴 가죽이 너무나도 낯설고 인공적으로 느껴졌다.

그 순간에 밤하늘을 돌아보면, 여전히 하늘은 어둡고, 별들은 저 너머에서 빛 한 줌을 머금은 채 떠있을 터인데, 그 하늘에 하얀 빛들이 알갱이처럼 내려오기에, 자세히 보아하니, 그것은 달의 푸른빛을 머금은 하얀 나비들의 떼였다. 나비들은 모두 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는데, 이것이 어찌 보면 눈발과도 같아 보였고, 또 어떻게 보면 유성우와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 상황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몸은 이성과 달리, 그 광경을 보기 위해 창가에 다가가고 있었다. 그때, 창문이 제대로 잠기지 않았었는지, 미풍에 틈이 열렸고, 그 틈새로 나비 한 마리가 들어왔다. 나비는 훨훨 날아와서는, 장미꽃 위에 앉았다. 그 포근한 날갯짓에 그는 괜스레 마음이 울렁거렸으니,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으나, 그에게 그 나비가, 비록 첫 만남이지만, 퍽 소중하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이 방 안에 다른 무언가가 찾아온 것은 얼마만인가를 떠올려보면, 그는 그저 흐릿하면서도 아득한,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시간의 줄기만을 가늠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나비를 품에 품고, 모든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니, 자신의 마음을 게워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이 나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나비임에도 그런 것이어서,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여, 오히려 눈물은 떨어지지 않았다는 게 그에게는 그나마 가질 수 있던 위안이었다.

나비는 그저 꿀을 필요로 한 걸지도 모르고, 그렇기에 우연히 여기를 찾아 날아든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이 상황에 대한 자신의 관점 속 환상성을 한 꺼풀 벗겨가며 생각해보았다. 그런 존재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해서, 그것은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는 결국 그것이 자신이 지금까지 겪었던 경험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걸 인식하였다. 그나마 저것은 자신에게 어떻게 해를 끼치진 못할 것이라는 것이 그가 유일하게 찾아낸 이전까지와의 차이점이었다. 그런 생각이 미치자, 그는 저 나비가 별 볼일 없게 느껴졌다가도, 또 그런 존재에게 기대어서 또 다시 과거의 실책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짓을 범하려 한 자신이 추하게 느껴졌고, 더 나아가, 자신을 골리려고 일부로 자신의 방에 찾아온 것이라는 생각마저 하게 되자, 그는 더 이상 저 나비를 보기가 싫었다.

그런 마음이 물씬 들 순간, 나비는 무슨 마음인 것일까, 십자가에, 십자가의 나무 예수의 머리에 올라탔다. 그 위에 앉은 나비의 눈은 나를 또렷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행위들에 별안간 겁이 났다. 그때, 나비가 날개를 펼치고, 그를 향해 날아오자, 벽에 걸려있던 십자가는 나비가 날아오르며 일으킨 작은 흔들림에 그만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나자, 십자가 안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액체와 향을 맡으니, 장미향이었다. 향기는 그를 부드럽게 안고, 그는 퍽 편할 찰나, 나비가 그의 콧잔등 위에 앉았는데, 나비의 작은 몸이 참으로 따스해서, 그는 방금까지의 모든 섬뜩함과 두려움과 공허함 등이 녹아서 씻겨 내려가고, 그것들이 모두 씻겨간 자리가 살금살금 간지럽기 시작하더니, 웃음이 터져 나와서 참을 수 없었다. 그 순간에 어디선가 부드럽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잠을 버틸 수 없어서, 그만 눈을 감고 마니, 이제까지의 잠 중 이보다 더 개운했던 잠을 없었으리라. 그 무렵의 밤은 저 드높은 하늘 너머에서 내려오는 나비들의 떼로 하얗게 물들어있었다.

다시 눈을 뜨니, 벌써 해가 중천이었다. 그는 밤중의 모든 게 다 꿈만 같았다. 바닥에 떨어진 십자가 조각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방 안을 가득 메웠던 향은 전부 사라지고, 십자가 안에서 흘러나오던 액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밤하늘을 가득 채웠던 그 수많은 나비 떼도 마치 어제의 광경이 그저 신기루였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어쩌면 방바닥에 떨어져 있던 십자가 외에는 전부 거짓일지도, 아마 자신이 환각을 봤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가슴 안에서 여린 온기가 꿈틀거린다는 것을 느꼈다.

그날은 햇볕이 세상을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ㅇㅎㅇ
ㅇㅎ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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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이 수백 년간 이 땅 위에 군림하고 있다. 모든 생명을 얼려 죽이는 이 길고도 긴 겨울은 사람들의 신앙, 즉 두려움과 사랑이 공존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먹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 사람들의 믿음이 변치 않는 한 이 겨울은 영속할 것이다. 그 폭정에 온 인민은 고통받으면서 제각기 만의 방식으로 상처 입은 삶을 연명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겨울에 그저 고통받으며 생을 연명하기도 하고, 어떤 자들은 이 겨울을 찬양하며,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하고, 누군가는 헛되이 저항하거나 그도 아니면 그저 삶을 포기하거나 신에게 빌어 이 겨울이 끝나기를 기원한다. 연명하는 자들과 착취하는 자들은 하나로 연결 지어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의 집단을 이루며 겨울을 숭배한다. 강 위에 얼어붙은 얼음과 눈을 이 겨울의 상징물로 여기며, 그 속에서 생명들의 얼어 죽어감을 찬양하는 것이다. 특히 착취자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겨울은 인간 과잉의 재앙을 해결해줄 유일한 방법이며, 겨울의 존재는 인류의 생존에 필수 불가결하다. 이 구원과도 같은 자연법칙 속에서 순응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다른 인민들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다수 인민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거부하며 그들의 언어 속의 저열함을 대개 저들의 본성 문제로 치부한다. 그러나 그런 분석은 틀렸다. 그들 역시도 자신들이 내뱉는 말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겨울의 항구적 존속에 해가 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오히려 생명을 사랑한다. 그들은 강 위의 얼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강 아래를 흐르는 물과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물고기를 진정으로 추구한다. 그들이 얼음을 캐내어 그것을 조각해내어 경애를 자아내는 신의 형상을 빚어낸다는 둥, 그분을 기리는 웅대한 첨탑을 세운다는 등의 짓들이 실상은 그 얼음을 캐고 난 자리에서 신선한 물과 고기를 잡아들이려는 속셈인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 겨울이 불러일으키는 죽음의 심상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겨울의 추위와 황폐함은 치명적인 것이고, 그들은 거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들의 휘하에 있는 자들을 부려 먹으며 그들이 구해오는 땔감과 식량을 그들의 품에서 앗아가서는 그걸로 불을 때워 자신들의 몸을 녹이고, 배를 불린다. 즉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또 자신들의 수족이 발하는 죽음에 가까워지는 순간 더욱 타오르는 그 생명의 열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즉 그들의 말은 모순적이고, 더러운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실제로는 믿음 없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아래에서 착취당하는 수많은 이들 역시 그들의 모순을 감각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옭아매는 그들의 지배를 파괴할 생각은 품지 못한다. 그들이 그토록 떠들어대는 그 하찮은 논리에 자신들도 모르게 지적으로 수용하게 되면서, 내적으로 부조화 상태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생활과 그들 외부의 더욱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 죽어가는 보다 비참한 생을 비

  • ㅇㅎㅇ
  • 2022-11-10
하루의 여정

‘바다에 빠진 아이는 우는 법이 없다. 우는 법조차 잊어버린 채, 그저 한없이 빠져선 귀신이 되어버린다.’ 그는 항상 이 구절에서 막혔다. 그의 능력상으로도 염치의 측면에서도 그는 이 구절의 뒷부분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아예 지워버릴 수는 결코 없었다. 이걸 지우는 순간, 자신이 진정으로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버려버리게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저 두 문장과 씨름했으나 이는 마치 수백 년 동안 깊이 뿌리박은 상서로운 거목을 두 손으로 뽑아서 엎어뜨리려는 시도와 같았다.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렇게 몇 개월을 허송세월했다. 오랜만에 그가 달력을 보았을 때, 그날은 일주년 전날이었다. 그는 아직 동이 트기 전인 새벽에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타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한 치도 피곤이 들어설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길, 어둠이 가득한 길을 작은 전조등 한 쌍이 가르며 나아갔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바다의 동틀 무렵은 언제나 슬픈 정서가 요동치게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서늘한 비수처럼 스치는 해풍이 모래사장을 덮고, 해송림을 스치며 인간의 땅으로 몰려드는 것이 마치 저승에서부터 영혼들이 그리운 고향, 그리운 사람, 그리운 노래를 찾아 돌아오려는 것 같았다. 그는 그곳에서 마치 하나의 이정표처럼 서 있었다. 개 중 하나가 자신을 알아보고, 자신의 품에 안기길 바라면서, 이윽고 눈을 떠보면 그 어린 얼굴이 이 품 안에서 고요히 들숨과 날숨을 쉬며 잠들어있기를, 그런 가망 없는 희망을 품으며 그의 다리는 부동을 유지했다. 얼마간 바람이 불고 곧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이 두 손에 그 한미한 숨이 꿈틀대는 것 같다고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보며 그렇게 느꼈다. 그리곤 다시 눈을 돌려 끝 모를 바다를 쳐다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벅차오를 성싶던 슬픔이 거품처럼 사라졌다. 햇살이 너무 눈에 부신 까닭이었다. 저 태양은 그날을 목도하였을 것이며, 저 뜨거운 얼굴에는 그날의 기억이 결코 지워지지 않은 채 생생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끊임없이 세상을 돌고 돌아 빛을 비추고 또 거둘 것이다. 그런 섬뜩할 정도의 무상함에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봄에는 시간을 내서 동네의 하천을 거닐면서 온갖 예쁜 꽃들이 만개한 풍경을 즐기고 여름에는 날을 잡아서 바다와 깊은 산 속 계곡을 찾으며 싱그러움을 만끽하고 가을에는 멀리까지 나서 단풍으로 유명한 산들을 돌아보며 자연이 그려낸 울긋불긋한 수채화를 감상하고 겨울이 오면 산 높은 곳에 올라서 온 대지가 하얗게 덮인 모습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는 것처럼, 자연을 사랑할 수 없었다. 어느덧 해가 자리를 잡고, 하늘에서 어두운 기운과 붉은 기운이 자취를 감췄다.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는 이제 막 7시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는 막 성당에 뛰어가는 젊은이를 보았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문득 자신의 팔에 차고 있던 묵주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 ㅇㅎㅇ
  • 2022-11-04
그들을 기리며

2022년 3월 2일의 일입니다. 때는 오전 5시 40분쯤, 아마 화이트칼라 계층의 평범한 노동자라면, 여전히 잠을 자고 있거나, 혹여나 근무지까지의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슬슬 일어나서 출근을 준비하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당진에 소재한 H사의 제철소 제1 냉연공장의 도금 포트, ‘철판 등 코팅을 위해 바르는 고체 상태 도금제를 액체로 만들기 위해 가열하는 데 쓰이는 설비’로 도금제로 쓰기 위해 뜨겁게 끓고 있는 400도가 넘는 아연이 담긴 그 용기 안에선, 발견되어선 안 되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사람이었습니다. 50대가 넘는 한 가장이, 도금 과정에서 생기는 드로스, 용해된 금속이 산소와 결합하여, 표면과 바닥에 생기는 잔여물로, 찌꺼기, 혹은 줄여서 찌끼라고 불리는 것을 제거하던 한 명의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2022년 3월 5일의 일입니다. 때는 오후 1시 40분이고, 위치는 동일 업체의 예산 공장입니다. 원래라면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이거나 그 직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마저도 보내지 못한 이가 있습니다. 추락하는 1톤의 금형, 그 바로 아래에는, 역시나 있어선 안 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역시도 50대의 가장, 해당 업체의 2차 하청업체에서 파견된, 해당 금형을 수리하던 노동자였습니다. 똑같은 날의 오전 7시 20분 즈음에는, 포항에서는, 어느 공과대학교의 캠퍼스 건축 공사장의 골조 2층에서 어느 60대 건설노동자가 콘크리트 잔재물을 정리하는 작업 중 추락하여, 끝내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이 죽음의 너머에서 서 있는, 그들을 욕할 생각까지는 없습니다. 아니, 사실은 욕하고 싶습니다. 어째서 이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서, 죽음을 무릅써야만 하냐고. 사실,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줄타기해야 하는 일은 사실 모든 인간이 겪는 일로, 삶과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 거의 유일하게 평등한 것입니다. 아니, 정정하겠습니다. 이었습니다. 직접적인 죽음에 처할 수 있는 순간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의 불평등과 이러한 현실에 대해 외치는, 그러고 그런 목소리가 세상에 전달되는 정도의 불평등. 이러한 불평등들을 단순히 선택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선택과 자유는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 서 있고, 동등한 조건을 지니고 있을 때, 비로소 성립될 수 있을 겁니다. 조건이 다르고, 위치와 환경이 다르다면, 그 하나하나의 차이들은 매 순간 각기 다른 변수가 되어서, 개인의 삶에 개입할 터이고, 우리는 그런 수많은 변수와 그 여파로 인해 파생되는 추가 변수들을 고려할 지적 능력이란 없거나, 설령 존재한다고 할지언정 부족합니다. 설령 고려할 수 있다고 해도, 어떤 조건들은 무조건적입니다. 경제적 조건과 사회적으로 절대적인 지위를 가진 인식, 이른바 헤게모니라고 불리는 것들, 사회적으로 행동을 장려하고, 규제하는 관습과 법제, 물론 이 역시 헤게모니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실제 구속력이 있는 수단으로, 이러한 요소들의 개입에 개인이 저항하기란 힘든 일입니다. 특히 현대의 행정부 비대화 국가에서는 더더욱 말입니다. 그렇기에 현실에선 개인의

  • ㅇㅎㅇ
  • 2022-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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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지현

    ㅇㅎㅇ님 안녕하세요. 사랑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이야기네요. 잘 읽었습니다. 나비를 만나는 장면들이 더 길다면 좋을 것 같네요. 청년이 고뇌하는 사랑을 표현해주는 좋은 매개체인 것 같습니다. 앞부분에 할머니의 기억들은 조금 급하게 끝난 느낌이 들었습니다. 주변 상황에 대한 묘사가 더 들어간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들을 퇴고시 생각해보심을 권해드립니다. 그럼 좋은 작품 또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2022-04-20 13:17:57
    송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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