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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기리며

  • 작성자 ㅇㅎㅇ
  • 작성일 2022-03-06
  • 조회수 377

2022년 3월 2일의 일입니다. 때는 오전 5시 40분쯤, 아마 화이트칼라 계층의 평범한 노동자라면, 여전히 잠을 자고 있거나, 혹여나 근무지까지의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슬슬 일어나서 출근을 준비하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당진에 소재한 H사의 제철소 제1 냉연공장의 도금 포트, ‘철판 등 코팅을 위해 바르는 고체 상태 도금제를 액체로 만들기 위해 가열하는 데 쓰이는 설비’로 도금제로 쓰기 위해 뜨겁게 끓고 있는 400도가 넘는 아연이 담긴 그 용기 안에선, 발견되어선 안 되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사람이었습니다. 50대가 넘는 한 가장이, 도금 과정에서 생기는 드로스, 용해된 금속이 산소와 결합하여, 표면과 바닥에 생기는 잔여물로, 찌꺼기, 혹은 줄여서 찌끼라고 불리는 것을 제거하던 한 명의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2022년 3월 5일의 일입니다. 때는 오후 1시 40분이고, 위치는 동일 업체의 예산 공장입니다. 원래라면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이거나 그 직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마저도 보내지 못한 이가 있습니다. 추락하는 1톤의 금형, 그 바로 아래에는, 역시나 있어선 안 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역시도 50대의 가장, 해당 업체의 2차 하청업체에서 파견된, 해당 금형을 수리하던 노동자였습니다.

똑같은 날의 오전 7시 20분 즈음에는, 포항에서는, 어느 공과대학교의 캠퍼스 건축 공사장의 골조 2층에서 어느 60대 건설노동자가 콘크리트 잔재물을 정리하는 작업 중 추락하여, 끝내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이 죽음의 너머에서 서 있는, 그들을 욕할 생각까지는 없습니다. 아니, 사실은 욕하고 싶습니다. 어째서 이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서, 죽음을 무릅써야만 하냐고. 사실,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줄타기해야 하는 일은 사실 모든 인간이 겪는 일로, 삶과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 거의 유일하게 평등한 것입니다. 아니, 정정하겠습니다. 이었습니다. 직접적인 죽음에 처할 수 있는 순간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의 불평등과 이러한 현실에 대해 외치는, 그러고 그런 목소리가 세상에 전달되는 정도의 불평등. 이러한 불평등들을 단순히 선택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선택과 자유는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 서 있고, 동등한 조건을 지니고 있을 때, 비로소 성립될 수 있을 겁니다. 조건이 다르고, 위치와 환경이 다르다면, 그 하나하나의 차이들은 매 순간 각기 다른 변수가 되어서, 개인의 삶에 개입할 터이고, 우리는 그런 수많은 변수와 그 여파로 인해 파생되는 추가 변수들을 고려할 지적 능력이란 없거나, 설령 존재한다고 할지언정 부족합니다. 설령 고려할 수 있다고 해도, 어떤 조건들은 무조건적입니다. 경제적 조건과 사회적으로 절대적인 지위를 가진 인식, 이른바 헤게모니라고 불리는 것들, 사회적으로 행동을 장려하고, 규제하는 관습과 법제, 물론 이 역시 헤게모니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실제 구속력이 있는 수단으로, 이러한 요소들의 개입에 개인이 저항하기란 힘든 일입니다. 특히 현대의 행정부 비대화 국가에서는 더더욱 말입니다. 그렇기에 현실에선 개인의 절대적인 자유와 전적인 선택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아니, 나기도 전부터 존엄하다는 사실을 떠올려볼 때마다, 누군가가 생존을 위해 열악한 환경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가, 끝내 고통스러운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리고 그런 죽음이 자유와 선택, 그리고 책임이라는 안일한 덮개에 덮이는 것은 용인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11년간, 그 기업의 한 공장, 지난 2일에 어느 이름 모르고, 얼굴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나, 다만 그 역시도 똑같은 사람이란 것만 알 수 있던, 한 노동자가 죽은 공장에서 29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0여 년 전 울려 퍼졌던 ‘그 쇳물 쓰지 마라’는 함성도 이 죽음을 막지 못했고, 그렇게 몇 년이 흘렀습니다. 몇백, 몇천 명이 죽었습니다. 봄에는 빨간 꽃 노란 꽃이 꽃밭 가득 피어나고, 담장 너머로 하얀 나비와 범나비가 춤을 추며 넘어 다니고, 여름에는 흰 구름과 솜구름, 아기 구름이 하늘 가득 피어오르고, 비지땀과 소금땀이 송골송골 맺히며, 가을에는 찬바람, 소슬바람, 산바람이 불어오고, 잎이 떨어져서 쌓이고 또 쌓이고, 겨울에는 흰 눈이 온 세상에 소복이 쌓이고, 오로지 하얀 세상이 되며,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도 사람은 죽었고, 죽었고, 또 죽었습니다.

얼마나 수많은 사람이 작별해야만 했을까, 2021년 1월 8일, 그날이 추운 겨울날이었던가, 국회에서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이른바 ‘중대재해처벌법’을 제정했습니다. 태안의 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이름은 그 법의 별명이 되었습니다. 그 이름 석 자에는 지금껏 다치고, 죽어간 수천 명, 그리고 아마 수만 명의 영이 깃들어있을 것입니다. 이 법은 그들을 위한 추도문입니다. 너무나도 오랜 세월이 걸려 만들어졌지만, 이 양손은 기쁘게 그 두루마리를 펼쳤습니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하얀 숨이 바들바들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나오려다가 얼어붙었습니다. 차마 그들을 보내는 길에 이런 걸 읽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아마, 이보다 더욱, 슬픔을 억누르고 그들을 웃으며 보내줄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을 다른 모든 이들은 이 형편없는 추도문에 도리어 통곡하였을 겁니다.

노동자들의 역사를 생각해봅니다. 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을, 85년의 구로동맹파업을, 1979년의 YH무역의 여공들과 1970년의 전태일 열사의 분신, 29년의 원산 총파업을, 그리고 그 이전과 이후의 수많은 고통과 투쟁, 희생을 기억해봅니다. 이 땅은 한 인간이, 한 노동자가 자기 몸까지 불사르며 퍼뜨린 온기로는 얼어붙은 흙이 녹기에 부족한가 봅니다. 여전히 그 시절의 퀴퀴한 곰팡내와 코를 찌르는 탄내가 우리의 하늘을 에워쌉니다.

어느덧 법률이 시행된 지 1개월이 지났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미 수십 명이 죽었고, 여전히 죽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그들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보내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어두운 밤이 유독 어두워 보입니다…….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목이 마르기 시작하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분명 감히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냐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본인조차도 한 글자씩 써 내려갈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격이 없을지도 모른다. 당사자가 아니니까. 그러나 미약한 꽃봉오리는 작은 바람에도 꺾여버릴 것만 같아서, 아무것도 피워내지 못하고 죽어버리느니, 차라리 펑 터트려내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찬 바람이 불어오면, 무서운 생각이 차츰 떠오른다. 우리는 거대한 리바이어던의 등 위에서, 끝끝내 바다 아래로 잠수하고 말 그 괴물의 등 위에서 서로를 그 괴물에게는 기별도 안 가는, 무의미한 제물로 바쳐가며, 결코 조정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언젠가 몰락하고 말 삶을 연명하고 말 것이라고. 그리고 그 괴물이 드디어 바다로 잠수하는 그 순간까지도, 눈을 가린 자들과 귀를 막은 자들, 입을 막은 자들이 사람들을 그 거대한 아가리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라는 게 두렵다.

조금 전까지 붙들어 매던 글을 다시금 천천히 살피니, 그 뒤를 이을 말을 떠올릴 수가 없어서, 아니, 떠오르는 말은 가득 있으나, 그것이 도무지 입에 발린 말뿐이고,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차라리 찢어버리고 싶다고 느꼈다. 분명 온갖 형언을 덧붙이고, 온갖 수사법을 동원하여 이 글을 끝맺을 수야 있겠지만, 그것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세상의 변화를 촉구할 용기도 없고, 세상의 끝자락에서 희망을 노래할 수도 없으며, 오로지 절망만을 볼 수밖에 없는 약시는 그저 절망 속에서 또다시 절망할 뿐이다.

바람이 멎었다. 살아야 한다. 냉기가 어느 정도 가시고 몸이 다시 온기를 되찾기 시작하자 머릿속에서 처음으로 스친 생각이었다. 따스함이 돌아오는 머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세상에서 절망만을 볼 수 없는 약시라면, 차라리 눈을 감자고. 눈을 감고 절망 너머를 그리자고. 눈을 감고, 머릿속을 가다듬는다.

죽은 이들이 보인다. 그들의 가족들이 그들을 떠나보내는 모습이 보인다. 그들의 눈물이 떨어져서, 그 눈물은 닿을 바닥도 없이, 끝없이 추락한다. 누군가의 사진이 하얀 꽃, 정확히 말하면 조화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의 신원을 알아볼 수 없는데, 저 멀리에서 흙먼지가 일고, 자세히 보니, 그것은 돼지 떼다. 그것들은 마구잡이로 흰 꽃을 뜯어 먹고, 장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놈들이 뜯어먹은 꽃 더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온전치 못하게 손상된 시체, 그리고 그 시체는 품에 한 아이를 안고서, 그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아이를 들어 올리자, 그 아이는 참으로 신기한 것이 우는 일이란 없고, 그 눈은 결의로 차 있는 것처럼, 선명한 빛으로 반짝여서, 눈을 가누기 힘들다. 다시 눈을 뜨니, 아이의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촛불이었다. 촛불. 이 온기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이 밝기도 그랬다. 그러나 이전처럼 이 온기와 밝기가 대단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이 따스함은 온몸으로 전해지지 않았고, 이 밝기는 한 치 앞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이전의 위력은 쇠하고, 그 이전보다도 더욱 못해졌다. 순간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촛불을 손에 들자, 저 멀리서 하나둘씩 촛불이 불을 밝히더니, 곧이어 사방으로 수백, 수천, 아니, 수백만의 촛불이 온 주위를 밝히었다. 갑작스러운 광경에 놀라서 넘어지고만 까닭에 손에서 촛불을 놓쳤는데, 이를 기점으로 온 촛불이 모두 하나로 모여, 거대한 불꽃이 되어 온 세상을 비추었는데, 그 빛은 마치 거대한 여명과 같았다.

눈을 뜨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고 봤더니, 시간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저 조금 전과 비교해서 몇 초가 더 흘렀을 뿐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여전히 마무리를 지어야 할 글이 남아있었고, 현실은 절망이 여전히 단 한 치도 걷히지 않은 상태였다. 손은 다시 펜을 집었다. 그리고 한 자씩 다시 써 내려갔다. 머릿속에 정리된 내용 따윈 없었고, 그렇기에 문법적으로도, 문맥상으로도 좋다고 말하긴 어려웠지만, 한 글자마다 그는 온 힘을 다했다. 엉망진창으로 끝내도, 진심을 담는다면 오히려 낫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손을 놀리며, 입으로는 조악하게 운율을 맞춰가며 한 마디를 작게 읊었다. 그 자신조차도 이런 모습이 실로 낭만파적이라고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았다. 한 음절 음절을 혹여나 함부로 했다가 말이 유리처럼 깨질까 봐 아주 신중히 읽는 것처럼, 음절 하나마다의 휴지가 크고, 목소리는 작고 느렸다. 그러나 알아들을 수 있던 것은 오직 마지막 한 단어뿐이었다.

“……. 전진.”

ㅇㅎㅇ
ㅇㅎ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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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과 인간

추운 겨울이 수백 년간 이 땅 위에 군림하고 있다. 모든 생명을 얼려 죽이는 이 길고도 긴 겨울은 사람들의 신앙, 즉 두려움과 사랑이 공존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먹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 사람들의 믿음이 변치 않는 한 이 겨울은 영속할 것이다. 그 폭정에 온 인민은 고통받으면서 제각기 만의 방식으로 상처 입은 삶을 연명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겨울에 그저 고통받으며 생을 연명하기도 하고, 어떤 자들은 이 겨울을 찬양하며,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하고, 누군가는 헛되이 저항하거나 그도 아니면 그저 삶을 포기하거나 신에게 빌어 이 겨울이 끝나기를 기원한다. 연명하는 자들과 착취하는 자들은 하나로 연결 지어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의 집단을 이루며 겨울을 숭배한다. 강 위에 얼어붙은 얼음과 눈을 이 겨울의 상징물로 여기며, 그 속에서 생명들의 얼어 죽어감을 찬양하는 것이다. 특히 착취자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겨울은 인간 과잉의 재앙을 해결해줄 유일한 방법이며, 겨울의 존재는 인류의 생존에 필수 불가결하다. 이 구원과도 같은 자연법칙 속에서 순응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다른 인민들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다수 인민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거부하며 그들의 언어 속의 저열함을 대개 저들의 본성 문제로 치부한다. 그러나 그런 분석은 틀렸다. 그들 역시도 자신들이 내뱉는 말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겨울의 항구적 존속에 해가 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오히려 생명을 사랑한다. 그들은 강 위의 얼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강 아래를 흐르는 물과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물고기를 진정으로 추구한다. 그들이 얼음을 캐내어 그것을 조각해내어 경애를 자아내는 신의 형상을 빚어낸다는 둥, 그분을 기리는 웅대한 첨탑을 세운다는 등의 짓들이 실상은 그 얼음을 캐고 난 자리에서 신선한 물과 고기를 잡아들이려는 속셈인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 겨울이 불러일으키는 죽음의 심상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겨울의 추위와 황폐함은 치명적인 것이고, 그들은 거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들의 휘하에 있는 자들을 부려 먹으며 그들이 구해오는 땔감과 식량을 그들의 품에서 앗아가서는 그걸로 불을 때워 자신들의 몸을 녹이고, 배를 불린다. 즉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또 자신들의 수족이 발하는 죽음에 가까워지는 순간 더욱 타오르는 그 생명의 열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즉 그들의 말은 모순적이고, 더러운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실제로는 믿음 없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아래에서 착취당하는 수많은 이들 역시 그들의 모순을 감각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옭아매는 그들의 지배를 파괴할 생각은 품지 못한다. 그들이 그토록 떠들어대는 그 하찮은 논리에 자신들도 모르게 지적으로 수용하게 되면서, 내적으로 부조화 상태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생활과 그들 외부의 더욱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 죽어가는 보다 비참한 생을 비

  • ㅇㅎㅇ
  • 2022-11-10
하루의 여정

‘바다에 빠진 아이는 우는 법이 없다. 우는 법조차 잊어버린 채, 그저 한없이 빠져선 귀신이 되어버린다.’ 그는 항상 이 구절에서 막혔다. 그의 능력상으로도 염치의 측면에서도 그는 이 구절의 뒷부분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아예 지워버릴 수는 결코 없었다. 이걸 지우는 순간, 자신이 진정으로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버려버리게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저 두 문장과 씨름했으나 이는 마치 수백 년 동안 깊이 뿌리박은 상서로운 거목을 두 손으로 뽑아서 엎어뜨리려는 시도와 같았다.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렇게 몇 개월을 허송세월했다. 오랜만에 그가 달력을 보았을 때, 그날은 일주년 전날이었다. 그는 아직 동이 트기 전인 새벽에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타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한 치도 피곤이 들어설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길, 어둠이 가득한 길을 작은 전조등 한 쌍이 가르며 나아갔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바다의 동틀 무렵은 언제나 슬픈 정서가 요동치게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서늘한 비수처럼 스치는 해풍이 모래사장을 덮고, 해송림을 스치며 인간의 땅으로 몰려드는 것이 마치 저승에서부터 영혼들이 그리운 고향, 그리운 사람, 그리운 노래를 찾아 돌아오려는 것 같았다. 그는 그곳에서 마치 하나의 이정표처럼 서 있었다. 개 중 하나가 자신을 알아보고, 자신의 품에 안기길 바라면서, 이윽고 눈을 떠보면 그 어린 얼굴이 이 품 안에서 고요히 들숨과 날숨을 쉬며 잠들어있기를, 그런 가망 없는 희망을 품으며 그의 다리는 부동을 유지했다. 얼마간 바람이 불고 곧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이 두 손에 그 한미한 숨이 꿈틀대는 것 같다고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보며 그렇게 느꼈다. 그리곤 다시 눈을 돌려 끝 모를 바다를 쳐다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벅차오를 성싶던 슬픔이 거품처럼 사라졌다. 햇살이 너무 눈에 부신 까닭이었다. 저 태양은 그날을 목도하였을 것이며, 저 뜨거운 얼굴에는 그날의 기억이 결코 지워지지 않은 채 생생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끊임없이 세상을 돌고 돌아 빛을 비추고 또 거둘 것이다. 그런 섬뜩할 정도의 무상함에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봄에는 시간을 내서 동네의 하천을 거닐면서 온갖 예쁜 꽃들이 만개한 풍경을 즐기고 여름에는 날을 잡아서 바다와 깊은 산 속 계곡을 찾으며 싱그러움을 만끽하고 가을에는 멀리까지 나서 단풍으로 유명한 산들을 돌아보며 자연이 그려낸 울긋불긋한 수채화를 감상하고 겨울이 오면 산 높은 곳에 올라서 온 대지가 하얗게 덮인 모습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는 것처럼, 자연을 사랑할 수 없었다. 어느덧 해가 자리를 잡고, 하늘에서 어두운 기운과 붉은 기운이 자취를 감췄다.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는 이제 막 7시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는 막 성당에 뛰어가는 젊은이를 보았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문득 자신의 팔에 차고 있던 묵주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 ㅇㅎㅇ
  • 2022-11-04
장미와 십자가

별이 밤하늘에 가득 피어오른 밤이었다. 그 날에 어느 청년은 사랑을 고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의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창가에서 마냥 창밖만을 내다보았다. 차마 당당히 이야기할 용기가,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그런 사나이다운 고백을 할 용기가 없었다. 그런 그였기에, 그는 자신이 창가로 들어오는 별빛들을 볼 낯이 없다고 생각했다. 창가에 놓인 화분에 심어진 붉은 장미 한 송이의 꽃잎에 앉은 달빛이 이슬처럼 흘러내렸다. 그는 전부 잊고 싶었다. 잠이 오지 않지만, 꿋꿋이도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잠 따위는 자고 싶지 않다는 게 현재로선 그의 생각이었다. 머리에서부터 시작된 과부하가 온 몸으로 퍼져나가며, 그는 몸이 뜨거워짐에 차마 몸을 가만히 이불로 감쌀 수가 없어서 이불을 걷어차고 계속 몸을 뒤척였다. 사랑. 언제나 사랑이 문제였다. 그는, 순간,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지고,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얼마나 오래 전인지도 이제는 까먹었건만, 그 순간의 모독만은, 주위의 시선만은 선명하게 그에게 박혀서 그를 괴롭혔다. 유년의 상처, 이제는 흉터가 되었지만, 여전히 쓰라리긴 매한가지였다. 그는 다시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가, 창틀에 팔을 걸친 채, 몸을 기울여 창문 밖으로 목을 빼서 바깥 풍경을 살피었다. 그가 바라보는 풍경은 모든 게 작아 보였다. 마치 인간이 개미를 바라보는 구도가, 그에게는 주위 풍경을, 인간 세상을 바라보는 구도였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사는 공간에서 이렇게 내려다보면, 그저 멋진 풍경에 감탄을 자아내거나, 어쩌면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섰다는 근거 없는 오만함이 차오르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에겐 이 모든 게 헛되었다. 그에게 이 풍경은 라푼젤이 자신이 갇힌 탑에서 내려다보는 풍경과 같았다. 내려가고 싶다. 그것은 그날 이후로 상실한 그의 권리이자, 그날부터 여태껏 간절히 바라온 그의 권리였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죄는 사면되고 권리는 회복될 수 있으나, 그의 것은 결코 그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의 죄는 그의 탄생 자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 죄를 심판하는 것은 이 세상의, 적어도 이 사회의 전원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지엄한 만인의 사법부의 재판소에서 피고인석에 앉아있는 채로, 이미 유죄는 정해진 채, 그 처벌의 강도만을 저울질할 차례만 남은 상황에서,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 최대한으로 거세하고 검열하여 그들의 자비를 구해야만 하는 처지인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는 차라리 우리에 갇힌 한 마리의 매우 특이하고 이색적인 동물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 옛날에 사람마저도 동물원에 가둬서 전시하였던 오랜 전통이 오늘까지도 재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낫게 느껴질까? 찬바람이 불어와서, 공기가 촉촉하여서, 뭐 그러한 잡다한 이유들로 그는 밖이 차갑게 느껴졌다. 창가에 놓인 화분에서 예쁜 자태를 뽐내는 붉은 장미도 추운지 몸을 떨었다. 하늘에 있는 별들도 몸이

  • ㅇㅎㅇ
  • 2022-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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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지현

    ㅇㅎㅇ님 안녕하세요. 위태로운 열악한 환경들,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는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의 작업 모습들이 잘 묘사되어있어 집중하며 읽었습니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화자에 대해 궁금해집니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소설이니만큼 화자의 시점과 상황을 고려하여 이야기의 확장을 고려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그럼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2022-04-18 18:13:39
    송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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