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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의 사망에 대하여 - 2일

  • 작성자 소묘
  • 작성일 2022-02-28
  • 조회수 201

몸이야말로 바다와 거친 폭풍의 후계자, 강철과 그 급을 같이 하는 단단한 눈매의 황제, 오똑 꺾어올린 부리와 다리의 미인, 그 외 여러 경외를 갖춘 호칭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일 것이다. 어찌 이리 아름다울 수 있는지! 아아, 호수를 지나며, 다리로 물살을 가르며 유영하는 자태는 그 어떤 이도 홀리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호수에서는 기름으로 얼룩진 오리들을 마주치기에, 짐은 강보다는 어느 푸릇푸릇한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미물들의 조잡한 속세를 내려다보며, 고고히 날개를 싸매어 둥지에서 우수에 젖은 옛 기억들을 다시 펼쳐보고 있었다.

 

짐의 어미도, 아비도, 우뚝 솟아있는 최상을 낳을 것이라고는 차마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회색 털이 채 마르기도 전에 짐은 이미 빛을 내뿜고 있었나니, 광휘에 휩싸여, 놀라면서도 시기하여, 짐의 형제자매들은 짐의 먹이를 매번 탐하였다. 그럼에도 짐은 높은 긍지에 힘입어, 그들에게 관대한 선행을 자주 베풀었다. 짐의 발육은 그때부터 이미 기대치를 넘어, 저 멀리 어느 봉황의 것에 준할 정도였으며, 정신은 지구의 넓이로 포용할 수 없어 붐비며 터져나가고 있었다.

 

이런 추억들을 다시 만끽하여 느껴보며, 짐은 아직도 잠에 기운 해가 눈을 차마 뜨기도 전에, 모든 몸단장을 마치었다. 이 몸의 윤기 좌르르 흐르는 깃털의 빛을 하늘이 탐하고 있었다. 검은 안개에서 서서히 보랏빛으로 넘어가며, 하늘은 짐의 빛깔을 어설프게 따라하고 있었다. 짐은 코웃음을 치며 날갯짓을 해보였다.

 

'보아라...이것이...이것이, '본질', 이다...'

 

넌지시 핀잔을 주며 짐은 다시 속물들의 세상에 진입했다. 그들의 궤도는 짐의 넓은 아량에도 극히 단순해 보였고, 가끔씩 작은 조무래기들이나 몸만 늙은 것들이 언짢은 행위를 해댈 때 짐은 그들에 대한 남은 애정도 내던질 뻔하였다. 이 몸의 강림에도, 길을 비키지 않으며, 심지어는 짐의 발자국을 그 더러운 발로 덮는 행각을 벌이다니, 참 미개한 종족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짐은 잠시 낙엽들 사이로 피신했다. 낙엽들이 파리한 손가락을 팔락거리며 짐을 반겼다.

 

'오냐, 오냐, 나의 백성들아, 그동안 잘 있었느냐.'

 

짐은 형보다 먼저 날아갔다는 동생의 슬픈 인생사를 경청하고 함께 끌어안아 통곡하기도 하고, 이번에 새로 들어왔다는 댁의 안부를 묻기도 하며, 짐이 한평생 보살핀 원로의 험난한 옛이야기들엔 미소 짓기도 하며, 이 군집을 지극히 정성을 다해 자식들처럼 보살폈다. 그들과 우리들, 모두 같은 말이라 감히 지칭할 수 있었다.

 

돌담 뒤에 곱게 놓여 짐의 통찰과 광대한 안목 하에, 계속하여 몸집을 불리는 마을을 뒤로 하고, 이 몸께서는 때마침 짐에게 바쳐진 달콤한 밀가루 덩어리 조공을 한 움큼 음미하며, 뒤쫓아 따라온 바람에 몸을 실어 편안히 여정을 시작했다.

 

호수 옆 풀밭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제법 위로 치솟아 있었다. 불어온 다른 바람의 선망과 질투를 한 몸에 받으며, 짐의 심복으로서 활약한 바람은 이내 자취를 감췄다.

 

아, 이 잔디가 도대체 얼마 만인지!

 

세상살이에 도태되어 자기수양의 뜻을 바로잡은지 어언 닷새째, 그동안 짐은 짐의 권력이 앞에 놓여있는 맑은 호수에까지 미칠세라 그녀의 간곡에도 잠시 떠나 있기로 결정하였었다. 그러나 정이라는 것이 원체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요, 또 시간을 초월하여 맺어지는 것이기에, 짐은 다시 호수에 이끌리게 되었다. 얼마나 서러워했으면 잔잔했던 물결에 크고 작은 파장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인가! 그녀의 지조와 건강을 염려해서라도, 짐의 방문은 단순히 이타적이고 운명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녀의 몸뚱아리는 급격하게 흔들리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도련님.'

 

'허허, 자네에겐, 달도, 해도 있지 않은가.'

 

'달이 떠 있고 해가 아무리 빛나도 같이 볼 사람이 없으면 서운하여요...'

 

짐은 크게 웃으며 다리를 바짝 들어 그녀의 곁에 붙였다. 그녀의 진동이, 짐의 심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왔다. 유한한 무한의 순환의 소유자, 생명의 황후, 그리고, 짐의 사랑 곁에서, 짐은 퍼뜩 잠이 들었다.

 

녹음이 그늘져 빛났다. 사방으로, 하늘로까지 연둣빛깔 색채가 어우러졌다. 짐의 날개가 모두를 덮고 있었다. 펄럭거리며, 바람을 밀어내며.

 

짐은 한낮에 정신이 들었다. 곁에서 호수는 졸고 있는 중이었다. 짐은 짐의 자유를 부러워해 줄기와 싹을 움트는 나무들을 향해 한 번 지저귄 다음 총알같이 낙하했다.

 

바람이 깃털에 속속들이 박히며 짐의 매력을 퍼뜨리고 있었다. 이미 땅 부근까지 향기는 만연하여, 도처의 불완전한 생물들 중 몇몇도 짐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펄럭이는 천막이 달린 고층의 옥상 위에서, 짐은 세부적인 관찰을 다시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아무리 보아도 예쁠 것 하나 없었다. 이런 것들도 짐의 교양으로 품어 치유해야 한다니, 짐은 이 몸의 운명을 중얼거리며 비난하기도 하였다. 따뜻한 햇살이 짐의 등 뒤로 비춰와, 짐은 돌아서서 해답을 갈망하였다.

 

'어찌하면 이 짐승들을 구원할 수 있나이까...'

 

짐은 미소만 벙긋하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았다.

 

짐은 머리가 아득해지는 것을 징조로 여기고 다시 짐의 안식처로 돌아가 선정에 대해 고뇌해보기로 다짐했다. 짐의 보금자리는 짐의 은혜를 받아 따뜻하게 달궈져 있었다. 짐은 평평한 자리에 앉아 대책을 모색했다.

 

'그들은 그대로 생활하기를 좋아한다. 짐의 설교에도 그들은 암만 잘 감동하지도 않을 것이다. 짐의 화려한 언변에도 그들은 편협함을 결국 내놓지 못하고야 말 것이다. 아, 불쌍하고 미천한 것들, 그들에게 닥쳐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다니!'

 

짐은 이 소위 '인간'이라는 것을 사소히 동정하였다.

 

'짐의 능력이 비범하여 세상을 일구어 놓았다 한들, 이 거대한 사업은 후에 누가 떠맡을지도, 그리고 계속하여 혁신을 도모할지도 전혀 모를 일이다. 무지한 것들의 계몽에는...그래! 몽매한 것들, 천치들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짐과 짐의 모든 업적의 불사를 기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짐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했다. 찌푸린 눈살로 짐은 대상을 찾았다. 가르침을, 전수할 수 있는...아! 저기 있었다. 빨간 지붕에 다섯 글자 간판, 그 중 세 글자 '유치원'은 선명히 눈에 보였다. '유치원'이, 짐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이것은, '유치원'은, 이 세상 모든 지식의 정수로서, 이 땅의 유일한 신성으로서, 빛날 것이었다. 해가 밑으로 꺼지고 있었다. 빨리, 빨리 이 창대한 계획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짐은 검붉은 지붕 위로 행진했다. 짐의 넘쳐흐르는 지식과 함께, 짐은 짐과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냉랭한 경계를 부수고 재차 전진했다. 짐의 높이 뜬 꽁지는 광채를 교시하고 있었다. 이 몸은 세계를, 그 흐름을 비틀 것이었다.

 

'짐의 친애하는 자녀들이여, 이 몸의 말에 경청하라.'

 

짐의 우렁찬 포효는 저 멀리 쓰레기봉투도 홱 뒤집히게 했다. 땀이 흥건한 미개의 생물들은 꾸물거리며 얼금뱅이 같은 신수를 과시하기만 했다.

 

'짐은 이 시대의 흥이요, 과거와 미래의 선구자이니라. 그대들은 모두 청아한 눈을 들어, 짐을 응시하여라.'

 

몇몇 것들이 큰 눈망울을 껌벅껌벅 굴리며 짐을 빤히 바라보았다.

 

'손가락질 하지 말지어다! 짐의 옥체는 금보다도 고귀하며, 그대들의 눈앞에 품격을 드러내고 있다!'

 

짐은 짐의 장황한 위업을 열거하며 연설을 시작하였다.

 

'이 몸은 유리의 반역자, 바람의 군주, 속도의 지배자, 번개의 최측근, 그리고 그 외 여러 칭호로 불리우는 아차산 참씨 치외군(癡聵君)파 77대손이다. 오늘 그대들에게 나의 방대한 정신을 흘려주러 찾아왔나니, 그대들은 그 허약한 귓바퀴를 쫑긋 세워라.

 

'짐은 곧 물결이요, 이 바다의 여러 파장 중 가장 굳센 이외다. 짐은 어느날 불행이 내려앉은 짐의 고향을 처량히 여기며, 어떻게 하면 악을 그 소굴로부터 쫓아내어, 우리 모두의 염원을 이룰 수 있는지 참으로 오랫동안 초민하였다. 그러다 짐은 그대들을 본 것이다. 나의 제군들이여, 그대들은 짐의 가르침을 잊어버리지 말고 한 자 한 자 모두 그대들의 뇌리에 새겨놓길 바란다.

 

'짐의 첫 가르침은 바로 종속과 존립의 관계이다. 그대들은 짐과는 달리 모두 시간과 죽음이라는,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폐를 쥐어짜고, 머리를 굴려봐도 살아날 수 없다는 생각에 휩싸여 그대들의 판단은 흐려지면 안 된다. 그대들은 시간과 죽음을 따로 놓아 생각하여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죽는 것은 맞으나, 죽음이 닥쳐왔다고 해서 그대들의 시간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생사의 기로에 놓인 모든 장애물을 흡수하고, 통치하여 나보다 약간 더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 군주 시간에게 잡혀갈 때까지 그대들의 목숨을 보장하여야만 한다. 그것이 그대들이 사는 의미이다. 그대들의 사명은 시간이 목숨을 앗아가는 것, 기억하여라. 시간이 목숨을 앗아가는 것, 이다.

 

그럼 둘째 가르침으로 넘어가겠다. 죽음이라는 것은 어떻게 초월하는가? 그대들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제대로 된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짐과 같이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는 자는 죽음의 앞에서 호탕하게 웃는 법이다. 죽음을 초월한다는 것은 죽음을 동등하게 맞이한다는 것이다. 자, 짐을 따라 외쳐보거라. 하! 하! 하!'

 

귀머거리들은 등을 돌리지 않았다.

 

'짐의 마지막, 셋째 가르침은 바로, 날아오르는 법이다. 그대들은 짐의 깃털을 흉내내기 위해 그 헝겊을 뒤집어 쓰고 있지 않은가? 그대들이여, 짐의 숙달된 비행을, 가만히 지켜보아라-'

 

짐은, 넓은 깃털을 활짝 펼치며 지붕에서 날아올랐다. 짐의 날개는 점점 더 넓어지며, '유치원'을 에두른 녹음을 덮어, 짐의 그림자로 다시금 빛나도록 하였다.

 

짐의 예상대로 망연자실한 짐의 제자들은 짐의 말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땀 한 방울도 흘릴 자신이 없다니! 그들은 역시나, 짐의 가르침을 널리 퍼뜨리기 위한 수단,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다. 짐은 한편으로는 그들이 측은해보이기도 하였다. 파란 종이 대신, 짐의 백성들을 써도 괜찮은 것을, 그들은 짐의 존재를 온몸으로 부정하려고 하고 있었다. 아아 얼마나 불행할까, 그들은!

 

짐은 다시 짐의 둥지로 올라섰다. 짐의 장장 한 시간에 걸친 긴 번뇌는 밝게 타오르던 해도 자존심 센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역시 짐의 나무는 아직 너무 높았다. 저런, 역겨운 것들이 가꾸는 것들에 비해, 짐의 나무는 멀쑥하니 다부져서, 위로 쑥 솟아 있었다. 짐은 기분 전환을 위해 식사를 편히 할 장소나 찾아보았다. 어제 기억해놓았던 그곳이 눈에 띄었다. 짐은 살포시 내려앉아, 가벼운 다리를 짐을 위해 부풀어 오른 푹신푹신한 땅에 안착했다. 짐은 달콤한 것을 고상하게 입에 넣어 굴리며, 바다 같은 마음에 다시 애정 한 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짐은 다시 날아오르려 준비했다. 흙이 짐의 발가락을 붙잡으며 애원하였으나, 짐은 그 만류를 뿌리치고 창공으로 치솟았다.

아아! 짐의 날개에 따끔한 충격이 울렸다.

저 흙바닥, 저놈이, 하는 사이에, 짐을 스쳐 가는 또 다른 공격이 있었다. 땅이 아니었던 것인가? 그럼, 그럼 누구인가? 저 콘크리트 기둥? 저 구부정한 침엽수? 저 킬킬대는 저 악동들? 저 악동들, 감히 누구의 몸이라고 손을 대는 것이냐! 드디어 미쳐버렸구나!

짐은 속히 피신하였다. 하얀 기둥 뒤로 돌아가려 했으나,

쩡하는 소리와 함께 ,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짐의 길을 막고 있었다.

짐은 짐의 굳센 다리로 그것과 한 판 겨룰까도 고민해보았지만, 짐의 참으로 따뜻한 관용은 너그러움을 베풀라고 연신 재촉했다.

하는 수 없이 짐은 반대편으로 날아가며, 저 반란에 대한 복수를 예고했다.

‘이것들아! 나를 잘 보아라! 이 모습이 몇 해 후의 너희들의 모습이 될 터이니!’

짐은 낮게 날아 짐의 관할인 낙엽의 마을로 들어갔다. 이파리들이 어머, 어머, 소리 지르며 짐의 무너진 자세를 부축해주었다.

짐은 붉게 타오르는 마음을 추스르며, 냉정하고 잔인한 벌에 그들을 담굴 것이라고 나지막이 되뇌었다.

그들에게 맞설 군대, 강한 군대가 필요했다. 순수한 낙엽들을 악과 죽음으로 모는 것은 짐의 성품으로는 무리였다. 짐 아래에는 낙엽 마을과, 또, 짐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짐의 혜안은 짐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마련해 두었던 것이다.

‘유치원’!

그들은 단순히 도구이자 용품에 불과했다. 짐에게 딱 들어맞아 있었다. 그들을 짐의 현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며, 짐을 위한 수단으로 변모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하고, 날개가 무거워질 정도였는가, 짐은 태양에게 무겁고 막심한 사명을 밝힌 것이 한편으로는 후회도 되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빛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나 이런 것들은, 짐에게는 장애물이라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짐은 발을 뒤로 차며 단단히 각오했다.

‘이들에게 자비는 없을 것이다!’

짐은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마을 옆에 있는, 그 검붉은 벽돌 지붕으로 직진했다. 짐의 눈 옆에 무언가가 흘깃 비쳤다. 막지 말지어다! 은색, 금빛이 찬란한, 아아, 그대는 달인가? 짐은 달을 반겼다. 나의 기사여, 나의 충실한 부하여. 검붉은 지붕이 눈앞으로 털썩 다가왔다. 짐의 군대는? 짐의 군대는 이미 무장을 전부 갖춘 채, 가부좌를 틀고 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나를 칭송하여라, 나를 칭송하여라,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라, 제군들.’

짐은 시끄러운 경적과 문 열리고 닫히는 전쟁의 쇳소리를 뒷전으로, 하늘보다 더 높은, 짐에게 걸맞은 자리에 도착했다.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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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땅거미 깔린 밤밭에 누가 소달구지 끌리는가?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장녀. 그들은 덜컹거렸다.   나무바퀴는 문드러져 곡을 하고, 이불에 둘러싸인 아이는 깜박거리며 눈물 부스러기를 털어냈다. 여름의 치졸한 도발은 그들의 눈앞에 불길을 뿜었다.   그들의 앞에는 무엇이 지나가는가?   몇 발걸음 앞에는 가시 돋친 고목 하나. 그 위에는 두꺼운 날개를 여미는 까마귀가 시시각각 부서지는 강둑을 지키고 서있었다. 또 몇 분 뒤에는 미미하게나 불어오던 밤바람이 멎고 장엄한 숲이 시야를 가로채갔다.   일그러진 박쥐들이 나무그늘 사이로 숨어들었다.   - 누우나. - 옳지. - 나, 있잖아, 누나, 무언가 기억이 났어. - 쉬-이. - 나 어무니 얼굴이 기억났어. - 그래, 그래.   아이는 무사한가?   신체는 온전하나 유복하던 면전은 시대의 파편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누이의 얼굴도 그러하며 다만 연상이라는 듯이 제법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가슴팍에 어린 얼굴을 파묻고 대자로 늘어진 아이의 모습은, 천하태평과도 유사했다.   바람의 포효소리가 잎사귀들을 뒤섞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일말의 호롱불도 그 굉음을 시작으로는, 이젠 제 명을 다했다는 건지, 도무지 빛나지도 심지어 깜박거리지도 않았다. 누이는 이만하면 되었으려니 하고 소를 멈춰 세웠다.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강이 출렁대고 있었다. 달을 먹은 강은 조약돌에 채일 때마다 하얀 빛을 울컥울컥 게워냈다. 달빛이 그림자를 온통 휘저어 놓은 밤이었다. 누이는 어둑어둑하니 각이 진 바위 옆에서 실밥이 다 끊어져 버린 담요를 뒤집어쓰고 아이의 조막만한 손을 와락 붙잡았다.   소는 무사한가?   흠칫, 무언가 있으매 어디 있느냐 하니 바람 가라사대 저기 저 쪽에 회색 무언가 보이는구나 하시니 흠칫, 콧잔등이 벌렁대고 땀이 방울 맺히고 발굽이 점차 깊게 땅을 판다. 두두...두두...두두... 늑...! 일그러진 박쥐들이 나무그늘 사이로 숨어들었다. 바람의 포효소리에 누이는 벌떡 일어났다. 콰지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이는 더듬거리며 아이부터 찾았다. 새근대며 자는 머리통을 보고선 누이는 소를 확인했다. 달구지는 뜯겨 나간 듯이 처참하게 박살 나 있었고, 소는 온데간데없었다. 무언가, 무언가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멀지 않았다. 누이는 아이를 데리고 바위 뒤로 숨었다. 달은 이미 잎사귀가 헤쳐 놓은지 오래였고, 막 일어난 아이의 숨소리만 외로이 들렸다. 모든 것이 멈춰 있었다. 어둠이 길게 늘어졌다. 누이의 눈가에 흘깃 비치는 것이 있었다.   소는?   곁에 있었다.   수군대는 소리가 빽빽한 어둠에서 흘러나왔다. 악과 죄만 무성한, 끝이 다 터져버린 솜이불 틈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끊임없이 누이를 옥죄었다. ‘아 이 얼마나... 우리들은 결국... 살아! 도망!‘ 누이의 지친 귀에 풀잎이 스치는 소리가 굴러왔다. 누이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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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26
갈림꽃

햇볕을 쬐고 있다고 느낀 건 한순간이었다. 다리에 쥐가 저려왔다. 쥐가 핑그르르 돌며 내 몸을 감싸왔다. 소파였나? 그래, 소파였다. 어제 일을 떠올려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무언가 희미하게 떠오르더니 꺼져버렸다. 꺼져버리었다, 저버리다, 저리다. 감각이 양 옆에서 나를 압박했다, 나의 복부를. 하임리히, 튀어나와! 기사 제목 같지 않은가, 하임리히 ... 튀어나와. 기억, 기억, 기억. 참 갓난아이구나, 너. 엄마는 기억하니? 응앙응앙, 응앙응앙. 가시방석의 가시모란속 가시이리. 가시리잇고. 그녀는 뒤섞인 꿈에 설핏 비쳤었다. 돌아가던 밤 속 호수의 영상, 그녀는 영혼의 연기. 불타오르는 연기, 한낱 낟알. 그리고 나는 뭘 한 거지? 보리 낟알이 쌀 낟알보다 귀하다고 할 수 있는가. 맥주병이라니, 수영은? 수영에는 배영, 평영, 접영, 자유형이 있지. 선생님한테 배웠어, 어릴 때. 내 옆에는 공책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리고 정숙해 주십시오, 진술하겠습니다, 여러분. 숙고, 심사숙고, 심사, 위원, 노래노래, 말 들, 잔잔한 달림간격, 다ㄹ리다 지침면 말들 해줘, 3번, 메시지, 모두 50원, 50전은 얼마? 1원 반, 쥐꼬리만큼, 반 병, 만 명, 총 지ㅊㅜㄹ 50만원. 감각이 내 몸에 다시 흘러왔던 것처럼 다른 곳에 머물던 회한이 이마로 끼쳐왔다. 슬픔이 그대를 덮치고, 파도로 몰려 올 때면, 어떻게 해야겠어, 달아나야지. 해는 통근한지 조금 되어보였다. 퇴근. 30분, 11시. 총 지출 50만원. 무언가를 기록해야한답시고 이런 짓을 해놨단 말이야? 다 들어있다고, 이 지겹게도 지껄이는 머릿속에. 때는 해가 중천에서 기울어가는 하루의 한 시기였다. 다리 밑 잔디밭에 다리, 또는 손을 교차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나니, 그들의 이름은 사랑이었다. 별이 가끔씩 얼굴을 비치며 지날 때마다 그들의 간격은 더욱 가까워졌다. 보름달. “봐봐, 우리들을 비춰주려고 나온 거야,” 가연이 입술을 가늘게 연 채 음송했다. “하늘도 우리를 축복해주는 것 아닐까?” “내 눈에는 유람선 밖에 안 보이는걸.” “쑥스러운 거지?” 가늘게 미소를 띤 흰 얼굴. 그것이 보름달이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하늘은 우리 사이에 끼어 들 수 없어. 영원히, 오래도록. 여름바람이 어느새 볼을 어루만지고 떠났다. “별이 참 아름답다.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서도 이 별을 감상하고 있겠지.” “우리처럼은 아니지.” 가연은 앙증맞게 기지개를 펴며 목을 뒤로 젖혔다. 이제, 몇 분 뒤면 어둑한 아름다움에는 한 송이의 꽃이 필 것이었다. 때문에 여기로 왔었지. 유람선이 멈추어 섰다. 그리고선, 이슬 위에 부는 연기처럼, 그녀는, 밤이 잠시 밝았다. 이마를 맞대고 조용히 있었다. 무한한 무의미의 굉음이 밖에서 울려 퍼지며 모든 소음을 차단했다. 우리 둘만의, 우리 둘만, 우리만, 끝없이, 끝없이 울려 퍼졌다. 감정의 음색. 눈길의 조화. 그래, 그랬었지. 지금은 겨울이고 말이야. 암, 그렇고말고. 봄의 첫새벽. 월요일의 첫새벽. 어디나 갈까.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코트 단추

  • 소묘
  • 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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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지현

    소묘님 안녕하세요. 인간이 주인공이 아닌, 새가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다만 특별한 사건이 도드라지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은 방백과 장면들이 주가 되어 아쉬운 느낌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느끼는 우월이 재미있는 반면, 주인공의 시선 말고도 다른 묘사나 상황들이 더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2022-03-21 15:44:31
    송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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