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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의 사망에 대하여 - 1일

  • 작성자 소묘
  • 작성일 2022-02-26
  • 조회수 221

1.

 

땅거미 깔린 밤밭에 누가 소달구지 끌리는가?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장녀. 그들은 덜컹거렸다.

 

나무바퀴는 문드러져 곡을 하고, 이불에 둘러싸인 아이는 깜박거리며 눈물 부스러기를 털어냈다. 여름의 치졸한 도발은 그들의 눈앞에 불길을 뿜었다.

 

그들의 앞에는 무엇이 지나가는가?

 

몇 발걸음 앞에는 가시 돋친 고목 하나. 그 위에는 두꺼운 날개를 여미는 까마귀가 시시각각 부서지는 강둑을 지키고 서있었다. 또 몇 분 뒤에는 미미하게나 불어오던 밤바람이 멎고 장엄한 숲이 시야를 가로채갔다.

 

일그러진 박쥐들이 나무그늘 사이로 숨어들었다.

 

- 누우나.

- 옳지.

- 나, 있잖아, 누나, 무언가 기억이 났어.

- 쉬-이.

- 나 어무니 얼굴이 기억났어.

- 그래, 그래.

 

아이는 무사한가?

 

신체는 온전하나 유복하던 면전은 시대의 파편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누이의 얼굴도 그러하며 다만 연상이라는 듯이 제법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가슴팍에 어린 얼굴을 파묻고 대자로 늘어진 아이의 모습은, 천하태평과도 유사했다.

 

바람의 포효소리가 잎사귀들을 뒤섞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일말의 호롱불도 그 굉음을 시작으로는, 이젠 제 명을 다했다는 건지, 도무지 빛나지도 심지어 깜박거리지도 않았다. 누이는 이만하면 되었으려니 하고 소를 멈춰 세웠다.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강이 출렁대고 있었다. 달을 먹은 강은 조약돌에 채일 때마다 하얀 빛을 울컥울컥 게워냈다. 달빛이 그림자를 온통 휘저어 놓은 밤이었다. 누이는 어둑어둑하니 각이 진 바위 옆에서 실밥이 다 끊어져 버린 담요를 뒤집어쓰고 아이의 조막만한 손을 와락 붙잡았다.

 

소는 무사한가?

 

흠칫, 무언가 있으매 어디 있느냐 하니 바람 가라사대 저기 저 쪽에 회색 무언가 보이는구나 하시니 흠칫, 콧잔등이 벌렁대고 땀이 방울 맺히고 발굽이 점차 깊게 땅을 판다. 두두...두두...두두...

늑...!

일그러진 박쥐들이 나무그늘 사이로 숨어들었다.

바람의 포효소리에 누이는 벌떡 일어났다. 콰지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이는 더듬거리며 아이부터 찾았다. 새근대며 자는 머리통을 보고선 누이는 소를 확인했다. 달구지는 뜯겨 나간 듯이 처참하게 박살 나 있었고, 소는 온데간데없었다. 무언가, 무언가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멀지 않았다. 누이는 아이를 데리고 바위 뒤로 숨었다. 달은 이미 잎사귀가 헤쳐 놓은지 오래였고, 막 일어난 아이의 숨소리만 외로이 들렸다. 모든 것이 멈춰 있었다. 어둠이 길게 늘어졌다. 누이의 눈가에 흘깃 비치는 것이 있었다.

 

소는?

 

곁에 있었다.

 

수군대는 소리가 빽빽한 어둠에서 흘러나왔다. 악과 죄만 무성한, 끝이 다 터져버린 솜이불 틈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끊임없이 누이를 옥죄었다.

‘아 이 얼마나...

우리들은 결국...

살아! 도망!‘

누이의 지친 귀에 풀잎이 스치는 소리가 굴러왔다. 누이는 바로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두 손에 아이를 들고, 뒤로, 뒤로, 강 주변까지 다리를 조용히 움직였다.

‘그들은...

왜...‘

강까지 단 두 발자국이었다.

‘하나..

둘...

세...‘

누이는 뜀박질을 쳤다. 깊은 수심도 보지 않고, 뒤도 돌지 않은 채로 달이 지켜보는 강에서 풍덩풍덩 휘저으며 나아갔다. 물살에 천둥소리가 녹아 흐르는 듯했다. 누이의 귀까지 물이 찼다. 머리카락은 강둑으로 뻗어나가려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흩어지며 물에 잠기고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끝까지, 그 땟국에 전 손은 아이를 치켜들고 있었다.

아이는 뒤를 돌아봤다. 아이의 목 뒤에 소름이 끼쳐왔다. 달이 입김을 분 듯이 아이는 차갑게 흐르는 물살로 내던져졌다. 물이, 그 부드러운 죽음의 엄습이 아이의 얼굴에 드리웠다. 얼음장 같은 손아귀가 아이의 몸을 덮치면 아이는 손을 마구잡이로 내저으며, 어떻게든, 어떻게든 수면 위로 올라가려 했다.

아이의 눈빛이 점차 달보다 희미해져갔다.

아이의 등에 평평한 것이 닿았다. 그가 뛰놀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집에 돌아오면, 그의 머리와 등을 싸매주던 마룻바닥 같이 단단하고 따스한 것이었다.

빛이 다시 그를 맴돌았다. 그의 집에 있던 수만의 기왓장 같이, 그의 눈 위에 밤하늘이 길게 늘여진 별들로 조각난 채 휘몰아치고 있었다. 후텁지근한 땅바닥에 아이는 비틀거리며 누웠다. 아이는 땅을, 그를 매몰차게 내쳤던 땅을 온몸으로 반겼다.

 

누이는?

 

다리가 한 쪽으로 쏠린 채, 누이는 땅바닥을 가까스로 붙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아 그 치마, 하나코와 카즈코에게 몸을 한 번 팽 돌리며 자랑하던 그 날이 선 다홍치마는 누이의 다리에서 사르르 떨리고 있었다.

 

- 누나, 누나, 누나, 누나,

- 다 괜찮다, 아무렴.

- 누나, 나 덥구 그리구 누나에게 말, 하고 싶어.

 

누이의 눈이 번뜩였다. 아이의 가슴이 들쑥날쑥하게 들락날락거렸다.

 

- 그래, 그래.

 

누이는 무거운 다리를 파르르 옮기며 연신 거친 숨을 토해냈다. 손바닥에 실 같이 가느다란 생채기가 여럿 났다.

 

- 누나, 나, 나, 아직 돌아가고 싶어. 나 아직, 땅에다 단지를 파묻어 놨어. 그거 꺼내구 또 그럴 거야. 아니, 나 아직, 아직, 나 안 아파 그지?

- 맞아, 어디가 아프다고.

 

오묘하게도 누이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은 미소 짓는 입꼬리만 내놓고 있었다.

 

- 그러니까 나 아직, 아니야. 나 선생님이 되기로 약속했어. 친구들에게 다 말해놓고 왔는데, 돌아가야, 돌아갈래. 우리 어무니 아부지, 우리 어떻게 왜, 우리가, 우리만, 이건 정말 아니지? 누나, 나, 보여, 저 잎이 흔들려. 저거 뭐야, 누나? 누나?

 

누이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 아, 아, 아, 아,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 따뜻하게 좀 하자.

 

누이는 아이를 조심히 들어 품에 고이 안았다. 누이의 숨이 아이 위에 훅 끼쳐왔다. 마치 흙에 생명을 불어넣듯이 누이는 몇 번이고 따뜻한 바람을 내쉬었다.

 

- 누나, 나 가위로 색종이 자른 거 나야. 너무 예뻐서 그랬구 그거 말곤 내가 한 적 없어, 아니야. 누나 듣고 있지? 나하, 내가하,

 

잠잠해진 물결 위로 어둠이 들이치고 있었다.

 

- 나 풀밭에 자주 나가. 누워서 별을 많이 봐. 여자애도 별 반짝였는데. 가서, 햇님이랑 안녕하세요하고 뒹굴어. 새벽에 정말, 시원해. 내가 인사하면 인사 받아주고 착해. 울집 근처에 새가 누워 있었어. 안녕했는데, 나, 나, 정말 돌아가는 거지? 아아아, 아아아...

 

누이가 강하게 외쳤다.

 

- 아니야, 쉬-이! 넌 다 괜찮아. 아픈 데도 없어. 너는, 너는,

- 나...

 

아이의 기침이 둘의 몸을 심하게 흔들었다.

 

- 나, 이제, 나, 아직, 하고 싶어. 누나처럼 똑똑해지는, 선생님도, 우리 집 책 다 어려운 것마저 다. 안경 써볼래. 나 아직! 더...힘들...콧수...공놀이...새끼손...마지...어머아버...아!...

- 제발...! 제발...이제는! 더 이상은!

- 나...쌩...건...누나두...아프지두 않구...안돼요! 아직요...아앗...다 괘않아 너넌...우우우...옷...옆...사...잘...정말...

 

한 번의 거대한 기침을 마지막으로, 소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소년은 천사처럼 누워있었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채, 눈을 감고, 팔다리는 마치 세상을 안은 듯이, 소년은 덜컹거리는 소달구지 위에 잠자고 있던 그대로 대자로 있었다. 마치 한 번의 귓속말이면 부스스 깨어날 것처럼, 소년은 그렇게 가뿐히, 살며시, 땅을 떠났다. 달밤은 엄숙히 굳어있었다. 누이는, 드디어, 집을 떠나고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지나간 두 달의 모든 바람이 아이의 머리를 헝클어뜨린 것처럼 누이의 눈가를 고요히 닦아주었다.

 

그렇게 하여, 인간의 모든 것보다도 오래된 그 길고 긴 순환은 다시 녹슨 쳇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육중하게 쇳소리를 내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 문이 열렸군.

- 들어갑세.

 

눈들이 깊은 잠에서 다시 깨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아, 마지막 끈은, 마지막 가지는, 그렇게 강을 움켜잡고 있는 숲 속 나무 한 그루 옆에서, 그만 막을 내리고야 말았다. ‘악상’이라는 작고 미미한 글자로 어찌 이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지도, 까마귀들은 이를 어찌 알고 나무 위에서 둥글게 둥글게 바람을 타며, 울분이 휘도는 마음을 어르고 달랬는지도 정말로 모를 일이었다. 불타는 마음들을 덮으며 하늘에서는 비가 내렸다.

달이 녹아내리는 밤이었다. 누이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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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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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꽃

햇볕을 쬐고 있다고 느낀 건 한순간이었다. 다리에 쥐가 저려왔다. 쥐가 핑그르르 돌며 내 몸을 감싸왔다. 소파였나? 그래, 소파였다. 어제 일을 떠올려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무언가 희미하게 떠오르더니 꺼져버렸다. 꺼져버리었다, 저버리다, 저리다. 감각이 양 옆에서 나를 압박했다, 나의 복부를. 하임리히, 튀어나와! 기사 제목 같지 않은가, 하임리히 ... 튀어나와. 기억, 기억, 기억. 참 갓난아이구나, 너. 엄마는 기억하니? 응앙응앙, 응앙응앙. 가시방석의 가시모란속 가시이리. 가시리잇고. 그녀는 뒤섞인 꿈에 설핏 비쳤었다. 돌아가던 밤 속 호수의 영상, 그녀는 영혼의 연기. 불타오르는 연기, 한낱 낟알. 그리고 나는 뭘 한 거지? 보리 낟알이 쌀 낟알보다 귀하다고 할 수 있는가. 맥주병이라니, 수영은? 수영에는 배영, 평영, 접영, 자유형이 있지. 선생님한테 배웠어, 어릴 때. 내 옆에는 공책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리고 정숙해 주십시오, 진술하겠습니다, 여러분. 숙고, 심사숙고, 심사, 위원, 노래노래, 말 들, 잔잔한 달림간격, 다ㄹ리다 지침면 말들 해줘, 3번, 메시지, 모두 50원, 50전은 얼마? 1원 반, 쥐꼬리만큼, 반 병, 만 명, 총 지ㅊㅜㄹ 50만원. 감각이 내 몸에 다시 흘러왔던 것처럼 다른 곳에 머물던 회한이 이마로 끼쳐왔다. 슬픔이 그대를 덮치고, 파도로 몰려 올 때면, 어떻게 해야겠어, 달아나야지. 해는 통근한지 조금 되어보였다. 퇴근. 30분, 11시. 총 지출 50만원. 무언가를 기록해야한답시고 이런 짓을 해놨단 말이야? 다 들어있다고, 이 지겹게도 지껄이는 머릿속에. 때는 해가 중천에서 기울어가는 하루의 한 시기였다. 다리 밑 잔디밭에 다리, 또는 손을 교차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나니, 그들의 이름은 사랑이었다. 별이 가끔씩 얼굴을 비치며 지날 때마다 그들의 간격은 더욱 가까워졌다. 보름달. “봐봐, 우리들을 비춰주려고 나온 거야,” 가연이 입술을 가늘게 연 채 음송했다. “하늘도 우리를 축복해주는 것 아닐까?” “내 눈에는 유람선 밖에 안 보이는걸.” “쑥스러운 거지?” 가늘게 미소를 띤 흰 얼굴. 그것이 보름달이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하늘은 우리 사이에 끼어 들 수 없어. 영원히, 오래도록. 여름바람이 어느새 볼을 어루만지고 떠났다. “별이 참 아름답다.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서도 이 별을 감상하고 있겠지.” “우리처럼은 아니지.” 가연은 앙증맞게 기지개를 펴며 목을 뒤로 젖혔다. 이제, 몇 분 뒤면 어둑한 아름다움에는 한 송이의 꽃이 필 것이었다. 때문에 여기로 왔었지. 유람선이 멈추어 섰다. 그리고선, 이슬 위에 부는 연기처럼, 그녀는, 밤이 잠시 밝았다. 이마를 맞대고 조용히 있었다. 무한한 무의미의 굉음이 밖에서 울려 퍼지며 모든 소음을 차단했다. 우리 둘만의, 우리 둘만, 우리만, 끝없이, 끝없이 울려 퍼졌다. 감정의 음색. 눈길의 조화. 그래, 그랬었지. 지금은 겨울이고 말이야. 암, 그렇고말고. 봄의 첫새벽. 월요일의 첫새벽. 어디나 갈까.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코트 단추

  • 소묘
  • 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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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지현

    소묘님 안녕하세요. 연작을 쓰고 계시군요. 사건이 지나가는 상황들, 남겨진 인물들의 이야기에 집중하여 잘 읽었습니다. 상황을 묘사하는 글들이 여유롭게 느껴졌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캐릭터들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대사가 많아 좋았습니다. 특히 아이의 말투에서 이 글의 성격을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13개 모두 다른 이야기라고 하신만큼 다른 글들도 단편적인 요소에 맞추어 읽어보겠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확실한 에피소드보다는 장면에 집중하신 것 같아요. 카즈코의 이야기라든지 사건 이전의 내용이 더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2022-03-21 15:47:42
    송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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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묘

    연작이긴 하지만 13개 모두 다른 이야기라 단편으로 보셔도 될 듯합니다.

    • 2022-02-26 10:52:00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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