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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기록

  • 작성자 ㅇㅎㅇ
  • 작성일 2022-02-18
  • 조회수 282

그날이 언제였던가? 그래! 그날은 비가 무척이나 내리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달력상으로는 가을이었으나, 가랑비도 아니고, 장대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꼴은 영락없는 장마철이었다. 게다가 아직 단풍은커녕, 밤조차도 쌀쌀하지 않아서, 매일 밤마다 이불은 제쳐둔 채로, 뒤척이면서 잠을 청하니, 분명 달력이 없었다면 아직 여름 중순이라고 여겼을 것이었다.

나는 그런 궂은 날씨에 괘념치 않은 채, 검은 우산을 들고, 간단히 비나 바람으로부터 몸을 어느 정도나마 지켜줄 바람막이를 걸친 상태로 수많은 차량들이 종류를 불문하고 시끄러운 소리와 매캐한 매연을 내뿜으며 내달리는 대로변의 인도를 걷고 있었다. 내가 그날, 그 거리를 지나가게 된 데에는 사연이 없던 것은 아니나, 분명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날에 나섰어야 할 정도로 급한 일이 아니었는데, 참으로 기묘한 일이라는 생각이 물씬 풍긴다. 나는 당시 서류를 한 장 복사해야 했다. 무슨 서류인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유일하게 기억나는 한 가지는 그 서류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굳이 그렇게 비가 내리는 날임에도 갈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는 것이다.

하여튼, 그런 까닭에, 나는 느긋하게 거리를 걸었다. 어찌 보면, 서류는 단순한 핑계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그저 비가 내리는 가을날의 거리를 거닐어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당시의 내게 있어선, 그 서류가 진정으로 중요했고, 단지 현재는 상황이 달라졌기에, 그 당시의 나를 현재의 잣대라는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 내 앞에 갑작스레 보이는 광경은 무언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나머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기까지 할 정도로 일순에 벌어진 것이었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바로 그 기이한 광경에 대한 이야기인데, 사실 이 이야기를 하려는 나 역시도 그날의 기억이 믿기지 않기에, 차라리 내 머릿속에서 그려낸 망상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순간, 시계의 알람이 울린다. 곧 이어, 하얀 옷의 사람들이 들어와서는 나를 강제로 잡아서 침대에 눕힌다. 나는 외친다. 외친다. 그러자 그들은 내 팔에 주사를 꽂는다.)

먼저, 그 거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거리 전체가 마치 서커스가 열리는 하나의 무대와 같이, 퍼레이드가 예정되어 있어서, 그에 맞는 주제를 가지고 꾸며진 것과 같아보였다. 주제는 마치 약간의 고딕풍이라고 하면 좋을, 약간 동화스럽기도 하고 할로윈 같기도 한 것 같아 보였다. 전반적인 색채는 붉은색과 검은색이었는데, 거리의 양 옆으로 배치된 천막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구조물들의 배열이 빨간색 옆에는 반드시 검은색이 배열되어있어 같은 색끼리의 일말의 접촉도 허용하지 않았기에, 마치 체스 판의 배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이마다 서있는 검은 철제 가로등의 가스등에서 비치는 주홍빛의 불빛은 분명 그러한 상황을 겪기 직전이 한창 비가 내리던 흐린 낮이었음에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어두컴컴한 밤인 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기게 만들었다. 그 외에도 알 수 없는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형형색색의 빛들이 거리를 알록달록하면서도 신비롭게 꾸몄다. 나는 그 순간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주변을 마냥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그 때 내 앞에 한 광대가 나타났다. 모두가 검은색과 빨간색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옷들과 가면을 걸치고선 광원을 알 수 없는 빛들 속을 거닐고 있는 와중, 굽 높은 신발에 의지하며 벌이는 그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며, 그 하얗게 칠해진 얼굴과 웃고 있는 얼굴과 대비되는 푸른빛의 눈, 그 눈동자가 담고 있는 기분 나쁜 슬픔. 나를 꿰뚫어보고 있는 것과 같은 그 눈동자를 나는 단숨에 찔러서 파내버렸다. 잠시 동안의 정적과 함께 모든 시선이 여기로 향하더니, 광대는 곧 바닥에 쓰러져 있던 상태에서 비어버린 눈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일어나서 마치 나와 짜고선 쇼를 한 것처럼 웃자, 사람들은 모두 웃어 젖혔다. 온갖 웃음소리, 고상한 웃음소리부터 천박한 웃음소리까지, 부드럽거나 호탕한 웃음소리부터 쇳소리가 섞이거나 짐승의 울음 같은 웃음소리까지,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웃음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나는 그 웃음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져서 그만 기절하고 말았는데, 그때서야 나는 내게 웃음에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다. 알람은 울리고, 그들은 또다시 나를 강제로 눕히고, 나의 외침에 아랑곳없이 내게 주사바늘을 꽂는다.)

아무튼,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그래. 나는 그 거리를 걸었다. 아마 거리에선 도축 행사가 있던 모양인지, 진한 피비린내가 났다. 거리 곳곳에는 수많은 동물들의 대가리가, 아직 피도 마르지 않은 상태로 꼬챙이에 꽂히거나 갈고리에 걸리거나 하여 거리의 구석구석마다 진열되어 있었고, 그래서 거리의 붉은 벽돌 길은 원래부터 벽돌이 그런 색이었는지, 아니면 이 피들에 물들어서 붉어진 것인지 모를 정도로 바닥에는 짐승의 피가 낭자했다.

나는 그 피 웅덩이가 많이 고인 거리를 거니는데, 어느 좁고 어둑한 골목의 입구 쪽에 유독 피가 많이 고여 있으며, 또한 이를 자세히 보니, 그 골목에서 피가 세어 나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에 호기심이 생겨난 나는 이 피들의 근원을 찾아서, 그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에 수많은 이상한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골목길을 지나기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먼저, 거대한 붉은 벽돌집들 사이에 난 골목길은 사람이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았는데, 발 하나를 집어넣기도 힘들어서 그 좁은 틈을 옆으로 지나가야 했다. 그 다음으로는, 이 골목길이 불빛 한 점 없이 너무 어두웠다는 점으로, 너무나도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 골목 양 옆으로 들어선 가옥들의 창문은 분명히 푸른빛으로 환했다. 이는 내가 잘못 본 것인가? 마지막으로 그 골목 가득히, 대략 발목이 다 잠길 정도로 차오른 핏물들 때문에, 그 끈적끈적하고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핏물들 때문에 골목을 지나는 데 애를 먹었다. 이 핏물들에 쥐나 벌레들이 둥둥 떠다니었다. 쥐들의 눈동자는 핏물에 물들어서인지 아니면 충혈이 되어있던 것인지 붉게 빛나고 있었다. 잘못하면 사람마저도 이 핏물에 잠겨서 떠다니게 되지 않을까? 그런 일말의 두려움이 이 좁은 골목을 한층 더 좁게 만들었다.

그렇게 계속 걸어 나가니, 어느덧 빛이 보이는 곳이 있고, 나는 서둘러 그곳을 향해 갔다. 그곳에서는 이제껏 본 적이 없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붉은 불꽃이 중심에서 타올랐다. 바람 한 점이 없음에도 열기가 여기까지 날아와서 눈이 아팠다. 주위는 방금까지만 해도 골목을 둘러싸던 높게 치솟은 붉은 벽돌의 가옥들하고는 일체 어울리지 않는, 마치 카타콤과 같은 칙칙한 돌벽, 이교의 형상을 한, 부조들과 끔찍한 우상들이 가득이 새겨진 벽이 주위를 둘러싸고, 분명 야외의 공간임에도 동굴이나 지하묘지와 같은 압박감과 음습함이 주위를 감쌌다. 중앙에서 타오르는, 이 음습한 공간의 유일한 광원인 거대한 불꽃 앞에는 돌로 만들어진 반듯한 제단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름 모를 짐승이 배가 갈려진 채로 있어 내장이 피와 함께 흘러 내렸다. 그 주위를 머리 덮개가 달린 검은 외투를 두르고 있는 집단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주문을 외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에 그만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 순간에 그 짐승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나와 마주쳤다. 그것은 눈웃음을 짓는 거 같았다. 피는 끊임없이 쏟아지는데, 그 양은 짐승 하나가 몸 안에 품을 수 있는 양을 아득히 넘어선 것이었다. 온몸이 뜨거우면서 동시에 차가웠고, 피는 그치지 않고 끝없이 샘솟으며 급기야 나를 집어삼키고 있고, 그 순간에도 그 눈동자, 붉은 눈동자는 나를 비웃으며, 사방에서 들려오는, 마치 나를 향해 읊는 것 같은 주문이 내 머리를 아프게 했다. 온 사방에 놓인 이교의 부조들이 나를 바라보며 나를 굴복시키려 하고, 이 순간에 나는 모든 세상으로부터의 가호를 바랄 수 없는, 무리에서 홀로 떨어진 새끼 양이나 다름없었다.

아아…….

(숨을 쉬기가 어려워진다. 그들은 서둘러 들어와서 나를 눕히고, 내게 약을 주입하고, 호흡기를 씌우고…….)

나는 다시 그 거리에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나는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시간은 비록 흐리지만 낮이었고, 가을답지 않게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본 것은 무엇인가? 이 모든 게 전부 현실인 것인가? 아니면 둘 중 하나는 거짓인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거짓인가? 지금의 풍경이 바로 거짓인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고 봐왔던 그런 일반적인 풍경들과 너무나도 다르고 또 낯설기 때문에? 아니면 내가 지금껏 살아오고 현실이라고 여겨왔던 바로 그 풍광이 거짓인가? 단지 지금껏 거짓된 세계를 현실이라 착각하고 살아왔다가 그날에서야 진정한 현실을 마주한 것인가?

그 순간에 내게 다가온 어린 고양이 한 마리. 아니, 이것은 고양이인가? 염소인가? 둘 중 그 어느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둘 중 그 어느 것과도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며, 그렇지만 둘 중 어느 하나와 유독 닮은 것은 아닌, 그러한 것이 한 마리가 내게 다가왔다. 그것의 염소와 흡사한 눈동자가 나를 이리저리 살피고, 나는 그것의 검은 빛의 고운 털이 퍽 살가웠다. 이 어려보이는 생명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는 주위를 살피지만 주위에는 어느 순간, 그 거리도, 사람들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대신에 영문 모를 축사가 펼쳐지고, 좌우로 길게 늘어진 울타리에서, 한 쪽에는 수많은 염소들이, 다른 한 쪽에는 수많은 고양이들이 우리를, 아니 정확히는 내 품 안에 든 이 생물을 노려보며 울부짖고 있었다. 이 장면은 이것이 꾸는 악몽인가? 아니면 이것이 살아가는 현실인가. 우리를 둘러싼 이 짐승들은 눈에 독기가 서려있었다. 이 수많은 녀석들은 이 어린 짐승에게 무슨 원한을 품고 있다는 말인가?

곧 이어, 그 짐승은 내 품을 벗어나서, 끝이 어디 있는지 모를 이 축사를 그저 바로 달려 나갔다. 그 순간, 그 짐승들은 마치 비웃는 것과 같이 울어대니, 눈을 깜빡인 그 찰나에 나는 다시 원래의 거리로 돌아왔다.

나는 그 거리를 그저 걸어갔다. 도무지 기분이 나빠져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무작정 앞으로 마냥 걸어 나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내가 도달한 곳은 어느 광장이었다. 그 광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광장에는 오로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깨진 분수대와 포석들이 파헤쳐져서 곳곳에 맨땅이 드러난 도로, 꽃들이 뿌리 채로 뽑혀진 화단으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러한 광장의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한 벤치에 앉아있는 한 여인. 반절의 하얀 날개만이 등에서 돋아난, 어려보이는 소녀와도 같은 여인이 앉아있다. 아아……. 날 구원하소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마치 자석에 자연스럽게 철들이 이끌려 달라붙고, 또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듯, 그런 자연스러운 힘에 의해 무릎을 꿇고 소녀에게, 생전 처음 보는 소녀에게 내 구원을 빌었으니, 그 소녀 역시도 난생 처음 보는 작자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구원 같은 소리를 하는데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그러나 소녀는 아무 말 없었다. 그저 무표정한, 그렇기에 더욱 순수하고 순결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물론 어렴풋이 나는 느꼈으리라. 그 소녀는 아무런 힘도 없다. 내게 구원은커녕, 조금의 성사라도 거행할 한 줌의 거룩함도, 고결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땅은 너무나도 부패했으며, 이 소녀는 이 땅에 추방되어, 이미 더러워진지 오래였다.

구원이란 위대하신 분이 불쌍한 자들에게 내리는 은총. 소녀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소녀는 말 대신 손을 건넸다. 그 손은 차가웠으니, 얼마 안가, 나의 손이 간직한 온기에 의해 알맞게 따뜻해졌다. 가자. 가자. 소녀는 나의 손을 잡고, 나와 발을 맞추며 걸어 나갔다. 주위는 거대한 기둥들, 수천 년의 세월을 간직하며 역사를 양분 삼아서 자랐을, 이제는 그 흐름의 풍파에 금이 가고 빛을 잃은 기둥들이 양 옆으로 수십 개가 나란히 서있고, 드높은 기둥에 받혀진 천장에는 칠이 벗겨진 천장화들, 창조와 몰락, 강림과 대속, 그리고 부활이 그려진, 과거에는 그 자체만으로 광채를 발했겠지만 이제는 어둠에 잠식되어 퇴색한 그림들이 빼곡하였다. 나는 저 천장이 우리를 위에서 덮칠 것만 같았다. 어두운 신전은 조용하고 황량했으며 내부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나는 소녀가 왜 날 이리로 인도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 그런 고민 중에 우리는 성단의 앞에 도달하였다. 이윽고 소녀는 무릎을 꿇더니 눈을 감고, 내게 있어선 기억 저편에서 흐릿하게 스치는 주기도문을 외었고, 나 역시도 그 소녀를 따라 더듬거리며 뻐끔거렸다. 아멘. 소녀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축 처진 날개는 생기를 잃어가선, 얼마 안 있으면 깃털 한 가닥 없이 날갯대만이 앙상하게 남고 말 것만 같았다. 나는 감히 어찌해야할 줄 몰랐다. 내가 구원을 갈구한 대상은 실은 다른 누군가에게서 구원을 원하던 존재였다. 나와 같은 존재를 나는 어찌 해야 할 줄 몰랐다.

그 순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그 지독한 염소와 고양이들의 울음. 그리고 그 저주스러운 이교의 기도와 오한을 불러일으키는 웃음소리들. 불타오르기 시작한 성전은 하나 둘 무너져 내리고, 마치 유황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천장과 기둥은 하나 둘 부서지며 불꽃이 되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불길의 너머를 바라보는 그 짐승의 대가리. 그 대가리의 붉은 눈은 화기 때문인지 더욱 붉어보였다. 이 모든 게 다 무엇인가? 이 모든 게 다 무엇인가? 나는 갑자기 이, 현재 상황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질문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우면서 낯선,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때를 늦었다는, 그런 류의 낯선 감각을 느꼈다. 내 입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 소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너무나도 여렸기에 나를 구원할 수 없었다.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울려 퍼지지 않는 비명을. 비명은 이윽고 온 세상을 가득 메울 성싶었다. 그러나 이 작은 공간 하나도, 세상과 비교해 지극히 작은 공간 하나도 채울 수 없었다. 소녀의 눈이 감기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떴다. 나는 이제 어디에 있으며, 어디를 향하는가? 그것은 알 수 없었고 나는 그저 이 끝없는, 풍경도, 색채도 상실한, 길마저도 전부 흩어지고 사라졌으며, 심지어 나라는 존재도 산산이 조각나서, 영적인 나만이 겨우 자신을 지킨 채로 공간을 방황하며, 이 모든 게 기분 나쁜 꿈인 것만 같았다. 차라리 꿈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그러나 여전히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각들이 이 모든 게 다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그러길 바라는 나의 믿음을 반박한다. 내 귀는 여전히 그들의 웃음과 기도 읊는 소리와 짐승들의 울음소리를 기억하고, 내 눈은 그 모든 기괴한 광경들을 머릿속에 각인할 수 있도록, 내게 다시 선명히 재연해줄 수 있다.

이게 내 모든 이야기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모든 걸 이야기했다. 사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온전히 내 기억을 반영했을까는 알 수 없다. 아마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기억에, 보다 정갈한 설명을 위해서, 왜냐하면 이 모든 이야기들이 실제로는 이성적인 인과관계를 거쳐 벌어진 것이 아니기에, 내 나름대로, 임시방편으로써, 현재의 내가 그 당시를 회상하는 과정에서, 그 당시에는 생각도 않았지만, 만약 나라면 생각했을 법한 개인적인 사견들을 덧붙이는 등, 이야기에 살이 붙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기억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훼손되고 왜곡되는 과정을 거쳐서, 실제와 달라졌을 수도 있다. 또한 여기에서의, 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던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겪었던 환경적 요인들이 기억이 변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외에도 화자와 청자와의 관계, 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하는 환경 등의, 커뮤니케이션학적, 혹은 화용론적 요인들도 역시나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유리창 너머의 하얀 방 안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그는 반응할 새도 없이, 빠르게 퍼져나간 연기에, 곧 의자에 기댄 채, 잠이 든다.)

이상이 얼마 전 XX시에서 갑작스러운 난동과 기행 및 발작으로 수용되게 되었던 105-M-XX-PSY와의 인터뷰의 전문입니다. 현재 해당 수용자에게서 어떠한 신체적 이상이나 생리적 이상을 발견할 수는 없으며, 일상 활동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지만, 정신적 충격은 여전히 지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밀검사를 해본 결과, 뇌나 신체상의 문제 역시 없었으며, 그 이전의 음주나 흡연과 같은 중독이나 마비 현상의 소지도 없었던 것으로 나타나며, 과거 이력 상으로도 주의할만한 사항은 보이지 않거니와 특정 행동을 했다거나 하는 것도 없는 것으로 보이기에, 현재까지는 특정 물리공간과의 접촉을 이번 초물리 현상의 발동 조건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후부터 해당 수용자는 이제까지의 기억 소거 및 정신 치료를 통한 사회 복귀에 주력하도록 하겠으며, 더불어 해당 물리공간과 이번 초물리 현상의 관계 유무 및 비슷한 피해자들의 사례 조사와 다른 현상들과의 교차 조사를 통해 해당 초물리 현상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둘 계획입니다.

이상으로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ㅇㅎㅇ
ㅇㅎ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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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이 수백 년간 이 땅 위에 군림하고 있다. 모든 생명을 얼려 죽이는 이 길고도 긴 겨울은 사람들의 신앙, 즉 두려움과 사랑이 공존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먹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 사람들의 믿음이 변치 않는 한 이 겨울은 영속할 것이다. 그 폭정에 온 인민은 고통받으면서 제각기 만의 방식으로 상처 입은 삶을 연명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겨울에 그저 고통받으며 생을 연명하기도 하고, 어떤 자들은 이 겨울을 찬양하며,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하고, 누군가는 헛되이 저항하거나 그도 아니면 그저 삶을 포기하거나 신에게 빌어 이 겨울이 끝나기를 기원한다. 연명하는 자들과 착취하는 자들은 하나로 연결 지어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의 집단을 이루며 겨울을 숭배한다. 강 위에 얼어붙은 얼음과 눈을 이 겨울의 상징물로 여기며, 그 속에서 생명들의 얼어 죽어감을 찬양하는 것이다. 특히 착취자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겨울은 인간 과잉의 재앙을 해결해줄 유일한 방법이며, 겨울의 존재는 인류의 생존에 필수 불가결하다. 이 구원과도 같은 자연법칙 속에서 순응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다른 인민들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다수 인민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거부하며 그들의 언어 속의 저열함을 대개 저들의 본성 문제로 치부한다. 그러나 그런 분석은 틀렸다. 그들 역시도 자신들이 내뱉는 말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겨울의 항구적 존속에 해가 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오히려 생명을 사랑한다. 그들은 강 위의 얼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강 아래를 흐르는 물과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물고기를 진정으로 추구한다. 그들이 얼음을 캐내어 그것을 조각해내어 경애를 자아내는 신의 형상을 빚어낸다는 둥, 그분을 기리는 웅대한 첨탑을 세운다는 등의 짓들이 실상은 그 얼음을 캐고 난 자리에서 신선한 물과 고기를 잡아들이려는 속셈인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 겨울이 불러일으키는 죽음의 심상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겨울의 추위와 황폐함은 치명적인 것이고, 그들은 거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들의 휘하에 있는 자들을 부려 먹으며 그들이 구해오는 땔감과 식량을 그들의 품에서 앗아가서는 그걸로 불을 때워 자신들의 몸을 녹이고, 배를 불린다. 즉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또 자신들의 수족이 발하는 죽음에 가까워지는 순간 더욱 타오르는 그 생명의 열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즉 그들의 말은 모순적이고, 더러운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실제로는 믿음 없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아래에서 착취당하는 수많은 이들 역시 그들의 모순을 감각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옭아매는 그들의 지배를 파괴할 생각은 품지 못한다. 그들이 그토록 떠들어대는 그 하찮은 논리에 자신들도 모르게 지적으로 수용하게 되면서, 내적으로 부조화 상태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생활과 그들 외부의 더욱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 죽어가는 보다 비참한 생을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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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10
하루의 여정

‘바다에 빠진 아이는 우는 법이 없다. 우는 법조차 잊어버린 채, 그저 한없이 빠져선 귀신이 되어버린다.’ 그는 항상 이 구절에서 막혔다. 그의 능력상으로도 염치의 측면에서도 그는 이 구절의 뒷부분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아예 지워버릴 수는 결코 없었다. 이걸 지우는 순간, 자신이 진정으로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버려버리게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저 두 문장과 씨름했으나 이는 마치 수백 년 동안 깊이 뿌리박은 상서로운 거목을 두 손으로 뽑아서 엎어뜨리려는 시도와 같았다.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렇게 몇 개월을 허송세월했다. 오랜만에 그가 달력을 보았을 때, 그날은 일주년 전날이었다. 그는 아직 동이 트기 전인 새벽에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타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한 치도 피곤이 들어설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길, 어둠이 가득한 길을 작은 전조등 한 쌍이 가르며 나아갔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바다의 동틀 무렵은 언제나 슬픈 정서가 요동치게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서늘한 비수처럼 스치는 해풍이 모래사장을 덮고, 해송림을 스치며 인간의 땅으로 몰려드는 것이 마치 저승에서부터 영혼들이 그리운 고향, 그리운 사람, 그리운 노래를 찾아 돌아오려는 것 같았다. 그는 그곳에서 마치 하나의 이정표처럼 서 있었다. 개 중 하나가 자신을 알아보고, 자신의 품에 안기길 바라면서, 이윽고 눈을 떠보면 그 어린 얼굴이 이 품 안에서 고요히 들숨과 날숨을 쉬며 잠들어있기를, 그런 가망 없는 희망을 품으며 그의 다리는 부동을 유지했다. 얼마간 바람이 불고 곧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이 두 손에 그 한미한 숨이 꿈틀대는 것 같다고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보며 그렇게 느꼈다. 그리곤 다시 눈을 돌려 끝 모를 바다를 쳐다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벅차오를 성싶던 슬픔이 거품처럼 사라졌다. 햇살이 너무 눈에 부신 까닭이었다. 저 태양은 그날을 목도하였을 것이며, 저 뜨거운 얼굴에는 그날의 기억이 결코 지워지지 않은 채 생생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끊임없이 세상을 돌고 돌아 빛을 비추고 또 거둘 것이다. 그런 섬뜩할 정도의 무상함에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봄에는 시간을 내서 동네의 하천을 거닐면서 온갖 예쁜 꽃들이 만개한 풍경을 즐기고 여름에는 날을 잡아서 바다와 깊은 산 속 계곡을 찾으며 싱그러움을 만끽하고 가을에는 멀리까지 나서 단풍으로 유명한 산들을 돌아보며 자연이 그려낸 울긋불긋한 수채화를 감상하고 겨울이 오면 산 높은 곳에 올라서 온 대지가 하얗게 덮인 모습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는 것처럼, 자연을 사랑할 수 없었다. 어느덧 해가 자리를 잡고, 하늘에서 어두운 기운과 붉은 기운이 자취를 감췄다.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는 이제 막 7시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는 막 성당에 뛰어가는 젊은이를 보았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문득 자신의 팔에 차고 있던 묵주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 ㅇㅎㅇ
  • 2022-11-04
장미와 십자가

별이 밤하늘에 가득 피어오른 밤이었다. 그 날에 어느 청년은 사랑을 고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의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창가에서 마냥 창밖만을 내다보았다. 차마 당당히 이야기할 용기가,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그런 사나이다운 고백을 할 용기가 없었다. 그런 그였기에, 그는 자신이 창가로 들어오는 별빛들을 볼 낯이 없다고 생각했다. 창가에 놓인 화분에 심어진 붉은 장미 한 송이의 꽃잎에 앉은 달빛이 이슬처럼 흘러내렸다. 그는 전부 잊고 싶었다. 잠이 오지 않지만, 꿋꿋이도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잠 따위는 자고 싶지 않다는 게 현재로선 그의 생각이었다. 머리에서부터 시작된 과부하가 온 몸으로 퍼져나가며, 그는 몸이 뜨거워짐에 차마 몸을 가만히 이불로 감쌀 수가 없어서 이불을 걷어차고 계속 몸을 뒤척였다. 사랑. 언제나 사랑이 문제였다. 그는, 순간,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지고,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얼마나 오래 전인지도 이제는 까먹었건만, 그 순간의 모독만은, 주위의 시선만은 선명하게 그에게 박혀서 그를 괴롭혔다. 유년의 상처, 이제는 흉터가 되었지만, 여전히 쓰라리긴 매한가지였다. 그는 다시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가, 창틀에 팔을 걸친 채, 몸을 기울여 창문 밖으로 목을 빼서 바깥 풍경을 살피었다. 그가 바라보는 풍경은 모든 게 작아 보였다. 마치 인간이 개미를 바라보는 구도가, 그에게는 주위 풍경을, 인간 세상을 바라보는 구도였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사는 공간에서 이렇게 내려다보면, 그저 멋진 풍경에 감탄을 자아내거나, 어쩌면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섰다는 근거 없는 오만함이 차오르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에겐 이 모든 게 헛되었다. 그에게 이 풍경은 라푼젤이 자신이 갇힌 탑에서 내려다보는 풍경과 같았다. 내려가고 싶다. 그것은 그날 이후로 상실한 그의 권리이자, 그날부터 여태껏 간절히 바라온 그의 권리였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죄는 사면되고 권리는 회복될 수 있으나, 그의 것은 결코 그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의 죄는 그의 탄생 자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 죄를 심판하는 것은 이 세상의, 적어도 이 사회의 전원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지엄한 만인의 사법부의 재판소에서 피고인석에 앉아있는 채로, 이미 유죄는 정해진 채, 그 처벌의 강도만을 저울질할 차례만 남은 상황에서,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 최대한으로 거세하고 검열하여 그들의 자비를 구해야만 하는 처지인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는 차라리 우리에 갇힌 한 마리의 매우 특이하고 이색적인 동물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 옛날에 사람마저도 동물원에 가둬서 전시하였던 오랜 전통이 오늘까지도 재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낫게 느껴질까? 찬바람이 불어와서, 공기가 촉촉하여서, 뭐 그러한 잡다한 이유들로 그는 밖이 차갑게 느껴졌다. 창가에 놓인 화분에서 예쁜 자태를 뽐내는 붉은 장미도 추운지 몸을 떨었다. 하늘에 있는 별들도 몸이

  • ㅇㅎㅇ
  • 2022-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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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ㅎㅇ

    잡담 1. 원래는 제목을 '인터뷰'라고 하고 싶었으나, 굳이 영어를 가져다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물씬 들어서 그나마 유사하게 '면담기록'이라고 정했습니다. 2. 단순히 scp적 소재의 소설입니다. 원래 첫 소설도 그런 판타지류(크툴루 신화나 scp같은 걸 주제로)를 쓰고 싶었는데, 이제서야 조잡하게나마 하나 써봤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좋아하는 소설들이나, 좋아하는 분위기의 이미지들을 곁들인. 3. 이 소설이 사실은 꽤나 즉흥적으로 써진(원래도 그랬지만) 것인데다가, 글 자체를 오랜만에 써보다 보니, 여러 면에서 어색할 수 있습니다.

    • 2022-02-18 04:55:50
    ㅇㅎ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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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지현

      ㅇㅎㅇ님 안녕하세요. 글의 분위기나 문체가 잘 어우러져 있어서 보는 내내 마치 새로운 세계를 엿보는듯한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특히 카니발적 묘사가 돋보였는데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런 묘사에 응당 등장하는 이미지들만이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이미지들을 결합하여 ㅇㅎㅇ님만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마지막 반전이랄까, 갑작스레 해당 기억이 수용자의 것임을 보여주는 부분은 다소 힘이 빠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럼, 다음 글도 생생한 이미지 기대하겠습니다!

      • 2022-03-21 16:18:51
      송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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