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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들을 거면서

  • 작성자 이재영
  • 작성일 2019-12-25
  • 조회수 653

1.

나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끊임없이 발버둥쳤지만, 내 발목을 잡고 있는 무언가는 나를 놓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간신히 돌부리를 붙잡고 있는 손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절벽 위에 희미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곧 내 발목을 잡는 괴생물체의 사악한 웃음소리에 묻혀 버렸다. 내가 겁에 질려 돌부리를 놓은 건지, 힘이 빠져 저절로 떨어진 건지 확인할 틈도 없이 나의 몸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웃음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고, 심연이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평소처럼 땀 범벅이 되어 잠에서 깨어났다. 세상은 어느 때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겁에 질린 내가, 청각장애인이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은 꿈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2.

학교 가는 버스에서 또다시 그 여자애를 만났다. 얼굴에 밴드를 붙인 여자애.

- 성호야, 안녕.

그 애의 입술이 말했다. 삼 일 전 새로 온 전학생을 만나 꽤나 반가운 눈치였다. 나는 손을 흔들어 화답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참 고마운 친구였다. 친구들에게 인사도 시켜 주고 반에 적응하는 데도 많이 도와주었으니 말이다. 항상 얼굴에 슬픈 기색이 감도는 여자아이였지만, 다른 친구들에게도 상냥하고 인기가 많은 축인 듯했다. 이름은 예나였다. 강예나.

 

3.

아침 조례가 끝나고, 모두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만 빼고.

나를 챙겨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아이들 틈에 끼어들어 입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고 주장했지만 모두 거짓이었던 유명 아이돌에 대한 이야기인 듯했다. 맥락을 파악할 수가 없어 지루해지려던 즈음, 누군가 내 어깨를 쳤다. 경훈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손을 움직였다.

안녕, ㅅ..ㅓ...ㅇ....ㅎ... ㅗ.

어설픈 수화가 무척이나 고마웠다. 아마 나를 위해 학교에서 가르쳐 준 수화를 기억하고 있던 건 이 녀석뿐이었을 것이다. 왜소한 몸집의 이 아이는 확실히 나와 친해지고 싶어했다. 작고 까만 경훈이의 눈 속에서, 나는 호기심을 보았다. 나를 보았다. 차별을 알기 전, 세상을 알기 전 순수함으로 가득했던 내 모습을 보았다.

 

4.

어덟 살의 김성호는 2급 청각장애인이었다. 두 귀가 완전히 들리지 않는 상태. 그게 나였다. 보청기도 의미가 없었고, 인공 와우 수술은 천문학적인 금액 때문에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차피 수술을 해도 효과를 볼 수 있을 지가 미지수일 뿐더러, 청력이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으니 수술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것이 의사의 소견이었다. 그렇기에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부모님과 언어치료사에게서 구화와 독순술(입술을 읽는 기술)을 익혀야 했다. 수화를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었고, 그 중에서도 수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은 내가 비장애인처럼 살기를 바랬다. 그래서 수없는 연습을 통해 내가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교육시켰다. 입술을 읽으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의 80%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고, 말이 약간 어눌한 것을 제외하면 구화도 완벽했다.

그렇게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당연히 다른 친구들이 나를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이 만큼 노력했으니, 남들도 그만큼은 배려해 줄 것이라는 보상심리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내가 귀가 들리지 않는 걸 알게 된 그날부터 아이들은 나를 따돌리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선생님 앞에서라도 잘 해 주는 척하는 녀석들도 간혹 있었지만, 그건 모두 위선이었다. 아이들은 마치 까내릴 사람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사소한 면까지도 트집을 잡으며 괴롭혔다. 뒤통수를 맞거나 발에 걸려 넘어지는 것 정도는 일상이었고, 돈을 빼앗기거나 집단으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폭력의 주체는 모두 달랐지만, 이유는 같았다. 나보다 약하니까. 괴롭힘에 가담하지 않는 아이들은 모두 내게 관심이 없거나, 없는 척했다. 내가 당하는 걸 즐기면서.

결국 나는 한 학기도 버티지 못하고 초등학교를 자퇴했고, 중학교까지 검정고시를 통해 학력을 인정받은 후 고등학교 1학년 학기 중에 학교에 들어오게 되었다.

 

5.

우울한 생각에 빠져 있던 나를 경훈이가 깨웠다. 아직까지 배운 수화는 많이 없었는지,

- 괜찮아?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입을 움직여 말했다. 소리를 냈는지, 안 내고 입만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4교시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 끝 즈음에, 또다시 조현 무리가 우리 반에 들어왔다. 조현은 큰 키에 깡마른 몸을 가진 옆반 남자애였고, 그 애를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경훈이가 말을 간혹 더듬고 덩치가 작다는 점을 우습게 봤는지, 가끔 반에 와서 경훈이의 물건을 '빌려' 갔다. 돈, 체육복, 손목시계.. 별의별 물건을 다 가져갔지만, 한 번도 돌려주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이번에는 돈이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조현은 경훈이가 자기 돈을 빌려 갔고, 지금 당장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경훈이의 볼을 툭툭 치더니 머리채를 잡고 한 바퀴를 돌렸다. 정황상 누가 봐도 조현이 억지로 돈을 뺏고 있는 상황이었다.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아이들이 말릴 틈도 없이 나는 조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어깨를 툭 쳤다.

- 뭐 하는 거야?

내가 말했다. 조현이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다.

- 뭐야, 이건 또?

녀석의 얼굴이 순간 구겨졌다가, 피식했다.

- 아, 너 걔지? 새로 전학 왔다는 그 장애인.

'장애인'을 심한 욕설인 것마냥 입을 크게 움직여 말했다.

- 친구야. 우리 눈치 보면서 적당히 살자. 얘가 내 돈 안 돌려줘서 그런 거야. 맞을 만 해서 때리는 거야. 오해 마.

- 내가 봤어. 몇 번이나 경훈이한테 돈 빌려 간 거. 그 정도 빌렸으면 한 번은 봐주지?

아이들이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조현 앞에서 이런 말을 한 건 내가 처음인 것 같았다. 순간 웃음기 있던 조현의 눈빛이 갑자기 돌변하더니, 나를 태울 듯이 쏘아봤다. 그리고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발길질이 날아왔다. 녀석의 무릎이 정확히 내 배에 꽃혔다.

- 어디서 굴러들어온 게 누구한테 훈계질이야, 훈계질은.

나는 배를 잡고 바닥에 쭈그려 쿨럭거렸다. 이 자식 몸에 비해 힘이 장난 아니었다. 경훈이가 사색이 되어 내 등을 잡으며, 연신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그 후 조현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자기가 돈 다 갚겠다고, 성호는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애절하게 부탁하는 것 같았다. 뒷모습만 보였기에 확인할 수 없었지만. 눈물도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몰래 비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 재밌겠지.

- 됐고, 성호라고 했지? 네가 경훈이가 안 갚은 돈까지 다 갚아. 15만 원. 다음 주까지다.

잔인한 표정의 조현이 말했다. 그리고 자기 친구들을 데리고 나갔다. 사색이 된 경훈이가 그걸 뒤따랐다.

그게 시작이었다.

 

6.

다음날 경훈이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아니, 오지 못했다. 아이들의 소문이 정확하다면, 경훈이는 그 날 간신히 15만 원을 모아 조현을 찾아갔다. 그렇지만 재수가 없다며 죽도록 맞았고, 돈은 돈대로 빼앗겼다고 했다. 애초에 조현은 돈을 원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자기 친구들한테 3만 원씩 나눠 줬다니까. 그냥 경훈이가 쉬웠던 거다. 내가 나보다 작은 경훈이를 지켜 주었어야 했다는 미안함과 함께 죄책감이 밀려왔다. 죄가 나한테 있는 것도 아닌데. 경훈이가 걱정되었다. 지난 번에 알려 줬던 전화번호로 문자를 해도 받지 않았다. 불안했다.

나를 위로해 준 건 예나밖에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조현의 눈치가 보이는지 나를 꺼려했는데, 이 애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수업 시간에 말로만 설명하셔서 놓친 필기도 전부 알려 주고, 인사와 자기 이름 정도에 수화를 배워 오는 등 신경을 많이 써 줬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집 주소와 전화번호까지도 말해 주었지만, 가능하면 집으로는 찾아오지 말아 달라고 했다. 조현이 계속 시비를 걸러 찾아오기에, 사실상 왕따가 된 나를 상대해 주는데도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에 문제도 없는 듯했다. 조현만 빼고. 조현은 예나가 못마땅했는지 계속해서 아이들에게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이 일어나서 급식실로 가는 것이 다행이었다. 종이 들리지 않기에, 아이들이 모두 자고 있으면 상황 파악을 하기가 힘들었다. 오늘은 조현도 찾아오지 않았다. 청각 장애인이 맞고 다닌다는 소식이 돌자, 선생님들이 나를 예의주시하시는 것 같았다. 조현은 선생님이 안 계실 때만 와서 돈을 뜯어 갔다.

집에서는 주머니에 항상 들고 다니는 맥가이버칼을 꺼내 평소 자주 만들던 조각상을 몇 개 깎았다. 짜리몽땅하고 동글동글한 남자아이 하나를 만들었고, 그 녀석을 걷어차고 있는 멀대도 만들었다. 그리고 멀대를 말리지도 막지도 못하는, 귀와 손이 없는 내 모습을 깎았다.

 

7.

며칠이 지났다. 경훈이는 여전히 학교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장문의 문자가 왔다.

-- 성호야. 나 경훈이야. 사정이 좀 있어서, 갈비뼈가 부러졌어. 지금 병원이야. 치료 끝나면 바로 전학을 갈 것 같아.. 애들하고 관계가 나빠져서. 학교폭력 문제가 있었는데, 선생님들도 그러시고 부모님도 그러시고 학폭위는 안 여는 게 좋을 것 같대. 학폭 피해자라 하면 다음 학교에서 이미지가 나빠질 수 있어서, 다시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고. 너만 힘들게 하고 내가 미안해. 정말로. 병문안도 안 와도 돼.

어이가 없었다. 왜 피해자인 경훈이가 책임을 지고 도망다녀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경훈이 갈비뼈를 부러뜨린 놈이 조현이란 건 기정사실에 가까웠다. 맞은 날 부러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조현이 받은 벌은 그해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경훈이가 학교에 오지 않은 날부터, 담임 선생님은 우리 반 아이들 몇 명을 불러 경훈이가 돈을 빼앗긴 날 있었던 일을 차례로 물었다. 나는 내가 본 일과 당한 일을 성심성의껏 말씀드렸다. 선생님 역시 조현의 행동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다양한 노력을 해 오신 것 같았지만, 결국 조현이 받은 사회봉사 60시간과 2주가 넘게 지난 후에야 이루어진 정학 3일뿐이었다. 내가 맞았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도 불같이 화를 내시며 그 자식 혼쭐을 내 주겠다고 길길이 날뛰셨다. 그렇지만 조현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시고는, 다시는 조현이 나를 건드리는 일이 없을 거라고 해 주는 것 외에는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8.

불행인지 다행인지, 조현이 더 이상 물리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내가 없는 사람인 양 굴었다. 도움의 손길은 더 이상 없었다. 배려를 당연하게 여기는 건 아니었지만, 수업에 참여하기에는 너무 힘든 환경이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나를 위해 수화를 배우라고 이야기하셨지만. 정작 본인들은 수화를 전혀 못하셨다. 수업은 대부분 말로 진행되었고, 고개를 돌리고 설명하시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판서밖에 없었다. 근처 아이들에게 내용을 물어봐도, 모두 나를 성가시게 여겼다. 내가 차의 신호를 듣지 못해 치일 뻔해도, 음악 시간에 참여할 수 없어 교실에서 혼자 남아 자습을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예나는 나를 피하지는 않았지만, 그 애마저도 다른 친구들이 나를 노골적으로 왕따시키니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경훈이가 그리워졌다. 그 애라면 나를 이해할 텐데.

아니, 어쩌면 아이들은 내게 관심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시선과 손을 가리고 말하는 모습을 고려했을 때, 뒤에서 나를 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들리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들렸다면 더 괴로웠을 테니까. 전보다도 더 말을 하지 않게 되었고, 악몽이 심해졌다.

 

9.

그날의 꿈은 평소와 같았지만, 조금 달랐다. 평소같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었지만,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경훈이가 아래로 보였다. 꿈에서라도 오랜만에 다시 보는 것이 반갑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곧 경훈이는 손을 놓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현기증이 나고 소름이 돋았다. 구렁텅이 전체가 마치 조현의 얼굴처럼 보였다. 그 녀석의 웃음소리가, 다른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나의 의지를 흔들었다. 나 또한 떨어졌다.

역시나 다급하게 깨어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무언가를 보다 만 느낌이었다. 결말이 지워진 소설처럼. 찜찜한 느낌으로 학교에 갔다. 친구도 없고 배움도 없는 학교에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수업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으니 성적은 바닥을 쳤고(만점으로 처리된 음악과 특기가 있는 미술 조각 수업을 제외하고는), 아이들의 왕따는 더욱 심해졌다. 자연스레 내 태도도 바뀌었다. 다른 사람의 입을 읽을 때에도 시니컬하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비관적인 생각이 많아졌다. 입 안에서 퉁명스러운 말들이 맴돌았지만, 차마 내뱉을 수는 없었다.

 

경훈이를 다시 만나서 여러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 성호야, 미안해. 잘 지내.

라는 문자 한 마디 이후로 핸드폰을 바꿨는지 전혀 연락을 받지 않았다. 경훈이가 나를 버렸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지만, 당분간 문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인 것 같았다.

학교가 끝나고 모두가 집으로 간 후, 청소를 하던 나에게 예나가 말을 걸었다. 무언가 결심한 표정인 듯했다. 표정에서는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슬픈 듯한 느낌이 감돌았다.

- ..내가 미안해. 다른 애들처럼 널 무시하고 괴롭혔던 것 같아. 네가 상처가 많은 아이인 건알고 있어서 꼭 친해지고 싶었는데, 표현을 못 했어. 지금부터라도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진심인 듯했다. 외톨이었던 내가 고마워해야 마땅한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상처가 많은 아이’라 치부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아이들이 없으니 그때야 나타나서 뜬금없이 이야기하는 것도 위선자같이 느껴졌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불쾌함을 느꼈다. 순간 속마음이 입으로 튀어나왔다.

- 알지도 못하면서.

예나가 당황했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이 보였다. ‘뭐라고?’ 예나의 입모양이 말했다.

-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는 거잖아. 너는, 귀가 안 들리고 모든 사람한테 무시받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는 알아? 정말 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네가 정말 필요했던 순간에는 왜 나를 피했는데? 그냥 내가 쉽게 보이니까 접근하는 거 아냐? 착한 척 하고 싶으니까 그냥 나 케어해 주는 척 하는 거잖아. 안 그래? 결국 너도 남들하고 다를 거 없어. 그냥 방관자야.

평소에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속에 담아만 두고 있었던 말들을 마구 내뱉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상은 지금 그나마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분명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예나 역시 공격적인 나의 모습에 상당히 화가 났고,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 오갔다. 예나가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아니, 내가 예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예나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바로 가 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지는 알지 못했다. 나는 옆모습에서 그 아이 눈에 흐르고 있는 눈물을 보았고, 팔꿈치에 묶여 있던 붕대도 그때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붙잡았어야 했다. 그때 사과했어야 됐다.

 

11.

집으로 돌아가면서, 역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야 내가 잘못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감정적으로 마구 말했던 스스로가 미웠다. 사과를 해야 했다. 그렇지만 빈손으로 다시 찾아가기는 뭐했다. 그래서 선물을 만들었다.

그날이 금요일이었기에, 토요일 오전까지 조각상을 깎았다. 지금까지 만든 것 중 가장 정성을 들여서 만들었다. 맥가이버칼로 슬픈 눈, 붕대를 묶은 팔꿈치, 그리고 옅게 띄고 있는 미소를 표현했다. 누구라도 좋아할 법한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 조각상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본딴 조각상이니 예나도 분명 마음에 들어할 거라고 생각하고, 지난 번에 알려준 주소로 찾아갔다.

그러나 예나는 집에 없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초인종을 눌러도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주머니의 맥가이버칼과 조각상을 만지작거리며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월요일에 전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월요일에 소식을 접했다.

예나는 일요일에 집 근처 폐공장에서 목을 맨 채로 발견되었다. 사망 시각은 금요일 저녁으로 추정되지만, 인적이 드문 곳이여서 일요일 오후에야 신고가 들어왔다. 자살 동기는 가정 폭력으로 보였다. 항상 술에 취해 계속해서 자신을 때리고 학대한 아버지와, 아버지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간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근처에서 발견된 유서 가득 적혀 있었다. 시체의 등 부분에 찍힌 막대 자국으로 보아, 아버지는 전날에도 딸을 둔기로 여러 번 구타한 듯했다.

아버지는 물론이요 친해 보였던 친구들마저 그녀를 찾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과 가까워 보였었지만 사실은 항상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 아주 가까운 사람은 없었고,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정상이었지만 스트레스와 심적인 고통으로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조현이 퍼트린 소문이 진실인 양 확산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마저 예나의 곁을 떠났다. 예나는 의지할 사람,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만큼 외롭고 힘든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나 같은 사람.

유서에도, 집에서 발견된 일기장에도 나에 대한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 큰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조금 더 관심을 가졌었다면, 조금 더 가까워졌다면 예나가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을 텐데. 미칠 것 같았다. 예나는 내가 힘들 때 위로해 주고 신경을 써 줬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가장 큰 쓰레기는 나였다. 알지도 못하면서 말한 것도 나였다. 죽어 마땅했던 것도, 예나가 아닌 나였다.

또 그 꿈을 꿨다. 이번에는 떨어지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손에는 무언가를 지키려는 그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힘이 솟았다. 가냘픈 팔으로 몸을 돌부리 위로 들어올렸다. 여러 번 시도한 끝에 낭떠러지를 간신히 기어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내 눈 앞에 예나가 있었다. 나무에 목을 맨 채로. 이미 너무 늦었다. 지금까지 위에서 계속 나를 부르고 있었던 건 예나였었다. 조금만 빨리 올라갔더라면. 안타까움과 함께 고통이 밀려왔다. 흥분한 나는 스스로를 나락으로 집어던졌다. 비웃음 소리만이 가득하지만, 내가 저버린 예나와는 멀어질 수 있는 그 어둠 속으로. 점차, 웃음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12.

예나의 묘비 옆에 꽃과 조각상을 올려 두었다. 조각상의 차가운 눈이 더욱 슬퍼 보였다.

공동묘지에서 나오는 길의 한적한 구석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룰 툭 쳤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조현이었다. 피식 웃더니, 조롱하는 표정으로 입을 움직였다.

- 기분이 어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묻고 싶은 걸 물었다.

- 여긴 뭐하러 온 거야?

- 네가 그 년 앞에서 질질 짜는 꼴 보고 싶어서. 흐흐.

대꾸하고 싶지도 않아서, 무시하려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조현의 입모양은 계속 움직였다.

- 네가 죽인 거야. 그 년.

순간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졌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슬픔도 죄책감도 아니었다. 순수한 분노였다.

- 뭐라고?

아마 ‘뭐어라아구우?’처럼 들렸을 것이다. 화가 나면 발음이 어눌해지니까. 조현은 그게 웃겼는지, 배를 잡고 나를 비웃었다. 그리고는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했다.

- 이미 소문 다 퍼진 거 알지? 걔 죽기 전에 너랑 크게 싸웠던 거 애들이 다 들었대. 너 학교생활 어떡하냐? 걔도 참 안 됐어. 너 같은 것만 아니었으면 자살까진 안 했을 텐데. 애를 쥐어패기만 한 애비도 그렇고, 걔는 그렇게 비참하게 살다 갈 거면서 뭐하러 태어났나?

말보다 주먹이 먼저 올라갔다. 조현의 뺨을 강하게 때렸다.

- 어쭈? 이 새끼 봐라?

조현은 살짝 놀란 눈치로, 나의 발을 걸어 쓰러뜨리고는 나를 마구 밟았다.

- 야, 니가 먼저 때린 거다? 아주 맞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어질했다. 조현이 내 머리채를 붙잡더니, 들어올렸다.

- 머리 찢어졌다, 야. 눈에서는 눈물이 나네? 울면 안 되지, 남자는. 스마일~

내 입꼬리를 잡아서 쭉 늘렸다. 나는 입을 벌린 후 온 힘을 다해 조현의 손가락을 물었다.

- 아! 이런 미친.. 아으으...

주머니에서 맥가이버칼을 꺼냈다.

- 어어어.. 어어?

이제 조현은 확실하게 놀란 표정이었다. 겁을 집어먹은 것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이 녀석이 나약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죽어 마땅한 건 내가 아니었다. 이 녀석이었다. 만악의 근원도 이 녀석이었다. 나는 심판할 자격이 있었다. 경훈이를 쫒아내고 예나를 욕한 이 녀석을, 그 누구보다도 죽이고 싶었다.

칼을 들고, 그대로 조현의 목을 향해 충동적으로 찔렀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찔렀다. 조현의 목 속 무언가가 툭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조현이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조현의 피와 내 머리에서 흐른 피가 뒤섞여 구별할 수 없었다. 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때야 현실감이 들었다. 나는 순식간에 살인자가 되어 있었다. 칼을 휘둘러 같은 학년 학생을 죽여 버린 살인자. 불현 듯, 꿈에서 들렸던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는 조현의 것도, 아이들의 것도 아니었다. 내 웃음소리였다. 나는 웃고 있었다. 사람을 죽여 놓고,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불안감도, 허무함도 아닌 완전한 희열이 나를 감쌌다. 어지럼증이 느껴졌고, 나는 배를 잡고 웃던 그 자세로 고꾸라져 바닥에 엎어졌다. 세상이 핑 돈 건지, 내 머리가 빙빙 돌고 있는 건지 구별할 수 없었다.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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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이재영 님. 소설 잘 읽었습니다. 이 소설은 청각장애인인 '나'가 '조현'을 살해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이 소설 곳곳에 드러나는 조각상에 대한 묘사였어요. '성호'의 내면을 대신하는 잘 쓰여진 장치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걱정하는 예나를 향해 '안 들을 거면서'를 이야기하는 나의 모습, 경훈과의 관계와 나의 소외감 또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었어요. 다만 소설의 후반부에, 예나가 갑작스레 자살하고 내가 조현을 살해하는 일련의 과정을 다룬 부분들은 지나치게 자극적인 전개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극적인 전개를 위해 살인과 자살, 학대가 번갈아 계속해서 벌어지는 이 소설이 생각해야 하는 어떤 윤리적인 부분에 대해서요. 그래야 이 소설의 메시지가 더욱 부각될 것 같습니다. 예나나 경훈, 성호 같은 선량한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 그리고 '안 들을 거면서'와 결부된 사건의 전개, 조현에 대한 나의 적의는 살인과 자살, '청각장애인'의 카타르시스적인 웃음 소리라는 극단적인 장치들을 경유하지 않고도 충분히 서술되거나 사유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쓰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다음 소설도 기다리겠습니다.

    • 2020-01-14 19:43:12
    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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