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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죽음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 작성자 탈퇴 회원
  • 작성일 2019-10-30
  • 조회수 394

방은 내게는 참 컸다. 내게는. 갈색 장판은 비가 올 때면 쩍쩍 소리를 냈다. 한쪽 벽에서는 검은 얼룩이 점점 자라났다. 나는 언젠가는 그 얼룩이 이 방을 전부 덮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벽에는 작은 창문이 있다. 창문 밖이 환했다가 어두워지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나는 모른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환해지는지 어두워지는지. 창밖이 환하면 시끄러웠고 어두우면 조용했다. 가끔 어두운 때에 얇은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높고 얇은 울음소리는 보통 창문 앞에서 한참 어른거렸고 걸걸한 소리가 들리면 사라졌다. 울음소리를 내는 것은 참 빨랐다. 나는 그게 뭔지 궁금했다. 나는 때때로는 울었고 많은 시간은 잠을 잤다. 때때로는 천장을 보고 다리를 버둥거렸고 이따금 손을 흔들었다. 내가 내 손을 보고 내 것인지 인식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 둘 들어보고 전부 쥐어도 보고 반대로 펴 보기도 했다. 나는 수를 셀 줄 모른다. 가끔은 발가락을 빨았다. 손가락도 빨고 이불도 빨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아마 전부 입으로 가져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불을 빠는 것은 가끔이었다. 멋모르고 한 번 물었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좋지 않은 것임을 알았다. 손이랑 발에서는 아무 맛이 나지 않는다. 이불은 아니었다. 분유 맛이랑 달랐고. 맛이 없었다. 엄마는 거의 안 보였다. 엄마에게서는 가끔 냄새가 났다. 아빠에게서도 나는 냄새였다. 엄마는 이따금 나를 안았고 손가락으로 찔러도 보았다. 나는 적어도 그 관심이 좋았다. 엄마가 나가고 나면 나는 또 무료했다. 얼룩덜룩한 천장을 보거나. 내가 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 세상만 볼 뿐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저 사람을 보았다.

 

1-2.

언제부터 저기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그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다. 설령 아는 사람이 아빠 엄마 둘 뿐이더라도. 내가 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도 나를 보았다. 나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얇고 높은 울음소리를 듣는 것처럼. 그 울음소리를 내쫓는 걸걸한 소리를 듣는 것처럼. 무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어도 그 사람과 있을 때면 심심하지 않고 좋았다. 그 사람은 내 머리를 만져주기도 하고 잡을 손가락을 내어주기도 했다. 볼을 쓰다듬기도 했다.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누구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말을 하는 법을 몰랐다. 내 성대는 떨릴 줄만 알았고 내 혀는 언어를 몰랐다.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나는 그래도 전부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다. 꼭 전부 아는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엄마 아빠는 나를 그렇게 봐준 적이 없다.

 

1-3.

밥을 주는 사람은 주로 아빠였다. 아빠는 나를 대충 안았고 분유를 먹을 때까지 잘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종종 분유를 토했다. 오래 주렸다 먹은 밥은 늘 탈이 나게 만들었다. 배 조금 위쪽이 꽉 막힌 것 같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가로 아까 먹었던 것이 흘렀다. 가끔은 그것조차 아깝게 느껴졌다. 내가 다음 밥을 먹기 전까지 얼마나 더 굶어야 할지 몰랐기에. 덜 데워진 우유에 이따금 분유 부스러기가 엉겼다. 급하게 먹은 밥에 사래가 들려 입가 밖으로 분유가 흐를 때 아빠는 낮게 무어라 중얼거렸다. 아빠 뒤에는 늘 빛을 내는 무언가가 있었다. 빛을 내는 네모난 무언가. 분유병 뒤편으로 몰래 훔쳐본 그 네모난 무언가 안에서는 작은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종종 붉게 변했고 아빠는 또 무어라 중얼거리며 나를 내려놓았다. 내가 한참 울어야만 나는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불규칙적으로 먹는 밥에 나는 항상 서둘렀고 하도 많이 울던 어떤 날에는 종내 울음도 잘 나오지 않았다. 눈가의 살은 종종 짓물렀다. 내 성대는 원래 소리를 잃었다. 짓무르는 것은 눈가 뿐 아니라 엉덩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혼자 화장실에 갈 줄 몰랐다. 배가 아프면 힘을 주었고, 그 상태로 보통 한참을 있었다. 일어서는 법도 몰랐고 몸은 뒤집을 수 있어도 다시 돌아누울 수는 없었다. 바닥을 배에 대고 숨이 막혀 울어버리면 그것도 한참 울어버리면 아빠가 왔다. 한 번은 아빠가 날 던졌다. 그 뒤로는 뒤집는 법을 잊었다.

 

1-4.

그 사람은 때로는 아빠를, 가끔 들어오는 엄마를 보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볼 때 그 사람의 눈썹 위는 미간으로 올라갔고 눈썹 끝은 아래로 내려가 꼭 八모양을 그렸다. 내 팔과 손가락 다리와 무릎 발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엄마가 만지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아빠 엄마는 그 사람이 있는 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가끔 구석에서 졸았다. 얇은 문 하나를 두고 내가 있는 곳과 분리된 곳에서 아빠 엄마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무언가 떨어지고 깨지고 벽에 부딪혔다. 이미 쉬어버린 목으로 울었을 때 그 사람은 내 볼을 또 만졌다.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늘 나를 만질 뿐 들어서 안아준 적이 없다. 나는 그 사람이 나와 같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 아무도 나를 보러 오지 않았고 나는 울다 지쳐 잠들었다. 어쩌면 내일은 더 이상 울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에게서는 이불과 똑같은 냄새가 났다. 전에 먹다 토했던 분유 생각이 났다. 토했던 분유마저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올라오는 분유에 기도가 막혔어도 삼켜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1-5.

예전과 같은 울음소리를 낼 수 없었다. 몸이 바싹 마른 것만 같다. 어디 하나 힘이 들어가는 곳이 없었다. 힘은 발가락에서부터 빠져나갔다. 처음에는 발가락을, 다리를, 손을, 고개까지.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창밖에서 나는 고양이 소리도 못 듣는다. 천장도 잘 안 보이고 벽에 얼룩도 안 보이고 그 사람도 안 보이고 아무것도 안 보인다. 숨이 잘게 끊긴다. 모든 일이 버거웠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숨을 쉬는 것이 버거웠다. 나는 조금씩 내 안에 남은 것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들어오는 것은 없었고 뱉어내기만 했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임을, 이불을 빨았던 그때처럼 알아차렸다. 한 번 닫힌 문은 끝끝내 열리지 않고 나는 엄마 아빠를 기다렸다. 손가락 발가락 빠는 일도 없이 그만 또 잠에 들어버렸다.

 

 

2.

저승사자라는 게 존재하는 줄로는 알고 있었지만…생각하고 있었던 저승사자는 아니시네요. 죽음이요? 요즘에는 저승사자 아니고 죽음이라고 하나요? 여하튼, 제가 생각했던 모습은 더욱 아니시고요. 어릴 적에는 참 무서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저는 어떻게 됩니까? 지금은 아니에요? 얼마나 더 머물러야… 아, 알겠습니다. 장례식에는 굳이 가고 싶지 않은데. 살면서 사람 죽은 걸 한두 번 봤겠습니까, 뭐 장례식장도 많이 가봤지만 제 장례식을 눈으로 보는 게 무슨 일입니까. 도망이나 가지 않을런지, 그 사진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잘 나온 사진도 아니고. 됐습니다. 후회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어쩔 수도 없고. 자식들 아내 손자들 보면 제가 어떻게 도망가 버릴 줄 어떻게 압니까. 미련이 어떻게 없어요. 세상에 저만치 많은 귀신들이 괜히 떠돌겠습니까. 죽음이 뭐 그런 것도 몰라요? 허… 저기, 죽은 사람은 담배 못 피웁니까? 나, 참… 이렇게 죽을 줄은 몰랐는데, 정말. 죽음은 알고 계셨습니까? 죽음은 모든 사람들의 죽음을 다 알고 계신 겁니까? 그것도 참 고역이겠습니다. 아, 사실 죽음도 알고 계셨겠지만 제가 약속한 게 있습니다. 내가 다 나으면 꼭 같이 집에 가자, 고 했었죠. 우리 같이 집에 가자. 이렇게 손 붙잡고 얘기했었죠. 집에서 죽었다고요? 누구… 제가요? 참, 저는 근 몇 년간 요양원 아님 병원 그것도 걷지도 못해서 침대에만 있었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누가 절 집으로 데려갔겠어요. 그 고생을 다 하면서. 집이 참 그리웠는데. 아니 어찌나 그리웠는지 어느 날은 갑자기 눈앞에 집에 있는 장롱이 보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내가 시집올 적에 해왔던. 저게 왜 저기 있냐, 몇 번을 물었는데도 여기가 집이니까 하고 전부 제게 거짓말 하는 게 아니겠어요. 아니… 제가 집을 몰라봤을 리도 없고 집에 있는데 왜 집에 가고 싶다고 했겠어요. 참. 얼마 전에는 꿈속에 손녀가 나왔습니다. 애가 어릴 적부터 참 총명했는데 이번에 무슨 시험을 본다고 하더라고요. 워낙 잘 하는 애니까 잘 했을 거라 생각해요. 살아있을 때 찾아와줘서 참 고마워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아들도 보고 싶어서 찾았는데 일 하느라 워낙 바쁘니까… 세상 살아가기가 어디 쉽습니까. 아들 얘기 하니까 또 생각나네. 생전에 걔를 참 많이 찾았어요. 잘 하기도 잘 했고 워낙 저를 닮아서 그런가. 아들 덕분에 가끔 바깥 공기도 쐬고 아, 몇 번은 집에 가기도 했네요. 다시 돌아가기 싫어서 얼마나 버텼었는지, 제가. 예? 그렇죠, 참 이기적이었죠, 제가. 아프지나 말던가. 그렇죠? 돈이라도 좀 덜 들어가게. 아들은 잘 몰랐을 겁니다. 저기, 제가 지금 영혼이 된 게 맞죠? 그… 죽음은 그런 것 못 합니까? 남 얘기 듣는 거. 아니 아들이 남도 아니기는 한데. 그래도 한 번은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어서. 살아있을 때 제가 말을 잘 못 하지 않았습니까. 입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아서. 다리처럼 굳어버려서. 아니 뭐 별 건 아니고…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궁금해서요. 낯간지럽네. 이제 뭐… 어디 하늘가면 그쪽이랑도 이별 하는 거 아닙니까. 제가… 같이 있는 행복했던 기억. 그거 좀 아는 거 없습니까. 능력이라도… ……. 소박하기도 하네요. 사과 그거… 그거 걔가 어릴 때 일입니다.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장난감은 아직도 마음에 걸립니다. 너무 늦게 사준 것 같아서. 추수 끝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 사이 걔도 참 많이 큰 게 아니겠어요? 애들은 참 빨리 자라요. 이것도 참 새삼… 장난감 그렇게 졸랐던 걸 사줬는데 금세 커서 잘 가지고 놀지는 않더라고요. 어땠냐고요? 저한테 뭘 그런 걸 물으십니까. 미안했죠. 일찍 사줄 걸 그랬는데. 참 속이 깊어요. 그래도 감사하다면서 제 앞에서는 가지고 노는 척이라도 해주는 게 고마웠죠. 다신 없을 아들입니다. 고생이요? …염치없지만 제가 제일 많이 시켰죠. 다음 생에는 제 아빠… 아니 그냥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공부 참 잘했던 앤데 동생들 대학 보내야 한다면서 젊은 나이부터 일 시작한 애가 아니겠습니까. 그 애는 잘 데려가셔야 해요. 혹시 몰라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애는… 얼마나 남았죠? 뭐, 이런 건 비밀입니까? 참 빡빡하게. 어차피 죽은 사람은 알아도 되는 거 아닙니까? …오래오래 살다가 올라오라고 하세요. 그 애가 나이가 오십이 다 됐죠? 칠순 잔치 하는 거 보고 싶었는데. 원래 부모는 자식이 백 살을 먹어도 아이로 보이는 겁니다. 모르시겠죠, 죽음은. 아내요? 제가 죽는 순간에 아내 품에 있을 수 있었다는 게 참 감사합니다. 아내가 종종 그랬어요. 제발 밤에는 죽지 마. 나 무서워. 그래서 용케 버티고 있었던 거 아니겠습니까. 거, 그쪽은 옆에 서있지. 숨 쉬기 힘들지. 뭐…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춥기는 늘상이 춥고. 아침에 아내가 왔어요. 그쪽이 옆에 서서 계속 지켜보고 있을 때요. 그간 계속 버텼는데 한계더라 싶더라고요. 그 숨은 아꼈던 숨입니다. 제발 밤에는 죽지 말라고 해서 조금씩 나누어 쉬면서 아침까지 기다렸죠. 제 자세를 바꾸어 주기 위해서 안아주는데… 긴장이 확 풀리지 뭡니까. 그 바람에 숨을 전부 내쉬어 버렸어요.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었는데… 후회는 없습니다. 마지막에 사랑하는 사람 품에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아니, 이런 표현을 어떻게 대놓고 앞에서 합니까. 죽음이야 뭐… 어차피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거고 저 같은 건 금방 잊을 테니까. 죽음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살면 죽음 일도 못 합니다. 세상에 안 슬픈 죽음이 어디 있어요. 다 안타깝고 슬프지. 어쨌든, 저는 참 다행이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행복한 영혼이던가요? 죽음이 뭐 그럴 힘은 없어 보이지만… 아프지들 말라고 전해주세요. 손녀한테는 하긴 했는데, 애가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네. 제가 고생하는 꼴 봤으면 잘 챙기겠지요, 다들. 말이야 하면 끝도 없죠. 젊어서도 워낙 호탕하다는 말 많이 듣고 말 많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는데… 여기서 올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천국이나 지옥이나 뭐 그런 곳에 갑니까? 저는 성당 다녔는데. 그 믿음이 좀 빛을 발합니까? 그래요 죽음은 모르시겠지요… 한 번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자 이런 말이 의미는 있습니까? 죽음도 죽음 짓 적당히 하고 올라오세요. 저요? 가자마자 술이나 좀 마시렵니다. 담배도 좀 피우고…

 

3.

오늘이 며칠이지?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날짜를 헤아렸다. 23일? 아니 24일이던가? 이제는 날짜마저 가물가물했다. 어제가… 어제는 또 며칠이었지? 요즘 들어 부쩍 날짜를 잊는 일이 잦아졌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날짜를 세는 것에 별 무리는 없었다. 달력을 보지 않고도 날짜를 맞추는 것. 그녀의 몇 안 되는 일과이자 매일 같은 삶을 사는 그녀에게 그나마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결국 온통 누렇게 변한 달력에 앞에 서고야 말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밤새 덮고 있던 이불을 걷었다. 그녀의 손목은 두터운 솜이불의 무게를 견디기에는 너무 가녀렸다. 손목 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군데군데 바느질이 뜯어진 이불에서는 솜뭉치들이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툭툭 튀어나온 모양새가 영 꼴 보기 싫었으나 별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달력만큼 누렇게 변한 이불에서는 죽음의 향기가 났다. 제일 마지막에 빤 지가 언제였더라. 아니, 그 전에 빤 적이 있었던가? 그래도 그것을 덮고 자는 수밖에는 없었다. 24일. 오늘은 24일이다. 12월 24일.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의 무릎 사이로 찬 공기가 스며들었다. 무릎이 시렸다. 무릎이 시려오자 팔목, 발목까지 시큰거리고 마침내 바람은 코로 밀려 들어와 온 장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가스가 끊겼나? 방 안은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방바닥이 차가웠다. 마른 손바닥으로 바닥을 쓸었다. 회색과 흰색의 머리카락이 한줌 모인다. 12월은 아무래도 버티기 힘든 것이었다. 마른기침을 한다. 벌써 몇 달째 지속되고 있는 기침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그나마 남아있던 약도 점점 떨어져 가는데. 걱정의 빛이 일순 어린다.

 

그녀는 겨울에 외출하는 것을 꺼렸다. 작년 이맘때 즈음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사람이 그리워 밖으로 나간 적이 있었다. 주름이 깊이 박힌 손으로 현관문을 꼬옥 쥐고 비척비척 낡은 신발을 꺼내 신었다. 그녀는 새 신을 하나 사 신고 싶었다. 그나마 걸친 옷이라고는 접때 아들이 사다준 외투뿐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날이 추운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날따라 꼭 누가 부르는 것 마냥 밖으로 나가고 싶었기 때문에 그녀는 별 망설일 것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찬 공기가 얼굴에 정면으로 들이닥친다. 폐부 깊숙이 겨울 공기를 채운 그녀는 살금살금 집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집은 달과 몹시 가까웠다. 월훈이 가득한 보름달이 뜨는 밤에 손을 내밀면 꼭 달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창문 틈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올 때면 으레 난쟁이를 떠올렸다. 달에 종이비행기를 날린 난쟁이를. 계단 하나하나를 내려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퍽 조심스러웠다. 한 걸음 내딛고 한 번 숨 쉬고, 내딛고 숨 쉬고를 오래 반복하고 나서야 자신이 살고 있는 달동네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무릎이 몹시 시렸다. 그 잠깐의 걸음에도 숨이 차서 결국 벽에 손을 짚고 숨을 골라야 했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숨 한 번, 한 걸음, 숨 한 번, 한 걸… 그녀의 몸이 바닥과 만난 것은 순식간이었다. 바닥이 얼어 있었던 탓이다. 가녀린 몸뚱어리가 낙엽처럼 바닥을 굴렀다. 머리가 띵하니 아려온다. 온 몸이 욱신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추운 날 기억 속에서 빠져 나왔다. 그 날을 떠올릴 때면 으레 방금 넘어진 것처럼 몸 전체가 아파오는 것이다. 아마 그때 병원비가 꽤나 나왔을 것이다. 그녀는 약이 다 떨어질 때 까지 최대한 버텨보기로 했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입맛이 통 없다. 밥을 차려먹을 기운조차 나질 않아서 그녀는 24일을 되새기며 찬 바닥에 앉았다.

 

24일… 24일. 어쩌면, 감기를 앓게 될지도 모르겠다. 잠드는 시간이 길어졌다. 찬 바닥에서 오랜 시간 잠을 자면 감기에 걸릴 것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별 수가 없었을 뿐이다. 힐… 힐소태이? 요즘 아파트 이름은 참 어려웠다. 그녀는 아들이 살고 있는 그 아파트에는 난방이 잘 되고 있을까 문득 떠올렸다. 잠자리만 바꿔도 금세 감기에 걸리던 아이였다. 따뜻하게 지내야 할 텐데… 날이 추워지고 길이 얼면서 성당에 나가는 일도 뜸해졌다. 그럴수록 그녀는 묵주를 쥐고 눈을 감은 채 더 열심히 기도할 뿐이다. 기도 역시 몇 안 되는 그녀의 일과 중 하나였다. 어쩌면, 그녀가 가장 크게 의미부여를 하는 일 일지도 몰랐다.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듣고 싶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가난한 사람이 살게 된다는 천국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녀는 문득 자신이 가게 될 곳은 어떤 곳일까 생각했다. 부자가 지옥에 간다면 가난한 자는 분명히 천국에 가리라. 가장 낮은 사람에게 해준 일이 나에게 해준 일이다. 예수님이 그랬다. 더 낮은 사람. 더 낮은 사람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그렇다면 내가 예수가 아닐까? 실없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살풋 웃는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오늘이 며칠이더라. 분명 아침에 달력을 봤는데. 12월, 아, 12월 24일이다. 내일이면 예수님이 태어난다. 마구간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곳에는 예수님이 있다. 그녀는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온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살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항상 낮았다. 가장 높은 곳에 사는 가장 낮은 자. 그것이 그녀였다.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여전히 배는 고프지 않다. 배고플 기미도 없다. 통 입맛이 없고 식욕도 없다. 마지막으로 밥을 먹은 건 언제였더라? 반찬으로는 무얼 먹었지? 우리 집에 반찬이 있었던가? 이곳이 내 집인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노란 조끼를 입은 사람들 생각이 났다. 그 사람들, 내일은 올 것이다. 어쩌면 그 사람들이 머무는 잠시 동안은 진심으로 행복했던 것만 같다. 그 사람들이 있을 때는 집 안에 온기가 가득했다. 나를 엄마라고 불렀는데… 그 사람들이 그리웠다. 사람이 그리웠고, 온기가 그리웠다.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겨울이라 해가 짧다. 몇 가지의 할 일을 하다 보면 금세 어둠이 진다. 그녀의 일상은 그렇게 반복되었다. 그녀는 차라리 오랜 잠을 자고 싶었다. 악에서 구하소서… 묵주를 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은 그녀의 손에 깊이 자리 잡은 주름 속까지 파고들었다. 아멘… 아마도 오늘 밤에는 외투를 입고 자야 할 것 같다. 내일 날이 밝으면 그때는… 나가봐야 할지도 모른다. 내일 날이 밝으면… 외투를 입었다. 곧 있으면 몸이 데워질 것이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사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오랜 잠이나 잘 요량이었다. 내일 그들이 오면 날 깨워 주겠지… 내일 날짜는 무리 없이 셈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야, 내일은 크리스마스니까…

 

4.

너는 배를 움켜쥔다. 결국 알약을 전부 털어 넣고야 말았다. 차라리 손목을 긋는 것보다 덜 아플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먹는 순간에는 아프지 않았는데. 몇 시간 지났지? 두 시간? 세 시간?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약들이 녹아내리면서 위장도 녹아내린다. 그동안 꾸준히 양호실 들락거리며 받았던 약은 꽤 됐다. 한 번에 다 털어 넣을 자신이 없었던 너는 약을 하나하나 전부 빻았다. 가루가 된 약을 너는 물에 타서 조금씩 삼켰다. 엉엉 우는 너를 달래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터넷에 ‘자살’을 검색하면 나오는 말들,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세상은 네가 얼마나 슬픈지, 얼마나 아픈지 결국 몰랐다. 처음에는 죽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냥 정말 그렇게 살기 싫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너는 더욱 발버둥 쳤다. 고등학교 삼학년. 공부를 하면 할수록 너는 더 작아졌다. 나는 왜 이런 것도 모를까? 너는 화장실에서 소리죽여 울었다. 가끔은 주먹으로 때렸던 명치에 푸르게 멍이 들었다. 대학은 누가 가는 걸까 싶었다. 모두 나처럼 힘들까? 세상에 힘든 사람은 오직 나 하나만 있는 게 아닐까? 다들 공부 잘 하잖아. 나만 못 해. 나만. 나만. 나만. 너는 고통에 허리를 비튼다. 입에서는 삼키지 못한 침이 길게 늘어진다. 배를 움켜쥔 다른 손으로는 바닥을 긁는다. 그마저도 이젠 힘겨워 허벅지를 꼬집고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 차라리 다른 곳이 더 아파서 이 고통을 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 온 얼굴이 벌겋다. 코에서는 콧물이 눈에서는 눈물이 입에서는 침이 흐른다. 닦을 겨를도 없다. 추하지, 참. 그때서야 너는 후회를 한다. 차라리 조금만 더 열심히 해볼 걸. 대학 그게 뭐라고. 열심히 살면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인생일까. 어린 네 모습이 네 눈앞으로 지나간다. 산타 할아버지가 놓고 갔던 선물 밤에 만지면 물거품이 된다고 해서 가지고 놀고 싶은 마음 꾹꾹 누르며 잠들었던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유치원에서 연극하고 내려왔을 때 가장 먼저 안아주던 아빠. 그 옷에서 났던 향기. 몹시도 아팠을 때 내 옆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던 엄마. 처음 상장을 받았을 때 그 벅차오름. 비행기를 탔을 때마다 느껴지던 떨림. 좋아하던 연예인을 보면서 느꼈던 작은 설렘. 작은 일상의 행복들에 너는 고개를 젓는다. 차라리 잘 죽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너는 애써 기억을 떠올린다. 공부 못하는 애 엄마는 힘이 없어. 너는 심장을 찢어놓았던 엄마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엄마 나 아픈데 병원 가도 돼? 엄살 좀 그만 부려. 너 요즘에 공부 하기는 하니? 내가 너 그 고등학교 보낸 거 얼마나 후회하는 줄 알아? 차라리 가까운 고등학교 보냈으면 내신이 이 정도로는 안 나오지. 너 이번에 대학 못 가면 고등학교 삼 년 다닌 거 다 헛수고인 거 알지? …아니야. 그냥 있을게. 한참 명치가 아파 울면서 공부했던 때를 떠올린다. 먹지 않으면 배고파 공부할 수 없으니까 물조차 마시기 힘들었어도 꾹꾹 씹어 삼켰던 모래 같은 밥알들. 쓰리게 올라와서 저절로 펜을 꼭 쥐게 됐던 그 쓰림. 야 나 재수하면 어떡해? 우리 가족들이 나 재수하면 죽인댔어. 그냥 죽고 말지. 운동장에서 했던 이야기가 괜히 스쳐지나간다. 누가 나를 죽였을까? 너는 목소리를 내고 싶다. 살려 달라고 말하고 싶다.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죽고 싶다는 소리 안 할게요. 공부 열심히 할게요. 죽은 듯이 살게요. 공부만 할게요 제가 잘못했어요제가잘못했어요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 꺼억 꺽 하고 네 숨이 넘어가는 소리만 방 안에 가득하다. 머리가 어지럽다. 적어도 행복하게는 죽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말들 이어지지 못한 생각들은 잘게 조각나고 만다. 잘게 멎는 숨처럼. 아예 멎을 숨처럼. 너는 죽었다. 온통 녹아버린 위장을 쥐고, 너는 죽었다. 온갖 액체로 범벅된 벌건 얼굴로 너는 죽었다. 고등학교 삼학년. 열아홉에 너는 죽었다. 누가 너를 죽였을까. 너는 죽는 순간 소원을 빌었다. 다음 생에는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너는, 죽었다. 죽어버렸다. 네가 죽을 때 네 침대 위에서 너와 같이 울었던 그 죽음을, 너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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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콘텐츠

19시 45분 즈음

 초기 인물 사진의 가장 큰 특징은 강렬한 눈빛이다. 카메라가 영혼을 앗아간다는 미신이 만연했기 때문에, 그 즈음의 일반인 모델은 하나같이 강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눈을 통해 왕래하는 영혼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의 구멍을 메웠다. 신념, 공포, 분노, 혹은 순수한 동경 따위로. 그런 의미에서 K의 눈은 낡아빠진 싸구려에 가까웠다. 아직 과학이 진리를 대신하기 전, 미신이 미신으로 불리지 않던 시대를 살아가는 듯, K의 눈은 기묘한 생명으로 불탔다. 그녀는 분명 이성보다 심장을 우선하리라. 촬영자로 하여금 그런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눈이었다.  나는 아무말 없이 삼각대를 세웠다. 카메라의 노출값과 함께 호흡을 가다듬었다. 갑갑한 교복 넥타이를 연신 긁어대며, K의 알몸에게 렌즈를 겨눴다. 석고상처럼 바스라지는 신체, 그 위로 수놓아진 푸른색 멍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응시했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녀가 진심 아닌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도, 시퍼런 눈을 치켜뜬채 나를 바라보는 것도.  K와 나는 방과후 빈 교실에서 처음 만났다. 양 팔에 아로 새겨진 멍자국이 염증처럼 부풀어오르는 탓에, 종일 묶어뒀던 팔토시를 막 벗어던진 참이었다. 나는 선생과 아이들이 빠져나간 교실에서 불어터진 흉터를 말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상처가 덧나고 함부로 엉겨붙기 때문에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그거, 얻어 맞은거야?”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채 호흡을 삼키면서, 얼마나 지났을까. 적막이 감도는 교실에서 K의 시선을 눈치챈 나는 소스라치게 놀랄 뿐 차마 할 말을 고르지 못 했다. 담홍색 저녁 노을을 받은 하얀 피부가 꼭 석고상처럼 눈부시다. 교실 뒷문에서 꼿꼿이 펼쳐진 척추가 아름답다. 따위의 사고를 반추하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K가 먼저 입을 열기까지, 나는 아무말 없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람을 죽였어.”  다만 그런 대치상황을 넘어 날아온 K의 한마디는 너무나도 뜻밖의 물건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람을 죽였노라 고백했다. 죄값을 치르는 건 두렵기 때문에 내일 자살을 할 것이라며, 초연한 어투로 속삭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해를 필요로하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녀는 어느새 다가와 내가 반사적으로 움켜쥔 DSLR을 검지로 쓸어올렸다. 슬쩍, 미소지었다.   나에게 처음 카메라를 건네주던 날, 아버지는 말했다. 사람의 눈동자도 카메라처럼 풍경을 담아둘 수 있다고. 잠깐 빛을 응시한 다음 눈을 감으면 눈꺼풀 속에 그 잔향이, 불꽃이, 똑똑히 보이잖아. 이게 바로 그 증거야. 보호안경 너머로 용접 불꽃을 튀기며 그는 곧잘 떠들었다. 삭으로 뜬 달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그 무렵의 나를 사진으로 이끈 매력적인 미소였다. 꼭 지금처럼, 체념 한방울 섞이지 않은 강인한 미소.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나는 양 뺨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걸 금방 실감할 수 있었다. K는 꼭 술을 마시지 않은 아버지처럼 따뜻했다.  “그러니까 내 영정사진을 찍어줘. 너, 사진 찍는거지?”  그날부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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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02
보이지 않는

 남자는 늑대였다. 손바닥만한 핏덩이로 태어난 그에게는 입술 대신 주둥이가 있었다. 남자의 어미는 탯줄도 채 자르지 않고 그 모습을 긴밀히 살폈다. 길게 뻗은 주둥이, 옹골찬 회색 눈동자, 전신을 덮은 이중 모피, 남자에게 인간 다운 신체 부위는 온전히 돋아난 다섯 손가락이 전부였다. 그 꼴이 영락없이 괴물이었기에, 남자는 버려졌다. 가문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바야흐로 이단 심판관이 악마와 마녀를 때려잡던 시기였다. 가축이 죽고, 곡식이 마르는 건 전부 악마의 소행이라고, 교회는 말했다. 달리 탓할 대상이 없어,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다. 숲속에서 홀몸으로 지내는 여성은 화형, 기형아를 출산한 일가는 몸이 찢어졌다. 단, 귀족은 예외였다. 그들은 단두대 아래서 목이 잘렸다. 최소한의 존중이었다.  버려지다시피 했지만, 남자는 부모가 기요틴 아래 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열일곱이 되는 나이에 몰래 성을 빠져나와 무법지를 거닐었다. 힘들지는 않았다. 남자는 금방 자랐다. 성을 빠져나왔을 때, 그의 신장은 이미 2m 가까이 되었다. 단단하게 솟은 송곳니는 돌을 부술 만큼 강했다. 이곳저곳을 떠돌다, 버려진 저택에 둥지를 틀었다.  "저곳에는 용이 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몸을 붙인 폐 저택에 관한 소문이 돌았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용이 몸을 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이제 30년 가까이 삶을 영위한 남자는 더는 아무것도 먹고 마실 필요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호수를 핥았다. 자기 직전, 저택 주류 창고에 남아있는 위스키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걸로 족했다. 덩치는 점점 커져, 처음 밖으로 나왔을 때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됐다. 하지만 남자는 늑대였다. 괴물이었지만, 용은 아니었다. 폐허에 버려진 정장을 손질하여 입고, 혀를 굴릴 때, 보다 고풍스러운 단어를 벼렸다. 마을의 처녀를 납치하거나, 황금을 탐하지 않았다. 다섯 손가락 달린 괴물은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누구보다 인간성을 갖춘 영혼이, 기사가 그의 심장을 꿰뚫어주길 바랐다. 남자는 괴물이었다. 괴물은 인간에게 죽어야 했다. 어디에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남자는 결론 내렸다.  폐허는 나름대로 지낼 만했다. 가구에 남아있는 문양으로 추측해 볼 때, 몰락 귀족의 저택인 것 같았다. 정장, 거대한 거울, 마찬가지로 거대한 시계.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은 모두 폐허에 남았다. 남자는 그들을 입었다. 버려진 것들을 입었다. 편안했다. 몸을 옥죄는 정장 안에서 남자는 편안할 수 있었다. 시계의 먼지를 털고 기름칠을 했다. 거울 역시 관리하긴 했지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닦아도 비치지 않았으니까. 본인 만큼은 절대로.  남자는 저택의 거울에 비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처음 그 앞에 섰을 때 깨친 사실이었다. 세상을 담은 조각은, 남자를 제외한 모두를 비췄다. 이따금 비를 피해 들어오는 올빼미, 토끼, 여우를 비췄다. 잘 정돈된 정장을 비췄다. 출처 모를 와인과 위스키 역시 그곳에 담겼건만, 남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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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29
꽃비

할머니는 소녀의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창문 너머로 쭉 이어진 벚나무의 행렬에 양 뺨을 살짝 붉혔다. 여든에 가까워 이제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이었지만 초봄의 내음 앞에서 그녀는 소녀가 되었다. 두 눈을 활짝 열고서 가만가만 떨어지는 꽃비를 응시했다. 노인답지 않은 풍부한 생기가 그 표정에 깃들어 있었다. 엄마는 종종 ‘어머니가 너무 늙으셔서 그래’하며 한숨을 내쉬곤 했으나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늙지 않았다. 다만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지금껏 놓쳐온 과거를 향해서. “너희 아빠랑 요양원 좀 알아보고 올 테니까 오늘만 할머니랑 둘이 있어.” 그 말과 함께 부모님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고삼이 된 너를 배려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슬픔이나 연민 대신 피로가 묻어나오는 한숨이었다. 최근 들어 엄마와 아빠는 자주 그런 한숨을 토했다.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오늘도 평소처럼, 응, 그래, 괜찮아. 짧은 세 마디로 둘을 배웅했다. 부모님의 한숨을 닮아 무거운 미소를 지었다. 시선을 돌려, 거실 탁자에 주저앉은 할머니와 눈을 맞췄다. 머리도, 눈도, 뇌도, 새하얗게 질려버린 노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어째서 우리의 몸은 이렇게 쪼그라들고 마는 걸까요. 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나는 창문에 기댄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올렸다. 거슬거슬한 촉감이 검지 손가락을 타고 전신에 감겼다. 젊음이 빠져나간 노인의 육체였다. 내 검지 손가락의 촉감이, 세월을 뚫고 올라온 그녀의 주름이, 그 사실을 열성적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뇌는 그 사실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며 몸을 웅크렸다. 시간이 흐른다는, 스스로가 늙어간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저는 솔직히 말해서 어른들을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시간이 흐른다는 것도 그 시간에 맞춰 자신이 점점 깎여나가는 것도 모두 당연한 거라고 다들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건 당연하다고 잘난 듯이 말하는 주제에, 어째서 기어코 어제를 돌아보는 걸까. 나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허공을 향해 말했다. 어제, 수업을 시작하기 직전 담임이 내뱉은 중얼거림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슬프다고 말했다. 우리 때가 참 좋을 때라고 말했다. 그 시간이 지나가 버린 지금은 그저 슬프다고 말했다. 우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그저 농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서 저녁 열 한시에 독서실을 빠져나오는 일상은 빈말로라도 그리워할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맨 앞자리에서 담임의 눈꺼풀이 미묘하게 떨리는 걸 보았다. 그는 그때 과연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알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할머니, 꽃이 그렇게 좋아요?” 나는 그리 묻고서, 잠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간고사가 마무리되면 벚꽃도 지겠지. 문득 그 사실을 실감했다. 평소라면 햇빛 아래서 벚꽃을 볼 일이 없는 탓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집을 나와 해가 떨어지고서 돌아오는 나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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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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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형

    안녕하세요, 빛낢 님. 반갑습니다. 이번 소설도 형식적으로 독특해요. 빛낢 님의 지난 소설들 또한 떠올려보면 일반적인 서사성, 즉 사건이 직선적으로 전개되고 주요한 인물이 등장해 갈등을 겪고 해소와 결말에 이르는 일반적인 소설적 플롯을 따라가지 않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네요. 이 작품 또한 일정한 주인공이 겪는 구체적인 갈등과 사건이 등장한다기 보다는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경험과 내면성, 환상이 병치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소설이에요. 처음엔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아이의 죽음이 등장하고 죽음 이후, 자살 등등의 여러 상이한 죽음을 겪은 인물들이 출현해 자신에 관해 보여주네요. 각기 다른 인물들이 죽음이라는 큰 테마를 통해 만나게 되는 방식이에요. 각 단락들이 읽는 맛과 함께 완성도와 리듬감이 있었고 초점화가 잘 되어 있어 뒤바뀐 시점의 각기 다른 인물들이 죽음과 만나는 방식을 폭넓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단점은 작품이 병렬식 구성을 취하고 있는 만큼 이 인물들의 결합을 유기적으로 만들 수 있는 중심 소재나 메타포가 부재한다는 것이었어요. 아무래도 죽음이라는 화두는 너무 막연하고 거대하며 보편적이니까요. 이 각기 다른 인물들이 한편의 소설 속에 어색하지 않게 공존할 수 있도록 중심 소재를 통해 이 인물들을 취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분량이 길어져 문제였던 건지 아이 에피소드를 제외한 다른 에피소드에서 문장이 장황하거나 늘어지는 부분, 아직 퇴고가 덜 끝나 내용이 설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어요. 문단의 구성도 빽빽해 인물의 수다스러운 말들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독자가 길을 잃을 우려도 듭니다. 이 점은 퇴고하면서 완화될 수 있는 부분으로 생각되어요. 퇴고한 버전 꼭 보고 싶네요. 다음에도 소설 올려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2019-11-11 02:09:07
    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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