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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귤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7-01-21
  • 조회수 473

꽃귤

 

책가방이 흐물거리며 어깨에서 벗어났다. 비에 젖은 왼쪽 어깨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었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는지 모를 만큼 오랫동안 현관에 서 있다가 이선아의 왈가닥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언니, 학교 다녀오더니 정신도 거기에 빼 두고 왔어?”

“어? 얜 또 무슨 미친 소리야.”

“상식적으로 일단 들어와서 얘기하지? 지금 눈 풀렸는데?”

이선아가 한쪽 눈가를 찡그리더니 팔짱을 꼈다. 한심하다는 눈빛. 아주 한 살 차이라고 봐 줬더니 기어오르지? 괜히 팩 소리를 지르고 신발을 황급히 벗었다.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질 뻔 했지만 나름 무사히 착지했다.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보고 있던 이선아의 눈빛은 변함없었다. 비 다 맞고 잘 하는 짓이다, 어? 나는 이선아를 째려보곤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아 시끄러워! 뭐 어쩌라고! 문 그렇게 닫지 말라고! 무슨 상관이야!

마구 정돈이 되지 않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기며 옷장을 열었다. 젖은 옷을 갈아입으려다 왼쪽 어깨에 아직까지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아 옷들을 뒤적이던 손을 멈추었다. 내 손을 어깨에 대어 보았지만 같은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심지어 비슷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대로 옷장 문을 밀어 닫고 미끄러지듯 침대에 앉았다. 보송한 이불이 젖은 생쥐 꼴과 어울릴 리는 없었지만 뭐 어때.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온기는, 자꾸만 선배를 떠올리게 되는 매개체인 것이다. 무의식적인 회상일까. 동아리를 가입하게 된 이유였던 선배. 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동아리를 선택하라는 종이와 홍보 책자가 함께 날아왔고, 신입생이었던 우리는 쉬는 시간마다 책상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동아리에 대해 재잘거리기 바빴다.

“너 어디 갈 거야?”

“몰라, 이 학교는 동아리가 왜 이렇게 많아서 사람 결정장애 오게 만들어!”

나는 그대로 의자에 늘어져 심드렁하게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동아리 활동. 맡기면 열심히 할 자신은 있었지만 중학교 때의 동아리를 생각하면 온몸이 일순간 부르르 떨려 왔으니까. 삼 년간 열심히 일구었던 동아리에서의 좋은 추억이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항상 억압만 받아 왔기 때문이었는지 아직도 동아리라고 하면 일단 경계하고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데 우리 동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냥 정하래?”

“아, 선배들이 각 반마다 돌아다니면서 홍보하긴 한다던데 아직 우리 한 명도 안 왔잖아.”

그러게, 우리 반만 소식이 늦나? 말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거리던 현수가 동아리 홍보 책자를 닫고 날 향해 물어왔다.

“으음… 진아야, 넌 뭐 관심 있는 거 있어?”

“그으다지… 글쎄, 잘 모르겠는데….”

말꼬리를 늘이는 것이 특기라도 되는 듯이 웅얼웅얼거리며 나 좀 잘게, 하고 대충 대답한 나는 다음 시간을 위해 책상에 엎드렸다. 한국사 시간 전에 자 두지 않으면 수업 중에 잘 확률이 백 퍼센트다. 그러나 편안한 자세는 몇 초도 넘기지 못하고 방해받았다. 잠이 들기 직전 잠시만 얘들아 여기 좀 봐 줘! 하는 명랑한 여자 목소리가 아이들을 강제로 기상시켰다.

“야 누구 왔…”

“동아리 홍보 왔나 봐! 저 남자애 엄청 잘생겼지!”

현수가 가리킨 쪽을 보자 과연, 여학생과 남학생 하나가 무언가를 들고 교단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오른쪽 눈을 비볐다. 시야가 좀 더 또렷해지자, 남학생이 들고 있는 것이 동아리 홍보용 피켓이라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선배 아냐?”

“어?”

“명찰 색이 다르잖아.”

“어, 그러게?”

찌뿌듯한 허리에 손을 대고 꾹꾹 눌러댔다. 책상에 늘어져 새로 출현한 두 명의 이방인들을 바라봤다. 왜 하필이면 이 시간에 와서 잠도 자지 못하게 난리인 건지. 잡담도 잠시, 남학생과 여학생이 동시에 안녕, 하고 인사를 했다. 눈을 깜빡였다. 잠자기 직전 봐서 잘 보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에서 설명하는 선배는 상당히 멋져 보였다. 선배는 칠판에 커다랗게 신문편집부, 라고 쓰더니 손을 털었다.

“우린 신문편집부야. 학교 신문을 만들고 발간하는 일을 해. 이사장님의 총애를 받고 있는 동아리라서 지원금도 빵빵하고! 작년에는 지원금 백만 원으로 회식도 갔었어, 만든 신문은 여러 대학교에 보내지니까 대학 진학을 그쪽으로 고려하는 친구들에겐 유리하겠지?”

그 후로 선배는 계속해서 신문편집부에 대한 얘기를 했다.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 선발 인원이나 커리큘럼 같은 것들. 선배의 머리 색깔이나 눈동자, 하다못해 교복을 어떻게 입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아주 미미하던 귤 향기만이 남아있었다. 동경일까, 하는 마음으로 신문편집부에 지원했고 우연인지 다행인지 합격자 명단엔 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말을 걸어보지 못했던, 앞에 서기만 하면 콩닥거리는 가슴에 급히 원고만 제출하고 돌아와야만 했던 그런 선배.

 

“많이 남았어?”

“음 조금요, 원고 네 개만 고치면 돼요….”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기장이라는 이유로 남아서 부원들의 글을 봐 줘야 한다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지만, 관례라며 선배들은 어깨를 두드리고 가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없던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선배들은 전부 가신 줄 알았는데? 내 옆에 선배가 앉아 있었다. 숨을 황급히 들이마시고 놀라 선배를 바라보았다.

“어, 서, 선배 안 가셨어요?”

“응, 일단 나도 기장이니까?”

“아.”

침묵이었다. 둘이 이야기를 한 적도 없었고, 부기장 선배가 내게 대부분의 일을 가르쳐줬으니 어색한 것이 당연했다. 갑자기 공기가 낯설게 느껴져 나는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리고 원고를 바라보았다. 커서가 깜박였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쉬이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몇 번이나 백스페이스를 누르고, 교정 버튼을 눌렀다가, 이건 아닌데, 하고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선배가 옆에 있다는 사실에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아, 바보 이진아!

“도와줄까?”

“네?”

“그거.”

선배의 손가락이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다. 새삼 손가락이 길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진아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마치 온몸에 심장을 달아 놓은 것 같이 쿵쿵거렸다. 그러니까.

“어, 네! 조, 조금만 부탁드릴게요.”

선배는 자신의 노트북을 켜더니 유에스비로 담아간 파일로 작업을 시작했다. 선배의 옆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분명 입을 다물고 있는데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선배의 집중하는 모습. 선배는 집중하면 입술을 내미는 버릇이 있구나. 무의식중에 난 내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선배가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황급히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기고 숨만 간신히 쉬고 있었다.

“이쪽은 끝.”

“어, 벌써요?”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질 못했다. 점점 고개는 내려가고, 애초에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눈은 갈 곳을 잃고.

“아직 못 끝냈어?”

선배의 목소리에 선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배는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원위치로 돌아왔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선배의 눈빛에 물음표가 달려 있었다. 나는 뺨을 긁적이며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거의 다 끝났어요. 이제 메일만 보내면 끝이에요.”

메일 창을 클릭하려는데 선배의 말이 손목을 잡았다.

“아, 메일 보내지 말고 내일 동아리 시간에 바로 나눠줘.”

“그래도 되요?”

“원래 그래 왔으니까요?”

선배가 내 말투를 따라하듯 말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곧 학교 문 닫아, 가자. 하는 목소리에 난 뻣뻣하게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비 오네?”

“어, 비 와요? 우산 안 가져왔는데….”

시원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름 날씨를 한풀 꺾이게 해 줄 비였다. 난 책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으니 비닐이라도 쓰고 가야지. 책가방에 방수가 되는 비닐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쪼그려 앉아 책가방 안을 보고 있는데 무언가가 등을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선배였다.

“뭐 해? 뭐 놓고 온 거 있어?”

“비 오니까요…?”

선배가 당황하는 모습에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선배는 눈을 깜빡이다가 낮게 웃더니 자신의 우산을 가리켰다. 같이 쓰고 가자. 얼결에 고개를 끄덕여버린 나는 숨을 들이켰다. 선배는 자연스럽게 우산을 펴고 손짓을 했다. 다시 심장이 쿵쿵, 쿵쿵 하고 뛰기 시작하고.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 다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넘어진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엔 이미 늦었다. 몸은 이미 앞으로 기울었다. 점점 빨라지는 가속도를 몸이 느끼고 있다.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어깨에 닿은 따뜻한 온기,

조심해야지, 하고 입술에서 흘러나온 다섯 음절과 아찔하던 귤 냄새를 나는 기억한다.

 

옛날에 친구가 말해 줬던 것이 떠올랐다. 꽃 하나를 따다가 꽃잎을 하나씩 떼면서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를 번갈아 되뇌는 일종의 점. 왜 하필 지금 떠올랐을까? 선배는 집에 들어가면 연락을 한다고 했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젖은 어깨를 만져도 선배의 온기와 같은 온기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질문에 대한 답 또한 도출되지 않는다. 손으로 눈을 꾹 눌러본다. 아직도 귤 냄새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언니, 엄마가 귤 먹으라고 사 놨대!”

“가져다 줘!”

“아, 진짜 언니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못 가져가? 좀 일어나! 그러니까 살이 찌지!”

“나보다 몸무게 많이 나가는 사람은 입 다무세요.”

이선아가 툴툴거리며 귤을 담은 접시를 내팽개치듯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동글동글한 귤들이 조금씩 흔들렸다. 차가운 귤을 손에 쥐었다. 그러고도 가지 않고 있는 이선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선아는 나를 째려보더니 언니가 그러면 그렇지, 라고 툭 말을 내뱉고는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문이 눈앞에서 쾅 닫혔다. 한결 아늑해졌다.

귤껍질을 벗겼다. 손톱 아래에 귤의 흰 부분이 껴서 몇 번이고 다른 손톱으로 긁어내야만 했다. 주황색 귤 알맹이가 보였다. 문득 다시 꽃잎점이 생각났다. 나도 모르게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를 되뇌고 있었다.

깐 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알맹이 하나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좋아한다. 다른 알맹이를 연이어 떼어냈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이게 뭐라고 가슴팍에서 콩콩대는 소리가 들리는지.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그리고 좋아하지 않는다. 마지막 알맹이가 좋아하지 않는다에서 멈추었다.

잠시 온 몸의 사고회로가 정지된 듯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야! 이 귤은 중간에 터진 부분이 있으니까 무효야! 혼자 속으로 외치곤 흩어져 있는 알맹이들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입을 움직여 귤을 꼭꼭 씹었다. 그 선배에게선 꼭 이 향이 났지. 다른 귤을 손에 쥐었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이 귤은 작으니까 무효야. 이건 껍질에 파랗게 멍이 들어 있으니까 무효야.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이 귤은 맛이 시니까 무효야.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 이건 모양이 일그러져 있으니까 무효야. 무효야, 무효야, 무효야. 이쯤 되면 귤이 나를 농락하는 건지, 아니면 괜한 오기이자 객기인지 모를 지경이다. 한 번쯤은 좋아한다, 가 나올 수 있는 거 아냐?

마지막 귤에 손가락을 찔러 넣는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진동을 타고 귤 냄새가 방안에 가득 퍼졌다. 나는 손을 뻗었다.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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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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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 2018-06-30
현상흔

현상흔   빛이 꼭 은신한 뱀 같았다. 며칠 전 촬영의 대가로 얻은 손목의 통증과 불면이 두통을 몰고 왔으나, 무영이 앓는 환시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출사 날마다 빛은 사정거리 내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독사 꼴을 했다. 천변에서의 촬영은 지난해 겨울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영이 눈가를 가볍게 찌푸렸다. 갈색 홍채가 투명하게 비칠 만큼 날이 좋았다. 무영은 물에 반사되는 빛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길게 응시했다. 강물 위에서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오리배를 타고 있었다. 볕을 받은 빨간 줄이 무영의 손목을 한 바퀴 휘감아 마치 실팔찌처럼 보였다. 아픔을 몇 번이나 더 찍을 수 있을지를 무영은 흐릿하게 가늠했다. 한 번. 운이 좋다면 두 번까지. 무리해서 찍으면 손목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걸 무영은 알았다. 사실 지금 잘린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상흔이 깊었다. 무영이 한숨을 쉬자 빛을 가려낸 손바닥 아래로 피사체와 피사체의 보호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앳된 여자아이와 한 쌍의 부부였다. “안녕하세요.” 무영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목에 걸린 카메라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여자가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무영은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리본을 매단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영의 볼 양쪽에 의례적인 웃음으로 만들어진 보조개가 움푹 팼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상반신만한 코커스파니엘을 품에 안고 있었다. “최대한 즐거운 감정을 담아 주세요. 천변에서 강아지랑 놀게 둘 거예요.” “강아지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여자가 잠시 여자아이 쪽을 바라보다가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침묵은 매미 소리에 묻혔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따가운 볕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갈색 아이브로우로 진하게 그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일처리에 능숙한 십일년차 사진사였다. 무영의 손이 카메라 전체를 훑고 지나가는 동안 여자는 여자아이의 갈색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마지막이라고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남자는 자신의 딸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가 딸아이의 손에 빨간 막대사탕을 쥐어주고 나서야 무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선배의 목소리가 언뜻 스치는 것 같았다. 날이 좋은 날에는 노출값을 줄여야지. 감정을 놓치면 안 돼. 무영은 조리개를 조금 더 닫고 테스트 컷을 찍었다. 무영은 시시때때로 뒤바뀌는 초점을 좇았다. 피사체는 강아지를 따라 달렸다. 점박이는 샛초록색의 여름 잔디로 뛰어들었다. 피사체가 강아지를 겨우 따라잡고서 품에 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혔다. 강아지의 꼬리가 쉴 틈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무영은 여자아이의 가장 즐거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셔터에 손을 올렸다. 무영의 미간에 얼핏 주름이 잡혔다가 풀어졌다. 여자아이가 이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다가 갑작스럽게 강아지

  • 윤별
  •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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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줄

    딱, 학생 때 느낄 수있는 설렘이 가득한 글.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헤헤 대는 글이었어요. 잘읽었습니다!

    • 2017-02-03 01:42:07
    김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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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선재

    * "책가방이 흐물거리며 어깨에서 벗어났다." - "나는 흐물거리는 책가방을 내려놓았다." 정도가 좋을 듯 합니다. 책가방이 자신의 의지로 '어깨'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요. * 잘 읽었습니다. 슬몃슬몃 웃음이 나는 글이었습니다. 윤별씨 또래가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잘 드러나는 글이었다 생각합니다. 우선, 앞의 두 작품과 비교해 이 작품은 문장에 별 무리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좋은, 멋진 문장을 쓰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습작기에는 종종 과하게 힘을 주기도 하고 어려운 단어로 어려운 구조의 문장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개 그렇게 쓴 문장들은 그리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힘 때문입니다. 어깨에 힘을 주고 날린 훅과 어깨에 힘을 빼고 툭 건드리듯 날리는 훅과는 분명히 다릅니다.(권투는 잘 모르지만 대개 그렇다고들 합니다.) 좋은 문장, 가독성이 있는 문장은 어깨에서 힘을 빼고 날리는 훅과 같은 문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가독성도 좋고 이야기에도 무리가 없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플롯에 대한 것입니다. 현재-과거-현재로 돌아오는 플롯이 지나치게 평이하고 또한 '나'와 '이선아'의 갈등(?)이나 '선배'가 있는 동아리에 가입하게 된 경위가 이 작품에서 그리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구상할 때 무엇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어디서 끝나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만약 이 작품이 선배와 내가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상황에서 시작된다면 어떨까요. 우산 밑 나란히 걷는 두 남녀의 묘사에 충실했더라면 뒷 부분의 내 '과일점'이 좀더 효과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소설은 시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구성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단 번에 쓰기 어려운 것이겠죠. 물론 단번에 썼다고 하더라도 쓰는 시간보다 훨씬 긴 퇴고의 시간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무엇을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낼 것인지. 고민해보시길 바랍니다.

    • 2017-01-30 12:18:27
    김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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