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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7-01-21
  • 조회수 391

 

죽음이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시계를 본다. 자정이 겨우 넘은 시각. 방 안에 자의로 갇혀있는 시간은 얼마나 길었지. 얼추 가늠해도 십오 일 남짓이다. 달이 뜨는 열다섯 번의 순간을 도축하듯 무시했다. 여자는 손을 뻗어 자신의 원고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프린터에서 막 나온 원고가 아직 따뜻하다. 열다섯 번의 밤과 열다섯 번의 낮을 쏟아 부은 작품이다. 꺼 두었던 휴대폰을 켰다. 편집장에게 연락을 했다. 여자는 오랜만에 듣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랐고, 편집장은 여자에게서 연락에 온 것을 놀라워했다. 여자는 막 마무리지은 원고를 봐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명랑하게 귀에 꽂혔다. 저 편집장은 항상 명랑했지. 당장 내일이라도 좋으니 근처에서 만나자는 말에 여자는 동의했다. 급작스럽게 잡힌 약속이었다.

그것은 곧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 확인해야 한다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여자는 자신의 방에서 비척비척 나갔다. 스탠드의 옅은 불빛에 익숙해져 있던 여자의 눈은 강한 빛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지러웠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떨리는 다리가 위태롭다. 여자는 화장실의 불을 켰다. 그곳에서 여자는 낯선 사람을 만났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머리카락은 부스스하고 다크서클은 뺨 중간까지 내려왔다. 이미 죽은 것 같아 보이는 눈에는 생기가 없었고 팔다리는 보름 전보다 훨씬 말라 뼈의 결합부가 도드라져보였다. 여자는 자신임을 확인하기 위해 오른손을 올렸다. 거울 안의 자신은 왼손을 올렸다. 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매끄럽던 원고와 상반된 피부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여자는 눈을 깜빡였다. 삐걱거리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원고를 끝낸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컨디션 조절이다. 최대한 빨리 자야 내일의 만남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여자는 다년간의 회사원 생활과 외부업체의 미팅 경력으로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알았다. 최소한 만남에서 대화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의 인상을 남겨야 한다. 여자는 곧바로 문을 열어 둔 채로 이부자리를 폈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온통 암흑이었다. 채도 낮은 유채색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다. 양을 세어 보아도, 수면유도영상을 보아도, 잔잔한 노래를 들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여자의 몸에는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중력을 이기지 못하는 행동거지들이 그것을 여실히 보였다. 다만 최면이었다. 약간의 방어기제성질을 띤 여자가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의 피부를 걱정하며.

여자는 연필을 잡았다. 나무 향기가 났다. 여자는 종이에 무얼 그릴까 생각했다. 저 밤하늘의 별들과 달이 춤을 추는 것을 그릴까, 아니면 자신의 추레한 몰골을 그려버릴까. 박제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지. 여자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떠올렸다. 인물들. 방금 쓴 원고의 인물들을 그려야겠다. 마디마디가 또렷한 손가락이 희게 떨렸다.

소중하다는 것은 끌어안고 싶다는 것이다. 소중하다는 것은 지키고 싶다는 것이다. 소중하다는 것은 닮고 싶다는 것이다. 소중하다는 것은 동화되고 싶다는 것이다. 소중하다는 것은…. 여자는 열거된 모든 속성에 해당되는 인물을 그린다.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 그녀의 곱슬거리고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생기 없는 눈에 애써 반사된 빛과, 무의식적으로 부풀리는 가슴의 데포르메를 그린다. 연필이 수명을 깎아나가며 인물을 형상화한다. 자그마한 입과, 마른 몸뚱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처럼 튼튼하게 자리 잡고 있는 두 다리와, 개뼈다귀같이 생긴 두 팔을 그린다. 애써 입혀 두었지만 어울리지 않는 흰색 교복 블라우스와, 체크무늬 넥타이와, 보풀이 일어난 조끼와, 시금치 색의 재킷과, 그 아래로 뻗어나가 뱀처럼 흐늘거리는 회색 치마를 그린다. 종이 안에서 살아난 인물이 자신의 창조주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여자는 소설 속에서 이 깡마른 아이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창조한 아이이고 동시에 자신이 죽인 아이이기도 했다. 가장 극단적인 서사를 부여한 소설에서 가장 잔혹하게 죽은. 살아난 아이가 종이 속에 갇혀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초점 없는 눈에서 살의가 보였다. 여자는 문득 이 아이가 자신에게 보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박힌 감정은 점점 몸뚱이를 불려나갔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의자가 다시 삐걱이며 노래했다. 공기가 무거워 아감구멍을 점점 틀어막았다. 여자는 간신히 숨을 쉬다가 칼을 들었다.

여자의 칼은 펜이다. 빨간 잉크가 펜에서 똑똑 흘러내렸다. 잉크가 종이 속 아이의 뺨을 적셨다. 마치 상처가 난 것처럼 잉크가 종이의 결을 타고 빠르게 퍼져갔다. 생각할 시간조차 없이 여자는 그림에 손을 뻗었다. 아이의 뺨에서 시작된 상처가 주위로 번져갔다. 여자가 아이의 뺨을 그었다. 뺨과 눈과 피부를 전부 그어 긁어냈다. 꽃이 피어나는 기괴한 아름다움. 종이를 잉크로 적시고 있는 행위일 뿐인데도 여자는 그 속에서 근육을 본다. 거기에 온갖 장기들이 있다. 하나의 근육세포마다 생명이 있다. 거의 아사한 생명이 있다. 아이가 죽어간다. 여자는 숨을 다급하게 들이켠다. 힘이 빠진 손에서 펜이 굴러 떨어진다. 잉크가 튄다. 아이가 완벽하게 죽었는지 여자는 확인하지 못했다.

 

죽었던가?

그 애가 정말 죽었던가?여자는 눈을 감고 다시 소설을 떠올린다. 몇 번이고 퇴고해서 이젠 거의 외울 수 있을 법한 그 소설을. 완전히 죽음에 도달했던가. 자신이 쓴 소설 속의 한 구절을 여자는 웅크린 채 작게 읊조려본다. 나는 무가치함을 느낄 수 있다. 음수로 치닫는 가치가 몸통을 뚫고 지나간다. 피부에서 맥박이 선명히 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자마자 죽어가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달콤한 꿈을 꾸다가 죽고, 누군가는 심장마비로 죽는다. 누군가는 스스로 목을 조르고, 누군가는 차에 치여서 죽는다. 그러니까 나처럼 피부가 전부 벗겨져 피와 함께 죽어가는 것도 죽음의 일부일 뿐이다. 지극히 작은 파편일 뿐이다.

나는 죽기 위해 소설을 썼던가, 아니면 살기 위해 소설을 썼던가? 살기 위해 약속을 만들었다. 살기 위해 다음날을 기약했다. 숨쉬기 위해 먼 미래의 일을 구체화시켰다. 내가 정말 삶을 갈구하는가? 여자는 입술을 세게 깨문다. 그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 무감각했다. 원래 이렇게 무감각했던가? 자신의 무릎을 껴안고 여자는 제게 또 묻는다. 너는 죽고 싶니, 살고 싶니?

문득 여자는 시계를 본다. 세 시 하고도 절반이 지났다. 편집장을 생각했다. 자신의 원고를 생각했다. 바닥을 칠 몸 상태를 생각했다. 몇 시간 후 자신이 앉아 있을 엔제리너스 카페의 의자를 생각했다. 여자는 자신의 얼굴을 생각했다. 이미 피부가 뒤집어진 자신의 얼굴에 종이 위에 그렸던 여자아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붉은색마저 얼굴 전체에 도포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이가 죽기 직전의 모습으로 말을 걸었다. 너는 죽고 싶니, 살고 싶니? 여자는 가늘게 뜬 눈을 깜빡이다가 긴 막대기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여자의 손이 시선을 따라갔다. 손에 금속제의 느낌이 선명하다. 칼날이 스탠드의 빛을 반사시켜 약하게 반짝거렸다. 여자는 칼을 제 우둘투둘한 뺨에 가져다대었다. 잉크가 흘러넘쳤다.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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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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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 2018-06-30
현상흔

현상흔   빛이 꼭 은신한 뱀 같았다. 며칠 전 촬영의 대가로 얻은 손목의 통증과 불면이 두통을 몰고 왔으나, 무영이 앓는 환시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출사 날마다 빛은 사정거리 내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독사 꼴을 했다. 천변에서의 촬영은 지난해 겨울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영이 눈가를 가볍게 찌푸렸다. 갈색 홍채가 투명하게 비칠 만큼 날이 좋았다. 무영은 물에 반사되는 빛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길게 응시했다. 강물 위에서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오리배를 타고 있었다. 볕을 받은 빨간 줄이 무영의 손목을 한 바퀴 휘감아 마치 실팔찌처럼 보였다. 아픔을 몇 번이나 더 찍을 수 있을지를 무영은 흐릿하게 가늠했다. 한 번. 운이 좋다면 두 번까지. 무리해서 찍으면 손목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걸 무영은 알았다. 사실 지금 잘린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상흔이 깊었다. 무영이 한숨을 쉬자 빛을 가려낸 손바닥 아래로 피사체와 피사체의 보호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앳된 여자아이와 한 쌍의 부부였다. “안녕하세요.” 무영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목에 걸린 카메라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여자가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무영은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리본을 매단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영의 볼 양쪽에 의례적인 웃음으로 만들어진 보조개가 움푹 팼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상반신만한 코커스파니엘을 품에 안고 있었다. “최대한 즐거운 감정을 담아 주세요. 천변에서 강아지랑 놀게 둘 거예요.” “강아지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여자가 잠시 여자아이 쪽을 바라보다가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침묵은 매미 소리에 묻혔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따가운 볕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갈색 아이브로우로 진하게 그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일처리에 능숙한 십일년차 사진사였다. 무영의 손이 카메라 전체를 훑고 지나가는 동안 여자는 여자아이의 갈색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마지막이라고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남자는 자신의 딸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가 딸아이의 손에 빨간 막대사탕을 쥐어주고 나서야 무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선배의 목소리가 언뜻 스치는 것 같았다. 날이 좋은 날에는 노출값을 줄여야지. 감정을 놓치면 안 돼. 무영은 조리개를 조금 더 닫고 테스트 컷을 찍었다. 무영은 시시때때로 뒤바뀌는 초점을 좇았다. 피사체는 강아지를 따라 달렸다. 점박이는 샛초록색의 여름 잔디로 뛰어들었다. 피사체가 강아지를 겨우 따라잡고서 품에 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혔다. 강아지의 꼬리가 쉴 틈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무영은 여자아이의 가장 즐거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셔터에 손을 올렸다. 무영의 미간에 얼핏 주름이 잡혔다가 풀어졌다. 여자아이가 이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다가 갑작스럽게 강아지

  • 윤별
  •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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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선재

    * "달이 뜨는 열다섯 번의 순간을 도축하듯 무시했다." - '도축하듯 무시했다'는 표현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 "꺼 두었던 휴대폰을 켰다. 편집장에게 연락을 했다." : 단문으로 쓰라는 말을 종종 들었겠죠. 그것은 가독과 의미의 명료함을 강조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사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명료한 두 문장은 과연 각각의 '사태'인 것일까요? 휴대폰을 켠 것은 편집장에게 연락을 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꺼 두었던 휴대폰을 켜 편집장에게 연락을 했다."로 쓰는 것이 문맥상 보다 유연할 듯 합니다. * "여자는 자신의 방에서 비척비척 나갔다. 스탠드의 옅은 불빛에 익숙해져 있던 여자의 눈은 강한 빛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여자는 부스스 의자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눈이 부셨다. 희미한 스탠드 불빛에 오래 익숙했던 탓이다." : 어떤 상황인지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여자의 눈은 강한 빛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표현은 어색합니다. 이런 수동태의 문장은 영어식 표현입니다. 또한 작품의 첫 머리에 '자정'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으로보아 지금은 '한 밤'인 듯 싶은데 왜 눈이 부신 건지요. * "다만 최면이었다." : 목적어를 분명히 해야 하는 문장입니다. * " 빰과 눈과 피부를 전부 그어 긁어냈다. 꽃이 피어나는 기괴한 아름다움." - "빰과 눈과 피부를 전부 그어 긁어냈다. 꽃이 핀다. 여자는 종이 위에서 점점이 번져가는 붉은 꽃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 '기괴한 아름다움'을 진술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소설에서는 그것을 단지 그러하다고 진술하기보다는 묘사를 통해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음수로 치닫는 가치"는 도대체 어떤 가치인가요? 음수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 잘 읽었습니다. 확실히 윤별씨는 요즈음 소설보다는 시쪽에 가까운 글을 쓰고 계시는 듯 합니다. "시는 춤추는 것이고 소설은 걷는 것이다"는 말을 한 작가가 있습니다. 소설은 시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 혹은 과정을 가져야 한다는 말일 겁니다. 이 소설에서 아쉬운 점입니다. 소설은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 유기적으로 어울려 개연적이고 논리적인 체계를 갖춰야 합니다. 우선 자정이 지나 편집장에게 함부로 전화를 거는 '여자'는 어떤 작가인 거죠? 제가 아는 세계에서 자정 넘어 편집장에게 원고를 봐달라고, 내일 만나자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만. 소설 첫머리의 여러 설정들(스스로 자신을 보름 남짓 가두고 글을 쓰는 것이라든가 편집장과 내일 만날 약속을 잡는다든가 그 약속을 위해 자신의 몰골을 점검한다든가 하는)은 이 작품에서 그닥 효과적인 설정은 아닌듯 합니다. 여러 설정들이 이 작품을 오히려 서툴게 만들고 있습니다. 자신의 피부가 뒤집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작가. 물론 작가들이라고 해서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작품 중반부터 등장하는 여자의 내면에 몰입을 방해합니다. 또한 여자가 그렇게 피폐해진 것이 작품 때문인지, 그것이 원래 여자의 내면 세계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인물에 대한 개연성과 작품의 맥락에 통일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앞의 작품도 그랬고 이 작품도 역시 윤별씨와 너무 멀리 있는 인물을 그려내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늘 얘기하지만 자신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세계. 작품의 인물은 그런 세계 안에서 찾는 것이 좋겠습니다.

    • 2017-01-30 11:39:16
    김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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