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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7-01-21
  • 조회수 490

명함

 

여자가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구불거리는 검정색 머리를 노란 고무줄로 질끈 동여맨 채였다. 여자의 손에 불거져 나온 힘줄처럼 머리카락이 툭 비어져 나왔다. 손가락의 끝에 가려진 검은 글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래산업 마케팅홍보팀 윤미정. 마케팅홍보팀, 하고 여섯 음절을 입안으로만 굴려보다가 저 깊은 곳에서 끓는 활자들에 여자는 입술을 잘근 물었다. 저기요, 여기 장사 안 하나요? 네, 나가요! 비린내가 풍기는 밖을 향해 소리친 여자는 끙 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여자의 투박한 손에서 벗어난 명함은 여자가 입은 앞치마의 앞주머니에 자리를 잡았다.

 

뭐 드릴까요?

여기 바지락은 어떻게 해요?

킬로에 만 오천 원이에요.

왜 이렇게 비싸요? 저기는 만원이던데.

자연산이라…. 그래두 맛은 있어요. 내가 여기에 생합이랑 이것저것 얹어드릴게.

아… 네에, 좀 둘러보고 올게요.

 

유모차를 끌고 온 가족은 여자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수산시장의 비린내 사이로 사라졌다. 엄마 손을 잡고 나온 초록 티셔츠의 남자아이가 한 번 뒤돌아보았을 뿐이었다. 여자는 자신의 또 다른 손을 내려다보았다. 분홍색 고무장갑에는 물에 떠다니는 희뿌연 잔여물들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여자는 오늘도 같은 생활을 반복했다. 명함을 만들었으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외려 저 직위와 동떨어진 제 신세를 눈앞에서 직시할 수 있었을 뿐이다.

 

미정인 무슨 일을 해? 그러니까…. 말을 어물어물 늘이며 여자는 저와 위로 두 살 차이 나는 남자의 말을 회피했다. 집안 식구들이 전부 모인 설날 윷자리에서 굳이 직업을 물어보는 저의가 무엇일까. 미정은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만 이리저리 움직였다. 구불구불 굽이치는 손가락이 다른 쪽의 손바닥을 긁어댔다. 미영인 공무원이구, 미선인 치과에서 일하고. 태형인 이번에 승진한다고 했나?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하하하….

인위적인 웃음소리에 잠시 여자는 숨을 멈췄다. 집안 식구들의 눈빛이 전부 제게 자신이 든 가위처럼 날아와 온몸에 꽂히는 것 같았다. 느낌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자는 제 몸에 구멍이 나진 않았는지 더듬어야만 했다. 태주는 뭘 하지? 아, 아직 취준생? 아직도? …. 제 남동생은 대답하지 못했다. 여자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애꿎은 빨간색 윷말만 반들거리도록 매만졌다. 폭격기처럼 내리꽂히는 비폭력으로 포장한 폭력적인 이야기들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뒤따랐다.

그래서 미정인 무얼 한다구? 다시 한 번 물어오는 끔찍한 목소리에 여자는 손 마디마디가 허옇게 질리도록 힘을 주다가 고개를 들어 아주 새된 소리를 내뱉었다. 미, 미래산업 마케팅팀에서…. 순간 경멸의 눈빛에서 호의와 질투가 섞인 눈빛으로 속성이 바뀌는 것을 여자는 눈치챌 수 있었다. 얼른 고개를 숙인 여자는 겨우 말을 끝맺었다. …일하고 있어요.

 

비린내가 현실을 일깨운다. 여자는 오늘 새벽에 경매시장에서 공수해 온 바다생물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사무치는 부끄러움이 여자의 피부를 야금야금 타고 오른다. 여자는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제 팔뚝을 교차해 붙잡았다. 순간의 가족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바다생물이었다. 미영의 질투 어린 눈빛은 꽁치를 닮았고, 미선의 반지 낀 손가락은 갈치를, 태형의 웃는 대가리는 고등어를, 모든 이야기를 주도했던 태철의 혀는 장어를 닮아있었다. 태주는 플랑크톤을 빼닮았다. 노력만큼 증식하지만 결국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순식간에 먹이로 전락하는. 꽁치와 갈치와 고등어가 플랑크톤을 입속으로 쓸어넣는 광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장어가 그 주위를 맴돌며 어떤 생선을 자신의 저녁으로 삼을지를 가늠했다. 팔기 위해 내어둔 상품들이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앞주머니에 들어 있는 명함을 다시 떠올렸다. 순간 바다생물 축에도 끼지 못하는 자신이 서러워졌다.

정말 하고 싶어 했던 일이 무엇이었더라. 여자는 어릴 적 자신의 꿈을 떠올렸다. 우주 비행사가 되어 우주에 존재하는 별에 모조리 자신의 발자국을 찍는 것. 기체로 이루어진 행성이 있다는 것을 알 만큼 커서는 의대에 진학해 부검의가 되어 사람 살을 찢고 그 안의 장기들을 탐색하는 것을 꿈으로 삼았었지. 실업계 고등학교를 지원한 후로는 그저 취업을 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 있었고. 성적으로 도출된 현실을 직시한 후로 어쩌면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망각했는지 모르겠다. 지금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겨우 고무장갑과 생선머리뿐인데.

장사는 계속되었다. 여자는 사람들을 응대했다. 그런데 왜 몸에서 살짝 비린내가 배어 있는 것 같지? 어, 어… 마케팅, 시장조사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니까. 여자는 바다생물들 앞에서 자의적으로 말했던 변명거리를 되씹었다. 비겁하고 유치하다. 갑자기 여자는 이 좁은 수산시장에 바다생물들이 찾아올까 더럭 두려워졌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의 시선이 수산시장 곳곳을 누볐다. 여자에게 체화된 기술은 집중하지 않아도 일을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생선 비린내와 아주 시끄러운 흥정 소리, 수산시장 한구석에서 미묘하게 나는 담배 냄새, 언성을 높여 싸우는 두 남자와 같이 사소한 일들은 별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자의 눈은 희끄무레한 동태의 썩은 눈깔과, 수산시장의 빨갛고 초록색이고 파란색인 파라솔과, 간이 테이블에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는 남자와, 그 남자의 젓가락에 집힌 종류 모를 회와, 물에 흥건히 젖은 도마와, 그 위에서 운명을 저주하고 있는 횟감과, 찰박거리며 물장난하는 포니테일의 어린아이와, 그것을 저지하는 자기 또래의 여성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여자는 대게 십 킬로를 주문한 중년의 남성에게 포장한 대게를 건네주었다. 한 명의 손님치곤 상당히 많은 돈을 받아들었다. 앞주머니에 돈을 접어 넣었다. 앞주머니에서 반들거리는 종이의 재질이 만져졌다. 때와 땀이 묻지 않은 순수한 종이의 감촉. 여자는 순간 소름끼치는 이질감에 명함을 꺼내 땅에 던졌다. 마케팅홍보팀 아래에 적힌 자신의 이름이 낯설었다. 생명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무생물처럼. 여자는 고무장화를 신은 발의 뒤꿈치로 명함을 몇 번이고 짓이겼다. 무생물을 깨고 나오는 신선한 흥정소리를 여자가 목청껏 외치기 시작했다.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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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 2018-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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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 2018-06-30
현상흔

현상흔   빛이 꼭 은신한 뱀 같았다. 며칠 전 촬영의 대가로 얻은 손목의 통증과 불면이 두통을 몰고 왔으나, 무영이 앓는 환시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출사 날마다 빛은 사정거리 내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독사 꼴을 했다. 천변에서의 촬영은 지난해 겨울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영이 눈가를 가볍게 찌푸렸다. 갈색 홍채가 투명하게 비칠 만큼 날이 좋았다. 무영은 물에 반사되는 빛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길게 응시했다. 강물 위에서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오리배를 타고 있었다. 볕을 받은 빨간 줄이 무영의 손목을 한 바퀴 휘감아 마치 실팔찌처럼 보였다. 아픔을 몇 번이나 더 찍을 수 있을지를 무영은 흐릿하게 가늠했다. 한 번. 운이 좋다면 두 번까지. 무리해서 찍으면 손목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걸 무영은 알았다. 사실 지금 잘린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상흔이 깊었다. 무영이 한숨을 쉬자 빛을 가려낸 손바닥 아래로 피사체와 피사체의 보호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앳된 여자아이와 한 쌍의 부부였다. “안녕하세요.” 무영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목에 걸린 카메라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여자가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무영은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리본을 매단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영의 볼 양쪽에 의례적인 웃음으로 만들어진 보조개가 움푹 팼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상반신만한 코커스파니엘을 품에 안고 있었다. “최대한 즐거운 감정을 담아 주세요. 천변에서 강아지랑 놀게 둘 거예요.” “강아지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여자가 잠시 여자아이 쪽을 바라보다가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침묵은 매미 소리에 묻혔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따가운 볕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갈색 아이브로우로 진하게 그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일처리에 능숙한 십일년차 사진사였다. 무영의 손이 카메라 전체를 훑고 지나가는 동안 여자는 여자아이의 갈색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마지막이라고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남자는 자신의 딸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가 딸아이의 손에 빨간 막대사탕을 쥐어주고 나서야 무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선배의 목소리가 언뜻 스치는 것 같았다. 날이 좋은 날에는 노출값을 줄여야지. 감정을 놓치면 안 돼. 무영은 조리개를 조금 더 닫고 테스트 컷을 찍었다. 무영은 시시때때로 뒤바뀌는 초점을 좇았다. 피사체는 강아지를 따라 달렸다. 점박이는 샛초록색의 여름 잔디로 뛰어들었다. 피사체가 강아지를 겨우 따라잡고서 품에 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혔다. 강아지의 꼬리가 쉴 틈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무영은 여자아이의 가장 즐거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셔터에 손을 올렸다. 무영의 미간에 얼핏 주름이 잡혔다가 풀어졌다. 여자아이가 이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다가 갑작스럽게 강아지

  • 윤별
  •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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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선재

    * "여자의 손에 불거져 나온 힘줄처럼 머리카락이 툭 비어져 나왔다. 손가락의 끝에 가려진 검은 글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여자의 손에 불거진 힘줄처럼 머리카락은 연신 비어졌다. 여자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힘줄이 불거진 손으로 명함을 고쳐 쥐었다. 그제서야 손가락에 가려져 있던 글자가 제대로 드러났다." * "여자의 투박한 손에서 벗어난 명함은 여자가 입은 앞치마의 앞주머니에 자리를 잡았다." - "여자는 손에 쥐고 있던 명함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 쓰신 문장대로라면 명함이 주어인데 명함이 스스로 여자의 손에서 벗어나 앞치마 주머니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어색한 문장입니다. 과하게 힘이 들어간 듯 합니다. * 잔여물 - 부유물이 더 적당할 듯 합니다. * "구불구불 굽이치는 손가락이 다른 쪽의 손바닥을 긁어댔다." : 1. 구불구불-이리저리 구부러져 있는 모양 2. 굽이치다-힘차게 흐르며 굼틀거려 굽이지다. 과연 손가락이 구불구불 굽이칠 수 있을까요? * "미영인 공무원이구, 미선인 치과에서 일하고. 태형인 이번에 승진한다고 했나?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하하하... . : 이 대화의 주체는 도대체 누구인가요? 또한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여럿이 모인 자리라는 설정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화의 주체가 누군지 분명치 않으니 대답하는 자 또한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 하하하 - 이걸 묘사로 바꿀 수는 없을까요? * "집안 식구들의 눈빛이 전부 제게 자신이 든 가위처럼 날아와 온몸에 꽂히는 것 같았다." - 지금 이 상황대로라면 여자는 가위를 들고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앞의 어디서도 여자가 뭘 하고 있는지, 뭘 들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진술은 없습니다. * "폭격기처럼 내리꽂히는 비폭력으로 포장한 폭력적인 이야기들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뒤따랐다." - "비폭력으로 포장한 폭력적인 이야기들이 폭격기처럼 연달아 내리꽂혔다." * "새된 소리를 내뱉었다." - "새된 소리로 내뱉었다." : 새되다라는 형용사는 '높고 날카롭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말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톤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를'이 아니라 '로'를 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 "사무치는 부끄러움이 여자의 피부를 야금야금 타고 오른다. 여자는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제 팔뚝을 교차해 붙잡았다." - 자신의 처지를 다시 자각한 여자가 새삼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 사무치다라는 표현을 써서 피부를 야금야금 타고 오를만큼 부끄러워야 하는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여태껏 윤별씨의 소설에서 보지 못했던 과한 표현들이 자주 보입니다. "여자는 새삼 자신의 처지가 다시 부끄러워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팔짱을 끼고 몸을 웅크린 건 그 때문이었다." 정도면 어떨까요. * "순간의 가족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 "그 순간의 가족들은" 혹은 "그 순간만큼은" * "태형의 웃는 대가리는 고등어를" - "태형의 웃는 얼굴은 고등어의 대가리를" * "노력만큼 증식하지만 결국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순식간에 먹이로 전락하는" - "무한히 증식하지만 결국 물고기의 먹이가 되고마는" * "여자는 바다생물들 앞에서 자의적으로 말했던 변명거리를 되씹었다." : 자의적이라는 말은 결국 자신의 의지대로라는 뜻입니다. 굳이 자의적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여자는 바다생물들 앞에서 그렇게 둘러댔다. 궁색한 변명이었다." * "한 명의 손님치곤 상당히 많은 돈을 받아들었다." - "손님 한 명에서 받은 돈은 근래 보기 드물게 많은 돈이었다." * "생명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 거짓 이력을 표현하려 한 것 같습니다. "거짓의 이력이었다."라고 편하게 쓰면 안 될까요? '생명력'이 '존재'한다는 것이 어색합니다. * "무생물을 깨고 나오는 신선한 흥정소리를 여자가 목청껏 외치기 시작했다." - "무생물을 깨고 나오는 신선함"이 과연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여자는 힘차고 높은 목소리로 흥정을 하기(호객을 하기) 시작했다. * 여태까지 제가 읽은 윤별씨의 작품들은 분명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와 분위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분명히 내면이 충돌하면서 분위기를 상승시키며 사건을 전개하거나 공간을 입체화하는 그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졌네요. 물론 다양한 세계를 다양한 시선으로 읽고 느끼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다만 그 다양성을 바라보는 나는 언제나 '나'라는 것이 문제겠죠. 이 작품을 읽고 아쉬웠던 점은 인물이 지나치게 평면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소설은 어쩔 수 없이 서술자의 시선으로 모든 것이 묘사되고 진술되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그런 묘사와 진술을 통해 인물이 캐릭터화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서술자인 여자는 명절에 있었던 일로 인해 거짓 명함을 만들었다가 결국 그 명함을 짓이겨 버리고 본업으로 돌아 옵니다. 여기서 가장 주된 사건은 '명절에 있었던 일'과 '그 명함을 짓이겨 버린 일'이겠죠. 그런데 두 사건 모두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모호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여자'도 그리 매력적인(문제적인) 서술자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건 시와 소설을 병행할 때 생기는 문제라기보다 쓰는 나가 어느 쪽을 향해 서 있는지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시절에는 무조건 '쓰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습니다만, 또 어떤 때는 '생각과 상상력'이 더 중요하기도 합니다. 나는 어떨 때 쓰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는 것인지,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상상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설가는 물론 몸이 부지런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몸만 부지런해서는 안 됩니다.

    • 2017-01-27 14:07:25
    김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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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 저는… 도대체 소설을 안 쓴 기간이 이렇게 제 문체에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12월 이후론 한 번도 소설을 안 잡고 주구장창 시만 썼더니 소설 문체도 어떻게 스토리를 짰는지도 전부 날아가 버렸어요. 도대체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죠… * 지금 이후로 올린 세 편의 소설은 정말 아주 아주 빈약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해도 예전의 감을 찾지 못하겠어서 도움을 받고자 올려요.

    • 2017-01-21 01:10:23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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