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전염병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6-11-30
  • 조회수 723

00

엄마가 어제 자살을 했다.

이십 일 층 아파트 베란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01

새벽이 고요하다. 세계의 잔혹과는 거리감을 가지고서. 하늘이 채도 낮은 파란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시침이 한 바퀴 도는 시간 동안 가만히 태양이 솟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었다. 이제는 과거형이 되어 버린 이야기. 지금 이곳에는 상승을 낙하로 저지하는 이들이 있다. 익숙한 효과음이 들려온다. 바람 가르는 소리, 그리고 뒤이어 토마토가 바닥에 세게 내던져져 뭉개지는 소리가.

처음엔 단순히 꿈이라고 치부했다. 두 번째엔 눈을 돌리고 귀를 막았다. 다시 익숙하다. 나는 난간을 잡고 공기 중으로 상반신을 내민다.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흰 차 하나에 토마토소스가 묻은 것처럼 불긋한 자욱이 육안으로 보인다. 그 옆에 힘없이 자리하고 있는 굴러 떨어져 뭉개진 사체. 역겨움이 몰려와 난간에서 뒷걸음질친다. 보폭이 작다. 항상 이렇다. 태양의 생기를 자살이, 상쇄시킨다.

 

일상은 변하지 않는다. 나와 관련 없는 일이 일어난다면 으레 외면하기 마련이다. 더럽지만 인간은 그런 족속이다. 피해가 없다. 죽지도 다치지도 않는다. 적어도 나와 내 근처의 사람들은 안전하다.

익숙함은 편안함을 추구한다. 반대로 편안함은 익숙함에 예속된다. 그러므로 나는 아침마다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는다. 문 밖의 신선한 공기가 집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이제 곧 다녀왔습니다 하는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올 거다. 익숙함에서 몰려오던 편안함의 초점이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ㅡ……

ㅡ비야?

 

이렇게.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비는 온 몸을 떤다. 이전까지의 신선한 공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의 회색 운동복에 이제는 약간 갈색 빛을 머금은 불그스름한 색소가 침착되어 있다.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가, 옅게 맴도는 지독한 냄새에 황급히 뒤로 물러선다. 비의 숨소리가 약하게 떨린다. 말하려다 말하려다 결국 목구멍에서 포기하고야 만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비린내가 더 강해지는 것만 같다. 강해진다. 흰 운동화가 빨간 물을 들인 듯 얼룩져 있다. 다시 눈동자와 눈동자가 마주하면 비는 아직까지도 떨고 있다. 빨간 액체와 낙하와 토마토 터지는 소리가 충돌한다.

 

ㅡ비야.

ㅡ언니… 나, 사람, 죽는, 거, 봤어.

02

지하철역이 붐빈다. 퇴근 시간에 맞추어 사람들이 우르르 이동한다. 마치 개미 무리와도 같이 일정한 목표를 가지고 일정한 차표를 사고 일정한 차를 타서 일정한 경로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 피로에 찌든 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검다. 내일의 걱정을 오늘 삼켜버린 듯 저마다 휴대폰을 목숨줄이라도 되는지 꼭 잡고서 놓지 않는다. 수백만의 발이 멈췄다가 지났다가 또 달렸다가 하는 곳에서 특정한 목적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한 곳에 멈춰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말이 없다.

이 사람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맸지만 노숙자다. 늦여름에 어그부츠를 신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낡아빠져 다 해진 옷을 질질 끌고 오거나 때 탄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매고 오는 사람들과 또 밤거리의 노숙자와 술에 취해 갈지자걸음으로 휘청거리는 부랑자. 개인이 모이면 무리가 된다. 다른 사람들이 던진 시선이 그들을 맞고 튕겨져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다. 암묵적 피라미드의 최하위계층에 거주하는 사람들. 연민의 눈길을 던지는 것조차도 무례한 행위임을 알지 못한다. 타인에게 무관심하다.

ㅡ장암, 장암 가는 열차가 들어오겠습니다. 타는 곳 안쪽으로 한 걸음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탑승구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사람들은 명랑한 노래에 오늘이 비로소 끝났음을 실감한다. 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고 무사히 지나갔구나, 하고 눈을 뜨기 전에 날카롭게 귀를 꿰뚫는 비명소리. 사망자는 총 여덟 명이다. 시체는 총 여덟 구다. 모여 있던 이들이 뛰어내렸다. 눈앞에는 열차가 서 있다. 열차의 앞머리에 끔찍하고 지독하게 붉으며 점성 있는 액체와 형체를 알 수 없는 일그러진 무언가가 섞여 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른다. 온 힘을 다해 비명을 지른다. 부정하기 위해 비명을 지른다. 잊기 위해 소리친다. 소리친다.

 

ㅡ대화, 대화 가는 열차가 들어오겠습니다. 타는 곳 안쪽으로 한 걸음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선로 안으로 뛰어든다. 불을 좇는 불나방이다. 끝내 타 죽는 말로를 경험하고야 마는. 7호선이 비명이 울릴 때 3호선의 비명도 함께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산 사람의 복부와 성대에서 떨려 나오는 공기의 파열뿐이다. 이들은 낮에 모였다.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해가 지고 밤이 되어 직장인들이 제2의 고향에서 몰려나오는 그 순간까지 이들은 기다렸다. 손에 붉은 깃발을 구겨 쥔 남자가 일어났다. 최면에 걸린 듯 뒤이어 모임의 구성원이 일제히 기립했다. 그들의 걸음걸이에는 힘이 있었다. 뛰어내리는 순간 열차가 그들을 먹어치웠다.

 

가장 아프게 죽는 방법은 몸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통각의 정점을 집요하게 자극하면서 체내의 모든 산소가 연소할 때까지 견뎌내야 한다. 도망쳐 나온 곳에 천국이 없다면 이들은 지옥을 먼저 경험하고 가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기 앞에 선 중공업 공장 생산계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눈에 초점이 나간 채 성냥을 손에 쥔다. 이내 공업용 식용유를 통째로 들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쏟아 붓는다. 기괴한 광경이 마치 숭고한 의식처럼 장엄하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웅성대고 사진을 찍고 업로드하고 또…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당한 이들. 경찰들이 인파와 노동자들의 사이를 가로막는다. 바리케이드 안에서 이들은 불타 죽어간다.

 

서울의 노숙자들이 한강에서 투신한다.

서울의 공장 단순노동자들이 기계에 불을 지르고 연소한다.

화성에서 간선상하차 노동자들이 바다로 향한다.

영월에서 탄광 노동자들이 폭탄을 터트려 자의적으로 갱 안에 갇힌다.

대전의 노숙자들이 고속도로까지 걸어가 스스로 몸을 분쇄한다.

음성에서 농약을 마시고…

전주에서 지하도 밑…

포항에서 투신…

부산에서…

 

자살은 빠르게 퍼져갔다. 서울에서, 땅끝까지. 젖어 있는 공기를 따라 자살률이 치솟고 그래프는 한동안 우상향곡선을 그릴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측했다. 잔인한 인터넷 기사 아래 달린 댓글은 반반이다. 걱정과 조롱. 후회와 멸시. 절망과 냉소. 완전히 상반된 감정들이 검은 활자를 물들인다. 이것이 저 사람들에게 허락된 표현의 자유이다.

꼴보기 싫었는데 잘 됐네. 사회악인 노동자 새끼들 잘 뒤졌다. 야 너희 아버지가 그렇게 됐으면 넌 어떻겠냐? 그 사람들도 가족이 있고 어쩌면 아이들도 있을 텐데 말을 해도… 괜찮아 우리 아빤 K사 다니거든. K사? 미친 놈….

마치 진흙탕 싸움을 하듯 인신공격성 발언이 빠르게 흘러간 그 날에도 자살사건은 일어났다. 일상이 아닌 일이, 일상으로 치부된다. 목이 부러진 시체 두 구 척추가 부러진 시체 세 구. 부산에서 다섯 명의 노동자들이 냉각탑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함께 떨어졌다. 그리고 해가 떨어지는 순간 K사의 앞마당이 피로 물든 날이기도 했다.

K사는 언론을 막으려 각종 수단을 동원하나 각종 포털사이트의 메인을 장식하고 있는 속보와 뉴스들을 모두 막기란 불가능하다. 결국 K사는 침묵을 지킨다. 영업 비리와 과중한 업무와 상사와의 관계와 회식과 또… 난무한 추측 속에서 결정한 K사의 최선이다. 피로 얼룩진 사원증만이 죽은 이의 신원을 알린다. 이것은 두려움이다. 보건복지부 홈페이지 트래픽이 터진다. 아무 말이 없다. 이것은 다시, 두려움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누구도 자살을 피해 갈 수 없다. 공포의 확산이 국토를 뒤덮는다.

 

03

엄마가 자살을 했다.

이십 일 층 아파트 베란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아빠가 돌아오지 않는다.

가장 먼저 엄마의 사체를 확인했던 사람이다.

무책임하게 우리를 남겨두고 떠난 사람이다.

 

우리는 엄마의 사체를 보지도 못했다. 그저 화장된 유골이 묻히는 것만 볼 수 있었을 뿐이다. 아빠는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사라졌다. 얼마나 충격을 받아야 남은 이들을 등지고 걸어 나갈 수 있을까.

아빠가 얼마나 떨고 있었을지 상상한다. 비는 옆에서 사람이 투신한 장면을 보고 떨었었다. 희뜩한 얼굴과 대조적으로 튄 핏자국을 기억한다.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비를 안았을 때 바람 부는 날의 나무보다 훨씬 더 와들거리던 비를 기억한다. 죽은 사람이 누군지는 모른다. 일면식도 없던 이다. 오며가며 인사하는 이웃도 아니었고 특별히 만난 적이 있는 친구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는 떨었다. 울음조차 터트리지 않은 채로 떨었다. 그 눈물들은 비의 안쪽으로 깊이깊이 침잠해 비에게 악몽을 선물했다. 달이 보이지 않을 때면 비는 방 불을 절대 끄지 않는다.

아빠는? 과연 충격이 남겨진 이들을 버릴 만큼 컸을지에 대해 생각한다. 장례식장에 다녀오던 아빠는 그렇게 약한 존재로 보이지 않았는데. 다리가 마치 쓰러지지 않겠다는 듯 굳건히 박혀 있었다. 그것은 썩은 나무뿌리였을까. 아빠의 왼손에는 우리가 있고 오른손에는 엄마의 죽음이 있다. 견주어 본다. 추상적인 무게가 손 위에 얹혀있다.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 비를 달랬지만 노을이 어둠에 잡아먹힐 때마다 오른손이 무거워진다.

 

04

ㅡ휴교래.

ㅡ어?

ㅡ방금 문자 왔어.

비가 내민 휴대폰에는 재량휴업이 마치 자랑이라도 되는 듯 선연하게 찍혀있다. 빛나는 휴대폰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새로운 메시지가 없다.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으나 새로운 공지사항은 9월 예산안 확인서뿐이다. 나는 휴대폰에서 눈을 뗀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메인 기사가 이제는 휴교로 바뀌고 있다. 뜨거운 감자를 좇는 이들 덕이다. 맹목적으로 기사를 믿는 것도 문제이나 아예 기사를 믿지 않을 수도 없단 말이지. 기사의 흐름에는 시류가 있다. 상황의 심각성을 세계에선 인지한 지 오래인데 학교는 그 시류에서 조금 비껴나 있다. 늦다.

ㅡ우리는 휴교 안 하는 것 같은데.

ㅡ설마, 전국적으로 하는 거 아니었어?

ㅡ우리 사립고등학교잖아. 수능도 얼마 안 남았고.

ㅡ그게 뭐야.

 

비가 혀를 길게 내빼어 투정부리는 투로 말을 뱉는다. 부러 웃는 것 같아 가만히 비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비는 표정을 숨기는 데 약하다. 이것마저 존재치 않아 주위에 브레이크를 걸어 줄 사람이 없다면 아마 비는 진작 추락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비는 늘 샛노란색 프리지어 머리장식을 달고 다닌다. 내가 오 년 전 밤을 무서워하지 말라며 사다 준, 큐빅이 박힌 머리장식을. 비는 입을 다물고 입꼬리를 올린다.

 

ㅡ혼자 있을 수 있겠어?

ㅡ어떻게든 되겠지!

ㅡ정말?

ㅡ언니, 나 못 믿어? 나 신비야.

 

비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으나 웃음이 위태로움 위에 덮여, 한 번 이야기하면 유리마냥 바스라질 것 같아서 나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입을 다문다. 비를 지켜야 한다. 위험하게 이지러진 세상에서 보호해야 할 사람이다. 이제까지 잘 해 왔듯 금세 마음을 추스를 거다. 그 때까지 나는 곁에 머물며 지켜봐 주기만 하면 된다. 나는 다른 말을 꺼내는 대신 웃음으로 화답한다.

 

ㅡ금방 올게. 어디 밖에 나가지 말구.

ㅡ걱정 말래두.

비는 고개를 끄덕인 후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파란색 이불 속으로 들어간 형체가 이불 속을 부풀린다. 그러다가 고개를 빠끔히 내밀곤 손을 흔드는 것이다. 자신은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것이. 노력이 아파서 나는 차마 입을 뗄 수가 없다. 휴대폰이 울린다. 담임이다. 오늘 정상 등교다. 문자를 확인하는 손가락이 신경질적으로 취소 버튼을 누른다. 가야 한다. 집 밖으로 나서는 것이 버겁다. 다녀올게. 성대를 울리며 공기를 마찰시키는 행위가 사뭇 이질적이다.

 

기숙사생들은 먼저 교실에 도착해 있다. 공기가 무겁다. 지난 몇 달 동안 점진적으로 밀도를 더한 공기는 적막처럼 가라앉는다. 수능과 자살소식과 그 모든 것들이 합쳐서 점성이 강한 끈적한 덩어리를 만든다. 그것은 우리의 숨구멍을 틀어막는다. 일상이기에 비일상적이지 않다.

수능까지 이제 오십 일이 가까워온다. 자살이라는 개념은 우리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일은 모두 우리의 일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장 닥쳐올 수능이다. 주위의 슬픔에 눈 돌릴 틈이 없다. 사실 나만 해도 그랬으니까. 아무리 사체를 보지 못했다고 해도. 장례식장에서 눈물이 나지 않았으니까.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해를 할 수 없다. 왜 다들 멍청하게, 자살을 할까. 궁금한 것. 그뿐이다. 나는 자리에 앉는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다들 담요를 하나씩 무릎에 얹어두고 각자의 공부에 골몰한다. 봉투모의고사를 꺼낸다. 휴대폰 스톱워치를 누른 후 언제나 그랬듯 완벽한 수식들이 적힌 완벽히 답이 떨어지는 문제들을 풀어나간다.

 

ㅡ쌤, 저희는 휴교 안 해요?

ㅡ어. 안 한다던데. 왜.

ㅡ전국적으로 휴교령 떨어졌잖아요…

ㅡ이러니까 네놈들 성적이 이것밖에 안 나오지. 그 열정으로 공부를 해 봐라.

 

위험한 거 아니에요? 이 문제에서는 적분이 필요했었던가. 연필이 종이 위를 방황하다가 흑연을 신경질적으로 뱉어낸다. 니들 수능 성적이 더 위험한 거 안 보이냐. 지우개를 놀린다. 이렇게 하면 풀릴 것도 같은데…. 아 쌤, 저희 죽을 수도 있다구요! 머리를 한 움큼 그러쥐다간 입술을 문다.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야, 니들은 지금 공부 안 하고 앞으로 힘들게 살래 아니면 지금 좀 공부해서 앞으로 좋은 차 타고 좋은 집에서 살래? 아아. 계속해서 영역을 침범하는 말소리가 거슬린다. 손마디가 툭툭 불거져 나올 만큼 연필을 꽉 쥔다. 니들 공부밖에 할 수 있는 거 없잖아. 그럼 그걸로밖에 못 벌어먹는다는 것도 알지? 근데 공부하는 사람이 한둘이냐. 그러니까…

지진이 났을 때도 같은 얘기를 했었다. 방송실에서는 괜찮다는 방송이 연이어 나왔다. 우리는 자습을 단행했다. 숨 막히는 공기 속에서. 간헐적으로 흔들리는 책상은 공포감을 고양시켰다. 배 안에서도 가만히 있으라며 윽박질렀고 국가에서 공인한 공중파 방송사에서도 오보를 전했었지. 이것은 무언의 폭력이다. 문득 자살로 죽는 것보다 타살로 죽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폭력이 심해지면 살인이 된다. 국가가 주도한 살인. 사회가 주도한 교살. 공기의 밀도에 질식사해도 이상하지 않다.

전부 귓바퀴를 겉돌다가 튕겨나가는 언어들이다. 이미 너무 많이 들어서 포화 상태의 몸뚱이에는 수용할 공간이 없다. 더 삼켰다간 터질 거다. 고개를 든다. 선생의 눈에는 초점이 없다. 흡사 누군가가 조종하고 있는 마리오네뜨다. 선생은 손가락을 몇 번이고 까딱거리더니 턱짓으로 이불을 덮고 자고 있는 아이를 가리킨다. 깨워. 두 음절의 의미 없는 언어로 다른 이의 행동을 제어한다. 마리오네뜨가 다른 목각인형을 제어하는 것만 같아 문득 두려워진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인다.

나 또한 평범함에 속해 있고 공부만이 생사를 결정짓는다고 생각하는 무리에 속해 있다. 기침도 마음 놓고 하지 못하는 무음의 공간 속에서. 곧 진정될 거다. 선생의 말은 전세계적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진적으로 늘고 있다는 인터넷 뉴스와 상반되는 이야기였지만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학교 안에서의 사실은 외부에서의 사실과 다르다. 학교 안에서의 규칙은 외부에서의 규칙과 다르다. 거스르지 말 것.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생각들이 진동 때문에 깨어진다. 시간 내에 다 풀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간다. 정신 차려. 종이 친다. 선생이 문을 연다. 공허가 잠시간 머무른다. 문소리가 울린다. 그것을 전부 메워낼 듯이 우리는 급식실로 달린다.

 

ㅡ야 오늘 수학 좀 이상하지 않냐?

ㅡ수학 원래 좀 이상하잖아.

ㅡ맨날 공부 공부 대학 대학. 이 놈의 학교는 대학 못 보내서 억울해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ㅡ아니 그거 말구…

ㅡ응?

ㅡ원래 건드리면 죽여버린다가 신조 아니었어?

ㅡ그랬지?

ㅡ근데 오늘은 좀 피곤해 보여서…

ㅡ야 우리보다 피곤한 사람이 이 학교에 어디 있냐.

 

일상적인 대화가 빠르게 지나간다. 하나의 주제는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수학의 영혼이 가출했다는 가설은 빠르게 지워진다. 더 유력한 설과 덜 유력한 설이 대립하면 후자는 죽는다. 수능의 압박감은 점심시간에도 존재한다. 우리는 웃고 떠들 권리가 있다. 스스로 되뇐다. 우리는 권리가 있다. 자기합리화와도 같은 일종의 자기위로.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물거린다. 흐르는 공기에 욕이 간간히 섞인다. 스트레스의 응집체다. 너무 일상적이었기에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의 온도가 낮다. 우리의 세계는 타인의 자살이라는 요소를 넣고 봐도, 빼고 봐도 별반 다를 게 없다.

 

ㅡ우리가 그런 거 걱정할 때냐? 우리 수능 며칠 남았는진 알아?

ㅡ그러면서 지금 급식실에서 죽치고 앉아 있는 건 뭔데?

 

와르르 웃는 공기의 파동에는 불안이 섞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로토닌과 도파민은 뇌를 마비시켜 일시적으로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하게 만든다. 한참 동안이나 깔깔대며 웃다간 다시 섞이는 말에 집중한다.

 

ㅡ우리끼리 챙기는 판에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겠지.

ㅡ하긴, 저런 게 한두 번이냐?

 

둔탁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진원지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웃음의 소음이 단박에 멎는다. 숨이 폐부 안으로 한꺼번에 밀려들어온다. 죽었다. 눈을 느릿하게 감는다. 신경이 눌리는 것을 느낀다. 다른 소음이 죽은 소음을 삼킨다. 어둠에서 깨어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될 거다. 환상을 본 거다.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잠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힘겹게 힘겹게. 그럼에도 사실은 사실로서 선명하게 남아있다.

수학이 죽었다.

 

05

빨 리 교 실 로 들 어 가 …

반 장 … 애 들 인 원 체 크 해 …

으 아 아 아 아 아 악 …

 

음절 하나하나가 테이프처럼 늘어진다. 어지럽다. 급식실로 뛰어가던 속도와 비례하여 급식실에서 내쫓긴다. 운동장은 황무지에서 콜라를 찾은 벌 떼처럼 와글거리는 학생들과 그들을 통제하는 선생들로 꽉 찬다. 얼른 교실로 들어가라고! 반장 뭐 해! 야! 너는 뭐 하고 있어! 정신의 부재 속에서 다리를 놀리던 나는 거칠게 밀리는 탓에 다시 정신을 단단히 부여잡는다. 선생님 얘 토해요! 우웨에에에엑 우웨에에에에에에엑… 모든 소리가 너무, 필요 이상으로, 가장, 굉장히, 또렷하게 들리고 있다. 또렷하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교실로 뛰어 올라간다. 다시 저것을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가쁘게 공기를 뱉는다. 숨에 피 냄새가 섞인 것 같다. 다시 우욱 하고 헛구역질을 한다. 창가로 달려가 커튼을 친다.

저 사람은 나의, 선생이다. 이 년 동안 봐 왔던 선생이다. 살을 맞대고 서로 이야기를 하고 감정을 나누던 한 사람이다. 교실에 올라온 학생들이 창백하다. 창백하고 창백하다. 한 사람의 죽음은 다른 이들을 시체로 만든다. 그나마 펜을 잡고 있는 학생들도 몇 번이나 샤프 꽁무니를 딸깍거리다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종결한다. 무기력하다. 무기력하고 무력하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교실의 적막은 누군가의 심장을 꿰뚫을 것만 같이 날카롭다.

 

사체는 말끔히 치워져 있다. 학교라는 이유다. 피가 스며든 검붉은 모래만이 어떠한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도 학교 천막의 지붕을 뜯어 간신히 가려놓았다. 교장은 끝내 휴교령을 내리지 않았다. 학교에서 발생한 일들은 외부의 사람들이 모르게 사라진다는 전제 하에 일어난다. 이 규모의 사건이 일어났으면 조용하지만은 않겠으나 학교 측에서는 분명 이것을 덮으려고 할 것이다. 더 이상의 소문이 퍼지는 것을 원치 않았는지 학교는 단축수업이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을 내보낸다. 정상등교라는 종례를 듣고 기숙사로, 또는 집으로 향하는 학생들의 입가에는 불평이 달랑달랑 매달려 있다. 죽은 수학 이야기로 기숙사는 떠들썩할 테고 선생들은 그걸 막겠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집에 가는 길이 유난히 길다. 그림자가 짧으나 길다. 햇빛은 핏자국을 비춘다. 마치 이것이 너의 현실이라는 듯이. 때로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아야 할 때도 있다. 외면하고 싶은 것을 눈앞에서 들이밀며 이것이 진실이라고 소리친다. 멀리서 환경미화원이 사체를 큰 비닐봉지에 담는 것이 보인다. 이제 죽은 사람을 치우는 일도 익숙해졌겠지. 해가 뜨면 보이는 환경미화원의 수가 는다. 정부에서 긴급채용이라도 한 걸까. 보도블록에 스며든 피가 검붉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적어도 하늘만큼은 붉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빌며.

 

종소리가 내내 따라붙던 침묵을 깬다. 비가 언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반갑다. 어,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사뭇 오랜만인 것만 같다. 신발을 벗는다. 가방을 침대에 던져두곤 비의 방으로 향한다. 비와는 다른 목소리가 방안을 채우고 있다. 비는 조용히 텔레비전을 눈짓으로 가리킨다. 시선이 시선을 따라 화면으로 향한다. 뉴스속보 자막이 눈에 들어온다.

뉴스속보: 집단자살바이러스, 의사 학회에서 발표

눈을 가늘게 뜨고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한다.

ㅡ미국 학회는 근래 발생하는 집단자살의 원인을 바이러스로 규명하기로 했습니다. 아직까지 바이러스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이 바이러스가 체내로 침투하면 뇌변연계에 심각한 이상을 일으켜 도파민과 세르토닌 분비를 중단시키고, 반대로 코르티졸 등 우울과 분노를 담당하는 호르몬 분비를 촉진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ㅡ뭐야?

고개를 돌려 비를 바라본다.

ㅡ계속 이 뉴스만 하고 있던데. 더 볼 것두 없더라구.

비는 어깨를 으쓱이곤 침대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화면만을 쳐다본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기자의 낭랑한 목소리는 속보의 내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ㅡ패널로 박상현 교수님 모셨습니다. 교수님, 바이러스의 증세는 어떻죠?

ㅡ바이러스가 활동을 시작하면 사람에 따라 증세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울증의 증세를 보이며, 무기력감과 탈력감이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납니다. 드물게는 조현병의 초기증세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데, 자기 스스로 분노를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며 심각한 자해현상을 보이기도 하고, 해리상태에 빠져 자신이 일시적으로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현재는 각각의 증상들이 포진적으로 나타나 공통적으로 겪는 증상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ㅡ그렇군요. 학회 측에서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있나요?

ㅡ자살하는 사람들이 급증하는 것으로 보아 이 바이러스의 전염성이 매우 강하다고 학회는 결론지었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일정 수준 이상의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보균자로 판단, 격리 조치를 내리기로 보건복지부와 협의하였습니다. 학회는 이 바이러스를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며, 비상대책위원회…

리모컨이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쳐진다. 이것은 농락이다. 리모컨 버튼이 눌려서 텔레비전 화면이 검게 변한다. 비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나는 비가 그랬듯 다시 어깨를 으쓱인다. 고장났을지도 모르는 리모컨을 주워 얌전히 침대 위에 내려놓는다. 비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나는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가 내뱉는다. 답답하다. 다시 한 번. 그래도 답답하다. 입술을 꾹 물었다가 입을 연다.

ㅡ그럼 우리는 왜 지금까지 자살 안 했게? 바이러스가 전염되자마자 활동 시작하는 줄 알아? 잠복기는 어디에다가 두고?

ㅡ잠복기?

ㅡ어. 얘네는 스스로 자라지도 못하고 양분도 못 만드니깐 살아 있는 세포에 들어가서 기생하는 거잖아. 세포 안을 다 파먹고 자가복제하려면 거기서 며칠간은 있어야 한단 말야.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새끼는 치고 봐야잖아. 안 그래?

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비가 몸을 들인 침대에 걸터앉는다. 침대가 물결의 파동을 그린다. 하강하는 느낌에 몸을 맡긴다. 그러다가 침대의 탄성이 잦아들 때즈음 상체를 반쯤 기울여 비 쪽을 향한다. 비는 앓는 얼굴로 제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들을 재배열하기에 바쁘다.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는 것을 본다.

ㅡ봐, 만약에 바이러스가 바로 활동한다고 치자. 그럼 바로 약 타 와서 먹겠지? 우리나라 사람들 조금만 아프면 병원 가기 바쁘니까. 그럼 바이러스가 제 새끼 칠 시간도 없이 죽어 버리겠지. 여기까진 이해 됐어?

ㅡ으응.

ㅡ그러니까 잠복기가 있는 거야. 새끼 퍼트리고 나서 죽으려고. 근데 우리는 잠복기 바이러스에 노출 안 됐을까? 우리 근처에서 죽은 사람만 해도 몇인데? 그럼 우린 벌써 죽었어야지. 그치?

국민 안정, 국민 안정 하면서 저런 짓 하는 건 학회나 정부나 똑같다. 아니면 정부가 학회나 저 교수를 매수했을 거다. 바이러스는 발견되지도 않았는데 바이러스라고 공공연하게 공중파까지 띄우고. 이왕 하려면 좀 그럴듯하게 이유를 붙이던가. 군중심리가 원래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에 불을 붙여서 뛰어내렸다고 하면 차라리 그게 더 그럴싸하겠다. 잇새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공기에 섞여 사라진다. 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게다가 노출된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변변한 복장도 못 갖춘 환경미화원이 시체 치우는 마당에 격리는 어떻게 시키려고? 만약. 정말 만약이지만. 이게 진짜로 바이러스면 우린 다 죽는 거고…. 휴대폰이 위잉 운다. 진동과 함께 파란 불빛이 두어 번 깜빡이다 멎는다.

[모든 학생들과 학부모님들께 알립니다. 정부와 교육청에서 내려온 지침에 따라 모든 국내 고등학교는 휴교합니다. 이에 따라 본교 또한 무기한 휴교하며 사태가 잠잠해질 무렵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반 단체 채팅방은 쉴 새 없이 울려댄다. 하얀색 바탕에 검은 글씨가 매달린 말풍선이 채 읽기도 전에 위로 사라진다. 수학의 자살. 학교의 휴교. 두 개의 뜨거운 감자가 먹히고 있다. 개중에는 휴교를 이제야 하는 학교를 원망하는 친구들이 있다. 바이러스의 공포에 사로잡힌 친구들이 있다. 몇몇은 수능을 걱정한다. 이 상황에서, 수능. 죽음을 목격한 상황에서, 수능.

우리나라는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적어도 삼 년, 보통은 육 년, 어쩌면 십이 년 또는 그 이상. 이것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각각의 삶들은 공부로 귀결된다. 이것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공리이다. 우리는 남들보다 삼 년 먼저 입시를 치렀고 이 고등학교에 합격하기 위해선 꽤 높은 성적이 요구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사람이 죽었는데. 어쩌면 죽는 이가 수학이 아니라 저들일 수도 있었다. 태연하게 수능을 걱정하는 텍스트들. 인간성의 부재를 눈앞에서 경험한다. 목숨보다 소중한 무언가가 저들에겐 수능인 걸까.

그럼 우리도 진작 자살을 했어야지. 수학이랑 우리 계속 같이 있었잖아.

흘러가는 대화들을 흘러가게 내버려둔다. 가만가만 지켜본다. 숨이 멎기 직전 들이키는 행위를 반복한다. 짧은 순간의 고통에 못 이겨 공기가 폐부로 침입하는 것을 용납한다. 죽기 직전의 아픔은 더할 것이다. 어떻게 이겨낼 수 있지? 어떻게 극한의 고통을 참아내고 죽음에 도달할 수 있지? 문득 존경과 경외가 스친다. 두 문장을 두서없이 늘어놓곤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본다. 36에서 10으로 급격하게 하향곡선을 그린다. 인터넷에 떠도는 자살 추세 예측 모식도가 자꾸 떠올라 휴대폰을 이불 속으로 구겨 넣는다. 이불 새로 계속해서 파란색 반짝임이 깜빡인다. 굳이 보지 않는다. 착잡함을 느끼고 싶지 않다.

 

06

언니.

응?

이 머리핀, 정말로 어둠을 몰아내 줘?

그럼.

무서움도?

당연하지.

그래도 무서우면?

언니가 지켜줄게.

 

07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실은 과연 진실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

손을 뻗으면 허상이다. 아스라지는 상을 멍하게 바라보면 공허뿐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생을 연장하고 있는가.

 

우리의 죽음은 무엇인가.

망각은 축복이라고, 했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삶과 죽음이란 유의미한가?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짜임새 있는 시계에 의해 쳇바퀴를 굴린다. 다람쥐가 되어 평생을 케이지 안에서 살아간다. 자유로이 죽는 것 또한 허락되지 않는다. 자유의지의 박탈. 우리는 스스로를 속박한다. 그럼 사는 것과 죽는 것의 차이점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미 자의는 상실한 지 오래인데.

작은 방 안에서 서른 명의 경쟁자들과 함께하며 총구를 겨눈다. 그들이 왜 경쟁자가 되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은 채. 규율과 사회의 패러다임 속에서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태양은 빠르게 움직인다. 행성들은 함께 움직이며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 목적의식 없이. 중력에 이끌려. 죽은 이와 무엇이 다른 거지? 우리의 정신은 깨어 있나? 우리의 의식은 살아 있나?

 

달이 지면 해가 뜬다. 해가 지면 달이 뜬다. 다시 달과 해가 꼬리잡기를 하듯 아주 느리게 지구 주위를 공전하기 시작한다. 지구가 돌고 있는지 그들이 돌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아주 느리게. 지구 안은 점철된 핏자국으로 가득 차는데. 정작 태양과 위성은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잠잠하게 상승과 하강을 반복한다. 격동하는 우주 속에서 우리는 아주 작은 생명체들에 지나지 않는다. 단 하나의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다. 닥쳐올 수능에 대한 긴장감은 조금도 줄어들질 않는다. 도무지 펜이 잡히지 않지만 펜을 잡는다.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행동들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혐오감이 울컥 올라온다. 자기합리화를 시작한다. 예로부터 해 왔던 행동들을 반복하는 것뿐이다. 그뿐이다. 종래에는 모두 괜찮아질 거다.

비를 바라본다. 비는 멍하게 불특정한 곳을 응시하는 빈도가 늘었다. 비는 어제 푸른 냄새가 난다, 고 했다. 푸르고 질퍽한 흙냄새가. 간밤에 비가 왔는지 흙이 축축하게 젖어있다. 비가 안개꽃을 보고 싶다, 고 했다. 흰색 안개꽃이 자기 방 안에 환하게 피어있었으면 좋겠다, 고. 백합이 놓여 있으면 좋겠다, 고.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방황하다가 입을 열 때면 마치 비의 입에서 꽃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고, 생각한다. 언니. 응? 교환일기 기억해? 어……. 말꼬리를 흐린다. 아니야. 장난이야. 비는 눈꼬리를 접어 안개꽃같이 웃는다. 구멍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듯 아리다.

 

08

경련이 인다. 눈 밑이 파르르 떨리더니 기능을 멈춘다. 목이 뻐근해 부여잡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아침이다. 추락은 상승을 저지한다. 파열음이 익숙하다. 고통의 파동 속에서 살아간다. 비가 손을 흔든다. 잘 잤어?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들이 다 없어지면 어떻게 하지? 비는 식탁에 앉아 묻는다. 손톱과 유리가 부딪힌다. 규칙적인 소음이 잠시 사고회로를 정지시킨다. 멸종될까? 다시 한 번 흰 음성으로 덮는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글쎄. 확실한 사실은 우리가 자살하기 전에 아사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거다. 쌀이 떨어져 밑바닥을 보이고 있다. 타의로 죽는 것은 사양이다.

ㅡ먹고 싶은 거라두 있어?

ㅡ먹고 싶은 건 없구…… 꽃 보고 싶어.

꽃.

며칠 전부터 비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

그렇다.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온통 붉은색이 점철된 세계다. 창문을 열면 피 냄새가 훅 끼쳐온다. 하늘의 색이 인식되지 않는다. 색채를 관장하는 시신경이 죽어 버린 것처럼. 청색맹인가, 녹색맹인가. 왜 세상이 붉은색이지? 안락하고 깨끗한 집과 피 묻은 세상. 바깥출입을 자제하는 비로선 압박해 오는 괴리감을 버티기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고개를 끄덕인다.

ㅡ꽃? 무슨 꽃?

ㅡ으응. 상관없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시침이 팔과 구의 정중앙을 지나고 있다. 밖은 아수라장이다. 돈을 챙길 필요가 있을까 고민하다 주머니에 깊이 쑤셔넣는다. 오래간 입지 않은 옷이 따뜻하다. 다녀올게. 비는 다시 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몸에 걸친 흰색 티셔츠와 같이. 비와 어울리는 꽃이 무엇일지 짐작할 수가 없다. 비는 비이고, 비는 모든 꽃의 뿌리를 타고 꽃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어쩌면 비의 머리에서 얌전히 앉아 있는 노란 프리지어 머리장식과 닮아있을지도 모른다. 손을 쫙 펴서 다시 흔든다. 문이 닫히고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유난히 경쾌하다.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면 우우웅, 우우우우웅 하고 소리가 난다. 네 살 때 이사를 왔으니 건축된 지 십오 년이 넘은 아파트다. 그 연륜에서는 이제 피비린내가 난다. 철문에 낀 냄새가 온몸의 세포로 파고든다. 소름이 끼쳐 몸을 바르르 떤다. 자의가 아니다. 오만한 사람과 우울한 사람과 피를 흘리는 사람과 또 검정색 사람이 엘리베이터 문 새로 오고가는 걸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태우고 다녔으면 역겨운 악취가 머무르는가. 입술을 문다. 우우웅. 우우우우웅. 도르래 돌아가는 소리가 하중을 삼킨다. 문이 열릴 때까지 불완전한 정적 속에서 기다린다. 도색이 벗겨진 노란색이 붉은색에 잠식될 때까지.

구역질이 난다. 수학이 죽었을 때 토했던 아이들이 생각난다. 피 냄새는, 그 빨갛고 끈적끈적하고 점성 있는 냄새는 점점 짙어진다. 마치 갓 도축된 고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한 냄새를 풍기듯. 코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파트를 빠져나오는 걸음이 다급하다. 입을 틀어막곤 본래 목표했던 방향과 역으로 발을 돌린다. 피 냄새가 짙다. 시야를 순식간에 좁혔다가 천천히 넓힌다. 그리고 숨이 멎는다.

이것은 흰색이다.

흰색에 붉은색이 점철된.

흰색이다.

붉은색이다.

비, 다.

아니다.

비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긴 머리와 흰 티셔츠. 비를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노란색 머리장식도 없었잖아. 저 정도로 비,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모른다. 아직 모른다. 비가 아닐 것이다. 숨이 엉킨다. 내뱉고 내쉬는 숨이 잔뜩 엉킨다. 매듭이 풀리지 않는다. 클라인의 병처럼 안과 밖의 구분이 없다. 폐부가 바깥이고 바깥이 폐부이다. 폐포가 받아들이는 피비린내가 날고기와 같다. 울음을 간신히 참는다. 목울대의 마비를 인정하지 않는다. 흐리다. 맑다. 흐리다. 맑다. 반복된다. 아니다. 맞다. 아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희뜩하게 불거져 튀어나온다. 피가 통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사고과정이 봉쇄된다. 부서진다. 관절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마리오네뜨의 줄이 풀린다. 조종자가 사라진다. 목각인형이 망가진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엘리베이터는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우웅 운다. 아까보다 긴 소리 속에 삼켜진다. 달려가는 발걸음에 철근이 매달린다. 간신히 버튼을 누른다. 일. 이.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우웅. 얼른 올라가라.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우우웅. 올라가서 비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오. 육.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우우웅. 비가 웃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우우웅. 신은 없다고 생각했으나 신께 빈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우우웅. 간절하게 빈다. 십사. 십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우우웅. 손톱이 살갗을 뚫는다. 심박이 손바닥으로 옮겨간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우우웅. 아물지 않을 상처를 후벼판다. 이십. 우우우우웅. 지독하게도 높은 이십 일 층이 앞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우우우우우우우우웅. 이십일. 이십 일 층입니다.

집안으로 뛰어들어간다. 목청이 터지도록 비야, 하고 부른다. 일말의 기대를 품고서. 언니, 꽃은? 하고 천진하게 웃을 그 얼굴을 그리면서. 비야, 하고 부른다. 문 뒤를 살핀다. 서랍장을 당긴다. 옷장 문을 열어제낀다. 화장실 불을 확인한다. 책상 아래를 살핀다. 넘어진다. 일어난다. 신발장을 살핀다. 숨이 막혀온다. 목이 죄어온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비야, 하고 다시 부른다. 내가 어떤 공간을 살폈던가 그리고 살피지 않았던가. 베란다에 노란색이 반짝인다. 깨끗한 프리지어 머리핀을 움켜쥐고 나는 운다.

 

09

수분이 부족하다, 고 생각하고 가장 먼저 시계를 본다. 똑, 딱, 똑, 딱, 하면서 초침이 흐르고 있다. 얼마나 지났나. 손에 프리지어 머리핀이 잡혀있다. 이것은 꿈인가. 꿈이 아닌가. 몸을 일으킨다. 관절이 굳었다. 대략 한나절이 지나 있는 저녁이다. 방이 어둡다. 불을 켜지 않았나. 눈이 어둠에 익숙하다.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다. 언니가 지켜줄게. 몇 년 전에 했던 말을 소리내어본다. 지켜줄게. 한 음절을 발음할 때마다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아 입술을 문다. 프리지어는 죽었다. 나르시소스가 몸을 던져 죽은 샘에. 비야, 너는 누구를 따라 죽은 거니.

 

비의 방은 가지런하다. 들어갈 때도, 나갈 때도. 비가 없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영원함은 빛을 목 졸라 죽인다. 발전도 퇴보도 없는. 지극히 영원한 관계가 언제까지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원함을 바랐다. 그저 유일하게 지켜야 할 대상이었다. 생경하다. 익숙함 안에 담긴 생소함은 날카롭다. 잘 벼린 칼날처럼. 몸뚱이를 가볍게 총탄처럼 관통하고 지나가는 칼날은 동심원을 그리며 장기를 헤집는다. 다시 구역질이 난다. 이것은 나에 대한 구역질이다. 눈에 담긴 풍경은 다시 일상적이다. 침대에 비가 없다. 의자에 비가 없다. 비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아 문득 문을 바라본다. 정적이다.

힘겹게 떼는 발은 마치 지구 하나씩을 매달고 있는 것만 같아서 차라리 무너져 내려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비의 침대를 눈에 담는다. 아스라이 푸르다. 질게 푸르다. 질끈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돌려 책상을 본다. 비가 신경 써서 관리한 흔적이다. 깨끗한. 먼지 하나 없는. 청결의 수식어가 따라붙는 책상 위에 노란색 노트와 휴대폰이 있다. 집어든다. 손이 떨려 종이가 버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우리가 써 오던 교환일기다. 첫 장부터 읽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눈을 다시 꾹 눌러감는다. 손에 힘을 주었다가 노트를 연다.

 

우리의 교환일기가 끊긴 지 몇 달이 지났어. 물론 언니는 이제 고등학교 삼 학년이고, 동생이랑 교환일기를 쓸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 나 혼자라도 이곳에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언니가 수능이 끝나고 보지 않을까? 즐거울 거야.

내가 쓴 일기의 마지막 날짜는 일 월 이 일로 적혀 있었다. 나는 숨을 멈추고 종이를 몇 장 더 넘긴다. 종이에선 비가 자주 쓰던 잉크의 냄새가 난다.

언니. 사실 나는 바이러스든 아니든,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해. 좀비 바이러스 같은, 소설에서만 보던 게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아마 그랬다면 우린 집안에서 굶어 죽었겠지. 사람이 하늘로 떠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 안타깝지만 다행스럽다고 생각해. 사람이 좀비로 변해서 죽지도 않고 쾅쾅거리면서 문을 두들기고 같은 사람을 물고 먹어치운다는 생각을 하면…… 으. 상상조차 하기 싫으니까. 결과적으로는 같게 됐지만. 언니는 오늘도 학교에 갔지. 걱정돼. 언니는 비인간적인 세계에서 인간적으로 살고 있어? 나는 이 소리 없는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기도하고 있어. 무사히 돌아와.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이 운다. 배터리가 나가지 않아 있는 비의 휴대폰. 무의식 속에서 강제로 끌어내어진다. 비의 세계 속에서 쫓겨난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막힌 채로 잠겨있다. 아, 아, 하고 소리를 내어본다. 다시 생소하다. 벨소리가 끊긴다. 그리고 다시 걸려온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다.

ㅡ여보세요.

ㅡ여보세요. 신윤성 씨 댁입니까?

서늘한 목소리가 전선을 타고 변환된다. 나는 울음을 간신히 삼킨다. 아, 빠. 오랜만에 불러보는 아, 빠. 아빠예요. 네? 저희 아빠라고요. 누구세요?

ㅡ자살대책본부입니다. 어제 신윤성 씨께서 투신자살을 하셨고 지금 사체가 발견되었습니다. 따라서 따님께서도 가택격리 대상자로 판정되어, 오늘부터 이 주일간 자택에 머무르셔야 합니다. 가족 분께서 함께 계신다면 전 가족이 가택격리 대상자로, 자살 확산 예방을 위해 꼭 따라 주셔야 하며…

전화기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무던히 덤덤하다. 기계적이고 냉랭하고 지쳐 있다. 이들은 같은 작업을 몇십 번씩 반복할 것이다. 감정소모가 클 것이다. 사망자 신원을 조회하고, 자살과 타살과 자연사 유무를 조사하고, 필요하다면 부검을 맡기고, 그 사람의 가족관계를 조사하여 격리하라는 통지를 보내는 일. 사망을 유가족에게 통지하는 일. 적응한 이들같이 무감각하다.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응해야 한다. 가장 빨리 달려야 하고 가장 높이 뛰어야 하며 가장 깊게 헤엄칠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다. 차다.

나는 이미 붉어진 하늘과 땅과 울음 속에서 차가운 목소리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꽁꽁 얼은 장미를 힘껏 내리치면 산산히 부서지듯. 엄습하는 냉기가 얼음동상을 생성한다. 조그마한 충격은 동상을 부술 것이다. 전화를 받기 전에도 세계는 이미 붉었고 더 이상 붉어질 것도 없다. 이를테면 그것은 암흑이다. 통화종료 버튼을 몇 번이고 신경질적으로 눌러버린다. 그 속에서도 힘의 부재로 손이 자꾸만 꺾인다.

 

통화가 종료된 비의 휴대폰을 본다. 기본 배경화면에 기본 어플리케이션. 통화 기록을 본다. 별다를 게 없다. 아빠에게 몇 번이고 전화를 한 흔적뿐이다. 아빠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눈을 깜빡인다. 비는 얼마나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나. 얼마나 많은 것을 속에 가라앉히고 삼키고 있었나. 문자메시지 버튼을 누른다. 임시 저장 메시지가 몇 십 개 뜨는 것을 지켜본다. 활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숨이 막힌다. 손이 떨려서 휴대폰을 떨어뜨린다.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친다. 이것은 두려움이다. 명명할 수 없었던 감정들이 구체화되어 밀려온다. 나의 책임. 한 번 보았으니 이제 물러설 수 없다. 이미 스틱스 강을 건넜다. 입술이 희어질 때까지 문다. 떨어뜨린 휴대폰을 느리게 주워들고 화면을 다시 켠다.

언니 나 너무 무서워.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아.

언니가 죽으면 어떻게 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해?

그치만 언니 수능 오십 일 남았지.

부담 안 주고 싶어 언니 꼭 끝나는 날 안아 줘.

 

언니 미안해

 

오전 여덟 시 삼십사 분.

아.

비를 죽인 것은 나다.

 

10

사람들은 자살을 해, 언니. 엄마도 자살을 했어. 나는 아직 실감이 안 나. 어제는 많이 울었어. 사실 지금도 아픈데 말하질 못하겠어. 나는 분명 쇳덩어리를 삼킨 적이 없는데. 왜 내 속은 이렇게 뜨겁고 아프고 찢어질 것 같을까? 통각이 마비될 만도 한데 사람의 몸은 그렇게 약하지 않나 봐. 언니, 울었어? 오늘 아침에 눈이 조금 부어 있던 걸 봤어. 나도 어제 많이 울었어.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울어 버렸어. 무섭다는 거, 이야기하지 못할 것 같아. 언니. 방금 전에도 퍽 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어. 나 혼자 집에 있으면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 언니. 빨리 와. 무서워.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자살 속보가 이어진다. 밖에서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온다. 비가 들었던 소리를 듣고 있다.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고독을 마신다. 이것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방에 처박혀 방바닥에 누워 있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끊임없이 잠을 청한다. 꿈의 경계와 현실이 모호해진다. 차라리 눈을 뜨는 것이 악몽이라고 말해줬으면 한다. 깰 수 있을 테니까. 수면제를 찾는 이유를 도출해낸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꿈은 이 지독한 악몽의 유일한 도피구다. 시간이 흐른다. 눈을 뜨면 아프지 않은 시간이 흘러가 있다. 그 때부터 시간이 아프기 시작한다.

아사로 죽기 직전에 몸을 일으킨다. 씻고 먹는다. 눈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잠이 더 이상 오지 않는 순간이 있다. 비의 일기장이 되어버린 교환일기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읽는다. 유일한 비의 유품. 남겨놓고 간 추억은 이것뿐이다. 일기의 활자 하나는 바늘 하나가 되어 식도를 찢고 위장에 박힌다. 기도를 헤집고 폐부에서 녹이 슬어 썩는다. 차라리 한 번에 꾸역꾸역 밀어 넣고 한계점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낫다, 고 생각한다. 언제나 그랬듯.

 

비의 휴대폰은 비행기 모드로 되어 있다. 나의 휴대폰은 배터리가 분리되어 있다. 아빠가 자살을 했다, 라는 전화는 나의 전화로까지 이어져 휴대폰을 던져버린 지 오래다. 휴대폰을 켠다. 쏟아지는 알림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휴대폰이 뜨거워진다. 잠시 놓아두었다가 반 채팅방에 접속한다. 한때 10명까지 주르륵 내려갔던 사람 수는 이제 26에서 머무르고 있다. 느리게 채팅이 갱신된다. 몇 개의 기사가 공유되고 있다. 학생 간의 전파도가 가장 높다.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몸속으로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치사율이 높다. 스트레스로 인한 전파 가설이 나타났다…. 강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간 물은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움직이다가 바다로 분출되기 직전 진동을 멎는다.

애들 다 어디 갔어?

모르겠어. 은채도 안 보이는데.

괜찮아?

무엇의 안부를 묻는 것일까. 몇 초간 느리게 눈을 깜빡이지만 얻어낼 수 있는 지식은 아무것도 없다.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페르소나다. 나의 가면. 나의 얼굴. 둘을 동일시하는 것을 배우고 익히고 실습한다. 이것을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뭐 다들 그렇지. 여섯 글자를 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저 아이들도 그리 좋은 상황에 처해 있지는 않겠지.

뉴스 봤어?

야 우리도 그럼 위험한 거 아니야? 보균자 어쩌고 하던데.

지랄은. 수학 죽었잖아.

그럼 우리도 죽었어야지.

아.

이과생이라는 놈들이.

답이 없다 답이

나는 눈을 굴린다. 일상적인 대화들이지만 일상적인 대화들이 아니다. 전파를 타고 내려오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모두가 덤덤한 듯 굴고 있지만 모두가 떨고 있다. 떨림은 휴대폰을 타고 전해진다.

여기 열 명 밖에 안 남았어 생존자?

그런 것 같지?

와 아포칼립스가 따로 없네 종말론인가.

조소다. 이것은 조소다. 세상을 비웃는다. 무채색으로 이루어진 세상에 붉은색을 점철한 세계를 비웃는다. 무능한 정부를 비웃고 가면을 뒤집어쓴 친구를 비웃고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는 나를 비웃는다. 조소는 자조로 뒤바뀐다. 이들은 울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 행동한다. 마치 정의와 개념조차 한낱 어색한 원소인 듯이. 애써 피한다. 배를 보이면 천적에게 물어뜯기기 마련이다. 억지로 웃는 태가 가련하다. 이것은 비였나. 비는 모두였나.

 

우리 수능 며칠 남았게?

아아. 이것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학생이다. 모든 이들이 죽어나가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충실히 지켜나가려고 하고 있다. 애초에 이 운명은 누가 만들었는가? 하늘에서 이것을 운명이라고 지정하지 않았다. 수능이 태초에 있었는가? 시험이 태초에 존재했던가? 도대체 우리를 이렇게 짓누른 것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짓눌린 시간은 간다. 흐름을 지배하면서. 비정상 사이에 정상이 끼어 있으면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법이다. 아무리 반인륜적이고 인간적이지 못하다고 해도. 정서적인, 홀로코스트다.

오늘로 보름이지?

벌써 그렇게 됐어? 수학 죽은 거 두 달 전 아니었어?

두 달도 안 됐을걸.

수능 안 보겠지?

보는 게 더 미친놈 아니냐.

일전처럼 휴대폰의 액정을 차지하는 텍스트들을 흡수한다. 벌써 한 달 반 남짓이다. 엄마가 죽은 지 한 달 반. 비이 죽은 지 삼 주일. 이상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떠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을까. 펜을 잡고 자습실에 틀어박혔을 것이다. 풀리지 않는 문제와 씨름했을 것이다. 깜빡 잠들었다가 깨어나 자신을 책망하고 하루의 마지막에는 지난 이십 사 시간을 회고하며 반성하고 뿌듯해했을 것이다. 불안함과 초조함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했을 것이다. 우리가 불과 두 달 전까지 이행해 왔던 길이 부서져 있다. 개인의 그림자를 둘러싼 채로 동그랗게 무너진다. 잃어버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야속하게. 지구가 돈다. 자전과 공전을 반복한다.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을 본다. 밤과 낮의 경계를 지운다. 반복되는 악몽과 반복되는 삶이 뒤엉킨다.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허상인지 구분할 수 없다. 혼자다. 꿈과 현실에서 나는 혼자다. 현실과 꿈이 같다. 악몽이다. 깨어날 수 없는 굴레의. 손톱 끝이 까슬하게 일어난다.

이러다가 세상이 없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언니. 무섭지만 우리가 정말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봤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대. 사실 정부든, 매체든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건 없잖아. 정보를 선별하고 군중심리에 악용하는 사람들인데. 그렇지만 자살자가 늘고 있다는 건 통계상 사실이래. 걷잡을 수 없이 퍼질 거야. 곧 모든 사람이 자살할 지도 몰라. 어떻게 멈추어야 할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나는 언니, 아직 어리고 힘없는 중학생이라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언니. 나는 지금 너무 무기력해.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너무 괴롭게 만들어. 언니. 지금은 뭘 하고 있어? 언니도 무기력해? 나는 언니만은 자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시야가 부옇다. 일기장을 덮는다. 푸른색의 감정이 스멀스멀 들어오고 있다. 이것은 슬픔인가, 죄책감인가, 외로움인가, 아니면 셋 다인가. 붉은색과 대비된다. 대비는 독인가 약인가. 단순한 알고리즘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다가 터져버린다. 아이들은 생명줄을 놓는다. 점점 잦아지고 있다. 카카오톡에 그나마 남아 있던 열 명조차 어느새 세 명으로 줄었다. 두 명. 끝내 없어진다. 더 이상 숫자가 내려가지 않는다. 뉴스와 인터넷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던 자살 이야기도 지금은 없다. 아무것도. 주위 상황을 알 수 있는 수단이 없다. 기괴하지만 살 수 있는 환경은 갖추어져 있다. 전기와 물과 식료품과 집과 옷이. 다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존재치 않을 뿐이다.

 

11

나는 어쨌거나 살고 있다. 살아가고 있다. 하늘이 붉어지고 검은 비가 내리고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도 숨은 아직 끊어지지 않는다. 기도를 통과하는 공기의 날카로움에 베인다. 무언가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근래 무엇도 먹지 못했다. 걸을 힘조차 없었으나 일어난다. 세계가 팽이 돌듯 한다. 어지러움이 잦아들면 외로움이 닥쳐온다. 이성적 사고가 가능한 시점에서 사회적 소통은 필수적이다.

아, 하고 육성을 내어 본다. 온전한 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얼마만이지. 성대가 쓸모없어졌다. 이대로라면 가장 먼저 퇴화하는 기관은 성대일 거다. 그리고 흔적 기관으로 남겠지. 생물 시간에 배운 적이 있다. 아니면 뇌가 먼저 적응하려나? 아무도 없는 상황에 익숙해지는 것. 적응과 퇴화, 무엇이 더 빠를지를 견주어 보다가 그만둔다. 본디 오늘이 수능 날이라는 것을 인지한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야.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납작한 공기가 무겁다. 중력을 이겨내는 것이 버겁다.

뿌리치고 나가야 한다.

나가서 무엇이든 먹을 것을 구해야 한다.

 

돈은 필요가 없다. 비가 죽었던 날 쑤셔넣었던 돈을 만지작댄다. 가게는 문을 연 채로 썰렁하다. 거리의 부랑자와 노숙인은 보이지 않는다. 환경미화원조차 없다. 거리가 앙상하게 말라있다. 고독하게 혼자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 가게 쪽으로 발걸음을 한다. 치우지 않은 낙엽들이 쌓여있다. 손대지 못한 자연의 부활이다.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는데 자연은 태초의 모습을 되찾아간다.

이제 붉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본다. 숨을 깊게 들이쉰다. 역한 피비린내가 후각을 자극한다. 이미 수도 없이 맡은 냄새. 눈을 돌리면 죽는 사람들이 보인다. 마치 벚꽃 날리듯 하늘에서 떨어진다. 건물 옥상에서 투신한다. 꽃은 지기 위해 피는 것인가. 끝없이 낙하해 발을 딛고 있는 그곳에 맞닿는 순간 태초로 돌아가 버린다. 그렇게 아프고도 더 아프고 싶어서. 또는 아픔의 굴레를 스스로 끊어 버릴 용기를 낼 만큼 너무 아파서. 사람들은 제각기의 이유로 자살을 한다. 비는 어느 쪽에 가까웠을까.

배를 채우지 않는다. 대신 공기의 밀도가 너무 높아, 가게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옥상으로 올라온다. 자의가 아니다. 이것은 다리의 타의성에 의존한 채다. 비의 휴대폰이 주머니 속에서 움직인다. 옥상이 잠겨 있지 않다. 이십 오 층 높이는 까마득하다. 몸을 빼어 밑을 내려다본다.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싶어 올라왔는가? 답은 명확하다. 사람이 작은 점으로 보인다. 붉은색뿐이다. 붉은 별 지구. 아무도 기억해 주지 못할 붉음을 남기고 낙화하는 사람들. 옥상에는 아무도 없다. 다시 고독이다. 옥상의 공기가 기도를 움켜잡고 죄어든다.

 

언니, 자살 바이러스는 없어. 자살은 전염병이 아니야. 언니도 그렇게 말했잖아. 그렇지만, 그렇지만 우울은 전파될 수 있어. 언니,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사실 우울한 감정은 꽤 잘 퍼지는 편인데, 웃음과 같은 원리일 거라고 생각해 봤어. 엄마도, 어쩌면 아빠도 자살을 선택했어. 아빠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은 건 아마 갈림길에서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기 때문이겠지. 언니, 뉴스에서 이야기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건 불가항력도 아니고 바이러스도 아니야. 단지 우울의 전파. 그뿐이라고 생각해. 어제는 비가 왔어. 비는 감정 전도율이 높아.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쉽게 물들인대. 언니.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나 봐.

 

비의 일기장에는 언니, 라는 단어가 수도 없이 적혀있다. 구절을 다시 떠올린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나 봐. 비야, 너는 충분히 강했어.

언니가 약해서,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비야.

비의 휴대폰을 끄집어내어 열여덟 글자를 적어넣는다. 커서가 깜빡이는 것이 선명하게 보인다. 전송 버튼을 누른다. 화면을 끈다.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뜬다. 이것은 비가 확인해야 할 마지막 이야기다.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발이 글자보다 더 비뚤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더디지만 확실하게. 나는 비가 죽었던 그 날처럼 손을 꽉 쥔다.

전염병이다. 나는. 나는 전염병에 걸렸다.

윤별

추천 콘텐츠

더 레드

* 엔터가 아무리 해도 안 되어서 pdf 파일을 첨부합니다. 글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니 꼭 pdf로 읽어주세요.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클릭  》 더 레드 더 레드 *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체온 사이의 서사를 옮겨 적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풍경을 글로 묘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써넣은 낱말이 이 세상에서 부드럽게 사라진다고 가정한다면…… 그러면 어떤 세계에서든 언제나 가장 먼저 멸종할 단어는 빨강이다. * 피터, 하고 부르면 빨간 베레모를 쓰고 벤치에 앉은 203이 익숙하게 돌아본다. 그게 낯설어 나는 못내 아쉬운 투로 203을 발음했다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다시 한 번 피터, 하고 입술을 맞붙인다. 피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모자를 비스듬하게 고쳐 썼다. 귀 뒤로 쓸어내려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이 베레모 그림자 아래로 구불구불 흘렀다. “이제 좀 익숙해졌어?” “여전히 내가 왜 널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지 말해 줄 생각은 없고?” 피터는 한 손을 바닥에 짚어 무게를 실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피터가 종종 이상한 고집을 부리곤 했지만 번호 대신 이름을 불러 달라는 건 지금까지의 숱한 요구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테였다. “농담으로라도 익숙해졌다고 해 봐. 그럼 알려줄게.” 확신하는데, 214 네가 좋아할 만할 일이야. 피터는 그렇게 덧붙이며 가늘게 눈웃음을 쳤다. 이럴 때의 피터는 어렵다. 가늠하기도, 꺾기도. 이기지 못할 것을 예감한 나는 손을 뻗어 괜히 피터의 눈꼬리를 엄지로 꾹꾹 눌러댔다. 피터는 개의치도 않고 발랄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또 재촉한다. 알았어. 익숙해졌어. 이제 됐지?” 여전히 피터는 웃는 낯이었다. 나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터는 내 몸을 당겨 자기 몸에 바싹 붙였다. 몸이 피터 쪽으로 기울면서 새하얗고 빳빳한 교복 와이셔츠 칼라에 그늘이 졌다. 피터라는 이름보다는 훨씬 익숙했으나 여전히 몸에는 힘이 바싹 들어가는 게 척추부터 손가락 끝까지 느껴졌다. “책을 한 권 발견했어, 214.” “그건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많잖아.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니야, 들어봐. 우리가 읽었던 책이랑은 다르단 말이야.” 피터는 자신을 밀쳐내는 내 손목을 쥐고 눈을 반짝였다. 뭔데. 나는 옅은 한숨을 쉬고 피터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피터는 그제야 내 손목을 놓고 뒤집힌 치마 끝단을 다시 뒤집어 정리하며 길게도 뜸을 들였다. 피터는 늘 침묵이 죄의 씨앗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만은 예외인가 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잖아?” “응, 레포트 쓸 때 많이 읽었지.” “세상에 배울 게 없는 책이 있다고 한다면 믿겠어?” “그런 책이 있을 리 없는 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네 직속선배 203이 집필부라며.” 그러면 이제 직속선배 203도 직속선배 203이 아니라 직속선배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실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가 비를 다 쏟아

  • 윤별
  • 2018-11-30
플루토 카니발

플루토 카니발         만일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내 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라. 누군가에게 나쁜 위성이라도 되고 싶다는 게 어떤 건지를. 잘 지내? 너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나, 그래서 난 자꾸만 이렇게 소포를 보내고 편지를 써. 아주 작고 미세한 나에게 너는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무거워서, 네 곁에 있지는 못해도 이렇게라도 자주 보내면 잊히지는 않겠지 하는 언니의 작은 소망이라고 생각해. 라, 오늘은 명왕성을 가지고 왔어. 가벼운 무게로 비틀린 궤도를 돌고 자기 위성에게까지 흔들리는 행성. 기억나? 네가 행성 같다고 내게 말했던 거. 너는 지금까지 해 왔듯 흔들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작고 위태로운 게 어린 널 닮았더라. 그냥 그렇다고. 라, 보고 싶어. 내일도 모레도 네 이름처럼 마음껏 신경 쓰게 해 줘.   *     밀크티 마실래? 우유 있어? 산 속이라도 있을 건 다 있어.   카론, 너 이사 온 지 벌써 한 달이야. 이젠 알 때도 되지 않았어? 라는 주머니에서 굴리던 손을 뻗어 선반에 놓인 컵 두어 개를 쥐었다. 나는 라의 말에 구태여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내 이름 대신 제멋대로 붙여 준 카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건 익숙했다. 작고 아담한 오두막집은 아늑했다. 신발에 묻은 눈을 채 털기도 전에 라가 벽난로 앞에 원목 의자 두어 개를 급하게 놓았다. 원래 작업실엔 사람을 잘 안 들여서. 변명처럼 말을 덧붙이던 라는 불 위에 걸어 둔 쇠막대에 주전자를 걸었다.   별로 안 걸리네. 우리 집에서 그렇게 안 멀다고 했잖아.   우유는 도통 끓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는 자꾸만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려고 했다. 얌전히 있는 불에 눈을 찌푸리기도 했다. 놓아 둬. 나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아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얌전히 무릎 위에 놓인 저 두 손으로 만들어졌을 시계들이 수납장 위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네가 만든 거지? 다 완성된 거야?   턱짓으로 시계들을 가리켰다. 라는 시선을 돌려 내 턱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더니 의자에 몸을 꺼뜨리듯 기댔다.   아직.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해 보이는데. 아니야, 아직.   라는 고개를 저었으나 내 눈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시계 부품들이 짜임새 있게 잘 맞물리는 것 같았다. 나는 시계를 뜯어보듯 찬찬히 살폈다. 과연 전에 일러 주었듯 고가에 팔리고도 남을 만큼 빛이 났다. 옆에서 한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중앙에 빈 공간 있잖아. 거기에 넣기만 하면 끝나. 보석? 비슷한 거.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 라는 피하던 시선을 둘 곳이 생긴 것이 기쁘다는 듯 손잡이를 잡았다. 라는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주전자에서 나오는 김이 라의 얼굴을 잠시 가렸다가 이내 흩어졌다.   그래서, 일은 잘 돼 가? 피해자가 한둘이어야지. 여기 오기 전에 거의 다 모았었어.

  • 윤별
  • 2018-06-30
현상흔

현상흔   빛이 꼭 은신한 뱀 같았다. 며칠 전 촬영의 대가로 얻은 손목의 통증과 불면이 두통을 몰고 왔으나, 무영이 앓는 환시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출사 날마다 빛은 사정거리 내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독사 꼴을 했다. 천변에서의 촬영은 지난해 겨울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영이 눈가를 가볍게 찌푸렸다. 갈색 홍채가 투명하게 비칠 만큼 날이 좋았다. 무영은 물에 반사되는 빛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길게 응시했다. 강물 위에서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오리배를 타고 있었다. 볕을 받은 빨간 줄이 무영의 손목을 한 바퀴 휘감아 마치 실팔찌처럼 보였다. 아픔을 몇 번이나 더 찍을 수 있을지를 무영은 흐릿하게 가늠했다. 한 번. 운이 좋다면 두 번까지. 무리해서 찍으면 손목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걸 무영은 알았다. 사실 지금 잘린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상흔이 깊었다. 무영이 한숨을 쉬자 빛을 가려낸 손바닥 아래로 피사체와 피사체의 보호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앳된 여자아이와 한 쌍의 부부였다. “안녕하세요.” 무영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목에 걸린 카메라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여자가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무영은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리본을 매단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영의 볼 양쪽에 의례적인 웃음으로 만들어진 보조개가 움푹 팼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상반신만한 코커스파니엘을 품에 안고 있었다. “최대한 즐거운 감정을 담아 주세요. 천변에서 강아지랑 놀게 둘 거예요.” “강아지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여자가 잠시 여자아이 쪽을 바라보다가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침묵은 매미 소리에 묻혔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따가운 볕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갈색 아이브로우로 진하게 그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일처리에 능숙한 십일년차 사진사였다. 무영의 손이 카메라 전체를 훑고 지나가는 동안 여자는 여자아이의 갈색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마지막이라고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남자는 자신의 딸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가 딸아이의 손에 빨간 막대사탕을 쥐어주고 나서야 무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선배의 목소리가 언뜻 스치는 것 같았다. 날이 좋은 날에는 노출값을 줄여야지. 감정을 놓치면 안 돼. 무영은 조리개를 조금 더 닫고 테스트 컷을 찍었다. 무영은 시시때때로 뒤바뀌는 초점을 좇았다. 피사체는 강아지를 따라 달렸다. 점박이는 샛초록색의 여름 잔디로 뛰어들었다. 피사체가 강아지를 겨우 따라잡고서 품에 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혔다. 강아지의 꼬리가 쉴 틈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무영은 여자아이의 가장 즐거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셔터에 손을 올렸다. 무영의 미간에 얼핏 주름이 잡혔다가 풀어졌다. 여자아이가 이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다가 갑작스럽게 강아지

  • 윤별
  • 2017-11-27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3월토끼

    안녕하세요:) 자살 바이러스가 퍼짐에 따라 주변 사람들의 변화를 주인공의 입장에서 잘 나타낸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윤별님 글의 현실적인 모습이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떨어졌어도 '이러니까 너희 성적이 안 오르는 거다' 며 수업을 계속하는 선생님이나 자살 바이러스가 퍼져도 수능 걱정을 하는 학생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언니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동생. 저는 개인적으로 먹고 싶은 것보다는 꽃을 보고 싶다고 얘기한 비, 라는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어요. 여기서 이런 얘기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글틴 문학당 수업에 참여했습니다. 글틴 문학당 자료집에서 윤별님의 소설, -네. 이 글이었습니다- 를 읽었는데 문장 하나하나가 마치 예쁘게 닦인 구슬같은 느낌이라 참 좋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수업 시작 전에 수필도 읽어보았는데 수필을 읽고서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글 잘 쓴다는 말 한 마디라도 전하고 싶었는데 수업이 끝나고 결국 말 한마디 못 해드렸네요. 그게 못내 아쉬워서 여기 댓글에나마 몇 자 적고 갑니다. 혹시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윤별님 옆자리에 앉았던 포니테일의 여중생이었습니다!

    • 2016-12-29 21:57:32
    3월토끼
    0 /1500
    • 0 /1500
  • 김선재

    "나는 난간을 잡고 공기 중으로 상반신을 내민다." -"나는 난간을 잡고 허공으로 상반신을 내민다." "그 옆에 힘없이 자리하고 있는 굴러 떨어져 뭉개진 사체." - "그 옆에 뭉개진 토마토처럼 떨어진 사체." "이전까지의 신선한 공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이전까지의 신선한 공기가 아니다." "말하려다 말하려다 결국 목구멍에서 포기하고야 만다." - "하려던 말은 결국 목구멍에서 막히고 만다." "흰 운동화가 빨간 물을 들인 듯 얼룩져 있다." - "원래 흰색이었던 운동화가 온동 붉은 색이었다." 혹은 "원래 흰색이었던 운동화가 온통 핏빛이었다." "다시 눈동자와 눈동자가 마주하면 비는 아직까지 떨고 있다." - "다시 눈과 눈이 마주친다. 비는 내내 떤다." "수백만의 발이 멈췄다가 지났다가 또 달렸다가 하는 곳" - "수백만의 발이 멈추고 지나고 달리기를 반복하는 곳" "늦여름에 어그부츠를 신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 - 누가 하는 말이죠? "다른 사람이 던진 시선이 그들을 맞고 튕겨져 나온다." - "다른 사람이 던진 시선이 그들의 시선을 맞부딪친다." . . . "비는 표정을 숨기는 데 약하다." - "비는 표정을 숨기는데 서툴다." "이것마저 존재치 않아 주위에 브레이크를 걸어 줄 사람이 없다면" - "표정을 숨기는 걸 잘해서 비의 속내를 읽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내가 오 년 전 밤을 무서워하지 말라며 사다 준, 큐빅이 박힌 머리장식을" - "내가 오 년 전 밤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사다 준, 큐빅이 박힌 머리장식이다." "자신은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것이" - "자신은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듯이." "성대를 울리며 공기를 마찰시키는 행위가 사뭇 이질적이다." - "몸밖으로 나온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이 낯설게 여겨진다." "일상이기에 비일상적이지 않다." - "일상이다." "궁금한 것. 그뿐이다." - "궁금한 것은 그뿐이다." . . . 잘 읽었습니다. 지난 번 아카데미에 제출했던 작품이네요. 그때는 시간에 쫓겨 자세히 읽지 못했는데 다시 읽으니 여러 군데에서 문장을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소설의 문장은 가독성이 있게 써야 합니다. 다시 말해 쉽게 써야 한다는 말이지요. 다른 무엇보다도 잘 읽혀는 글을 써야 합니다. 이건 논문이 아닙니다. 한자어를 가급적이면 자제하라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추상적인 단어로 구체적이고 쉬운 문장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우리가 쓰는 말이 한자어와 완벽하게 결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글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은 한글로 대체하고 한자어를 써야 한다면 되도록 일상적인 한자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기이하다'보다는 '이상하다'가 낫다는 말입니다. 1. 위의 문장들에 대한 부연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고쳐 쓴 문장이 정답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윤별님의 무엇을 고쳐야 하는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아마 비교해서 읽어보면 잘 아실 거라 여겨집니다. 중간의 ...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2. 이 글의 화자는 비의 언니인 '나'입니다. 나는 아마 고삼으로 여겨지는데 일반적인 고삼의 시선이 아니라는 것이 걸립니다. 02)의 서술자는 누구인가요? 나인가요? 유독 이 02)의 어조가 다른 문맥과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고삼 수험생인 '나'의 시선과 다른 시선에서 쓰여진 것 같다는 의미입니다. 3. 자살바이러스로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는 상황. 퍽 소설적인 이야기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너무 많은 사회적인 얘기를 담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결코 흠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전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고삼인 나와 나에 기대 겨우 삶을 지탱하고 있는 동생. 그 둘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혈육입니다. 하늘아래 둘 뿐인 거죠. 그렇다면 이 둘의 얘기를 좀더 세심하게 다뤄야 하지 않을까요? 유폐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집에서 둘이 할 수 있는 일들. 얘기들. 그런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있을텐데요. 이 글을 읽으며 두 자매가 어둠을 마주보고 누워 있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두렵고 외롭고 적막한 세계. 아마 그 세계의 유일한 구원은 서로의 체온일텐데요. 그런 구체성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묘사가 거의 없습니다. 사회 전반의 모습들이 진술되고 학교에서의 생활이 진술되고 '나'의 사유가 진술되고 있을 뿐이라 여겨집니다. 최근에 읽은 노랑님의 '시니컬한 삶의 자세'를 한 번 일어 보시길 바랍니다. 4. 퇴고에 대한 얘기를 하셨는데... 공간을 대폭 축소했으면 합니다. 주 공간을 비와 내가 지내는 집으로 하고 학교라는 공간은 서브로 축소해도 좋겠지요. 또한 너무 많은 얘기를 하려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들(나와 비)의 이야기는 그들만의 세계 안에서 그려야 합니다. 그 공간이 지나치게 현실적이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단편 소설의 시작과 끝은 가까울 수록 좋습니다. 다시 말해 시작과 끝의 시간 거리가 짧거나 물리적인 공간의 크기가 작거나. 예를 들면 방문을 열며 시작한 소설은 방문을 닫으며 끝나는 것이 좋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시작한 소설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끝나는 것이, 밤에서 시작한 소설은 새벽이나 밤에서 끝다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그게 구성의 시작입니다. 전체적으로 구성이 산만하고 서사도 느슨합니다. 3/1을 덜어낸다는 심정으로 차근차근 고쳐나가시길 바랍니다.

    • 2016-12-02 02:23:30
    김선재
    0 /1500
    • 0 /1500
  • 윤별

    16년 1월 글을 퇴고한 작품입니다. 더 퇴고하고 싶은데 어느 부분을 퇴고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퇴고 전 글 http://teen.munjang.or.kr/archives/90797 +6월달부터 소설이 밀려있는것같습니다ㅠㅠㅠㅠ! 귀찮고 힘드시겠지만 그 쪽의 소설들도 한 번만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 2016-12-01 10:03:26
    윤별
    0 /1500
    • 김선재

      8월 이전의 소설들은 김이설 선생님이 관리하셨던 걸로 알고 있어요. 물론 개별적인 작품평은 하지 않았지만 총평 등에서 각각의 작품을 언급하셔서 제가 거기에 첨언하는 것은 이설 선생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 2016-12-12 00:53:52
      김선재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