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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붕어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6-11-04
  • 조회수 906

금붕어

 

안개는 울음을 멎게 한다. 습한 공기가 폐부 안으로 떠밀려 들어오면 헐떡이던 식도의 근육은 느리게 주저앉는다. 비집고 나오던 눈물이 다시 제 모체로 기어들어간다. 청이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숲으로 도피하는 이유다. 눈발이 날린다. 눈물을 얼릴 것만 같은 기괴한 바람이 청을 묻고 지나간다. 청은 자신의 몸뚱이 안에 바람이 머물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 추운 날씨에도 안개가 끼다니. 다 해진 신발이 너덜거리며 밑창이 덜렁거린다. 운동화가 청을 이끈다. 청의 걸음은 느리다. 느린 걸음마저도 멎은 지금 이 시간 속에 청이 있다.

우는 것도 이제 지겨워. 안개 덕에 울음을 간신히 그친 청이 나직하게 공기를 뱉는다. 눈 덮인 숲은 답지않게 희다. 무채색으로 이루어진 설원 속이다. 청은 그대로 눈을 들어 나무들을 본다.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 괜히 입술을 짓씹는다. 저 나무들은 상록수인데 왜 알몸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청은 소나무와 그 옆의 전나무와 눈으로 덮인 덤불들으로 시선을 내린다. 소나무가 방출하는 독성을 어떻게 견뎌내었는지 신기할 정도로 빽빽히 들어선 덤불 위에 눈이 덮여 있다. 청은 고요 속에서 생각한다. 이 고요를 깨뜨리고 싶다, 고.

디 트레네 포레스트. 독일어와 영어가 혼재된 단어는 실은 이 숲에게 온당히 부여된 이름은 아니었으나, 청은 자신이 붙인 여덟 음절의 이름에 만족했다. 디 트레네. 디 트레네. 나직한 것은 실은 나직하지 않았으며 청을 완벽하게 흔들 만큼 기괴하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칼은 어떻게 잡으나 흉기이지. 청이 뻐끔거리는 것 또한 같다. 자해다. 그럼에도 청은 디 트레네, 하고 다시 발음한다. 숲은 청이고 청은 숲이다.

문득 청은 금붕어를 씹어먹고 싶다, 고 생각한다. 붉고 붉은 피를 터트리는 것을 생각한다. 설원을 망가뜨리고 고요를 깨뜨리자. 금붕어에게 통점이 있던가? 아무래도 좋아. 금붕어가 눈물을 떨어뜨리면 그 때 우적우적 하고 씹어먹을 것이다. 비린내가 코를 찌르더라도 괜찮다. 청은 주위를 둘러본다. 금붕어가 어디에 있을까. 금붕어는 어디에 있을까. 청은 걷는다. 눈 위로 뽀드득뽀드득 하는 소리가 울린다. 바람 소리밖에 남지 않은 허공에 눈 밟는 소리가 겹쳐진다. 창백한 눈소리가 설원 위에 나리고. 꽁꽁 얼어버린 금붕어가 어디에 있을까.

무엇이 원인인가? 무엇이 울음인가? 울음의 정의란 무엇이고 눈물의 정의는 무엇인가? 청의 의문이 묻는다. 청은 데-피니션, 하고 발음한다. 잇새로 새어나가는 에프의 음절을 이로 씹는다. 자신이 언제부터 울어버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억을 재생한다. 운명으로 정의하기에는 어려운 것. 순응할 수 없는 것. 무어가 그리 청을 자극하고 있는지. 가장 정확한 것은 공기다. 공기가 청을 옭아맨다. 냄새는 곧 충동으로 이어진다. 공기의 작은 떨림마저 느낄 수 있다. 청의 발걸음은 빨라진다. 유리병에서 탄산이 새어나오듯 그렇게 천천히. 천천히 빨라진다. 부글부글 끓는다. 이산화탄소가. 청의 산소가. 혈류가 빨라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다. 맥박이 뛴다.

뛰는 맥박을 부여잡는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청의 눈에는 다시 설원이 있다. 심장이 쿵 뛰면 맥박이 종종거리며 심박을 뒤따른다. 심박의 죽음은 맥박의 소멸을 의미한다. 둘은 서로 독립-종속변수의 관계다. 독립된 심박은 제멋대로다. 그러니까 지금도 이렇게, 봐, 빠르게, 쿵, 쿵. 청은 답잖게 말끝을 툭툭 끊어낸다. 벌목하듯 숨을 빠르게 들이킨다. 한 번 들이키면 산소가 제 안에서 여덟 조각 나는 느낌이다. 여덟 조각 안에는 같은 영상이 산소를 매개로 하여 재생된다. 이것을 청은 주마등이라고 불러 왔다. 나는 이제 죽나요? 차라리 그 장면을 보는 것보다는 죽는 게 나을 텐데. 역겨운, 냄새. 안개 특유의 냄새와 역겨운 비린내가 섞여든다. 청은 그것을 아주 또렷하게 느낀다. 다시. 청은 겨우 입을 열어 아, 하고 소리를 내어본다. 이질적인 공기의 파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인다.

 

ㅡ언제부터 그랬어?
ㅡ…
ㅡ묻잖아.
ㅡ이 년, 전부터.

청의 앞에 서 있는 여자가 고개를 기울인다. 납득할 수 없다, 라고 청은 받아들인다. 청은 우물쭈물한다.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다. 냉담한 목소리가 사늘하다. 이것으로 입증된 셈이다. 배워 왔던 행복한 가정이란 존재할 수 없다. 단란한 가정. 무슨 소용이니. 지금 여기 없는데. 실존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행위는 허무하다. 애초에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꿈꾸지도 말아야지. 닿지도 못할 곳이라면 운동화 끈을 동여매지도 말아야지. 여자는 하이힐 뒷꿈치로 대리석 바닥을 두드린다. 관절이 굽혀지고 펴지는 일련의 과정을 청은 지켜본다. 여자의 뒤에 걸려 있는 벽걸이형 수족관에는 여자의 남편이 아끼는 금붕어 두 마리가 헤엄치고 있다.

ㅡ그럴 리가,

아,

ㅡ없잖아.

역겹다.

청은 옷을 들어올려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옷을 찢고 칼을 들어 자신의 무수한 상처들을 보여내면서 내가 당신의 남편 되는 사람 때문에 무너졌다고 절규하고 싶다. 저 사람은 독수리고 나는 새앙쥐다. 승산은 없다. 할퀴면 상처 하나 나지 않은 채로 제 몸뚱이를 채어 뾰족한 바위들이 고개를 치뜨고 있는 절벽 아래로 떨어뜨릴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은 발악하기를 원한다. 어떻게든 저 사람에게 맞서고 싶다. 그러나 바위들 틈에는 금붕어가 있다. 청을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이 입을 벌리고 뻐끔거리는 금붕어가. 청은 마비된 얼굴 근육을 간신히 움직여 입술을 문다. 나도 네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어. 언제나 단어들은 입안에서만 맴돌지. 성대를 통해 떨림으로 터져나오진 않는 것이다.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처럼 불쑥불쑥 올라왔다가 다시 잠잠해지고만 만다. 가엾어라.

ㅡ그럼 왜 말 안 했니?

여자의 표정빛은 변화가 없다.

ㅡ산부인과는 가 봤니?

청은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손을 꽉 쥐어버린다.

ㅡ성병이라두 걸렸으면 어떻게 하게.

희뜩해진 주먹 위로 핏줄이 볼록 튀어나온다.

ㅡ사실이라고 생각은 안 하지만 말야,

푸른 대비.

ㅡ혹시 모르니까.

청의 얼굴만치 푸른 대비. 가해자는 쟤다. 쟤의 남편이고 지금은 쟤가 나를 죽이고 있다. 그런데 왜 내가 참아야 하는 거지. 청이 다시 소리를 내려고 하자 무수히 많은 나비들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기도를 막아버린다. 청은 숨을 쉴 수 없어 얼굴이 희었다가 파랬다가 한다. 머리카락이 달랑거리며 흔들린다. 곧이어 온몸이 흔들린다. 여자는 청을 오물 보듯 본다. 청은 순간 몸을 돌려 달아나버린다. 달아나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쟤야. 그런데 왜 내가 달아나고 있지? 달리며 청은 쉴새없이 자문한다. 저것이 나의 엄마, 인가? 왜? 달떠 내쉬는 숨과 숨 사이의 크레바스에서 청은 허우적댄다. 왜? 왜? 왜? 한 음절이 청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왜?

청이 운다. 툭 툭 하고 눈물이 덩어리져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그 앞에서 뱉어내지 못했던 응어리들이다. 굳었던 근육이 말랑해지다가 흐물흐물해져 청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야 만다. 물리법칙은 청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청은 그대로 땅바닥에 구른다. 살가죽이 벗겨져 희게 일어나고 그 아래에 동그랗게 피가 맺힌다. 완벽한 원형은 유지될 수 없다. 뭉그러지며 청이 마찰한 곳에 피가 얼룩져 흙과 섞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은 계속해서 호흡한다. 아가미 안으로 공기를 받아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내뱉고. 생을 연명하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이다. 청은 숨을 멈춘다. 계속 달린다. 어지러움이 발끝에서부터 빠르게 감아올라와 견딜 수 없다. 심장이 발작하듯 수축과 팽창을 반복한다. 청은 눈을 질끈 감았다간 균형감각을 망각한 채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는다. 방해물이 제거된다. 계속해서 억압받던 왕정 하의 공기들이 폐부에서 튀어나온다. 청은 소리내어 운다. 눈물이 툭 툭 떨어진다.

 

청은 육 개월이 겨우 넘어간 기억들이 스치우는 것을 느낀다. 다시 아, 아 하고 공기를 파열시킨다. 이것은 육 개월 전의 기억이다. 저장할 가치가 없는 기억일 뿐이다. 청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삼킨다. 마치 물고기를 씹어삼키듯. 형체를 잃은 산소가 수증기로 응결되어 하늘로 날아간다. 맥박과 소리와 또 심박과, 쿵쿵거리는, 소리와, 역겨운, 냄새와, 다시, 쿵, 쿵, 거리는, 심박, 툭, 툭, 툭, 하고, 떨어, 지는, 물.

빠짐없이 역겹다. 역겹다. 역겹다.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난 태어나기 전으로 되돌릴래. 그리고 한 달이 되기 전에 자의로 자궁 밖으로 탈출할 거야. 눈을 감으면 금붕어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잠에 빠지면 청은 머리부터 차례로 금붕어에게 먹힌다. 금붕어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내가 금붕어를 씹어먹어야 한다. 금붕어를 씹어먹고 싶다. 금붕어를 와작와작 으적으적 하고 씹어먹고 싶다. 안개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 툭 툭 하고 청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지어 쏟아지고 있다. 청은 어찌 할 줄을 모르고 뻣뻣해진 목울대로 겨우 공기를 들이고 있다. 얼른 멈춰 줘, 하고 청은 안개에게 소원을 빈다. 얼른 멈춰 줘. 항상 멈춰 줬잖아. 장마가 찾아온다. 멎지 않는 장마가.

이제 그만하자. 울지 말자. 청은 다시 역겨운 냄새를 맡는다. 꼬리뼈에서 시작한 한기는 머리를 지배한다. 정상적인 사고과정을 잃었으나 청은 자신이 내뱉는 모든 말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눈물을 그치자.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청은 중얼거리다가 소리치기 시작한다. 청의 뱃속으로부터 심장을 거쳐 몸 전체를 몇 번이고 돌고 온 소리들은 청에게 다시 메아리친다.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이제 청의 눈에서는 눈물인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줄줄줄 물이 흘러내린다.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역겨운 냄새가 사고회로 곳곳에 스며들고 몸뚱이는 제멋대로 프로그래밍되어 운동한다. 청은 울지 말자, 라고 반복적으로 소리치다간 갑자기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하고 길게 비명을 집어뺀다.

그러더니 집어드는 것은 나뭇가지다. 몇 번이고 자신의 왼쪽 눈을 찌른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파? 이것이 아프니? 청의 눈에 생채기가 자리하고 나뭇가지가 이리저리 꺾인다. 여린 나뭇가지로는 소용이 없어. 울음을 멈출 수 없어. 더 강한 것이 필요하다. 청은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비틀거린다. 나뭇가지를 내던진다. 흐릿한 한쪽 눈과 멀쩡한 한쪽 눈의 초점을 맞추기가 어렵다. 세 발짝을 걸어 각목을 주워든다.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청은 계속해서 외치며 제 눈을 내려찍는다. 아프지, 않다. 시야가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없다. 한쪽 눈은 아직 말짱하지만 다른 쪽 눈은 뭉개질 대로 뭉개져 있을 것이다. 머리가 복잡하게 아파온다. 시신경과 뇌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청은 그 사이에서 빛을 본다.

따스하고, 부드럽고, 완벽한 빛을.

그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환영과도 같은 것이어서 청은 자기도 모르게 각목의 뾰족한 부분으로 왼쪽 눈을 깊게 깊게 아주 깊게 찔러버린다. 순간적으로 청은 다시 그 빛을 본다. 청은 온기를 본다. 형체화된 온기가 넘실댄다. 다시 청은 각목을 앞으로 잡아빼었다가 내려찍는다. 누군가에게 안겨 있는 자신을 본다. 청은 그것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끊임없이 눈을 찍는다. 통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야가 없어지자 더 이상 볼 수 있는 방도가 없다. 청은 숨을 깊게 들이킨다. 선택지가 없다. 애초에 줄 거라면 확실히 주란 말이야. 청은 남은 오른쪽 눈을 찌른다. 다시 환하게 빛이 들어오더니 언젠가 배웠던 단란한 가정이 거기 있다. 그 안의 주인공은 아는 사람들이다. 청은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눈을 헤집는다. 상처가 나고 눈알이 뒤집힌다. 아직 닫히지 않은 시야에서는 빛에 파묻혀 일렁이는 자신이 있다. 청은 더 자세히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지금이 순간이고 순간이 기회이다. 매 순간마다 청은 힘을 느낀다. 가장 마지막 순간에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불꽃놀이의 화약이다. 화학물질이 색색깔의 불꽃으로 터지는 것을 청은 본다. 그 속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청은 운다. 청은 웃는다. 청은 운다. 청은 웃는다. 혼재된 청이 기묘하게 울며 웃으며 다시 자신의 눈을 찌른다. 이어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청은 그 자리에 쓰러지듯 누워버린다.

손끝에서부터 칠흑의 어둠으로 옮겨가는 안도감. 이것은 단순히 다른 부류의 안도감이다. 이제 울지 않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다. 금붕어를 씹어먹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다. 아빠의 벽걸이형 수족관에 담겨 있는 두 마리의 금붕어와 자신을 잡아먹을듯이 달려드는 금붕어와 또 저 절벽 아래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금붕어 모두를 입속에 쑤셔넣고 우걱우걱 소화시킬 수 있다는 안도감이다. 청은 감지 못하는 눈을 감는다. 푸르던 하늘이 검어진다. 눈은 기능을 상실한다. 눈이 청의 위로 쌓인다.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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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선재

    윤별님은 서술자의 심리 묘사나 분위기를 묘사하는 것에 있어 분명 돋보이는 재능이 있습니다. 문제는 인물과 분위기 만으로 소설이 구축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서사보다 내면 묘사나 서술자를 둘러싼 공간을 지배하는 분위기가 돋보여야 하는 작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야기를 놓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번 작품인 의 경우와 비교해도 그렇습니다. 여결은 인물의 심리에 치중하면서도 이야기가 보였고 그 이야기에 맥락이 있었습니다.그에 비해 이 작품은 이야기를 지나치게 놓아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서술자인 '청'의 캐릭터에 대한 배경과 '갈등'에 대한 쓰는자의 배려가 더 필요해 보입니다. 첨언하자면, 도입부에서 등장하는 숲에 대한 진술과 묘사들은 퍽 시적이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주변의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이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감각을 글쓰기에 표현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것은 글을 쓰는데 분명 필요한 것입니다. 좀더 인물과 이야기를 단단하게 구축한 다음 쓰기를 시작해 보시길 바랍니다.

    • 2016-11-20 23:38:54
    김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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