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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화海花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6-06-08
  • 조회수 1,655

해화海華

 

01

교실이 부산스럽다. 공기가 들떠 있다. 초록색 칠판에 적혀 있는 글자를 바라본다. 수학. 수업 시작 전부터 모니터에 아이패드 전선을 이리저리 연결하고 문제를 띄워 두던 선생님은 어쩐 일인지 들어오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소모임을 하듯 웅성이던 소리가 크기를 키웠다. 애꿎은 하얀 분필 글씨만 노려보다가 책상 위에 엎드렸다. 잠이 제멋대로 쏟아지는 오 교시에 제정신을 유지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그 시간에 지루한 수학 선생이 문제만 줄곧 풀어댄다면 더더욱. 내 정수리를 톡톡 건드리는 손길만 아니었어도 그대로 우주에 빠져들 수 있었을 텐데.

ㅡ왜?

고개를 들고 눈을 비볐다. 하품이 늘어졌다. 물망초 향기가 났다. 화가 제 자리에서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ㅡ유! 지금 자면 안 돼,

ㅡ미적분이잖아. 버렸는데 왜 또.

화가 항상 입에 달고 사는 말에 나는 또 그 소리야, 하면서 늘어뜨려 놓은 팔에 고개를 묻었다. 수면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어때. 한 시간은 무리겠지만 아마 삼십 분 정도는 잘 잘 수 있을 테였다. 바람은 바람으로 끝나는 법이라고, 화는 내 어깨를 흔들어 고개를 다시 들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부스스한 정신으로 화를 다시 바라본다. 화가 눈매를 샐쭉 접어 내렸다.

ㅡ오늘 너 자면 네 머리는 안 남아날걸. 담임 들어오잖아.

ㅡ수학 아냐?

나는 칠판에 쓰여 있는 글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화가 고개를 돌려 글자를 흘깃 보더니 이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ㅡ그, 그, 뭐더라, 심리검사? 한다고 했던 것 같던데. 그래서 수학 안 들어왔잖아.

그럼 그렇지. 수학이 들어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독사가 들어오지 않는 날은 딱 둘일 테였다. 하나, 교통사고를 비롯해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아예 움직일 수 없을 때. 둘, 자신이 아끼는 학생에게 큰일이 생겼을 때. 수학이 아끼는 학생은 대개 정해져 있었는데, 성격이 정말 순하거나, 성적이 정말 좋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화는 그 두 범주 안에 모두 속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잠자기는 글렀다.

 

ㅡ이런 건 도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어. 결과 가지고 애들을 평가하는 것도 이해 안 되고. 애초에 이걸로 애들을 평가할 수는 있나…?

ㅡ그냥 문제아 가려내기지.

화는 이제 아예 의자에서 몸을 돌려 내 책상에 상체를 기대고 있었다.

ㅡ반마다 한둘씩 있잖아. 얘는 특별히 조심해야겠구나, 얘는 어떤 활동에는 배제시켜야겠구나. 이런 거. 그런 거 걸러내는 거지, 뭐. 나도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

ㅡ너는 항상 결과 좋게 나오잖아?

기숙사를 공유하다 보면 별의별 것들을 함께하곤 하는 법이다. 우리는 일 학년 때 기숙사를 함께 썼고, 화장품을 비롯해서 세안용구, 간식, 가끔은 옷까지도 함께 썼다. 그리고 이 학년에 올라와선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여학생 이백 명 중 다섯 명씩 무리짓는 기숙사 배정에서도 같이 방을 쓰게 되었다. 그러니까, 서로 적어도 일 년은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라는 소리였다. 처음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했던 몇몇 검사들의 결과를 기억한다. 화의 심리검사 결과표에서는 긍정적인 감정을 뜻하는 붉은 그래프가 위로 치솟아 있었다. 반대로, 불안이나 초조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은 땅을 기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완벽하게 이상적인 결과와도 같았기에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비단 그 심리검사에만 국한된 결과는 아니었다. 화는 의사가 되고 싶어 했다. 직업 적성검사를 하면 육각형의 사교성과 탐구성 부분의 점에 걸친 점수가 굉장히 높게 나왔다. 거의 만점에 가까웠다, 나머지 네 유형이 육각형을 일그러뜨리고 있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거의 균형 잡힌 육각형이었다. 화는 예술 쪽에도 재능이 있었고, 몸을 움직이는 일에도, 말을 하는 일에도, 그러니까 대부분의 일처리를 상당히 깔끔하게 처리했다. 불가능이 없어 보인다는 말이 퍽 잘 어울렸다.

 

ㅡ선생님들은 항상 날 그 틀에 맞춰서 보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ㅡ그게 싫은 거야. 솔직히 이 시험은 마음만 먹으면 모범생처럼 위조할 수 있거든. 일관성 검사에서 걸러진다고는 하지만, 그건 다른 문제지. 어느 정도 머리만 있으면 가능해.

화는 제 왼손바닥을 오른손 검지로 두드리고 있었다. 미세하게 살갗이 희어졌다가 다시 본디의 색깔로 돌아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행위를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색이 같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ㅡ봐. 하나의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이 애는 완벽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거야. 친구들이랑 교우관계도 원만하고, 성적은 상위권인데다가 활동적이라서 두루두루 교외활동들도 하고 있지. 그럼 많은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건 무엇이지? 그런 애들은 어떻게 행동하더라? 성적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그냥 무식하게 앉아서 공부만 하는 거잖아. 계획이나 시간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다 알고 있을 테고.

ㅡ다 시험 쳐서 들어왔으니까 우리 학교 애들은 거의 다 그렇지? 나는 예외지만.

ㅡ그렇다 치고. 게다가 우리는 검사 조금 빨리 하려고 객관식으로 마킹해야지? 그럼 일은 훨씬 쉬워져. 이 성격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를 생각해서 마킹하는 거야. 서류상으로 완벽하게 모범생인 사람의 결과가 나오는 거지.

화는 제 손바닥을 두드리고 있던 둘째손가락에 힘을 실어 약한 마찰음이 나게 할 즈음이 되어서야 손가락을 손으로 감쌌다. 눈을 찡그린 채였으나 미약하게 웃음기가 남아 있는 채였다. 화 자신이 타고난 기질일지도 몰랐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의 행동도, 화의 말도. 부정할 수가 없어 더더욱 그랬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ㅡ그럼 아예 미친 척 하고 문제아처럼 찍어 보지?

ㅡ그러려고.

낯선 언어에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일 년 내내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화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 나올 수는 있었지만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화의 얼굴을 올곧게 바라보았다. 화의 눈빛에는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역시 평소의 화가 아니었다. 화를 향하고 있는 두 눈이 분명 왜? 라고 묻고 있을 테였다.

ㅡ이번 반 배정이 조금 안 좋았거든. 너도 알잖아, 나 저번 기말고사 전교 일 등 한 거. 분명 반은 1반부터 성적순으로 배정하는 게 관례란 말야?

화가 말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했다.

ㅡ근데 나는 4반으로 배정받았고 수학이 아끼는 애들은 모조리 수학이 데리고 갔더라. 그냥,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아서. 그래서 선생님 한 번 골려 볼까, 생각중이야.

ㅡ너는 그렇게 말하는 편이 편해?

ㅡ응?

ㅡ그냥 반 배정 엿같이 나왔는데 그게 미친 꼰대들 때문이고 그 엿 한 번 처먹여 주려고. 기분 좆같거든. 이렇게 말하면 되잖아.

화는 그냥 웃기만 했다. 한없이 순하고 유한 웃음이었지만 그만큼 한없이 답답하기도 했다. 너 좋을 대로 해라, 하고 말을 툭 던지고 나는 허파에 가득 들어찬 숨을 뱉어내었다. 성의로 준비해 두었던 초록색 수학 교과서와 수학의 정석을 책상 서랍에 대충 쑤셔 넣는 동안에도 화는 계속 웃고만 있었다. 썩어빠진 공간에서 웃고 있기만 하면 그 사람은 단지 호구에 지나지 않는다. 만만히 보고 개 패듯 패고, 바퀴벌레 밟듯 밟고 가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면 밟히고 찢어진 그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거의 십 년 가까이를 사회의 압력 아래에서 억눌려 온 우리에게는 그것이 더 익숙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러한 것들을 겪어 왔으니까.

ㅡ그래서, 진짜 해 보게?

ㅡ그럼, 가만히 있을까?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못한다. 당연한 진리였다. 내가 최우선으로 생각했고 가끔은 그것 때문에 큰 사건들도 터졌던 것. 다만 내내 유했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최대한 피해 왔던 화가 그 말을 했기에 놀랐을 뿐이었다. 나는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ㅡ한 번은 골려 줘야지. 나 데려온 거 후회하게.

화가 혼잣말을 했는지, 아니면 내게 속삭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쨌거나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그 뒤에 바로 문 열리는 소리 뒤에 담임이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기에 화는 앞으로 몸을 돌려야만 했다.

 

화는 정말로 그렇게 했다. 나름 자부하는 속도로 모든 문제를 다 풀었을 때, 화는 이미 마킹을 끝내 놓고 OMR 답안지를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 책상 위에 놓인 수학의 정석을 화는 풀고 있었다. 시선이 자연스레 노란색 답안지로 향했다. 낙서를 하지 말라고 프린트되어 있는 시험지를 펼쳐 문제와 화의 답을 힐끔거리며 대조해보기 시작했다. 분명 내신에도 들어가지 않는 시험이었고, 남의 답을 본다고 해서 실격이 되거나, 부정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을 바늘로 콕콕 찌르고 있었다. 피는 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담임은 저 앞에서 책 한 권을 잡고 읽고 있었고, 나는 들키지 않았다.

걷으라는 담임의 말 한 마디에 맨 뒤의 아이가 일어나 시험지와 답안지를 걷어 갔다. 화는 불과 사십 분 전에 그러했듯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게 찍었어? 내 입이 뻐끔거렸다. 화는 다시 웃기만 했다. 승리의 웃음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화는 유쾌해 보였다. 장난이라고는 모르던 사람이 처음 장난을 쳤을 때의 그 상쾌함, 그리고 어딘가 모를 불안함이 구십 구 대 일 정도로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으레 모든 장난이 그렇듯, 나는 그 날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ㅡ화야, 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라는데?

B4 용지 크기에 주황색으로 얼룩덜룩 프린트된 광택지를 한 명 한 명에게 나누어주다가 부반장이 화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화는 창문 밖으로 만개한 벚꽃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반장이 건네는 종이를 받아들었다. 반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지 않는 것을 보면 공적인 일은 아닐 테였다. 무슨 일일까, 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화의 얼굴이 웃음기를 띄고 있었다. 그리고 내 손에 들린 주황색 B4 종이에 시선이 머문 순간 나는 화가 왜 웃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ㅡ다녀올게.

화는 짓궂은 표정으로 나를 한 번 바라보고 특유의 유한 웃음을 지었다.

ㅡ괜찮겠어?

아마 질타라고는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아이일 테였다. 화는 그럴 테였다. 완벽한 아이라고 칭해졌고 그렇게 대우받아 왔기에. 입학시험에 합격해야 들어올 수 있는 고등학교였고, 시험이 어렵기로 소문난 선생님들 사이에서 독보적으로 전교 탑을 달리고 있는 학생이었으므로.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상으로 삼고 있는 유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아마 마찰이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을 테였다.

 

천천히. 모래성이 위에서부터 천천히 깎여나가면 자신이 깎여나가는 것도 모르는 채 부서진다. 야금야금 파먹는 고통은 미약하다. 그저 무너졌을 때 허무함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고고한 유리가 위용을 뽐내다가, 권총 한 발에 쨍그랑, 하고 깨져 버리면 그 충격은 어마어마하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날카로운 파편에 베인 살은 붉은 피를 내보이고,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점심시간 내내 화는 올라오지 않았다. 나는 점심을 걸렀다. 그다지 맛있는 메뉴는 아니었다. 더불어, 아침을 많이 먹었으므로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잘 모르겠다. 아마 화가 걱정되었기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며 입술을 깨물었을 테였다. 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선생님의 경멸적인, 혹은 비난조의 말을 그대로 담아두고선 화장실 한구석에 틀어박혀 눈물을 쏟아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의자를 박차고 교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ㅡ유야?

뜻밖에도 우리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만났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감출 수 없었다.

ㅡ괜찮아?

ㅡ뭐가?

되물어오는 목소리에 물기는 어려 있지 않았다. 외려 내가 당황해야 할 테였다. 부드러운 웃음을 화는 담고 있었고 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ㅡ담임이 뭐라고 안 했어?

ㅡ성적이 좋잖아.

성적 하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 그 사실은 어김없이 이곳에서도 발현되었다. 화는 어깨를 으쓱하고 제 손에 들린 주황색 용지를 내게 건넸다. 화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장난을 성공시켜 한껏 들떠 있는 어린아이.

ㅡ뭐라고 하기는 했는데, 전교 밑바닥에 있는 애처럼은 안 대하더라. 그냥 요즘 힘든 일 없냐고 물어보더라구.

검사 결과표는 평소 화가 가지고 있던 결과표와 극명하게 상반된 결과였다. 붉은 그래프는 거의 없다시피 했고, 파란 그래프는 하늘을 뚫을 만큼이나 솟았다. 불안이 99퍼센트였고, 초조와 무력이 그 뒤를 이었다. 자기 존중감은 바닥에 가까웠고 행복하지 않다고 답했다. 화의 말대로 완벽한 문제아로 탈바꿈한 검사 결과였다.

ㅡ상담 받아 보라는데.

ㅡ상담? 지금 했잖아.

ㅡ아니, 그런 거 말구. 그러니까ㅡ 정식으로 상담선생님이랑 상담이라도 받아보라는데.

화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ㅡ아니, 왜?

ㅡ결과지에 자살 관련 항목 나왔었잖아? 그거 점수 높다구.

강박증. 뭔가를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완벽주의가 순간적으로 공기에 섞여 들어간 것만 같았다. 아마 자신도 알았을 테였다. 상담까지 갈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학생들은 위기가 오면 그것을 회피하려고 한다.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고는, 어쩔 수 없이 하는 마지막 선택이 정면 돌파인 셈이었다. 탈출구는 있었다. 자살이나 인생 비관의 선지만 조심하는 것. 아마 화에게는 너무도 쉽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화는 항상 정면으로 뚫고 지나가는 것을 택했다. 화는 항상 그랬다.

ㅡ심각해진 거 아냐?

ㅡ뭐, 한 번 정도는 해 보고 싶기도 했고.

화의 얼굴에는 걱정이라는 감정은 묻어 있지 않았다. 차라리 즐거움이면 모를까. 지금까지 보아 왔던 화의 공기와는 조금 달라서,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ㅡ골리려면 제대로 골려야지. 안 그래?

 

 

02

화는 아무래도 쓰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언뜻 들은 것도 같은데, 실은 화가 쓴 글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열외로 치더라도 곡 쓰는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재능이 아깝다며 예고를 갔어야 할 인재라고 추켜세우면, 화는 특유의 미소와 함께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지만 정말이었다. 음악 선생님까지 재능을 인정해 축제에 내놓을 곡을 쓴 학생이었다. 열일곱의 나이에 오케스트라 악기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오케스트라의 중심부에 서 보는 학생이 어디에 있을까. 오케스트라에서 나의 자리는 플루트였고, 화의 자리는 피아노였다.

피아노를 왜 배웠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공부를 그렇게 잘 하는데 피아노까지 배워야만 할 이유가 있었느냐고. 화는 그저 곡을 쓰고 싶어서 피아노를 배웠다고 했다. 자신이 원하는 곡을 쓰고 싶어서. 자신 안에 머물고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내고 싶어서 피아노를 배웠다고 했다. 실은 글을 쓴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같은 이유라고 했다. 자신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너무 강해서 끊임없이 끄집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래서 자신은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써야 한다고 했었던 것도 같다.

아무튼 그리 쓰는 행위를 좋아하는 화였지만, 지금은 음악회가 한 달 앞으로 훌쩍 다가온 터라 합주 연습이 우선이었다. 사은음악회라고 했다. 화와 나는 플루트 이중주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음악 선생님이 먼저 제안하긴 하셨지마는 곡을 정한 것은 우리였다. 그것이 우리가 이 황금 같은 주말에 학교 기숙사에 남아 기악연습실에 몸을 썩히고 있는 이유였다.

 

외박신청서를 내고 집에 가겠다고 했으면 아마 지금쯤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며 일어날 시간이다. 어쩌면 자고 있을 시간일지도 몰랐고. 아무튼 하루의 시작이라는 점만은 확실했다. 오전 여덟 시가 늦은 시간은 아니니까.

꿈을 꾸고 싶었다. 정확히는 잠을 자고 싶었다는 말이 맞을 테였다. 주말에는 여섯 시에 일어나야 하는 주중과는 다르게 잠을 많이 잘 수 있어서 금요일에는 항상 밤늦게까지 SNS에 접속해 있곤 했다. 집과 학교의 거리가 차로 두 시간을 꼬박 달려야 할 만큼 멀었기에 중학교 때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SNS밖에 없었다. 아침에 연습이 있다는 것을 깜빡 잊고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던 것이 화근이었다.

ㅡ거기 플루트 들어가야지 않아?

화의 연주가 멈췄다. 이상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표정이 어떨지는 내가 가장 잘 알았다. 멍한 눈에 초점 없이 어딘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겠지. 나는 재빨리 웃으며 미안, 하고는 다시 가자, 라고 내뱉었다.

ㅡ졸려?

ㅡ어제 잠을 많이 못 자서.

ㅡ못 잔 게 아니라 안 잔 거 아니야?

ㅡ귀신같은 놈. 어떻게 알았어?

화는 네가 이래서 안 되는 거야, 라고 말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ㅡ우리 기숙사 같이 쓰잖아. 오늘 아침에 내가 깨운 거 잊었어? 세상모르고 잘 자고 있던데.

납득.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화는 바보라고 속삭이고는 다시 피아노에 손을 올렸다.

 

화의 손은 오른쪽 중지의 첫째 마디와 둘째 마디 사이, 그리고 새끼의 둘째 마디와 셋째 마디 사이에 굳은살이 박여 있는 것 빼고는 굉장히 예뻤다. 원래 피부가 하얗기도 했지만, 손가락이 길고 투명했기 때문에 더더욱 아름답게 보일지도 몰랐다.

흔히 피아니스트는 손이 가늘고 길어야 피아노를 잘 칠 수 있다고들 하는데, 실은 그것이 아니라고 화가 말해준 적이 있다. 손이 가늘고 길면 여리고 섬세한 감정을 그만큼 잘 표현해 낼 수 있고 손이 두껍고 힘이 있으면 역동적인 음악들에 적격이라고. 손의 모양에 따라 자신의 주특기가 바뀔 수는 있어도, 피아노 자체에서 불리하고 유리하고는 없다는 말을 했었다. 물론 손가락이 길면 시작할 때 편하겠지만, 연습하다 보면 한 옥타브를 넘어서 열 개의 흰 건반 정도는 거뜬히 닿을 수 있다고 했다.

화는 그래서였는지 여리고 섬세한 곡 연주에는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적어도 우리 학교 내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톡톡 건드리는 곡을 쓰기도 했다. 한 번 연주하면 좀처럼 피아노를 놓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공부의 영향이 피아노에도 미쳤는지 완벽해질 때까지 자꾸만 연습하는 것이었다. 피아노 연주가 끊기는 일은 없었다.

 

ㅡ여보세요?

드물었다, 고 정정해야 할 것 같다. 피아노 연주를 잘라먹고 들어온 것은 화의 치마 주머니에서 웅웅대는 진동이었다. 중요한 전화가 아니면 끊는 화의 눈동자가 잠시간 커지더니 나 잠시만 전화 좀 하고 올게, 하고 기악연습실을 나가 버렸다.

나는 화가 들어올 동안 피아노를 눈으로 훑고 있었다. 플루트와 피아노의 조합은 까다롭지만 잘만 어울린다면 전율을 일게 할 수도 있는 조합이었다. 나는 자리를 옮겨 피아노에 손을 대었다. 물론 피아노를 배운 적은 있다. 그렇지만 어릴 때, 피아노는 잘 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플루트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으니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플루트를 선택하라는 말을 들은 뒤로는 피아노를 쳐 본 적이 없었다. 학원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건반 위에 다섯 손가락을 올리고 검지에 힘을 주어 건반을 눌러 보았다. 맑은 소리와 함께 현 울림이 건반을 타고 느껴졌다.

기껏해야 오 분 일 것 같았던 통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화가 없는 시간 동안 나는 피아노의 모든 건반을 눌러 보았고 심지어 간단한 곡을 쳐 보기도 했다. 피아노 위에 놓인 <말할 수 없는 비밀> 악보의 첫 줄을 더듬더듬 쳐 나가는 데 몇 분이나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한 장을 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며 한숨을 쉬고 나서야 화는 들어왔다. 어둠이 깔려 있었다. 화의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ㅡ무슨 일 있어?

화는 항상 그러했듯 웃음을 내걸었다.

ㅡ응? 아니, 그런 건 아니고.

ㅡ얼굴색 안 좋은데?

ㅡ그냥 되게…… 쉽다는 생각이 들어서.

ㅡ뭐가?

ㅡ다른 사람 되는 거.

화는 그저 특유의 웃음을 띤 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자신의 생각에 자신 스스로가 동조하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화의 눈에 나의 눈을 맞추었다. 어둠이 있었다. 빛 속에는 어둠이 숨어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겠으나, 농도가 짙었다. 괜찮은 거 맞아? 달싹거리자 화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이 전부였다. 빛이 들었다. 화는 내게 짓궂은 미소를 내보이더니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만들었다.

ㅡ그래서 우리의 장난은 완벽하게 성공했다는 것!

ㅡ선생님이 네 상담 결과를 진짜로 믿고 있나 봐.

나는 화의 어쩔 수 없는 발랄한 기운에 함께 웃고야 말았다.

 

어쨌거나, 우리의 합주 주제는 봄이었다. 지금까지 연습하고 있던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거나, <사계>라거나 하는 곡들은 전부 연습곡이었다. 화가 곡을 써 오기로 했는데, 그 전에 둘이 맞춰 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기에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은 빛이라고는 환한 형광등인데다가 방음 역할을 완벽하게 하고 있는 벽과 철문에 둘러싸여 연습을 하라고 집어넣어지면 누가 그곳에서 봄을 연상할 수 있겠냐마는.

화의 템포가 자꾸만 빨라졌다. 원래도 빠른 곡이었는데, 점점 빨라지더니 손이 보이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플루트의 숨으로 따라가기가 벅찼다. 그렇지만 그것도 듣기에는 나쁘지 않아서, 이론이나 연주법 따위의 생각들은 집어치웠고 함께 합주를 해 나갔다. 손이 아팠고 숨이 가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일 학년 몇 명이 창문으로 힐끗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마지막 화음을 내려치자마자 화는 다른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곡이었다. 나는 가만히 플루트를 내리고 피아노 의자 한구석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단조의 선율이었다. 꽃이 피어나는 듯 하더니 져 버린다. 모든 만물이 웅크리고 있다. 피아노는 화려한 선율을 뱉어내고 있었다. 분명 악보로 옮기면 음표가 빽빽이 들어차 차라리 백지를 보겠다고 할 정도의 화려한 기교를 막힘없이 뱉어내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허를 품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빠져 있었다. 화는 이제 눈을 감고 손가락이 가는 대로 눌러대고 있었는데, 몸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까지, 그리고 다시 저 쪽 끝에서 이 쪽 끝까지. 아르페지오가 차가운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질적이었다.

음악이 끝나고 나서도, 우리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ㅡ봄의 음악이야.

ㅡ이번 음악회에 연주할 거?

순간 나는 나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삭막했기 때문이다. 무릇 봄을 떠올린다고 하면 화창한 제전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단조의 선율에 행복이라고는 저기 저 구석에 조금 보이는 희망이 고작 전부인 곡이었다. 되물음에 화는 담담하게 답했다.

ㅡ응. 이걸로 연주하면 어때?

ㅡ진심이야?

화가 내내 피아노 건반에 고정시키고 있던 눈을 내 쪽으로 돌렸다. 나는 순간 움찔했으나 말을 이어나갔다.

ㅡ겨울에 가깝지 않아?

ㅡ……그런가.

화는 내 의견에 긍정도, 부정도 표하지 않은 채 멍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지친 것 같았다. 나는 화의 손을 잡았다. 사람의 팔목 끝에 달려 있는 무엇이 얼음장보다도 더 차게 식어 경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몇 주일이 지나는 동안 화는 상담을 받았다고 했다. 한두 차례가 아니라 몇 차례였는데, 야자 시간을 한 시간씩 빼고 어딘가로 다녀왔다. 학교 근처, 교육청 내부에 위 클래스라고 하는 상담 시설이 있다고 했다. 왜 교육청 안에 상담 시설이 자리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 삭막한 공간 안에 있는 만큼 편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ㅡ그런 데서 무슨 상담을 진행한다는지 모르겠어.

내 쪽으로 몸을 돌리고 앉아 있는 화의 고개가 기울었다. 나는 화의 눈을 바라보았다. 말이 이어졌다.

ㅡ교육청 안에 있는 것도 불편해 죽을 것 같은데 상담선생님들, 그냥 시간 때우려고 하는 것 같아. 이상한 질문들만 물어보고 정말 도움이 될 법한 질문들은 안 하더라.

ㅡ왜?

ㅡ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막 가정사 같은 거 물어보고 그러던데, 부모자식 간에 이간질시키는 것 같아. 상담 받아서 심리치료 하러 왔다가 걱정거리만 더 생겨서 가게 생긴 판이야. 그 분위기에서 어떻게 애들이 말을 꺼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ㅡ그치. 문제가 있지 않았으면 그 쪽으로 가지도 않았겠지. 그거 일종의 정신장애잖아.

화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그으렇지, 하고 맞장구를 쳤다. 화가 다른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국어가 들어왔고 그 뒤를 부반장이 따르고 있었다.

ㅡ화야, 너 지금 선생님이 내려오라는데?

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어선생님께 웃음으로 양해를 구한 다음 화는 문 밖으로 나갔다. 국어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이 수업을 시작했다. 화 없잖아요, 화 성적 떨어지면 선생님이 책임지셔야 해요! 밥도 먹었고, 배도 부르고. 공부하고 싶을 리가 없는 아이들 몇몇이 국어 수업 한 시간을 빼고자 칭얼거렸지만 국어는 그 애들의 의견을 전부 기각했다.

 

화가 좋지 않은 낯빛으로 들어온 것은 두 분의 선생님이 들어오고 나가고를 반복하고 나서였다. 나는 화를 바라보았지만 수업 중이었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03

선생이라는 작자가 학생들에게 잔심부름을 시킨다. 한두 번이면 이해를 하겠는데, 교육정보부장도, 과학부장도 아닌 그저 일개 학생인 나에게 항상 복사를 시키는 것은 정말 이해를 하려 해 봐도 할 수 없는 범주의 일이었다. 복사기는 본교무실 옆에 딸린 제2교무실에 있었는데, 그 교무실에는 학생부장 선생님에다가 학생주임 선생님, 그리고 담임까지 있어서 교무실에 들어가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나라도 흐트러져 있으면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넥타이가 끌러져 있다던가, 와이셔츠가 치마 밖으로 나와 있다던가. 보통의 선생님이라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까지도 학생부에 걸리면 벌점 사항이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제2교무실에 가는 것을 꺼려했고 가더라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본교무실을 지나면서 선생님들께 인사를 했다. 밝게 웃는 선생님들은 찾아보기 드물었다. 원래 항상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셨는데. 오늘의 기류가 묘하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조금 조심해야겠다, 정도의 생각뿐이었다.

 

ㅡ그러니까 괜찮다구요. 괜찮다고 하잖아요!

ㅡ해화. 너 진짜 이럴 거야?

교무실 문 앞에 서자마자 익숙한 목소리 둘이 귀에 꽂혔다. 나는 문고리를 잡았다가, 손이 불에 덴 듯 화닥닥 떼고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방음도 제대로 안 되는지, 안에서 하는 말이 밖에서도 희미하게 들렸다.

ㅡ학교에서 지원해 주잖아. 누가 사비 내래? 왜 그걸 안 받겠다는 건데.

담임의 목소리였다. 하이톤의 목소리가 교무실을 울리고 있었다.

ㅡ아니, 내담자가 상담을 원하지 않는다잖아요. 근데 왜 자꾸 이러세요?

ㅡ너 상담 결과 못 봤어? 전교에서 일 등이야. 뒤에서 일 등. 알아?

ㅡ그렇다고 해서 제가 꼭 상담을 받아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잖아요.

화의 목소리가 섞였다. 평소에는 듣지 못했던 높은 언성이었다. 유하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분노와 약간의 질책이 섞여 있었다.

ㅡ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거잖아. 지금 너 이 학년이야. 일 학년이 아니라고, 해화. 너 언제까지 이렇게 철없이 굴래? 언제까지 신입생 티 못 벗을 거야?

ㅡ그게 지금 저희가 얘기해야 할 거예요?

ㅡ뭐라고?

담임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복사해야 할 유인물 귀퉁이를 꽉 쥐었다.

ㅡ지금 저는 제 입장 밝혔잖아요. 상담 안 받겠다고. 받아야 할 이유도 없고, 가치도 못 느끼겠고, 차라리 그 시간에 공부를 하는 게 낫다고요.

ㅡ학교에서 지침이 내려왔잖아. 너 상담 받아야 한다고. 주기적으로 받는 게 좋다고.

ㅡ선생님, 선생님 항상 그러셨잖아요. 공부하라고. 그 시간 아껴서 공부하겠다는 거예요. 제가 다른 걸 한다고 말씀 안 드렸잖아요. 상담 같은 바보 같은 짓, 제게는 필요 없을 것 같고 제 증상 못 낫게 한다구요. 소용없다구요. 그래서 선생님 항상 말씀하시던 대로 공부한다고 하는데 왜 대체 저를 막으시냐구요!

ㅡ너 지금 당장 정신병원에 수용되어도 하나도 놀랄 거 없다니까?

담임의 목소리를 끝으로 정적이 흘렀다. 담임도, 화도 말이 없었다. 담임은 담임 나름대로 욱 하는 성격을 참지 못해서 그리 나온 것일 테였다. 말이 튀어나온 후에 너무 심했다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을 테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렸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심리검사 상으로는 가뜩이나 상처가 많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아이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아마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갈 정도로 손을 꽉 쥐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을 테다. 그렇지만 유리창 너머로 화의 얼굴을 볼 자신은 없었다.

ㅡ제가 이상해 보여요? 갑자기 이렇게 대들고 말대꾸하니까?

ㅡ…….

ㅡ선생님.

담임은 말이 없었다. 화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지 않았다.

ㅡ정신병원에 가두시는 편이 편하겠어요? 선생님한테도, 저한테도?

복도를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위에 화의 목소리가 다시 얹혔다. 나는 급하게 교무실 문 쪽으로 몸을 향하게 하여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ㅡ저는 더 이상 상담에서 뭘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거기에서 뭐 물어보는지 아세요? 네 어머니는 무슨 일 하시니, 아버지는 무슨 일 하시니, 가족이랑 대화는 많이 하니, 대화를 안 한다고? 왜? 아, 시간이 없다고? 시간을 만들어야지. 다 대화가 부족해서 그런 거야. 혹시 지금도 자살 생각 드니? 왜 자살하고 싶은 것 같아? 좀 마음을 편하게 먹어. 지금 잘 하고 있다며. 성적도 좋고, 원하는 대학교도 지금처럼만 하면 충분히 갈 수 있다고 들었는데. 너는 지금 너무 너 자신을 옥죄고 있잖아. 제가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이러겠어요? 지금 저희가 몇 살인지 아시잖아요. 열여덟이에요. 열여덟. 저희 하루 종일 기숙사에 갇혀서 선생님들이 그렇게 원하시는 공부만 하다가 기숙사에서 자요. 가족을 어떻게 만나요? 여기에서 거기까지 세 시간 거린데? 제가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 있었으면 이미 성인군자 되어서 여기 안 있었겠죠. 상담 받으러 갈 일도 없었을 테구요. 그렇게 말한다구요. 정말 특별할 것 없고 차라리 악이 될 말만 골라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구요. 내가 상담을 받아야 해요? 네?

ㅡ화야.

ㅡ상담 받는 게 안 받는 것보다 더 독이 되는 느낌이에요. 내가 상담 하는 거, 분명 녹음 안 되고 어디로도 발설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머니께 전화 갔다면서요. 왜 제 선에서 끝낼 수 있는 일을 부모님한테까지 말해서 일을 크게 만드세요. 상담자가 내담자를 불안하게 만들어요. 제가 불안하다구요. 무슨 말을 하면 그게 다 부모님 귀로 들어가는데 제가 뭘 더 말할 수 있겠어요? 뭘 더 바라세요?

화의 목소리가 높게 갈라졌다. 마치 절규와도 같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려고 부단히 애쓰고만 있는 것 같았다. 감정을 풀어놓지 않는다. 화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하나 확실히 알게 된 것은 그것뿐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데 능한, 천성이 유한 아이. 그런 화가 지금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과 언쟁하고 있다. 보통 학생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으나, 모범생이라고 불리는 화가 선생님에게 자신의 의견을 토하고 있다. 자신은 상담을 받지 않겠다면서.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둘 다 말을 멈춘 것이 틀림없었다. 저벅거리던 발걸음 소리가 내 앞에서 멈추었다.

ㅡ안 들어가고 뭐 해?

ㅡ아, 안녕하세요.

학생주임이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교무실 문 앞에서 알짱거리는 이 학년 여자아이를 보면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할 테였다. 나는 부러 교복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피했다. 고의로 피하는 것 같지 않게 조심하면서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잘못한 것은 없었는데,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ㅡ과학 선생님께서 이거 복사 해 오라고 하셔서요.

ㅡ곧 수업 시작이야. 오 분 정도 남았을걸?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교무실에서 다시 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문 너머에서 발생한 소음은 문의 작은 틈새를 지나 우리에게까지 도달했다. 학생주임은 눈을 찌푸리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은 여전히 아래를 향해 있었으나,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치맛자락을 몇 번 더 문지르고는 고개를 올렸다.

학생주임의 눈은 당황을 담고 있었다. 교무실에서 여태까지 이렇게 큰 소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일까.

ㅡ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온 신경은 굳게 닫힌 나무문 너머에 쏠려 있었으나 학생주임의 시선 때문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언쟁이 오갔고, 둘 다 목소리는 한껏 높아져 있었고,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지만,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한참이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학생주임이 나를 내려다보기 시작한 지 삼십 초도 안 되어 교무실 안이 잠잠해졌다. 마치 해일이 격정적으로 몰아치다가 모든 것을 삼켜 버린 것만 같았다.

 

화는 종종걸음으로 교무실 뒷문으로 나오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학생주임의 그림자 뒤에 나를 숨기고야 말았다. 어쩐지 미안해지는 것이었다.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화는 제 품에 제가 항상 지니고 다니던 노트와 펜을 꼭 끌어안고는 아래를 보며 계단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학생주임은 이미 들어간 것이었는지 시야 안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손목에 찬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삼 분 가량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지각 확정이었다.

교무실 안으로 몸을 들였다. 어쨌거나 내게 강제로 맡겨진 임무는 완수해야 했으므로. 교무실 안은 잠잠한 듯 보였으나 화가 한바탕 휩쓸고 간 잔재가 남아 있었다. 선생님들 사이에서 조용한 말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듣는 것을 애써 피하며 복사기 앞으로 다가갔다. 복사기가 윙윙대는 소리가 모든 소음을 먹어치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본 수 34를 누르는 손가락이 자꾸만 엇나가 취소 버튼을 몇 번이나 눌러야만 했다.

ㅡ화 걔, 왜 그런대요?

ㅡ요즘 좀 이상하지 않아요?

ㅡ성적은 그대로잖아요. 의대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던데, 이번 모의고사 성적 보면.

ㅡ근데 성격이 좀…….

복사기는 여전히 윙윙거리며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를 뱉어내고 있었다.

ㅡ이영 샘이 1학년 담임 아니었어요?

ㅡ그랬죠. 그래서 저희 반에서 매일 전교 일 등 나왔잖아요. 화, 일 학년 때는 괜찮았는데. 오히려 착하다고 소문났었잖아요. 다들 알지 않아요?

ㅡ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생님한테 저게 무슨 말버릇이야.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가 웅얼거렸다. 하얗게 쌓인 종이들의 행진이 끝나기만을 나는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던 학생주임이 끼어들었다.

ㅡ사정이 있었겠죠.

ㅡ그렇다고 선생님한테 대들어요?

ㅡ화가 좀 심했지. 어떻게 그렇게 악쓰면서 말할 생각을 한담. 배짱도 좋아.

선생. 먼저 선 자에 날 생 자를 써서 선생이랬다. 먼저 산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만큼 학생들에게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지혜를 나누어 주어야 할 사람들이었고, 그렇기에 하얀 종잇장을 먹물로 더럽히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도 중립을 유지해야 할 사람들이라고 했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의 인생에 손을 댄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나의 말로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법이었고, 생사를 결정할 수도 있는 법이었다. 더군다나 학생들은 아직 자아와 신념이 정착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그렇지만 지금 내 눈에 비친 선생이라는 작자들은, 그런 기미마저 보이지도 않았다.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동정과 연민인 척 하지만 실은 그 안에 사나운 들개 한 마리씩을 감추어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들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으면 그것을 풀어 사정없이 물어뜯는 것이었다. 중립이라고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저 한 사람의 희생양을 가운데에 두고, 자신이 받은 스트레스며 수치들을 몽땅 풀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복사기의 일이 끝나자마자 나는 복사된 과학 자료들을 품에 안고 교무실 문을 나섰다. 학생주임과 여타 선생들의 말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선생들은 학생주임을 개떼처럼 물어뜯고 있었고, 학생주임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문득, 학생주임을 학주라는 별명 대신 선생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종이 울리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과학은 교실에 없었고 나는 그 안에 세포의 구조에 관한 유인물을 전부 나누어 줄 수 있었다. 여러 세포 소기관들의 이름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나는 눈을 잠시 감았다. 저것들이 내 안에 여러 개 들어 있다니, 하고 생각을 잘근잘근 씹다가 문이 열렸을 때 다시 눈을 떴다. 빛이 너무 환하게 들어왔다. 점심 바로 직전의 시간이었다. 햇살이 분에 넘치게 찬연해서 나는 창문 쪽으로 설핏 다가가 살굿빛 커튼을 쳤다. 내가 자리에 돌아오기 바로 직전에 교실 문이 열렸다.

ㅡ전체 차렷. 선생님께 경례.

ㅡ안녕하세요.

ㅡ유는 다리에 모터를 달았나? 과학의 첫 마디에 아이들이 와하하 웃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ㅡ선생님께서 유인물 복사해 오라고 하셨잖아요.

어물어물 과학의 농담을 받아친 내 시선이 향한 곳은 교과서나 과학의 얼굴이 아니라 화였다. 화가 인사 구령을 붙일 때 목소리는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교무실에서 담임과 언쟁하던 그 목소리도 아니었다. 평소대로의 목소리였다. 과학 시간 내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화가 바로 내 앞에 앉아 있었고, 과학도 앞에서 설명하고 있었으므로 그다지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 터였다. 화는 전교 수석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손장난조차도 하지 않은 채로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ㅡ유야, 밥 먹으러 가야지.

ㅡ어? 어어.

ㅡ지금 안 가면 줄 엄청 늘걸?

ㅡ챙기고 있잖아. 해화, 하여튼 엄청 급하다니까.

농담조의 언어가 입에서 튀어나왔고 화는 언제나 그러했듯 웃고 있었다. 나는 과학 교과서를 덮고 노트와 함께 한쪽에 쌓아 두었다. 필통을 그 위에 올리며 나는 가자, 라고 입모양으로 말했고 화는 내 팔에 자신의 팔을 낀 채로 급식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ㅡ…….

우리 사이에는 잠시 말이 없었다. 화는 너무나도 평온해 보였고,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걸었다. 나는 화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다가 그만두었다. 언제나와 같은 유한 웃음이었다. 볕이 따스했다. 몸이 나른해지기 딱 좋은 날씨였다. 화는 나와 한쪽 팔을 공유한 채 걷고 있었다. 급식실로 향하는 회색 계단이 유난히 희게 눈부셨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04

문자가 온 것은 일정 이틀 전이었다. 사진 동아리 셔터에서 바다에 가자고 제안을 해 왔다. 갑작스러웠다. 삼 학년 선배들도 일 학기까지는 동아리 활동을 하는데, 어찌 되었든 고삼이었으므로 이제는 동아리 활동이 힘들 것 같다는 전언과 함께 마지막 동아리 출사를 남해로 가자고 했다. 익히 본 사진들이 굉장히 아름다웠기에 우리는 좋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화가 일 학년 후배들에게 문자를 돌렸고 학원을 가야 한다는 한 명만 빼고 우리는 모두 동아리 출사에 동참하기로 했다. 이번 출사가 유달리 특별했던 것이라면, 당일치기였던 지금까지의 여행과는 달리 일박이일로 계획한 점 정도였다.

ㅡ선배님들, 우리 이번 년도에는 문집 내는 게 어때요?

ㅡ문집?

ㅡ으응, 그러니까 사진집 말예요. 우리 매 해마다 사진은 엄청 찍어댔는데 제대로 된 결과물이 없어서요.

ㅡ비용 많이 들지 않을까?

화가 의견을 냈고 고속버스 뒷자리에 타고 있던 삼학년 기장 선배가 고개를 기울였다.

ㅡ알아보니까 그렇게 많이 들지는 않는 것 같더라구요. 출사를 일 학기랑 방학에 집중적으로 가서 사진 찍어 오고, 축제 때 팔면 아마 순이익도 조금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풀내음에서도 그러잖아요.

ㅡ풀내음? 아, 그 글 쓰는 동아리?

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ㅡ제가 총무라 얼마나 드는지는 대략적으로 알아요. 물론 저희는 사진이라서 조금 더 들겠지만……. 유가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은 만질 줄 아니까 표지나 속지 구성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ㅡ뭐, 우리는 더 이상 셔터에서 활동 안 하니까. 이번이 마지막 활동이잖아? 너희 이 학년이 잘 추진해 봐. 화가 알아서 잘 하겠지. 그렇지?

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뒷자리는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바닷바람이 숨결을 타고 들어왔다. 내내 내리고 있던 눈을 들었다. 바다 특유의 소금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햇빛을 반사한 모래가 연노랑과 분홍빛으로 감미롭게 빛나고 있었고, 하늘은 유유히 구름이 떠도는 가운데 말간 물빛을 띠고 있었다. 바다는 연한 청빛에 가까운 색을 내보였다. 지상 낙원이라고 불려도 부족함이 없을 만했다. 토요일 낮이었기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우리는 해안가를 따라 펼쳐진 길을 걷다가 백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삼학년 선배들은 나름대로 각자에게 주어진 마지막 휴식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마 이 시간이 지나면 전부 공부에 매진하고자 학교 본관과 기숙사 이외에는 어디도 나가지 않을 것이다. 특히 서울대학교를 노리고 있는 선배들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짧고 어두운 그림자가 점점 길어질 테다. 눈을 감았다. 우리도 이제 일 년 밖에 남지 않았다. 정확히는, 일 년도 남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화를 바라보았다. 화는 이미 신발을 벗어 백사장 위쪽 돌에 가지런히 놓아두고는, 맨발로 모래 위에 서 있었다. 뒷모습이 약했다. 쓰러질 것만 같았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렸다. 가만히 백사장 위에서, 바다 저 끝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었다. 신발과 카메라를 조금 큰 돌 위에 얌전히 올려두었다. 가만 보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있었다. 모래장난을 하는 일학년들과, 아직은 차가운 물에 서로를 빠뜨리려는 삼학년들, 그리고 함께 걸으며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는 이학년들. 모래 위에 새겨진 신발자국 위에 맨발자국이 겹쳤다. 조금 더 작은 발자국이 들어맞았다.

ㅡ무슨 생각 해?

화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이 내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답답하리만치 유하고 선한 웃음을 다시 내걸었다. 먼저 눈이 커진다. 곧 입꼬리부터 위로 끌어올린다. 보조개가 움푹 파이고, 그다지 많이 튀어나오지 않은 광대까지 올라가면 눈이 희미해진다. 초승달 모양으로 눈이 변하면 눈매가 유하게 접힌다. 살짝 벌어진 입의 그 작은 틈새로 안도의 숨이 뱉어진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정말 짧은 시간 안에 벌어진다. 찰나의 일이다.

ㅡ으응, 그냥 이것저것.

ㅡ이것저것?

ㅡ오랜만에 바다 보니까 좋아서.

그 말을 끝으로 우리 사이에는 긴 정적이 흘렀다. 화의 시선은 저 바다에 머물러 있었고 나의 시선은 발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모래에 닿았다. 정적이라기보다는 물과 바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완연한 봄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하늘과 바람과 바다와 모래만 바라보고 있었다.

ㅡ너 글 썼었어?

다시 물음을 뱉어낸 건 나였다.

ㅡ으응, 뭐 그런 셈이지.

화는 어물어물 넘어가려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눈을 올려 화를 그대로 바라보았다. 화의 눈은 여전히 넘실대는 바닷물에 고정되어 있었다.

ㅡ언제부터?

ㅡ중학교…… 삼 학년 때부터? 삼 학년 올라갈 때부터. 이제 삼 년 째네.

ㅡ그랬구나. 몰랐어.

모르고 있었다. 화가 글을 쓴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화가 부러 말해주지 않았는가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마다 어딘가를 가느라고 함께 밥을 먹지 못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수요일마다 네 명의 아이들이 있는 무리와 함께 밥을 먹었는데, 풀내음 모임 때문일 테였다. 우리 학교에 있는 글 쓰는 동아리는 수요일마다 모인다고 했었으니까.

ㅡ재미있어?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재미있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화의 보고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화는 나에게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야기해봤자 양서 정도였다. 글 쓴다는 사실을 모를 수밖에 없었을 테였다.

화의 눈이 일순간 반짝인 것도 같았다. 웃음이 짙어졌다.

화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모든 대답을 대신했다.

 

ㅡ사진 찍을까?

ㅡ응?

화가 잠시 의문형으로 말끝을 올리더니 이내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를 자각한 듯이 아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어색한 웃음이 스쳤다. 나는 내가 카메라를 놓고 온 돌을 눈으로 가리켰다. 화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걸음을 옮겼다. 모래의 감촉이 발을 감쌌다. 우리는 카메라를 곧 손에 들었고 풍경 이곳저곳을 찍기 시작했다.

바다와 하늘과 백사장의 조화부터, 바다 저편에 덩그러니 서 있는 섬, 발을 안고 있는 모래의 온기, 물이 밀려오다가 모래를 적시고 다시 밀려나가는 순간, 하늘에서 흘러가고 있는 구름, 바다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는 몇 그루의 나무들. 하나둘 보이지 않던 광경이 눈에 잡혔다. 조금이라도 더 이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 계속해서 셔터를 눌렀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출사를 나온 이래 가장 황홀한 광경들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카메라를 놓칠 뻔하며 아슬아슬하게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풍경만 담을 것이 아니었다. 바다 옆에서, 해안을 따라 소리 지르고 까르르 웃으며 어린아이마냥 천진하게 웃고 있는 우리들이 있었다. 나는 카메라 렌즈를 그쪽으로 돌렸다. 풍경 사진은 나 말고도 다른 부원들이 많이 찍어 올 테였다. 우리의 목적이 그것이었으므로. 나는 셔터를 눌렀다. 열댓 명의 사람들이 그 안에 담겼다. 정지된 화면이었으나 그것마저도 아름다웠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마다 하나의 추억이 남았다. 하나의 추억이 그림으로 남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이 남고 있었다. 나는 다른 사진들도 찍으려 몸을 돌렸다. 화가 카메라 렌즈에 들어왔다. 화의 카메라도 우리들을 찍고 있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우리의 순간을 담고 있었다. 화의 카메라 렌즈가 내 쪽으로 돌았고, 나는 그 순간 셔터를 눌렀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봄의 화창하던 날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방 안의 온기만이 봄이었다는 것을 일러 주고 있었다. 그마저도 밤이 되자 기온이 낮아져 보일러를 틀어야만 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을 즐기고 있었다. 삼학년은 삼학년대로, 이학년은 이학년대로, 일학년은 일학년대로 각자의 마지막을 즐기고 있었다.

시간이 돌았다. 천장이 돌았다. 우리는 모두 호기심에서 출발했으나, 패배의 쓴맛을 한 번 느낀 혀는 깊게 말려들어가 쉽게는 펴지지 않는 법이다. 일학년들을 제외한 이학년과 삼학년은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모를 술병을 내놓았다. 모두 처음이었고, 모두 어리숙했다. 선배들도 몇 잔 입에 대지 못하고 곯아떨어졌다. 어른과 아이의 경계선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어른의 세계를 엿본 것이었다.

절제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음에 감사하다고, 나는 하늘에 진심으로 감사 기도를 드렸다. 비록 옷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아무데나 이불을 펴고 자고 있었다지만, 남자선배 여자선배 할 것 없이 마무리 청소를 했고, 그로 인해 우리가 잡은 방은 상당히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비록 술 냄새가 빠지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아무도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일학년들은 옆방에서 이미 자고 있었고, 하나둘씩 방으로 들어가 잠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와글와글한 분위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동아리 부원들 모두가 바닥에 이불을 깔고, 덮고 누워 있었다. 나 이외에는 깨어 있는 사람이 없었을 테였다. 나는 오늘 찍은 사진을 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하나같이 즐거운 사진들뿐이었다. 모두가 웃고 있었고,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비가 쏟아져 와르르 피하는 장면조차 유쾌함이 녹아 있었다. 삼학년 기장 선배는 부기장 선배를 잡고 바다에 빠트리고 있었다. 여자라고 봐주는 일 따위는 없었다. 바다에 빠진 부기장 선배도 웃고 있었다. 기장 선배도 곧이어 바다에 빠졌다. 두 명이 무리에서 이탈했는데, 기류가 심상치 않았던 이학년 여자애 하나, 남자애 하나였다. 둘은 손을 잡고 있었다. 혹여나 들킬까, 카메라 줌을 해서 찍었기에 흔들린 사진들이 몇 장 나왔다. 그림자가 늘어서 있는 사진도 있었다. 달리기를 하는 사진, 나이가 몇인데 모래성을 짓는 사진, 그것을 또 부수는 사진. 여러 사진들이 한데 모여 오늘 하루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나의 시선으로 본 오늘이 오롯이 기록되어 있었다.

화도 있었다. 카메라를 든 모습이 가장 많았지만, 언제부턴가는 카메라를 놓아두고 혼자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뒷모습을 찍어 두었다. 막연히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사진이었다. 곧게 펴진 허리와 적당히 날리는 머리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늘 입고 온 옷의 색이 굉장히 바다와 잘 어울려서, 어딘가에 바로 제출해도 손색없을 만한 작품이 나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가 위태로워 보였다. 내내 그렇게 보이는 것은 내 착각뿐이었을 테였다.

 

화가 없어졌었다는 것을 안 것은 아이러닉하게도 화가 돌아온 시각이었다. 시계는 더 이상 돌지 않았고, 가만히 두 시 삼 분 전을 가리키는 분침과 시침이 화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비가 그치지 않은 것이었을까. 화의 온몸이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화는 모처럼 차려입고 나온 것 같아 보이는 흰색 블라우스와 분홍색 치마를 온통 빗물로 적시고 있는 채였다. 머리카락은 물에 젖어 갸름한 얼굴에 착 달라붙었고, 블라우스는 속이 비쳐 조금만 움직여도 속옷이 보일 지경이었다. 화의 뒤로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닫혔다. 빗소리가 줄어들었다. 화는 얼어붙은 듯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시간이 멈추었다. 나도 따라 숨을 멈췄다.

어디에 다녀온 것이었을까. 두 시가 가까이 된 이 시각에 비를 맞으며 대체 어디에 다녀온 것이었을까. 그것보다도 화가 없어진 것을 알지 못했다. 내가 언제 화를 마지막으로 봤더라? 사진을 함께 찍고 웃을 때도 화는 있었고, 선배들이 술을 권하는데도 고개를 저을 때도 화는 있었다. 일학년들에게 들어가 자라고 할 때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일을 화가 특유의 웃음으로 해결했기 때문에. 그리고 동아리 부원들끼리 게임을 할 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운 상태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화를 붙잡고 어디에 다녀왔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의 화는 사진 속의 화보다 몇 배는 더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그저 목구멍으로 파장을 삼켜내고만 있었다.

화의 스커트 끝자락에서 방울져 내리던 빗물이 흔들렸다. 화는 젖은 손을 느릿하게 움직여, 제가 가져온 분홍색 줄무늬 캐리어에 손을 뻗었다. 불이 켜져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자연스럽게 캐리어를 뒤적이고 있었다. 밖에서 어둠에 길들여져 온 탓이었을까. 마치 노련한 사냥꾼이 눈을 감고도 자신의 탄환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처럼, 캐리어에서 속옷과 회색 후드 티셔츠, 그리고 검은색의 트레이닝복 바지를 손에 움켜쥐었다. 화는 주위를 한 번 빙 둘러보았다. 나는 어쩐지 자는 척을 해야 할 것만 같아, 이불을 끌어안고 숨을 죽였다.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화는 가만히 주변을 살피다가 비틀거리면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살갗이 스치는 소리와 옷이 맞닿는 소리가 적막 속에서 선명히 들렸다. 소리마다 빗물에 적셔진 소리였고, 빗물마다 바다 냄새가 묻어 있었다. 화에게서는 바다 냄새가 났다.

 

05

화는 문학을 줄곧 빌려 읽곤 했다. 그러고 보면 글을 쓰는 사람에 있어서는 당연한 이치였다. 문학과 시, 그리고 일반사회 서적을 주로 읽곤 했는데, 이것은 가끔 화가 이과 학생임을 망각하게끔 만들었다. 화가 글을 쓴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화가 빌려 읽는 책의 작가들을 눈여겨보았다. 화는 다양하게 읽고 있었다. 윤동주나 서정주와 같은 근대 시인들부터 황지우, 기형도, 신경림과 같은 현대 시인들까지 두루 읽고 있었다. 소설도 가리는 작가가 없었다. 외국문학보다는 한국문학을 선호하는 것 같아 보였으나, 그것은 순전히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내가 도서관 안에서 문득 문학에 대해 물었을 때도 화는 부정하지 않았다.

ㅡ그렇긴 해. 확실히 한국문학을 더 많이 읽으니까.

ㅡ왜?

화는 당연하다는 투로 말을 뱉고 있었다. 도서관에는 아무도 없었고 조금의 잡담 정도는 허용되었다. 도서관 안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차라리 도서관 옆에 딸린 열람실 쪽이 책을 보는 장소로는 더 나았다.

ㅡ우리가 한국어를 쓰니까.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화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열심히 작가들의 이름과 소설들의 표지를 한 손으로 쓸며 빌릴 책을 고르고 있던 화가 김진명 작가의 책 한 권을 뽑아 제 팔에 안았다. 내 쪽을 바라보고서야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화는 다시 찬찬히 공기를 흘려내었다.

ㅡ내가 글을 쓰려면 여러 작가들의 문체를 보고 배울 필요가 있어.

ㅡ그렇지.

ㅡ그런데 영미문학이나, 다른 세계문학들은 전부 다른 번역가들이 번역한 책이지?

나는 고개만 가만히 주억거렸다.

ㅡ그럼 전부 번역체가 되는 건데, 번역체는 우리나라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들이 꽤 있어. 내가 고등학생인데, 고등학생 눈에도 보이는 자잘한 실수들이 적은 게 아니면 얼마나 많은 문법적 오류가 있다는 소리야. 그런 오류들에 많이 노출되다 보면, 나도 자연스럽게 그 오류들을 닮아가게 된다구.

너는 평범한 고등학생이 아니잖아, 라는 소리를 가만히 삼켜야만 했다. 물론 화의 의견을 존중하기도 했지만, 조금 더 화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화가 입을 다물어 버릴 것이 틀림없었기에, 나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ㅡ게다가 나는 한국문학을 쓸 거잖아. 한글로 문학을 쓰려면 여러 작가들의 천재적인 표현들이나 문체들, 그리고 한국어를 어떻게 구사해야 보다 마음에 확 와 닿게 할 수 있는지를 배워야 하는데, 그게 한국문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단 말이야. 물론 외국문학도 읽기는 해. 그 문학들의 줄거리가 굉장히 탄탄한 경우가 많거든.

화가 옆 칸으로 옮겨 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화가 다시 입을 열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화는 아무 말 없이 섬세하지만 날카로운 눈빛으로 책 한 권을 뽑아 차르륵 소리가 나도록 넘겨보았다. 오래 묵은 종이 냄새와 새 종이 냄새가 섞였다. 각자의 책은 각자의 향기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 향기가 좋아서 책을 읽는 편이었다. 책장을 넘길 때 와삭거리는 책장의 느낌도 좋아했다. 그래서 내가 읽는 책들의 종이는 절대로 과하게 두껍거나 얇지 않았다.

ㅡ그래서? 오래간 이어진 침묵을 참지 못하고 다시 내가 이야기를 꺼냈다. 화는 세 번째 책으로 같은 과정을 반복하더니 김진명 저의 책 위에 와인색 커버로 둘러싸여 있는 책 한 권을 얹었다. 언뜻 보니 시집 같았다.

ㅡ그래서 외국문학은 줄거리를 중심으로 봐. 그리고 이국적인 표현들 같은 것도. 보통은 원서로 읽지. 그럼 외국 작가의 문체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거든. 한국문학은 문체나 표현방식을 중요하게 보는 편이야. 미문을 추구하는 건 아니지만, 참신하게 비유한 시나 소설들이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많더라구.

도서관 사서에게 책과 학생증을 건네준 후 화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속삭였다. 화의 목소리가 바코드 찍는 소리와 섞여 더 작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ㅡ그러면서 배우는 거니까.

 

우리는 항상 밥을 먹고 난 후에 도서관에 갔다. 글을 쓰는 취미는 같지 않다고 해도, 둘 다 글을 읽는 행위 자체를 좋아했기 때문에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도 함께 도서관에 가곤 했다. 물론 오케스트라 연습이 있는 하루와 화가 풀내음에 글을 쓰러 가는 하루는 제하고서였다. 밥을 먹기 전에 도서관에 가면 밥 때를 놓치는 경우가 왕왕 있었고, 어찌어찌 간다고 해도 밥이 동나 있을 때도 적잖았다. 한 시간 반 정도 되는 점심시간에 우리가 도서관에 가면, 우리는 책 속에 푹 빠져들어서, 밥을 먹는 시간조차 아까울 판이었다. 그럴 때는 사천 원 정도 하는 급식을 포기하고선 책을 읽는 즐거움을 품곤 했다. 확실히, 우리가 다른 학생들과 같지는 않았다.

밥을 최대한 빨리 먹고 도서관에 가면 책 읽을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였다. 일학년 때는 사십 분도 감사해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책을 읽어나갔는데, 이학년이 되면서 급식을 먹는 시간이 다소 빨라졌고, 우리는 그에 따라 급식을 먹고도 여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화는 책을 고르는 시간이 느린 편이었다. 종이의 냄새와, 재질과, 표지만 보고 냉큼 책을 고르는 나와는 달랐다. 제목과 작가를 먼저 읽고, 종이를 다소 빠르게 넘기며 훑어 읽은 다음 자신의 마음에 드는 책이 나올 때까지 책장 사이에서 나올 마음을 먹지 않았다. 화와 나는 관심 분야가 비슷해서 항상 비슷한 곳에서 책을 골랐는데, 무슨 일인지 화가 800번대 책꽂이 근처에 보이질 않았다.

ㅡ여기서 뭘 해?

ㅡ책 고르는데?

너무도 당연하다는 말투로 소리를 뱉어내며 나를 바라보는 화는 의외로 200번대 심리학 쪽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화의 손에는 이미 두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위에 있는 책이 두꺼웠다. 심리학에 관하여. 이름만 들어도 딱딱하고, 재미없어 보이고, 게다가 비문학의 향을 강하게 풍기고 있는 책이 화의 손에 들려 있었다. 내 표정이 어떨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화가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내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슬 기울였다.

ㅡ왜?

ㅡ아니, 그냥 좀 의외라서….

나는 부러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화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자 내가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ㅡ너 항상 문학이나 작법서나 일반사회 같은 것만 읽었잖아. 아니면 시. 근데 왜 갑자기 심리학?

ㅡ아.

화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툭 하고 말을 내뱉었다.

ㅡ문학상 준비하는데 필요해서. 심리학 관련해서 쓸 예정이거든.

ㅡ문학상? 공모전 같은 거야?

ㅡ비슷해.

화의 눈이 다시 책장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화가 손을 뻗어 조금은 큰 베이지색 커버의 책을 꺼냈다.

ㅡ제대로 쓸 건가 보네.

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자신은 제대로 쓰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듯이. 약간의 자부심도 함께하고 있는 것 같았다.

ㅡ우리 세 권 대출 가능해? 두 권이 한도 아니었어?

말마따나, 화가 들고 있는 책은 세 권이었다. 두 권까지 대출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대출 한도는 일주일. 도서부라면 다섯 권까지 빌릴 수 있겠지만, 화와 나는 둘 다 도서부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다.

ㅡ응. 두 권 까진데?

ㅡ너 지금 세 권 들고 있는 것 같은데.

ㅡ아, 이거?

화는 맨 아래쪽에 있는 책을 가까스로 빼내어 위쪽으로 올렸다. 책 몇 권이 휘청였다. 학교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책이라면 반드시 붙어 있어야 할 바코드가 없었다. 나는 시선을 잠시 세 권의 책에 번갈아 주었다가, 화의 눈을 바라보았다.

ㅡ이거 학교 도서관 책 아니야.

간결하게 결론지어지는 탓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도서관 밖 벤치로 나갔다. 줄곧 도서관 안에서 책을 읽어 왔지만 봄이 만개하고 있었고, 옅은 구름이 해를 살짝 가리고 있어 햇빛도 그리 강하지 않았으며, 공기는 따스했기에 이런 날에는 벤치에서 읽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시끄럽지 않아서 곧 우리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집어든 책은 <우비>였는데, 어쩌다 보니까 첫 문장부터 나는 결말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진부한 이야기일 테였다.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는 아이와 그것을 채워나가려는 한 남자.

즐겁지 않은 책을 읽는 것은 즐겁지 않은 법이다. 나는 <우비>를 덮었다. 종이의 질감이 손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눈을 돌리자 심리학 도서를 읽고 있는 화가 있었다. 화의 손이 종이를 팔락이며 넘겼다. 본디 속독을 하는 화인데 어쩐 일인지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자신이 들고 있는 노트에 몇 자를 끼적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화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화의 치맛자락 위를 살짝 누르고 있는 책 두 권에 시선을 옮겼다. 화가 도서관에서 빌리지 않았다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은 잿빛이었는데, 어딘가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잿빛은 하나의 잿빛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콜라주 작품 같이, 흰색을 더 많이 품고 있는 회색도 있었고,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회색도 있었는데, 그것들은 대개 투명도를 높인 색들을 여러 겹 중첩시켜 놓은 것 같았다. 책은 단지 회색만 띄고 있지 않았다. 바다와 벚꽃 색을 동시에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책의 가운데에는 ‘숨’이라는 흰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 아래에는 긴 흰색 줄이 글자를 받치고 있었고, 줄을 따라 우리는 모두 살아있었다.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책을 집어들었다. 화가 내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ㅡ이거 봐도 되지?

화가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책이었다. 지은이도, 그린이도 없었다. 출판 표시도 없었다. 작가를 알 수 있을 만한 표시는 아무것도 없었다.

ㅡ화야, 이거 어디서 났어?

ㅡ그거? 주웠는데.

도서관에서와 같이 간결한 말투였다. 화는 책을 읽을 때면 으레 그렇게 변하곤 했다. 책의 세계에 빠져서, 자신을 그 안의 주인공에 투영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절정에 달한 소설을 읽고 있을 때 화에게 말을 걸면 아예 대꾸를 하지 않거나 짜증을 내곤 했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나는 책 표지와 함께 몇 장을 넘겼다.

 

*

인적이 드문 길가는 한적하다 못해 싸늘한 느낌까지 내뿜는 것이 일상이었다. 광장이라는 이름값도 없이, 본디 사람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아 먼지가 쌓여 있을 것만 같았건만, 오늘은 무슨 일인지 와글와글한 소음이 공기를 메우고 있었다. 엄청난 인파들이 켜켜이 쌓인 나뭇단 근처를 빙 둘렀다. 가장 밀도가 낮은 곳은 나뭇단 바로 옆이었다. 보이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관례였는지, 이 무더운 날씨에도 완전무장을 한 경비병들이 나뭇단 사방을 지키고 있었고 그 안에는 무엇도 없었다.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죽음의 땅과도 같았다.

당도하는 모든 이들은 둘 중 하나였다. 구원자이거나, 아니면 사탄이거나.

 

ㅡ온다!

한 남자의 고함은 그곳에 몰린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묻힐 법도 했지만, 귀신같이 알아들은 옆 사람들의 돌림 노래에 의해 퍼져나갔다. 온다, 온다! 모든 사람이 그리 외치고 있었다. 상류층은 그늘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고,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어머니 치맛자락을 꼭 잡고 있었다. 왜 어린아이들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지는 모를 수 없는 일이었다. 군주께서 그리 명령을 내렸으니, 아이들과 노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이 광장에 몰려 있는 셈이었다.

모세의 기적이 펼쳐지듯 길이 갈라졌다. 북새통 같았던 광장이 양쪽으로 갈라지더니, 그 안으로 세 사람이 들어왔다. 둘은 중무장한 경비병이었고, 하나는 앳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더러워진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차라리 입지 않는 편이 나아 보일만한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앙상한 몸을 겨우 가릴 만했다. 소녀의 팔은 붉게 부어오른 채로 몸에 묶여 있었다. 결코 튼튼하지는 않았으나, 약해진 소녀의 몸을 결박하기에는 충분했다. 소녀의 살갗은 나이에 맞지 않게 여기저기가 벗겨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마치 불에 탄 듯이 그을려 있었고, 그 아래에 자리한 눈은 제대로 뜨지도 못할 정도였다. 얼굴 이곳저곳에 긁힌 자국과 벌겋게 부어오른 자국이 있었다. 목부터 시작하여 팔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화상 자국은 분명 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을 테였다. 화상을 입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이 물집이 이리저리 터지고 쓸렸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자욱이 온몸을 덮고 있었다. 소녀는 제대로 걷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경비병은 소녀를 거의 끌다시피 하며 걷고 있었다.

ㅡ마녀다, 마녀!

ㅡ죽여! 죽여라!

소리치는 사람들은 단 몇 명이었으나, 그것은 곧 온 세계를 울리는 메아리가 되어 광장을 붉게 물들였다. 경비병들은 호응에 맞추려는 듯 소녀가 묶여 있는 줄을 세게 잡아당겼다. 소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곧 부러질 것만 같은 소녀의 표정은 무력에 가까웠다.

 

아우성이 잠잠해졌다. 소녀의 바들거리는 다리가 쌓아올린 나뭇단을 오르고 있었다. 배려란 없었다. 소녀가 올라가지 못하면 가차 없이 소녀의 머리를 후려치는 것이었다. 억센 손에 소녀가 스러졌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더 이상 상처가 남을 수도 없어 보이는 붉은 다리에 또 다른 붉은 줄 몇 겹이 그어졌다. 피가 타오르고 있었다. 해가 타오르고 있었다. 소녀는 기어이 나뭇단 위에 올라갔고, 뒤따라 올라간 경비병이 우뚝 선 나무 기둥에 소녀를 단단히 묶었다. 그리 단단히 묶지 않더라도 도망칠 수 없을 테였지만,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묶인 소녀의 몸에는 일말의 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종이 울렸다.

불이 붙었다.

모든 것을 삼키고 있었다.

나무의 밑단부터 시작한 불길은 위로, 위로 올라갔다. 소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소녀의 목이 뻣뻣해졌다. 제 몸 하나도 지킬 수 없는 제가 한심스러웠을 테였다. 제 동생이 어떻게 될지는 소녀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불 속에서 소녀는 끝끝내 울지 않으려 버텼다. 어딘가에서 제 동생이 이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을 테였다. 자신의 언니가 힘없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테였다. 극악무도한 경비병들은, 동생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아무리 목이 터져라 울어제낀다 해도 머리를 화형대 쪽으로 돌리고 똑똑히 보라며 윽박지를 테였다. 소녀 자신은 울 수 없었다.

소녀의 발끝에 불이 닿았다. 맨발을 불길이 휩쌌다. 나무를 파먹으며 불길은 소녀가 묶인 나무 기둥 위로 치솟고 있었다. 불은 소녀를 녹이고 있었다. 모든 것을 녹이고 있었다. 흰 옷에 불이 옮겨 붙었고, 살갗에 가해지는 타는 고통을 소녀는 고스란히 감수해야만 했다. 소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음 한 번, 울음 한 번 내지 않았다. 내지 못했다. 소녀의 눈에 가까스로 제 동생이 담겼다. 경비병이 동생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고, 동생은 제 언니가 사라져 가는 것을 모조리 보아야만 했다. 소녀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지었다. 동생과 눈이 마주친 그 순간까지.

불길이 동생과 소녀 자신을 완전히 가로막자, 나무 타는 소리 외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소녀는 소리 없는 울음을 터트렸다. 눈에서 나온 눈물이 시원할 지경이었다. 소녀는 허파에 바람을 한껏 불어넣고, 입 안의 살을 잘근거리며 숨을 기어이 토해내었다. 그것뿐이었다. 재뿐이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생명과 다른 한 사람의 삶을 빼앗아 간 처참한 사건이었으나, 단지 온 나라의 소녀들이 말살당할 전조에 불과하지 않았다.

*

 

<마녀사냥>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단편 소설이었다. 전조에 불과하지 않았다, 는 말이 내내 생각나리만치 가혹하고 잔인한 장면이 펼쳐졌다. 잔인하다는 말을 넘어 잔혹동화를 연상시킬 만큼 아픈 소설이었다. 그러면서도 다음으로 펼쳐지는 장면들 하나하나가 흡입력을 강하게 지니고 있어, 소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을의 모든 소녀들이 사라지는 과정은 잔혹했지만, 충분히 있음직했다. 중세 시대의 마녀사냥이라는 소재와 폐쇄된 마을, 그리고 그 당시 권력에 의한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 제3자의 시선과 동생의 시선으로 번갈아 가며 풀어나가지는 이야기는 아픔을 담고 있었다. 잔혹하리만치 잔뜩.

<숨>은 단편선이었다. 몇 선의 단편이 함께 실려 있었는데, 내가 읽은 <마녀사냥>이 첫 소설이었고, <인간방패>가 마지막이었다. 각각의 단편은 오십 쪽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고, 여섯 개의 단편과 몇 개의 짤막한 조각글들이 엮여 있는 책이었다. 모든 소설들이 하나같이 잔혹했고, 아팠고, 병들어 있었다.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갈구했지만, 해피엔딩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있었던 한 시간 가량, 그리고 교실에 돌아와서 한 시간 가량을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자습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수업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나는 활자의 나열에 몰입하고 있었다.

ㅡ이거 읽어 봤어? 쉬는 시간이 되자, 나는 화에게 책을 건네주었다. 흥분된 목소리가 책에 묻어 있었다. 화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ㅡ응. 왜?

ㅡ이거 마지막 글 엄청 좋아.

ㅡ그, <인간방패>였던가?

이번에 고개를 끄덕이는 쪽은 나였다. 나는 격양된 목소리로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참 오랜만이었다. 그렇지만, 스리랑카 지역의 내전에서 발생하는 인간방패와 현 시대를 살아가는 고등학생들을 엮어 이야기를 풀어나간 것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발상이었다. 전쟁 중 비무장 민간인을 공격지점에 내세워, 정부군과 반군에게 모두 공격당해 무차별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인간방패들. 눈을 한 번 감고, 몇 초 뒤에 뜨면 화자가 어린아이에서 고등학생으로 바뀌어 있고, 고등학생에서 다시 어린아이로 바뀌어 있다. 하나의 자아가 분열한다. 한국 사회의 입시 제도에 찌들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공부만 죽을 듯이 하는 제 일의 자아와, 인간방패들 사이에 서서 자신의 부모님을 제발 죽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제 이의 자아. 두 개의 자아가 만나 스스로를 죽여 가는 과정이 황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ㅡ고 나는 말을 쏟아내었다.

화는 그저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라면 함께 웃으며 조곤조곤하면서도 기어이 제 할 말을 전부 해낼 테였지만 오늘은 말이 없었다.

ㅡ읽었다고 하지 않았어?

ㅡ읽었지.

ㅡ네 마음에는 안 들었나 보네.

화는 고개를 기울이다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ㅡ괜찮았어. 요즘 읽은 것 중에서는, 뭐.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어쨌거나 화는 지금 책을 읽고 있었기에, 한 마디라도 더 했다가는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화는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그저 제가 보고 있는 책을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나는 화가 읽고 있는 책의 표지를 힐끗 보았다. 미술심리학이었다. 화가 먼저 말을 꺼냈다. 책을 읽는 도중 먼저 내게 말을 거는 것은 퍽 드문 일이었기에, 나는 화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ㅡ영악한 아이들이 있데.

ㅡ응?

ㅡ사실 정말 상담이 필요한 아이들인데, 자발적으로 치료를 거부해 버리는 거야. 그런 애들은 자신이 심리학 서적을 읽고 그거랑 반대로 행동한다고 하더라. 미술심리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래. 예를 들면, 검은색 계열의 무채색이랑 채도가 낮은 붉은색이 좌절이나 절망을 나타낸다면, 그 애들은 부러 노란색이나 하늘색으로 칠한다고 하더라고.

ㅡ똑똑하네.

그럼, 하고 화는 잠시 말이 없었다.

ㅡ그렇게 똑똑한데 왜 자기 자신 하나는 제대로 컨트롤 못 한대?

ㅡ아마 그게 더 어려운 거 아닐까. 오히려 똑똑해서 더 힘들 수도 있지 않을까….

화가 말꼬리를 흐렸다. 똑똑해서 자신을 다루기 더 힘들다, 라는 개념은 내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나는 손톱 언저리를 만지작거렸다. 손톱 옆에 달랑달랑 붙어 있는 눈칫밥 위를 손가락이 오고갔다. 보통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학생들이 모범생이라고 불리지 않았던가? 외려 통제가 안 되는 아이들이 문제아 내지는 위험 가능성이 높은 아이들이라고 불리지. 돌이켜 보면 늘 문제가 되는 이들은 규율을 어기거나, 무엇인가를 어지럽히는 아이들이었다. 최소한의 규율을 지킨 아이들은 누구에게도 제제를 받지 않았었다. 그런데 대체 왜 자신을 통제하기 어려울까.

나는 남은 하루 내내 그것만을 고민했으나,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06

나는 학교를 돌아다니기로 마음먹었다.

야간자율학습은 자율학습이 아니었다. 강제적으로 학생들을 끌어다가 의자에 앉혀 두고서는 원치도 않는 공부를 시킨다. 나가고 싶다고 해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험이 이주일 남았기 때문에, 학생들도 별다른 반항은 없었다. 선생님은 야자 감독이라는 칭호를 달고 소위 야자를 튄 학생들을 잡아들였다. 이게 무슨 자율학습이야. 강제학습이지.

게다가 심화반이라고 불리는 엘리트들의 모임은, 야자 시간부터 기자 시간까지 쭉 별도로 마련된 자습실에서 공부를 하는데, 화의 말로는 독서실 책상이 놓여 있고 한 방에 여섯 명씩 넣어서 독서실처럼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전교에서 십이 등 안에 들어야 심화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백 명 중 십이 등. 삼 프로. 전교에서 난다 긴다 하는 아이들만 모아두고 공부만 시키는 것이었다. 기숙사 불은 자정에 꺼지는데, 심화반의 불은 새벽 두 시에 꺼진다. 소등시간마저도 달랐다. 삼 프로. 삼 퍼센트면, 일등급이었고 우리 학교는 모의고사 수학 일등급이 전교생의 사분의 일을 넘는 무시무시한 학교였다.

 

나는 도둑고양이마냥 자리에서 살그머니 일어났다. 야간자율학습이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휴대폰을 손에 쥐기 위해 책상 속에 손을 넣자, 매끈한 파일이 만져졌다. 나는 그것도 함께 꺼낼까 말까 고민하다가, 홀몸으로 걷는 것보다야 무엇이든 지니고 있는 편이 낫겠다 싶어 파일을 끄집어내었다. 퍽 두툼했다. 분명 의자 끌리는 소리가 적막을 깼는데도 아무도, 어느 누구도 내 쪽에 시선을 던지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할 일만 열심히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뒷문을 조용히 열었다. 찬바람이 훅 들어왔다. 파일을 옆에 끼고, 휴대폰을 치마 주머니에 넣은 채로 문을 닫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 발을 내딛어 보았다. 터벅, 하는 재미없는 소리가 복도의 공기에 내려앉았다가 사라졌다. 나는 야자 시작 전 청소시간에 닦아 매끈해진 유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한 자리가 빈 채로 모두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다른 짓을 하고 있는 학생은 없었다. 모두 교복을 입고, 텀블러를 하나씩 책상 위에 올려둔 채로 샤프 하나씩을 쥐고 수학 문제며 국어 문제를 풀어제끼기에 바빴다.

로봇들 같았다. 잘 생산된 로봇들. 아무 생각도, 느낌도 없이 그저 하던 일을 반복하던 로봇들.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파오면서도 자신이 궁극적으로는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방패>의 제 일의 자아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목적도, 목표도 없이 오로지 대학을 가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제 일의 자아. 자신에게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옆에는 누가 있는지, 자신의 주위에는 무엇이 있는지,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항상 펜만 잡고 글자를 눈에 새기고 입을 달싹거리는 제 일의 자아.

 

나는 별종이었다. 일정 무리 이상이 되면 무리지어 절벽으로 떨어지는 쥐의 습성을 바탕으로 쓴 우화인 레밍 딜레마가 떠올랐다. 별종으로 취급받던 주인공은 대체 자신들이 왜 절벽 아래로 떨어져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친구들에게 물어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ㅡ우리는 레밍이니까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거야.

그것뿐이었다. 레밍들이 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지, 자신이 누구인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지만 별종은 별종 취급 받을 뿐이었다. 레밍 딜레마. 나는 지금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내가 누구인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게 묻고 있었고 단 하나의 답도 찾지 못했다. 다만 이 학교에 있는 그 누구도 이 고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만은 너무도 잘 알았다.

특별한 것도, 잘난 것도 없지만 나는 별종이었다.

 

나는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화가 보름 전쯤 했던 말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통제를 벗어나 보고 싶었다. 내가 나를 잘 통제할 수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 화의 말대로라면 자신을 잘 통제하는 사람들이 심리적으로는 외려 힘들다는 것이었고, 그것을 역으로 생각해 보면 자신을 잘 통제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심리적 압박에서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나는 계속 걸었다. 정말? 어째서? 어째서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느껴 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다른 반을 들여다보았다. 별다를 것 없었다. 로봇 여러 대가 각자 의자에 앉아 있었고, 기계적으로 교과서를 읽거나 정리를 하거나 문제를 풀어낼 뿐이었다. 하나하나를 관찰해 보았다. 앞자리 맨 끝에 앉은 학생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펜만 팽팽 돌리고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삼각함수의 미분 문제가 앞에 놓여 있었다. 지금 우리는 고등학교 이학년이었고 그것은 다음 학기에 배울 것이었다. 나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 옆에 앉은 학생은 국어 지문을 풀고 있었는데, 도무지 풀리지 않는다는 듯이 머리를 몇 번이나 긁적였다. 창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 가운데 줄에 앉은 학생은 전자사전으로 영단어 뜻을 찾아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심화반 앞에 다다라, 나는 이 광경을 훔쳐보아도 될까 하는 알량한 양심에 잠시 망설였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의 나는 레밍이 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을 다시 기억하고는 심화반의 작은 창문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심화반 안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안에 깔려 있는 적막과 무거운 공기와 살벌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피부에 닿는 것만 같았다. 여섯 명의 학생들은 빙 둘러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각자의 옆에는 자신의 앉은키보다 조금 더 높은 커튼이 각자 학생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위로 보인 문제들은 기하와 벡터 따위의 선행(先行)학습들 거리였다. 블랙라벨과 일등급수학이 보였다. 심화반 학생들은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풀어내고 있었다. 막힘이 없었다. 이쯤 되면 심화반은 그저 머리가 좋은 순으로 뽑힌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화도 그 안에 속해 있었다. 운 좋게도 내가 들여다보던 심화반은 이 학년 심화 A반이었으므로, 화는 그 안 맨 구석 자리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성적순으로 자리를 배치한다는 사실이 뚜렷이 드러났다. 전교 오 등까지는 모두 알고 있었기에 하나하나 눈으로 짚으며 얼굴과 이름을 맞추어 보았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잘 하고 있었다. 화는 펜을 돌리더니 곧 문제지 책장을 넘겼다.

결국, 화도 자신을 잘 통제할 줄 아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발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특유의 슬리퍼 끄는 소리는 선생님이라는 것을 빠르게 일깨워주었다. 나는 황급히 숨을 공간을 찾아보았으나, 화장실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파일을 꽉 쥐었다. 이왕이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원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듯이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모퉁이를 돈 발소리가 멈추었다. 두 눈이 나를 향했다.

학생주임이었다.

ㅡ야자 시간 아니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ㅡ왜 여기 나와 있어?

ㅡ선생님께서 유인물 좀 걷어 오라고 하셔서요.

순간 나는, 야자 하기 싫어서요, 라는 말을 뱉어내고만 싶었다. 그러면 속이 후련해질 것만 같았다. 나의 마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학생주임에게 반항과도 같은 것을, 한 번 정도는 해 보고 싶었다. 나는 레밍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렇지만 터져 나온 말은 정반대였다. 나는 어색해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면서 학생주임의 슬리퍼를 쳐다보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떨렸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현실과 타협했음에 울분을 토해내는 것일지도 몰랐고, 징계를 받을 것이라는 소극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몰랐다. 학생주임은 고개를 한쪽으로 움푹 기울이더니 이내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ㅡ고생해라.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어떤 선생님이 보내서 왔는지, 어떤 유인물을 걷어 왔는지, 오늘은 나누어 준 유인물이 없지 않았는지와 같은 질문들을 꼬치꼬치 하지 않고 그저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다른 선생님이었다면 학생이 그렇다고 야자 시간에 나와 있으면 안 되지, 로 시작해서 결국에는 너 벌점이야, 로 끝나는 설교를 적어도 이십 분 정도는 길게 늘어뜨렸을 것이었다. 그러나 학생주임은 나의 말을 온전히 믿었다. 믿었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알고 있던 것이었는지는 잘 구분이 가지 않는다.

선생님.

나는 다시 학생주임을 선생님이라고, 소리 내어 부르고 싶어졌다.

 

나는 레밍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는 레밍이었다. 본성이었다.

그리고 순간, 나는 학교를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교 교문에는 수위 아저씨가 버티고 있었다. 나는 월담을 했다. 학교 뒷문으로 나와, 본관에서 교문까지의 가파른 내리막길을 담을 타고 빙 돌아와서 여자 기숙사를 지나, 수위 아저씨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담을 넘었다. 내 키의 두 배 정도 되는 담이었으나, 울퉁불퉁하게 놓인 돌을 딛고 담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담은 처음 넘어 보는 것이었기에 두려웠으나 무사히 착지했다. 수위 아저씨가 무엇인가 낌새를 눈치 채고 나와 보기 전에 나는 이미 학교 근처에서 사라져 있었다.

저녁 일곱 시였다. 무지개가 하늘 전체를 거꾸로 덮고 있었다. 빛을 잃은 탁한 무지개였다. 나는 걸었다. 십 분이 지나자 세상은 완벽한 어둠으로 탈바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걸었다. 이 시간에 나와 있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물론 차가 다니기는 했다. 퇴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차는 막혔다. 그러나 교복 차림으로 당당하게 돌아다니는 학생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이곳은 아파트 숲이었다. 아파트가 나무처럼 높이 솟아 있는, 이곳은 아파트 숲이었다. 나는 숲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발길이 도착한 곳은 버스 정류장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현금 카드 대신 만 원 짜리 두 장이 잡혔다. 버스에 올랐다. 시외버스였다. 남해로 곧장 가는 시외버스였다. 버스 내부에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물론 버스를 타는 것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을 테였다. 아마 휴게소를 들린다면 두 시간 정도가 될 테였지만, 이곳에서 남해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셔터에서 남해로 출사를 갈 때 두 시간이 걸린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이곳은 아파트 숲이지마는 조금만 달리면 바다가 나올 테였다. 바다가.

 

버스 안에서 나의 적막을 처음 깬 것은 휴대폰이었다. 요란하게 제 몸을 떨고 있었다. 담임이었다. 나는 수신거부를 눌러 버렸다. 그 다음에는 여러 친구들이었다. 그것도 수신거부를 눌러 버렸다. 여러 선생님들한테서 전화가 왔지만 나는 모조리 수신거부를 택했다. 눈을 감았다. 화의 전화가 왔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빨간색 수화기를 옆으로 밀었다. 더 이상 나는 저 세계에서 오는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물론 화는 예외였지만, 지금은 담임이 함께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나는 아예 휴대폰 배터리를 본체에서 빼내어 버렸다.

나는 휴대폰을 파일 위에 내동댕이쳤다. 파일이 버스의 불빛을 반사해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파일을 손에 쥐었다. 무엇이 들어 있기에 이렇게 두툼하지? 나는 속을 들여다보았고 그제야 화가 오늘 완성했다던 원고를 처음으로 내게 주었던 것이 기억났다. 분명 점심시간이었다. 화는 그것이 문학상에 제출할 글이라고 했었다. 심리학에 관련된 책을 모조리 찾아 읽으며 썼던 글일 테였다. 물론 나는 화가 글 쓰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화는 모범생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범주 안에 들어있었으므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글을 쓰는 짓은 하지 않았다. 아마 풀내음에서 모일 때만 글을 썼을 테였다. 풀내음은 몇 주 전부터 수요일 점심시간뿐 아니라, 토요일과 일요일에 세 시간씩 모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 시간에는 모두 조용히 모여서 자신의 노트북이나 종이를 바라보며 글을 끼적인다고 그랬던 것도 같았다. 그 시간에 원고를 완성한 것일 테였다.

나는 원고를 꺼냈다. 아직 도착하려면 한 시간도 더 넘게 남았다. 에이포용지로 오십 장 남짓 되는 소설을 읽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원고는 스테이플러로 찍히지도 않을 만큼 두꺼웠다. 종이는 일반 종이와 달리 매끄러워 굉장히 질이 좋았다. 화의 원고는 클립에 얌전히 끼워져 있었다. 종이를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다가 겉표지를 넘겼다. 익숙한 문체를 읽어내려갔다.

 

*

나는 문을 잠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나를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수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형광등을 반사시켜 날카롭게 칼날이 빛났다. 선뜩해질 만도 했지만, 어째서인지 나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단지 아, 칼이구나, 라는 생각과 내가 곧 죽겠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무섭지 않았다. 내가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졌던 적이 있었던가? 누군가 내게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가만히 저을 것이었다. 차라리 지금 이 세상이 무서우면 무서웠지, 죽음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잃을 것이 없었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가만히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울어 줄 사람이 있을까? 내 무덤을 찾아 올 사람이 있을까? 그 전에, 시신을 수습할 수는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책상에 머리를 박고 혼자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는 울어 줄 사람도, 무덤을 찾아 올 사람도, 시신을 수습해 줄 사람도 없었다. 내가 만일 수업 중에 긴 칼을 꺼내, 가슴을 그대로 찔러 죽는다면 아마 잠시간 화제가 되긴 할 것이다. 수업시간에 선생님과 반 아이들 앞에서 자살한 아이로. 그렇지만 곧 잊힐 테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서, 잊고 싶은 것은 최대한 빨리 잊는 습성이 있는 법이니까.

외려 잘 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나는 소위 전교권에서 노는 아이였고, 학교에서 한 명씩만 받을 수 있는 학교장추천을 받을 유력한 후보였다. 삼학년까지 이 성적이 유지된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내 다음 등수가 학교장추천을 받을 수 있을 테고, 대학교 여러 군데를 넣을 수 있을 테고, 그 중 하나는 붙을 수 있을 테다. 그 아이도 못 하는 편은 아니니까. 나를 제외한 사람들의 등수는 한 등수씩 올라갈 테였고, 수행평가나 지필평가에서 가장 견제해야 할 대상이 사라질 테였다.

실은 나라도 내 앞의 누군가가 사라졌다면 잘 되었다고 생각했겠으니까.

 

손에 홍매화가 흐드러졌다. 손목에 방울져 내리는 홍매화가 내 눈을 아찔하게 잡아채었다. 칼을 쥔 손이 덜덜덜 떨렸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미칠 듯이 아팠지만, 이상하게도 아프다는 생각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괜찮았다. 이곳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내가 자로 재어져 소고기마냥 등급으로 나뉘어 평가받는 이곳에서 탈출할 수만 있다면. 이곳은 살아 있는 지옥이었고, 나는 형벌을 받는 죄수였다. 손목에서 펄떡거리는 맥박이 느껴졌다. 맥박에 맞추어 피가 꿀렁거리며 튀어나왔다. 새빨간 피가 온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문득 바다가 떠올랐다. 푸른색의 바다가. 나는 바다에서 죽고 싶었다. 꽃이 되어 바다에서 죽고 싶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꽃이 되어, 바다에 빠져 죽고 싶었다. 물에서 죽고 싶었다. 태초에 나는 물에서 태어났고, 물에서 지고 싶었다. 벚꽃이든, 동백이든, 홍매화든 상관없었다. 나는 바다에서 죽고 싶었다. 꽃이 지듯이, 그렇게 아름답게. 추락하는 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낙화하는 꽃은 얼마나 황홀한가! 그 광경이 내 눈 앞에 환영처럼 펼쳐지자 나는 미친 듯이 놀리던 손을 멈추고 벗어던져 놓았던 흰 반팔 티셔츠로 손목을 감쌌다.

 

자꾸만 발걸음이 휘청거렸다. 눈앞이 어지러워 몇 번이고 넘어졌다. 시야가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다가 완전히 닫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자정이 가까이 된 시각에 바다로 가는 도로를 따라 걷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도 검은 길을 따라 걸었다. 넘어져 뒹굴어 까진 여기저기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손목을 감아 둔 흰색 티셔츠가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토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다로 가야만 했다.

내가 바다로 가는 동안, 해안선을 따라 걸음을 옮기고, 절벽을 따라 가는 동안,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을 집어던질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모범생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내가 해야만 하는 것에 온 힘을 쏟는 그런 학생이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부정해야 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나는 학생이 아니었다. 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항상 잘 웃고 모든 일에 관대하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태생적인 완벽주의자가 아니었다. 나는 현명하지도, 지혜롭지도, 책임감이 있지도, 따뜻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그저 나는 나일 뿐이었다. 나는 나였다.

전라의 상태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옷을 입고 있었고 또 그 옷이 살갗에 스치는 것까지도 느낄 수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전라의 상태였다. 그저 바닷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절벽 위에 발을 올리면 위태롭게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나는 내 목숨을 버린 상태였다. 내가 고등학교의 그 밀폐된 공간에서 내가 사랑하는 것을 죽이고 부정하고 펜을 잡아 애써 그 생각을 눌러두었을 때부터 나는 죽어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을 죽여 놓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껍데기뿐이었다. 껍데기가 없어진다고 해서 그다지 별다를 건 없다. 이미 알맹이는 떠난 지 오래였으니까.

 

나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직감했는데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

 

나는 꽃이 되고 싶었다. 로 갈무리되는 이야기에 나는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한 번에 다 읽어 내려갔다. 자살은 민감한 주제였다.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작중의 소녀는 무너지고야 말았다. 그것이 왜인지 모르게 화와 겹쳐 보여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화와 소녀가 분리된다. 당연히 화가 썼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테라고, 나는 그리 생각했다. 작중에 자신의 성격이 반영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라고, 국어 시간에 작문을 하면서 배운 적이 있었다. 그래서 글을 보면 사람을 어느 정도는 평가할 수 있는 법이라고도 했다. 화와 소녀는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슴 한구석이 잔뜩 부풀어 올라 숨을 쉴 때마다 아파 오는 탓에 숨을 크게 쉬지 못했다.

 

바다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십 분 정도 후였다. 푹 빠져들어서 읽은 소설 덕에 시간은 금방 갔다.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왔기 때문에, 해가 진 후의 바다는 볼 수 없었다. 나는 홀린 듯이 바닷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때처럼 나는 신발을 벗었다. 스타킹이 거슬렸기에 스타킹도 벗어 내렸다. 어차피 치마를 입고 있었으니 상관없을 테였다. 모래가 차가웠다. 그 때의 따스한 모래와는 딴판이었다. 모래사장을 따라 걸었다. 분홍빛 모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눈을 들면, 그저 깊고 어둡게 출렁이는 바다만 존재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이 어두웠다. 검다. 검은 물이 일렁이고 있다. 이성을 잃고 달려들다가 끈에 매여 다시 끌려가는 파도가 순환한다. 다시 달려들고, 다시 한계점에 도달해 끌어내려진다. 비가 내리고 번개가 치는 것 같은 환영이 일렁인다.

나는 그것을 오래오래 보고 있었다. 마치 화가 그 날 밤에 그러했듯이.

 

07

나의 하루는 사라져 있었다. 내가 어떻게 그 곳에서 하루를 보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비척비척 걷는 나를 보고 인상 좋은 할머니 한 분께서 방을 내 주셨던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돈이 없다고 하자 괜찮다며 사람 좋게 웃으시던 그 분께서는 밤중에 잘 익은 고구마를 가져와서 내 손에 쥐여 주셨다. 먹지 않고 가만히 있자 할머니께서는 마치 보따리에서 이야기를 꺼내놓듯 옛날이야기를 풀었다. 왜인지 울었던 기억도 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일어나 보니 따스한 방 안이었고, 모든 기억이 방 안을 가득 메우자 나는 치마 주머니 속에 담겨 있던 펜을 꺼냈다. 파일은 그대로였다. 파일 뒤에서 이면지를 꺼내 짤막한 메모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무책임했다. 분명 얼굴을 뵙고 감사하다는 말을 꺼내야 할 테였는데, 그럴 수 없었다. 어쩌면 또 다시 울 것만 같다는 생각에 나는 재빨리 메모를 적어 내려갔다. 몇 번이고 얼굴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강하지 않은 형광등 빛이, 이곳은 집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갈 때의 짐은 얼마 없었다. 파일과 휴대폰이 전부였으니까. 그제야 나는 휴대폰에 얼마나 많은 연락이 왔을지 더럭 겁이 났지만 휴대폰을 켜 보려 들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레밍이 되어야 했고, 그것으로도 족했다. 방 안을 휘 둘러보았다. 온기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 나는 어젯밤처럼 눈을 감아 보았다. 가야 할 시간이다. 떠나야만 한다.

 

버스를 타고 오는 길은 생각보다 짧았다. 나에게서는 바다 냄새가 날 테였다. 바다 냄새를 교문에서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지각생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교실로 바로 향하지 않았다. 내 발걸음은 기숙사에 가까워졌고, 다행이도 점심시간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위에서는 남청색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저 학생들이 기숙사까지 내려오기 전에, 서둘러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기숙사 개방 시간이었던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관리실은 식사중이라는 문구를 내걸어 두고 있었고, 나는 학교를 빠져나올 때처럼 도둑고양이마냥 살금살금 차가운 계단을 올라갔다.

하루 보지 않았을 뿐인데 낯설게 느껴지는 공기가 사 층 기숙사를 전부 감싸고 있었다. 나는 괜히 소독서실을 기웃거리고, 기숙사 저 끝에서 이 끝까지 거닐다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 물건은 그대로였다. 무엇이든 하나 정도는 없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외려 당황할 만큼 그대로였다. 일단 나는 씻어야 했다. 부러 걸치고 나갔던 겉옷을 벗었다. 바다 냄새가 묻어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평화로운 방 안에서, 내 침대가 나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으로 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외려 할머니의 방 안이 더 따뜻했던 것 같기도 했다.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노트 하나를 주워들었다.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방바닥에 세탁바구니 이외 아무런 것도 놓을 수 없다는 사칙에 따르면, 곧바로 벌점감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노트를 펼쳤다. 검은 볼펜으로 빽빽한 줄글이었다. 날짜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일기장인 것 같았다. 어디서 많이 본 글씨체였다. 컴퓨터의 바탕체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글씨, 화의 글씨였다. 손이 잠시 떨렸다.

나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화가 글을 쓴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도서관에서 화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만 해도 화가 어떤 생각을 하며 글을 쓰는지도 몰랐었다. 화와 함께 지낸 것이 이 년째이다. 그것도 한 기숙사 안에서, 같은 방을 쓰며, 같은 공기를 마시며. 무엇이든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름 화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화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감추고 있었다.

화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와 양심이 충돌하고 있었다.

 

나는 잊고 있었다. 우리 기숙사에서 가장 방음이 잘 되는 곳은 자습실이었고, 그 이외에는 아주 형편없다는 사실을.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슬리퍼가 카펫에 부딪히는 소리였으나 나는 그것이 사감의 발소리라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어디 숨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옷장? 너무 작았다. 학생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화장실? 열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저벅거리는 소리는 가까워 오고 있었고, 여기는 사층이었으므로 문을 열고 뛰어내릴 수도 없었다.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내 침대 위에 놓여 있는 무릎담요를 잡아채었다. 담요라고는 했지만, 가로가 이 미터가 넘어가는 얇은 이불이었다. 나는 그것을 몸에 둘둘 말고선 곧바로 침대 아래로 들어갔다. 운이 좋으면 베개가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었다.

문이 열렸다. 나는 노트를 꼭 안은 채로 벽을 보고 있었다. 소리로만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노트 안을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는 모든 신경을 들리는 소리와 진동에 집중했다. 사감은 방 안까지 들어오지는 않는 것 같았다. 문이 열리면서 들어온 차가운 공기가 담요를 뚫고 내 살갗에 느껴졌다. 그것은 꽤 오래간 머물렀는데, 문이 닫히기까지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사감의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나는 그제야 숨을 뱉었다. 몸 구석구석에 퍼져 있던 힘이 빠져나갔다. 발끝에서부터 손끝까지, 긴장하고 있던 근육들이 안도할 때에야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몸을 둥글게 만 채로, 불편하고 비좁은 침대 속에서 나는 일기장을 읽기 시작했다. 다락방에 몸을 들인 아늑한 느낌에 그대로 종잇장을 넘길 수 있었다.

 

7.5 : 일기장

열여덟, 3월 10일

심리검사를 한다고 했습니다. 심리검사니 적성검사니 지겨워요. 대체 옳음과 옳지 않음의 기준이 뭔가요?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좋지 않은 사람인가요? 불안과 초조 같은 감정들이 흘러넘치면 좋지 않은 사람인가요? 그것으로 인해 그 사람이 유지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건가요? 대량 양산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간상을 복제품처럼 찍어내는 것만 같습니다.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보면, 사회에서 완벽하게 배제되어야 할 인간입니다만,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는데요. 잘만 살아가고 있는데요. 질려요. 정신병자 취급하는 것도, 장애 취급하는 것도. 질립니다.

 

열여덟, 3월 17일

무엇도 할 수가 없습니다. 글도 쓸 수가 없고, 공부도 할 수가 없습니다. 기계적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기분이에요, 무기력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그런 저를 제어할 수 없어서 더 화가 납니다. 글을 쓰고자 하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번 글은 나를 투영시키고 싶었는데, 그것도 어렵습니다. 감정이 넘쳐흘러서 절제하기가 어렵습니다. 책으로 엮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원고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풀내음 모임 시간을 더 잘 이용해야겠다는 다짐은 했지만, 다짐은 다짐으로 끝날 것만 같습니다.

아, 일주일 전에 심리검사를 했습니다. 아마 이번 심리검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내보이는 검사가 되겠지요. 유한테는 장난으로 그러겠다고 말해 두었으니, 소문이 이상하게 번질 일은 없을 텝니다.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을 텝니다. 괜찮기를 빌고 있습니다. 어쩌면 내게는 기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이 빌어먹을 감정에서 빠져나오고 싶으니까요. 원인도, 치료 방법도 모르는 이 무저갱에서 말입니다.

 

열여덟, 3월 21일

날카로운 송곳이 잔뜩 내 목을 겨누고 있는 기분이에요. 모의고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실은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진짜 나는 이 아이가 아니거든요. 윤동주의 시를 배우면서 느꼈습니다만, 나는 아무래도 윤동주와 같은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가장 큰 특징인 자아의 분열은 내게서 자주 일어나는 형태이고, 이를테면 그것은 지킬과 하이드의 행태로 나타나지요. 다만 지킬이 바깥, 하이드가 안이라는 것만이 다를 텝니다. 나는 윤동주가 그랬듯이 요절할 것만 같습니다.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직감이에요. 내가 죽기 전에 윤동주가 그랬던 것처럼, 세상에 남겨질 작품을 쓰고 죽을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의대 지망생들을 불러서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실은 나는 무엇도 잘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을 성적으로 분류한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요. 반사회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반사회적이고, 모든 일에 염세적이고, 고개만 젓는 학생이라고 불려도, 나는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나였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내 안에 있는 하이드는 아무리 불러도 나오려 하지 않는 겁쟁이이기 때문에, 내 밖에 있는 지킬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습니다. 아마 선생님은 흡족했을 텝니다. 내 생활기록부에는 지금까지 결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진로도 일학년 때 그대로 의사이거든요.

나는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데.

 

열여덟, 4월 1일

심리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예상 그대로였어요. 담임은 심리검사 결과를 보고 나를 불렀습니다. 화라고 이름을 불리는 순간 알아챌 수 있었지만. 담임이 불러서 한 말은 그다지 기억나지 않아요. 소설에서 읽었던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으니까요. 전형적인 책임 회피였어요. 일학년까지 곧잘 해 왔던 학생이 단번에 무너져 내린 것을 본 사람은 누구나 책임을 회피했을 텝니다.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그것이 진짜 저였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습니다. 담임은 몇 번이고 안경을 고쳐 썼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 담임이 하곤 했던 행동들이 연거푸 일어났습니다. 나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어요. 담임이 내린 해결책은 여러 방면으로 상담을 받아 보라는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아마 며칠 이내로 나를 끌고 나갈 것 같아요.

그렇지만, 아마 내 속은 알 수 없을 텝니다. 이건 단언이에요.

 

열여덟, 4월 3일

상담을 받았습니다. 역시 같은 말에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었지만, 상담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구역질나고 역겨운 짓이었어요. 위선자 하나가 내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어요. 내 이름과 성별과 각종 내 신상정보를 깡그리 털어가더니, 날더러 내가 왜 이 지경까지 온 것 같으냐고 물었어요.

아마 그 때 한 번만 내 진심을 보인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그랬으면 내가 이 자리에 있겠느냐고. 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만했어요. 그 앞에 있던 상담 선생이라는 작자는 잠깐 당황한 빛을 보이더니 다시 재차 묻더군요. 왜 이 지경까지 온 것 같으냐고. 내 생각을 말해 보라고. 상담 선생은 아주 고약했고 더군다나 미숙했어요. 이제 막 고등학교 이학년에 올라간 아이보다 표정 숨기는 것이 능숙하지 못한데다 그것을 들키기까지 했으면, 대체 어떤 사람이 상담 선생이 되어야 하는 건지를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열여덟, 4월 4일

부모님한테 전화가 갔다고 합니다. 기악연습실에서 유와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휴대폰이 울려서 보니 어머니였습니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나가서 받으니 그 끔찍한 목소리가 들려오더군요. 몇 번이나 끊었는데도 계속 전화가 와서, 나는 아예 휴대폰 배터리를 분리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분명 어제 상담을 할 때 녹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상담 내용은 어디로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받았어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말하지 않겠다고 우겼거든요. 상담의 제 1원칙은 자살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닐 경우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자살의 자 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대체 왜? 어디에서 새어나간 건지는 빤합니다. 아마 상담선생님에게서 담임으로, 담임에서 부모님으로 그렇게 전달되었을 텝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공간은 어디인가요? 애초에 믿지도 않았지마는, 최악입니다.

 

열여덟, 4월 9일

나는 상담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은 내게 정신병원에 넣어도 시원찮겠다는 어투의 말을 쏟아내더군요. 교무실은 선생님들로 가득 차 있었고, 최소한 학생을 배려했다면 조용한 공간에 가서 둘이서만 이야기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담임은 배려 따위는 없이, 그 공간에서 모두에게 들릴 만한 커다란 소리로 고함을 질렀습니다.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입을 다물었어요.

정신병원에 넣어도 이상할 것 없어.

실은 정말 그럴지도 모릅니다. 나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나는 사람 자체를 존중하지 않는 당신들과는 이야기조차 하고 싶지 않아요.

 

열여덟, 4월 24일

우리는 바다에 왔습니다. 삼학년들의 마지막 출사예요. 이제 우리가 셔터를 이끌어나가야 합니다. 사진집을 만들기로 했어요. 어쩌면 순간을 남기고 싶었던 순간의 열망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한 해간의 기억을 끌어안는다는 것은 외려 좋은 일이니까요. 내가 이 세상에 어떤 방식으로도 남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해요. 어쩌면, 내가 글을 쓰는 일도 그것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있지, 나는 바다에서 죽고 싶어요. 바다를 보고 왔어요. 나는 다시 나갈 테지만, 햇빛 아래에서의 바다는 굉장히 아름다웠어요. 황홀경에 다녀온 것 같습니다. 모든 색이 한데 어울려 있었어요. 하늘과 바다와 바람과 모래와 햇빛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제 자리에서 찬연히 빛나고 있어서, 나는 어쩐지 슬퍼졌습니다. 만일 내가 죽게 된다면, 이곳에서 죽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어요.

 

열여덟, 4월 25일

돌아왔습니다. 지금이 두 시 가까이 된 시각이라, 25일이라고 해야 할지, 24일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자정이 넘어갔으니 25일에 쓰기 시작합니다. 바다의 낮과 밤은 나와 언뜻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름다운 모습을 내보이던 바다가, 밤을 집어삼키자 검은 물로 바뀌었습니다. 무엇도 삼킬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추악한 나마저도 받아들여 줄 것 같았어요. 나는 그것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습니다. 비가 쏟아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웠어요. 아름답습니다. 꽃이 되어, 바다에서 지고 싶습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나는.

 

열여덟, 4월 30일

유가 어제 내가 엮어낸 책을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고민하다가 내주었습니다. 실은 내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럼 의심을 받을까 봐 모른 척 하고 건넸어요. <인간방패>가 재미있다고 했습니다. 나도 그것을 쓸 때는 꽤 흥분해서 쓰고 있었다지만, 이렇게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이 내 이야기였기에 더 그러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주인공의 심리묘사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내 경험들을 여기저기 끌어다 놓았으니까요. 나는 계속 모른 체 하고 있습니다. 유는 내가 그것을 썼다는 것을 아마 모를 테예요. 조금은 어색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미술심리학을 빌렸습니다. 문학상을 위해 빌렸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반쯤은 사실이니까요. 얼른 읽어야겠습니다. 나는 빨간색 대신 노란색을, 검은색 대신 연두색을 칠해야 하는 학생이니까요. 아마 일 주일 안에 미술치료를 하겠다고 말이 나왔으니 미리 대비해 두어서 나쁠 것은 없잖아요.

 

열여덟, 5월 3일

미술치료를 받았습니다. 예상했던 일이었어요. 미술상담선생님은 왜 이 아이가 여기에 왔는지 자못 궁금한 표정이었습니다.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는데, 나는 순진한 양의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고민이 있느냐고 물어서, 나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해결되었어요, 라는 이야기만 남기고 말이에요. 내 그림은, 미술심리학 책의 ‘행복한 아동’ 그림에서 약간만 변형시킨 그림이었어요. 배색을 더 경쾌하게 했고, 그 그림의 잔해가 남지 않도록 공을 들였습니다. 그저 그렇게 끝났습니다. 나는 더 이상 내 마음을 내비치지 않을 거예요. 마음을 주고, 정을 주고, 내 진심을 말하면 돌아오는 것은 결국 상처밖에 없거든요. 다른 사람들을 믿고 의지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용서될 열여덟의 나이에 이것을 깨달은 것은 조금 슬프지만, 그만큼 상처를 덜 받는다는 것으로 나를 위로하고 있어요.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열여덟, 5월 4일

나는 실은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괜찮아 보일 뿐이지. 내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요. 괜찮아 보이는 법은 간단해요. 그저 웃으면 되는 법이에요. 그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행복한 아이로 보일 수 있어요. 아프게 웃는다거나, 힘들게 웃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닐 테예요. 정말 행복한 듯이 미소를 머금고 있으면 너를 보면 항상 기분이 좋아져ㅡ 따위의 말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조금 더 가까운 친구에게 행복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조금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요. 이를테면 모든 일을 활기차게 한다든지, 같은 공통 관심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요. 자신의 내면까지 속일 필요가 있어요. 실은 조금도 괜찮지 않은데도, 괜찮다고 말하는 법을 익힐 필요가 있어요.

천천히 무너지던 모래성이 파도를 한 번 맞으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법입니다. 고해하자면, 지금 나의 삶은 슬로우 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재생하는 느낌이에요. 나는 파도를 맞았고, 야금야금 부서지던 모래성이 단번에 아무것도 아닌 모래 덩어리들로 조각나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카메라를 화면에 연결하면 화면에 뜨기까지 몇 초 정도는 지연됩니다. 나는 그 지연되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어요. 나는 그렇기에, 마지막 몇 초를 더더욱 아름답게 치장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열여덟, 5월 5일

어제에 이어 회고해봅니다. 똑똑한 아이들은, 명석한 아이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인재상이 무엇인지 알아요. 그래서 그것에 맞추려다 보니까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게 되지요. 일종의 페르소나와 같은 것이지요. 숨 막히는 가면에 갇혀 자신을 썩혀 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신의 상처는 점점 깊어지고, 곪아가고, 썩어가고. 외견상으로는 아무런 문제없는 완성품이죠. 정말 굉장히 모범적인 완성품. 그렇지만 부속 부품들은 전부 녹이 슬어 있어요. 언제 멈출지 몰라요. 어쩌면 폭발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을 감수합니다. 그래야만 사랑받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나는 사랑받고 싶어요.

 

열여덟, 5월 10일

글로 나를 남기고 있어요. 내 안의 윤동주가, 지킬이, 하이드가 계속해서 바뀌어 나타납니다. 나는 술만 진탕 퍼마시는 염세주의자이자 술주정뱅이에요. 성적을 비관해서 뛰어내리기 직전인 학생이구요. 면접에 탈락하고는 허구한 날 세상 탓을 하는 대학원생이기도 해요. 배가 불룩 나와서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배불뚝이 상인이었고, 모든 것을 토해내기 직전까지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다가,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어 모든 것을 게워내는 거식증 환자이기도 해요. 하늘로 날아가는 새입니다. 그 새는 날개가 부러져 있는데도 날아가고자 해요. 어떤 때는 수면 밑을 가만히 부유하는 고래이고, 다른 때는 흙이고, 저 아래 묻혀 있는 석유가 되기도 해요, 나는 나를 남기고 있어요.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글 속에 묻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분명 나를 글에 투영시키는 건 위험한 일이에요. 감정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거든요. 그렇지만 요즈음 쓰는 글들은 나를 옥죄지 않는 글들이에요. 더 이상 가두고 있지 않는 글들이에요. 굉장히 빠르게 써지고, 굉장히 잘 써집니다. 그것은 또한, 내 이야기이기에 가능한 일들일 테예요.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털어놓는 내 이야기. 그렇지만, 소설이라는 그럴듯한 언어로 포장해내면 내 이야기와는 완전히 분리하여 사람들이 읽기 때문에 나는 마음 놓고 글을 쓰고 있어요.

나는 최대한 많이 나를 남기고 싶어요. 나는 잊히고 싶지 않아요.

잊지 말아 주세요.

잊히고 싶지 않아요.

 

열여덟, 5월 15일

문학상에 낼 원고를 완성했습니다. 며칠을 앓은 끝에 원고를 완성했어요. 십만 자 장편소설입니다. 에이포용지로는 대략 쉰 장에서 예순 장 가량 되는 것 같아요. 나를 끌어안는 소설입니다. 나를 담고 있는 소설이에요. 이 소녀는 나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똑같아요. 가면을 쓰고 있었고, 그 가면 속에 숨어서 울다가 결국에는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나는 가만 보면 이 부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상관없을 텝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의 주인공에게 푹 빠져서 글을 썼어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소녀라는 것은 아니에요. 나는 현실과 이상의 경계 속에서 글을 썼고, 위태롭게 외줄타기를 했지만 결코 한쪽으로 넘어가지는 않았어요. 물론 휘청거릴 적은 있었을 테지만, 줄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생각해요. 이 원고는 유에게 내일 보여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열여덟, 5월 16일

유가 없어졌습니다. 사라졌어요. 분명 나와 함께 있었습니다. 점심시간까지만 해도 나와 함께 있었고, 나는 유에게 원고를 넘겨주었습니다. 유의 마지막 모습은 야자시간 전이었습니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내 머리로는 아무리 고민해도 어디로 갔는지, 짐작할 방도가 없습니다.

살아 있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어요. 살아만 있어 달라고. 본래 야자를 빠지는 아이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왜 오늘, 학교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걸까요. 유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학생주임 선생님이라고 해요. 파일 하나를 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선생님께 가져다드릴 두툼한 유인물이었다고 해요. 그건 아마 내 원고였을 테예요. 선생님은 애초에 유에게 유인물을 걷으라고 한 적이 없었고, 유가 그 날 받은 빳빳한 새 종이들은 내가 준 소설밖에 없었으니까요.

기숙사에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나도 몇 번이고 전화를 했고, 문자를 보냈지만, 휴대폰을 꺼 놓은 것이었는지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문자에는 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휴대폰을 붙들고 전화를 걸었지만, 어느 때에도 연결이 되지 않았어요. 선생님들은 주변을 수소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일까지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경찰에 가출 신고를 한다고 하는 것 같았어요.

아, 바다에 가고 싶습니다. 그 날 그 바다에 가고 싶어요. 다시 바다에 가서,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 싶어요.

 

8

장난으로 해 보겠다고 말했던 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화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던 모든 것은 진실이 아니었으며, 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심지어 자신의 말투까지도 화 자신이 아니었다. 나는 일기장을 덮었다. 푸른색과 붉은색이 이리저리 섞여 있는 노트는 마치 바다에 피가 퍼져나가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것은 화의 피였다. 화는 자신이 아니었다. 나는 숨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내뱉었다. 허파에서 빠져나가는 공기가 떨림을 담고 있었다.

나는 내 마음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무엇을 해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지금 내가 이 상태로 화를 만난다면? 어떤 말이든 쏟아낼 것이었고 화는 당황할 테였고 어쩌면 우리는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영영. 머리를 차갑게 식힐 필요가 있었다. 지금 내 머리와 가슴은 필요 이상으로 과열되어 있었다. 나는 이불을 침대 바깥으로 내보냈고 이어 내 몸도 내보냈다.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뻗어 일기장을 화의 책꽂이 한구석에 고이 꽂아두었다. 떨어져 있었던 곳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옷을 벗어던졌다. 아직도 바다 냄새가 나고 있었다. 화는 지금도 바다에 가고 싶을까. 무의식적으로 입 안을 와그작 깨물었더니 피비린내가 입안에 가득 풍겼다. 하나의 옷가지가 끌러질 때마다 육체는 점점 가벼워졌지만, 반대로 내 몸뚱어리는 물에 젖은 듯이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려는 몸을 애써 추슬렀다. 씻어 내리고 싶었다. 벌점을 받든 말든 상관없었다. 나는 일단 내 몸을 씻어야겠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온수가 머리부터 천천히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하얀 김이 뿌옇게 올라왔고 샤워 부스의 유리창에는 곧 물방울이 맺혔다. 내가 바다에 갔던 이유를 다시 한 번 되짚었다. 레밍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모든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기 위해서. 그럼 그 레밍을 상기시킨 것은 무엇이었지? 하필이면 그 날 떠올랐던 화의 말이었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자기통제를 하기 더 힘들 테라는 그 말. 나는 통제를 벗어나 보고 싶었고 대체 왜 그런지에 대해서 고민하고자 했었다. 화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

적어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찾은 셈이었다. 비록 바다가 아닌 화의 일기장에서였지만. 결국 화는 제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내게 주웠다고 말했던 그 책도 화 자신이 쓴 책이었고, 문학상 원고의 소녀도 화였고, 그리고 녹슬어 있는 부속품으로 가득 차 완성된 모범생도 화였다. 나는 화를 모르고 있었다. 모르고 있었다. 메아리치는 생각은 샤워기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로도 지워지지 않았다.

온수가 내 몸을 잠식하는 것을 완연히 느끼며,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내가 화에게 내뱉었던 언어들이 수문 열리듯 밀고 들어온다. 나는 화의 앞에서 심리검사의 점수가 낮게 나오는 아이들을 문제아라고 지칭했다. 정신병자, 장애아, 병신. 내가 그 애들을 그리 부를 때마다 화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었던 친구에게 자신의 원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있었다. 득은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실은 되지 않게 하자. 나 때문에 화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하자. 나는 언젠가부터 누군가를 죽이고 있었다. 끔찍하게도.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았다. 울고 싶었으나 내 자신이 너무 아파서 울지도 못했다. 샤워 부스에서 나가자. 공기가 점점 물을 머금었고 이 안에 있다가는 질식사할 것만 같았다. 시뻘겋게 달구어진 쇠꼬챙이로 쑤셔대는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로 나는 헐떡거리며 욕실에서 빠져나왔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바르륵 떨리는 손을 최대한 뻗어 속옷을 잡아채었다. 교복에서 바다 냄새가 더 훅 끼쳐왔다. 아무래도 드라이클리닝을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오후 수업은 빠질 작정이었다. 나는 교복을 한쪽으로 밀어 두고 얇은 트레이닝복과 긴팔 티셔츠를 꺼내들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모든 상념들은 나에서 출발한 것이었고, 곧 화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우리는 한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았으나, 실은 평행선 위를 달리고 있었다.

 

화를 다시 만난 것은 야자가 끝난 후, 방에 들어온 화를 맞이하면서였다. 점심에서 밤에 이르는 열 시간 남짓의 간격 동안 사감은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다. 화는 나를 바라보더니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내 앞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나는 화가 항상 그러했듯 웃고만 있었다.

ㅡ어디 다녀왔어?

ㅡ으응, 그냥…….

나는 말끝을 흐렸다. 레밍이 되기 싫었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그저 바다가 보고 싶었다고 말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너의 말 한마디가 나를 움직였다고 말해야 할까. 셋 다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나는 바다라는 단어를 화의 일기장에서 여러 번 보았던 탓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화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ㅡ다친 덴 없구?

화의 시선이 나의 몸을 이리저리 훑고 지나갔다. 점심에 돌아와서 씻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내가 퍽이나 답답했을 테였다. 화는 미간을 찌푸린 채 팔짱을 끼고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노려보는 것도 같았다. 나의 눈과 화의 눈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화의 검고 짙은 눈에서 바다의 밤이 보였다.

 

번개와 비가 동시에 몰아치는 환영이 보였던 그 날을 기억한다. 밀려들어오고, 다시 밀려나가던 검디검은 물을 기억한다. 교복에 배인 바다의 냄새를 기억한다. 그 날 밤, 목부터 차갑게 에두르던 바닷바람을 기억한다. 발바닥에 스치던 모래의 차가운 감촉을 기억한다. 말라 있던 모래가 축축한 모래로 젖어들던 순간을 기억한다. 몸부림치며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었던 사나운 파도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 아래 서 있었던 한 여자아이를 기억한다. 교복을 입고 바다에 시선을 하염없이 머무르던 여자아이를 기억한다.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날 밤, 축축한 옷에 먹혀서 들어오던 너를 기억한다. 빗소리를 뒤에 몰고 들어오던 너를 기억한다. 가만히 달빛을 등지고 있던 너를 기억한다. 밭은 숨을 죽이며 들이키던 너를 기억한다. 어둠 속에서 울음을 담고 있던 눈을 기억한다. 너의 가라앉은 몸을 기억한다. 혼자였던, 철저히 혼자였던 시간마저도 마음 놓고 감정을 터트리지 못했던 너의 메인 목울대를 기억한다.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리던 너의 손을 기억한다. 손에 잡혀 있었던 무채색의 옷가지들을 기억한다. 화장실 문이 닫히고 나서 털썩 쓰러지는 것 같던 그 소리를 기억한다. 오래간 울리던 샤워기 소리를 기억한다. 너의 발자국에 묻어 있던 바다 내음을 기억한다. 이제야 기억할 수 있다. 기억한다. 화, 너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는 없었다. 어떠한 이야기도 할 수 없었으므로. 그것 자체로 죄악이었으므로.

ㅡ너 창백해. 아파 보여. 괜찮은 거 맞아?

화가 내 쪽으로 한 발 더 다가왔다.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려고 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는 정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화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자신의 몸이 부서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남만 걱정하는 사람. 자신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챙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보다는 늘 타인이 더 중요한 사람. 설령 그것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스스로 생각한대도, 어찌 되었든 지금 낭떠러지 끄트머리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

ㅡ아픈 건 너지, 내가 아니잖아.

한참 만에 내 입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는 볼썽사납게 갈라지고 있었다. 화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에 또 울컥한 나머지 나는 기어이 목소리를 짜내어 뱉어내고야 말았다.

ㅡ너 아프잖아. 아픈데 왜 말을 안 해?

ㅡ유야.

화가 내 말허리를 자르려는 듯이 이름을 불렀다. 그것이 기폭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너는 알까, 화야.

ㅡ왜 말을 안 하냐고. 왜 끙끙대면서 혼자 그렇게 힘들어하느냐니까? 편해? 지금 네가 사는 이 세상이 편해? 너 지금 행복해? 아무렇지도 않아? 그렇게 남을 걱정할 만큼 네가 강해?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응?

ㅡ유야. 나 괜찮아.

ㅡ대체 진짜 너는 누구야?

이제 나는 거의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화는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그저 나를 향해 다가와서는 나를 안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울음을 삼켰다.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데 눈물을 뱉는 것은 주객전도의 행위임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나는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화는 내 등을 쓸어내렸다. 반복적으로 쓸어내리는 손길이 분에 넘치도록 따뜻했다. 나는 그대로 온몸에 꽉 들어차 있던 힘을 빼내고 무너졌다.

ㅡ나는 나야, 유야. 해화. 나는 해화야.

화는 힘주어 말하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ㅡ유야. 너 오늘 조금 아픈가 보다. 얼른 자자. 사감선생님이랑 담임선생님께는 내가 말씀드려놓을게. 기숙사 자습 빼고 일단 자자. 응?

화의 목울대가 뻣뻣했음은 나만 알고 있을 테였다.

 

잠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화의 말대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덮고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별의별 말들이 다 들려왔다. 가장 처음 귀에 들어온 대화는 룸메이트들끼리의 대화였다. 내 자리가 불룩하게 솟아 있는 것을 본 다른 룸메이트들이 내가 돌아온 줄 알고 이불을 들추어 보려고 했다가 화에게 저지당했다. 왜? 아프대. 응? 어딜 다녀왔길래? 그을세……,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 그치만 아프다잖아. 자게 놓아두자. 자세한 건 내일 묻구. 화는 몇 마디 말로 간단히 룸메이트들을 내게서 떨어지게 할 수 있었다. 분명 표정은 그 유하게 웃는 얼굴일 테였다.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눈을 곱게 접어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고, 보조개가 움푹 파인 얼굴.

화는 사감이 이곳에 들어오는 것 또한 막아낼 수 있었다. 밖에서 큰 소리가 났고,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좋았다. 나는 사감의 말을 들으려 애썼다. 대강 저 애를 당장 잡아서 퇴사시켜야겠다는 말을 뱉었는데, 화는 벌점 삼 점을 받게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것이 사칙에 알맞다는 논리였다.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09

화의 예상과는 다르게 나는 아프지 않았다. 아주 말짱했고,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있었다. 하루 정도 어디 나갔다 온다고 병에 걸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아마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테였다. 담임에게 잔뜩 깨지고, 사감에게 또 왕창 채이고, 반 애들은 나를 조금은 이상한 눈으로 보곤 했다. 상관없었다. 나는 레밍이 아닌 화를 보고 있었으므로.

ㅡ이학년 팔반 이 유 학생, 지금 바로 학생부로 내려오세요. 다시 한 번 알립니다. 이학년 팔반 이 유 학생, 지금 바로 학생부 학생부장 선생님께 내려오세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부장이라면 학생주임이었다. 무섭기로 소문이 나 있었기에 내 어깨는 잔뜩 긴장해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손톱이 손바닥을 뚫을 기세로 주먹을 쥐고 있었다. 계단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침자습시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그랬기에 적막을 깨는 발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터벅거리는 소리가 두려움에 차 있었다. 어제의 패기 넘치던 나는 어딜 갔나, 하고 내가 나 자신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부는 제2교무실 옆에 딸린 조그마한 교실이었다. 평소에 학생주임은 제2교무실에서 생활했으나, 학생들을 맞을 때는 학생부에서 줄곧 맞곤 했다. 나는 학생부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나는 한숨을 옅게 쉬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ㅡ안녕하세요.

가벼운 인사였지만 공기는 무거웠다. 학생부는 예상외로 아늑한 공간이었는데, 학생부라기보다는 상담실에 가까운 가구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낮은 테이블이 가운데에 놓여 있었고, 학생들이 앉을 수 있는 일인용 소파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학생주임이 앉아 있는 소파가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화병 하나가 자리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얇은 커튼 두 겹으로 막아 두었고, 한쪽에는 컴퓨터 한 대와 의자 하나가 있을 뿐 다른 가구는 없었다. 학생주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학생주임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ㅡ어제 어디 다녀왔니?

ㅡ…….

나는 마치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말을 할 수 없었다.

ㅡ곤란하니?

ㅡ그런 건 아닌데…….

ㅡ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학생주임의 입에서 튀어나온 의외의 말에 나는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아마 벙 찐 표정이었을 테다. 학생주임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말을 되풀이했다.

ㅡ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유, 네가 학생 신분으로서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지 않을 아이라고 생각해. 야자 도중에 나와서 무단 외박을 한 건 분명 잘못했지만, ……그건 사실 모든 청소년들이 한 번 쯤은 겪어 봐야 할 일이지 않아?

학생주임의 입에서는 다시 한 번 믿기 힘든 말이 터져 나왔다. 보통 선생님들이 이런 말을 학생에게 하던가? 내 기억 속에서의 학생주임은, 아이들이 아무리 사소한 교칙을 어겨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기강을 잡던 사람이었다. 선생보다는 군대의 교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중학교에서의 학생주임은 그저 아이들을 잡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한 번 학생부에 걸려들어가면 그 날 울지 않고는 못 배겼다. 그 정도로 무서웠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조금은 당황한 것도 같았다.

ㅡ매일 학교에 가두어 놓고 공부만 시키니까 애들이 힘들어하지. 가끔은 나가서 바람도 쐬고 공기도 마시고 해야 하는데 그런 걸 일절 안 시키니까 기본적인 욕구도 못 채우는 거잖아. 그걸 채우겠다는데 우리가 어떻게 혼내? 어떻게 보면, 우리가 빼앗아 간 너희의 권리를 너희가 혼자서라도 되찾겠다는데. 그렇지 않아?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얌전히 앉아만 있었다. 눈을 굴렸다. 학생주임이 한 말은 적어도 빈말이라거나, 듣기에만 좋은 말 같지는 않았다. 나는 말라 가는 입술을 축였다.

ㅡ그래서 유. 너는 무엇을 느꼈지?

ㅡ네?

ㅡ어디든 가서, 무엇을 느꼈느냐고. 아니야, 질문을 바꾸자. 하루 야자를 빼고, 기숙사 자율학습까지 빼고, 게다가 무단 외박을 하면서까지 네가 한 일이 그 모든 것들을 감수할 만큼 가치 있었니?

나는 곧, 하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ㅡ가치는 넘쳤어요. 다만 제가 그것을 제어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게 문제이지요.

ㅡ곧 제어할 수 있게 될 거야. 네가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사실 바다와도 같아서, 지금 출렁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언젠가는 잠잠해지게 되어 있거든. 파도가 칠 때 어떻게 치지?

ㅡ밀려오죠. 밀려왔다가 다시 떠내려가고, 밀려왔다가 다시 떠내려가고. 모든 걸 집어삼킬 듯이 으르렁대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빠져나가고…….

ㅡ바로 그거야. 너도, 우리 모두 역시 바다니까.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몸을 잠시 움찔거렸다. 바다라는 말에 반응한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바다라고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내 안쪽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말을 느낄 수 있었다.

ㅡ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리고 오늘에서야 겨우 나는 그 말을 뱉어낼 수 있었다.

 

하루 일과의 마지막은 화의 일기장을 읽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언제 들킬지 몰라서 조마조마했다. 화가 언제 들어오는지도, 언제 나가는지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화가 어디에 일기장을 놓는지를 몰라서, 일기장을 찾는 데 고생하곤 했다. 그렇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화는 책장 맨 위 칸에 일기장을 보관하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화가 붉은색과 파란색이 섞인 노트를 밀어 넣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물론 못 본 척 했지만. 화가 언제 기숙사에 출입하는지를 인식하게 되자, 나는 퍽 자유자재로 화의 일기장을 볼 수 있었다.

일기장은 환상과도 같은 세계였다. 좋은 의미의 환상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환상은 환상이었다. 평소의 화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이를테면, 유채색이 화의 세게였다면 화의 일기장은 무채색이었다. 좋았던 일들이 적혀 있었던 페이지가 있던가? 화에게 모든 것은 그저 흑백으로 보일 뿐인 것 같았다. 자기 자신만 유채색이었는데, 그것조차도 아주 새빨간 붉은색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화의 아픔을 나름대로 지켜줄 수 있었다. 조금 더 신경 써 줄 수 있게 되었다. 바다에서 돌아온 그 날, 화에게 목소리를 쥐어짜내어 뱉은 뒤로 말을 조금 더 조심하려고 노력했다. 스트레스를 받는 지점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조금 더 조심하면 되었다. 조금 더 조심하고, 조금 더 배려하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사소한 일들 때문에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는데,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일 테지만, 제3자가 보면 한 손으로도 들 수 있는 무게의 물건이 당사자에게 떨어지고 있는 일과도 같았다. 나는 그것을 알았고, 화를 지키기 위해서 매일 밤, 화가 들어오기 직전에 일기장을 읽었다. 화는 평소와 같았고, 일기장 또한 무채색에 가까웠다.

 

며칠간의 자비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자마자 몸을 가눌 수 없었다. 가슴에서 시작된 통증이 온몸으로 격하게 퍼져나갔다. 손가락 하나를 까딱하면 마치 관절을 비트는 듯이 아팠고 눈을 뜨면 안구가 잔뜩 말라 있어서 뻑적지근했다. 열에 달떴다. 뜨거운 숨이 입 사이로 비어져 나왔다. 기침을 할 때면 폐와 심장 부근의 모든 것을 들어내어 밖으로 토해내는 것만 같았다. 기침이 통증으로 인해 막힐 지경이었다. 가슴에서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쓰라린 느낌이 뒷목과 뇌 뒤편을 전부 긁으며 올라갔다. 윙윙대었다. 머리 앞부분에 도달해서는 마구 쥐어짰다. 병원에 가야 했으나 내가 거부했다. 남아있고 싶었다. 남아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기숙사에 누워 있기로 했다. 환각과 환청이 이곳저곳에서 들렸고 온 세계가 이지러졌다. 뜬 눈에 보이는 세계는 마치 물을 탄 듯 부예졌고 막대기로 휘저은 것 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눈을 감았다. 목구멍으로는 침조차 넘기기 버거웠다. 아무도 없는 기숙사는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누워 있는 것과 잠을 자는 것뿐이었다. 고통은 꿈속에서도 계속되었다. 꿈속에서 내게 덮쳐오는 고통은 종종 다른 형태로 나타나곤 했는데, 이를테면 갈비뼈 몇 대가 나간 것 같았다든지, 다리가 심하게 꺾여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든지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속에서의 나는 항상 무엇인가에 쫓기고 있어서, 그 아픈 몸을 이끌고 죽도록 뛰어야만 했다.

 

화의 일기장이 문득 기억이 났다. 화가 밟아 왔던 전철을 되짚었다. 화가 났다. 도대체 얼마나 곪을 때까지 자신 안에 묵혀 두었을까 싶어서. 무엇이 그리 중요했기에 자신까지 속여 가면서까지 괜찮다고 자신을 끊임없이 옥죄어 왔을까 싶어서. 화에게 괜찮다는 말은, 위로의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채찍질에 가까웠다. 화가 났다. 그렇게 자신을 숨기면서 고통 속에서 살아갈 만큼 세상은 가치 있는 공간이 아니란 말이야. 세상은 너를 아프게 하면 안 되는 공간이란 말이야…….

그리고 문득, 너무도 슬퍼졌다.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울음이 나왔다. 허무하게도 울음은 간단히 터져버렸다. 화의 앞에서 그렇게 참아내던 울음을 삼키려 했지만, 내가 삼키기에는 너무 큰 울음이었다. 이곳의 적막을 깨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이불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흐느꼈다. 무엇이 그렇게 서러웠는지 몸이 한동안 들썩였다.

잠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는 날뛰고 있었다. 꿈에서 지르던 비명이 화근이었다. 무엇인가 쫓아오는 느낌과 함께 머리와 허리가 너무도 아파 와서 나도 모르게 목구멍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것을 들었는지, 사감이 달려와 이것저것을 캐물었다.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입을 잠갔다. 눈을 감았다. 어차피 꿈과 현실이 하나의 세계로 느껴진다면, 그저 그것이 지날 때까지 가만히 버티고 있는 것만이 방도였다. 해일이 한바탕 쓸고 지나가면 잠잠해질 것이다. 모두 다 괜찮아질 것이다.

 

무채색이라고 생각했던 화의 일기장은 실은 모든 색에 젖어 있었다. 온통 붉은색 계열이었으나, 적어도 무채색은 아니었다. 화의 피가 일기장에 묻어 있는 것이었다. 차라리 화의 세상이 무채색이었다. 화는 모든 무채색 세상의 가시들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켰고, 그것을 게워낼 방도로 글을 쓰는 것을 택한 것이었다. 자신의 치부라고 생각할 테였다. 그렇기에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자신의 안에만 꼭꼭 숨겨내고 있을 테였다. 화에게는 장벽이 존재했다. 그렇지만 그 장벽은 장벽으로 보이질 않아서, 충분히 깊이 닿아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마저 결코 깊이 닿아 있지 않았다. 까마득히 깊은 개울에서, 얕은 모래 위에 발만 담가 두고 그 개울에 몸을 들여 보았다고 안심하는 셈이었다. 그리고 일기장은 몇백 미터나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아 있는 바다였다.

 

아, 내가 일기장을 손에 쥐어도 되는 것일까.

화의 비밀을 내가 몰래 훔쳐보아도 정말 괜찮은 것일까.

생각이 일기장에서 상담으로 옮아간다. 화는 어쩌면 정말 상담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장난이라고는 말해 두었지만, 누구에게라도 손을 뻗고 싶었는지 모른다. 애처로운 손길을 뻗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마 평소의 화가 상담을 요청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저을 테였다. 자금 장난하느냐며 화에게 재미있다는 눈을 던지기 바빴을 테였다. 화에게는 자신이 힘들다는 사실을 입증해 줄 객관적인 지표가 필요했고 그것이 심리상담 결과였을 테였다. 힘들다는 말을 꺼내는 아픈 일에조차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화는, 용기를 내고 있었다. 이 삶에서는 아마 더 이상 낼 수 없는 용기를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그 용기를 꺾어 버렸다. 처참하게도. 꽃을 꺾어 버렸다. 암흑에서 끌어올려주기는커녕 구렁텅이로 밀어 넣기만 했다. 모든 생각이 엉켰다. 모든 상념이 가라앉았다. 밭은 숨을 가다듬었다. 생각이 멈춘 것은 얼굴에 느껴진 시원한 감촉 때문이었다. 서늘한 바람 한 줄기 때문이었다.

 

ㅡ화……야.

화라는 확신이 들었다. 세계가 모두 이지러저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한대도, 화인 것만 같았다.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익숙한 분위기였다. 물망초 향이 옅게 풍겼다. 화. 화야. 입술을 달싹여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짜내었다. 드문드문 뜯어지고 찢어지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손을 뻗었다. 입에서 나오는 숨이 덥다는 것을 선연히 느낄 수 있었다. 냉랭한 손에 따뜻한 손의 온기가 잡혔다. 나는 그것을 나름대로 힘껏 움켜잡았으나, 손에 들어가지 않는 힘은 도무지 꽉 쥘 수가 없었다. 나는 그리운 이를 부르듯이 화의 이름을 불렀다. 화야, 하고.

ㅡ유야. 뭐 필요한 거 있어?

ㅡ가지 마.

나는 화의 목소리인 것을 인지하자마자 화의 손을 놓지 않을 작정으로 움켜쥐었다. 이것이 꿈인 것만 같아서, 더 애달프게 손을 그러잡았다. 화는 답이 없었다.

ㅡ가지 마.

밭은 숨을 다잡았다. 숨이 성겨서 자꾸만 말이 끊겼다. 답을 갈구하듯 입술이 달싹였다. 어디로부터 가지 말라는 것이었을까. 떠나지 말아줘, 가지 말아줘. 화가 한숨을 내뱉은 것만 같았다. 곧 시원한 감촉이 얼굴에 닿았다. 화의 손이었다. 나는 더운 숨을 가쁘게 토해내고만 있었다. 시간이 멈추었다.

ㅡ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다시 올게, 화야.

화는 내 얼굴을 몇 번이나 쓰다듬더니 한 발 물러났다. 이내 시원한 느낌이 사라졌다. 나는 손을 애처롭게 뻗었다가 힘없이 떨어뜨렸다. 꿈과 현실의 경계선이 모호한 이 시점에서, 꿈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꿈으로, 현실로, 꿈으로, 다시 현실로, 꿈으로. 대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를 모르겠다. 꿈이 현실 같았고, 현실이 꿈 같아서 이곳저곳에서 나타나는 환영과 환청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화의 환영이 나타났다. 등을 돌리고 문 밖으로 달아나는 환영이었다. 그것이 환영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환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환영이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뜨거운 숨에 맞서는 차가운 감촉이 다시 다가왔다. 화야, 하고 부르자 먼저 차가운 감촉이 손을 잡았다. 환영에 내내 시달린 탓에, 힘을 내려고 해도 낼 힘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화가 이끄는 대로 그대로 끌려가기만 했다. 나는 어쩐 일이었는지, 이것이 꿈이라는 확신이 들어서, 내내 가슴에서 맴돌던 말을 불쑥 토해내고야 말았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부디 꿈이기를 빌면서.

ㅡ괜찮아.

화는 다시, 아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환영에 사로잡히고 풀리고를 반복했다. 가위에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정신이 어느 정도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호한 경계가 사라졌고, 주위의 사물들과 사람들을 분간할 수 있었다. 성장통이라는 단어가 문득 떠올랐다. 성장통이 이렇게 아프게 오는 것이었는지도 생각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실은 그런 것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았다. 나는 어쨌거나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고, 세상이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했다. 그리고 참 이상하게도,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한낱 노트필기나 수업 진도 따위가 아니라, 화의 일기장이었다.

 

열여덟, 5월 21일

용기를 내고 싶어요. 대체 용기라는 건 뭘까요? 좋은 용기도, 나쁜 용기도 물론 존재할 테지만, 어느 쪽이든 좋으니 나는 용기를 가지고 싶어요. 이건 자존심이라거나 자존감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개념이에요. 내가 이걸 할 수 있다는 마음을 먹는 것이 자존감이라면, 직접 실행에 올릴 수 있는 추진력이 용기예요. 나는 용기를 가지고 있을까요? 실은, 아닌 것만 같아요. 항상 말했듯이 나는 겁쟁이여서 앞에 나서지를 못하니까요. 남 앞에 나서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운데, 내 앞에 나서는 건 우주로 로켓을 쏘아 올리는 핵심 기술을 파악하는 것보다 어려워요. 언제쯤이면 내가 내 앞에 나설 수 있을까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오즈의 마법사의 사자를 생각해 봅니다. 용기를 가지고 싶다던 사자를요. 물약을 먹고 용기가 생겼다고는 하지만, 문학 작품 해설에는 도로시와 함께 여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시련들을 겪고 이겨내면서 용기를 기를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해요. 모두 자신의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고.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아픈데도, 용기를 얻을 수 없어요. 아파서 용기를 얻을 수 없는 걸까요?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모르겠는 일 투성이에요.

 

열여덟, 5월 22일

유가 아프다고 해요. 나는 학교에 왔고, 곧 기숙사로 돌아가 볼 텐데 유가 얼마나 아픈지를 모르겠어요. 다시 말하지만, 살아만 있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일전에 유가 어딘가로 사라졌을 때도 살아만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적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고 있어요. 지금의 내 마음은, 그때와 같습니다. 유를 잃어버린 느낌이에요. 통째로.

지금 유는 나보다 아플지도 몰라요. 나는 아프지 않다고 그리 말하고 있으니까, 완벽하게 평범한 여자아이와 끔찍하게 아픈 여자아이 정도로 정의내릴 수 있겠네요. 나는 조금 후에 유를 보러 갈 거예요.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 주제에 아주 큰 욕심이지만요. 제발 내게 용기를 주세요. 손을 잡을 수 있게, 그리고…….

 

화의 일기장에 추가된 무채색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용기를 가지고 싶다는 말이 대부분이었고 아팠던 당일에 내 이야기가 잠깐 들어가 있을 뿐이었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가 꿈결에 화에게 말했듯이, 괜찮을 것 같았다.

 

10

용기를 더 낼 수 있을까?

낼 수 있을 거예요.

나는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용기를 내어 줘요.

내게 용기를 조금만 나누어 줘요.

 

*

나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직감했는데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바람이 몸을 감쌌다. 찬연하게 빛나는 물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까마득한 절벽 끝에서 새파랗게 춤추는 물을 바라보았다. 곧 나의 육신은 저 물 아래로 가라앉을 테였고, 영혼은 빠져나와 어디로든 갈 테였다. 그것이 설령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채라 해도, 지금의 나보다는 나을 테였다. 아니, 실은 이곳만 빠져나가면 그 무엇도 나보다는 나을 테였다. 나는 저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내가 물에서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죽고 싶다고 가슴속에 간직한 것은 어쩌면 적어도 가라앉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가라앉고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가라앉고 있다. 바다에는 염분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라앉으면 그 자리에 머무를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산호초나 바위에 걸려 더 이상 가라앉지 않을 수도 있을 테였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으면 고래의 등에 막힐 수도 있을 테였다. 더 이상 가라앉지 않을 수 있다. 더 이상.

꽃잎이 떨어지고 있다. 바람에 날려서 벚꽃 잎이 떨어지고 있다. 지고 있다. 낙화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서, 이 밑바닥까지 빠르게 침잠하고 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지금이라면 꽃이 될 수 있다. 꽃이 될 수 있다. 꽃이 될 수 있을 테다. 입술에서 비릿한 피비린내가 돌았지만, 그것마저도 달콤한 꿀이 될 수 있다. 나는 발을 어렵게 옮겼다. 첫발이 어렵다고들 했던가. 두 번째 발은 조금 더 쉬웠다. 세 번째 발은 더 쉬웠다. 결국 나는, 나는 듯이 절벽 끄트머리를 향해 달려갔고 끝내 꽃이 되고자 마음먹었다. 나는 낙화하고 있다. 어느 무엇보다 아름답게, 어느 무엇보다 찬연하게.

나는, 꽃이 되고 싶었다.

*

 

화가 내게 시집을 가져온 것은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화는 계속 글을 쓰고 있던 모양이었다. 시 백여 편을 모아 얄팍한 시집 한 권을 엮었으니 그동안 화가 얼마나 많이 써 왔는지 짐작이 갔다. 그 백여 편이 희가 쓴 시의 전부가 아닐 테였으므로. 몇 백 편 중 고심해서 고르고 골라 나온 시집이었을 테였다. 문체가 <숨>과 퍽 닮아 있었다. 시집의 겉표지는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화려했다. 화의 일기장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만 화의 일기장의 색감이 강렬했다면, 이번 시집의 모티프는 솜사탕이기라도 한 듯 옅은 파스텔 톤의 분홍색과 하늘색이 시집 전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서로 섞여들어가고 있었다.

ㅡ작년 봄부터 쓴 시들 중에서 괜찮은 시들 모아서 엮었어. 괜찮다고 하기도 뭐하지만, 그래도 꼭 해 보고 싶었거든. 시집 내는 거.

ㅡ풀내음에서는 알아?

화는 고개를 저었다. 뭐 그게 어때서, 라는 표정을 얼굴에 담고 있었다.

ㅡ그냥. 너한테만 보여주는 거야.

화는 내가 말을 꺼낼 틈조차 없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ㅡ풀내음에도 조만간 가지고 가기는 할 거야. 그래도 너한테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어서. 그냥 먼저 가져왔어.

ㅡ난 너 글 쓴다는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ㅡ언젠가는 말하려고 했었어. 사실 이 시집이 엮여 나올 때쯤에 말하려고 했는데, 네가 먼저 알아버린 거거든. 괜찮아. 나도 너에 대해서 전부 아는 건 아니잖아?

자신의 말에 자신이 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화가 내민 시집을 받아들었다. <꽃>이라는 단순한 제목이 하얀색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잘 볼게. 나는 화에게 미안함이 섞인 웃음을 내보였다. 화의 글은 여러모로 굉장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었는데, 하나하나의 묘사가 섬세해서 자꾸만 들여다보게 하는 그런 글이었다. <인간방패>를 보고 혀를 내두른 것도 묘사의 힘이 컸다. 실은 나는, 내가 접해 본 작품 중에서 화처럼 피 튀기는 잔인한 장면을 스스럼없이 적어내는 작가를 몇 보지 못했다. 화는 정면 돌파를 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성격이 글에 녹아들어 있었다. 에둘러 말해야 할 부분은 단편적인 묘사로 넘어갔는데, 장면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적어내어야 할 때 화는 마치 야생의 늑대가 사냥감을 쫓아가듯 단 하나의 단서도 놓치지 않고 쫓아갔다. 옷소매에 핀 튀 한 방울,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의 형태, 삐뚤빼뚤한 발자국까지 전부 묘사하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사건을 전개해 나갈 때도, 꼭 내 눈 앞에서 장면을 생생하게 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영화를 보는 것처럼 글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단지 감수성에 풍부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ㅡ잘 볼게.

화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웃어 보였다. 나는 그것을 기숙사에 들고 와서 틈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글은 화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고, 시집은 화 그 자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어느 작법서에서 읽었던 시와 자신을 분리하라는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야만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자신을 투영시킨 시는 쓰기는 쉽지만 결코 좋은 시가 되기는 어렵다고. 자신과 작품을 분리하면 분리할수록 더 나은 작품이 나올 테라고. 그렇지만 나는 인간으로서의 화를 좋아했고, 그런 화의 작품을 보는 것도 좋아했다. 그러면 된 것이다.

 

당신은 여전히 나를 기억하고 있나요?

화가 엮은 시집의 첫머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나요, 로 시작되는 시집은 대부분이 꽃에 대해 노래하고 있었다.

 

*

서시

 

하늘에서 별이 나린다

 

너는 별을 안고 있다

가슴 가득 별을 품고

유성의 꼬리 끄트머리를 땅에 지익직 그으며

네가 가는 길목마다 일렁이고 있다

 

달을 닮았다고들 하지만

하얀 보름달보다는 노란 별이 어울리는

그대여, 부디 노래를 불러 주오

이 밤이 빨리 지나가도록

노오랗게 웅크려 주오

환하게 열린 다섯 개의 꽃잎을

*

 

달맞이꽃으로 시작해서 개나리, 봉숭아, 히아신스, 리시안셔스, 하늘말나리, 라일락, 튤립, 장미, 국화, 카네이션, 난초, 데이지, 민들레, 수국, 백합, 물망초……. 각양각색의 꽃을 제각기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장미를 형상화한 하나의 시는, 수술로부터 출발하여 온 꽃잎과 줄기와 잎을 누비다가, 바람을 타고 밖으로 저 멀리 날아가려다가 장미 가시에 걸려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꽃가루를 시 안에 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꽃> 시집 중에 꽃이 들어가지 않은 시는 없을 것 같았다. <바다를 위하여>라는 시에서는 동백꽃이 나오고 있었고, <향수>라는 시에서는 어머니 집에 피어 있던 들국화가 등장해서 시 전체의 분위기를, 어쩔 때는 그 근방의 느낌을 뒤흔들거나 헤집어 두고 달아난다. 아무리 꽃이 없는 시를 찾아보려 애써도 찾을 수가 없었다. 개중에는 리시안셔스나 붓꽃 같은 생소한 꽃들도 있었는데, 시를 보고 꽃의 이미지를 검색해 보면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구나, 하며 수긍하게 되는 것이 화의 시의 묘미였다.

꽃 사진이 실려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한 장의 사진도 꽃을 담고 있는 사진이 없었다. 대신 바다 사진이 시 다섯 편에서 여섯 편마다 하나씩 붙어 있었다. 아침의 사진이었다. 해가 막 솟아오르고 바다가 처음 햇살을 받아 부서져 내리는 그 순간부터 해가 반쯤 머리를 내민 순간, 진청색의 하늘이 느릿하게 밝아오는 순간을 시 중간 중간에 넣고 있었다. 점점 해는 위로 올랐다. 점심의 풍경을 담고 있었다. 해가 절정에 떠서 찬란히 부서지는 빛더미, 밀려오는 파도와 쓸려가는 진주의 포말이 사진에 담겨 있었다.

 

ㅡ나 상담 그만뒀다?

그 말을 흘려내는 화의 얼굴은 밝았다. 묘하게 승리의 표정을 담고 있기도 했고, 해방의 표정을 담고 있기도 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가 진짜? 하고 되물었다. 화는 입을 다물고 움푹 보조개가 패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ㅡ이제 상담 받으러 안 가도 돼.

ㅡ잘됐다. 너 상담 받는 거 싫어했잖아.

ㅡ으응, 그랬지.

화는 간단하게 답하더니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ㅡ근데 그거 어떻게 알았어?

ㅡ네가 나한테 말해 주지 않았어?

ㅡ그랬던가…….

화는 말꼬리를 흐렸다. 작은 것은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투였다. 화가 그리 자랑스럽게 이야기한 것은 내가 여든 번째 시를 읽은 날이었다.

 

*

낙화

 

발자욱을 남긴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모조리 어둠이다.

허공 우에 발자욱이 남는다.

바람을 타고 남는다.

저 위에서 회오리치는

꽃잎의 향연!

붉게 남는다.

너는 내게 남는다.

멎어서도, 남아 있다.

*

 

나는 굳이 화의 일기장을 읽으려 들지 않았다. 물론 시집 자체가 화였으므로 그런 것도 있었지마는, 퍽 오래 전부터 화의 일기장은 용기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기를 갈구하는 내용이었다. 조금 더 용기를 달라고, 조금만 더 용기를 달라고. 며칠씩이나 그런 내용이 계속되었고, 나는 차라리 시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용기를 얻는다는 것은 어쨌거나 좋은 징조였으므로. 게다가 화의 행동거지는 항상 착함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꽤 명랑해진 것이 눈에 띄었으므로,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화의 글을 읽었고, 화는 공부를 했다. 어쩔 때는 글을 썼다. 우리는 며칠 전처럼 다시 함께 도서관에 가기 시작했다. 화는 다시 문학을 빌렸고, 나는 도서관 한구석에 박혀서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우리는 함께 급식을 먹으러 갔고, 매점에 갔고, 오케스트라 연습에 나갔고, 화는 풀내음에도 꼬박꼬박 나갔다. 분명 평소와 같은 삶을 살고 있었지만, 집에 돌아온 것 같은 편안함이 지금은 존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의 화근은 상담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ㅡ나 오늘 외박해.

ㅡ신청했어?

ㅡ응. 그래서 일요일에나 돌아올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 백한 번째 시를 읽었고, 내일이면 마지막 백두 번째 시를 읽을 차례였다. 마지막 시는 화의 앞에서 낭송해 줄 생각이었으므로 남겨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외국에서는 시 낭송회를 비교적 자주 연다고 알고 있었다. 우리는 고등학생이었고, 앞으로 적어도 일 년 반 동안은 시 낭송회는커녕 마음 놓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조차도 주어지지 않을 테였기에 화의 시에 대한 마지막 예의를 차리고 싶었다.

화가 침대에 없었다. 나는 화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물망초 냄새가 약하게 났다. 시집을 펼쳤다. 보면 볼수록 화와 닮아 있었다. 표지부터가 화의 일기장과 같지 않았는가. 사진들만 눈에 담으며 책장을 넘겼다. 정오를 지난 그 시점부터는,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동해에서 본 것과 같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따뜻한 느낌은 결코 아니었다. 외려 바다의 본디 모습이 생생히 살아나는 것 같았다. 해가 서서히 지는 바다는 조금은 차가웠고, 서늘했고, 한편으로는 무심했으나 다시 보면 모든 것을 끌어안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에는 바다 사진을 보고선 놀란 기색을 감출 수 없었으나, 익숙해지자 예상외로 잘 어울려서 나는 시 몇 편에서 멈추어 바다 사진과 함께 시를 손으로 훑어가며 읽곤 했다.

 

11

화가 죽었다.

 

시신이 동해 바다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바닷가로 시신이 떠밀려오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불행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었는지 화는 살아 있을 적 그대로 해안가 한구석에서 잠든 듯, 그렇게 있었다고 했다. 시신에 외상은 없다고 한다. 바다 위의 절벽에서 떨어져 내렸을 것이라고, 사인은 자살이라고 예상하고 있단다.

처음 세상 밖으로 이야기가 나온 것은 월요일이었다. 금요일에 외박을 갔고, 그 후로 학교에도, 기숙사에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일요일 밤에도 기숙사에 들어오지 않은 화가 마음에 걸리기야 했다만 설마 큰 일이 생겼으리라고 짐작할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하루 더 자고 아침 일찍 오려나 보다, 라고 생각하고만 있었다.

 

눈을 감는다. 침대에서 옅게 물망초 향이 피어오른다. 동해 바다가 떠오른다. 이제는 잡을 수 없이 먼 기억이 되어 버린 바다다. 나는 그것을 애써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려고 눈을 떴다. 세상이 자꾸만 섞였다. 열에 달떠 꿈과 현실을 헤매고 있던 그 순간처럼 세상이 이지러져서, 나는 눈을 다시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아름다웠던 광경이 선하다. 화가 등장한다. 연극배우처럼 비틀거리고 있다. 바다를 바라보는 뒷모습이 출사를 갔던 그 때와 같았다. 여린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듯이, 그렇게 비틀거리고 있다. 오래간 바다를 바라본다. 화는 멈추어 서서 꼼짝하지도 않고 모래에 뿌리를 박고, 오래 서 있다. 그러다가 장면이 바뀐다. 몰아치는 파도가 검다. 밤이다. 그 날 밤은 청명했고 달무리가 져 있었다. 달빛이 워낙 밝아서, 그것만으로도 물체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 선연하게 가슴을 찌르는 아픔에 나는 겨우 그만, 이라고 공기를 뱉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너무도 생생했다. 나는 그것을 외면할 수조차 없었다. 깨문 입술에서 비릿하게 피 맛이 났다. 화는 달무리 밑에서 절벽 위로 올라가고 있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고요히 자신의 몸을 위로, 위로만 올려 보내고 있다. 비틀거린다. 달무리는 점점 낮아지는데, 화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마치 둘이 만나려는 것만 같았다. 끝을 알 수 없는 저 아래로 끝없이 침잠하는 것보다 끝이 보이는 저 위로 올라가는 것을 화는 택했다. 화의 눈은 생기를 잃어 있었다. 여태껏 보지 못했던 내려가 있는 입꼬리와 웃음기 없는 얼굴이 생경했다. 이질적인 소녀가 남청색 교복을 입고 밤 아래에서 바람을 맞으며 올라가고 있었다. 화의 눈앞에는 끝내 담담하게 흐르는 바다가 펼쳐졌다.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가장 깊은 공간이다. 심해다. 잡아먹힐 것만 같다. 안 돼. 제발 그만 해. 나는 머리를 감싸고는 거의 쥐어뜯을 듯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으나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울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이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 있을까. 환영마냥 또렷이 보이는 이 광경을 어떻게 해야 죽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그런 생각에 휩싸여 있는 도중에도 내 앞에서 천천히 슬로우 비디오처럼 지나가는 장면들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화가 바다를 내려다본다. 달이 화를 내려다보고 있다. 저 위에서 별들이 반짝이고 있다. 처량하고 구슬프게 울고 있는 별들의 눈물이 내리고 있다. 화의 시선이 떨어진다. 머뭇거린다. 발이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했다. 입술을 이로 물기를 여러 번이었다. 화는 기어이 눈을 감았다. 화 자신마저도 자신을 외면하고 싶은 듯이, 도망치고 싶은 것만 같이.

화는 울 것만 같아 보였다. 눈에, 목에, 손에, 온몸에 울음이 가득 차 있는 것이 눈에 선했다. 슬프고 아픈데, 울음을 표현해내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마냥 손을 꽉 쥐고 고개를 떨어뜨리기만 했다.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고, 그러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주저앉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 화는 제 허파에 숨을 가득 집어넣었다. 그것은 화가 자주 하던 버릇이었다. 단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화가 웃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화야. 나는 나도 모르게 끓는 목소리를 흘려버렸다. 해화.

 

어째서 그렇게 슬픈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던 거야. 왜 혼자 모두 짊어지고 가려고 했던 건데.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 내가 도와줄 수 있었을 거 아냐. 나의 중얼거림은 이내 젖은 목소리로 바뀌었다. 미안함과 죄책감과 분노와 자괴감과 무기력함이 한데 섞인 약물을 내 등에 꽂아 주사한 것 같았다. 척추로부터 찌릿하고 온몸을 잠식하는 감정들이 버티지 못하게 했다. 간신히 일어서 있던 나를 주저앉혔다.

화가 다시 뜬 눈에는 밤의 바다가 담겨 있었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만 같은 밤바다가. 화는 얼마나 거기에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화는 꽃이 될 순간만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말을 알고 있었으나 꽃이 떨어지지 않기를 빌었다. 바람이 불지 않기를 빌었다. 부디 꽃잎이 날리지 않기를 빌었다. 그 날은 바람이 불지 않았어야 했다. 잠잠하기만 했어야 했다. 나는 순간적인 폭발이 일어난 것만 같은 머리에 눈을 더 질끈 감았다. 화의 발이 움직였다. 화의 시야 오른편에서부터, 서서히 꽃이 지고 있었다. 분홍색 꽃이 달빛에 반사되어 날리고 있었다. 화의 발이 어렵게 움직였다. 반대 발이 움직였다. 끄트머리에서 절벽 안쪽으로 들어온 다음,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발을 떼었다. 꽃처럼, 졌다.

나는 기어이 화의 향이 남아 있는 침대에 얼굴을 묻고 끝내 울었다.

 

*

어느 학생의 기도

 

달님

내일 아침에 제가 눈을 뜨지 않게 해 주세요

만일 눈을 뜬다면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는 순간 파랑색 트럭이 달려오게 해 주세요

계단에서 발이 미끄러지면 계단 모서리에 뒷목이 박히게 해 주세요

급식에 청산가리 조각이 섞여 들어가 모르고 목구멍으로 넘기게 해 주세요

근처 차도에서 차가 급발진해서 인도를 들이받게 해 주세요

가정 실습 시간에 통조림 뚜껑으로 손목을 깊게 베이게 해 주세요

팔 층 기숙사에서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면 추락하게 해 주세요

어둠에 먹힌 공기 없는 창고 안에 저를 가두세요

 

달님

어떤 연쇄살인마가 거리를 지나갈 때 제 심장에 칼을 꽂아 넣게 해 주세요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앗지 말고 제 명줄을 쥐고 흔드세요

배에 칼을 찌르고 빼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해도 좋아요

처참하게 생기를 잃어 가는 눈을 보며 차갑게 웃어도 괜찮아요

싸늘하게 식어버린 사체를 가지고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요

난도질을 하든, 토막을 내든, 칼로 문양을 새기든,

피를 모아서 물감으로 사용하든, 살점을 먹든, 장기를 적출하든, 뼈를 취하든

제 몸통을 단번에 뚫게 해 주세요 숨이 멎도록

 

달님

저는 겁쟁이라서 제 손에 칼을 쥐고 마지막을 삼킬 수 없어요

그러니 부디 사랑하는 나의 달님,

내일 아침에 제가 눈을 뜨지 않게 해 주세요.

*

 

화의 시집의 마지막 작품을 읽었다. 화의 유작이다. 꽃 하나만 남기고 떠났다. 마지막 시는 꽃을 담고 있지 않았다. 화의 첫 일탈이었고, 마지막 일탈이었다. 그리고 화가 끝까지 부르짖었을지도 모를 언어의 나열이었다. 몇몇 구절은 일기장에서 보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나는 마지막 시를 다시 한 번 소리 내어 읽었다. 목이 메어서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렇대도 나는 단어에서 단어로, 행에서 행으로 더듬어 가며 숨을 뱉었다. 달님. 저는 겁쟁이라서 제 손에 칼을 쥐고 마지막을 삼킬 수 없어요. 그러니 부디 사랑하는 나의 달님, 내일 아침에 제가 눈을… 뜨지 않게 해 주세요…….

화는 갔다. 자신이 원하던 대로, 문학상 원고 속의 소녀처럼 꽃이 되어 바다에서 죽었다. 꽃이 되어 졌고, 바다에서 죽었다. 아름답게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화의 말처럼, 화는 아름다웠다. 꽃이었다. 너는 지기 위해 태어난 꽃이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꽃이었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시집의 마지막 맺음말을 삼켰다.

 

나는 아직도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는데.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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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드

* 엔터가 아무리 해도 안 되어서 pdf 파일을 첨부합니다. 글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니 꼭 pdf로 읽어주세요.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클릭  》 더 레드 더 레드 *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체온 사이의 서사를 옮겨 적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풍경을 글로 묘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써넣은 낱말이 이 세상에서 부드럽게 사라진다고 가정한다면…… 그러면 어떤 세계에서든 언제나 가장 먼저 멸종할 단어는 빨강이다. * 피터, 하고 부르면 빨간 베레모를 쓰고 벤치에 앉은 203이 익숙하게 돌아본다. 그게 낯설어 나는 못내 아쉬운 투로 203을 발음했다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다시 한 번 피터, 하고 입술을 맞붙인다. 피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모자를 비스듬하게 고쳐 썼다. 귀 뒤로 쓸어내려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이 베레모 그림자 아래로 구불구불 흘렀다. “이제 좀 익숙해졌어?” “여전히 내가 왜 널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지 말해 줄 생각은 없고?” 피터는 한 손을 바닥에 짚어 무게를 실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피터가 종종 이상한 고집을 부리곤 했지만 번호 대신 이름을 불러 달라는 건 지금까지의 숱한 요구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테였다. “농담으로라도 익숙해졌다고 해 봐. 그럼 알려줄게.” 확신하는데, 214 네가 좋아할 만할 일이야. 피터는 그렇게 덧붙이며 가늘게 눈웃음을 쳤다. 이럴 때의 피터는 어렵다. 가늠하기도, 꺾기도. 이기지 못할 것을 예감한 나는 손을 뻗어 괜히 피터의 눈꼬리를 엄지로 꾹꾹 눌러댔다. 피터는 개의치도 않고 발랄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또 재촉한다. 알았어. 익숙해졌어. 이제 됐지?” 여전히 피터는 웃는 낯이었다. 나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터는 내 몸을 당겨 자기 몸에 바싹 붙였다. 몸이 피터 쪽으로 기울면서 새하얗고 빳빳한 교복 와이셔츠 칼라에 그늘이 졌다. 피터라는 이름보다는 훨씬 익숙했으나 여전히 몸에는 힘이 바싹 들어가는 게 척추부터 손가락 끝까지 느껴졌다. “책을 한 권 발견했어, 214.” “그건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많잖아.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니야, 들어봐. 우리가 읽었던 책이랑은 다르단 말이야.” 피터는 자신을 밀쳐내는 내 손목을 쥐고 눈을 반짝였다. 뭔데. 나는 옅은 한숨을 쉬고 피터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피터는 그제야 내 손목을 놓고 뒤집힌 치마 끝단을 다시 뒤집어 정리하며 길게도 뜸을 들였다. 피터는 늘 침묵이 죄의 씨앗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만은 예외인가 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잖아?” “응, 레포트 쓸 때 많이 읽었지.” “세상에 배울 게 없는 책이 있다고 한다면 믿겠어?” “그런 책이 있을 리 없는 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네 직속선배 203이 집필부라며.” 그러면 이제 직속선배 203도 직속선배 203이 아니라 직속선배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실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가 비를 다 쏟아

  • 윤별
  • 2018-11-30
플루토 카니발

플루토 카니발         만일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내 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라. 누군가에게 나쁜 위성이라도 되고 싶다는 게 어떤 건지를. 잘 지내? 너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나, 그래서 난 자꾸만 이렇게 소포를 보내고 편지를 써. 아주 작고 미세한 나에게 너는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무거워서, 네 곁에 있지는 못해도 이렇게라도 자주 보내면 잊히지는 않겠지 하는 언니의 작은 소망이라고 생각해. 라, 오늘은 명왕성을 가지고 왔어. 가벼운 무게로 비틀린 궤도를 돌고 자기 위성에게까지 흔들리는 행성. 기억나? 네가 행성 같다고 내게 말했던 거. 너는 지금까지 해 왔듯 흔들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작고 위태로운 게 어린 널 닮았더라. 그냥 그렇다고. 라, 보고 싶어. 내일도 모레도 네 이름처럼 마음껏 신경 쓰게 해 줘.   *     밀크티 마실래? 우유 있어? 산 속이라도 있을 건 다 있어.   카론, 너 이사 온 지 벌써 한 달이야. 이젠 알 때도 되지 않았어? 라는 주머니에서 굴리던 손을 뻗어 선반에 놓인 컵 두어 개를 쥐었다. 나는 라의 말에 구태여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내 이름 대신 제멋대로 붙여 준 카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건 익숙했다. 작고 아담한 오두막집은 아늑했다. 신발에 묻은 눈을 채 털기도 전에 라가 벽난로 앞에 원목 의자 두어 개를 급하게 놓았다. 원래 작업실엔 사람을 잘 안 들여서. 변명처럼 말을 덧붙이던 라는 불 위에 걸어 둔 쇠막대에 주전자를 걸었다.   별로 안 걸리네. 우리 집에서 그렇게 안 멀다고 했잖아.   우유는 도통 끓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는 자꾸만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려고 했다. 얌전히 있는 불에 눈을 찌푸리기도 했다. 놓아 둬. 나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아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얌전히 무릎 위에 놓인 저 두 손으로 만들어졌을 시계들이 수납장 위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네가 만든 거지? 다 완성된 거야?   턱짓으로 시계들을 가리켰다. 라는 시선을 돌려 내 턱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더니 의자에 몸을 꺼뜨리듯 기댔다.   아직.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해 보이는데. 아니야, 아직.   라는 고개를 저었으나 내 눈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시계 부품들이 짜임새 있게 잘 맞물리는 것 같았다. 나는 시계를 뜯어보듯 찬찬히 살폈다. 과연 전에 일러 주었듯 고가에 팔리고도 남을 만큼 빛이 났다. 옆에서 한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중앙에 빈 공간 있잖아. 거기에 넣기만 하면 끝나. 보석? 비슷한 거.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 라는 피하던 시선을 둘 곳이 생긴 것이 기쁘다는 듯 손잡이를 잡았다. 라는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주전자에서 나오는 김이 라의 얼굴을 잠시 가렸다가 이내 흩어졌다.   그래서, 일은 잘 돼 가? 피해자가 한둘이어야지. 여기 오기 전에 거의 다 모았었어.

  • 윤별
  • 2018-06-30
현상흔

현상흔   빛이 꼭 은신한 뱀 같았다. 며칠 전 촬영의 대가로 얻은 손목의 통증과 불면이 두통을 몰고 왔으나, 무영이 앓는 환시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출사 날마다 빛은 사정거리 내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독사 꼴을 했다. 천변에서의 촬영은 지난해 겨울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영이 눈가를 가볍게 찌푸렸다. 갈색 홍채가 투명하게 비칠 만큼 날이 좋았다. 무영은 물에 반사되는 빛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길게 응시했다. 강물 위에서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오리배를 타고 있었다. 볕을 받은 빨간 줄이 무영의 손목을 한 바퀴 휘감아 마치 실팔찌처럼 보였다. 아픔을 몇 번이나 더 찍을 수 있을지를 무영은 흐릿하게 가늠했다. 한 번. 운이 좋다면 두 번까지. 무리해서 찍으면 손목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걸 무영은 알았다. 사실 지금 잘린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상흔이 깊었다. 무영이 한숨을 쉬자 빛을 가려낸 손바닥 아래로 피사체와 피사체의 보호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앳된 여자아이와 한 쌍의 부부였다. “안녕하세요.” 무영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목에 걸린 카메라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여자가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무영은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리본을 매단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영의 볼 양쪽에 의례적인 웃음으로 만들어진 보조개가 움푹 팼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상반신만한 코커스파니엘을 품에 안고 있었다. “최대한 즐거운 감정을 담아 주세요. 천변에서 강아지랑 놀게 둘 거예요.” “강아지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여자가 잠시 여자아이 쪽을 바라보다가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침묵은 매미 소리에 묻혔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따가운 볕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갈색 아이브로우로 진하게 그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일처리에 능숙한 십일년차 사진사였다. 무영의 손이 카메라 전체를 훑고 지나가는 동안 여자는 여자아이의 갈색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마지막이라고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남자는 자신의 딸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가 딸아이의 손에 빨간 막대사탕을 쥐어주고 나서야 무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선배의 목소리가 언뜻 스치는 것 같았다. 날이 좋은 날에는 노출값을 줄여야지. 감정을 놓치면 안 돼. 무영은 조리개를 조금 더 닫고 테스트 컷을 찍었다. 무영은 시시때때로 뒤바뀌는 초점을 좇았다. 피사체는 강아지를 따라 달렸다. 점박이는 샛초록색의 여름 잔디로 뛰어들었다. 피사체가 강아지를 겨우 따라잡고서 품에 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혔다. 강아지의 꼬리가 쉴 틈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무영은 여자아이의 가장 즐거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셔터에 손을 올렸다. 무영의 미간에 얼핏 주름이 잡혔다가 풀어졌다. 여자아이가 이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다가 갑작스럽게 강아지

  • 윤별
  •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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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역

    죽지 말고, 살아서, 꼭 있어주세요. 자신이 바라는 자신의 이상적 모습이 너무 많아서 좀 걱정됐네요. 대단하고 아름답습니다. 해화가 역점을 둔 바와 같이, 묘사가 수려하고 자연스러워요. '양서'를 '고전 양서'로 바꾸는 약간의 용어 수정과 할머니가 유를 도와주는 장면에서 개연성이 좀 적게 느껴진다는 것, 04에서 다른 학생들과 바다에 가는 장면은 이후 전개를 시사해주는 장면 외로는 제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정도 퇴고할 부분으로 보이네요. 내내 바다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차라리 어느 정도 지면을 할애해서 전체적인 배경을 그려내주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두 사람 간의 관계가 너무 두각되는 나머지 다른 인물, 배경이 동떨어져보이는 정도가 줄어들 것 같습니다. 개연성도 강조될 거고요.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과 여러모로 겹쳐보였어요. 18세에 자살기도도 그렇고, 암울한 분위기라든지, 겉보기엔 유하고 온건해보인다든지, 수재였다든지. 일기장이 등장하는 것도 그렇네요.

    • 2016-06-15 00:49:43
    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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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세한 평 감사합니다. 말씀해 주신 점 참고해서 방학 중에 퇴고해봐야겠어요.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은 퇴고가 전부 끝난 후에 읽어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16-06-20 13: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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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에 썼던 작품입니다. 시험이 끝나고 낯설게 느껴질 때즈음 퇴고하려고 했는데 늦어져 버렸네요. 퇴고 전에 어느 부분을 더 조밀하게 짜야 할 지 모르겠어서 도움을 받고자 글을 올립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 2016-06-08 18:5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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