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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방패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6-04-26
  • 조회수 495

우리는 인간방패입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은 격렬한 진동과 함께 시작되었어요. 땅이 흔들렸고, 어머니는 나를 안고 허겁지겁 뛰었습니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어머니의 품속에 고개를 묻으며 옷자락을 그러쥐었어요. 여자의 높은 비명을 시작으로 무엇인가가 터지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귀에 꽂혔어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불을 뿜었고, 채 피하지도 못할 속도에 사람들은 사방에서 픽픽 스러지고 있었어요.

내가 조금 더 컸을 때는 그 광경을 생생하게 보아야만 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자 동생 하나씩을 품에 안고 있었거든요. 아직 보송한 동생에게 젖을 물리며 어머니께서는 나긋한 목소리로 내가 난 나라가 스리랑카라고 알려 주셨어요. 찬란히 빛나는 섬이라는 뜻이라며 내 손을 잡았습니다. 그렇지만, 내 눈에 보인 이곳은 빛은커녕 어둠으로 죽어가고 있어요. 피가 빛을 삼키고 총이 사람을 삼키고 있어요. 그 이름은 어울리지 않아요, 라며 고개를 젓자 어머니께서는 곧 빛이 돌아올 거야, 라며 내 손을 더 꽉 잡았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적어도 어머니께서는 그 빛을 볼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어머니께서는 우리에게 나무를 껴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이 여름날에도 아름다운 봄을 맛볼 수 있다고. 그래서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나무에 올라갔어요. 나무 꼭대기에 맞닿으면 저 끝 어딘가에서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요. 그럼 우린 그것을 봄이라고 부르곤 했어요. 그 바람에는 포근한 라일락과 묘한 향기가 함께 섞여 있었으니까요. 생경한 향기였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봄이라고 불렀어요. 어머니께서 밥 먹으라며 부르는 소리마저도 봄이었습니다. 어쩌면 어머니께서는 우리에게 봄을 껴안으라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절하게요.

 

그 날 밤,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마을이 불길에 휩싸이던 그 날 밤에도 우리 셋은 나무에 바싹 붙어 있었습니다.

떼거리로 몰려온 사람들이 다른 쪽에서 밀려들어오는 군인들에게 총을 쏘아대더니, 마을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육탄전을 벌였습니다. 헬기가 투두두두, 투두두두 소리를 내며 위를 맴돌고 있었어요. 나는 내 동생들을 꼭 껴안고 있었습니다. 무서워서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어요. 나무가 부디 셋을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기만을 기도했어요. 내 눈에 보인 건 아버지였어요. 아무런 무기도 없이 무어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열댓 명이 모이자 헬기에서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어머니 쪽도 마찬가지였어요. 인간방패였습니다. 나는 그 애들의 머리를 내 품으로 끌어안았어요. 소리 내어 울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마저 죽을 것만 같아서 나뭇잎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더 이상 봄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리고 어머니가 무참하게 폭격에 맞아 죽는 모습을 보고선 나도 따라 죽으려고 했었습니다. 군인들이 떠난 우리의 마을은 온데간데없었고 널려 있는 사체만이 어젯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어요. 나는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지나서야 굳은 몸으로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었습니다. 내가 살아남은 것이 죄악이라고 생각했어요. 전부 타 버린 이 참혹한 광경 속에서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나을 것만 같았어요. 나는 날붙이를 찾아 미친 듯이 헤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칼을 발견했을 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세 살배기 여동생이었어요.

울지도 못하고 잠긴 목소리로 내 이름만 리시아, 하고 부르고 있는 여동생 앨리를 보자마자 나는 그 아이를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습니다. 그 옆에선 일곱이 겨우 된 남동생 비가 내 옷자락을 잡았어요. 칼이 손에서 떨어졌고, 나는 울지 않으려고 다시 노력해야만 했어요. 내 손을 잡은 어린아이 둘이 내 마음마저 움켜쥐고는 놓아 주지를 않았어요. 내가 이제는 저 애들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꼈어요.

 

우리는 지금 걷고 있습니다. 어디로든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걷고 있어요. 함께 걷는 무리 속에서 죽어 가는 사람이 여럿입니다. 몇몇은 먹을 것이 없어서 아사하고, 몇몇은 총에 맞아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죽어요. 총탄이 우리 중 하나의 몸을 꿰뚫으면 우리는 허겁지겁 흩어져요. 풀숲으로 숨기도 하고, 개울로 뛰어가기도 해요. 나는 내 동생들의 손을 잡고 몸을 숨길 공간을 찾아요. 숨지 못한 사람들은 그대로 인간방패가 됩니다. 나는 숨을 죽이고 내 동생들을 껴안고만 있어요. 동생들의 눈을 가려요.

죽음은, 어른들이 해 주던 옛날이야기나 책에서 묘사된 것 같이 영웅적이고 아름답지 않아요. 탕, 하고 소리가 한 번 나면 한 사람이 고꾸라집니다. 더 이상 움직이질 못해요. 그리고 쓰러진 사람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야 말아요. 넘어지면 끝장이에요. 밟히고, 채이고, 말 그대로 피투성이가 된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해요. 그게 다예요. 우리가 숭고하다고 배웠던 죽음과는 너무도 다른 마지막.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면 우리는 다시 모여듭니다. 어른들은 반군이니, 정부군이니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나는 둘의 차이점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양쪽 다 우리를 죽이려 드는데요.

어제 밤에는 내 동생 비가 죽었어요. 비가 넘어졌고, 우리는 계속 달려야만 했어요. 일으켜 세워서 뛰고 있는데 비가 갑자기 중심을 잃더니 앞으로 고꾸라졌어요. 나는 다시 비를 일으켰어요. 비는 화살에 맞은 사슴마냥 자꾸만 비틀거렸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비가 총에 맞은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비, 뛰어! 빨리! 나는 고함을 질렀고 비는 그 몸으로 악착같이 뛰었습니다. 숲 속에 도착해서야 비의 몸에 총탄이 박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총알이 나온 흔적이 없었어요. 할 수 있는 것 또한 없었어요. 비는, 가쁜 숨을 계속해서 쉬었습니다. 아프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대체 무엇이 이 어린 아이가 자신을 숨기도록 만들었을까, 하고 비의 손을 잡고 쉴 새 없이 도닥였습니다. 내가 눈을 들었을 때는, 이미 비는 고통 없는 곳으로 떠난 후였어요.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세 명의 사람을 차례로 잃었고, 그들은 잔인하게도 내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 의해 스러져 갔습니다.

 

문득 겁이 나요. 죽음에 익숙해져가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겨우 열네 살인데, 내 나이보다 더 많은 죽음을 보았고, 내 나이보다 더 많은 전쟁을 겪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요. 그 때에도 나의 부모님이 죽었을 때처럼, 그리고 어제처럼 죽을 만큼 슬퍼할까요. 아니면 그 때쯤이면, 죽음을 너무도 많이 목격해서 무덤덤할까요. 그것도 아니면 나 스스로조차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서, 슬픈 감정조차 토하지 못할까요.

이제 나의 세계에는 앨리와 나밖에 남지 않았어요. 공기는 앨리에게서 웃음을 앗아갔습니다. 우리는 무리에 섞여 걸어갑니다. 나는 종종 울고 싶어지는 날에는 자고 있는 앨리를 꼭 안아요. 앨리는 뒤척이고, 나는 그런 앨리를 한참이나 쓰다듬다가 밖으로 나옵니다. 불침번을 서는 사람들이 바뀌고,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올 무렵까지도 나는 밤하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어요. 저 어딘가에는 어머니가, 아버지가 있을까 하고. 오늘 새벽에는 비가 무사히 올라가기를 기도했어요. 어머니 품에 안길 수 있기를.

있잖아요, 나는 아무래도 우는 법을 잊은 것 같아요. 간밤에 슬프고 아프고 도무지 제 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울고자 했는데도 나는 울 수 없었어요.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소리 내어 울음을 토해내려고 숨을 들이켜도 으으, 으으 하는 괴상한 소리만 나올 뿐 입 밖으로 울음이 터지질 않았어요. 뱉어내질 못했습니다. 사막에 있는 것만 같았어요. 주위가 점점 피폐해져 가고 있어요. 황폐해요.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는 곳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고개를 들어, 환하게 빛나고 있는 북극성을 오래오래 바라보았어요. 그것은 시리도록 희어서, 어쩐지 나와 같이 외로워 보였거든요. 나처럼 홀로 아파 보였거든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도, 죽음을 피해 숨는 일도 없는 나라가 있다고 해요. 함께 걷는 사람들에게서 건너들은 이야기입니다. 찬란한 섬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상향과도 같은 세상에 대한 묘사가 넘쳐납니다. 그곳에는 봄이 있대요. 향기롭고 어여쁜 봄이 있대요. 작열하는 태양 아래를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우리는 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만물의 생명의 어머니인 봄에 대해서요.

나는 아직도 나무 위에서 느끼던 봄을 잊지 못하고 있어요. 그 바람이 데려다 주던 꽃향기와 따스한 기운을, 손을 넣어 헤집던 엘리의 머리카락을, 어머니께서 밥 먹으라고 부르던 소리를, 우리를 감싸 안던 산들바람을, 눈을 위로 올리면 보이던 파아란 하늘을. 나는 아직도 나무 위에서 쏟아지던 봄을 잊지 못하고 있어요. 내게 내리던 찬연한 빛을, 피와 총과 병과 모든 무기로부터 해방된 것만 같은 느낌을, 모든 어둠을 몰아내고 웃어 보이던 나무를, 나무껍질의 싱싱한 냄새를, 나무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매미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봄을 보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어요. 작은 여자아이에게 봄을 보여주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어요.

우리에게도 봄이 올까요? 밤마저도 따스한, 피비린내 대신 향긋한 꽃향기가 대지를 메우는 그런 봄이 올까요? 내가 글씨를 한 자 한 자 적고 있는 지금은 추운 여름밤이에요. 나는 언젠가, 봄바람이 불어오는 밤에 별을 볼 수 있을까요. 그 봄날 밤에는, 나도 기어이 울 수 있을까요.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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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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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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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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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설

    아주 잘 읽었습니다. 많이 늦어 미안하고요. ㅡ 요즘 우리가 처한 현실의 척박함을 은유적으로 비유하고 있는 소설이었다고 생각이 들어요. 사는 것이 고단하고, 매일매일은 '폭격'을 맞은 것처럼 심란하고, 희망이 없으니 '봄이 올까요?' 물어도 답을 들을 수 없는 곳. 그런 현실을 은유적으로 그린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월장원으로 뽑게 되었어요. 다시말해 작가의 시선이 성숙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한 시선은 성숙한 세계관이니까요. 그런 작가의 눈을 계속 발전해나가길 기원합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요, '내가 난 나라가 스리랑카라고 알려 주셨어요' 라는 부분이에요. '태어난 나라'라고 해야 조금 더 자연스러운 문장일거고요. 저는 '스리랑카'라는 것 때문에 자꾸 혼동이 되었어요. 그것이 큰 의미가 있는 것일까(제가 세계사에 무지한 탓도 있겠죠), 있다면 한국인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국적과 상관없이 인간의 이야기/인류의 이야기로 읽어야 하는걸까? 그렇다면 굳이 스리랑카여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하는 의문들 말이죠. 작가가 독자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해줄 필요는 없어요. 다만, 메시지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생략과 왜곡도 필요하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주 즐거이 잘 읽었습니다. 어쩐지 남의 이야기같지 않았거든요. 저는 그것이 공감이라도 믿어요. 좋은 소설은 독자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만들어주는 작품이라고 믿어요. 앞으로도 계속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쓰시길 바랍니다. 기대할게요.

    • 2016-06-09 00:42:48
    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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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사합니다. '스리랑카'는 현재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이에요. 인간방패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고, 조금 더 찾아보다가 스리랑카의 타밀족과 정부군 사이의 내전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예전에 글틴에 글을 올렸을 때, 추상적인 글들을 한창 썼던 시절, 조금 더 구체적인 상황을 지정하는 것이 좋다는 선생님의 지적에 조금 더 구체성과 현실성을 부여하려다가 스리랑카를 택하게 되었네요. 인류의 이야기로 보아야 하는 부분들이 맞아요. 그저 하나의 장치였을 뿐이었어요. 좋은 평 감사합니다. :)

      • 2016-06-09 18:4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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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사장님

    • 2016-05-03 23:50:18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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