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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죽였습니다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6-03-18
  • 조회수 477

 나는 나를 죽였습니다.

 

 정확히는 죽이고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아마 몇 분 지나지 않아 죽을 텝니다. 정말이에요. 지금 제 눈에는 새빨간 피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낭자한 핏자국에서 시선을 돌리면 이미 손에서 떨어져 나간 천 몇 백 원짜리 커터칼이 피에 절어 있어요. 온통 붉은색이 공기까지도 잠식해버린 이 시점에서, 제가 죽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겠어요. 지금은 아주 좋습니다. 처음에는 손목이 많이 욱신거렸습니다. 고통의 범주에 들어갈지는 모르겠지만, 아프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감각은 금세 무뎌지더군요. 이제는 통증이 없어요. 마약계 약물을 복용한 건 아닙니다. 제가 그런 걸 어떻게 구하겠어요.

 나는, 수도 없이 죽어 버리고 싶다고 외쳤어요. 어느 무엇도 잘 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봐줄 만하다는 평을 듣는 것은 공부, 정도였네요. 연필을 잡고, 눈을 내리고, 상상력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낼 수 없는 책을 펴 두고 흑연을 덧칠하는 일의 반복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머릿속에 들어가 있어야만 했고 얼마나 들어 있는지가 승패를 좌우하는 게임이요. 

 공부라는 건, 인생을 건 도박게임과도 같았어요. 열아홉 해를 꼬박 보내면서 그 중 열다섯 해를 머릿속에 최종 게임을 위한 준비에 씁니다. 개중 사, 오년은 유익했어요. 간단한 사칙연산이라던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예의라던가, 내가 알지 못했던 지식들을 재미있게 배울 수 있었거든요. 나는 내가 배운 것들을 써먹을 수 있었어요. 입을 빵긋거리며 가게의 간판을 읽기도 했고, 손가락을 하나 둘 꼽아 가며 빌지에 적힌 가격을 계산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신이 나서 방방 뛰곤 했었어요. 내가 무엇인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거든요.

 그렇지만, 나머지 열 해에는 늘 인생을 사는 데에는 쓸데없는 지식들만 머리에 우겨넣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하나를 알고 나면 시험이라는, 누가 만들었을지 모를 제도에 몸을 맡겨야 했고, 나의 성적은 퍽 좋았습니다. 칭찬이 좋았어요. 사람들이 나를 대단하다는 눈으로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괜히 으쓱해지기도 했고, 수줍어 몸을 배배 꼬기도 했었지요. 그렇지만 재미는 없었어요. 나는 점점 내가 배운 것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었어요. 

 중학교 삼 학년 때였어요. 나는 전국에서 퍽 유명하다는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고, 벚꽃이 필 때쯤 미적분학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도대체 삼각함수가 어디에서 쓰이는지도 몰랐고, 미분과 적분을 하는 과정이 대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찾아낼 수도 없었어요. 정사영은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써먹을 곳이 보이질 않았고 무한의 세계는 정말이지 무엇을 하는 데 사용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궁금증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그것들을 찾아보려고 하면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어요. 숙제를 하지 못했습니다.

 

 있잖아요, 나는 글을 쓰는 일을 좋아했어요. 사랑했습니다. 가장 사랑해 마지않았습니다. 노트북에 빈 한글 파일 창 하나를 띄워 주면, 나는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글을 쓸 수 있었어요. 밤이 찾아오면, 나는 어김없이 노트북을 켜고 그 위에 키보드 패드를 올려두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 준비를 하는데, 나의 하루는 그 때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잔소리도, 그 무엇도 나는 개의치 않고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손을 미친 듯이 놀리고,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이 노닐고, 내 가슴 속에 있던 언어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던 감정들이 하나로 합쳐져 정갈한 한글로 튀어나오면, 나는 내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숨을 폐 끝까지 한껏 들이마시고는 했습니다.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생각들이 공기를 마구 어지럽히고 찢고 뒹굴면 나는 그것을 그대로 한글로 옮겨두었어요. 나는 손이 빠른 편이 아니었으나 생각이 빠른 편이었기에, 그것을 옮기는 데 한껏 집중을 하다가 중간점검을 하려고 정신을 문득 차려 시계를 보면 오전 네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지요. 열두 시부터 집필을 했다손 쳐도 나는 이곳에서 네 시간을 꼼짝 않고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글을 사랑했습니다.

 내가 만들어낸 인물들을 사랑했고, 내가 아끼는 배경을 사랑했고, 물의 노래와 숲의 흔들림과 오래된 책의 냄새를 사랑했고, 그것이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을 사랑했고, 불에 찢기고 살이 전부 타올라 울음을 터트리는 느낌을 사랑했고, 가슴을 후비고 심장에 칼을 찔러 넣는대도 나는 글을 사랑했어요. 글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들떠 올라간 심장소리가 저만치 폭포수만큼 높아질 때쯤 알아차릴 수 있었어요. 나는 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요. 글이 죽으면 나도 죽고, 내가 죽으면 글도 죽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시기요? 글쎄요. 일기라거나, 수필 같은 것은 자각하지 못했을 어릴 때부터 시작했습니다. 세 살 때 썼던 그림일기장이 발견되었고 그 후로도 수십 권의 일기장이 저를 둘러싸고 있었다면 말 다 했죠. 힘들거나 아플 때마다 나는 글을 썼습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치유가 되는 것 같았거든요. 말 못 할 일이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문자로 옮겨, 곱씹고 곱씹고 곱씹어 그것이 마침내는 곪아 터질 때까지 생각하고는, 활활 타오르는 불에 종이를 던져 버렸습니다. 소설이나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제가 중학교 삼 학년 때부터였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글을 전문적으로 쓰기에는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랑은 점점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몸집을 불려 가고 있어서, 글을 쓰지 않으면 제가 아닌 것만 같았습니다. 이상했습니다. 내가 손을 들인 취미생활은 점점 퇴보되기 일쑤였습니다. 처음에는 귀찮다는 사소한 이유로 시작해서 이후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는 과정을 거쳤지요. 그래서, 무서웠어요. 부러 글을 멀리하려고 했으나, 글을 쓰는 행위만으로도 무엇인가 큰 위로가 되었던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기어이 예고에까지 생각이 미쳤고, 식견이 좁았던 나는 그것을 선생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팔 년 가까이 같은 학원을 다니면서 그렇게 심한 말을 들었던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숨이 차네요. 점점 손이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피는 뜨겁기 그지없는데, 그것을 제외한 제 몸은 점점 차가워집니다.

 춥습니다.

 

 어쨌건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원하는 고등학교에 합격했고,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공부는 어려웠어요. 성적은 곤두박질쳤구요. 세 자리 수를 벗어난 적 없던 성적의 앞자리가 8으로, 7로 바뀔 때마다 내 손은 떨렸어요. 부모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저 얘가 적응을 하지 못해서 그렇겠지, 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네요. 과제는 물밀 듯 몰려왔고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오로지 보고서였어요. 보고서를 쓰다가 막히거나 도저히 풀리지 않을 때는 새 한글창을 켜서 내가 원하는 글을 썼는데, 그것마저도 십 분을 넘길 수 없었어요. 죄책감이 들었어요. 그럴 때마다 나는 학교 뒤편 으슥한 길에 몸을 숨기고 글을 써 나갔습니다. 오롯이 나만의 공간이었으니까요.

 왜 나는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요. 실패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던 사람이 너무 큰 파도를 만나면 스러지고야 맙니다. 저는 그것을 몰랐고 치기 어린 어린아이가 으레 그렇듯 도전했습니다. 무모했지요. 저는 스러졌습니다. 무너졌어요. 실패를 거듭하면서 자존감은 땅에 떨어졌어요. 모든 사람이 저를 보고 무능하다고 하는 것만 같았어요. 무능하고, 어리석하고, 할 줄 아는 것은 밥 먹기와 숨 쉬기뿐인 그저 도움 안 되는 한 아이. 그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별과제와 프로젝트는 전부 진행되었고, 성공적이었습니다. 어째서였는지는 모르겠어요.

 그것은 3학년이 되면서 더 심해졌습니다. 고삼이라는 이야기는 부담의 연속이었고 저는 하루하루를 살얼음판 위에서 걷고 있었어요. 뾰족한 쇠파이프가 제 목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점점 조여 오고 있었어요. 아팠습니다. 무서웠습니다. 그렇대도 고등학교 삼 학년이니까, 라는 이야기로 전부 죽이고 있었어요. 저는 아파서는 안 되고, 무서워서도 안 되고, 그런 티를 내서도 안 된다고, 그리 말했지요.

 모두가 내게 그리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잠에 들면 내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깨어나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신이 있다면 부디 저를 죽음에 이르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거리를 걷다가 차가 저를 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갇혀 있는 교실에 불이 나서 저만 죽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공사장에서 떨어진 벽돌이 제 목을 쳐서 혈관이 잘릴 수 있게 기도했습니다.

 연쇄살인범이 저를 보고 단번에 칼을 꽂을 수 있게 기도했습니다.

 하늘에서 저를 구원해 주기를 기도했습니다.

 나는 내가 죽기를 바랐습니다.

 

  내가 원하던 것과는 점점 멀어지는 이상과 내가 사랑하는 것과의 격리. 격리였어요. 점점 나는 젖어들었고 수렁에 빠졌습니다. 저는 무엇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무기력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바에는, 내 운명을 바꿀 수 없을 바에는, 그저 나의 생을 끝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행복은 없었고, 내가 하루하루 살아감으로서 얻는 것이 고통뿐인 나날이라면 나의 생의 끝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었어요. 그뿐이었어요.

 그뿐이었어요.

 

 내가 내 손에 칼을 찔러 넣고, 수도 없이 벤 이유라기에는 너무 작다고 생각하시나요? 모든 사람이 전부 겪는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너무 사치스럽다고요? 그럴 수도 있어요. 사실은 그 말이 맞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와 같은 일을 겪고 있고, 아마 더 큰 아픔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어요. 분명 그런 이들도 있을 거예요. 그렇대서 제가 지니고 있던 아픔이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있잖아요, 저는 그냥…… 그냥 위로를 받고 싶었어요. 너는 할 수 있잖아, 따위의 위로를 가장한 압력이라거나, 잘 해 놓고서는, 따위의 비꼬는 어조가 아닌, 그저 괜찮다는 말 한 마디를 바랐어요. 

 그리고 역시, 그뿐이었어요.

 

 아, 이제 조금씩 눈이 감기기 시작하네요. 나는 내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압니다. 여기는 아무도 없는 골목길 한구석이에요. 나는 이곳에 앉아 종종 글을 쓰곤 했습니다. 이곳은 이를테면 모체의 자궁이에요. 모든 것을 숨길 수 있는 공간. 나는 이곳에서 나였고, 여타 공간들에서는 내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나로 죽고 싶어서 이 공간에 발을 들였어요. 나는 나로 죽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나는, 나는… 살고 싶었어요. 그 무엇보다 행복하게, 나로서 살아가고 싶었어요. 살고 싶었어요. 

 나는 살고 싶었어요.

 

 잘 있어요, 모두.

 고마웠어요.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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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설

    많이 늦었습니다. 미안해요. ㅡ 유서의 형식을 빌어 ‘나’가 얼마나 글을 사랑하는지를 아주 절절하게 묘사한 글이었습니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메시지가 강렬하게 전달되는 이야기였어요. 다만 에피소드가 부족한 점이 아쉬웠습니다. ㅡ 이야기가 흥미롭게 진행되기 위해서, 독자들이 즐겁게 몰입되어 읽히기 위해서는 적절한 에피소드가 필요합니다. 갈등이 있으면 더 좋겠고요. 갈등이란 싸움이라는 뜻이에요. 인물 간의 갈등이든, 심리적인 갈등이든지간에요.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는데요. ‘나’의 동료가 ‘나’의 이야기를 해보는 설정은 어떨까요. 멀쩡하게 학교 잘 다니던 친구가, 입시도 성공한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자살을 한 것이죠. 왜 그랬을까-. 알고 봤더니 ‘나’의 가방 속에는 습작 노트만 가득했다든지 소문이 돌고… 이야기를 흥미롭게, 독자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도록 이끌어가는 연습을 해보길 권합니다. 건강하게 건필하시길!

    • 2016-05-02 05:13:44
    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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