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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영너꿈
  • 작성일 2015-09-17
  • 조회수 838

 

 

 

 

 

 

 

 

 어둔 밤빛이 온 거리를 뒤덮은 어느 날이었다. 가로등 하나가 길거리에 힘없이 서있었고, 지저분히 터져버린 음식물쓰레기 봉투는 제 액즙을 소리 없이 토해냈다. 어두컴컴한 연기가 짙게 서린 밤길. 정현의 한숨소리는 나지막하게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시간은 적적하게 그녀의 머릿결을 스쳤고, 먹구름은 유난히도 서슬 퍼렇던 달빛을 매만지며 지나갔다. 서슬 퍼런 달빛. 그것은 마치 임종을 앞둔 사람의 뒤꽁무니를 쫓는 사자(使者)처럼 그녀의 그림자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밤거리는 기분 나쁘게도 그녀의 발목을 휘어잡는 듯 했다. 괜스레 울울해진 마음에, 정현은 조금이라도 그 골목길이 밝아지길 빌었다. 그러나 가로등의 주황빛이 바닥에 퍼지고, 담의 고양이가 기분 좋게 고양이 세수를 한다 한들. 그 어두운 거리가 갑작스레 밝게 펴질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정현은 호젓한 헛웃음을 바닥에 흘기며, 되레 잔뜩 긴장을 한 채 거리를 걸었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 그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은 그녀에게 과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오밤중에 십여 분간 걷는 일이란 새파랗게 어린 처녀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었다. 누군가 그녀의 치마 끝자락을 탐할 수도 있었고, 뭇 남성의 혈기가 그녀의 허리춤을 끌어안을지도 몰랐다. 혹여, 앞뒤 양편에서 커다란 덩치의 남성들이 그녀를 노릴 수도 있는 일 아닌가? 하지만 그 두려운 골목길. 그녀는 언제나 그곳을 지나며 살아야 한다고 강요받은 채 살아왔다. 그러하나, 슬프게도 그것은 누군가 그녀로 하여금 그리 하도록 시킨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녀의 아비가 그녀로 하여금 가난을 느끼라며 엉덩이를 밀친 것이라면 그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 누구도 그녀의 목덜미를 물어다 그녀를 가난이라는 덫에 물리진 않았다.

 어쩌면 모든 일은 그렇게 돌아가야만 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가난한 자는 두려움의 포로로. 그렇게 점차 어둠은 청초한 꽃을 좀먹는 것이었다.

 

 그러하나 정현은 그런 짙은 두려움 따위 느껴지지 않다는 듯 – 그저, 척일뿐이었지만 – 당당한 발걸음으로 길거리를 나아갔다. 흑연은 조금씩. 자신에게로 다가서는 그녀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녀 주위로 펼쳐 있던 심연 같은 어둠이 짙어갔다. 정현은 집이 그렇게 멀지 않았음을 느끼며 점차 안도했다. 들어가자마자 대충 씻고 밥만 먹고 얼른 자버려야지, 하고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뒤로부터 툭툭, 하고 굴러와 그녀의 단화 앞에 멈추는 돌멩이 하나. 정현은 멀뚱히 그것만을 바라보다, 그녀의 다리 새로 펼쳐 들어오는 그림자 하나에 눈을 번뜩였다.

 설마. 설마……. 오만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친다. 그간 항상 생각해오던 그릇된 이야기 전개가 지금 막을 여는 것일까. 정현은 침을 꿀꺽, 크게 삼킨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지. 나는 지금 뭘 해야 하는 것이지. 무섭다. 엄마가 보고 싶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전신은 두려움에 담금질 당한 듯 축, 늘어졌다. 누굴까. 나의 뒤를 따라온 이 사람은 누구인 것이지. 아까 즈음에 돌아봤을 때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덜컥, 그 그림자가 한 움큼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일순간, 그녀의 온몸으로 짜릿한 전기가 일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정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돌아섰다. 시커먼 그림자, 달짝지근하게 꼬인 혓바닥, 가로등 아래에서 빛나는 분홍빛 안색……

 술기운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오른발을 뒤로 내뺀 정현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녀의 코끝을 찌르는 시큰한 술 내음. 한 줌, 그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예, 괜찮아요……”

 어렵사리 그녀의 입에서 튀어 나온 한 마디가 시발점이라도 되었다는 듯, 정현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던 취객은 가로등에 토악질을 해댔다. 그녀는 차마 바라보지 못할 광경에 고개를 돌리곤 두 눈을 찔끔, 감아버렸다. 그러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그녀는 뒷걸음을 쳤다. 그러다 문뜩, 무언가가 그녀의 발에 걸리는 것을 느끼곤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선 그녀는 아무 것도 못하는 채로 그곳에 망부석처럼 굳어버렸다.

 

 정현은 제 발에 치여 툭툭, 하고 굴러가는 돌멩이를 무심코 바라봤다. 찰나,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곳에 발바닥이 묶여버렸다. 하, 하고 붉은 보도에 한숨을 내뱉은 정현의 눈빛이 차츰 새빨갛게 변해갔다. 대체 왜였을까. 잠시간 기겁하며 놀랐던 마음이 안도되었기 때문일까. 혹은, 이런 길을 매번 걸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슬픈 것일까. 그녀의 슬픔이 만면에 퍼졌다.

 곧, 돌멩이가 하수구에 폭, 하고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어째서 정현은 그 하수구를 바라본 채 그 자리에 붙잡혀 있었어야만 했을까.

 왜인지 그녀는 그곳에 고착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정현은 그저 취객의 토악질 소리를 들으며 1시간 전의 일을 회상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정현은 그 순간, 차라리 폭풍이 한 차례 지나갔다고 믿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고작 1시간 전에 끝마친 진열대 청소는 무의미해졌고, 먼지마저 털어냈던 테이블은 진득거리는 액체로 뒤덮임을 당한 채였다.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람. 그녀는 예상치도 못한 위층 학원 원생들의 난입에 놀라 – 정현은 아무래도 학원 파트 시간이 바뀌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 심지어는 멍한 안색으로 30분가량을 소진했다. 지점장이 돌아오려면 고작 30분밖에 남지 않은 시각. 그녀는 서둘러 음료수 재고를 채우고, 바닥을 쓸고 닦고, 과자 진열대를 정리하고, 생필품 진열대의 먼지를 닦았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래도 음식물 쓰레기만큼은 지점장님이 치워주신다고 하셔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하며 테이블 위를 쓸었다.

 그러곤 휴식. 정말 물고기 비늘 조각만큼의 짧은 휴식이었다.

 그 순간 문에 달린 풍등이 요란하게 울었다. 정현은 의자에 앉아 반기계적으로,

 “어서 오세요, SU입니다.”

 를 외쳤다.

 “그래, 잘 쉬고 있구나, 거 참. 뭐 그래도 깔끔하게 청소한 것 같으니 아무 말은 않아도 되겠네.”

 지점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편의점 안 곳곳을 찔렀다. 정현은 자리에 앉아 넋을 놓은 채 천장을 바라보다 퍼뜩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지점장님, 오셨어요?”

 “그래. 뭐가 힘들었는지 잘도 쉬고 있더구나. 하여튼, 잔고는?”

 “만 원짜리 4장, 오천 원짜리 3장, 천 원짜리 23장이요. 동전은 학생들이 너무 지저분하게 던져 놓고 가서……. 그리고 수업 시간 바뀌었는지 방금 전에 들이닥쳤다 나가서…”

 정현의 목소리가 쥐구멍을 파고 들어가듯 조심스레 내던져졌다. 그에 반해 지점장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네 마음 문제 아니니? 그렇게 쉴 시간 있었으면 그 동전이라도 세고 있지…… 그러니 요즘 애들이 문제라니까. 주인의식이 없어요, 어휴. 음식물쓰레기는 정리 했어?”

 지점장의 넌지시 던진 한 마디에 정현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놀란 것에 반해서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멍 때리다,

 “네? 그거는 지점장님께서 해주신다고……”

 하고는 말끝을 흐렸다. 분명, 바로 어제 이 시간에 지점장님께서 그렇게 이야기 하셨는데……. 그러나 지점장은 정현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그건, 네가 정말 할 일이 많아서 내가 들어왔을 때까지 채 다 끝내지 못했을 때 이야기고. 어휴, 진짜. 어린 애가 말도 못 알아듣고, 뭐하자는 건지. 왜 이렇게 생각이 없는 거야? 제발 정신 좀 차리면 안 되니? 지점장인 내가 저 음식물쓰레기 치우는 일까지 하란 말이야? 잔고도 제대로 못 헤아려 놓고, 저 기본적인 것도 못하고. 그걸로 무슨 돈을 받겠다고.”

 지점장은 혀를 끌끌, 차며 한 쪽의 입꼬리를 들썩했다.

 “너 같은 애한테 월급 주는 게 가장 아까운 거야. 제대로 하는 일은 하나도 없으면서 돈은 제깍제깍 타가겠다고 손이나 벌리고. 내가 너 나이 때에 남편 잃고 혼자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 정말 악착같이 버텨왔어. 이 편의점이 생기기 전부터 이곳에 구멍가게 차리고,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고……”

 지점장은 편의점 내부를 이리저리 거닐며 수많은 말들을 내뱉었다. 허나, 정현은 지점장의 어투까지 따라할 수 있겠다는 듯 입모양으로 그녀의 말들을 조목조목 쫓았다. 얼마나 자주 듣는 똑같은 이야기인지. 그러는 저도 하는 일은 하나도 없으면서. 정현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떨쳤다.

 “근데 요즘 애들은 생각이 없는 건지, 힘든 일을 안 하려고 해요. 어휴, 너 나이 때에는 돌도 씹어 먹을 나이야. 알아? 돌도 씹어 먹을 나이라고.”

 쾅, 지점장은 음식물쓰레기가 담긴 통을 발로 찼다. 그에 정현은 가만히 지점장을 따라하다, 파뜩 놀라 얼굴을 폈다.

 “거기서 뭐해? 이거 얼른 안 치워?”
 “아, 네.”

 지점장이 보고 있는 가운데, 정현은 허리 숙여 음식물쓰레기 통의 뚜껑을 열었다. 퉁퉁 불어버린 면, 눌어붙은 떡, 김밥, 파리 알과 파리 시체……. 정현은 입 밖으로 뛰어 나오려는 헛구역질을 참아가며 그것들을 처리했다.

 “어휴, 이런 년들한테 돈 주는 게 가장 아까워.”

 그리고 문득, 제 등 뒤에서 차가운 한 마디를 내뱉는 지점장에 정현은 한기를 느꼈다. 꼭, 제 손에 들고 있는 음식물쓰레기를 지점장의 머리에 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뿌리를 내렸다. 얼마나 달콤한 상상인가. 자신이 증오하는 사람에게 복수하는 생각.

 파리 알이 뒤섞인 음식물쓰레기를 지점장의 머리 위로 부어버리고, 뺨을 몇 대 갈긴 다음에 라면 진열대를 확, 쓸어버리는 것이다. 그러고는 시계를 바라보며,

 “30분 드릴게요. 청소해보세요.”

 라고 하곤 미소를 짓는다. 그러면 지점장은 울다시피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모든 것을 정리하겠지.

 하지만 정현은 그것을 절대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만약 그런다면, 결국 정현은 그곳에서 잘리니까. 힘겹게 잡은 아르바이트 자리마저 끊긴다면……. 그녀는 어디에서 잠을 자야 하는가? 길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것인가. 쓰레기통의 일회용 커피 컵에서 얼음을 먹고, 누군가가 먹고 버린 과자 봉지에서 과자 부스러기를 먹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연명해야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무뜩, 정현은 저 자신의 처지에 다시금 한탄을 했다. 꼭 매일매일 이렇게 핍박을 받아가며 살아야 하는 걸까. 진정 이 세상은 돈 많은 자가 결국 승자인 걸까.

 정현은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묶는 동안에도,

 “어휴, 너 나이 때에는 돌도 씹어 먹을 나이야. 알아? 돌도 씹어 먹을 나이라고.”

 하는 지점장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참, 거지같은 목소리다. 잠자다가도 나오겠어. 만약, 꿈속에 그 목소리가 나온다면 그것은 분명 악몽이겠지, 하고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

 

 머리칼이 미역 줄기처럼 갈라져 그녀의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씻는 내내 정현은 아까의 상황에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그런다 해도 바뀔 것은 하나 없다는 것을 깨닫곤 체념했다.

  좁디좁은 단칸방. 심지어는 반 즈음은 지하였기에 자동차 배기가스가 창문으로 제가끔 흘러 들어왔다. 뭇 여인들의 또각또각 소리가 언젠가 들려온 적도 있었고, 아이들의 헤진 축구공이 창살에 끼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때마다,

 “가난한데 어쩌겠어. 그나마 이곳이 내가 살 수 있는 최고의 집인걸 어째.”

 하곤 제 자신을 위로했다. 어쩌겠는가. 자신이 세상을 원망하고 제 처지를 한탄해도 바뀌는 건 조금이나마 괜찮던 마음이 새까맣게 변하는 것뿐인데.

 그녀는 밥그릇에 숟갈을 푹, 꽂으며 깊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독하게 사는 거야. 이정현. 언젠가는 이 시든 꽃에게도 볕들 날이 오겠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 정현은 제 방 안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분명 한쪽 구석에서 바퀴벌레가 스스슥, 하며 나타날 것도 같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했다. 이제 그녀라는 꽃은 화사하게 만개할 차례만 남았으니!

 정현의 입가에 기다란 호 하나가 펼쳐졌다. 그래, 조금만 버티자. 그녀는 굳게 다짐하며 입안으로 숟갈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방안을 크게 울리는 와자작, 하는 소리.

 그녀는 찰나,

 “너 나이 때에는 돌도 씹어 먹을 나이야. 알아? 돌도 씹어 먹을 나이라고.”

 제 귓가에 울리는 지점장의 목소리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고는 손바닥에 밥을 뱉었다. 부서진 돌가루. 그녀는 그것을 한참을 바라보다, 짐짓 울상을 지었다. 집에 지금 지어진 밥이라곤 이것밖에 없는데. 정현은 힘겨이 둔부를 끌어 개수대의 쌀통에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 행동을 함으로써 얻은 것은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알리는 둔탁한 바가지 소리와 꼬르륵, 하고 배고픔을 알리는 배앓이 뿐이었다. 멍하니 등 뒤로 손을 짚은 채 천장을 바라보던 정현은 식탁 위에 놓인 밥을 바라보았다.

 “아, 집에 있는 밥이라곤 이것뿐이구나.”

 그녀는 미간에 흘러내린 머릿결을 쓸어 넘기며 다시금 숟갈을 밥그릇에 묻었다.

 그러고는 와그작와그작. 허망한 파열음만이 방안을 꿰찼다. 동시에 정현의 슬픔도 깊이를 더해갔다.

 서서히, 어둠이 인상 깊게 짙어져 엷은 필라멘트에 의존한 전구마저도 삼켜가는 시각이 되어갔다.

“너는 돌도 씹어 먹을 나이야.”

 어디서부턴가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정현은 소슬바람에 놀라듯 몸을 떨치며, 이것이 차라리 꿈이길 바랐다. 아니, 이것은 분명 악몽일 거라고 생각했다. 악몽일 거야, 악몽일 거야.

 하지만, 정현은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하나의 꽃이었을 뿐…….

 와그작와그작. 섧게도 그녀는, 돌도 씹어 먹을 나이였다.

 

 

 

영너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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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너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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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실     『지금 응암순환, 응암순환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항상 5678 도시철도를 이용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둔 터널이 점차 밝아왔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는 조금씩 강렬해졌으나, 지빈은 미동도 않은 채 그저 넥타이만을 고쳐 맬 뿐이었다. 환풍구 소리와 덜컹이는 열차 소리가 조화를 이루었고, 지빈은 스크린 도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제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보영에 대해 생각했다.  보영은 도시 외곽에 살았다. 그 어떤 소리도 날카롭지 않고, 그저 아이들의 웃음소리만 유여하게 퍼지던 곳. 언젠가 보영은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할 것 같아, 그치?” 라며 내심 그곳에 대한 동경을 표했다.  보영의 아파트는 고즈넉하고도 적요했던 그 동네에 위치했다. 그렇기에 저가 마음 깊이 그리던 곳을 갖게 된 보영은 분명 그곳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을 터였다. 비록, 그녀의 꿈은 구두 굽의 마른 나뭇잎처럼 작은 편린들이 되어 버렸지만, 자못 정적인 풍경 – 가령, 하늘의 양떼구름이라든지. - 에 취해 그마저도 잊은 채 그녀는 편히 살고 있었으리라. 보영이라면 아마도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었다.  확실히, 지빈의 기억 속 보영은 모진 시련들도 꿋꿋이 잘 버텨낼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므로 지빈에게 보영에 대한 걱정이란 크게 필요치 않았다. 외려, 지빈은 오로지 저 자신의 소설들에만 고민을 중첩했을 뿐이었다. 어디를 배경으로 쓸 것인지, 누구를 초점으로 잡을 것인지, 중심 사건은 무엇인지. 무엇보다도, 지빈 자신은 과연 어떤 것을 쓰고 싶은지. 자문자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지빈의 목덜미를 옥죄고 있었다. 그리고 보영은 그러던 지빈에게 가능하다면 이번 목요일 (바로 오늘이다.) 의 늦은 오후에 잠시 얼굴 좀 보자며, 보영 자신은 월차를 낼 터이니 어떻게든 꼭 만나자고 황급히 연락을 보냈다.  사뭇, 지빈은 어리둥절하였으나 흔쾌히 승낙하였다. 어쩌면 보영의 무언가가 – 그것은 일상이 될 수도 있었고, 성생활이 될 수도 있었으며, 철학적 관념이 될 수도 있었다. - 뒤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뒤틀림이 무엇인지 몰라서였는지 혹은 오랜만의 연락에 당황스러웠던 것이었는지, 사라져 가던 지빈의 발자국에는 새삼 보영에 대한 걱정이 묻어 나왔다.    보영은 지금쯤 놀빛에 감동한 채, 베란다에 나가 책을 읽고 있지 않을까? 아니, 그럴 일은 아마 추호에도 없을 것이었다. 보영의 마음속 책장에는 언제부턴가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지빈은 그 사실에 씁쓸해져 버려 먹먹히 제 발끝만을 바라보았다.  지빈의 등 뒤엔 소름끼치는 글씨체의 ‘상수’라는 역명이 갈색 화살표에 적혀 있었다. 지빈은 스크린 도어에 비치는 역명을 한참 느끼다, 눈앞에 다가선 지하철로 몸을 담았다.  일순, 향수의 날선 냄새가 지빈의 코끝을 휘감았다. 지빈이 세차게 고개를 떨치며 머리칼을 쓸어 넘기자, 지빈의 등 뒤로 숱한 빛들이 파라노마를 이루다 사라졌고 어둠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섧게도, 지빈은

  • 영너꿈
  • 2015-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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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yment        시계 바늘은 무디게 움직이고 있었다. 천장의 환풍기만이 재빨리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답답했다. 불빛마저 두 눈에 가득 들어차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아,  당최.  시간이 가질 않았다.   *    검푸스름한 달빛이 창가께로 쏟아진다. 숲속의 오두막은 심해를 유랑하듯 고요하고, 음울한 바람만이 커튼을 매만진다. 방안은 조용하다 못해 삭막하다.  방의 한가운데에는 축음기가 우뚝하다. 잠자코 축축한 습기를 흡입하던 그것은 이윽고, 저가 품고 있던 LP판을 움직인다. 헛헛한 기타 선율이 흐르고 ‘故 김광석’의 목소리가 흩트려진다. 먹먹하다. ‘그루터기’ 노래 가사는 어디론가 휘날려 사라지고 만다. 울적하다. 아니, 울울하다.  곧, 빙그르르, 돌던 LP판은 꼿꼿이 멈춘다. 동시에, 나는 멍해져버린다.  ……  아, 지금은 몇 시지?   *    단란한 음악 소리가 냉철한 건물들 새로 가득이다. 아이들을 태운 모형 말들만이 오직 밝고, 아이들의 눈에 비친 풍경은 한 장의 파라노마다.  회전목마는 불빛마저 포근하다. 그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에는 열망이 가득하고, 또, 쾌감마저 완연하다. 그곳엔 웃음소리만이 잔뜩이다. 아이들은 그것 곁을 신나게 뛰어다니고, 제가끔 팔딱거리며 뛰다가 행복에 물든 미소를 연신 짓는다.  허나, 왜인지 그들의 부모는 지쳐 보인다. 가슴이 저릿하다. 그들에게 생기란 화염 속의 오아시스다.  팔이 아프다.    이젠, 빙그르르, 돌던 회전목마가 서서히 멈춘다. 동시에, 모든 이들은 펑, 하고 터져 사라진다.  ……  음, 아직인가?   *    놀빛이 건물 외벽에 흐른다. 볼 끝에 닿는 하늘의 숨결은 깊고, 드넓은 육상 경기장은 죽은 듯이 적요하다. 고적하다. 그러나 땅바닥에 내딛는 발걸음만은 시원하다.  나는 목적 없이 그곳을 달린다. 숨결이 가빠온다. 밤빛이 흐드러지게 피어오르는 가운데, 티셔츠는 땀에 얼룩져 간다. 의외로, 고즈넉한 외로움에 황홀경에 도취된다. 모든 게 완벽하다. 숨이 좀 가쁘고 팔이 욱신거릴 뿐이다. 서서히, 눈을 감는다.  바람이 차다. 온몸이 너덜너덜하다. 피폐하다.  …….  일순, 나는 왜 이곳을 뛰고 있는지에 대해 고뇌한다. 이곳은 어디일까. 대체 이곳을 왜 뛰고 있는 걸까. 내가 하고자 하는 게 무어더라.  퍼뜩, 눈을 뜬다. 놀빛이 경외롭다. 심중한 번뇌가 머릿속에 가득이지만, 달갑게 불어오는 바람에 다시 기분이 좋다. 어쩌겠는가. 결국 잊어버린 꿈이겠는 걸.  옅은 미소를 짓는다. 눈을 감는다. 완강히 굳은 다리에 힘을 서서히 빼고, 동시에 꽉 쥔 두 팔에 힘을…….    쨍그랑, 무언가가 발밑에서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났다.  “이 새끼가 하라는 일은 제대로 안 하고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어?”  레스토랑의 한인 지점장이 내게 소리쳤다. 멍하니, 조심스레 발밑으로 시선을 돌리니 접시 파편이 불규칙하게 흩뜨려 있었다. 가만히 그것을 지켜만 보다, “빨리 치

  • 영너꿈
  • 201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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