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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 작성자 꽁보리
  • 작성일 2015-02-22
  • 조회수 666

소나기가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볏짚 속에 웅크려 앉아 비를 피하는 소년과 소녀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좁은 공간에서 눅눅한 풀냄새와 빗소리를 같이 공유하며 쑥스럽게 앉아있었을 소년과 소녀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소녀가 그렇게 떠난 뒤 소년은 어떤 눈으로 소나기를 바라보았을까? 처음엔 비만 내려도 어느새 그 순간으로 돌아가 볏짚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횟수야 갈수록 뜸해질 테지만, 그런 것만은 여전할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그리고 지금, 바깥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이사를 갔다. 도시 안에서는 외진 편이었다. 그래도 중학교 때에는 같은 교복을 입고 집 근처를 오가는 사람이 많았는데, 하필 좀 먼 곳으로 고등학교를 배정 받아서 같은 고등학교 교복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내가 아는 한, 이사 오기 전부터 옆집에 살고 있던 오빠 한 명 뿐이었다. 늦잠을 자서 멀리 있는 버스 정류장까지 15분 간 뛰어가는 나와는 달리, 아침 일찍 출발해서 25분 정도 느긋하게 걸어 버스를 타는 그 오빠와는 마주친 적도 손에 꼽았다. 선생님이 ‘그 거리에 사는 애들도 일찍 잘만 온다.’며 나를 야단치실 때 가끔 생각나는 정도였다. 명찰 덕에 나이랑 이름만 알지, 마주쳤을 때 인사도 않는 데면데면한 사이지만 그는 내 머릿속에 그렇게 자리하고 있었다.

무더운 날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늦여름인데도 무척이나 더웠다. 푹푹 쪄서 ‘비나 쏟아져라’하고 바랄 정도였다. 그렇지만 진짜로 쏟아질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렇게 많이 올 줄은. 어쩐지 슈퍼 주인 할머니가 무릎을 부여잡고 계셨던 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집에 가려는 길에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장대비가 쏟아지는 건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그날따라 혼자였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힘겹게 도착한 근처 편의점에서 열어본 지갑엔 천 원짜리 지폐가 3장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우산 5000원’이라 써진 팻말은 꿈쩍도 안했다. 어두운 바깥 하늘은 여전히 우렁차게 물세례를 토해내고 있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가방에는 중요한 책들도 많고, 그냥 맞고 가기에는 빗줄기도 너무 굵었다. 게다가 집까지 가는 길은 끝이 안 보이는 직선이었다. 중간 중간 비를 피할 조형물도 없는 쭉 뻗은 길이라 더 난감했다. 워낙 비가 세차게 내려서 가로수에서도 무성한 물 무더기가 쓰러졌다. 가방을 차라리 두고 올 걸 그랬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때, 종소리가 들리며 열리는 편의점 유리문 틈으로 흠뻑 젖은 사람이 들어왔다. 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항상 아침 일찍 다니고, 학원이나 도서관에 들러 밤늦게 돌아오는 단정한 사람. 간혹 보는 사람이지만 그 오빠의 흐트러진 모습이 신선했다. 주머니를 누르고 있던 손을 떼고 주머니 속에서 덜 젖은 지폐를 꺼내는데, 조금 전 나처럼 낭패라는 표정이었다. 천 원짜리 지폐 2장. ‘우산 5000원’에 힐끗 눈길을 주었으나 팻말은 전처럼 도도하게 무시했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던 난 팻말을 노려보기만 하다가 순간 떠오른 생각에 흠칫했다. 어쩔 줄 모르는 나와 그는 상관도 안 한 채 쏟아지는 빗소리가 유리창을 내려쳤다. 점원도 손님들이 말이 없자 다른 생각에 빠져든 것 같았다.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았던 나는 용기를 냈다.

“저… 00빌라 102호 사시죠?”

휙 쳐다보기에 급히 ‘저 옆집 사는데…….’하고 조그맣게 덧붙였다. 말없이 보는 눈동자 때문에 저질러 놓은 다음에서야 온갖 걱정이 찾아왔다. 평소에 같은 반 남학생들이랑 말을 별로 안하는데다, 친한 이성 친구도 없던 남자랑 대화하는 게 너무도 어색했다. 저질러 놓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사 온지 거의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 와서 말 거는 것도 어쩐지 민망했다. 괜히 다른 음흉한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본론을 얼른 꺼냈다.

“저 3천원 밖에 없어서…… 2천원 밖에 없으신 것 같은데 혹시…….”

‘합쳐서 우산 하나 사서…….’ 내가 생각해도 뒷말은 거의 안 들린 것 같았다.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 처음 대화하는 사람한테 거의 30분에 가까운 시간동안 같은 우산을 쓰고 가자는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혹시 관심을 표현하는 거라고 오해라도 하면 어쩌지. 부끄러워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래.”

하지만 내가 그렇게 민망해 할 시간도 오래 주지 않았다. 그는 우산 하나를 집어 계산대에 올려놓고 자신의 2천원을 내밀고는 날 쳐다보았다. 망설임 없는 시원스러운 대답에 잠깐 멍하던 난 얼른 3천원을 꺼냈다.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막상 받아들여지니까 어쩔 줄 몰랐다. 척척 계산하고 편의점 밖에서 우산을 펼치고 날 기다리는 그가 대단해보였다. 나만 아무렇지 않은가, 하고 멋쩍은 마음이 들어 얼른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하얗고 작은 비닐우산이 가리는 하늘은 작았고, 난 가방을 앞으로 꼭 끌어안은 채 말없이 걷고 있었다. 평소에도 사람이 많지 않은 길이었지만, 비가 와서 끝이 보이지 않는 쭉 뻗은 길에 비닐우산 하나만 존재했다. 숨 막히는 어색함에 비닐우산을 강하게 때리는 빗소리만 가득했다. 시선은 내 운동화 앞코만 앞질러갔다. 내 팔과 꼭 붙어 있는 우산을 든 오른팔만 느껴졌지, 한마디 말도 없는 어색한 상황에서 차마 시계를 꺼내어 보는 행동은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빗물 사이로 느릿하게 흘러갔다.

우산을 산 뒤로 비 한 방울 맞지 않아 제안 자체는 성공적이었지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 채 이런 분위기로 걸어가는 것이 힘겨웠다. 차라리 비를 맞고 갔으면 몸은 고생해도 마음은 편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가 제안했으니 똑같이 어색해할 그를 배려해서라도 무언가 말을 걸어야겠다는 묘한 책임감이 일었다. 애써 시선을 길 위에서 떼어 내 왼쪽으로 서서히 끌어올렸다. 다른 곳과 다르게 푹 젖은 왼쪽 어깨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다른 의미로 숨이 갑작스레 막혀왔다. 발걸음이 저절로 멈춘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진해진 셔츠 왼쪽 색깔만 시야를 온통 차지했다.

오감이 그 순간을 새겼다. 그 때 코끝을 메우던 비 냄새, 귓전을 때리던 빗소리, 밀착되어 있는 팔. 어색하기만 하던 팔은 이제 그 온기가 먼저 다가왔었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그 어깨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한 쪽 가방끈에서만 물이 뚝뚝 떨어지고, 팔뚝을 타고 빗방울들이 흘러내렸다. 반듯한 너른 어깨가 시선을 온통 사로잡았다. 약 2년 간 가끔이긴 하지만 분명 봤던 어깨인데, 그 날만은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숨을 들이마실 수 없었다. 뱉는 숨은 파르르 떨렸다. 빗소리에 내 심장 소리가 만만찮은 빠르기로 합세했다.

“왜 그래?”

편의점에서의 대화 이후로 두 번째 듣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난 헉 하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내가 멈추자마자 저도 멈췄는지 내 몸은 여전히 보송보송했다. 편의점에선 안 그랬었는데, 그 눈동자가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졌다. 울렁거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속삭이듯 말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뗐다. 내 걸음걸이가 빨라지자 우산도 함께 빨라졌다. 집에 가까이 갈수록, 우산 아래 오래 있을수록 심장이 더 세차게 뛰었다. 그의 어깨뿐 아니라 나무도, 집들도, 길바닥도 푹 젖었는데 나 하나만 보송보송했다. 나 혼자만 다른 세상에 갔다 온 것처럼. 내대신 점점 더 흠뻑 물을 머금어가는 그 어깨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영원했으면 하던 우산 속 좁은 공간은 빌라에 들어가 우산을 접으니 사라졌다.

“이건 어떡할래? 그냥 너 가질래?”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애써 떨림을 자제하며 말했다.

“오빠도 2천원 냈잖아요.”

아마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던 것 같다.

“음, 그럼…….”

잠시 고민하더니,

“그러면 네가 가지고 있다가 내가 우산 없거나 하면 빌려줘. 학교에 두고 다녀라.”

이름이…, 하면서 시선이 내 가슴팍에 내려왔다가 음성으로 허공에 뱉어냈다.

“이미주. 몇 반이야?”

내 이름이 이렇게 예쁜 이름이었나. 촌스럽다고, 개명하겠다고 엄마한테 어리광부리던 이름이었다. 미, 주. 그의 입에서 나와 빗방울 사이로 사라져버린 내 이름마저 사랑스러웠다. 거의 무의식의 상태에서 반을 말하고, 먼저 집에 들어왔다. 내가 꼭 쥔 우산 손잡이에 아직 그의 온기가 남아있었다. 손을 잡은 것 같아서 얼굴이 발그레 해졌다. 옆집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쾅-하고 멍해 있는 날 깨웠다.

 

 

그 날 이후 내 생활 패턴은 완전히 바뀌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섰고, 슈퍼 주인 할머니의 무릎을 항상 곁눈질했다. 한 살 많은 그와 마주칠까 괜히 2학년 층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틈만 나면 신문의 기상예보를 들여다봤다.

가끔 운 좋게 마주치면, 우리는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등굣길에 두어 번, 학교에서 한 번. ‘안녕하세요’하면 반가운 목소리로 ‘안녕’하고 돌아오는 게 그렇게도 좋았다. 진작 말을 걸었다면 2년 간 더 친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아쉽기도 했다. 어쩌다 마주쳐 눈인사만 하고 지나가도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한 우산을 쓰고 걸었던 날 이후로 그동안 비가 딱 한 번 왔었는데, 정말 갑작스런 소나기였다. 난 누가 발견해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싸구려 비닐우산에 빨간 리본도 매어두고, 이름도 써놓고는 교실 한 귀퉁이에 일주일 째 잘 뉘어놓았었다. 그가 우리 반 교실로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집에 갈 준비를 하며 집에서 가져온 빨간 색 우산을 들었다. 하필 그 때 우리 반 문 앞에서 살짝 젖은 머리를 한 그와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비가 와서… 우산 빌리러 왔어. 그래도 넌 챙겨 왔구나. 다행이다.”

너도 안 가져왔으면 내 학원까지만 우산 같이 쓰고 가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그 말을 듣고 가져온 우산을 창문 밖으로 멀리멀리 던져버리고 싶었다. 내 표정이 굳어진 게 보였는지, 그는 당황하면서 ‘공짜가 아니라 맛있는 거 사주려고 했다’며 변명을 덧붙였다.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에 왜 그가 올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걸까. 나 자신이 마냥 바보 같았다. 쭈뼛거리며 비닐우산을 내밀었다. 손잡이에 매어진 리본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손을 흔들며 ‘다음에 우산 없으면 우리 반으로 와.’하고는 계단 밑으로 사라졌다. 그 때 그 허망한 기분은 ‘다음엔 꼭’이란 다짐을 만들었고, 투지에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날’, 난 마음을 단단히 먹은 채 수업시간 내내 창밖을 힐끔거렸다. 등교하는 길에 슈퍼 주인 할머니가 무릎을 부여잡고 ‘아이고, 아이고.’하며 끙끙대셨기 때문이었다. 일기 예보도 맞아떨어졌고. 할머니께는 죄송했지만, 운명처럼 장대비가 쏟아질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를 한 번이라도 더 볼 기회가 생기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얼굴에 철판 깔고 우산 없다면서 찾아가면, 그가 우산을 따로 가져왔어도 얼굴 한 번 보고 말 한 마디 건넬 수 있는 것 아닌가. 복도에서 스쳐지나가는 인사가 아닌, 눈을 제대로 마주치고 제자리에 서서 하는 그런 대화. 그걸로 족했다.

하지만 내 이런 기대와는 달리, 학교가 마칠 무렵까지 날씨는 화창하기만 했다. 마지막 교시 때는 집중 못 한다고 선생님한테 야단도 맞았다. 그렇게 학교는 끝이 났고, 교실에서 우당탕 거리는 소음이 점점 사라질 때 까지도 창밖으로 빗줄기는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의 인사 소리도 내 귓가에 웅웅거릴 뿐, 난 쭉 멍해 있었다. 대단히 큰 기대를 품고 와서 그런지, 오빠를 허망하게 우산만 들려주고 보냈던 그 날보다도 허탈했다. 슈퍼 주인 할머니의 관절염은 날씨의 신이 아닌데 내가 너무 맹신했었구나, 하는 실망을 품고 터덜터덜 혼자서 운동장을 걷고 있었다. 머릿속엔 온통 날씨 생각만 가득했다. 미친 것처럼 ‘비와라, 비야 와라. 비 좀 내려줘. 제발…….’

그 순간, 내 뺨에 촉촉한 물기가 닿았다. 나는 놀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얕은 물기가 하늘에서 스멀스멀 떨어졌다. 아, 비가 온다. 그 사실만이 머리를 점령해버렸다. 앞뒤 가리지 않고 나는 바로 뒤를 돌아 계단을 두 칸, 세 칸씩 뛰어올랐다. 그의 교실로 가는 그 발걸음 한 번 딛을 때 마다 구름 위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빠르게 그의 교실 앞에 도착했을 때, 그 반에 남아있는 학생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다행히 그도 있었다. 선배들 교실 앞에서 헉헉거리는 날 한 번씩 쳐다보면서 남아있던 학생들도 점점 사라졌다. 난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가운 표정도 잠시, 의아한 표정이 뒤를 이었다. 난 그런 걸 알아차릴 새도 없이 뛰어 오느라 가쁜 숨을 고르며 외쳤다.

“밖에 지금 비와요!”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지금? 안 오는데?”

“온다니까요! 잘 보면 와요!”

난 밝은 표정으로 윽박지르듯이 말했다. 그 앞에서 평소에 머뭇거리는 인사가 고작인 평소의 나와는 전혀 달랐다. 정신없이 비가 내린다는 사실만 자각하고는 쭉 공황상태였다. 난 머리에 손을 올렸다.

“봐요, 머리가 젖었…….”

손끝에 마른 머리카락이 닿고서야 난 정신을 차렸다. 머리카락은 내 머릿속과는 달리 평소와 같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빗물이 아닌 땀이 이마 위를 적시는 것 같았다. 난 말을 하다 멈췄고, 그는 날 묵묵히 쳐다보았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그의 어깨를 바라보던 좁은 공간처럼,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렇게 얼이 빠져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달리 나직하게 느껴졌다.

“비 온다고?”

그 목소리가 신호탄이 되었다. 얼굴에 점점 열기가 올라오더니, 멍하던 내가 다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온통 얼굴을 점령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머리가 별로 젖지 않을 정도의 보슬비에 왜 달려왔는지, 이렇게 밝은 얼굴로 소리를 쳤는지 변명해보려고 입을 살짝 벌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생각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다리는 긴급 상황이라 판단하고는 재빨리 그 자리에서 박차고 나왔다. 몸은 여전히 정지 상태라 간단한 목례도, 인사도 없이 달렸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묵묵한 눈길이 등 뒤로 와 닿았지만 무시했다.

올라올 때처럼 쉼 없이 운동장을 달려 학교를 빠져나왔다. 촉촉하게 내리는 보슬비가 발그레한 뺨을 촉촉하게 식혀주었다. 머리카락 위로, 어깨 위로 작은 빗방울이 내려앉았다. 보슬보슬 마음결에도 내려앉았다.

 

 

그 뒤로 난 그 날과 똑같이 도망쳐 다녔던 것 같다. 다리가 그를 위험인물로 판단하고 계속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몇 번이나 용기를 내서 전처럼 인사라도 건네려 했지만, 몇 번이고 같은 결과만 반복했다. 그렇게 도망친 날 ‘비 온다고?’라고 뱉던 목소리와 시선을 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내 정신 추스르느라 전혀 염두에도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머릿속에 남은, 그 나직한 목소리의 알 수 없는 느낌은 비웃음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생겨만 갔다. 도저히 그를 다시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채로 세월은 너무나도 빨리 흘렀다. 난 끝까지 바보였다.

새해를 맞고, 다시 또 새해를 맞았다. 아무 것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난 3학년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를 보지 않기 위해 예전처럼 아슬아슬한 지각쟁이가 되었고, 쉬는 시간엔 교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집에서 나올 땐 현관문 밖을 살피는 습관이 생겼고, 빌라로 들어갈 때는 기척이 있나 귀를 기울이는 습관이 생겼다. 못 견디게 보고 싶고, 인사를 건네고 싶은 날은 굳은 다짐을 품고 나갔다가 금방 돌아오기 일쑤였다. 먼발치에서 그를 훔쳐볼 때마다 보슬비 내리던 날의 잔상이 나를 괴롭혔다. 창피했고, 비웃음 섞인 눈길이 나를 찾아들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저녁을 먹으며 부모님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나저나 옆집 이사한다며?”

단어들이 귓구멍으로 팍 꽂혔다. 옆집. 이사.

“옆집 외아들이 서울로 대학을 간대요. 이참에 거기서 살려나 봐요.”

난 이야기를 들으며 계속 밥을 먹었다. 밥만 우걱우걱 먹었다. 숟가락이 밥그릇과 입사이만 왔다 갔다 했다. 목이 메어 왔다.

며칠 동안 난 멍해 있었다. 이렇게 마지막이 되는 건가. 이제는 용기를 내보고 싶어도 용기를 낼 상대조차 없는 건가. 그래도 정말 마지막이라면 한 번만, 딱 한 번만 용기를 내볼까? 1년 여 만에 그를 다시 가까이에서 마주친 것은 그 생각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종업하기 며칠 전이라 짐을 챙겨오던 차였다. 땅만 보고 걷다가 현관문 근처에 왔는데, 누군가 내 옷깃을 약하게 잡아당겼다. 눈이 마주쳤다. 난 직감적으로 그 순간에 용기를 내야 함을 깨달았지만, 언제나처럼 시선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현관문 손잡이 쪽으로 자꾸만 손이 가려고 했다. 그 때,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잡동사니들을 내려놓고 그 중에 우산을 쥐어 내밀었다. 그 역시 짐을 정리해 들고 온 모양이었다. 비닐우산에는 변함없이 빨간 리본과 흐릿해진 내 이름 석 자가 있었다. 학년이 바뀌어도 교실에 가지고 올라갔었던 걸까. 아니면 어제 오래도록 내린 비 때문에 아침에 들고 나갔던 걸까. 난 우산만 바라본 채 말이 없었다.

“이거, 네가 가져.”

목소리를 참 오랜만에 들었다. 그 이전에도 많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네가 나보다 돈 더 많이 냈잖아.”

그는 손을 치우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지 않아서 그가 어떤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다. 난 우산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그러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렇게 다 마무리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단 사실을 문득 깨닫고는 얼른 비켜섰다. 그가 내려놓았던 짐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난 현관문을 열려다가 손에 쥔 비닐우산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무슨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뒤를 홱 돌아보았다. 비가 오던 날, 편의점에서 처음 그에게 말을 걸었던 그 날처럼.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우산을 도로 내밀며 말했다.

“비 오는 날에 편의점에서 우산 사지 말고 쓰고 다녀요. 오빠도 돈 냈잖아요.”

고개를 드니 그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속삭이듯이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이랑 같이 쓰다가 어깨 젖어가면서 우산 기울여주지 말고요.”

안 들렸을 것이었다. 나 또한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라, 거의 내뱉기만 한 말이었다. 그는 ‘비 온다고?’하며 물었던 그 때 그 표정을 지었다. 억지로 우산을 그가 들고 있는 짐 위에 얹고는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였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래.”

나처럼 중얼거리던 그의 목소리가 문을 닫기 전에 들렸지만, 그게 어느 말에 대한 대답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내 나지막한 고백을 들었는지도.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미주씨, 이 일은 어떻게 할까요?”

회상에 젖어있던 나는 직장 동료의 물음에 현실로 돌아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는 마저 내 업무에 열중했다.

그 날 이후로 그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삿날에도 마주치지 못했고, 서울에 와서도 우연으로라도 마주친 적 없었다. 비 오는 날에나 가끔 생각나는 첫사랑으로 만날 뿐. 소설 소나기에 나오는 그 소년도 서른 즈음 되어서는 비 내리는 날 창밖을 바라보며 기억 속에서나 가끔 소녀를 만나고, 기분 좋게 회상하지 않았을까? 환생해서 잘 살고 있겠지,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결혼한 부인이 이따금 첫사랑에 대해 물으면 미소 짓고 말았을 것이다.

얼마 전 단골 카페에 갔다. 사장님은 나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여자인데,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걸 본의 아니게 이야기를 들어서 알게 되었다. 사장님은 내가 후배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 날처럼 사장님과 직원들의 수다를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다.

그 때도 마침 비가 오고 있었다.

‘동창한테 들은 얘긴데, 부부가 이사하려고 버릴 물건을 빼는데 남편 짐에서 부인이 낡은 비닐우산을 발견했대. 흐릿하지만 ‘이 뭐시기 주’라는 여자 이름이 쓰여 있고 빨간 리본도 매달려 있어서 부인이 남편을 추궁했는데, 남편이 웃으면서 고등학생 때 자기가 산 것이라고만 얘기했대. 그래도 촉이 딱 오지. 보면서 싱글벙글 웃는 폼이 딱 알겠더래. 뭐겠어?’

‘뻔할 뻔자죠. 근데 그래서 어떻게 됐대요? 그 우산 버렸대요?’

‘몰라, 그건. 남편 쪽이 동창이라 부인이 남편 친구한테 궁금해서 물어봤다나 봐. 근데 친구들도 전혀 모른대.’

‘왠지 신비로운 첫사랑이네요.’

그 사람들이 키득거리자 나 역시 웃음이 나왔다.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채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창밖의 빗줄기를 감상했다.

더없이 창피하고 부끄러웠던 그 때, 오고 있지만 실내에선 보이지도 않던 보슬비가 더는 얄밉지 않았다. 자책을 대신해 내 원망과 투정을 다 받아주었던 대상을 이제는 완전히 보내주었다.

그냥 옆집 동생이 자기를 좋아하는 게 뻔히 보여서 귀여운 기억으로 우산을 보관했든, 내 마음과 같았든 상관없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당사자는 무지 창피했어도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빨개져서 어쩔 줄 모르는 여자애가 꽤 귀여웠을 걸? 스스로 그렇게 위로하던 게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하하하.

 

난 기분 좋게 웃으며 회상에서 완전히 깨어나 업무에 몰두했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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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 백단    민희는 힘겹게 손잡이를 붙들고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전거를 탄 소년이 그녀가 탄 버스를 유유히 지나쳤다. 꽉 막힌 아침 도로는 버스가 나아갈 틈을 주지 않았다. 그녀를 포함한 승객들의 불안한 눈길이 시계를 힐끔거렸다. 야속한 시계는 그들의 조급함에도 개의치 않고 시간이 다 흐르면 다음 숫자로 넘어갔다. 버스는 조금 간다 싶으면 멈춰 서고, 이젠 가겠지 싶으면 또 멈춰 섰다. 버스가 그렇게 멈출 때마다 사방이 한숨 소리로 가득 찼다. 지각이 목전에 다가오고 있었다. 민희는 억울했다. 심지어 평소랑 달리 더 일찍 나온 날인데, 도로가 이토록 막힐 게 뭐람. 그녀의 시선이 몇 초마다 한 번씩 시계를 훑었다. 계속 시계를 보다가는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아서 민희는 시계 보기를 그만두고 눈을 내렸다.  그 대신 문득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의자에 앉아 잠이 든 한 여자였다. 무릎 위에 올려진 크로스백이 고스란히 열린 채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저러다가 소매치기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민희는 그녀를 깨울까 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깨워서 기분이 나쁘더라도 돈을 도둑맞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어쩌지? 그래, 깨우자. 아니, 깨우지 말까?’  한참을 고민하는데, 어떤 손이 잠든 여자의 가방 속을 잘 매만지고는 지퍼를 잠가 주었다. 카키색 모자를 눌러 쓴 남자였다. 남자는 여자가 깨지 않도록 소리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섬세하고 조심스러운지. 틀림없어, 백프로야. 둘이 사랑하는 사이구나. 참 좋을 때다. 민희는 두 다정한 연인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 때, 그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틀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당황스러움이 얼굴 위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머, 내가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봤나. 부끄러웠겠다. 미안함과 민망함에 그녀는 시선을 돌려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새 시간은 더 흘러 있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다시 그녀는 창밖을 응시했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버스가 도착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 동안에도 민희는 남자가 자신을 끊임없이 몇 번이나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져 괜히 멋쩍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어느덧 내릴 차례가 되었다. 다른 승객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간신히 지각을 면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었다. 일찍 나와도 도착 시각이 이래서야. 일찍 나왔기 때문에 오늘 같은 교통 상황에도 지각을 면한 것이었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낑낑거리며 교통 카드를 기기에 찍고 밀려 내리는데, 옆에서 아까 그 여자가 함께 떠밀려 내렸다. 애인과는 다른 정류장에서 내리나? 민희는 무심코 그 여자가 앉아 있던 자리를 올려다보았다. 창가에 팔을 올리고 손바닥을 눈가에 댄, 고개 숙인 남자가 앉아 있었다. 워낙 잠깐 본데다가 모자도 쓰고 있지 않아 아까 그 남자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민희는 부지런히 걸어 회사 건물에 다다랐다. 건물 문을 열고 막 들어가려는데, 바로 뒤에 상사인 김 부장이 서 있었다. 민희는 문을 열고 씩씩하게 인사했다.  “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 꽁보리
  • 2017-01-20
해는 다시 뜬다

“쿽!” 남자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깼다. 본인도 자신이 낸 괴성에 멋쩍은지 콧잔등을 긁었다. 옷에 찌든 술 냄새가 방 안에 진동했다. “거참, 뭔 놈의 꿈이…….” 남자는 혀를 차며 두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간밤에 꿨던 악몽이 끊긴 필름처럼 드문드문 재생되고 있었다. 잠에서 깨고 시간이 흐를수록 끊김은 점점 심해졌다. 결국 남자가 눈곱을 대충 떼고 만화책을 대여섯 권 훑어볼 즈음엔 핵심적인 장면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물론 그는 꿈 따위가 어떻든 개의치 않고 책장을 넘기며 키득거릴 뿐이었다. 한참 그렇게 있다가 이미 예전에 몇 번 봤던 것이어서 질려갈 때쯤 남자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컴퓨터 하단의 시계는 오후 3시임을 알려주었다. 게임에 접속하자 온통 피바다인 게임의 시작 화면을 보고 남자는 불현듯 간밤의, 이제는 흐릿해진 꿈이 떠올랐다. 지금으로선 기억나는 게 너무나 무섭고 끔찍했었다는 ‘전체적인 느낌’뿐이고, 기억에 남는 광경은 딱 하나. 집 바닥 위에 피를 흘리며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그의 노모의 시신이었다. 바닥엔 남자의 죽은 어머니가 흘린 피로 가득했다. 다른 내용에 대한 기억은 백지가 되어버렸는데, 그 모습은 유달리 생생하게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왜 그 장면이 그렇게도 충격적이었을까. 어머니라서? 아니면 피를 한가득 흘리는 시체에 대한 것이라서? 남자는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이도 저도 아닌 본인과 어머니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했다. 한 달에 한두 번, 그것도 술에 취해 들어오는 자신과 자신이 오는 날이면 언제든 집에 있던 어머니. 어머니는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남자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왔다. ‘뭐, 이번 달엔 세 번째인가. 어제 초저녁쯤에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지는 바람에 여기 오겠다고 전화하고 난리를 피웠으니.’ 그런 생각에 빠져있던 것도 잠시, 남자는 게임 플레이 화면이 뜨자 바로 게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손으로 옆을 더듬어 언제 땄는지 모를 미지근한 맥주로 목을 축이며 생각했다. 그냥 그저 그런 꿈일 뿐이야. 그래봤자 저 문 밖에서 자기 할 일 잘 하고 있을 양반인데. 악몽을 꿨으니 로또라도 사볼까. 남자가 게임에 열중해 있는 동안, 바깥에서 제 할 일 잘 하고 있을 양반이 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안 들리는 것도 같았다. 스피커 소리 때문에 긴가민가한 거야. 들렸겠지. 남자는 무의식중에 그렇게 확신했다. 게임 하단에 ‘접속한지 4시간째’란 알림이 떴다. 눈도 뻐근하고, 배도 고프고 해서 남자는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책상 위에는 빈 맥주 캔 두 개와 몇 번 떼어먹은 말라비틀어진 빵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남자는 무심코 한 조각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 맛이 없었다. 곰팡이가 피었을 수도 있었다. 남자는 여기가 심부름꾼 노릇하던 술집도 아니고 집인데,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순이 노인네에게 뭐라도 있는지 물어봐야겠다는 일념으로 의자에서 몇 시간 만에 몸을 일으켰다. 무

  • 꽁보리
  • 2014-12-21
표절작

한 달 전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죽었다. 경찰은 미친 듯이 추격하여 범인을 어느 공사장에서 발견했는데, 발견 당시 서 있는 범인의 주변은 온통 너부러진 시신들이었다. 그리고 범인은 미처 경찰들이 막기도 전에 미리 뿌려놓은 휘발유에 불을 붙였다. 커져가는 불길 속에 그는 시신들과 함께 몸을 묻었다. 이상이 뉴스에서 본 내용이다. 여자 11명을 죽인 연쇄 살인 사건의 최후. 사건이 끝나고 경찰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에 난 소희가, 그 놈이 잡히기 직전에 가출한 내 동생이 그 사건의 마지막 피해자인 줄로만 알았다. 상습적으로 가출을 일삼다가 붙잡혀 와서 이번에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 하나뿐인 혈육이. ‘저희가 그 놈 추격해서 간 공사장에서 화재 진압 중에 언뜻 교복을 입고 있는 시신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얼른 불 끄고 신원을 확인했는데…….’ 권소희 양이었습니다. 그 말에 손이 풀려 전화기가 땅으로 떨어졌다. ‘시신 수습을 위해 언니 분이 와주셔야 할 것 같은데… 머리 부분이 완전히 다 타버려서… 그…….’ 머뭇거리던 경찰관의 목소리는 내게 닿지 않았고, 소희의 머리 없는 시신 앞에서 오열할 때가 되서야 다시 그 말이 내게 닿았다. 그렇게 나는 피붙이 하나 없는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   * * * “아줌마, 저 여기 소주 한 병이랑… 안주는 뭘로 하지.” “권 작가님 왔어요? 되게 오랜만이네. 오늘 꼼장어 괜찮은데.” “그걸로 주세요, 그럼.” 난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권 작가님, 요새 왜 이렇게 안 왔어요. 우리 단골이시면서. 근데 신작 안 내셔? 우리 아들이 진짜 팬이라니까.” 포장마차 여주인이 병과 잔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이래서 여기 오는 발길이 뜸해진 거였다. 정신없는 색감의 물건들을 보면 또 몰라, 새하얀 종이나 파일 화면을 보면 소희 얼굴이 어른거려서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죽었어도 세상은 아무런 문제없이 한 달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나만 그 시간에 묶여 있었다. 난 씁쓸한 기색을 감추고는 나올 때 되면 나온다고 웃으며 대충 대꾸했다. “아줌마! 여기 술 한 병 더 줘! 베스트셀러 작가한테 술 주는 거 영광으로 알아…” 말이 뭉그러져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순전히 ‘베스트셀러 작가’란 단어 때문에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만큼 헝클어진 굳센 머리칼을 손으로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부랑자의 모습. 예컨대 술에 잔뜩 취한 새우 잡이 배의 선원 같은 외모였다.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술병을 가져다준 주인에게 잔을 채우며 말을 걸었다. “누구에요? 베스트셀러 작가?” “베스트셀러 작가는 개뿔이. 그냥 취객이죠. 처음 보는 손님인데, 몇 시간째 계속 앉아있어요. 자기가 베스트셀러 작가라면서. 나도 안 그래도 궁금해서 물어봤거든? 근데 작가도 아니고, 자기 입으로 ‘베스트셀러로 데뷔할 작가’래요. 그냥 헛소리야. 작가님이 신경 안 쓰셔도 되요.” 작가님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는 아무나 하나. 아부성 짙은 그녀의 말을 흘려듣고 그 남자 가까

  • 꽁보리
  • 2014-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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