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평범한 날이었다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5-01-25
  • 조회수 415

<평범한 날이었다>

 

아주 평범한 날이었다. 특별한 것이라 한다면, 그 날이 유달리 추웠던 것 정도일 것이다. 항상 하듯 기지개를 펴고, 세수를 하고, 책가방을 들쳐 맸다. 진솔은 입에 삥 반 조각을 베어 물은 채로 평소와 다름없이 버스를 타러 정류장에 나섰다. 몇몇 학생들이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어제 다퉜던 미애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디. 말을 붙이려 그녀의 등을 제 긴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평소라면 뒤를 돌아봤을 미애는 냉정하리만치 쌀쌀맞았다. 아무런 대꾸도 없이, 때마침 온 버스 안으로 몸을 실었던 것이었다.

 

아침 버스는 웬일인지 한산했다. 어렵지 않게 자리를 하나 차지할 수 있었다. 몇 정거장이나 지났을까,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탔고 개중에는 머리가 허옇게 센 할머니도 있었다. 진솔은 하얀 머리칼을 보자마자 일어났다.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입 안에서 맴돌다 이내 삼켜져 버렸다. 할머니는 진솔 쪽을 보지도 않곤 자리에 털썩 앉았다. 연신 앓는 소리를 내더니만 그대로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꽃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제 책상 위에 웬 하얀 꽃 한 송이가 놓여져 있었다. 누가 놓아뒀을까? 겹겹이 둘러싸인 꽃잎과 초록 이파리가 참 잘 어울린다고, 진솔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따라 자신의 책상 근처에 아무도 오질 않았다. 평소 무리의 중축이 되어 제 자리에서 이야길 나누곤 하던 한슬마저 시간이 끝나자마자 제 곁에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는 평소 무리의 여학생들과 진솔 쪽을 바라보며 쑥덕이던 것이었다.

 

점심시간, 학생들이 썰물마냥 우르르 빠져나갔다. 진솔은 저와 항상 같이 다니던 무리를 찾으려 두리번댔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미애를 비롯한 네 명은 보이질 않았다. 정신없이 주위를 살피다 보니, 교실 안에는 진솔 혼자만 남아 있었다. 문득 창가를 바라보았다. 유리 너머로 미애의 옆모습이 보였다. 미애는 눈을 비비적대고 있었다. 분명 이 시간이면 행복해 죽을 것 같다는 눈웃음을 지었던 미애였다. 그러나 지금, 그 표정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초승달 휘게 웃던 눈은 잔뜩이나 찡그려져 있었고, 재잘대던 그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제가 섣불리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 자신이 관련된 일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다. 바로 하루 전 크게 다퉜으니까. 그들에게 가려는 발걸음이 멈추었다. 미애의 모습이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조용히 있다, 가만히 복도를 걸었다.

 

어디로든, 이 작은 학교 안에서 발길이 닿는 대로 가 보자. 진솔의 발걸음이 멈춰섰다. 철컥 하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평소라면 열려 있어야 할 옥상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치마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냈다. 청소 도우미이기에 받았던 열쇠였다.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자신이 의도해서 온 곳이기는 하다만, 왠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있던 것이었다. 초록색을 띠는 폴리에스테르 바닥에 물이 꽁꽁 얼어붙어 빙판이 되어 버렸다. 진솔은 조심히 앞으로 나아갔다. 예전에도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항상 옥상에 오곤 했었는데.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그런데, 그런데 어쩐지 기묘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진솔은 한 발짝 더 앞으로 내딛었다. 눈앞에 흰 난간이 보였다. 호기심이 동했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묘한 느낌 때문이었는지, 진솔은 두고두고 후회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난간 밑을 문득 바라본 것이었다. 폴리스 라인의 노랑빛이 눈에 확 들어왔다. 거무죽죽한 자국은 흰 천으로 완벽하게 덮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는데, 운동장의 모래바닥에 흡수되어 온전한 제 색을 뽐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마치 포도가 완전히 으깨어지면 나올 법한 그런 색깔이었다. 그 위에 어떤 형체가 겹쳐졌다. 무엇인가가 여기저기 엉킨 채였다. 사람이 죽었나? 천 밖으로 비집고 나온 머리는 사 층에서도 선명히 보일 만큼 깨져 있었다. 진솔은 난간에 바싹 붙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바람이 유난히 찼다. 영문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 불안감이 조금씩, 조금씩 진해지더니 이내 완벽히, 선명하게 진솔을 감싸 버린 것이었다. 하얀 천 아래 대조되는 붉은 액체가 덕지덕지 말라붙어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머리가 으스러지고 목이 뒤로 흉하게 꺾여 있는 그 형체는 바로 진솔 자신이었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진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웅웅 울려오는 당시의 소리에 손을 들어 제 귀도 막았다. 머릿속을 빠르게 장악하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려 마구 도리질쳤다. 이대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솔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그것들에게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곧 사라질 듯이 잠잠해지면, 몇 초의 간격을 두고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이었다.

 

마침내 진솔은 하얗게 질려 버린 제 손을 바라보았다. 새빨간 피가 군데군데 묻어 말라 있었다. 이제는 검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었다. 제 손만큼이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뒤로 완전히 꺾여 버린 손목을 바라보고는 뒤로 주춤댔다. 맞부딪혀 딱딱 소리를 울려내는 이가 딱했다. 눈을 아래로 내렸다. 다리도 걸어 다닐 수 있는 것이 신기하리만치 흉하게 부러져 절그럭대는 것이었다. 심지어 날카로운 뼈가 살을 찢고 튀어나오기까지 했다. 그제야 고통이 진솔을 덮쳤다. 그것에 굴복하지 않으려 입술을 꽉 물었다. 그러나 너무도 아픈, 아프다는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그 통증에 진솔은 눈을 감고 사실이 아니라며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눈을 떴다. 아까까지만 해도 환하게 비쳐오던 햇살은 온데간데없었다. 빛 한 점 없는 어둠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움직이려 해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소리치려 해도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제야 진솔은 자신이 갇혀 있는 것을 실감했다. 저 혼자, 그 어딘가에. 이제는 두려움마저도 없어지는 것인지, 뻣뻣하던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저 무엇이 다가오든,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진솔은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작게 경련했다.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이 미동조차 없어졌다. 완전히 멈춰 버린 그 눈이 다시 열리는 일은 없었다.

 

가히 평범하리만치 평범한 날이었다.

 

윤별

추천 콘텐츠

더 레드

* 엔터가 아무리 해도 안 되어서 pdf 파일을 첨부합니다. 글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니 꼭 pdf로 읽어주세요.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클릭  》 더 레드 더 레드 *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체온 사이의 서사를 옮겨 적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풍경을 글로 묘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써넣은 낱말이 이 세상에서 부드럽게 사라진다고 가정한다면…… 그러면 어떤 세계에서든 언제나 가장 먼저 멸종할 단어는 빨강이다. * 피터, 하고 부르면 빨간 베레모를 쓰고 벤치에 앉은 203이 익숙하게 돌아본다. 그게 낯설어 나는 못내 아쉬운 투로 203을 발음했다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다시 한 번 피터, 하고 입술을 맞붙인다. 피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모자를 비스듬하게 고쳐 썼다. 귀 뒤로 쓸어내려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이 베레모 그림자 아래로 구불구불 흘렀다. “이제 좀 익숙해졌어?” “여전히 내가 왜 널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지 말해 줄 생각은 없고?” 피터는 한 손을 바닥에 짚어 무게를 실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피터가 종종 이상한 고집을 부리곤 했지만 번호 대신 이름을 불러 달라는 건 지금까지의 숱한 요구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테였다. “농담으로라도 익숙해졌다고 해 봐. 그럼 알려줄게.” 확신하는데, 214 네가 좋아할 만할 일이야. 피터는 그렇게 덧붙이며 가늘게 눈웃음을 쳤다. 이럴 때의 피터는 어렵다. 가늠하기도, 꺾기도. 이기지 못할 것을 예감한 나는 손을 뻗어 괜히 피터의 눈꼬리를 엄지로 꾹꾹 눌러댔다. 피터는 개의치도 않고 발랄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또 재촉한다. 알았어. 익숙해졌어. 이제 됐지?” 여전히 피터는 웃는 낯이었다. 나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터는 내 몸을 당겨 자기 몸에 바싹 붙였다. 몸이 피터 쪽으로 기울면서 새하얗고 빳빳한 교복 와이셔츠 칼라에 그늘이 졌다. 피터라는 이름보다는 훨씬 익숙했으나 여전히 몸에는 힘이 바싹 들어가는 게 척추부터 손가락 끝까지 느껴졌다. “책을 한 권 발견했어, 214.” “그건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많잖아.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니야, 들어봐. 우리가 읽었던 책이랑은 다르단 말이야.” 피터는 자신을 밀쳐내는 내 손목을 쥐고 눈을 반짝였다. 뭔데. 나는 옅은 한숨을 쉬고 피터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피터는 그제야 내 손목을 놓고 뒤집힌 치마 끝단을 다시 뒤집어 정리하며 길게도 뜸을 들였다. 피터는 늘 침묵이 죄의 씨앗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만은 예외인가 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잖아?” “응, 레포트 쓸 때 많이 읽었지.” “세상에 배울 게 없는 책이 있다고 한다면 믿겠어?” “그런 책이 있을 리 없는 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네 직속선배 203이 집필부라며.” 그러면 이제 직속선배 203도 직속선배 203이 아니라 직속선배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실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가 비를 다 쏟아

  • 윤별
  • 2018-11-30
플루토 카니발

플루토 카니발         만일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내 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라. 누군가에게 나쁜 위성이라도 되고 싶다는 게 어떤 건지를. 잘 지내? 너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나, 그래서 난 자꾸만 이렇게 소포를 보내고 편지를 써. 아주 작고 미세한 나에게 너는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무거워서, 네 곁에 있지는 못해도 이렇게라도 자주 보내면 잊히지는 않겠지 하는 언니의 작은 소망이라고 생각해. 라, 오늘은 명왕성을 가지고 왔어. 가벼운 무게로 비틀린 궤도를 돌고 자기 위성에게까지 흔들리는 행성. 기억나? 네가 행성 같다고 내게 말했던 거. 너는 지금까지 해 왔듯 흔들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작고 위태로운 게 어린 널 닮았더라. 그냥 그렇다고. 라, 보고 싶어. 내일도 모레도 네 이름처럼 마음껏 신경 쓰게 해 줘.   *     밀크티 마실래? 우유 있어? 산 속이라도 있을 건 다 있어.   카론, 너 이사 온 지 벌써 한 달이야. 이젠 알 때도 되지 않았어? 라는 주머니에서 굴리던 손을 뻗어 선반에 놓인 컵 두어 개를 쥐었다. 나는 라의 말에 구태여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내 이름 대신 제멋대로 붙여 준 카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건 익숙했다. 작고 아담한 오두막집은 아늑했다. 신발에 묻은 눈을 채 털기도 전에 라가 벽난로 앞에 원목 의자 두어 개를 급하게 놓았다. 원래 작업실엔 사람을 잘 안 들여서. 변명처럼 말을 덧붙이던 라는 불 위에 걸어 둔 쇠막대에 주전자를 걸었다.   별로 안 걸리네. 우리 집에서 그렇게 안 멀다고 했잖아.   우유는 도통 끓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는 자꾸만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려고 했다. 얌전히 있는 불에 눈을 찌푸리기도 했다. 놓아 둬. 나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아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얌전히 무릎 위에 놓인 저 두 손으로 만들어졌을 시계들이 수납장 위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네가 만든 거지? 다 완성된 거야?   턱짓으로 시계들을 가리켰다. 라는 시선을 돌려 내 턱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더니 의자에 몸을 꺼뜨리듯 기댔다.   아직.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해 보이는데. 아니야, 아직.   라는 고개를 저었으나 내 눈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시계 부품들이 짜임새 있게 잘 맞물리는 것 같았다. 나는 시계를 뜯어보듯 찬찬히 살폈다. 과연 전에 일러 주었듯 고가에 팔리고도 남을 만큼 빛이 났다. 옆에서 한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중앙에 빈 공간 있잖아. 거기에 넣기만 하면 끝나. 보석? 비슷한 거.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 라는 피하던 시선을 둘 곳이 생긴 것이 기쁘다는 듯 손잡이를 잡았다. 라는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주전자에서 나오는 김이 라의 얼굴을 잠시 가렸다가 이내 흩어졌다.   그래서, 일은 잘 돼 가? 피해자가 한둘이어야지. 여기 오기 전에 거의 다 모았었어.

  • 윤별
  • 2018-06-30
현상흔

현상흔   빛이 꼭 은신한 뱀 같았다. 며칠 전 촬영의 대가로 얻은 손목의 통증과 불면이 두통을 몰고 왔으나, 무영이 앓는 환시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출사 날마다 빛은 사정거리 내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독사 꼴을 했다. 천변에서의 촬영은 지난해 겨울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영이 눈가를 가볍게 찌푸렸다. 갈색 홍채가 투명하게 비칠 만큼 날이 좋았다. 무영은 물에 반사되는 빛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길게 응시했다. 강물 위에서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오리배를 타고 있었다. 볕을 받은 빨간 줄이 무영의 손목을 한 바퀴 휘감아 마치 실팔찌처럼 보였다. 아픔을 몇 번이나 더 찍을 수 있을지를 무영은 흐릿하게 가늠했다. 한 번. 운이 좋다면 두 번까지. 무리해서 찍으면 손목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걸 무영은 알았다. 사실 지금 잘린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상흔이 깊었다. 무영이 한숨을 쉬자 빛을 가려낸 손바닥 아래로 피사체와 피사체의 보호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앳된 여자아이와 한 쌍의 부부였다. “안녕하세요.” 무영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목에 걸린 카메라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여자가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무영은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리본을 매단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영의 볼 양쪽에 의례적인 웃음으로 만들어진 보조개가 움푹 팼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상반신만한 코커스파니엘을 품에 안고 있었다. “최대한 즐거운 감정을 담아 주세요. 천변에서 강아지랑 놀게 둘 거예요.” “강아지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여자가 잠시 여자아이 쪽을 바라보다가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침묵은 매미 소리에 묻혔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따가운 볕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갈색 아이브로우로 진하게 그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일처리에 능숙한 십일년차 사진사였다. 무영의 손이 카메라 전체를 훑고 지나가는 동안 여자는 여자아이의 갈색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마지막이라고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남자는 자신의 딸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가 딸아이의 손에 빨간 막대사탕을 쥐어주고 나서야 무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선배의 목소리가 언뜻 스치는 것 같았다. 날이 좋은 날에는 노출값을 줄여야지. 감정을 놓치면 안 돼. 무영은 조리개를 조금 더 닫고 테스트 컷을 찍었다. 무영은 시시때때로 뒤바뀌는 초점을 좇았다. 피사체는 강아지를 따라 달렸다. 점박이는 샛초록색의 여름 잔디로 뛰어들었다. 피사체가 강아지를 겨우 따라잡고서 품에 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혔다. 강아지의 꼬리가 쉴 틈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무영은 여자아이의 가장 즐거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셔터에 손을 올렸다. 무영의 미간에 얼핏 주름이 잡혔다가 풀어졌다. 여자아이가 이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다가 갑작스럽게 강아지

  • 윤별
  • 2017-11-27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