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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잇조각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5-01-21
  • 조회수 262

<종잇조각>

 

희멀건 죽을 보고 있자니 제 신세가 처량하고, 또 처량했다. 쌀이 모자라 한 줌을 넣고 말갛게 떠오를 때까지 폭폭 끓여 올린 죽. 이것으로 다섯 식구가 세 끼를 해결해야 할 터였다. 차디찬 겨울바람이 문고리를 훑고 지나갔다. 지푸라기로 엮어낸 문 쪽에서 외풍을 그대로 맞는 시은의 잔뜩 움츠려 구부정한 등이 파르르 떨렸다. 굽은 숟가락을 집어들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고 죽을 게눈 감추듯 해치우고는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어머니께서는 오늘도 남의 밭에서 농사를 지을 것이 틀림없었다, 세 어린 동생들을 옆집 아주머니께 맡겨 둔 채로. 시은도 아주 어릴 적에는 그 아주머니께서 기저귀를 갈아 주시곤 했었다, 그러나 네 살 즈음에 시은이 더 이상 그 곳에 가지 않겠다고 뻗댔던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아주머니의 집 구석구석이 눅눅해져 곰팡이가 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동생들의 시도때도 없이 앙앙대는 울음소리가 싫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저 혼자 있고 싶었는지도. 고집이 센 시은을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첫 며칠 간은 어머니께서 기를 쓰며 시은을 아주머니 댁 앞에 데려다 두곤 했었으나, 그 때마다 시은은 걸어서도 반 시간 남짓이 걸리는 고 거리를 다시 되돌아 왔던 것이었다.

 
시은은 유난히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라 했다. 또래들과 어울려야 할 시기에 시은은 집에서 혼자 무언갈 하고 있었다.그것이 또 영양가가 없지도 않았다. 어느 날은 가만히 엎드려 하나의 물체를 찬찬히 뜯어보곤 했다. 다른 날은 비좁은 마루에 걸터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감기가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은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자리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었다. 상상 속에서나마 제가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들을 마음껏 먹어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토록 행복했다.

 
동물 친구들을 잔뜩 불러야지. 병아리는 삐약거리면서 손 위로 올라올 거고, 토끼는 깡총거리면서 내 주의를 맴돌다간 날 툭툭 칠 거야. 가시를 제법 세우고 있는 고슴도치는 내 손길에 빳빳이 세웠던 창을 단번에 내려 주려나.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고 있을 때었다. 열려 있던 문틈 사이로 바람이 냉기를 내뿜었다. 시은은 제 상상을 방해한 문 틈을 잠시 째려보더니만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조그마한 침입자가 바람 혼자뿐만은 아니었다. 시은의 손에서 맴도는, 어쩌면 총총거리는 것으로도 보이는 작은 주홍빛 종잇조각이 어느 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었다.

 

그 종잇조각이 내뿜는 기묘한 분위기에 호기심이 동했는지, 작은 종이를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시은이 알아볼 수 없는 주홍색 글자와 함께, 숫자 여섯 개가 인쇄되어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는 끙끙대더니 이내 숫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2, 4, 15, 19, 25, 31."

 
그것을 모두 읽었다는 뿌듯함에서였는지, 누가 알아주길 바라서였는지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기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시은은 환해진 얼굴로 종이를 한참 동안이나 살펴보더니 그 작은 종이를 접어댔다. 고사리 손으로 몇 번 구깃대더니 금세 주홍빛 종이비행기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제 입으로 왜앵, 소리를 내 가며 몇 번이나 팔을 휘둘렀을까.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밖을 보니 해가 막 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께서 노곤한 몸을 끌며 집 문턱을 넘고 계셨다.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시은은 아버지에게 깡총거리며 다가가 제가 접은 종이비행기를 자랑스레 내보였다.

 
"아빠, 나 오늘 종이비행기 접었다."
"으응, 그래? 한 번 보자."

 

 

생경한 감정이 시은의 마음을 간질였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종이비행기를 요리조리 돌려 가면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시은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종이비행기를 풀어헤치는 것이었다. 걸레로 쓰이는 아침에 배달된 조간신문을 펼쳐들었다. 너덜해진 신문지였으나 글씨는 번지지 않았다. 몇 장을 팔락거리며 넘겨대더니 아버지의 처져 있던 눈이 크게 뜨였다.

 
"시은아, 이 종이 어디서 났니?"
"으응, 그냥 놀고 있다가 보니까 내 옆에 있었어!"

 

 

아버지께선 시은을 슥 쓰다듬어 주고는 그 늦은 시각에 밖으로 휘적휘적 나가는 것이었다. 머리칼에 남은 따스한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느끼려 시은은 제 손을 머리 위에 포옥 올렸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어느새 제 앞에 차려져 있는 밥상에 시은은 입을 떡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은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음식들이 상다리가 부러져라 가득이 놓여 있던 것이었다. 아버지가 밝게 웃어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시은은 수저를 들고는 제 작은 입으로 음식들을 가득 담곤 오물대기 시작했다. 절로 미소가 번졌다. 비단 음식 때문만이 아니었다. 가슴이 뜨뜻해지는 무언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꽃봉오리가 수줍게 얼굴을 내민 봄 동산에 따스한 햇살과 나비가 함께 날아다니는 듯한 그 생기 가득찬 느낌이 시은은 싫지만은 않았다. 아버지께서 자기를 바라봐 주는 그 따스한 눈길도, 동생들이 투닥거리는 그 풍경도 시은은 마냥 좋았던 것이었다. 헤실대며 열심히 입가를 움직이고 삼켜대기를 계속했다. 그 움직임은 어쩌면 왜인지 목구멍에 치밀어오르는 무언가를 꾹꾹 눌러담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렴풋이 들려오던 그 왱왱거리는 소리는 다름 아닌 라디오였다. 마침 일곱 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은이 알아듣지 못할 법한 이야기들이 빠르게 쏟아져 나왔다. 그 난리통에 제 아버지 이름 석 자가 시은의 귀에 꽃혔다. 놀라서 밥을 먹던 것도 멈추고서 눈을 껌뻑였다. 시은과 눈을 마주친 아버지께선 머쓱하게 웃으셨다.

 

 

"…회 로또 당첨 번호는 2, 4, 15, 19, 25, 31이며 보너스 번호는 12입니다. 이전 회에서 1등 당첨자가 나오지 않아 이전 회 당첨금이 이월되었기 때문에 이번 당첨자는 두 배 가까이 되는 당첨금을 수령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시은의 얼굴에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로또가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몰랐다. 그러나 매번 아버지께서 입버릇처럼 하셨지 않았던가. 로또 한 번만 당첨이 되면 이 쪽방 신세도 면할 수 있겠다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아버지를 꽉 껴안고 그 널따란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 따스한 손길이 시은을 감싸안았다. 왱왱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러나 이번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종전 아나운서의 낭랑한 소리가 아니었다. 웬 낯익은 여자 목소리였던 것이었다.

 
*

 

 

소리가 잦아들었다. 너무도 듣기 싫어 귀를 막았던 손을 살포시 내려놓고 꼭 감았던 눈을 떴다. 눈에 당연히 들어와야 할 그 커다란 상이 없었다. 당황한 빛을 역력히 내비치며 시은은 벌떡 일어났다. 잠깐, 언제부터 누워 있었더라? 그제서야 잠시 잊혀졌었던 한기가 시은의 작은 몸뚱아리를 다시 감싸안았다. 집안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도, 아무것도. 왱왱거리던 그 라디오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완벽한 적막. 문이 세차게 덜컹거리는 소리와 문틈으로 들이치는 눈만이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시은에게 자각시켜 주었다.

 
아아, 대체 어디서부터가 꿈이었던가. 어디까지가 상상이었고, 어디까지가 현실이었던가. 시은의 목구멍을 바위가 턱 막아 버린 것 같았다. 꽉 막힌 숨구멍에 억지로 캑캑대는 시은의 얼굴이 벌개졌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은 한낱 달콤한 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던가. 꿈이라는 사실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리고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한 제 머리가 너무나도 한심스러웠다. 멍청아. 아빠는 여기 없잖아. 게다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바보 아냐.

 
시은은 머리를 있는 힘껏 쥐어박았다. 아팠다. 머리가 울려왔다. 그러나 지금 시은이 느끼고 있는 허탈함과 상실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차라리 머리가 미친 듯이 아파와 이 감각을 마비시켜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 생각했다. 가슴에 마치 구멍 하나가 뚫린 것처럼 바람이 숭숭 들어와 몰아쳤다. 한참이나 그렇게 요동을 치더니만 나가 버린 바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때였다, 시은의 머릿속에 저 스스로도 기막힌 생각이 떠오른 것은.

 

 

다시 잠이 들면, 다시 행복해질 거야. 배를 곯아 피골이 상접한 그 작은 몸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서랍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톱밥이 날렸다. 뿌연 먼지 가운데 어머니께서 잠이 오지 않을 때 한 알씩 넘기시던 하얀 알약이 유리병 틈으로 비쳐 보였다. 병 뚜껑을 열어 제 손에 와르르 쏟아 부었다. 물과 함께 하얀 덩어리들이 하나씩, 둘씩 그 작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시은은 깊고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미소가 시은의 입가에 잔잔히 머물렀다.

 
"아빠."

 
*

바람을 타고 종이쪼가리가 날아와 잠이 들어 버린 시은의 옆에서 총총거렸다. 주홍 글자에, 여섯 개의 숫자가 또렷이 인쇄되어 있는.

 
{ 2, 4, 15, 19, 25, 31. }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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