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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5-01-12
  • 조회수 358

수영은 자꾸 미끄러지는 펜을 그러쥐었다. 아무리 옷깃으로 벅벅 문질러 보아도 미끄러지긴 매한가지였다. 삑사리가 났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오늘은 유달리 신경이 쓰였다. 그래, 이맘때쯤 되면 한두번씩 있는 일이잖아. 암만 다독여봐도 번진 잉크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수정테이프로 지워 봤자 더욱 티가 날 게 뻔했다. 저릿하게 아파오는 손을 탈탈 털었다. 몇 시간이나 했다고 펜을 잡지도 못 할 지경이 되었는지. 작은 투덜거림을 내뱉었다. 고무줄을 손에 감았다. 흔한 머리를 묶는 고무줄이었지만 짙은 빨간색이어서였는지 눈 앞에 청록색의 잔상이 둥둥 떠다녔다. 단순한 보색 잔상 때문이라고 그렇게 넘겼다. 다시 책에 집중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고 청록색의 덩어리들은 사라지지는 못할망정 더욱이 그 크기를 키워 나가는 것이었다. 급기야 저를 집어삼킬 정도가 되자 수영은 고군분투하던 글자에서 눈을 떼고 도리질쳤다.

시선이 멈춘 천장에서는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회색 콘크리트 천장. 몇 달 전에는 별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에 자주 천장을 올려다보곤 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수영을 반겨주는 것은 항시 콘크리트 천장이었다. 애시당초 건물 안에서 별이 보이길 원한다는 것이 헛된 희망이긴 했다만 천장을 마주하던 그 때마다 착잡하게 달라붙는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수영의 오른편과 왼편에는 흰 커튼이 둘러져 있었다. 기지개라도 펴려 양옆으로 발을 쭉 벌린다면 필시 커튼 밖으로 뚫고 나갈 것이었다. 제 몸과 의자. 딱 그만큼만 둘러싸고 있는 커튼은 손때가 묻어 그리 희지도 않았건만 스탠드에서 나오는 빛을 머금어 희게 보였다. 적어도 지금 까맣게 타들어가는 수영의 마음보다는 흴 터였다. 그것에 비교하면 아주 새하얄 터였다.

한땐 이 공간이 아늑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제 몸에 딱 맞고, 오롯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 내내 꿈꾸어만 왔던 저만의 공간이 생기는 것이었다, 비록 두 시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불만이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방해하는 사람들도 없으니 그토록 원하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착각이었던 걸까. 아니면 지금 제가 느끼는 것이 착각인 걸까. 차라리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 착각이었으면 좋았겠더라. 마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독방에 밀어넣어진 느낌이었던 것이었다. 답답하고 갑갑했다. 소리라도 꽥 지르면 좋으려만 안타깝게도 그런 시설 따위는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 밀폐된 공간에서 영원히 뛰쳐나가고 싶다는 욕망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젠 숨조차 쉬기 힘들 지경이다. 숨을 깊이 들이쉬려 하면 턱 하고 막혀오는 무언가에 수영이 헉헉거리며 가슴을 부여잡은 것이 이번 달만 해도 벌써 다섯 번째다. 아늑했던 공간은 답답함의 산물로 변질되었고, 마냥 좋았던 공기는 숨이 턱 막힐 만큼 짙었다. 그럴 때마다 수영은 바깥의 별을 보며 간신히 마음을 추스렸다. 사 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애써 자신을 위로했던 것이었다.

*​

익숙한 벨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곧이어 슬리퍼 끄는 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문을 여는 소리, 그리고 낯선 - 아니, 어쩌면 낯서지 않은 - 침입자. 항시 들어 왔던 퉁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학생, 두 시야."

안다고요. 수영은 웅얼거리며 가방에 닥치는 대로 책을 쑤셔넣었다. 분명 저 아저씨도 짜증이 나겠지, 지금까지 남아 있는 학생 몇만 아니면 지금쯤 자고 있는 건데. 얼마나 집에 들어가고 싶겠어? 나도 같은 마음입디다, 아저씨. 몇 권 넣지도 않았는데 가방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잘 닫히지도 않는 가방의 지퍼를 어거지로 밀어넣고는 제 여린 등에 짊어졌다. 채 잠기지 않은 틈이 흉했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수영의 몸이 격하게 휘청거렸다. 곧이어 불이 꺼졌다. 수영은 휘청거리는 몸을 추스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가파른 길을 내려갈 때는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언젠가 한 번, 어스름한 밤에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그대로 굴러떨어진 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맨 콘크리트 바닥에 처박혔을 때의 기분은, 참으로 비참했다. 창피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밑바닥에 내던져져 짓밟힌 것 같았다. 그러나 무슨 감정인지도 모를 생소한 감정이 뒤따라 올라왔다. 어쩌면 하늘의 별과 눈이 마주쳐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무슨 감정인지 채 알아채기도 전에 이미 수영의 몸은 일어나 집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

아직 12월 초인데도 불구하고 눈이 내려 도로가 꽁꽁 얼어붙었다. 하얗게 입김이 나왔다. 독서실 앞에서 줄지어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님들 행렬에 익숙한 얼굴은 없었다.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로 발을 빠르게 놀려댔다. 교복 마이는 추위를 막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영은 두 손을 치마 주머니에 넣고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가로등이 깜박였다. 그림자가 덩달아 있다, 없다 했다. 위태로이 이어져 가는 불빛이 마치 수영 자신을 보는 것 같아 괜스레 기분이 나빴다. 며칠 전에 이 근처에서 살인이 일어났단다. 소식을 부모님께 전해 드리자, 그래서 뭐 어쨌다고? 라는 표정을 짓던 부모님의 얼굴을 수영은 지워낼 수가 없었다. 두 시. 중학생에 나다니기엔 꽤나 늦은 시각일 텐데 걱정도 되지 않는 건가. 걸음이 저도 모르게 느려졌다. 적막이 수영의 몸을 감싸안았다. 완전한 적막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제 발자국 소리와 꼭 닮은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수영은 우뚝 멈추어 섰다. 잘못 들은 건가. 제 머리를 헝크리고는 다시 걸어들어갔다. 곧 집이 보일 터였다.

그 때였다. 불빛이 어스름하게 보임과 동시에 수영의 복부에 생경한 감촉이 느껴진 것은. 그것은 생경하다기보다는 느껴서는 안 될 그런 부류의 것이었다. 금속성의 날카로운 것이 파고드는 그 끔찍한 느낌에 수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내 모든 장기가 딸려 나가는 느낌이 들더니만 다시 한 번 강렬한 통증이 찾아왔다. 지탱할 것을 찾으려 손을 허우적댔지만 잡히는 것은 없었다. 그대로 콘크리트 바닥에 얼굴이 처박혔다. 데구르르 굴러 수영의 고통에 찬 얼굴이 하늘을 향했다.

밤하늘의 별이 검은 눈동자에 들어왔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졌을 때와 같은 감정이 문을 두드렸다. 순간 수영은 허우적대던 팔을 멈추었다. 예상 외의 반응에 상대는 잠시 당황했지만 그대로 칼을 빼들어 다시 한 번 깊숙히 찔러넣었다. 저항하지 않았다. 그제야 수영은 제 몸을 지배하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편안함. 그것은 바로 극도의 편안함이었다. 어찌 되었든 하루하루 경쟁하며 비수를 꽃는 생활보다는 지금이 훨씬 더 편안했다. 불현듯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서야, 이제서야 날 묶고 있던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미련은 없었다. 억울함도 없었다. 오히려 벅찼고, 고맙기까지 했다. 이 족쇄에서 날 풀어 줘서 고마워요. 비로소 날 자유롭게 만들어 주어 고마워요.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흐릿한 제 눈에 또렷이 비친 별. 수영에겐 그거면 되었다. 저 별이 날 인도해 줄 거야.

*

싸늘한 시체와 낭자하게 흩뿌려진 혈흔만이 불과 몇 시간도 안 된 참상을 오롯이 보여 주었다. 그대로 굳어 버린 입가에는 생전 보지 못했던 행복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수영을 잔잔히 비추고 있는 별빛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끝.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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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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