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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5-01-10
  • 조회수 438

<봄날>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어머니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작자가 영원히 땅에 묻혔다. 자식들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났다던 그 여자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경찰에서의 전화로부터였다. 다른 지인도 아닌 경찰. 달동네 어느 판잣집에 인기척이 없기에 주민들이 신고를 했더라, 몇 남겨져 있지 않은 연락처로 전활 일일이 걸어도 답이 없더라, 그리고 마지막 연락처가 너더라.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나오는 것이 더 이상했을 것이었다. 눈물 없이 메마른 삼일장을 치렀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그리고 벚꽃이 만개한 완연한 봄날이었다. 친구들이 찾아와 힘내라며 위로를 건넸지만, 위로 따위는 필요 없었을 만큼, 어머니의 죽음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어머니의 판잣집은 허름했다. 문은 삐걱거렸고, 분명 벽이 가로막고 있는데도 외풍이 그대로 들어왔다. 지붕의 판자는 한두 곳이 빠져 비가 그대로 샐 듯이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젊은 나이에 자유를 찾아 떠난 사람이라곤 도무지 믿을 수 없던 것이었다. 상윤은 가지고 온 누런 박스를 검게 때가 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가져갈 것들은 가져가라는 경찰의 말에 떠밀리듯 오기는 했으나 무엇부터 정리해야 할 지 도통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방 안을 죽 둘러보았다. 서랍장, 액자, 옷장…. 모두 눅눅해져 검은 곰팡이가 스멀스멀 자리를 잡아 가는 그 광경에 상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옷장에 가지런히 걸려 있던 몇 안 되는 옷들과 모자들을 상자에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먼지가 폴폴 날렸다. 그 여자의 흔적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상윤은 중얼거리며 거의 쓸어 담다시피 집 안의 물건들을 누런빛으로 물들여 갔다. 금속성의 물체가 서로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제 귀를 아프게 파고들고 나서야 다소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 거칠던 몸짓을 멈추었다. 이내 상윤의 시선은 검은 옻칠에, 흰 자개가 박힌 서랍장에 가 있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상윤의 눈가를 맴돌았다. 그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던 것이었는지,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서랍을 거세게 열어젖혔다. 더운 기가 훅 끼쳤다. 이어 색 바랜 양장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한두 권이 아니었다. 상윤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주저 없이 박스에 내던졌다. 그리곤 집안을 다시 둘러보는 것이었다. 더 이상 챙길 것이 없어 보였는지 그리 무겁지않은 박스를 두 팔에 안아들었다. 쾅 하고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빈 공간에 메아리쳤다.

*

"부도라니, 그게 무슨 소리랍니까?"

전화통을 붙잡더니 느긋했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갔다. 자신이 할 말만 뱉어내고 끊어진 목소리에 상윤은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수화기를 책상에 냅다 메다꽂았다. 회사가 부도가 났다는 소식이었다. 부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정작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부도를 낸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의 동업자였다는 것이었다. 제 몇 년 지기 친구였다. 애초에 친구의 제안을 곧바로 수락했던 것부터가 잘못이었던 걸까.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 못해 후려갈길 줄이야. 상윤은 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빚만 잔뜩 안기고 날라 버린 친구 덕에, 곧 경찰이 들이닥쳐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그 시뻘건 압류 딱지를 내밀 터였다. 상윤이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곳곳에 붙여진 종이쪼가리들이 어슴푸레한 가운데 가만히 절 노려보고 있었다.

상윤은 매일 출석이라도 하는 양 회사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항시 같은 넥타이에 멀끔한 양복을 차려입은 채 떡이 진 머리를 단정히 빗고, 그 먼지 낀 가방을 들고 거리를 전전하는 것이었다. 첫 며칠은 절 배신한 그 자식을 찾아다녔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동네를 이 잡듯 뒤졌으나, 이미 날라 버린 것인지 흔적조차 보이질 않았던 것이었다. 사흘째 되던 날, 상윤은 그를 찾아다니는 것을 그만두었다.

밤만 되면 상윤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몇 병이나 시켜 빈속에 들이부었다. 속이 화하게 달아올라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면 상윤은 제 옆의 손에 잡히는 것을 붙잡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고 인사불성이 되어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이었다. 어떤 날은 그것이 사람일 때도 있었다. 멋모르고 상윤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봉변당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곯아떨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상윤은 인정할 수 없었다. 가장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일자리를 잃고,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것이었다. 사람들의 동정 따윈 받기 싫었다.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는 친구들을 보면 울화가 치솟았다. 그럴 때면 오히려 바락바락 악을 쓰며 니들이 뭔데 날 보고 이러쿵저러쿵 거리는 건데? 라며 절규 섞인 소리를 질렀다. 자연히 상윤을 측은하게 여기던, 그나마 남아 있던 몇 명의 사람들도 그런 면모에 질려 고개를 저으며 하나 둘 내떨어졌다.

"월세 못 낼 거면, 방을 빼던지 햐야지. 여튼, 이번 주까지 짐 정리 다 햐 두어."

"할머니, 인간적으로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너무하긴 총각이 너무하지. 두 달 전부터 밀린 월세 내라꼬 내가 안 햤어? 이만큼 봐 줬으면 많이 봐 준 거여, 안 그려?"

"그래도 회사가 부도가 났는데…."

"요즘 총각 말고도 아이엠에푼지 뭐신지 하는 것 땜시 다들 그려, 총각만 그런 거 아녀."

타박거리는 슬리퍼 소리가 멀어지자, 상윤은 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아이들이 강아지에게 돌팔매를 해 대는 것이 언뜻 보였다. 깨갱 하며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강아지가 마치 제 모습 같아 찌푸린 미간을 더욱 구기는 것이었다. 한숨을 쉬며 어두컴컴한 집안에 발을 들여놓은 상윤은 신발을 내팽개치듯 벗었다. 걸음을 옮기는 상윤의 발에 무언가 걸렸다. 몸이 균형을 잃는 느낌과 동시에 맨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머리가 띵했다. 팩 짜증을 내며 스위치를 쳐 올렸다. 전구에 불이 깜박거리며 들어왔다. 누런 상자였다.

*

역병이 돌았다.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다 검게 몸이 썩어 들어갔다. 그 시절 의료 기술로는 치료가 힘들었다. 대형 병원에서도 겨우 고칠 수 있단다. 열 명 중 여덟 명 꼴로 싸늘한 시체가 되어 갔다. 사람들이 공포에 떨자 정부는 서울의 출입을 전면 통제했다. 그러나 방어막은 완벽하지 않았다. 잠시 주춤하는 것처럼 보였던 역병은 아래 지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느릿하고 여유 있게 경기도와 충청도 전역을 장악하고는, 능글맞게 어디에 잠식할 지 고민했다. 그러고는 이제는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손을 뻗치는 것이었다. 상윤이 사는 시골 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루에 몇 명씩이나 하얀 천을 덮은 사람들이 실려 나갔다. 병원이라곤 달랑 동네 의원 하나였는데, 그마저도 도움이 되질 않았던 것이었다.

상윤의 형제들 중 맏이인 상희의 몸에 붉은 반점이 돋아났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가는 반점에 상윤의 어머니는 상희를 헛간에 가두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채 이틀도 지나지 않아 상윤 밑 동생들의 귀 밑과 팔에 붉은 기가 보였다. 점차 뚜렷해지는 붉은 반점을 달고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세 아이 역시 모두 헛간으로 밀어 넣어졌다. 삼일 밤낮으로 들리던 우는 소리가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불안해진 상윤이 헛간 문을 열었을 때는 검은 형체가 파리 떼에 둘러싸여 있었다.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이 썩어 문드러져 있는 시체 곳곳에 파리 알이 슬어 있었다. 상윤은 역한 냄새에 입을 제 손으로 틀어막았다. 파랗게 겁에 질려 문을 황급히 닫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상윤은 목청이 터져라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어머니!"

"느이 어무이 도망갔다. 즈이 자식들 몽땅 죽게 생겼구만, 지 혼자 살겠다고 봇짐 싸들고 어데로 도망가삤다. 아이고 하늘도 무심하시지요, 어무이 아부지 없이 요 어린 것들을 혼자 우찌 살라꼬…."

상윤은 이웃 할머니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도 믿기 싫었다. 멍한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보다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아니에요, 아니에요. 할머니, 저희 어머니 어디 있어요? 저희 어머니 어디 숨어 계신 거죠? 빨리 나오라고 해요, 할머니는 알고 계시죠? 제 누나도, 동생들도 다 이상해요. 내가 알던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아요. 전부 까맣게 변했다구요. 지금 우리 어머니가 보셔야 해요, 어머니가 다, 다 해결해 줄 거예요."

"뭐라꼬? 니 지금 뭐라켔는데. 검다고?"

할머니는 상윤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굳은 표정으로 등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갔다.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더니만, 완전히 사라졌다. 상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의 뺨을 지나 축 늘어뜨린 손을 적시는 뜨거운 물기를 그저 내버려 두었다. 동공은 쉴 새 없이 흔들렸고, 들썩임은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할머니는 곧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제각기 손에 무엇인갈 든 장정들과 함께였다.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눈들 따위는 상관없었다. 할머니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며 정말이냐 재차 물었다. 장정들이 그 둘을 지나쳐 갔다. 곧이어 코를 찌르는 석유 냄새와 함께 굉장한 열기가 바람을 타고 순간 느껴졌다. 불길이 치솟았다. 벌건 불이 어느새 상윤의 집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날름거리는 혓바닥이 상윤을 조롱했다. 할머닐 붙잡았던 손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상윤의 눈동자에 불이 집어삼키고 있는 자신의 집이 비쳤다. 저 안에 어머니가, 누나가, 동생들이 있는데…. 활활 타오르는 저에게 모든 것을 뺏겨, 초점 없이 저를 바라보는 불은 상윤을 보며 시시덕대며 웃어댔다. 상윤이 다섯 살 때 일이었다.

*

문에 무엇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상윤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분명 동네 아이들이 이맘때쯤이면 노느라 여기저기서 퍽 소리가 나기 일쑤였지. 그때마다 상윤은 궁시렁거리고는 했었다. 이 달동네에서 무슨 공놀이냐며 버럭 화를 내고도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게 하는 대신 자신의 앞에 놓인 누런 상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무 감정 없는 손길로 상자를 열어젖혔다. 몇 년 전 자신이 아무렇게나 담아 두었던 옷가지와 두툼한 노트 몇 권이 눈에 들어왔다. 아릿한 향이 코끝을 감쌌다. 노트 한 권을 손에 쥐었다. 뿌예져 원래 색을 알 수 없을 법한 겉표지를 쓸었다. 손끝에 회색 먼지가 묻어 나왔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연갈색 노트 겉면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렸다. 결국에는 노트를 탁 소리 나게 내팽개치고 말았다. 상자 안은 다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치 컴컴한 정적에 휩싸였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깜박거리며 위태로이 길가를 비추던 가로등의 불빛이 희미해졌다. 찾아 올 사람이 없을 터인데, 웬일인지 문이 흔들렸다. 문가에 사람의 실루엣이 어렸다. 상윤을 아는 사람이 이 근방에는 없을 터였다. 상윤은 웬 손님이람,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삐걱대는 금속 소리에 귀에 익은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겹쳐왔다.

"야 상윤아, 그동안 잘 지냈냐?"

"뭐, 그럭저럭 잘 지냈습니다."

고향집 아주머니였다. 아직 어렸던 상윤이 혼자 살아가야 하는 것을 딱하게 여겨 자신의 집에서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무사히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그 시절 아가씨였다. 역병이 돌아 일가가 모두 명을 다한 집안의 아들을 선뜻 거두겠다고 나설 사람은 없었다. 자신 네들 먹고살기도 힘든데 도무지 입을 하나 더 늘리진 못하겠다는 핑계였다. 그러나 실상은 자기네들에게까지 피해가 올까 두려워 꺼렸던 것이었다. 상윤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은 몇 있었으나, 상윤이 제 옆에 가까이 오면 피하기에 바빴다. 그런 동네 사람들의 눈길에도 아랑곳 않고 상윤을 제 집으로 들인 사람이 경화였다. 혼기 찬 참한 아가씨로 소문이 났던 경화가 상윤을 거두기로 결정했을 때, 이웃들은 경화를 극구 말려댔다.

"경화야, 니가 죽을 수도 있데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

"꼭 그 아를 데리고 와야겠나? 보육원에 맡기는 게 안 낫나?"

그런 이웃들이 참으로 더러워 보였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역겨워 보였던 것이었을까. 경화는 겉과 속이 다른 그들의 행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당당히 상윤을 제 집으로 데려오고는, "이제부터 내가 네 엄마야." 라던 그 목소리를, 눈을 마주하며 활짝 웃음을 짓던 그 얼굴을 상윤이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느그 회사 망했다메. 그것도 그 문디 때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죄송합니다."

"내한테 죄송할 거 하나도 읎다. 그래서, 지금부터 어떻게 할 낀데? 입에 풀칠을 하고 살든, 배 곯으면서 살든, 어쩌든 일단 살기는 살고 봐야 할 거 아이가? 어?"

"…잘 모르겠습니다, 회사도 부도났고, 그냥 다 때려치울까 생각도 들고. 아주머니는 여길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겨우겨우 수소문해가 찾았다이가. 이래 꽁꽁 숨길 건 또 뭔데? 때려치우긴 뭘? 고마 악착같이 살아야지 뭐."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뭐…."

"잃을 게 읎다니, 그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고. 느이 어무이 있잖나. 어무이 봐서라도 니 그라면 안 되지."

"어머닌 돌아가신 지 오래인 데다, 저희 모두를 버리기까지 했지 않습니까."

"누가 그걸 몰라서 그라나? 내 말 안 해 줬나? 일기장말이다이가, 일기장."

상윤은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어머니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기도 싫었다. 몇 십 년 동안 어머니라는 단어를 내뱉지 않고 살았다. 첫 몇 년은 그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렸다. 그래서 자신을 거두어 준 경화에게마저 어머니라 부르는 대신 아주머니라고 싹싹히 대했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어머니라는 단어가 익숙해질 참이었다. 경화도 상윤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이야기를 꺼냈던 적이 없었다. 상윤의 기분을 이해하는 것이었는지, 안쓰러워 보여 그랬는지. 둘 중에 하나겠지. 그런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이 지금, 왜인지 경화는 상윤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자꾸만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일기장이라뇨?”

"그, 뭐고, 갈색 비스무리한 노트 몇 권 없드나? 그거 말이다. 거, 느이 어무이가 니한테 남긴 유품이다이가."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란다. 버리고 도망갈 때는 언제고. 유품을 남겼단다. 짜증이 치솟았다. 자기가 뭔데. 어머니와 지낸 나날은 고작 5년이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목소리만 간신히 기억난다. 남보다 얕다면 얕았지, 절대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 제 어머니라는 사람에게 하고픈 말이 많았다. 용케도 제 자식은 기억했나 봐요, 우릴 버려 놓고선 혼자 사는 재미 좋았어요? 주먹 쥔 손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부르르 떨렸다.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

"내 이제 가 볼게. 약속 있다. 낸중에 다시 찾아올테니까, 맛있는 거라도 좀 준비 해 놔라. 알았나?"

경화를 배웅해 주겠다며 따라 나설 때에도,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인살 할 때에도 상윤의 눈앞에는 그 연갈색 노트가 아른거렸다. 오르막길을 오를 때에도 힘든 줄 몰랐다. 상윤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문이 열리고 집에 불빛이 들어왔을 즈음에는 상윤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던 것이었다. 누런 박스 앞에 꿇어앉았다. 무릎과 손에 먼지가 묻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체 그 잘난 어머니란 작자가 무슨 유품을 남겼는지 보자. 박스를 단숨에 열어젖히고 일전의 노트를 집어 들었다. 그 때의 아릿한 향이 그대로였다. 역시 열어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바짝 말라 허옇게 일어난 입술을 까슬한 혀로 적셨다. 심장 박동이 온몸에 울렸다. 심지어 손가락 끝에서까지 또렷이 느껴졌던 것이었다.

마른 침을 삼키고는 일기장을 펼쳐들었다. 팔락거리는 종이의 질감이 덜덜 떨려오는 손에 그대로 전해졌다. 연필로 휘갈겨 쓴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

1969년 1월 19일, 눈

경찰에서 압류 딱지가 나왔다. 집은 온통 빨간 딱지투성이다. 돈이 될 만한 것은 빚쟁이들이 모두 가져가 버렸다. 파산 신청도 받아주질 않는다. 무슨 서류가 필요한데, 그게 가장이여야 된다나. 아이들과 발 뻗고 곤히 자는 일이 줄었다. 경찰에서 불쑥 나올까, 아니면 빚쟁이들이 또 찾아올까. 상희가 왜 우리 집이 빨간지 묻는다. 마치 불이 난 것 같단다. 천진난만한 상희의 물음에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참는 것밖에는 길이 없었다. 배고프다 칭얼대는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내가 한심하다. 가슴에 비수를 꽂고 살아가는 기분이다.

1969년 1월 24일, 흐림

빚쟁이들이 또 쫓아왔다. 어떻게 찾았는지 참으로 신통하다. 이러다 죽을 때까지 쫓아오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이 마음속에 박혔다. 쾅쾅대다가 가는 듯싶어 한시름 놓았더니,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쇠파이프가 불쑥 깨진 문틈으로 들어왔다. 서랍을 뒤지더니 몇 십 년의 소중한 추억들을 불태웠다. 아이들은 겁에 질려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딱 하나 있는 이불 속에서 끅끅댔다. 이불 무더기를 걷어차려는 빚쟁이들에게 애들만은 건들지 말아 달라 오열해 간신히 돌려보냈다. 애 아빠는 사라진 지 오래다. 부도가 나고, 빚을 떠안더니 도망친 지 이 년이 넘어간다. 남은 애들은 어떻게 하라고….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이런 날은 남편이 원망스럽다. 살아 있기는 하려나…?

*

어머니께서는 아버지 이야기를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으셨다. 어린 마음에 상윤이 제 아버지는 어디 있냐 물으면 어머니께서는 오랜 여행을 떠났다고 하셨다. 이유는 물어볼 때마다 달라졌다. 어떤 날은 회사에 일이 있어 늦으신다고. 또 다른 날은 멀리 상윤의 선물을 사러 갔다고.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빛이 퍽 좋아 보이진 않았던 고로, 상윤은 여남은 번 물어보곤 그것에 대해 캐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철이 들 즈음에는 상윤이 이미 경화의 집에 맡겨졌던 것이었다. 상윤이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마저 도망갔단 사실을 알았던 어린아이들은 상윤을 놀려댔다.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낼 수밖에 없었던 상윤은 밤마다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것을 몇 십 년 만에, 그것도 말이 아닌 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상윤은 고개를 흔들고는 일기장을 휙휙 넘겨갔다. 어느 틈인지 글씨가 진해졌다. 잉크로 꾹꾹 눌러 쓴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

1971년 8월 24일, 맑음

상희를 헛간에 집어넣었다. 울며 악을 쓰는 상희를 차마 제대로 바라 볼 수가 없었다. 반점이 보였을 때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았어야 한다. 없는 돈 있는 돈, 모두 모아 의원에 데려가려 했지만, 이웃 사람들이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집 앞에서 막았다. 흡사 저번 시위에서 보았던 인간 바리케이드였다. 온 마을 사람들이 역병에 걸린 통에 뭐가 문제가 되겠냐며 따졌지만 그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자신들의 목숨이 아니니 그리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 것이겠지. 그토록 살갑게 대해 주었던 이웃들이건만. 배신감이 치솟았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더구나…. 너의 울음소리가 여기까지도 들려온다. 애써 외면하고 듣지 않으려 했건만, 귓가로 아프게 파고드는 너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단도가 되어 마음을 갈가리 찢어 놓는구나. 미안하다, 아가. 미안해…. 이 못난 어미를 절대 용서하지 말거라….

1971년 8월 26일, 맑음

상예, 상수, 상미…. 세 아이 모두 반점이 보였다. 역시 울며불며 열에 들떠 보채는 세 아이를 헛간에 밀어 넣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며 거짓을 이야기해야만 하는 그 입이 너무도 야속했다. 입술을 깨물며 아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웃음을 짓는 무기력한 내 모습에 치가 떨렸다. 이번에도 이웃들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더욱 강경하게 막아대는 통에 그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경화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한다지만, 여전히 제 목숨이 더 중한 것이었다. 남이 죽건, 아니면 어떻게 되건 자기 일이 아니면 상관없다는 건가. 저 가식껍데기 속 진짜 모습은 추악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아니 없다. 그런 가식덩어리들보다는, 역병에 걸려 아파하고 있는 내 자식들이 백배는 더 깨끗할 터인데, 사람들은 왜 그것을 모르는지….

*

잉크가 번지고 종이가 하얗게 일어 군데군데 알아보기 힘든 부분들을 상윤은 간신히 읽어 내려갔다. 글자를 훑는 상윤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믿기 힘들었던 그날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마치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뇌리에 박혀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것이었다. 자신의 누나와 동생들의 얼굴이 차례로 눈앞에 아른거렸다. 너무 어린 나이에 헤어짐을 겪어서였을까, 아니면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었기에 그랬을까. 희미해져 가는 어머니의 얼굴과는 반대로, 형제들의 얼굴은 너무도 또렷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검게 썩어 들어가 파리 떼가 웽웽 날리던 그 덩어리가 형제들의 형체를 일그러뜨렸다. 그것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상윤과는 대조적으로, 이제 상윤은 그것을 너무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상윤의 눈앞엔 이젠, 썩은 시체 더미밖에 보이질 않았다.

*

1971년 8월 27일, 흐림

손등에 반점이 보인다.

1971년 8월 28일, 맑음

상윤이를 놓아두고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마을에 역병은 거의 없어진 것 같다. 내가 이 마을에서 나가면 우리 상윤이는 무사하겠지….

1971년 8월 30일, 비

떠나오길 잘했다. 상윤이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

가슴에 쿵, 하고 돌덩이가 내려앉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 피가 비쳤다. 점점 더 짧아지는 일기에 손이 덜덜거렸다. 종잇장이 와삭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자신을 버리고 간 어머니다. 이렇게 식은땀이 나고, 초조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왜인지 온몸의 근육들이 단단히 경직되고, 가슴이 계속 쿵쾅대는 것이었다. 일기장에 간간히 묻어 나오는 옅은 붉은빛이 상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꼬박이 쓰이던 일기는 8월 30일 이후, 열흘이나 지나서야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

1971년 9월 12일, 흐림

며칠이나 지났을지. 경화가 깨우는 통에 눈을 떴다. 어떻게 여길 찾았는지는 모르겠다, 화들짝 놀라 경화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말했지만, 경화는 그럴 이유가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문득 손을 보니 반점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상윤의 소식을 물으니 제가 데리고 있단다. 한국전쟁 때 어렸던 경화가 수류탄 쪼가리에 맞아 목숨을 잃을 뻔 한 것을 한 번 구해준 그 일이 아직까지도 고마워 그러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상윤은 제가 책임지겠다는 경화의 말이 어찌나 고맙던지.

1971년 9월 19일, 맑음

이제 다 나았으니, 마을로 돌아오지 않겠냐는 경화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처음에는 귀가 뜨였지만, 생각해 보니 그럴 자격이 없다. 상희를 시작으로 내리 네 명의 아이들을 내 손으로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 역병 때문에 그랬다고는 해도, 지켜내지 못한 내 잘못이다. 게다가 상윤마저 내팽개치고 마을을 떠났다. 경화가 없었다면 지금쯤 상윤은……. 아니, 생각하지 말자. 너무도 무책임했다. 상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 날 어머니로 생각하기나 할까.

*

상윤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부류의 감정이 상윤을 감싸 안았다. 차라리 그 때 자신에게 돌아왔어야 했다. 그 때였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진난만하게 어머니의 품에 안길 수 있었을 텐데. 그저 나쁜 꿈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너무 늦어 버렸다.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잖아요, 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상윤은 다른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빛깔을 보니 그나마 최근의 것으로 보였다. 뒤표지에는 1995라는 글자가 매직으로 진하게 쓰여 있었다.

*

1995년 12월 28일, 맑음

경화가 왔다. 여느 때보다 표정이 밝았다. 상윤이의 사업이 성공했단다. 오랜만에 웃음이 나왔다. 울음 섞인 웃음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야. 상윤아, 그럴 줄 알았다. 아주 잘 되었어. 잘 되게 해 달라고 몇 번이나 빌었는지 모른다. 경화도, 상윤이도…. 고생 많았다. 이젠 잘 살 일만 남았겠지. 경화에게 너무나 고맙다.

1996년 1월 3일, 눈

요즘에 손이 왜 이리 떨리는지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더 남겨야 하는데.

1996년 3월 7일, 봄 햇살

상윤아. 잘 지내고 있니. 밥은 잘 먹고, 잠은 잘 자지? 어릴 적 네 모습이 눈에 자꾸만 밟히더구나. 널 보러 가고 싶었다. 내 아들이 얼마나 컸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네 머리를 쓰다듬고, 네 얼굴을 어루만지고, 네 가슴을 보듬고 싶었다. 몇 번이고 망설였다. 혹여나 네가 날 원망할까, 문지방을 넘으려는 발을 돌리기 일쑤였다. 이제는 그것이 평생의 한이 되는구나. 너에게도, 나에게도. 이게 아마도 마지막이 될 것 같구나…. 상윤아. 보고 싶다. 못난 어미여서 미안하다. 이런 어미 따위는 잊어버리고, 네 갈 길만 꿋꿋히 가거라. 뒤돌아보지 말아라. 절대 약해지지도 무너지지도 말거라. 네 앞길에는 반드시 봄 햇살이 따스하게 비칠 거라고 약속하마. 너는 누가 뭐래도, 내 아들이다. 상윤아… 내 아들… 사랑…

*

사랑의 ‘ㅇ’자의 잉크가 넘쳐 뒷면까지 번져 있었다. 꾹꾹 눌러 쓴 정갈한 글씨가 왠지 모르게 흔들려 보였다. 군데군데 종이가 하얗게 일어나 글씨가 번져 있었다. 상윤은 한 장을 더 넘겼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의 일기는 없었다.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1999년 3월 7일. 사망진단서에 쓰인 날짜와 같았다. 그제야 상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푸르르 떨리던 종잇장은 팔락이다 이내 잠잠해졌다. 정적 속에서 툭 하는 마찰음이 울렸다. 빛바랜 종이 위에 회색빛의 동그라미가 퍼졌다. 상윤은 일기장을 덮었다. 그것을 한참이나 매만지더니 제 품에 안고는 끅끅댔다. 흐느끼는 소리만이 텅 빈 방 안에서 메아리쳤다.

일기장을 추려냈다. 뽀얗게 먼지가 묻어나오는 표지를 닦아냈다. 그 몇 십 권의 노트를 슥삭거리고 있으니 어느새 퍼런 칠흑의 옷을 벗어던지고 느긋이 옅은 빛으로 갈아입고 있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이젠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노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표지를 쓸어내리더니, 이내 차곡차곡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경화에게 전화를 했다. 경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곧이어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통장에 세 달 분의 월세와 약간의 생활비를 부쳤다는 문자였다.

상윤은 집주인 할머니의 집을 두드렸다. 손에는 두툼한 하얀 봉투가 들린 채였다. 이른 아침부터 어딜 나가셨는지, 기척이라곤 눈밭에서 뒹굴고 있는, 그 절뚝이는 강아지뿐이었다. 깨갱대던 그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상윤에게 불편한 다리로 달려와서는 주위를 뱅글뱅글 도는 것이었다. 그 하얀 털 뭉치를 다시금 내려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다시 한 번 할머니, 하고 길게 내빼며 부르고서는 안 계시나 보다, 하고 우편함에 봉투를 밀어 넣었다. 허리를 굽혀 강아지를 한 번 쓱 쓰다듬고는 오르막길을 올랐다. 하얀 입김이 나왔지만 이상하게 춥지는 않았다. 집 문턱을 넘어들었다. 휴대폰 폴더를 열었다. 자판을 꾹꾹 눌러대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집에도 도착하기 전에 진동이 울렸다.

「 그려, 그러문. 다음에 또 월세 밀리기만 해 봐. 그때는 얄짤없어. 」

상윤이 제 집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몇 푼이라도 받고 내놓으려 했던 작은 책꽂이의 비닐포장을 벗기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좁아터진 방구석에 책꽂이 있어 봐야 뭣하겠냐며 타박 받던 신세의 책꽂이였다. 그 순간 그것을 버리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던지. 쌓아 둔 일기장들을 조심스럽게 꽂아 넣었다. 한 권 한 권 꽂아 넣을 때마다 노트의 겉면을 매만졌다. 마치 소중한 보물을 만지듯이, 몇 시간이나.

*

딸랑, 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문이 밀리며 열렸다. 평상복보다 편해 보이는 옷차림이었지만 말끔하게 머리를 빗어 넘기고 면도를 한 상윤이었다. 짜장면을 후룩이던 주황색 인부복의 인부들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향했다.

“저어, 일거리 남는 곳 있습니까?”

유리창 너머로 때 이른 봄 햇살이 찾아들고 있었다.

*

끝.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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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드

* 엔터가 아무리 해도 안 되어서 pdf 파일을 첨부합니다. 글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니 꼭 pdf로 읽어주세요.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클릭  》 더 레드 더 레드 *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체온 사이의 서사를 옮겨 적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풍경을 글로 묘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써넣은 낱말이 이 세상에서 부드럽게 사라진다고 가정한다면…… 그러면 어떤 세계에서든 언제나 가장 먼저 멸종할 단어는 빨강이다. * 피터, 하고 부르면 빨간 베레모를 쓰고 벤치에 앉은 203이 익숙하게 돌아본다. 그게 낯설어 나는 못내 아쉬운 투로 203을 발음했다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다시 한 번 피터, 하고 입술을 맞붙인다. 피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모자를 비스듬하게 고쳐 썼다. 귀 뒤로 쓸어내려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이 베레모 그림자 아래로 구불구불 흘렀다. “이제 좀 익숙해졌어?” “여전히 내가 왜 널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지 말해 줄 생각은 없고?” 피터는 한 손을 바닥에 짚어 무게를 실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피터가 종종 이상한 고집을 부리곤 했지만 번호 대신 이름을 불러 달라는 건 지금까지의 숱한 요구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테였다. “농담으로라도 익숙해졌다고 해 봐. 그럼 알려줄게.” 확신하는데, 214 네가 좋아할 만할 일이야. 피터는 그렇게 덧붙이며 가늘게 눈웃음을 쳤다. 이럴 때의 피터는 어렵다. 가늠하기도, 꺾기도. 이기지 못할 것을 예감한 나는 손을 뻗어 괜히 피터의 눈꼬리를 엄지로 꾹꾹 눌러댔다. 피터는 개의치도 않고 발랄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또 재촉한다. 알았어. 익숙해졌어. 이제 됐지?” 여전히 피터는 웃는 낯이었다. 나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터는 내 몸을 당겨 자기 몸에 바싹 붙였다. 몸이 피터 쪽으로 기울면서 새하얗고 빳빳한 교복 와이셔츠 칼라에 그늘이 졌다. 피터라는 이름보다는 훨씬 익숙했으나 여전히 몸에는 힘이 바싹 들어가는 게 척추부터 손가락 끝까지 느껴졌다. “책을 한 권 발견했어, 214.” “그건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많잖아.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니야, 들어봐. 우리가 읽었던 책이랑은 다르단 말이야.” 피터는 자신을 밀쳐내는 내 손목을 쥐고 눈을 반짝였다. 뭔데. 나는 옅은 한숨을 쉬고 피터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피터는 그제야 내 손목을 놓고 뒤집힌 치마 끝단을 다시 뒤집어 정리하며 길게도 뜸을 들였다. 피터는 늘 침묵이 죄의 씨앗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만은 예외인가 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잖아?” “응, 레포트 쓸 때 많이 읽었지.” “세상에 배울 게 없는 책이 있다고 한다면 믿겠어?” “그런 책이 있을 리 없는 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네 직속선배 203이 집필부라며.” 그러면 이제 직속선배 203도 직속선배 203이 아니라 직속선배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실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가 비를 다 쏟아

  •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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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 2018-06-30
현상흔

현상흔   빛이 꼭 은신한 뱀 같았다. 며칠 전 촬영의 대가로 얻은 손목의 통증과 불면이 두통을 몰고 왔으나, 무영이 앓는 환시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출사 날마다 빛은 사정거리 내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독사 꼴을 했다. 천변에서의 촬영은 지난해 겨울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영이 눈가를 가볍게 찌푸렸다. 갈색 홍채가 투명하게 비칠 만큼 날이 좋았다. 무영은 물에 반사되는 빛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길게 응시했다. 강물 위에서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오리배를 타고 있었다. 볕을 받은 빨간 줄이 무영의 손목을 한 바퀴 휘감아 마치 실팔찌처럼 보였다. 아픔을 몇 번이나 더 찍을 수 있을지를 무영은 흐릿하게 가늠했다. 한 번. 운이 좋다면 두 번까지. 무리해서 찍으면 손목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걸 무영은 알았다. 사실 지금 잘린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상흔이 깊었다. 무영이 한숨을 쉬자 빛을 가려낸 손바닥 아래로 피사체와 피사체의 보호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앳된 여자아이와 한 쌍의 부부였다. “안녕하세요.” 무영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목에 걸린 카메라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여자가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무영은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리본을 매단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영의 볼 양쪽에 의례적인 웃음으로 만들어진 보조개가 움푹 팼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상반신만한 코커스파니엘을 품에 안고 있었다. “최대한 즐거운 감정을 담아 주세요. 천변에서 강아지랑 놀게 둘 거예요.” “강아지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여자가 잠시 여자아이 쪽을 바라보다가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침묵은 매미 소리에 묻혔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따가운 볕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갈색 아이브로우로 진하게 그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일처리에 능숙한 십일년차 사진사였다. 무영의 손이 카메라 전체를 훑고 지나가는 동안 여자는 여자아이의 갈색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마지막이라고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남자는 자신의 딸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가 딸아이의 손에 빨간 막대사탕을 쥐어주고 나서야 무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선배의 목소리가 언뜻 스치는 것 같았다. 날이 좋은 날에는 노출값을 줄여야지. 감정을 놓치면 안 돼. 무영은 조리개를 조금 더 닫고 테스트 컷을 찍었다. 무영은 시시때때로 뒤바뀌는 초점을 좇았다. 피사체는 강아지를 따라 달렸다. 점박이는 샛초록색의 여름 잔디로 뛰어들었다. 피사체가 강아지를 겨우 따라잡고서 품에 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혔다. 강아지의 꼬리가 쉴 틈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무영은 여자아이의 가장 즐거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셔터에 손을 올렸다. 무영의 미간에 얼핏 주름이 잡혔다가 풀어졌다. 여자아이가 이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다가 갑작스럽게 강아지

  • 윤별
  •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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