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눈꽃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5-01-09
  • 조회수 578

하얀 설원이 펼쳐졌다. 간밤의 눈이 세상을 덮었다. 햇빛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꽃에 반사되어 바스러졌다. 그런 세상을 네 살배기 어린아이가 신기한 듯이, 병실 창문에 찰싹 붙어 바라보고 있었다. 제 검은 눈동자에 흰 눈꽃을 담아내려 애를 쓰는 어린아이의 뒤편에는 흰 침대가 놓여 있었다. 하얀 시트와, 하얀 이불과, 하얀 간이의자. 온통 하얀색으로 도배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희는 오직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얼음조각에만 정신을 빼앗겨 있었던 것이었다.

“설희야, 주사 맞을 시간이에요.”

평소 그 익숙하리만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지체 않고 오도도 달려와서 방싯 웃었을 설희였다. 안 아프게 놓아 주세요, 라며 그 조그마한 입으로 나름 애교도 부릴 터였다. 그러나 오늘은 웬일인지 꼼짝도 않고 창밖만 바라보는 것이었다. 연화가 조심스레 다가갔다. 설희의 눈높이에 맞추어 쪼그려 앉아, 홀려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눈송이가 바람에 밀려 회오리치며 한 폭의 그림을 그려냈다.

“우리 설희, 눈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

말을 하고도 아차 싶어 제 입을 막았다. 설희는 병원에서만 사 년을 지낸 아이였다. 그 짧은 사 년 인생 중, 사 년. 설희를 태어나게 한 여자는 어린 미혼모였다. 그것도 출산 도중 몸이 버텨 주질 못 해 숨을 거둔. 여자의 부모님조차 종적을 감추고 나니, 설희는 고아원에 맡겨질 가련한 운명에 처해졌다. 입원을 위한 검사 결과에서 선천적으로 병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병원 측에서는 쉬쉬했지만 발 없는 소문이 천 리 간다고, 어느 새 소문은 안개마냥 주욱 퍼져 있었다. 그럴 만 한 것이, 미혼모에 난치병, 거기에 고아. 태어날 때부터 불행덩어리를 안고 태어난 아이. 어느 누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어떤 고아원에서도 설희를 받아 주겠다는 곳이 없었다. 전염성이 없다는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마찬가지였다. 수습 간호사였던 연화가 설희를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설희는 길거리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던 것이었다. 첫눈이 내리던 날 세상의 빛을 보았다 하여, 눈처럼 희게 자라라며 연화가 지어 준 이름이 바로 설희였다. 설희는 이름과 같이, 한눈에 보아도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자라났다. 아니, 생각해 보면 한 번도 병원에서 나간 적이 없었기에 그렇지 않은 것이 더욱 이상할지도. 설희에게는 겨울이 고비였다. 매 겨울마다 설희의 정신은 하늘과 땅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그 작은 몸에 전기충격을 몇 번이나 보내 목숨을 간간히 연장해 갔다. 세 번의 겨울을 모두 그렇게 보냈다.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그러나 이번 겨울은 달랐다. 한 번도 의식을 잃지 않았던 것이었다. 겨울만 되면 낮아지던 혈압도 정상이었다. 설희를 자식처럼 키워 온 병원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설희가 완치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그렇게 설희의 첫 겨울이 시작된 지 한 달 만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눈이 설희의 검은 눈에 아로새겨지고 있는 것이었다. 연화는 아직도 창문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설희를 보며 미소일지 한탄일지 모를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예쁘지?"

"하늘에서 구름이 조각조각 찢어져서 내려오는 것 같아. 폭신해 보여."

"…설희야. 눈 보러 안 갈래?"

연화의 한마디에, 설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태 나가 본 적이 없었기에, 지금 보고 있는 것으로 만도 충분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뭘 어떻게 더 본다는 건지. 아리송한 설화의 마음을 알아챈 건지, 연화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설희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저 구름 조각, 만져 보고 싶지 않니?"

설희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설희가 지금껏 보인 모습 중 가장 활기찬 모습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잠시 흔들리던 연화의 마음이 굳었다. 저 아이에게 눈을 보여 주어야겠다. 나가자, 설희의 귓가에 속삭이더니 곧 손목의 주삿바늘을 빼내었다. 솜을 꼭 누르고 있으라 이르고는 병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연화의 손에는 두꺼운 옷 몇 벌이 들려 있었다. 설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평생을 제가 입고 있던 흰 환자복만 보다, 평상복을 마주하니 그렇게 화려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 작은 손을 뻗어 연화가 들고 온 옷을 어루만졌다. 생소하지만 기분 좋은 촉감에 해맑게 미소를 짓는 설희는 흡사 인간 세계에 처음 내려온, 때 묻지 않은 천사와도 같았다.

설희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대며 둘러보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뒤뜰의 눈의 순결함 위에 설희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눈 덮인 나무도, 붉은 동백꽃도,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저 눈송이도. 나풀대던 눈송이가 설희의 오른손에 내려앉았다. 차가움에 손을 털어내다가도, 다른 눈송이가 제 손에 앉자 까르르대며 즐거워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설희를 보는 연화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퍼졌다. 꼬마 요정이 뛰어다니며 즐거워하는 것 마냥 세상을 다 가진 듯 한 표정을 짓는 설희보다 순결한 존재는, 그 순간만큼은 없었으리라.

"난 이다음에 저 구름 조각이 되고 싶어."

"왜?"

"날 행복하게 만들어 준 것처럼 다른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고 싶으니까!"

자그마한 병원 뒤뜰에서 잠시 숨을 고르려 벤치에 앉자마자 설희가 두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했다. 눈이 설희의 작은 두 손에 들어왔다. 지금 보이는 모든 것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듯, 설희의 두 눈이 반짝였다. 연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왔다. 그 순수한 눈망울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따뜻해짐과 동시에 심장 한켠은 미칠 듯이 뛰어 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연화는 그 감정을 억지로 눌러 버렸다. 어쩌면 덜덜 떨려 오는 제 손을 애써 감추어 왔을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지금만큼은, 오로지 설희의 행복만을 좇고 싶었다.

*

"이연화 간호사, 이연화 간호사. 지금 바로 305호실로 와 주세요. 다시 한 번 안내방송 드립니다…."

다른 환자를 보고 있던 중 안내방송이 전 병원에 울려 퍼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수간호사를 통해서 전달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급한 일이 틀림없을 것이었다. 환자분께 죄송하단 인사를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305호. 누구 병실이더라…. 쿵.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았다. 무겁게 짓눌러져 들어오지 못하는 공기를 억지로 폐에 밀어 넣었다. 종종걸음이 뜀박질로 바뀌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설희의 얼굴이 선명히 눈앞에 떠올랐다. 애써 덜덜거리는 손을 멈추려 주먹을 꽉 쥐었다. 소용없었다. 305호 병실 문을 열어젖혔을 때 그토록 아니길 바랐던 장면이 세차게 흔들리는 눈에 들어왔다.

아아, 왜 그리도 필사적이었던가. 병원의 작은 뒤뜰을, 하늘에서 내리는 눈꽃송이들을, 그리고 연화의 얼굴을 그 작은 눈동자에 조금이라도 더 담으려 애를 썼던가. 그 무엇도 잊지 않으려 애처로운 눈빛을 얼마나 보냈던가. 그래서였구나. 그 작은 몸으로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것을 너는, 너는 알았던 것이로구나. 길고 까슬한 손이 여리고 작은 손에 겹쳤다. 파르르 떨려오는 손이 다른 손을 꼭 움켜잡았다. 절대 잊지 않겠다 말하는 것 같은 눈동자가 연화를 애처로이 바라보았다. 산소 호흡기에 의지하던 호흡이 점점 약해졌다. 실내였기에 비가 들어올 리도 없었고, 비가 오는 것도 아니었건만 침대 시트가 젖어들었다.

열려 있는 창틈으로 눈꽃 한 송이가 날아 들어왔다. 병원 안의 따뜻함에 녹는 것이 당연했을 눈꽃은 어찌 된 연유인지 설희의 위를 빙빙 맴돌았다. 그대로 설희의 자그마한 코 위에 눈꽃이 자리를 잡자마자, 그 위로 흰 천이 덮였다. 설희의 목소리가 잔잔히 울리는 것 같았다.

"난 이다음에 저 구름 조각이 되고 싶어."

언제 눈이 내렸냐는 듯, 여린 햇살만이 빼꼼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윤별

추천 콘텐츠

더 레드

* 엔터가 아무리 해도 안 되어서 pdf 파일을 첨부합니다. 글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니 꼭 pdf로 읽어주세요.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클릭  》 더 레드 더 레드 *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체온 사이의 서사를 옮겨 적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풍경을 글로 묘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써넣은 낱말이 이 세상에서 부드럽게 사라진다고 가정한다면…… 그러면 어떤 세계에서든 언제나 가장 먼저 멸종할 단어는 빨강이다. * 피터, 하고 부르면 빨간 베레모를 쓰고 벤치에 앉은 203이 익숙하게 돌아본다. 그게 낯설어 나는 못내 아쉬운 투로 203을 발음했다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다시 한 번 피터, 하고 입술을 맞붙인다. 피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모자를 비스듬하게 고쳐 썼다. 귀 뒤로 쓸어내려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이 베레모 그림자 아래로 구불구불 흘렀다. “이제 좀 익숙해졌어?” “여전히 내가 왜 널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지 말해 줄 생각은 없고?” 피터는 한 손을 바닥에 짚어 무게를 실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피터가 종종 이상한 고집을 부리곤 했지만 번호 대신 이름을 불러 달라는 건 지금까지의 숱한 요구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테였다. “농담으로라도 익숙해졌다고 해 봐. 그럼 알려줄게.” 확신하는데, 214 네가 좋아할 만할 일이야. 피터는 그렇게 덧붙이며 가늘게 눈웃음을 쳤다. 이럴 때의 피터는 어렵다. 가늠하기도, 꺾기도. 이기지 못할 것을 예감한 나는 손을 뻗어 괜히 피터의 눈꼬리를 엄지로 꾹꾹 눌러댔다. 피터는 개의치도 않고 발랄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또 재촉한다. 알았어. 익숙해졌어. 이제 됐지?” 여전히 피터는 웃는 낯이었다. 나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터는 내 몸을 당겨 자기 몸에 바싹 붙였다. 몸이 피터 쪽으로 기울면서 새하얗고 빳빳한 교복 와이셔츠 칼라에 그늘이 졌다. 피터라는 이름보다는 훨씬 익숙했으나 여전히 몸에는 힘이 바싹 들어가는 게 척추부터 손가락 끝까지 느껴졌다. “책을 한 권 발견했어, 214.” “그건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많잖아.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니야, 들어봐. 우리가 읽었던 책이랑은 다르단 말이야.” 피터는 자신을 밀쳐내는 내 손목을 쥐고 눈을 반짝였다. 뭔데. 나는 옅은 한숨을 쉬고 피터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피터는 그제야 내 손목을 놓고 뒤집힌 치마 끝단을 다시 뒤집어 정리하며 길게도 뜸을 들였다. 피터는 늘 침묵이 죄의 씨앗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만은 예외인가 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잖아?” “응, 레포트 쓸 때 많이 읽었지.” “세상에 배울 게 없는 책이 있다고 한다면 믿겠어?” “그런 책이 있을 리 없는 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네 직속선배 203이 집필부라며.” 그러면 이제 직속선배 203도 직속선배 203이 아니라 직속선배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실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가 비를 다 쏟아

  • 윤별
  • 2018-11-30
플루토 카니발

플루토 카니발         만일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내 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라. 누군가에게 나쁜 위성이라도 되고 싶다는 게 어떤 건지를. 잘 지내? 너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나, 그래서 난 자꾸만 이렇게 소포를 보내고 편지를 써. 아주 작고 미세한 나에게 너는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무거워서, 네 곁에 있지는 못해도 이렇게라도 자주 보내면 잊히지는 않겠지 하는 언니의 작은 소망이라고 생각해. 라, 오늘은 명왕성을 가지고 왔어. 가벼운 무게로 비틀린 궤도를 돌고 자기 위성에게까지 흔들리는 행성. 기억나? 네가 행성 같다고 내게 말했던 거. 너는 지금까지 해 왔듯 흔들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작고 위태로운 게 어린 널 닮았더라. 그냥 그렇다고. 라, 보고 싶어. 내일도 모레도 네 이름처럼 마음껏 신경 쓰게 해 줘.   *     밀크티 마실래? 우유 있어? 산 속이라도 있을 건 다 있어.   카론, 너 이사 온 지 벌써 한 달이야. 이젠 알 때도 되지 않았어? 라는 주머니에서 굴리던 손을 뻗어 선반에 놓인 컵 두어 개를 쥐었다. 나는 라의 말에 구태여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내 이름 대신 제멋대로 붙여 준 카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건 익숙했다. 작고 아담한 오두막집은 아늑했다. 신발에 묻은 눈을 채 털기도 전에 라가 벽난로 앞에 원목 의자 두어 개를 급하게 놓았다. 원래 작업실엔 사람을 잘 안 들여서. 변명처럼 말을 덧붙이던 라는 불 위에 걸어 둔 쇠막대에 주전자를 걸었다.   별로 안 걸리네. 우리 집에서 그렇게 안 멀다고 했잖아.   우유는 도통 끓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는 자꾸만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려고 했다. 얌전히 있는 불에 눈을 찌푸리기도 했다. 놓아 둬. 나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아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얌전히 무릎 위에 놓인 저 두 손으로 만들어졌을 시계들이 수납장 위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네가 만든 거지? 다 완성된 거야?   턱짓으로 시계들을 가리켰다. 라는 시선을 돌려 내 턱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더니 의자에 몸을 꺼뜨리듯 기댔다.   아직.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해 보이는데. 아니야, 아직.   라는 고개를 저었으나 내 눈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시계 부품들이 짜임새 있게 잘 맞물리는 것 같았다. 나는 시계를 뜯어보듯 찬찬히 살폈다. 과연 전에 일러 주었듯 고가에 팔리고도 남을 만큼 빛이 났다. 옆에서 한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중앙에 빈 공간 있잖아. 거기에 넣기만 하면 끝나. 보석? 비슷한 거.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 라는 피하던 시선을 둘 곳이 생긴 것이 기쁘다는 듯 손잡이를 잡았다. 라는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주전자에서 나오는 김이 라의 얼굴을 잠시 가렸다가 이내 흩어졌다.   그래서, 일은 잘 돼 가? 피해자가 한둘이어야지. 여기 오기 전에 거의 다 모았었어.

  • 윤별
  • 2018-06-30
현상흔

현상흔   빛이 꼭 은신한 뱀 같았다. 며칠 전 촬영의 대가로 얻은 손목의 통증과 불면이 두통을 몰고 왔으나, 무영이 앓는 환시를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출사 날마다 빛은 사정거리 내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독사 꼴을 했다. 천변에서의 촬영은 지난해 겨울 이후로 처음이었다. 무영이 눈가를 가볍게 찌푸렸다. 갈색 홍채가 투명하게 비칠 만큼 날이 좋았다. 무영은 물에 반사되는 빛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길게 응시했다. 강물 위에서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오리배를 타고 있었다. 볕을 받은 빨간 줄이 무영의 손목을 한 바퀴 휘감아 마치 실팔찌처럼 보였다. 아픔을 몇 번이나 더 찍을 수 있을지를 무영은 흐릿하게 가늠했다. 한 번. 운이 좋다면 두 번까지. 무리해서 찍으면 손목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걸 무영은 알았다. 사실 지금 잘린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상흔이 깊었다. 무영이 한숨을 쉬자 빛을 가려낸 손바닥 아래로 피사체와 피사체의 보호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앳된 여자아이와 한 쌍의 부부였다. “안녕하세요.” 무영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목에 걸린 카메라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여자가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무영은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리본을 매단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영의 볼 양쪽에 의례적인 웃음으로 만들어진 보조개가 움푹 팼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상반신만한 코커스파니엘을 품에 안고 있었다. “최대한 즐거운 감정을 담아 주세요. 천변에서 강아지랑 놀게 둘 거예요.” “강아지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여자가 잠시 여자아이 쪽을 바라보다가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침묵은 매미 소리에 묻혔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따가운 볕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갈색 아이브로우로 진하게 그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일처리에 능숙한 십일년차 사진사였다. 무영의 손이 카메라 전체를 훑고 지나가는 동안 여자는 여자아이의 갈색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마지막이라고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남자는 자신의 딸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가 딸아이의 손에 빨간 막대사탕을 쥐어주고 나서야 무영에게 눈짓을 보냈다. 선배의 목소리가 언뜻 스치는 것 같았다. 날이 좋은 날에는 노출값을 줄여야지. 감정을 놓치면 안 돼. 무영은 조리개를 조금 더 닫고 테스트 컷을 찍었다. 무영은 시시때때로 뒤바뀌는 초점을 좇았다. 피사체는 강아지를 따라 달렸다. 점박이는 샛초록색의 여름 잔디로 뛰어들었다. 피사체가 강아지를 겨우 따라잡고서 품에 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혔다. 강아지의 꼬리가 쉴 틈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무영은 여자아이의 가장 즐거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셔터에 손을 올렸다. 무영의 미간에 얼핏 주름이 잡혔다가 풀어졌다. 여자아이가 이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다가 갑작스럽게 강아지

  • 윤별
  • 2017-11-27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둥글삐죽

    ...

    • 2018-12-09 03:39:24
    둥글삐죽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