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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다시 뜬다

  • 작성자 꽁보리
  • 작성일 2014-12-21
  • 조회수 525

“쿽!”

남자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깼다. 본인도 자신이 낸 괴성에 멋쩍은지 콧잔등을 긁었다. 옷에 찌든 술 냄새가 방 안에 진동했다.

“거참, 뭔 놈의 꿈이…….”

남자는 혀를 차며 두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간밤에 꿨던 악몽이 끊긴 필름처럼 드문드문 재생되고 있었다. 잠에서 깨고 시간이 흐를수록 끊김은 점점 심해졌다. 결국 남자가 눈곱을 대충 떼고 만화책을 대여섯 권 훑어볼 즈음엔 핵심적인 장면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물론 그는 꿈 따위가 어떻든 개의치 않고 책장을 넘기며 키득거릴 뿐이었다.

한참 그렇게 있다가 이미 예전에 몇 번 봤던 것이어서 질려갈 때쯤 남자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컴퓨터 하단의 시계는 오후 3시임을 알려주었다. 게임에 접속하자 온통 피바다인 게임의 시작 화면을 보고 남자는 불현듯 간밤의, 이제는 흐릿해진 꿈이 떠올랐다. 지금으로선 기억나는 게 너무나 무섭고 끔찍했었다는 ‘전체적인 느낌’뿐이고, 기억에 남는 광경은 딱 하나. 집 바닥 위에 피를 흘리며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그의 노모의 시신이었다. 바닥엔 남자의 죽은 어머니가 흘린 피로 가득했다. 다른 내용에 대한 기억은 백지가 되어버렸는데, 그 모습은 유달리 생생하게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왜 그 장면이 그렇게도 충격적이었을까. 어머니라서? 아니면 피를 한가득 흘리는 시체에 대한 것이라서? 남자는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이도 저도 아닌 본인과 어머니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했다. 한 달에 한두 번, 그것도 술에 취해 들어오는 자신과 자신이 오는 날이면 언제든 집에 있던 어머니. 어머니는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남자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왔다.

‘뭐, 이번 달엔 세 번째인가. 어제 초저녁쯤에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지는 바람에 여기 오겠다고 전화하고 난리를 피웠으니.’

그런 생각에 빠져있던 것도 잠시, 남자는 게임 플레이 화면이 뜨자 바로 게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손으로 옆을 더듬어 언제 땄는지 모를 미지근한 맥주로 목을 축이며 생각했다. 그냥 그저 그런 꿈일 뿐이야. 그래봤자 저 문 밖에서 자기 할 일 잘 하고 있을 양반인데. 악몽을 꿨으니 로또라도 사볼까.

남자가 게임에 열중해 있는 동안, 바깥에서 제 할 일 잘 하고 있을 양반이 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안 들리는 것도 같았다. 스피커 소리 때문에 긴가민가한 거야. 들렸겠지. 남자는 무의식중에 그렇게 확신했다.

게임 하단에 ‘접속한지 4시간째’란 알림이 떴다. 눈도 뻐근하고, 배도 고프고 해서 남자는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책상 위에는 빈 맥주 캔 두 개와 몇 번 떼어먹은 말라비틀어진 빵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남자는 무심코 한 조각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 맛이 없었다. 곰팡이가 피었을 수도 있었다. 남자는 여기가 심부름꾼 노릇하던 술집도 아니고 집인데,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순이 노인네에게 뭐라도 있는지 물어봐야겠다는 일념으로 의자에서 몇 시간 만에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비롯한 온몸이 찌뿌듯해 두둑두둑 꺾으며 방문을 열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역겨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발을 문 밖으로 한 발 내딛자마자 등줄기가 싸해졌다. 냄새도 느낌도 한 곳에서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굳어버린 고개를 겨우 돌려서 그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꿈 속 그 장면이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남자는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 서서 돌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은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그녀가 꽤 오래 전에 죽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머릿속은 시신을 본 뒤로 쭉 카오스 상태였으나, 도저히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이끌었다. 가까이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매우 느리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을 만져 보았다. 차갑고 딱딱한, 그야말로 소설 속에서만 봤던 송장의 모양새였다. 손을 들어 감긴 눈 위로 휙휙 휘저었다. 진짜 죽었어? 정말? 왜? 남자는 혼자서 말 없는 어머니에게 아이처럼 물었다. 그 때까지도 남자의 머릿속은 혼돈의 상태였다.

그 때, 남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피가 엉겨 붙은 머리의 상처였다. 거실 한가운데에 등이 보이게 엎어졌는데 뒤통수가 깨져 죽은 사람. 머리가 굳은 남자가 봐도 누군가의 짓이라는 게 금방 보였다. 대체 왜? 누가? 그리고 그 순간, 남자의 텅 빈 머릿속을 거대한 생각의 파도가 덮쳤다.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던 남자는 제 몸을 일으키려다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핏자국 없는 깨끗한 바닥으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한꺼번에 밀려들어오는 매우 많은 생각들 때문에 정신없는 와중에도 급히 제 몸을 훑어보았다. 하필이면 검은 티셔츠, 검은 추리닝을 입고 있었다. 검은 탓에 있어도 보일 리가 없는데, 남자는 제 상의의 가슴 부분과 소매 부분을 이성 잃은 눈동자로 몇 번이고 훑어보고 몸을 더듬었다. 뭐가 묻었는지, 붙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눈앞에 자꾸 꿈 속 장면이 어른거렸다. 유달리 생생하던 어머니의 시체. 그것만 유달리 생생하고 현실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꿈의 느낌이 끔찍했던 이유는. 설마. 설마. 설마…….

남자는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질 쳤다. 이럴 순 없어. 이 지경까지 올 순 없어. 남자는 계속 뒷걸음질하다 차가운 벽이 등에 부딪혀서야 멈췄다. 그 차가운 느낌에 움찔한 남자는 다시 멍한 상태로 돌아갔다. 입에서는 망가진 기계처럼 ‘내가 사람을… 내가…….’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만 나오는 것이 영락없는 미친 꼴이었다. OUT된 게임 플레이어처럼 남자는 미동도 않은 채 그렇게 시간을 의미 없이 멍하게 흘려보냈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소리가 거칠고 불규칙했다.

시간이 흐르고, 초침소리는 남자의 귓가에서 점점 더 커져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창밖에 둔 시선에 갑자기 달려오는 경찰차가 잡혔다. 저를 잡으러 올 것 같았다. 맹수처럼 달려와 자신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남자는 벌떡 일어났다. 눈 속에 공포가 가득 들어찼지만, 그 안에 어떤 결심이 있었다. 치우자. 남자는 입속에서 말을 뭉갰다. 다른 누가 봤다면 광기에 젖었다고 말할 수 있는 눈을 하고선 남자는 시신의 팔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힘을 주어 끌어내려고 하는 순간,

“누구야!”

잠겨 있지도 않은 문을 손쉽게 열어버린 경찰이었다. 남자는 어물쩍 두 손을 놓았다.

 

“아들이라고요?”

경찰은 화들짝 놀랐다. 멍한 남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경찰은 미주알고주알 설명을 늘어놓았다.

“피해자를 살해한 빈집털이 놈이 오늘 서에 와서 자수했거든요. 그 놈 말이 이 집엔 늙은 할머니 혼자 사시고, 어제는 게다가 동네 분들과 1박 2일로 여행갈 예정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젯밤 10시에 침입했는데, 피해자가 있어서 당황하는 바람에 실수로 그랬다고……. 도둑질만 하던 놈이라 도망을 갔어도 잠깐 망설이고 자수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경찰이 말하는 동안 꿈의 그 한 장면은, 아니 어쩌면 간밤 남자의 취중 목격 장면은 그를 쉴 새 없이 괴롭혔다. 경찰도 남자에게 질문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직업은 뭔지, 어제는 왜 왔는지, 평소 어머니는 어땠는지, 어제 몇 시에 왔는지……. 남자는 아무 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집에서 30분 걸리는 거리의 술집에서 10시 반에 출발했다는 사실에 대해 차마 입도 열 수 없었다. 조금만 쉬겠다고 답변을 미뤘다.

상처가 아주 깊지는 않아, 가격당한 후 몇 시간 동안은 살아있었을 것이라는 경찰의 두런거림과, 부엌에 누군가가 만들다 만 해장국을 뒤로하고 경찰의 물음을 피해 남자는 방으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고스란히 놓인 맥주 캔을 보며, 자신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여행지에서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였을지도 모르는 어떤 불쌍한 노인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쉰 목소리로 술 취해 들어온 아들에게 뭐라고 말하진 않았을까, 직접 봤으면서 유언을 남겼는지도 모르는 아들을 두었다. 범인이 자수하지 않았다면 아들이 제 짓이라 망상하고는 이상한 데에 묻어버렸을 것이었다. 눈물 한 방울 없이.

남자는 허공에 그 아들에게 주먹을 날리다가도 눈물을 머금고 끌끌끌- 웃었다. 어머니, 아들 참 잘못 두셨소. 이럴 자격도 없는 아들인데. 살아생전도 놓치고, 임종도 놓치고, 송장조차 따뜻하게 어루만지지 못한 것이, 너무 늦었다. 남자의 격한 몸짓에 카스테라 부스러기가 공중으로 휘날리고, 발광은 멈추지 않았다.

또 한참을 그러다 갑자기 어느 시점부터, 미쳐가는 남자의 머릿속에 한 영상이 점점 선명한 화질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냥 자신의 모습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와, 술에 만취해서 피범벅인 채로 애타게 손으로 허공에 아들의 얼굴을 더듬는 노모를 지나쳐 제 방으로 들어와 잠든. 깨어나선 게임만 주구장창 하다가 시신을 발견하고 이내 빼돌리려하는. 경찰에게 뭐라 말한 뒤 방으로 와서 난리를 피운 뒤 침대에 벌렁 누워 잠들어버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영상은 선명하지만 저 너머 다른 세상 얘기 같았다. 그것은 전날 꾼 그 악몽이었다. 남자는 그제야 눈치 챌 수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크게 웃을 수 있었다.

“그래! 똑같은 내용에서 잠드는 걸로 난 잠에서 깼으니, 이것도 꿈이고 잠들면 이제 깰 수 있을 거야!”

이건 꿈이야! 꿈이야! 꿈이야! …그리고 내일 일어나면, 제일 먼저 문을 열고 엄마를 안아줘야겠다.

남자는 침대로 벌렁 뛰어들어 잠시 후 코를 골았다. 아무 것도, ‘꿈과 달리 무언가를 더’하지는 않은 채로.

 

* * *

 

“쿽!”

남자가 잠에서 깼다. 멋쩍어하며 콧잔등을 긁었다.

“거참, 뭔 놈의 꿈이…….”

남자는 혀를 차며 두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꿈이 점점 뇌리에서 사라져 갔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만화책을 펼쳤다. 한참 뒤에 만화책을 덮고 나서야 지난밤에 꾼 악몽을 회상했지만 그 내용 자체는 잘 생각나지 않았다. 끔찍한 느낌과 어떤 피범벅인 시신이 놓인 유독 생생한 장면 하나만 기억에 남았다. 남자는 게임이 시작하자 그나마도 남아 있던 꿈의 잔상을 지운다.

또, 또 아침이 찾아 왔다. 해는 몇 번이고 다시 뜬다.

꽁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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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꽁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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