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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을 위한 쾌락

  • 작성자 탈퇴 회원
  • 작성일 2014-08-10
  • 조회수 793

‘강간물’ 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포르노 영상을 튼 지 채 5분이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하민은 얼굴이 잿빛으로 물들며 올라오는 욕지기를 간신히 참고 있었다. 뒤에서는 형사반장이 자신의 그곳을 주물럭거리며 괴상한 욕구를 겨우 잠재우고 있었다. 그것도 힘든 짓거리였다. 하민이 자신을 슬쩍 눈길질 하는 것을 알고도 일부러 이런 짓을 해야 한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 언제까지 봐야 합니까?”

그는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장을 뒤돌아보았다. 반장은 뒤돌아보는 그를 보고는 당황한 얼굴로 얼른 그곳에서 손을 떼 뒷짐을 쥐었다. 그렇지만 이미 앞섶은 불룩하게 튀어나와있는 상태였다. 영상에서는 계속해서 이상야릇한 신음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해자 얼굴하고 범인 얼굴 확인해야 하니까 보라는 거야! 누군 이딴 더럽고 저질스러운 거 보고 싶어서 보는 줄 아나?”

“하지만 얼굴은 대충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하민은 구역질로 요동치는 목을 부여잡은 채 영상을 일시정지 했다. 어둡고 화질이 좋지 않아 완벽히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윤곽이 어느 정도 뚜렷하게 나타나 충분히 그놈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었다. 반장은 자신이 보기에도 그놈의 얼굴과 똑같은지, 뭐라고 반박할 수 없어 얼굴을 일그러뜨리다가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뭐하고 있어? 당장 그놈 데려와!”

“아, 예.”

하민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반장은 아쉬운 듯 멈춘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풀이 죽어 있던 앞섶이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었다. 에라이....... 그는 주위를 힐끔 살피고는 얼른 영상을 끄고 그 파일을 복사했다. 하민이 동영상 속의 살인범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하민이 대충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던 그 얼굴은 동영상 속의 살인범의 얼굴과 전혀 달랐다.

 

 

외등 하나가 비추는 살인마 강민오의 얼굴은 무서우리만치 섬뜩했다. 코 한쪽이 찢어지고 눈물처럼 마르지 않는 살기를 품고 있는 두 눈동자는 끊임없이 하민의 얼굴을 살폈다. 적대적인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상할정도로 예의발랐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민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 만난 것처럼 강민오를 대하는 기분이 낯설지가 않았다. 처음 봤을 땐 몰랐는데,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 살피니 마치 조각조각 흩어진 한 사람의 얼굴이 끼워 맞춰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냉수 한 컵을 들이키고는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너를 루프에 넣을 거다. 그곳에서 너의 살인을 연구한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런 식이지.”

“다른 일들은 모두 구식으로 해결하면서, 범죄연구에는 그런 방식까지 도입하는군요.”

“말이 루프지, 지금까지 루프가 반복 된 적은 없다. 모두 루프가 반복되기 전에 연구는 끝났지.”

하민이 말했다.

“살인 예방책이지. 이미 다 잡은 살인마가 또 나와서는 안 되니까.”

“루프엔 언제 들어가죠?”

강민오가 하민을 맞바라보았다.

“아, 형사님도 저한테 몇 번 죽겠네요. 피해자 역할 하시니까. 루프만 제대로 돌아간다면.”

그는 킥킥거리며 입가에 실소를 흘렸다. 하민은 그를 따라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잊고 있었다. 루프 시스템과 함께 도입된 피해자 체험이 떠올랐다. 흉악범죄를 저지른 살인범은 루프시스템에 도입됨과 함께, 담당 형사 1명 이상이 ‘피해자 체험’에 참여해야 했다. 피해자가 된 채로 직접 과거로 돌아가 그대로 몸에 범행수법을 익혀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험부담이 크고, 쉽사리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베테랑 형사들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 깊게 들어가서는, 살인마의 어린 시절까지 들추어낼 수 있었다.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하민은 소름 돋게 웃는 놈이 끔찍스러웠다. 꼭 거울을 보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얼굴을 한 비정상 인간.

“뭐, 재미있을 거예요.”

그는 누런 이빨을 딱딱 부딪치면서 낄낄댔다.

“저는 사람도 그냥 죽이진 않으니까요.”

“루프가 뭔지는 알고 있겠지?”

그와 일대 일로 이곳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새롭게 규정된 법에 따라, 범죄자가 행해야 할 일에 대해서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현재 강민오는 교도소가 아닌 일산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물론, 삼엄한 경비와 독방은 예정된 그에 대한 선물이었다.

“그 시간 안에서만 살 수 있는 거다.”

“알고 있어요.”

강민오가 대꾸했다.

“피해자도 물론 나다.”

“그러니까 제 앞에 계시는 거겠죠.”

“쫑알쫑알 거리지마! 이 새끼가, 너는 지금 사형당할 새끼야!”

계속 되는 그의 말장난에 절로 책상을 내리친 그의 주먹은 어느 새 강민오를 향해 돌격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 그의 주먹을 강민오가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나중에 때리세요.”

어디서 본 것 같다. 그러나 그 느낌은 불확실하고, 또한 결코 느끼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다. 하민은 주먹을 내리지 않았다. 손의 털들이 일제히 곤두섰다.

“어차피 또 만날 거잖아요.”

독방의 철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천천히 번데기처럼 몸을 오므렸다. 그는 마치 지금까지 참아왔다는 듯 교도관들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목울대가 쓰르라미처럼 울고, 눈가의 주름은 부챗살인 양 접혔으며 입가의 근육은 벌레마냥 꼬물꼬물 움직였다. 그의 몸은 둥글게 말려들어가 무릎은 가슴에 딱 붙었고, 얼굴은 접힌 다리 위로 파고들어갔다. 그리고 손은 그렇게 말린 몸을 감쌌다. 말라붙은 각질이 하얗게 내린 피부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과거 어머니가 불에 달군 젓가락과 숟가락으로 자신의 피부를 지질 때 남은 흔적이었다. 경찰 쪽에서는 아무리 그가 설명을 해도 피해자가 저항을 하다 생긴 상처라며 단정 지었다. 간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웃음소리는 멈췄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가는 오르골처럼 그의 입에서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흐물흐물해진 미치광이의 웃음은 그의 얼굴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가라앉았다. 그는 고개를 살짝 쳐들어서 벽의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곧 있으면 형사들이 점심먹으러 나갈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미친놈의 연기도 끝마칠 수 있었다.

시침과 분침이 서로 꼭 껴안은 채 4시 20분을 가리켰다. 갑자기 강민오는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이 사색이 된 얼굴로 호들갑을 떨며 벽 쪽으로 물러났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에게 다가가는 것 같았다. 고양이처럼 곤두선 그는 사시나무 떨듯 온 손발을 꽉 힘을 준채 흔들었다. 웃음을 연신 짓던 입술은 시퍼렇게 빛바랜 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시간이었다. 엄마의 지독한 사랑이 확인되는 시간.

그는 살짝 고개를 들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김하민을 향해 눈길을 보냈다. CCTV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진짜 살인마.

 

 

하민은 반장과 함께 루프시스템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에 대한 주의사항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터라 이젠 이골이 난 상태였다. 반장은 관처럼 생긴 커다란 기계를 오른손으로 툭툭 쳐대면서 말을 이었다.

“꽤 위험한 일이지.”

“알고 있습니다.”

“자네가 모르는 것도 하나 있어.”

반장의 시선이 하민의 얼굴에서 천천히 발쪽으로 옮겨갔다.

“신체부위 하나를 절단해야 해.”

“뭐라고요?”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지 확인하기 위해 기다렸지만, 반장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발이든, 손목이든, 다리든, 팔이든....... 하나는 내놓아야 해. 그래서 그 신체부위를 이 기계에 넣는 거야. 그러면 과거로 되돌아가는 거지.”

“도대체 왜 발을 잘라야 한다는 겁니까?”

“그게 식량이야.”

하민은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반장의 말이 먼저 나섰다.

“시간에서 이탈하는 순간, 자네의 모든 생리적 욕구는 금지되네. 똥오줌 못 싸는 건 기본이고, 그 어떠한 것도 먹을 수 없네. 자기 신체 말고 먹으려면 살인이 일어나야 하는데, 물론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하진 않겠지. 안 그런가?”

하민은 반장이 한 말들을 차근차근 이해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짜증은 이미 얼굴에 만연한 상태였다.

“자네가 테스트에서 1등으로 통과되었으니 다른 사람이 대타로 뛸 수도 없는 노릇이네. 자네가 하루 전날 사고로 죽지만 않는다면야. 식물인간도 할 수 있는 게 시간여행이니까. 그리고 임무 수행 전에 미리 자네 통장으로 1억이 입금 되고, 임무 완수하면 5억이 추가로 지급 돼. 자네에겐 더 없이 좋은 기회 아닌가?”

모두 맞는 말이라 하민은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여행을 하다가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형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시간여행으로 불구가 된 자를 위해 시간여행을 한다는 것이 좀 우스운 일이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선택은 누구의 말마따나 힘 있는 자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힘없는 자는 그저 ‘따르는 것’ 이 순리였다. 사람들을 죽일 때는 그 힘이 감히 신에 범접했을지 모르나, 우리 안에 갇힌 신세가 되고 난 부터는 노숙자나 다를 바 없게 된 살인마 강민오 역시 그래서 경찰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 아닌가.

“마취를 통해서 안전하게 절단할 것이니 걱정 말게.”

 

 

하민은 단칸방만한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각종 범죄관련 서적들이 꽂혀 있는 책장 귀퉁이에 ‘루프 사건일지’ 라는 가죽장정 된 두꺼운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루프 시스템이 도입된 지 5년이 된 것을 기념하여 정부에서 모든 루프를 통한 연구를 응집해 놓은 책이었다. 전국의 형사들에게 새해 기념 선물로 배부된 것인데, 그동안 한 번도 열어보지 않고 있다가 여름 막바지가 되어서야 그는 그것을 열어젖혔다. 장마철이 지난 뒤라 습기를 머금은 책장은 눅눅해진 상태였고, 가죽 모서리에는 곰팡이가 쑥스럽다는 듯 피어있었다. 그는 책상 위의 물티슈로 몇 번 문질러 닦다가 지워지지 않자 쓰레기통으로 물티슈를 버리고는 책을 펴들었다.

그동안 경찰은 루프를 통해 범죄자들의 범죄행각을 낱낱이 밝혀내고, 그것에 대한 예방책과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하여 범죄자들의 정신치료에도 일조했다. 책 앞에는 루프에 참여한 형사 50명의 이름이 가나다라 순으로 배열해있었다. 곧 이 상단에 자신의 이름 ‘김하민’이 들어갈 것을 생각하자 그는 나름 자부심이 생기면서도 아직 물러가지 않은 루프에 대한 공포가 더 와 닿았다. 신체 중 한 곳을 절단해야 하네. 반장의 그 말이 귓바퀴를 타고 끊임없이 맴돌았다. 움푹 꺼진 그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허공을 이리저리 훑다가 다시 책에 머물렀다. 연쇄살인마의 피해자를 직접 경험한다는 것도 무섭고 꺼림직 한 일인데, 손목까지 바쳐가면서 돈을 받아야 한다니. 식물인간으로 그 일 이후로 단 한 번도 제 힘으로 손가락 하나 까딱해본 적 없는 그의 형 역시 루프를 통해 범죄를 연구했던 범죄심리학자였다. 원래는 형사만 참여 가능한 루프 시스템이었으나, 워낙 뛰어난 인재로 촉망받던 형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형이 얻어낸 결과는, ‘시간여행을 하는 도중엔 인간의 모든 욕구가 억제된다.’ 는 사실 하나 뿐이었다. 형은 그것을 모르고 갔다가 사고사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연구의 장기화는 곧 루프 안에서의 반복이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내가, 내가 꼭 치료할 거야. 반드시.”

그가 읽었던 루프 일지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18세의 남학생을 대상으로 총 20여 차례의 납치·연쇄살인을 저질렀던 여성연쇄살인마 이희정의 이야기였다. 역대 루프 사건 중 가장 많은 형사들이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30명 중 10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지금도 그 시간 안에 갇혀 있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살아있을 가능성은 당연히 없었다. 굶어죽었을 확률이 99퍼센트였다. 이희정은 자해와 자살시도까지 하면서 루프 시스템에 도입되는 것을 극히 꺼려했지만, 반 강제적으로 밀어붙인 경찰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과거로 되돌아갔다. 그 연구는 루프에 참여한 형사들에게 끔찍한 악몽의 갈고리만 남겨준 것이 다였다. 이희정은 더 잔인하게 살해했다. 과거에서 같은 사람을 피해자 대상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먹다버린 음식물 찌꺼기처럼 피해자를 뭉개버렸다. 죽진 않았지만 루프에서 살아 돌아온 10명의 형사들은 극심한 환각증세와 정신분열 증세를 토로했고, 급기야 그 중 다섯 명은 심리치료를 하던 의사를 죽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루프 시스템의 효과는 나날이 갈수록 그 저력을 과시했다. 10명의 연쇄살인까지 일어날 수 있었던 조유강의 연쇄살인도 그래서 막을 수 있었다.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그는 중얼거렸다. 이희정 루프 사건은 분명 초기 단계였고, 형사들의 미숙함도 컸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미 확고히 범죄수사계에서 그 입지를 다진 루프 시스템은 시간여행을 통한 미래에 대한 범죄예방이었다.

강민오에 대한 과거를 알아보고 왔다던 신입형사가 회의실로 들어섰다. 날씨는 고구마 드럼통 안에 그들을 가둬놓은 것처럼 푹푹 쪘다. 신입형사 정환이 문을 염과 동시에 바깥의 뜨거운 공기가 훅 불어 닥쳤다. 반장은 문이나 닫고 오라며 신경질을 부렸다. 민정환은 깐죽거리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보고 온 것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직 루프 시스템을 사용도 해보지 못한 하민에게는 중요한 이야기였다. 에어컨 온도가 더 낮춰지지 않자 반장은 욕설을 지껄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과거로 갈 때는 그냥 자는 것 같아요. 아무런 느낌도 안 들고요. 거기 딱 도착하면, 그 느낌이 딱 들어요. 뭐라고 해야 하지........ 꼭 아이언 맨 슈트를 착용한 느낌? 어떤 거 안에 꼭 맞게 들어간 것처럼 좀 답답해요. 뭐, 다른 행동들은 다 가능하지만.”

“어린 시절 보고 온 거 맞지?”

하루빨리 돈을 받고 형을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미덥지 못한 정환을 흘겨보았다.

“당연하죠. 딴 거는 재미없어요. 피해자 역할은 어차피 김 형사님께서 하셔야 하니까.”

“어떻디? 걔가 말한 그대로야?”

반장이 물었다.

“네. 그 흉터도 그놈 엄마가 한 짓이 맞아요. 반장님이 괜히 헛수고 하신 거네요.”

반장은 어서 얘기나 계속 하라고 다그쳤다.

“그놈이 어렸을 때부터 피해망상증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계속 칼을 지니고 다니면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대비해 항상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중얼거리더라고요. 걔 엄마는 4시 좀 넘어서인가? 그때 퇴근하는데, 퇴근하자마자 강민오한테 묻더라고요. ‘오늘은 너 죽이려는 사람 없었니?’ 와, 그 말 하는데 엄청 소름돋았어요. 그런데 이상한 건, 강민오가 없다고 하니까 갑자기 골프채를 갖고 오는 거예요. 집안에서 골프를 칠 리도 없고, 그래서 지켜봤더니 다시 강민오한테 묻더군요. ‘오늘은 어디 맞을 거니?’ 라고요. 그러니까 평소에도 학대를 당했다는 얘기에요. 강민오가 다리라고 대답하니까, 너는 항상 다리만 맞으려고 한다며 배와 머리 등 그냥 가리지 않고 무작정 두들겨 패더군요. 멀쩡한 아줌마가 지 자식 귀신들린 것처럼 패는 거 보고 진짜 무섭더라고요.”

하민은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소름이 팔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꼭 자신의 과거를 남의 입으로 듣는 느낌이었다.

“교우 관계는 어땠는데?”

반장 옆의 형사가 물었다.

“일진이었어요. 자기 말로는 어렸을 때부터 왕따 당했다고 했는데, 그거는 거짓말이에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돈 뜯고, 안 가져온 애는 손가락이나 고추 잘라버린다면서 칼로 막 피부를 긋는다니까요? 그리고 수업시간에는 선생님이 저를 지적하거나 혼내면 자해한다고 협박하면서 커터칼을 손목에다 갖다 대고요.”

“어렸을 때부터 개막장이었구먼.”

반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머금었다.

하민은 정환의 말을 들으면서 피해자로 당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그에 대해 알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환의 말은 그로 하여금 ‘그의 과거를 보고 싶다’ 는 그의 욕망에 부채질했다. 자신은 매우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살인 광경을 모두 보고 돌아오면, 형을 식물인간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루프 시스템을 더 알아볼 수 있었다.

 

 

햇빛은 계속 손을 뻗어 옷을 갈아입고 있는 하민을 더듬었다. 그는 창문에 블라인드를 끝까지 내려버리고 물건들을 챙겼다. 뒤에 매는 작은 배낭에는 손전등, 핸드폰, 강민오에 대한 것이 적힌 파일, 갈아입을 옷 등 총 일주일 동안 그의 살인을 탐사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모두 다 챙겼다. 그는 살아 돌아올 수 있다고 믿었다. 반드시, 반드시 살아 돌아와 그는 루프 시스템에 희생당한 형을 살릴 것이었다. 이희정 사건을 조사하다가 식물인간이 되고 만 형은 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살아남은 다른 9명의 형사들은 모두 자살을 하거나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어젯밤, 형을 만나러 그는 병원에 갔더랬다.

“형. 나........ 다시 올 수 있겠지? 돌아와서, 형이랑 다시 얘기하고 캠핑가고 그럴 수 있겠지? 응?”

그의 형은 허공에 붕 뜬 눈으로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간여행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는 아직도 두려웠다. 그의 형은 왜 식물인간이 된 것인지, 살인마의 살인방식을 적은 보고서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오리무중이었다. 딱딱하게 굳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따뜻한 온기가 넘치는 그런 손도 아니었다. 시간을 역류한 대가로 손에 묻혀온 다른 이들의 세월들이 차갑게 서린 손이었다.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루프에 무엇이 숨겨져 있을지, 그 안에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말이다. 그 의심은 민정환을 봄으로써 더욱 확고해졌다. 어제는 얘기를 듣는데 집중하느라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그의 사지는 모두 멀쩡했다. 과거에 갈려면 식량으로 쓸 신체부위 하나를 내놓아야 한다. 그가 누군가를 대신 그 식량으로 썼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갔다 오지 않은 것도 아닐 터였다. 변태적 행각만을 일삼는 반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거부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그가 루프 시스템을 통해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현장 안에 스스로 갇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거로 돌아가 범죄자를 루프 안에 가둬 놓고 그 행동양상과 살인을 연구하고 그것을 토대로 살인범과 사이코패스의 특징을 정리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기에, 그는 결국 가기로 결심을 다시 굳혔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전에 이미 형사들과 술자리를 가졌었다. 민정환은 여전히 자신이 과거를 갔다 온 이야기를 무용담 늘어놓듯 흥미진진하게 풀어놓았었다. 그때 돋았던 소름은 아직도 피부에 흉터처럼 남아있었다.

20평쯤 되어 보이는 널찍한 공간에 루프 시스템 기계가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옆 조그만 탁자에는 김하민과 강민오를 위한 마취주사와 메스들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강민오는 피자 위에 얹어진 올리브 조각을 입가에 달고 나타났다. 지극히 온순했으며, 또한 평화로워보였다. 마치 여러 번 해보았다는 듯 루프 시스템 앞에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기도 했다. 하민은 떨지 않으려고 화장실 거울 앞에서 한참 동안이나 자신에게 세뇌를 한 뒤에야 ‘연구실’ 로 발을 디뎠다. 그는 자신과는 다르게 편안해 보이는 강민오를 보며 이상한 기분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강민오의 시선은 반장이 들어설 때까지 줄곧 민정환을 향해 있었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연신 하민에게 파이팅의 구호를 외쳤다.

반장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연구실 문을 열었다.

“다들 준비 됐나?”

그래봤자 두 명에 불과한 인원이었다. 하민은 전날에 자신이 보고해야 할 일지를 받은 뒤였다. 총 30개의 문항을 완벽히 수행해야 했다. 일지에 적힌 30개의 물음은 모두 강민오의 전반적인 일생에 관한 것이었다. 꼭 신이 죽은 그를 심판할 때 묻는 질문지 같았다.

“네.”

“거 기대되네요. 엄청.”

강민오가 비꼬아 대꾸했다. 반장은 그와 민정환을 번갈아 보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식량으로 쓸 신체 일부를 절단할 것이고, 자네들은 루프 시스템 옆의 기계에 올라서게.”

채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김하민의 왼손목이 깨끗이 잘려나갔다. 강민오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한쪽 눈을 도려냈다. 그는 해적 마냥 검은 안대를 찬 상태로 기계에 올라섰다. 길쭉하게 생긴 그것은 해변가에 있는 간이샤워부스와 다름이 없어보였다. 하민은 바로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고개가 하늘 위로 기계에 의해 치켜지는 것을 가만히 냅두었다. 그의 눈길은 기계 천장에 있는 조그만 창문을 통해 검은 레이저에 흔들림 없이 고정되었다.

민정환은 그런 그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제 막 기계 안으로 들어서는 강민오를 향해 알 수 없는 눈짓을 해보였다. 하민은 다시금 경운기처럼 덜덜거리며 떨려오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동공이 빠르게 수축되기를 반복했다. 마른 손과 발에서는 땀이 흘렀다. 머리카락으로 덤불을 이룬 머리에서는 어지럽고 졸린 듯 제대로 정신이 살아있지를 못했다.

“이제 가네, 김하민 형사.”

반장은 물끄러미 기계 두 개를 한 눈에 담았다. 잘린 그들의 부위를 가운데의 관처럼 생긴 기계 안에 넣고 그곳에서 흘러나온 피로 가득 채웠다. 관 주위에는 바닥에 점점이 좌표를 찍은 핏방울들이 널려있었다.

“부디 훌륭히 루프 연구를 마치기 바라네.”

하민은 명멸하는 검은 레이저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장소조차 파악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계속되는 두통에 친구가 미리 챙겨가라고 했던 아스피린 몇 알을 물도 없이 겨우 씹어 삼킨 뒤에야 상황을 가늠할 수 있었다. 먹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인간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 몸 밖으로 노폐물을 배출시키거나, 성적인 요구도 채울 수 없었다. 그러한 욕구를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딱 한 가지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금기사항이라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 아니면 결코 선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사흘 전부터 금식을 했기에 대장은 말끔히 비워져 있는 상태였다. 아주 배고플 때만, 식량을 섭취하면 되었다. 그 식량이라고 해봤자 절단한 발목이었지만.

역류를 타고 도착한 곳은 미화 아파트 안의 놀이터였다. 땅바닥에 구부러져 있던 몸을 일으켜 정자에 앉혔다. 조금씩 몽환적인 분위기가 벗겨지고, 머리가 맑아짐에 따라 그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과연, 애기엄마들이 늘어놓고 치우지 않은 쓰레기들이 나뒹구는 정자에 ‘2005 올해 초특가 분양!’ 이라는 전단지가 버젓이 붙어있었다. 그럼 한 8년 전으로 타임리프를 한 것이었다. 과거라....... 누가 어제 술자리에서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났다.

나는 과거로 가서 형사 절대 안 할 거야.

8년 전이니 스마트폰 따위가 있을 턱이 없었다. 아이가 오줌 싼 이불처럼 샛노란 하늘은 지금이 초저녁이라고 알려주었다. 핸드폰 시간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이미 정지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미화 아파트면 강민오가 살인을 처음 저질렀던 무렵에 살던 아파트였다. 하민은 한창 장마가 휩쓸고 간 8년 전의 여름이 주는 땀줄기를 훔쳐냈다. 가방 앞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강민오의 여권사진에서 스무살의 그를 오려낸 것이었다. 10명의 여학생들을 강간, 살해한 역대 연쇄살인마 중 단연 선두를 달리는 그의 살인을 추적하는 것은 꼭 영화의 중요한 반전을 미리 보는 것처럼 설렜고, 흥미진진했다. 과연 어디서 그가 나타날 것일까, 그것이 궁금했다.

정자 앞에 앉아 놀이터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으나 사진 속의 그를 닮은 사람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아파트 주변을 돌아다니며 찾아볼 생각도 해봤지만, 그래봤자 오히려 시간만 더 오래 걸리고 놓칠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하민은 이대로 일주일을 버틸 것을 생각하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물이나 한 모금 마시려고 가방을 뒤적거리는 순간, 그의 눈길을 붙잡은 남자가 있었다. 왜소한 몸집에, 생기를 잃은 눈동자와 입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우울한 표정을 가진 사람이 꼭 어린애처럼 허리 아래의 킥보드를 타고 있었다. 강민오였다. 그는 재빨리 가망을 멨다. 하민은 그 사람과 거리를 어느 정도 유지함과 동시에 뒤를 쫓아갔다.

킥보드는 아스팔트 도로에서는 미끄러지면서 잘 나가지만, 인도(人道)에서는 울퉁불퉁한 보도블럭 때문에 드르륵 거리는 소리를 연신 뀐다. 강민오는 도로에서보다 더 세게 말이 뒷발질 하듯 달렸다. 은근히 속도가 높아지는 바람에 하민은 조심스럽게 소리를 죽이며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킥보드는 현란한 미러볼처럼 빛을 발했다. 그것은 인도에서 내려와 106단지로 방향을 바꾸었다. 간간이 오고가는 차들은 킥보드를 타는 성인남자를 향해 경적을 누르기 일쑤였다. 8년 전에는 꽤나 인기를 누렸던 아반떼 차량들이 많았다. 새삼 과거로 온 것을 하민은 다시 느꼈다. 그런데 잠깐 한눈을 판 사이, 강민오가 저만치 점으로 작아지고 있었다. 그는 달음박질쳤다.

강민오는 5-6 라인에서 킥보드를 멈추고는 낑낑대며 킥보드를 들고 현관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응답기 기계 앞에 가서 서더니, ‘506호’를 누르고 집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하민은 밭은 재채기를 연신 뱉어냈다. 두 무릎을 짚고 경비실 뒤편에 서서 그의 행동을 눈으로 좇았다.

“누구냐?”

분명 그의 얼굴이 보일 것인데도 집 안 누군가는 그렇게 물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시선을 아래로 깔면서 대답했다.

“저, 민오요.”

“너 이 새끼, 뭐하다 이제 오는 거냐?”

강민오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기침을 하고 혀를 차는 소리에 이어 다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들어와라.”

하민은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강민오가 들어가며 문이 열리자마자 용수철처럼 그의 몸이 튕겨나갔다. 옷이 끼는 것을 감수하고 들어간 그는 놀라 쳐다보는 그를 발견했다. 하민은 태연하게 8년 전의 강민오에게 말했다. 첫 번째 살인사건이 일어나던 해.

“아, 워낙 급한 일이 있어서요.”

“몇 호 사세요?.”

착 가라앉은 목소리는 우울증 환자의 목소리 같았다. 인생의 절망을 있는 대로 맛본 중년에게서 나올 법한 어조였다. 물어보는 것이 분명한데도 강민오의 말끝은 눈 꼬리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1406호.”

“여기 13층까지밖에 없어요.”

왜 거짓말을 하냐고 묻는 그의 눈초리가 섬뜩했다. 하민은 팔에 돋는 닭살에 침을 꿀꺽 삼켰다. 하민은 착각했다며 1005호에 산다고 둘러댔다. 그는 미심쩍은 눈길을 거두지 않고 하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엘리베이터 왔어요.”

“아, 어서 타죠.”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순간 까지도 강민오의 웃음이 잔상처럼 그의 눈앞을 떠돌아다녔다.

 

강민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난 후에 민정환에 대한 의심은 더 깊어졌다. 뒤늦게야 깨달은 것인데, 그가가 집에 들어가고 나면 자신은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문을 따고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가족으로 위장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민정환은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것일까? 뭔가 찜찜했다. 그는 아스피린 한 알을 물도 없이 그냥 씹어 먹으며 쓴 맛에 얼굴을 잔뜩 구겼다. 으....... 이제 어떡하느냐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일지를 펼쳤다.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었다.

1. 강민오의 어린 시절 학대, 범죄사건, 가정환경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시오.

사이코패스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부모나 가족,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학대를 받았는지, 절도나 방화 등 범죄사건을 저지른 적이 있는지, 그리고 야뇨증이 있는지. 이것은 모든 사이코패스들의 세 가지 공통점이라고 언젠가 배운 적이 있었다. 학대, 방화, 야뇨증. 이 세 가지가 기준 연령을 넘어서 지속되고 반복된다면 사이코패스일 확률이 높다. 대다수 사람들은 연쇄살인마 강민오를 ‘사이코패스’ 라고 단정 짓고 있지만, 그것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사이코패스냐, 아니냐에 따라 처벌과 치료, 예방책도 달라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아는 사람도 거의 없어 그러한 과거를 캐내는 것은 진실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강민오는 필히 루프 시스템이 필요한 범죄자였다.

할 수 없이 하민은 따로 챙겨 온 그의 가족에 대한 보고서를 읽어보았다.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과 약간의 치매기를 가지고 있는,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부적응자였다. 알코올 중독이니 술이라면 환장을 하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그렇지만 술병을 배달하는 일로 위장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누가 술을 시켜먹나. 하지만 다음 장을 넘기자 그런 우스운 일은 ‘가능한 일’ 로 변모했다.

- 첫 번째 살인 이후, 강민오의 부친이 살던 집에서 소주와 막걸리 병 등이 합쳐서 총 500병 이상 대량 발견. 불과 한 달 전에 판매되었던 것들임.

한 달 만에 술을 500병정도 소화하려면 매일 슈퍼에 가서 사는 것도 한계가 있는 일이었다. 택배로 한 번에 많이 주문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내 모르게 행동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아내는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시간에 바람을 피우고 있을 것이니까. 쯧쯧, 절로 혀를 차는 소리가 하민의 입에서 흘렀다.

그는 강민오의 동호수를 단단히 외워둔 후, 단지 내 상가로 가서 술을 한 스무 병쯤 구매했다. 바코드를 찍던 아르바이트생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훑었지만 별다른 소리는 하지 않았다. 봉지에 술병들을 깨지지 않도록 조심히 담고 나서려는데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가 그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요즘은 배달 안 시키나 봐요?”

그는 당황한 낯빛으로 뒤돌아보았다.

“예?”

“원래 배달 주문으로 많이 시키셨잖아요.”

그 인간은 원래부터 여기 슈퍼에서 엄청나게 마셔댔네, 뭐.

“아, 운동도 할 겸 해가지고.......”

“너무 많이 드시지 마세요.”

여고생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저희 아빠도 너무 많이 드세요. 그래서 위염 걸리셨고요.”

“걱정 감사합니다.”

슈퍼를 나오면서 그는 생각했다. 분명 아르바이트생은 강민오 부친의 얼굴을 모르는 것이라고. 만약 안다면 나한테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그냥 많이 사가니까 짐작한 거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아파트로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에 다시 올라탄 순간 다시 떠오른 그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은 그로부터 무서운 기억을 끄집어냈다. 하마터면 술병이 가득 든 봉지를 그는 떨어뜨릴 뻔 했다. 그녀는 그에게 살해당한 최초의 피해자였다.

딩동- 초인종 벨소리가 울리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부엌에서부터 죽 이어진 핏물을 달고 강민오가 뛰쳐나왔다. 그는 현관문 앞에 있는 하민을 눈물로 그렁거리지만 살기가 어린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결코 사람의 표정이라 할 수 없었다. 마치 악마가 몸 안에서 그러한 표정을 짓게끔 조종하는 것 같았다. 유명한 오컬트 영화인 ‘엑소시스트’에 나오는 악마에 빙의한 소녀 같았다. 민오는 계단을 쿵쿵대며 밟아 내려갔다. 집 안쪽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벽을 야구방망이라고 쿵쿵 치며 괴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간간이 ‘이놈의 마누라, 또 남자한테 가서 꼬리치고 있을 거야, 분명히!’ 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민오의 아버지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입가와 몸 여기저기에 피가 묻은 것이 꼭 좀비와 흡사했다. 그는 봉지를 문가에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주문하신 물건 왔습니다.”

“주문? 내가 무슨 주문을 했다고?”

“아까 술 20병 주문하셨다고........”

“빌어먹을, 어쨌든 난 줄 돈 없으니까 그냥 거기 놓고 가쇼!”

힘줄이 불끈 튀어나오고 전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분노가 그의 몸 곳곳에 척후병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분노절제가 되지 않는 전형적인 유형이었다. 적대적이고, 행동과 말이 공격적이며 쉽게 화를 잘 내는 성급하고 참을성 없는 인간. 하도 많이 봐왔던 유형이라 하민은 그를 보고 척하니 알 수 있었다. 가정배경은 확실히 전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배달원인 척 하고 들어와 빠르게 집 안을 그는 스캔했다. 언뜻 평범한 집처럼 보이지만 숨통을 죄이는 답답함과 이상하게 배치되어있는 가구들이 눈에 띄었다. 소파와 TV의 위치가 일반적인 집과 달리 거꾸로 배치되어있는가 하면, 가족사진은 머리가 아래로 향하게 벽에 매달려 있었다. 뜨끈뜨끈한 핏자국은 현관에서부터 저 깊숙이 부엌까지 따라 나 있었다. 아버지가 강민오를 폭행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면 그의 엄마는 어디 있지? 하민은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말했다.

“그, 사모님께서는 어디 출타 중이신가 봐요?”

“네깟 놈이 알아서 뭐해!”

“슈퍼 들렀다 가셨거든요.”

“그 년이?”

벌써부터 솔솔 냄새가 맡아지는 그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나마나 걸레 년처럼 남자들한테 꼬리나 치고 있겠지. 제 자식 죽이려고 한 여자랑 뭘 살아? 이미 집 나간 지 오래야. 집 애새끼가 한 달 째 제 어미 못 보고 있으니까! 이봐, 당신, 혹시 그 년 보면 당장 집에 와서 저 개새끼나 데리고 나가라 그래.”

“아, 예. 알겠습니다.”

하민은 후퇴하듯 재빨리 문을 닫고 나왔다. 하지만 다음으로 그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든 것은 귀신처럼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나타난 강민오였다. 그는 피로 물든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두 눈에서는 시퍼런 빛이 너울거렸다.

“엄마 어디 있는지 알아요?”

분명 성인인데도,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그 모양새가 심히 두려운 이질감을 일으켰다.

“....... 뭐?”

“방금, 아버지가 말했잖아요. 엄마 어디 있는지. 아버지는 ‘걸레 년’ 이라고 했지만.”

“나도 몰라. 어디 있는 지는 말씀 안 해주셨거든.”

“걸레 년.”

강민오는 말을 오물거렸다.

하민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고 되물었다.

“뭐?”

“걸레 년이라고요. 우리 엄마.”

그가 하민의 눈길과 마주쳤다. 하민은 순간적으로 매우 낯익은 눈빛을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루프 안에 들어오기 전부터 자신의 머릿속에서 기어 다니던 불안감이 점차 몸을 불리고 있었다.

“맞죠? 걸레 년. 아버지가 그렇게 불렀으니까 맞을 거예요.”

 

그 뒤에 하민이 취해야 할 행동은 곧 일어날 첫 번째 피해자로 모습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짜 피해자를 죽여야 했다. 루프 안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살인은 정당했다. 어차피 현재에서 이미 죽은 사람들이었다. 과거에서 누구 손에 죽든 변할 것은 없었다. 범죄연구를 진행시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살인도 저질러야 하는 것이 바로 루프의 형사들이었다.

아까 그 아르바이트생이 퇴근할 때를 기다리다가 하민은 편의점 뒤의 한적한 골목가로 끌고 간 후 망설임 없이 목을 그어버렸다. 그 여자는 남자친구라도 만나러 가는 모양이었는지 다홍빛으로 나폴 나폴 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하는 일에 맞지 않게 꽤나 고가의 백을 들고 있었는데, 남자친구가 사준 것일 거라고 그는 추측했다.

‘만약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으면 전화를 했었을 수도 있겠네.’

어쨌거나 상관없었다. 이 시체는 음식물 쓰레기통에 토막 내서 버려질 것이고, 자신은 그녀의 남자친구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이 여자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것이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골목에는 술집 간판 불빛 하나 들어오지 않았다. 날씨만큼이나 우중충한 잿빛 분위기를 흐리고 있는 다세대 주택 골목은 살인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칼 한 자루를 꺼냈다. 목과 얼굴을 피로 마스크 팩 한 채 길바닥에 누워있는 여자를 보고 있노라니 약간의 동정심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민의 깊숙이 목을 파고들어간 칼로 금방 짓이겨졌다. 뼈에서 자꾸만 칼이 걸렸다. 곱고 흰 피부는 돼지 껍데기 마냥 잘 썰리는데, 흰 뼈에서 그그극 하는 소리만 날 뿐 칼이 나아가질 못했다. 할 수 없이 가방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꽉 쥔 다음, 언젠가 의자를 만들기 위해 톱질을 했을 때처럼 슬근슬근 앞뒤로 움직여야 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분리된 몸뚱이를 아래로 내렸다. 목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잘린 몸에서 시냇물같이 흘러나오는 보랏빛 피는 경사진 면을 따라 그대로 하수구에 스며들었다.

머리가 제일 힘들 뿐이었다. 다리나 팔, 그리고 몸을 여러 조각으로 자르는 데는 그리 많은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 힘주어서 칼질 두 세 번 하면 쉽게 잘리는 팔과 다리는 곧 조립할 인형처럼 주위에 널브려져 있었다. 워낙 날이 잘 선 칼이었다. 어느 틈에 하민은 이상야릇한 쾌감이 가슴 언저리에서 굽이치는 것을 느꼈다. 허나 이내 잠자코 그녀를 숨기기 좋게 손질하는 데만 집중했다.

가방 밑바닥에 깔려 있던 대용량 쓰레기봉투를 꺼내 거기에 차곡차곡 마트 물건 담듯 그는 시체 토막들을 넣었다. 바닥에 있는 피는 휴지로 대충 지워버렸다. 이래야 더 자연스러울 테니까. ‘2005’라는 숫자는 아직도 낯설게 그의 눈동자 안에서 부유했다. 루프로 건너오기 전에는 폐품 처리되었던 폴더 폰들이 지금 길거리의 핸드폰 가게에서는 최신 폰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원래 피해자를 죽였으니 이제 하민은 첫 번째 피해자인 그 여자가 되어 있었다. 자신이 보기에는 김하민 원래 그대로였지만, 이미 루프 시스템은 그를 토막 난 아르바이트생 여자로 만든 뒤였다.

그는 다시 보고서를 꺼내어 읽어보았다. 첫 번째 피해자는 귀가하던 중, 놀이터를 지나가다 실종되었으며 정확히 사흘 후에 시신이 심각하게 훼손당한 상태로 사거리에 버젓이 버려졌다. 그는 곧장 놀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계속 왔다갔다 걸음을 되풀이 하던 그에게 강민오가 나타났다. 바람피우다 돌아온 엄마에게 맞았는지 얼굴과 반팔 아래 드러난 팔에는 시퍼런 멍들이 부황처럼 떠있었다. 그는 킥보드를 밀고 천천히 놀이터로 바퀴를 굴렸다. 그는 재빨리 뒤로 돌아 걷는 시늉을 했다. 돌부리를 걷어차며 구르는 킥보드 바퀴가 자꾸만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놀이터에 왔을 때부터 떠나지 않던 물음. 민정환과 강민오. 왜 루프 시스템에 들어가기 전 둘은 눈짓을 교환했을까. 고개는 왜 끄덕였을까.

“누나.”

어느 새 등 뒤까지 바싹 붙은 민오가 그의 등 뒤를 톡톡 건드렸다.

“응? 왜?”

눈 깜박일 새도 없이 강민오의 두 손에 실린 힘은 킥보드를 하늘 위로 높이 쳐든 뒤, 그대로 하민의 머리를 내려쳤다. 섬뜩한 웃음자국이 옅게 남아있는 그는 쓰러진 하민을 계속해서 떡방아 찧듯 뭉갰다. 킥보드의 바퀴가 어둠 속에서 현란한 춤사위를 보일 때, 그 붉은 빛이 핏빛인지 아닌지는 살펴봐야 했다. 단단하고 종잇장같이 얇은 킥보드의 단면은 하민의 두개골을 부수고 살을 찍어 내렸다. 피가 몸 곳곳에서 솟구쳤다. 얼마 되지 않아 하민의 몸은 킥보드 아래에 굴복했다.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고통은 그리 많이 느껴지지 않았다. 미리 약을 먹어둔 탓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상했다. 분명 강민오는 여자를 납치한 뒤, 사흘 동안 고문하고 강간했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 킥보드로 내려치다니? 이희정처럼 피해자에 대한 살인수법이 바뀐 것인가? 멀쩡한 성인남자가 어린아이처럼 킥보드를 타고 다니다가, 그 킥보드로 지나가는 아르바이트생을 후려쳐 죽이고 있었다. 일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그 순간, 루프 시스템 기계 안에 들어가 과거로 돌아가려고 기다리고 있을 때 얼핏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살인마를 잡기 위해 루프 시스템을 가동하는 것이네.

잡아야죠. 그놈을 루프 안에 가둬야 하니까.

복부와 다리, 머리, 목 등 이곳저곳을 가격당하면서도 하민은 그 말들이 빠르게 귓구멍에서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그는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쳤다. 강민오가 헉헉 숨을 몰아쉬고 힘이 다 빠졌을 때가 기회였다. 킥보드가 강민오의 힘에 부친 팔에 내려가는 순간, 그는 벗겨진 신발로 강민오의 얼굴을 있는 힘껏 갈긴 뒤 남아있는 기운을 쥐어짜가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킥보드를 들고 찾아온 강민오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김하민이었다. 남들 눈에 제대로....... 피해자인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것이 맞나? 의구심이 일었다. 그는 무작정 인근 맥도날드로 들어가 화장실로 종종걸음 쳤다. 거울에 비치면 남들이 보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울 속의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김하민이었다. 피해자로 변하지 않았다. 스티븐 킹의 소설 캐리의 여주인공처럼 온 몸을 피로 샤워 한 모습이었다. 제대로 깎지 않은 수염이 들쑥날쑥 있는 턱에는 피가 머무는 정류장이었고, 그 아래 쇄골에는 핏물로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단단하고 뭉툭한 자신의 코도 그대로였다. 왼쪽 손목이 잘려나간 것도 그대로였다.

어떻게 된 거지?

머릿속에서 가장자리를 겉돌던 그 물음은 이제 머릿속 한가운데서 그의 모든 집중을 끄는데 성공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그 외침 끝에 불현듯 스쳐간 생각하나가 있었다. 루프 참여자가 자신이 되돌아가는 과거의 정확한 날짜를 모르면, 오작동이 일어날 수도 있어. 반장의 말이었다.

설마.

그는 대충 물로 피를 닦은 다음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무작정 햄버거를 들고 베어 물려던 사람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지금 몇 년 몇 월입니까?”

좀비라도 달려든 듯 꼬불꼬불 파마를 한 여자는 겁에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2011년 7월이요.”

그는 의심으로 꽉 막혀있던 가슴이 핵폭탄만큼 우레와 같은 폭발음을 일으키며 터지는 것을 목격했다. 2011년 7월이라니. 자신은 분명 반장이 2005년 7월에 루프를 만드는 것을 봤다. 그런데 어떻게 2011년이라는 것인가? 그때는 이미 살인마 강민오가 모든 피해자들을 살해하고 도망치던 때였다. 아까 자신이 피해자 행세를 하기 위해 죽인 그 아르바이트생은 다른 여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첫 번째 피해자의 얼굴이 불에 그을리고 처참하게 뭉개진 탓에 얼굴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그럼 아까 왜 술병 지랄을 떤 거야?

분명, 강민오가 그렇게 시켰을 가능성이 높았다. 2005년 전단지와 그 핸드폰 광고 전단지들도 그가 붙이고 다닌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하나 분명한 것은, 반장과 민정환이 자신을 속였다는 점이었다.

살기 위해 무엇이라도 먹어야 했다. 루프 안에 들어온 지 사흘이 지나고 있었다. 뱃가죽이 등골에 달라붙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째서 반장이 2005년이 아닌 2011년으로 조작한 거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러나 킥보드로 두들겨 맞은 고통이 피라냐인 양 그의 신경을 물어뜯는 바람에 그는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잠깐만. 그는 뭔가 생각난 듯 자신이 루프 안에 들어온 이후의 일들을 찬찬히 짚어보았다. 그럼 아까 내가 죽인 그 여자는 어떻게 된 거야? 분명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용의자를 쫓고 있을 것이고. 자신은 머지않아 유력한 용의자로 급부상하여 처참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토막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될 가능성이 높았다. 피해자 대신 행세를 한다고? 웃기시네. 그는 가방 안에 든 자신의 잘린 손목을 잘근 깨물었다. 남들 눈에는 그저 검은 빵으로 먹는 것쯤 여겨질 터였다. 질긴 살이 탄 냄새와 함께 혀 안에서 꽈배기처럼 말려들어갔다. 맛대가리도 없었다. 배는 점점 고파왔다. 인육을 먹는 형사라니. 참을 수 없이 자신이 혐오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순간 반장이 했던 말이 하나 떠올랐다.

‘루프 안에서 살인을 저지르면 모든 욕구가 풀리네. 꼭 봉인을 푸는 마냥. 하지만, 그건 살인이야.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일세.’

그 말인 즉슨, 과거의 다른 음식들도 마음껏 먹고 생리욕구도 풀 수 있다는 것이었다. 먹은 것도 없는 장에서는 나오지 못한 가스가 계속해서 역주행하고 있었다. 죽일까? 아까 실수로 아르바이트생을 죽였지만, 그럼에도 음식들을 먹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그 아르바이트생 역시 루프를 통해 온 사람일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 나가려면 루프 시스템을 작동한 사람이 들어와 같이 나가야 하는데, 반장이 들어올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다른 말로, 사람을 또 다시 죽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잘 해낼 수 있을까요?”

“그놈이 정신을 차리겠지.”

에어컨이 후후 부는 냉풍이 반장의 땀을 훔쳐갔다. 민정환은 불안한 표정으로 핏물이 뚜껑 사이로 비집고 넘치는 루프 기계를 바라보았다. 죽은 시체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내가 2005년이 아니라 자기가 마지막 살인을 저질렀을 때로 돌아갔다는 걸 알면.......”

“강민오 형사가 알아채기 전에 죽이면 어떡합니까?”

그는 강민오를 ‘살인마’가 아닌 ‘형사’로 부르고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지. 이 모든 것이 지금 녹화되고 있는 중이니까, 살인마가 자기가 살인마란 걸 다시 깨닫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하네. 그리고 어차피 중간에 분명 깨달을 것이야. 사람이 인육을 어떻게 먹나. 분명 루프 안에서 음식을 먹기 위해 살인을 할 거야. 그러면 본능이 깨어날 걸세.”

그가 낄낄거리는 얼굴로 정환을 돌아보았다.

“동물 본능이 어디 가겠는가? 인간도 마찬가지지.”

루프 안에서 잔인한 살인극이 시작되려고 할 참이었다. 그들은 김하민을 꾀어서 루프 안에 들어가게 한 뒤, 가둔 것이었다. 식물인간이라고 병원에 누워있던 그의 형은 멀쩡히 반장의 심부름으로 커피를 타러가고 없었다. 보고 있던 현실이 점차 본모습을 드러내는 찰나였다.

“이 녀석은 커피 타러 갔는데 왜 이렇게 늦게 와?”

“분장하고 연기 좀 하느라 진짜 식물인간이 된 줄 아나보죠.”

정환이 대꾸했다.

“뭐, 그래도 유능한 인재 아닌가. 그 새끼가 떠들어댔던 것처럼, 자기 ‘형’은 범죄심리학자이고 루프 안에서의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을 밝혀냈으니까.”

그가 루프 기계로 고개를 돌렸다. 바닥 틈새에 고인 피가 진득하게 달라붙고 있었다.

 

 

자신의 손목은 더운 여름이라 금방 악취가 나기 시작하고 썩기 시작했다. 루프 안에서는 루프로 들어간 참여자에게는 모든 시간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썩거나 그런 것도 없다고 한 반장의 말이 점차 어긋나고 있었다. 알고 봤더니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 6년이나 지나가 있는 루프 안, 썩어가 더 이상 배를 채울 수도 없는 손목. 먹기 위해서는 살인을 저질러야 했다. 그래야 먹을 수 있었다.

날씨는 피부를 곪게 만들고, 머릿속에 복잡한 열기를 불어넣었다. 폭발하기 직전의 증기기관차였다. 연기가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그의 뇌 안에서 맴돌고 있으니 과부하가 걸린 셈이었다. 공원에 죽치고 앉아 먹을 것을 걱정하거나 자신을 죽이려 한 강민오를 기다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태양은 돋보기로 개미 태우듯 그의 인내심을 심지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것이 터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배가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파왔다. 한 발짝도 걸어 나갈 수 없는 지경이었다. 강민오에게 다친 상처는 뜨거운 날씨를 만나 기승을 부려 더 깊게 타들어갔다. 상처를 치료하지 않아 괜한 곳까지 욱신거리고 따가웠다. 병균이 옮아붙은 것이었다.

몇 번이나 참자고 다짐했다. 조금만 있으면 강민오가 나타날 것이고, 그러면....... 그러면 어떡하지? 시간이 이미 강민오가 마지막 살인을 저지른 후인 2011년이니, 자신은 할 일이 없었다. 연구도 불가능했다.

하민은 벤치에 죽 드러누웠다. 해가 저편으로 자리를 움직인 덕분에 나뭇잎이 그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가뭄에 콩 나듯 한두 명 보일까 말까였다. 더위로 허덕인 후에는 졸음이 밀려오는 법이다. 그늘은 그 촉진제가 되어 빠르게 그의 눈꺼풀을 닫히게 만들었다. 적색으로 빛나는 눈꺼풀 안쪽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목이 찢어져라 부르는, 공포에 가득 찬 비명.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자신이 조사한 범죄자들 말고,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들은 적 있는 비명.

그가 급히 일어나 앉자, 한 여자가 그를 가리킨 채 비명을 지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몰려들 때쯤에서 뒤로 도망치더니, 무어라고 주위사람들에게 떠들어댔다. 사람들의 눈길이 그를 거치자마자 순식간에 두려움으로 시뻘겋게 변색되었다. 누군가는 핸드폰을 꺼내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급히 걸고, 누군가는 급기 그 무리에서 빠져나가기 바빴다. 자신을 두고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10분쯤 늦게 깨달았다. 왜 나를 보고 소리를 지르는 거지? 어디에 전화를 하는 거야? 하민은 급히 가방을 메고 뒤로 물러섰다. 사람들은 여전히 공포가 담긴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더위에 어질한 귀가 깨기까지 시간이 더 걸렸다. 그때서야 사람들의 말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김하민이잖아!”

“그 연쇄살인범?”

“시, 신고해야 돼, 신고해야 한다고. 공원에 지금 버젓이 저렇게 앉아있는데.......”

살인범? 내가? 그는 잠시 동안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자려고 누웠는데, 어떤 여자가 자신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들은 귀신 보듯 나를 쳐다보더니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하고, 지금 나보고 살인마라고 한다....... 핸드폰을 꺼내든 사람들은 경찰에 전화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살인마라니, 아르바이트생 한 명만 죽였는데, 연쇄살인마라니? 나는 루프를 통해서 살인마 강민오를 연구하기 위해 온 거야. 그런데 나보고 연쇄살인범이라는 개소리를 지껄여?!

사이렌 소리가 멎기도 전에 형사들과 의경들이 차 안에서 달려나왔다. 그 발걸음과 얼굴들은 분명 그를 향해 있었다. 하민은 더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미친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계속해서 ‘잡아, 오늘 놓치면 우리들 목 날아간다!’ 는 소리만 연신 들려왔다. 아직도 의문만이 머릿속에 남았다. 도망칠 이유도 없었다. 아르바이트생은 범죄연구를 위한 희생양이었다. 더군다나 반장의 시간 착오로 죽은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절대,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게 아니었다. 하민은 발에 불이 붙은 것처럼 도보 위를 내달렸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자 더 많은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기다렸다는 듯 들어섰다.

“제기랄!”

그는 다급히 어린이 놀이터 쪽으로 발끝을 돌렸다. 아파트 주민들이 있을 것이니 쉽게 건드리지 못하리라는 계산에서였다. 양쪽으로 갈라지는 나무들이 모두 죽은 시체로 보였다. 머리가 잘리고 온 몸이 난자당한 채로 우뚝 서서 도망치는 그를 보고 있는 시체들....... 그는 환영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눈을 감았다 떴지만, 다시 눈 뜬 그를 맞이한 건 칼을 들고 옆에서 달려드는 시체들이었다.

“으어아악!”

칼에 팔을 베었다.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피는 시야에 흩뿌려졌다. 놀이터의 아이들이 비눗방울을 호호 불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놀이터로 뛰어들더니, 아이 한 명을 붙잡고 놀이터를 등진 채 경찰들을 앞에 두고 몸을 급히 돌렸다. 형사들은 아이의 목에 칼을 댄 상태로 인질을 붙잡고 있는 하민을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를 향해 뒤쫓던 시체들은 희뿌연 검은 연기만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괴상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헤헤헤.......

“인질을 놓아줘라, 김하민!”

내 이름을 알고 있어? 그런데도 나를 연쇄살인범으로 오인하고 붙잡으려고 해? 더더욱 괘씸하였다. 누구 때문에 살인마 강민오를 쫓으면서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고 인육까지 질겅질겅 씹어댔는데. 다 너희 같은 개새끼들 살리려고 그런 거야! 과거로 돌아온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기나 해?

“내가 연쇄살인범이라고? 개 같은 소리들 하네.”

그의 머리는 위아래로 흔들리는 바이킹이나 마찬가지였다. 송두리째 몸이 흔들리면서 욕설이 섞인 말이 우수수 폭탄 만난 물보라처럼 쏟아졌다. 형사들은 총구를 그의 전신으로 겨눈 채 쉽게 몸을 놀리지 않았다. 그들은 하민이 모르게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내딛었다.

“너를 이훤순, 김학수, 이국민, 황영지, 금지영, 이다의를 살인한 죄로 체포한다, 김하민! 당장 인질을 놓고 항복하라! 우리는 너를 사살할 수도 있다.”

그 순간이었다. 하민을 지금과 같은 지경으로 만든 강민오가 느닷없이 형사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멀쩡한 모습이었다. 하민은 문을 쾅쾅 두들기며 내보내달라고 아우성치던 울분과 분노를 드디어 바깥으로 내보내주었다.

“야 이 씨발새끼들아! 지금 네들 눈엔 저 살인마 새끼가 안 보여? 나는 저놈 잡으러 루프를 통해 온 거란 말이야! 당장 저 새끼부터 잡아! 저 새끼가 니들이 나열한 그 피해자들 죽인 놈이라고!”

그러나 형사들은 강민오를 향해 ‘어떻게 할까요?’를 되풀이할 뿐, 오히려 상관을 대하는 태도였다. 강민오는 하민을 보더니 킥보드로 그를 내리칠 때의 태도로 앞으로 나섰다. 하민은 오줌을 질질 싸고 울음보를 터뜨린 아이의 목에 칼을 더 찔러 넣었다. 핏방울이 땀처럼 송골송골 맺혀났다.

“저 놈은 아직도 모를 거야.”

“예?

강민오의 말에 형사 한 명이 되물었다.

“아직 지가 살인범인 줄 모를 거라고. 박 형사.”

“예.”

하민은 강민오에게 바싹 다가붙은 형사 한 명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프 시스템에 들어오기 전, 살인마 강민오를 관리하던 신입형사였다. 강정환과 함께 새로 들어온....... 그놈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루프 기계에 강민오와 나 말고도 과거로 온 사람이 있었어? 역시, 자신이 죽인 그 아르바이트생도 루프를 통해 온 것이 확실했다.

“반장님한테 가서 보고해라.”

“뭐라고 말입니까?”

“조금만 있으면, 드디어 그 새끼 잡는다고.”

 

꺄아-

비명이 새어나가기 전에 그는 입을 꽉 틀어막았다. 억센 손이 여자의 코와 입을 틈새 하나 없이 가로막았다. 여자의 뜨거운 숨이 그의 검지의 단면을 따라 흐르다가, 어느 순간 화장실의 지린내가 다시 허공을 나돌았다. 하민은 소리 나지 않게 화장실 한 칸을 열어젖힌 후, 기절한 여자를 안에 넣고 문을 잠갔다. 새벽 2시. 그가 아직도 연쇄살인마라고 믿고 있는 강민오가 살인을 가장 많이 저질렀던 시각이었다. 거짓말처럼 그 역시 이 시간에 지하철을 배회하던 술 취한 여자를 죽였다. 칼은 딱 한 번만 휘두르면 되었다. 정확히 목을 베어버렸다. 완전히 떨어져나가지 않아 보기 흉했지만, 숨을 쉬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는 대충 커다란 비닐로 시체를 가리고는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여자에게서 뺏은 지갑을 보던 그는 만원짜리 지폐 다섯 장을 구기듯 움켜쥐고는 지갑을 선로에 버렸다. 그의 걸음이 닿은 곳은 맥도날드였다. 배가 울었다. 허기지고 뱃가죽이 종잇장처럼 얇아졌다. 그는 가까스로 발을 질질 끌며 맥도날드 문을 열었다. 피가 묻은 옷은 상관치 않았다. 어서 배부터 채우는 것이 먼저였다. 직원이 주문을 도와드릴까요, 라고 묻기도 전에 그가 만원 두 장을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상하이치킨 세트 두 개, 세트 두 개 어서 주쇼.”

그는 숨이 차 제대로 말도 잇지 못했다. 돌아오는 점원의 대답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죄송하지만 그런 메뉴는 없습니다, 손님. 치킨 버거나 빅맥 세트는 있습니다. 그걸로 드릴까요?”

“무슨 헛소리.......”

아, 지금은 2011년이지. 지랄 같네. 그는 빅맥 세트로 두 개 달라고 말하고는 버거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낚아채듯 받아갖고 2층으로 올라갔다.

얼마 만에 맛보는 음식인가. 그는 단 10분도 걸리지 않고 두 햄버거를 먹어치웠다. 목구멍이 채 삼키지 못한 음식들로 꽉꽉 막혔다. 하지만 그것은 시원한 콜라로 밀어내면 되었다. 온몸이 샤워를 한 것처럼 개운했다. 살인을 저지른 뒤의 맛난 음식이라서 그런가.

그는 감자튀김을 케찹에 하나씩 찍어먹으면서 다시 지금까지의 일들을 정리했다. 지금 자신은 강민오 대신 살인마 취급을 받고 있었고, 강민오가 죽인 피해자들이 모두 그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염병할, 이게 무슨 짓거리야. 다시 신경질을 내며 감자튀김을 집으려던 그의 손가락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거짓말처럼 생생하게 여러 장면들이 자신의 머릿속을 에워싸는 것을 느꼈다. 그것들은 동시상영 되었다. 여자들을 강간하고 그것을 찍는 누군가, 시체를 보면서 자위를 하는 누군가, 그 시체들을 토막 내어 냉장고에 보관해놓고 사골국처럼 우려먹는 누군가, 퇴근하는 아르바이트생의 귀갓길을 조심스럽게 따라 밟는 누군가, 그 ‘누군가’는 굳이 더 생각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감자튀김을 집지 못하고 손끝을 허공에 가만뒀다. 모두 자신이었다. 쾌감에 익숙한 그 웃음도 자신의 얼굴에서 피어났고, 세심하고 교묘한 눈빛도 자신의 눈동자 안에서 빛났다. 아까 지하철 화장실에서 여자를 죽일 때의 전율이 그의 온 신경을 타고 짜릿하게 훑고 지나갔다. 묘한 쾌감이었다. 아까 여자를 죽일 때, 두려움 따윈 일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목적 아래 죽인 것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그때가 재밌지?

그가 혼란스러운 머리를 가득 안은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누군가가 그를 거칠게 밀고 지나갔다. 한 젊은 남자였다. 그 남자가 지나가고 난 뒤 주머니가 허전해 살펴보자 만원 지폐 세 장이 먼지만 남겨놓고 사라져 있었다.

“저 미친 개새끼가.”

다른 이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사이코패스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였다. 첫 번째,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

하민은 이어폰을 꽂고 계단을 내려가려던 남자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뭐에요?”

남자가 짜증스러운 눈길로 물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는 천천히 놀람과 당혹감으로 빠르게 작아 들어갔다. 그 눈동자가 칼을 든 하민을 담아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자는 우당탕 요란하게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칼에 맞은 가슴에서는 고래 등처럼 피분수가 솟고 있었다. 사람들이 놀라 음식을 떨어뜨리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그저 아득하니 들려왔다. 그는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아까 여자를 죽일 때와, 아르바이트생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을 때.

재밌는데?

공원에서처럼 똑같이 일이 되풀이되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멍청하게 헛웃음만 입가에 그렸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손에 힘이 쫙 빠져나갔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사람들이 어어- 거리며 위태위태한 그를 쳐다보았다. 계단에서 떨어질 때도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계속 한 말이 빙글빙글 머릿속에 남아 소용돌이쳤다.

재밌다.

두 번째, 살인은 더할 나위 없는 쾌락이다.

 

 

“그 새끼는 어떻게 됐어?”

루프 기계로 돌아온 강민오를 반장과 민정환 등이 맞았다. 강민오는 땀을 흘릴 기운도 없이 회의실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루프 안에 갇혔어요.”

“시간이 다 흐른 거 맞지?”

“네. 이제 계속 반복될 텐데요. 어차피 그 놈 하나만 그 반복되는 시간 안에서 사는 거니까, 상관없어요.”

반장은 함박웃음으로 자리로 돌아가 사건일지를 펼쳤다. 그리고는 연쇄살인마 ‘김하민’이라고 라벨 붙인 곳을 펼쳤다. 카메라를 바라보며 씩 웃고 있는 하민의 얼굴이 흑백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는 그곳에 ‘사건완료’ 라는 붉은 도장을 쿵 찍었다. 하민의 웃는 얼굴에서 붉은 색소가 배어나왔다.

 

 

**

 

하민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 왜 이렇게 안 나타나. 이 사진 맞긴 한 거지?”

그는 강민오의 어린 시절 사진을 꺼내들었다. 옆에서는 ‘2005 올해 초특가 분양!’ 이라는 전단지가 샛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맞겠지, 뭐.”

그 순간, 킥보드 하나가 놀이터 앞을 쏜살같이 지나갔다. 거의 순간포착 수준이었지만, 강민오였다. 그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킥보드를 타고 아파트로 달려가는 괴상한 남자를 불러댔다. 그가 킥보드를 멈춰 세웠다.

“실례합니다. 여기가 무슨 아파트지요?”

그의 물음에 강민오의 두 어깨가 뒤로 틀어졌다.

“몰라요? 미화 아파트잖아요.”

하민의 안면근육이 일시적으로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리고는 몸을 지탱하고 있던 두 다리에 힘이 빠져나가더니 이내 나자빠졌다.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린 상태로 강민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이 자신과 똑같았다. 사람을 죽이고 쾌감어린 미소를 짓는 것까지.

“김하민 아저씨.”

 

부실한 타임리프 소설 하나 올려봅니다.... 루프물 같지만 루프물이 아니에요!!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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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시 45분 즈음

 초기 인물 사진의 가장 큰 특징은 강렬한 눈빛이다. 카메라가 영혼을 앗아간다는 미신이 만연했기 때문에, 그 즈음의 일반인 모델은 하나같이 강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눈을 통해 왕래하는 영혼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의 구멍을 메웠다. 신념, 공포, 분노, 혹은 순수한 동경 따위로. 그런 의미에서 K의 눈은 낡아빠진 싸구려에 가까웠다. 아직 과학이 진리를 대신하기 전, 미신이 미신으로 불리지 않던 시대를 살아가는 듯, K의 눈은 기묘한 생명으로 불탔다. 그녀는 분명 이성보다 심장을 우선하리라. 촬영자로 하여금 그런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눈이었다.  나는 아무말 없이 삼각대를 세웠다. 카메라의 노출값과 함께 호흡을 가다듬었다. 갑갑한 교복 넥타이를 연신 긁어대며, K의 알몸에게 렌즈를 겨눴다. 석고상처럼 바스라지는 신체, 그 위로 수놓아진 푸른색 멍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응시했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녀가 진심 아닌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도, 시퍼런 눈을 치켜뜬채 나를 바라보는 것도.  K와 나는 방과후 빈 교실에서 처음 만났다. 양 팔에 아로 새겨진 멍자국이 염증처럼 부풀어오르는 탓에, 종일 묶어뒀던 팔토시를 막 벗어던진 참이었다. 나는 선생과 아이들이 빠져나간 교실에서 불어터진 흉터를 말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상처가 덧나고 함부로 엉겨붙기 때문에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그거, 얻어 맞은거야?”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채 호흡을 삼키면서, 얼마나 지났을까. 적막이 감도는 교실에서 K의 시선을 눈치챈 나는 소스라치게 놀랄 뿐 차마 할 말을 고르지 못 했다. 담홍색 저녁 노을을 받은 하얀 피부가 꼭 석고상처럼 눈부시다. 교실 뒷문에서 꼿꼿이 펼쳐진 척추가 아름답다. 따위의 사고를 반추하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K가 먼저 입을 열기까지, 나는 아무말 없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람을 죽였어.”  다만 그런 대치상황을 넘어 날아온 K의 한마디는 너무나도 뜻밖의 물건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람을 죽였노라 고백했다. 죄값을 치르는 건 두렵기 때문에 내일 자살을 할 것이라며, 초연한 어투로 속삭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해를 필요로하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녀는 어느새 다가와 내가 반사적으로 움켜쥔 DSLR을 검지로 쓸어올렸다. 슬쩍, 미소지었다.   나에게 처음 카메라를 건네주던 날, 아버지는 말했다. 사람의 눈동자도 카메라처럼 풍경을 담아둘 수 있다고. 잠깐 빛을 응시한 다음 눈을 감으면 눈꺼풀 속에 그 잔향이, 불꽃이, 똑똑히 보이잖아. 이게 바로 그 증거야. 보호안경 너머로 용접 불꽃을 튀기며 그는 곧잘 떠들었다. 삭으로 뜬 달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그 무렵의 나를 사진으로 이끈 매력적인 미소였다. 꼭 지금처럼, 체념 한방울 섞이지 않은 강인한 미소.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나는 양 뺨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걸 금방 실감할 수 있었다. K는 꼭 술을 마시지 않은 아버지처럼 따뜻했다.  “그러니까 내 영정사진을 찍어줘. 너, 사진 찍는거지?”  그날부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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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02
보이지 않는

 남자는 늑대였다. 손바닥만한 핏덩이로 태어난 그에게는 입술 대신 주둥이가 있었다. 남자의 어미는 탯줄도 채 자르지 않고 그 모습을 긴밀히 살폈다. 길게 뻗은 주둥이, 옹골찬 회색 눈동자, 전신을 덮은 이중 모피, 남자에게 인간 다운 신체 부위는 온전히 돋아난 다섯 손가락이 전부였다. 그 꼴이 영락없이 괴물이었기에, 남자는 버려졌다. 가문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바야흐로 이단 심판관이 악마와 마녀를 때려잡던 시기였다. 가축이 죽고, 곡식이 마르는 건 전부 악마의 소행이라고, 교회는 말했다. 달리 탓할 대상이 없어,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다. 숲속에서 홀몸으로 지내는 여성은 화형, 기형아를 출산한 일가는 몸이 찢어졌다. 단, 귀족은 예외였다. 그들은 단두대 아래서 목이 잘렸다. 최소한의 존중이었다.  버려지다시피 했지만, 남자는 부모가 기요틴 아래 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열일곱이 되는 나이에 몰래 성을 빠져나와 무법지를 거닐었다. 힘들지는 않았다. 남자는 금방 자랐다. 성을 빠져나왔을 때, 그의 신장은 이미 2m 가까이 되었다. 단단하게 솟은 송곳니는 돌을 부술 만큼 강했다. 이곳저곳을 떠돌다, 버려진 저택에 둥지를 틀었다.  "저곳에는 용이 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몸을 붙인 폐 저택에 관한 소문이 돌았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용이 몸을 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이제 30년 가까이 삶을 영위한 남자는 더는 아무것도 먹고 마실 필요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호수를 핥았다. 자기 직전, 저택 주류 창고에 남아있는 위스키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걸로 족했다. 덩치는 점점 커져, 처음 밖으로 나왔을 때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됐다. 하지만 남자는 늑대였다. 괴물이었지만, 용은 아니었다. 폐허에 버려진 정장을 손질하여 입고, 혀를 굴릴 때, 보다 고풍스러운 단어를 벼렸다. 마을의 처녀를 납치하거나, 황금을 탐하지 않았다. 다섯 손가락 달린 괴물은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누구보다 인간성을 갖춘 영혼이, 기사가 그의 심장을 꿰뚫어주길 바랐다. 남자는 괴물이었다. 괴물은 인간에게 죽어야 했다. 어디에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남자는 결론 내렸다.  폐허는 나름대로 지낼 만했다. 가구에 남아있는 문양으로 추측해 볼 때, 몰락 귀족의 저택인 것 같았다. 정장, 거대한 거울, 마찬가지로 거대한 시계.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은 모두 폐허에 남았다. 남자는 그들을 입었다. 버려진 것들을 입었다. 편안했다. 몸을 옥죄는 정장 안에서 남자는 편안할 수 있었다. 시계의 먼지를 털고 기름칠을 했다. 거울 역시 관리하긴 했지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닦아도 비치지 않았으니까. 본인 만큼은 절대로.  남자는 저택의 거울에 비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처음 그 앞에 섰을 때 깨친 사실이었다. 세상을 담은 조각은, 남자를 제외한 모두를 비췄다. 이따금 비를 피해 들어오는 올빼미, 토끼, 여우를 비췄다. 잘 정돈된 정장을 비췄다. 출처 모를 와인과 위스키 역시 그곳에 담겼건만, 남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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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29
꽃비

할머니는 소녀의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창문 너머로 쭉 이어진 벚나무의 행렬에 양 뺨을 살짝 붉혔다. 여든에 가까워 이제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이었지만 초봄의 내음 앞에서 그녀는 소녀가 되었다. 두 눈을 활짝 열고서 가만가만 떨어지는 꽃비를 응시했다. 노인답지 않은 풍부한 생기가 그 표정에 깃들어 있었다. 엄마는 종종 ‘어머니가 너무 늙으셔서 그래’하며 한숨을 내쉬곤 했으나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늙지 않았다. 다만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지금껏 놓쳐온 과거를 향해서. “너희 아빠랑 요양원 좀 알아보고 올 테니까 오늘만 할머니랑 둘이 있어.” 그 말과 함께 부모님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고삼이 된 너를 배려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슬픔이나 연민 대신 피로가 묻어나오는 한숨이었다. 최근 들어 엄마와 아빠는 자주 그런 한숨을 토했다.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오늘도 평소처럼, 응, 그래, 괜찮아. 짧은 세 마디로 둘을 배웅했다. 부모님의 한숨을 닮아 무거운 미소를 지었다. 시선을 돌려, 거실 탁자에 주저앉은 할머니와 눈을 맞췄다. 머리도, 눈도, 뇌도, 새하얗게 질려버린 노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어째서 우리의 몸은 이렇게 쪼그라들고 마는 걸까요. 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나는 창문에 기댄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올렸다. 거슬거슬한 촉감이 검지 손가락을 타고 전신에 감겼다. 젊음이 빠져나간 노인의 육체였다. 내 검지 손가락의 촉감이, 세월을 뚫고 올라온 그녀의 주름이, 그 사실을 열성적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뇌는 그 사실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며 몸을 웅크렸다. 시간이 흐른다는, 스스로가 늙어간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저는 솔직히 말해서 어른들을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시간이 흐른다는 것도 그 시간에 맞춰 자신이 점점 깎여나가는 것도 모두 당연한 거라고 다들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건 당연하다고 잘난 듯이 말하는 주제에, 어째서 기어코 어제를 돌아보는 걸까. 나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허공을 향해 말했다. 어제, 수업을 시작하기 직전 담임이 내뱉은 중얼거림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슬프다고 말했다. 우리 때가 참 좋을 때라고 말했다. 그 시간이 지나가 버린 지금은 그저 슬프다고 말했다. 우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그저 농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서 저녁 열 한시에 독서실을 빠져나오는 일상은 빈말로라도 그리워할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맨 앞자리에서 담임의 눈꺼풀이 미묘하게 떨리는 걸 보았다. 그는 그때 과연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알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할머니, 꽃이 그렇게 좋아요?” 나는 그리 묻고서, 잠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간고사가 마무리되면 벚꽃도 지겠지. 문득 그 사실을 실감했다. 평소라면 햇빛 아래서 벚꽃을 볼 일이 없는 탓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집을 나와 해가 떨어지고서 돌아오는 나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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