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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작

  • 작성자 꽁보리
  • 작성일 2014-08-03
  • 조회수 770

한 달 전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죽었다. 경찰은 미친 듯이 추격하여 범인을 어느 공사장에서 발견했는데, 발견 당시 서 있는 범인의 주변은 온통 너부러진 시신들이었다. 그리고 범인은 미처 경찰들이 막기도 전에 미리 뿌려놓은 휘발유에 불을 붙였다. 커져가는 불길 속에 그는 시신들과 함께 몸을 묻었다. 이상이 뉴스에서 본 내용이다. 여자 11명을 죽인 연쇄 살인 사건의 최후.

사건이 끝나고 경찰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에 난 소희가, 그 놈이 잡히기 직전에 가출한 내 동생이 그 사건의 마지막 피해자인 줄로만 알았다. 상습적으로 가출을 일삼다가 붙잡혀 와서 이번에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 하나뿐인 혈육이.

‘저희가 그 놈 추격해서 간 공사장에서 화재 진압 중에 언뜻 교복을 입고 있는 시신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얼른 불 끄고 신원을 확인했는데…….’

권소희 양이었습니다. 그 말에 손이 풀려 전화기가 땅으로 떨어졌다.

‘시신 수습을 위해 언니 분이 와주셔야 할 것 같은데… 머리 부분이 완전히 다 타버려서… 그…….’

머뭇거리던 경찰관의 목소리는 내게 닿지 않았고, 소희의 머리 없는 시신 앞에서 오열할 때가 되서야 다시 그 말이 내게 닿았다.

그렇게 나는 피붙이 하나 없는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

 

* * *

“아줌마, 저 여기 소주 한 병이랑… 안주는 뭘로 하지.”

“권 작가님 왔어요? 되게 오랜만이네. 오늘 꼼장어 괜찮은데.”

“그걸로 주세요, 그럼.”

난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권 작가님, 요새 왜 이렇게 안 왔어요. 우리 단골이시면서. 근데 신작 안 내셔? 우리 아들이 진짜 팬이라니까.”

포장마차 여주인이 병과 잔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이래서 여기 오는 발길이 뜸해진 거였다. 정신없는 색감의 물건들을 보면 또 몰라, 새하얀 종이나 파일 화면을 보면 소희 얼굴이 어른거려서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죽었어도 세상은 아무런 문제없이 한 달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나만 그 시간에 묶여 있었다. 난 씁쓸한 기색을 감추고는 나올 때 되면 나온다고 웃으며 대충 대꾸했다.

“아줌마! 여기 술 한 병 더 줘! 베스트셀러 작가한테 술 주는 거 영광으로 알아…”

말이 뭉그러져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순전히 ‘베스트셀러 작가’란 단어 때문에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만큼 헝클어진 굳센 머리칼을 손으로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부랑자의 모습. 예컨대 술에 잔뜩 취한 새우 잡이 배의 선원 같은 외모였다.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술병을 가져다준 주인에게 잔을 채우며 말을 걸었다.

“누구에요? 베스트셀러 작가?”

“베스트셀러 작가는 개뿔이. 그냥 취객이죠. 처음 보는 손님인데, 몇 시간째 계속 앉아있어요. 자기가 베스트셀러 작가라면서. 나도 안 그래도 궁금해서 물어봤거든? 근데 작가도 아니고, 자기 입으로 ‘베스트셀러로 데뷔할 작가’래요. 그냥 헛소리야. 작가님이 신경 안 쓰셔도 되요.”

작가님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는 아무나 하나. 아부성 짙은 그녀의 말을 흘려듣고 그 남자 가까이로 가서 앉았다. 구미가 당겼다. 새로 놓아진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워주며 말을 걸었다.

“아저씨, 어떤 소설을 쓰시기에 베스트셀러가 된대요?”

남자는 물끄러미 날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기분 나쁘게 히죽, 웃었다. 술을 따르던 내 손이 잠깐 멈칫했다. 팔 근육 조직에 긴장감이 스쳐지나갔다. 투다닥. 남자가 의자를 끌어 가깝게 앉았다. 진한 술 냄새와 입 냄새가 가까워졌다. 플라스틱 의자가 벽돌에 끌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아가씨, 내 소설 궁금해? 내 소설 좀 많이 특별한데. 그 뭐냐, 행위예술처럼 직접 다 해본 게 소설로 되는 거야.”

“네. 저도 작가거든요.”

남자의 얼굴 근육이 한껏 패이며 험악한 표정을 자아냈다. 남자가 벌떡 일어나 의자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침을 튀기며 삿대질을 해왔다.

“너! 너! 내 소설 표절하려고 그러지! 어림도 없어 이 나쁜 년아…….”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옆에 가래침을 퉤 뱉었다. 몹시도 기분이 나빴지만 쓸데없는 호기심이 날 놓아주지 않았다. 일어나서 남자의 의자를 세워주며 얼른 둘러댔다.

“아저씨, 진정하세요. 저 동화 작가에요. 어린이 동화.”

물론 거짓말이었다. 자꾸 이쪽을 흘깃 훔쳐보는 포장마차 주인에게 안 들리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남자는 씩씩거리며 못 이기는 척 세워준 의자에 엉덩이를 털썩 놓았다.

“그러면 됐고… 내 소설은 안타깝지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여.”

속으로는 뜨악했다. 저런 사람이 로맨스 소설을 쓴다니, 편견일지 몰라도 아이러니했다. 나 역시 20대 여성이면서 추리소설가인 드문 케이스니 나도 크게 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술 냄새는 시간이 갈수록 진해지고, 말은 점점 빨라졌다. 혀가 꼬이면서도 속도가 빨라 말은 계속 뭉그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알아듣는 내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한 사내놈이 있는데, 이놈이 제 짝을 못 찾은 거야. 이 여자는 얼굴은 마음에 드는데, 손이 마음에 안 들고. 저 여자는 정강이가 예쁜데, 무릎이 더러워! 또 어떤 여자는 발목이 참 예쁜데 목이 너무 짧아! 그 사내놈은 자기가 사랑할 여자를 찾아서 막 헤매는 거야. 소개팅도 계속 나가고 그랬거든? 근데 아무리, 아무리, 아무리, 찾아도 그 놈이 찾는 그런 년이 안 나오는 거야. 그래서 그 놈은 결심하는 거지! 아. 내가 그런 년을 만들어야겠다!”

안타깝지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남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팔 근육에만 맴돌던 긴장이 전신으로 퍼져나가던 것은 그 때부터였다. 더 이상 웃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러고 그 놈은 제일 먼저 손이 예쁘다고 생각했던 여자를 찾아가서 손을 가져왔어. 잘 다듬어서. 영원히 그렇게 있어달라고 방부제 처리도 하고. 그 뒤엔 무릎부터 발까지 가져왔는데, 아니 글쎄 그 여자는 발은 너무 예쁜데 정강이랑 무릎에 상처가 너무 많은 거야. 여자 다리가 꼴배기 싫게, 씨발. 그래서 발목부터 무릎까진 버렸어. 다시 갖다 주기도 뭐하잖아? 발 줘서 고맙다고 예쁘게 불 붙여 줬는데. 발이 없으면 그나마 가지고 있던 예쁜 점도 없어지잖아. 편하게 보내줬지. 여하튼 그렇게 계속 모아서 우리 집에 예쁜 꽃무늬 침대에 잘 맞춰놨지. 근데 아무리 찾아 봐도 얼굴을 못 찾겠는 거야. 얼굴이 진짜 완성인데, 그치 아가씨. 그래서 며칠째 계속 어두워질 때까지 길거리를 걸으면서 얼굴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누가 갑자기 내 팔을 턱! 하니 잡았다 이거야!”

남자는 테이블을 탕탕 두들겼다. 여기가 중요한 부분이라고. 절정의 순간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거기가 좀 인적 드문 공사장? 그런 곳 근처였는데 날 잡은 년이 교복을 입고 있어서 너무 놀랐지. 그 년이 교태를 부리면서 ‘아저씨, 저 하루만 재워주시면 안 되나요?’ 이러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어. 얼굴! 얼굴이! 내가 찾던 그 얼굴인 거야! 그래서! 거기서 얼굴을 가져왔지. 근데 어디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거야. 기름 냄새! 공사장에 어떤 놈이 기름을 뿌리고 있더라고. 그래서 그냥 그 년을 거기 두고 왔어. 나중에 보니까 그 놈이 아주 못된 범죄자 새끼였더만. 연쇄살인마? 아무튼 그래서 여신을 완성했지! 완벽한 여신! 그래서 나, 아니지 그 놈이지. 승승장구하면서 연애하고 있어. 흐흐, 어때 아가씨?”

이미 그 지경이 되었을 때는 내 몸이 떨림을 주체하지 못했다. 난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끝인가요? 그 후에 계속 연애하고 있어. 남자는 또 다시 히죽, 웃었다. 이게 소설이라 그랬죠? 어, 행위예술이기도 하고. 드라마인가? 암튼. 어때 아가씨?

난 대답했다.

“울고 싶어요.”

남자는 대단히 흡족해했다.

“지금 한 달 째 연애중인데, 조만간 결혼하고 싶은데 그 전에 주인들한테 고맙다고 해야 될 것 같아서 경찰서에 갈 거야. 사람 찾아달라고도 하고, 우리 여신 자랑도 할 겸.”

“안 돼!”

귀가 번쩍 뜨였다. 무의식적인 외침이었다. 카오스 상태인 머릿속에서 유일하게 떠오른 이성적인 빛줄기였다. 그렇게 둘 순 없어. 난 입이 움직이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여자들은 연애하는 걸 더 좋아해요. 결혼은 좀 미루고 연애를 좀 더 하는 게 어떨까요?”

나 뭐라는 거야.

“아 그래? 아가씨가 같은 여자 마음 제일 잘 알겠지. 그럴까?”

“네, 그러세요. 꼭.”

눈에 핏발이 섰을 것 같은데, 숨길 수가 없었다.

“한 달 쯤 뒤에나 그래야겠다. 그 여신이 또 밤일은 어찌나 잘하는지, 그 년 얼굴이 늘 환해! 매일 입에다 뽀뽀해주잖아, 내가. 코 물어주면 좋아한다?”

부들부들 떨릴 것 같은 몸이 움직이지도 않았다. 신경이 늘어져버린 것 같았다.

“들어줘서 고마워 아가씨. 근데 있잖아. 얼굴에 비해 손이 좀 늙은 것 같다는 생각을 아주 가끔 하거든? 진짜 예쁜 손이긴 한데 말이야.”

녀석은 의자를 또 투다닥 끌어당겨 내 코앞에서 히죽 웃었다. 탁자 위에 힘없이 얹어져 있던 내 손가락 위로 나무껍질 같은 촉감이 손톱 위부터 스르르 기어올랐다. 근데 아가씨, 손 참 예쁘다. 뼈마디를 넘어 솜털을 헤치고 손등에서 그 손가락이 원을 한 바퀴 그렸다. 소름이 온 몸을 가로지르는 동안 꿈쩍도 않던 다리에 무슨 힘이 그렇게 팍 들어갔는지, 난 그 자리를 박차고 죽어라 달렸다. 포장마차 주인이 뛰어나와 날 부르는 소리도, 호쾌하게 웃는 녀석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집에 뛰어들어 왔을 때에는 신발도 어디 가고 없었다.

그 이후 뭘 하다 잠들었는지, 기억에 없다. 소희야. 소희야. 소희…….

 

* * *

 

며칠이 지나, 그나마 정신 상태를 추스르고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는 상태로 회복되었을 때, 난 옆에 있는 접시를 던져 깨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거기서 도망치다니, 우리 소희는. 다른 여자들은. 내 자신이 한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거기 있는 그 술병으로 머리를 내리쳐버릴 걸. 하다못해 정신을 차리고 그 놈의 뒤를 밟았더라면 집을 찾아냈을 텐데.

날이 저물자마자 포장마차로 뛰어갔다. 주인을 볼 명목이 없었지만 염치 불구하고 그 때 그 사람에 대해 물었다. 돈을 배로 물어주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내가 가고 난 뒤 농담이라고 소리 지르고는 자리를 떴다고 했다. 혹시 내가 다시 오면 고맙다는 말도 전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고 갔다는 말에, 분통이 치밀어 올랐다. 처음 온 손님이어서 집도 모르고, 다른 것도 모른다는 게 주인의 설명이었다. 허탈한 마음에 그 때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소희의 이름만 불렀다. 그래도, 농담이라 하니 더 이상의 피해자는 없는 거겠지. 그렇겠지. 그 때 문득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작가라고 처음 말했을 때 놈의 반응. ‘내 소설은 많이 특별해.’ ‘표절하려고 왔지.’ ‘나쁜 년.’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놈이 자수하려는 걸 막은 그 때의 나. 난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었지? 맞다, ‘정신병자라고 좀 봐줄지도 몰라.’였다. 어차피 피해자는 더 이상 생기지 않을 테니까 최대한 놈을 괴롭게 하고 싶다는 그런 욕심이 생겼었다. 내가 그 자식한테 할 수 있는 짓…이라면…….

난 그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 날처럼 정신없이 뛰면서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늦어도 한 달 뒤에 신작을 출판할게요. 반드시 기한 안에 다 쓸 테니까 확실하게 홍보 일정 잡아주세요. 최대한 크게. 최대한 빨리. 부탁할게요. 돈 문제는 편집장님 마음대로 하세요. 상관없으니까 내 부탁만 들어줘요. 제발. 그리고… 책 출판하고 표절이라고 웬 미친놈이 전화를 걸어올 거예요. 난리를 칠 텐데, 연락 오면 아무 짓도 하지 마시고, 얌전히 약속만 잡고 저한테 연락해 주세요. 제가 표절하는 것이냐고요?"

달리던 다리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일 뿐이에요."

 

* * *

 

그 놈이 출판사에 와 있단 연락을 받았다. 미처 한 달 전엔 하지 못했던 신고 전화를 걸었다.

한 달 전, 난 그런 얘기를 들었고 그 놈 얼굴 외엔 아무 것도 모른다. 얼굴조차도 충격에 의해 희미하지만 들은 이야기는 확실하다. 오늘 그 놈이 날 만나러 왔으니, 이제 조사해 달라.

미심쩍어 하긴 해도 경찰에게 오케이를 받아낸 나는 출판사를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죽기 직전의 상태로 미친듯이 그 놈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써댔던 한 달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그 이야기, 내가 표절작으로 만들어 줄게. 그 생각 하나로 이를 갈던 시간들. 자수해서 죄값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인생을 쏟아부으며 만든 성취감만큼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그 놈이 있다는 방의 문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 회상을 마치고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희미해도 단 한 번도 잊지 않은 그 놈의 얼굴이 날 보며 놀란 표정으로 바뀌었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희야. 곧 네 나머지 시신도 보내줄게.

꽁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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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2-22
해는 다시 뜬다

“쿽!” 남자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깼다. 본인도 자신이 낸 괴성에 멋쩍은지 콧잔등을 긁었다. 옷에 찌든 술 냄새가 방 안에 진동했다. “거참, 뭔 놈의 꿈이…….” 남자는 혀를 차며 두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간밤에 꿨던 악몽이 끊긴 필름처럼 드문드문 재생되고 있었다. 잠에서 깨고 시간이 흐를수록 끊김은 점점 심해졌다. 결국 남자가 눈곱을 대충 떼고 만화책을 대여섯 권 훑어볼 즈음엔 핵심적인 장면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물론 그는 꿈 따위가 어떻든 개의치 않고 책장을 넘기며 키득거릴 뿐이었다. 한참 그렇게 있다가 이미 예전에 몇 번 봤던 것이어서 질려갈 때쯤 남자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컴퓨터 하단의 시계는 오후 3시임을 알려주었다. 게임에 접속하자 온통 피바다인 게임의 시작 화면을 보고 남자는 불현듯 간밤의, 이제는 흐릿해진 꿈이 떠올랐다. 지금으로선 기억나는 게 너무나 무섭고 끔찍했었다는 ‘전체적인 느낌’뿐이고, 기억에 남는 광경은 딱 하나. 집 바닥 위에 피를 흘리며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그의 노모의 시신이었다. 바닥엔 남자의 죽은 어머니가 흘린 피로 가득했다. 다른 내용에 대한 기억은 백지가 되어버렸는데, 그 모습은 유달리 생생하게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왜 그 장면이 그렇게도 충격적이었을까. 어머니라서? 아니면 피를 한가득 흘리는 시체에 대한 것이라서? 남자는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이도 저도 아닌 본인과 어머니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했다. 한 달에 한두 번, 그것도 술에 취해 들어오는 자신과 자신이 오는 날이면 언제든 집에 있던 어머니. 어머니는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남자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왔다. ‘뭐, 이번 달엔 세 번째인가. 어제 초저녁쯤에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지는 바람에 여기 오겠다고 전화하고 난리를 피웠으니.’ 그런 생각에 빠져있던 것도 잠시, 남자는 게임 플레이 화면이 뜨자 바로 게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손으로 옆을 더듬어 언제 땄는지 모를 미지근한 맥주로 목을 축이며 생각했다. 그냥 그저 그런 꿈일 뿐이야. 그래봤자 저 문 밖에서 자기 할 일 잘 하고 있을 양반인데. 악몽을 꿨으니 로또라도 사볼까. 남자가 게임에 열중해 있는 동안, 바깥에서 제 할 일 잘 하고 있을 양반이 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안 들리는 것도 같았다. 스피커 소리 때문에 긴가민가한 거야. 들렸겠지. 남자는 무의식중에 그렇게 확신했다. 게임 하단에 ‘접속한지 4시간째’란 알림이 떴다. 눈도 뻐근하고, 배도 고프고 해서 남자는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책상 위에는 빈 맥주 캔 두 개와 몇 번 떼어먹은 말라비틀어진 빵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남자는 무심코 한 조각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 맛이 없었다. 곰팡이가 피었을 수도 있었다. 남자는 여기가 심부름꾼 노릇하던 술집도 아니고 집인데,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순이 노인네에게 뭐라도 있는지 물어봐야겠다는 일념으로 의자에서 몇 시간 만에 몸을 일으켰다. 무

  • 꽁보리
  • 2014-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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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무섭네요..

    • 2014-08-04 01:44:4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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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면서 저도 무서웠어요..

      • 2014-08-05 15:27:4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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