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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꽁보리
  • 작성일 2014-01-19
  • 조회수 335

이 지역 독립군의 수장인 아버지는 모든 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셨다. 그 용맹함과 굳은 마음을 따르는 자가 끝없이 줄을 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어머니가 나를 임신하셨을 때, 배를 쓰다듬으시며 늘 입버릇으로 중얼거리셨다고 한다. 너는 이 조국의 자랑스러운 독립투사가 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맹장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선천적으로 몸, 특히 심장이 약한 아이였다. 자랄수록 툭하면 잔병치레에, 뜀박질도 무리이니 아버지 시선에는 걱정과 아쉬움이 반반이었다. 나를 저처럼 만드시려고 태어나기 전부터 벼르셨던 분이니, 병약한 신체에 아쉬워하시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어렸던 나는, 태어나기 전 아버지의 입버릇이었다는 그 말을 듣고서 그 눈에 담긴 아쉬움을 고까움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당신은 병신인 아들을 가져서는. 어쩌다가 그게 나여서는. 작은 아이의 머리 위에 덧씌워진 주눅은 정신도 유약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몸이 안 되더라도 마음만은 독립투사로 키워내고자 했던 아버지의 바람도 덧없이 사그라져버렸다.

바깥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은 단절되어 있었다. 나는 귀를 막았다. 바깥에서 만세 물결이 펼쳐지든, 피를 튀기는 전쟁이 일어나든 내 세상에는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있었고, 수많은 책이 있었다. 어차피 관심 가져봤자 쓸 모 없는 병신인 나였으니,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날 끊임없이 꺼내오려 하셔도, 유약한 마음은 고집이 셌다.

결국 부모님의 체념이 이어지고, 그 동떨어진 세상에서 나는 어느새 인가부터 시를 쓰고 있었다. 내 세상의 아름다움이 여린 글씨 위에 담겼다. 종이 위에서는 평화롭게 꽃이 피어나고 귀뚜라미가 울었다. 바깥의 울부짖음은 먼지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이어지던 평화로운 나날의 끊김은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의 귀가로부터 시작되었다. 온 몸이 생채기와 붕대로 뒤덮여 계셨다. 집은 옮겨지고, 생소한 사람들이 드나들며 아버지의 안부를 여쭈었다. 난 묵묵히 조용한 곳에서 시를 쓰고 있었지만. 그 날은 아버지의 상태가 많이 호전된 어느 날이었다. 마루에 걸터앉아 가만히 시를 끄적거리던 내 종이를 누군가가 위에서 집어 들었다. 아버지셨다.

“무엇을 하기에 그리 열중해 있느냐.”

아버지가 나의 시 한 자락을 눈에 담으려 하시던 차였다. 난 재빠르게 아버지의 붕대 감긴 손에서 종이를 뺏어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시인지 뭔지 알아차리시기도 전이었을 것이었다. 머리가 새하얘져서 한 짓이었지만, 그 눈 속 고까움이 눈덩이로 불어나는 상상을 잠시 했던 것 같다. 당신의 바람과 다르게 난 병신이었으니까. 종이 찢어지는 소리만 내 세상과 바깥의 경계에 가득할 때, 난 아버지의 붕대 감긴 손으로 따귀를 맞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학교에 가게 되었다.

 

 

* * *

 

 

다른 이들보다 훨씬 늦게 들어온 학교였다. 잔병치레로 빠지는 일이 잦았음에도 부모님은 나를 최대한 그곳에 두려 하셨다. 바깥세상에 날 억지로 밀어 넣는 시도는, 이미 뼛속까지 점령한 유약함을 이기지 못했다. 주변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난 내 세상에만 존재했다. 그렇게 몇 해를 어떤 변화도 없이 보냈다. 아버지, 어머니의 눈에 절대 닿지 않는 곳에 시 종이만 쌓여갔다.

여느 날처럼, 쉬는 시간에 학교 뒤편 나무 밑에 앉아있었다. 종이 뒤에 책 몇 권 받쳐두고 시를 쓰고 있었다. 학교를 다닌 몇 해 동안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시간과 공간이었다. 내 숨소리와 바람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만 존재하던 그 공간에 끼어든 활기찬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었다. 그 날.

“시야?”

난 아버지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급하게 종이를 찢어냈다. 하지만 등 뒤에 서 있던 너, 나와 같은 교실에서 생활하던 소년인 너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시랑은 좀 다르다. 맑고 아름다워.”

임태근. 너와의 만남은 내 세상과 바깥과의 교집합을 만들어낸 발단이었다.

 

 

* * *

 

 

중한아.

그 때 이후로, 그 나무 밑에 앉아 있으면 이따금씩 나를 부르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면 서 있는 네가 있고, 우리는 점차 말을 트기 시작했다. 활발하고, 활동적이고, 영리하고, 야무진 너는 내게 필요한 사람이었다. 나중에는 부모님보다도 더 많은 대화를 너와 나누었다, 물론 말을 주로 하던 이는 너였지만.

우리는 함께 시를 쓰기도 했다. 시인이 꿈이라는 네가 내게 내민 시에는, 너의 자아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이상하게도 온전히 시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너의 패기만은 확실히 느꼈다. 너만의 힘찬 기운, 너의 외침. 시를 보면 볼수록 너의 내면을 흠모하고, 거기에 빠져들었다.

 

 

날이 갈수록 내가 그 나무 밑에 앉아 있는 이유는, 나만의 세상이 아닌 네가 되었다. 활달해서 인기도 많은 너였는데도, 네가 나를 찾아오는 횟수는 점점 더 잦아졌다. 그로 인해 내 세상은 더 이상 내 세상이 아니게 되었지만, 의식할 새도 없이 마냥 네가 좋았다.

“중한아. 네 시가 궁금하다. 처음 때에도 반절도 못 읽었다.”

너는 곧잘 이렇게 말했지만, 항상 부끄러운 마음에 거절했다. 어떻게든 나를 구슬릴 심산이었을까, 넌 늘 내게 시 몇 장씩을 내밀었다. 난 언제나 두근거리며 시를 읽었고, 어느 날부터인가 그 두근거림은 시를 보지 않을 때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시를 다 읽기를 기다리는 너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다.

“이 시를 설명해줘.”

너의 시는 가끔 두루뭉술하게 느껴졌다. 한 겹 걷어내면 무언가 있을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렇지만 대단히 궁금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나는 네 시를 신나서 설명하는 네가 보고 싶었다. 그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야기하는 너를.

그런데 너는 단단한 눈으로 냉큼 대답했다.

“조국의 독립.”

그 때 난 너의 눈에서 잠시 아버지를 보았다.

 

 

* * *

 

 

그 날 이후로 너의 시를 다시금 찬찬히 살펴보았다. 너는 대단했다. 아무 것도 모르던 때에도 느낄 수 있었던 너의 패기가, 알고 보니 더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점점 바깥 세상에 발을 들였다. 교집합은 점점 바깥세상 쪽으로 커지고, 나만의 세상은 작아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네가 있었다. 아니, 커지는 교집합과 새로 만들어지는 세상이 너였다. 너에 대한 절대적인 마음은 더 깊어져만 갔다. 나는 너를 깊이 사랑했다.

너는 내가 해준 내 어린 시절을 듣고 나서 부쩍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어떤 것이 잘못 되었는가, 어째서 부당한가를 말하는 너의 모습에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시인을 꿈꾸는 너와는 다른 모습. 낮은 목소리로 조목조목 말하는 너의 눈에는 분노와 결의가 가득했고, 네가 이끄는 새로운 길에서 나는 점점 눈을 뜨고 있었다.

“중한아. 나 소원 하나만 들어주라.”

너는 어느 날 갑자기 심각하게 말했다. 난 끄덕였다. 너는 곱게 접은 종이를 내밀었다.

“이 시를 선물할게. 너를 위해 쓴 거야.”

애써 떨림을 감추며 받아들었다.

“열흘 뒤에 보답으로 네 시를 줘.”

네가 나를 위해 쓴 시에는 그 어떤 다른 시보다 더 강력하게 말했다. 바깥세상으로 완전히 넘어오라고. 너는 반쯤 넘어온 내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열흘 뒤에 우리 학생들이 장터에 모여서 시위를 하기로 했어.”

난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너와 함께 가고 싶다. 중한아.”

그것은 직격탄.

 

 

* * *

 

 

그 날이 오기 전까지 유독 너는 그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삼갔다. 혹여 내가 부담을 가질까 하는 배려인 듯 했다. 너의 짐작대로 난 혼란스러웠고, 너와 얘기를 하는 동안에도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결국 못 참고 얘길 먼저 꺼낸 것은 나였다.

“태근아. 내가 가면 방해가 되지 않을까?”

“아니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여서 만세를 외치는 것뿐이야. 너도 우리 민족의 한 일원이잖아. 상관 없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곧장 대답해오는 너였다. 난 잠시 망설이다 다른 질문을 했다.

“그리고…… 시 말이야. 네 소원에 대한 대답으로 써야 하는 거니?”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묻는 내게 넌 잠시 가만히 있다가 픽- 하고 웃었다.

“아니, 그냥. 그건 진짜로 그냥 갖고 싶은 거야.”

나도 너를 위해 시를 썼잖아. 너도 나를 위해서 시 한 편 써달라고. 친구 간에 오가는 시, 뭐 이런 거지.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 네 말을 듣고 얼굴이 확 달아오른 이유가.

 

 

* * *

 

 

시를 썼다. 너를 위해서. 모든 구절을 고치고, 또 고쳤다. 쓰는 내내 신경이 너에게로 곤두서 있었다. 열흘 동안 너의 다른 부탁이 아닌 널 위한 시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보면 다 해결될 것만 같았다.

내 종이 위에 담기는 나는 너무도 낯선 모습이었다. 이제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마음. 네 시에서 느껴지는 것만큼 뜨겁고 강렬했다. 너를 향한 내 마음이 고스란히 글씨 위에 담겨 있었다. 다른 요소는 전혀 개입되지 않은 채 온전히 너만 생각하며 그려낸 마음. 종이가 무겁지 않을까 하는 망상이 들 만큼 난 애정을 쏟았다. 그리고 아흐레 째 되는 날, 너에게 종이를 잘 접어서 내밀었다.

너는 빙그레 웃으면서 받아 들고는 곧장 주머니에 넣었다. 내가 섭섭해 하기도 전에 너는 재빨리 말했다.

“내일, 모든 일이 끝나고 읽어 볼게.”

올 거지? 그의 확신하는 속마음이 전해져왔다. 머리가 아팠다.

 

 

* * *

 

 

이튿날이 밝았다.

난 장터 근처 나무 그늘 뒤에 숨어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네 얼굴을 찾았다. 장터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이 각양각색이었다. 너의 말대로 남녀노소, 모두가 모여 있었다. 독립군들도 꽤 보였다. 장터 가운데 마련된 단상에 서 있는 네가 낯설었다.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난 쉼호흡을 하며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남으면 내 시를 읽을 거야. 넌 살 거야. 살아서 읽어달라고.

너의 연설이 시작되었는데,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언제나 기분 좋던 너의 음성이 귓가에서 웅웅거릴 뿐이었다. 식별할 수 없는 음성이 귓가를 스치고, 만세 소리인듯한 함성이 시작되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이렇게 몸이 엉망인데, 난 도움이 되지 못해. 태근아.

그렇게 변명하며 힘겹게 돌아섰다.

탕-

이질적인 소리에 난 무의식적으로 뒤를 홱 돌아보았다. 흐릿하고 뿌연 시야에 들어오는 단상 위에 없던 핏자국이 생겼다. 털썩 주저앉은 나는 집 쪽으로 벌벌 기었다. 웅웅거리는 귓가로 우렁찬 소리와 총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얼마나 기어갔을까. 내 등 뒤도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미안하다. 난 다 죽어가는 마당에 이런 생각을 했다.

모이지 않았더라면 넌 무사했을텐데. 왜 이런 걸 해서는.

난 끝까지 병신이야. 죽일 놈이다.

온 세상을 다 포용하는 나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 나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 * *

 

 

 

“김중한 시인은 원래 중립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임태근 시인과 친구가 되면서 독립을 염원하게 되었어. 죽기 전 마지막 작품이자 임태근에게 선물로 보낸 시에는, 시 속의 ‘임’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염원이 담겨있어. ‘임’은 독립을 의미하고. 자, 질문?”

 

“선생님! 저요!”

학생A가 손을 들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임'이 독립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연애시처럼 보이는데.”

 

 

“이 시는 봉투에 담겨진 채로 발견 되었는데, 봉투 위에는 죽기 전 날짜와 짤막한 메모가 있었단다.  ‘널 생각하며 썼다.’라고. 정황으로 보아, 평소 중립적인 성향이었던 김중한에게 임태근이 조국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 없이 했던 걸로 추측 되고 있어. 두 사람 모두 만세 시위에서 죽음을 맞이 했으니, 김중한이 임태근에게 ‘네 말대로 생각을 바꾸었다.’라는 의미로 시위 전날에 시를 보낸 것이 아닐까? 그리고 다 떠나서, 둘 다 남자잖니!”

 와하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학생A는 질문을 더하려다가 그냥 침묵한다. 장난하지 말라며 벌을 세울 모습이 뻔히 보였으니까.

꽁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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