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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 작성자 사내
  • 작성일 2013-07-10
  • 조회수 386

<사내>

나야.

나 왔어. 그래, 보고 싶다던 얼굴 비추러 직접 왔어. 찾아오지 말랬다고 이딴 식으로 연락할 것까지 없었잖아. 이게 다 뭐야, 노인네 갈 때 됐으니 간 거 가지고 호들갑들은. 치여 죽든 늙어죽든 말이야. 다들 질질 짠다고 나도 울어줄 줄 알고? 짭새들이 저렇게 따라붙었는데 저깟 놈들 앞에서 어림없지. 여기까지 성질부리러 왔느냐고? 아주 개판을 벌이러 왔다! 흐응, 알았어. 얼굴 붉힌다고 달라질 얘기도 없지. 이건, 소주를 좀 마셔서 그래. 간땡이가 다 죽었어. 아무 것도 걸러내질 못해. 고스란히 버텨야 해.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쪽팔리게 벌게져서는……. 얼마 만에 마시는 건데 말릴 생각은 마. 찬 소주가 아니라 찬 바닥에서 아직도 일 년하고 반이야. 바닥만 좀 따스워도 지낼만하겠는데 교도소라는 곳이 말이야, 어쩌겠어. 억울한 건 아니야. 불편해서 그렇지. 좋은 남편도, 좋은 아들도 아니었잖아. 죗값을 치르는 거지.

당신은 편안해 보여. 낯설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낯선 건지, 편안한 얼굴이 낯선 건지 잘 모르겠네. 희미하게 웃는 걸 몇 번 본 것도 같은데, 어쨌거나 보는 사람도 기분 좋아지는 그런 웃음은 아니었지. 오히려 울음이 터질 것 같았으니까. 파들파들 떨어지던 입 꼬리를 어떻게 잊겠어. 내려앉은 쌍꺼풀, 그 뒤의 눈빛도 느슨했지. 어쩌다 미간을 좁히면 늘어진 눈꺼풀이 접혀 들어가면서 그나마 남은 눈빛마저 놓칠 것 같았어. 그렇게 당신 미간이 활시위처럼 당겨지면 마음 한 구석이 화살을 기다리는 과녁같이 짱짱하게 떨려왔어. 화살이 날기도 전에 활이 부러져 버릴까봐 덩달아 내 미간도 좁아졌어. 활을 당겼다, 풀었다, 당겼다, 풀었다……. 그러느라 지친 당신 눈 아래는 늘 거뭇한 자락이 치렁치렁했지. 끌리는 치맛단을 부여잡고 도망가는 사람처럼 늘 무엇엔가 시달리며 살았지. 쫓기고 쫓기다 나를 안아버리곤 했어. 숨 쉴 틈이 없는 절박한 포옹, 설렘은 없고 다리가 저려 올만큼 위태로운 포옹이었지. 내 날개뼈를 더듬으며 머리를 묻어가며 속삭였어. 사랑한다, 사랑해.

정작 내가 당신에게 가 안길 때 당신은 그저 가슴팍을 토닥여주며 잠을 권했잖아. 무언가 말하려고 해도 토닥이는 박자에 맞춰 부르는 당신 허밍을 끊을 수가 없었어. 들어본 적 없는 단조의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는데 그게 나중엔 꼭 흐느낌에 가까운 소리가 났어. 얼마 안 가 흐느낌이 가늘어 끊어져 가면서 내 어깨를 베고 잠들었지. 토닥이던 손은 가슴 위에 가만 얹은 채로 말이야. 안기고 싶었던 일렁이던 마음을 눌러 담는, 딱 그만큼 무거운 손으로.

미영이는 달랐어. 마음이 질척하게 차오르면, 늪을 피해 땅 위로 솟아오르는 뿌리처럼 여지없이 드러나는 내 깊은 곳을 미영이는 놓치지 않고 어루만져줬어. 그러면 나는 조용히 흔들렸어. 가슴 속에서 무언가 커다랗게 맺혀서는 덜컹거리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다리까지 떨려왔어. 덩치는 이만해서, 아기 손이네! 언젠가 내 손을 덥석 잡았을 땐 발기해버려서 곤란했어. 손이 어째 나보다 곱네, 설거지도 안 하는구나? 내 손을 쥐었다 폈다 주무르며 웃어재끼는 걸 보면서 사정에 가까웠던 기억도 있어. 날 흥분시키던 눈가에 바짝 당겨진 주름, 위로 쏟아져 흐르는 웃음소리. 숟가락이 간신히 들어갈 성 싶은 작은 입으로 조잘댈 때면 세상이 내 발 아래 있었는데. 그 입으로 도담도담 책을 읽어주곤 했어. 허벅지 안쪽까지 고개를 들이밀면 파륵파륵 책장 넘겨가며 구절구절 읽어줬어. 잠자코 듣고 있노라면, 얼마 안 가 꼬르륵 소리가 났어. 미영이는 머쓱한 기색도 없이 까르륵 구르며 말했지. 배곯지만 않으면, 글을 쓸 텐데. 더 배웠을 텐데.

동창이라고 둘러댔지만 거짓말이라는 거 알고 있었을 거야. 전당포에서 처음 만났어. 맞아, 당신 반지 내가 가져다 팔았어. 무턱대고 종로로 나갔는데, 한여름에 긴 소매 옷에 모자까지 눌러쓰고는 멀쩡한 귀금속점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 들어가도 봤지만 대하는 태도들이 영 이상했지. 그냥 나와야 했어. 멍하니 걸었어. 와중에도 나는 혹 당신이 꾸짖을까 걱정했던 거 같아. 그럼에도 쉽사리 도로 가져다 놓을 수는 없었어. 멍하니 걸었어. 해가 높아지면서 긴 소매 옷도 소용없이 따가운 볕이 쪼이려는 참이었어. 누군가 어깨를 스치고 옆 건물로 뛰어 들어갔어. 전당포였어. 전당포를 생각 못 했어. 뒤쫓아 이 층으로 따라 올라갔어. 짙은 유리문 뒤로 여자 뒷모습이 보였어. 우리 엄마 반지라니까! 마음속에서 한참을 벼렸는지 문을 열자마자 모진 목소리가 꽂혔어. 내놔! 내놓으라고! 여자가 발 굴러가며 악 쓰고 있었어. 어서 오세요. 계산기를 두드리던 전당포 주인은 그녀가 뻗은 손은 아랑곳 않고 나를 맞았어.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날 봤어. 펼친 손바닥은 여전히 전당포 주인을 향한 채 소리쳤어. 내놔!

당신 반지로 그 여자 엄마 반지를 샀어. 돈이 필요한 건 아니었거든. 고마워. 난 백미영이야. 다짜고짜 말을 놓은 그녀는 묻지도 않은 얘기를 술술 했어. 아빠가 팔아버렸어. 지금도 도박장에 있어. 아무리 그래도 엄마 반지는. 난 졸업도 못한 주제에 학자금 대출 빚을 아직도 갚아. 그녀 얘기를 들으며 종로를 걸었어. 어느 후줄근한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 커다란 상가 아래 어두컴컴한 포장마차에서 그녀가 곤달걀을 사서 내밀었어. 너도 먹을래? 부화 직전에 삶은 거야. 가여운 생각이 들었어. 우스운 일이지, 달걀이나 닭은 잘 먹으면서 삶은 병아리는 흉측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 찜이나 후라이로 올라가는 대신 부리며 날개며 달아본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는 걸까. 곤달걀을 먹어치운 그녀가 물었어. 내가 줄 수 있는 게 없어. 저녁 밥 해줄게, 우리 집에 갈래?

삶은 병아리 대신 계란 부침을 얻어먹고 다녔어. 귀가는 날이 갈수록 늦어졌어. 당신 혼자 저녁을 먹는 날이 늘어갔어. 그날은 아홉시가 넘었을 거야. 손 씻고 와. 밥 차려놨어. 식탁 위로 수명이 다해가는 형광등 하나만 부옇게 켜져 있었어. 그 아래 당신이 저녁상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어. 나는 외투도 벗지 않고 맞은편에 앉았어. 말을 건네려면 당신과 나 사이의 모든 반찬을 지나야 할 것 같았어. 젓갈더미를 구르는 동안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모두 상해버리겠지. 희멀건 형광등 빛 아래의 반찬들은 이미 모두 상해 있었어. 그래보였어. 귀가가 늦은 내게 당신이 먼저 뭐라도 물어주길 바랐어. 당신은 그 대신 찬도 올리지 않고 밥만 한 술 담뿍 떠서 내밀었어. 당신 얼굴 위로 형광등 빛이 흐느적거렸어. 당신 눈 밑이 거뭇한 자락도 흔들리는 듯 보였어. 내 방 쓸래. 당신이 내민 숟가락 머리를 바라보며 말했어. 이제 각자 방 쓰자. 쭉 뻗은 팔 끝의 숟가락은 흔들리지도 않고 도로 머리를 돌려 당신 입으로 들어갔어. 당신은 입술도 떼지 않고 불뚝불뚝 관자근을 몇 번 솟구더니 삼키는 데까지, 대답하는 데까지 오래 안 걸렸어. 일단 씻자. 같이 씻어. 당신은 순식간에 밥상을 치워버렸지. 당신은 평소보다 훨씬 정성스레 나를 씻겼어. 씻고 나와서 어깨 맞대고 누워서도 당신은 유난히 다정스레 팔을 주무르고, 몸뚱이를 더듬었어. 방 불은 모두 끄고 어둠 속에서 뜨뜻한 당신 손이 분주했지만 나는 식탁위에 누워 형광등 빛을 쬐는 듯, 구석구석이 시렸어. 들숨 날숨 맞추어 시린 기운이 자맥질을 하다가, 왈칵 울음이 오르는 걸 막느라 애를 먹었어.

아마 당신은 아직도 내가 아는 줄 모를 거야. 열쇠가 없어 당신 오기만 기다리던 날, 그래 나 몰래 그 새끼 만나고 온 날 말이야. 해가 떨어지니 여름인데도 쓸쓸한 바람이 불었어. 솜털이 섰어. 벅벅 팔뚝을 비벼대도 찬바람에 자꾸 털이 곧추 섰어. 두 시간쯤 지나서 두둑두둑 땅거미가 오르고 나서야 당신이 왔어. 집에 들어가 식은 몸이 다시 덥혀지니 꾸덕꾸덕 피로가 덮쳤어. 씻으라는 당신 야단이 멀어졌어. 얼마나 잤을까.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설핏 잠에서 깼어. 당신이 울며 그 새끼를 부르고 있었어. 한 손은 내 손을 잡고 한 손은 내 뺨을 쓸며 내 얼굴에서 그 새끼를 찾고 있었어. 잠이 달아났어. 그래도 줄곧 자는 척 시침 떼고 있었어. 더 참지 못하고 입꼬리가 실룩이려 할 때쯤, 울음을 추스른 당신이 이마에 입 맞춰주고는 씻으러 들어갔어.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어. 주먹을 쥐었어. 눈을 힘주어 감았어. 당신 입술이 스친 이마가 화끈거렸어. 이마를 벅벅 문질렀어. 목구멍이 달아올랐어. 핏방울이 비치도록 입술을 깨물었어. 얼굴이 터지도록 끓어오르는 열기가 다문 입술 사이로 새지 못하고 머리로 뻗쳐올랐어. 오르는 열기에, 울음에 취해 머리가 무거워져 다시 잠에 들었어. 혼자 잠들어야 했어. 혼자서 잠들어야 했어.

군데군데 근지러워 북북 긁어대다 새벽쯤 깼어. 울음기에 부어올라 익어가는 눈두덩을 뭔가에 물렸나 싶어 치켜떠봤지만 방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어. 잠든 당신을 뒤로하고 욕실에 들어갔어. 욕실 불이 너무 밝아 눈 뜰 엄두가 안 났어. 하얀 욕실에서 불어 터지기 직전의 눈을 반 강제로 감고 서있었어. 당신이 부르짖던 그 새끼 이름이 멍울져 둑, 둑 떨어져나갔어. 가느다랗게 몸이 떨렸어. 멋대로 비죽이려는 입술 대신 눈두덩을 씰룩거려 어렵사리 거울을 봤어. 발갛게 부어서 붉게 충혈 된 눈은, 쥐어짜면 붉은 즙을 흘릴 것 같았어. 간지럽던 온 몸에는 옅게 열꽃이 피어올라있었어.

찬물로 한참을 씻었지만 열꽃이 쉽게 가라앉지 않더라. 연고라도 바를까 했던 것뿐이야. 화장대를 뒤적이는데 당신 핸드폰이 울렸어. 문자 메시지였어. 내가 갈게. 돌려줬으면 해. 만나서 얘기해. 어디서 만나? 많이는 못 줘……. 주고받은 며칠 전부터의 문자도 가방 속 두툼한 봉투도 그 안에 든 결혼반지도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날이 밝기만 기다렸어. 열꽃 핀 흔적 때문에 소매가 긴 옷에 모자를 눌러썼어. 반지를 챙겨 종로로 나갔어. 당신 버리고 새 가정 꾸린 새끼 대신으로 당신과 살 수는 없었어.

시나브로 내게 들어오는 미영이를 느끼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당신하고 정리하게 될 줄은 몰랐어. 미영이 월경주기가 불규칙한 탓에 늦게 눈치 챘거든. 알게 됐을 땐 이미 십주가 넘어 낙태가 어려웠어. 당신하고 제대로 정리하고 새 살림 차리고 싶었는데, 배가 점점 불러와서 더 미루지 못하고 당신에게 소개했어. 무작정 집으로 데려왔지. 당신 눈을 기억해. 미영이 배를 바라보던 낮은 시선. 구석구석으로 쏘아대던 눈총이 묵직해진 미영이 배를 겨눈 순간, 겨우 남아있던 당신 눈빛이 스러지는 걸 봤어. 자글자글 잡혀있던 미간은 양 옆으로 팽, 풀어졌어. 내가 애비가 되기로 했어. 미영이 손을 잡고 말했을 때, 당신은 몇 번이고 애비, 애비, 애비 되뇌었지. 주문 외듯이, 아니 저주하듯이.

미영이 닮은 딸이길 바랐는데 아들이 태어났어. 은호가 태어나면서 미영이는 은호의 여자가 됐어. 미영이는 악착스럽게도 은호에게 책을 읽혔어. 우리 은호는 시를 쓰는 게 좋을까? 시인은 배가 고픈데, 그럼 글 열심히 읽어서 나중 법 공부를 하면 좋겠다. 미영이가 은호를 허벅지에 앉히고 책 읽어줄 때면, 은호와 미래를 그릴 때면 은호를 밀치고 내가 앉고 싶었어.

하루는 미영이가 샤워하는 욕실에 나도 따라 벗고 들어갔어. 미영이가 재빠르게 주저앉아 욕조에 알몸을 숨겼어. 이내 가슴을 가리고 악을 썼어. 나는 빈 샴푸통이 날아와 가슴을 때리고 발등을 찍을 때까지 벙하니 서 있었어. 주춤주춤 욕실을 나서기가 무섭게 문을 잠가버리더라. 닫힌 문에 대고 나도 소리를 질렀지. 나 네 남편이야! 그리고 옷을 주워 입는 수밖에. 얼마 안 있어 뿌연 욕실 안에서 미영이가 나왔어. 벌써 옷을 다 챙겨 입고서. 머리도 안 말리고 옆에 와 누웠어. 나는 슬며시 젖가슴에 손을 얹었어. 치워. 아침 당신이 할래? 미영이는 낮고 빠르게 쏘아붙이고 등을 보였어. 후두둑 차갑게 식은 물방울이 튀어 볼에 떨어졌어.

미영이가 날 떠날지도 모르겠다고 어렴풋이 짐작은 했었어. 그딴 식으로 떠날 줄은 몰랐지. 용서가 안 됐어. 미영이 물건을 모두 쌌어. 온 집안을 쑤셨어. 미영이 책을 전부 뺐어. 휑해진 책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 책장이 미영이가 유일하게 해온 혼수라는 걸 알아차렸어. 아예 책장 째 내다 놓으려고 책을 좀 더 골라내기로 했어. 은호가 읽기에는 그림이 너무 많은 어린이 책 시리즈를 뺐어. 다른 물건들이랑 한쪽에 밀어 잘 쌓아뒀어. 책장을 완전히 비웠어. 집을 한 판 뒤집고 나니 몸 여기저기가 쑤셨어. 서둘러 눈 붙여보려 했는데, 새벽까지 잘 되지 않았어. 넓지도 않은 집을 뱅뱅 돌다가 책 더미에 쓸려 다리가 까졌어. 짜증이 일어 안주도 없이 소주를 마셨어. 그제서야 가까스로 눈을 감았어. 온갖 기억이 덮칠 줄 알았으면, 차라리 밤을 새웠을 거야.

미영이는 입덧이 심했어. 당신에게 보이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화장실에서 나오는 미영이가 내 방이 어디냐고 물었어. 여기야. 그래서 당신 방은 어디냐니까. 여기야. 방을, 같이 썼단 말이야? 미영아, 너도 알잖아. 빠져나오려고 노력한 거. 정말 끝이야. 너밖에 없어. 아니, 그래도…… 욱.

한 바탕 게워내고 다시 잠에 들었어. 미영이 아버지가 두들겨 맞아 찾아왔었어. 돈이 되는 건 모두 끌어 모아야 했어. 미안해. 어렵게 구해다 준 반지인데. 미영이는 내게 사과했지만 사실 누구한테 미안해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 아버지를 욕하며 미영이 울어재끼기 시작했어. 안아줘야 할까, 토닥일까, 기다릴까, 말을 건넬까. 어떻게든 울음을 그쳐야겠단 생각뿐이었어. 아버지란 놈은 다 그래. 미영이는 울음을 그쳤어. 함부로 말하지 마. 넌 아버지 없어?

이번엔 요의를 느껴 깼어. 머리가 아팠어. 몸이 심장 고동, 그 박자에 욱신거리고 있었어. 나는 가슴에 손을 모아 얹고 진정되길 기다리다 다시 잠에 들었어. 꿈을 꿨어. 가슴께에서 나무가 자랐어. 당신 허밍이 들려왔어. 토닥토닥 내리누르는 당신 손을 피해 아래로 가지가 뻗어나갔어. 발간 봉우리도 맺히더니 이내 꽃이 흐드러졌어. 미영이가 나무 기둥을 끌어안고 웃어재꼈어. 열매가 익어갔어. 묵직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은호가 나타나 따먹었어.

아빠, 배고파. 은호가 나를 깨웠어. 미영이다. 미영이었어. 은호 얼굴에서 미영이 눈이 보였어. 놀란 가슴에 짜증이 일어서 손을 저어 아이를 쫓아냈어. 좀 더 자자, 휘이 휘둘렀는데 저 혼자 풀썩 나동그라졌어. 사내새끼가, 빨딱빨딱 안 일어나. 뒤통수에 대고 호통을 쳤어. 은호야, 해도 가만. 얘, 은호야 불러도 가만. 서늘한 은호 목을 감아쥐고 고개를 받쳐 들어 나를 향해 돌렸을 때, 보얀 뺨 타고 흐르던 검은 피를 당신도 봤어야 하는데. 그런데 있잖아. 으흐흐. 우습지, 킥킥. 애가 머리를 찧어 피범벅이 된 책 제목이 글쎄, 엄마 아기는 어떻게 생겨? 라는 거야. 킥킥. 어떻게 생기느냐고? 어떻게 생겼느냐고? 글쎄, 느이 엄마 아래 찢어가며 머리 디밀 때도 이렇게 피범벅이기는 했단다.

그래, 내가 죽인 게 아니야. 억울하지 않느냐고? 아냐, 됐어. 내가 애비니까. 삼년상 치르는 셈 칠게.  미영이도 없고 차라리 잘 됐어. 미영이가 떠나던 날을 잊을 수가 없어. 잃어버린 회의 자료 복구로 퇴근이 늦어진 날이었어. 날아갔을 수도 있죠. 그럼 다시 했어야죠. 누가 대신 해줍니까? 상사 꾸중에 미영이가 간절했어. 살갑게 껴안고 싶다는 생각만 잔뜩 집어먹고 집에 돌아왔을 때 미영이는 이미 등 돌린 채 곯아떨어져 있었어.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꼬물꼬물 옆자리로 비집고 들어가 등을 맞댔어. 다리를 모아 끌어안았어. 깜빡 잠들었어.

요란한 꿈을 꿨어. 키가 갑절은 커진 상사가 한숨 섞인 짜증을 계속했어. 낙하산, 낙하산, 낙하산. 머리 위로 수군대는 소리가 쏟아졌어. 두 손 모아 머리만 까딱까딱 빌고 또 빌었어. 애가 올해 학교에 들어갔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때 갑자기 당신이 들이닥쳤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어. 상사 뺨을 갈겼어. 누구한테 삿대질이야, 이 개놈새끼야. 어찌나 빨리 들이닥쳤는지 치마가 휘날렸어. 손가락질을 피해 당신 치마폭에 안겼어. 곧 당신은 나를 따뜻하게 휘어 감았어. 아니, 엉겨 붙었어. 옭아맸어. 잡아끌었어. 뒤덮쳤어. 짓눌렀어. 끈끈한 바닥에 쓰러져 등을 뉘였어. 꼼짝없이 원망스럽게 당신을 올려다봤어. 치맛단이 드세게 펄럭여 얼굴을 덮었어. 나는 당신 치마 속에서 당신 사타구니를 향해 뻐끔뻐끔, 가쁘게 숨을 내쉬었어. 결국 당신은 주저앉듯 천천히 내려앉아 끈끈한 바닥에 내 작은 얼굴을 으깼어.

흠뻑 젖어 깼어. 끈적거리는 온 몸이 정말로 어딘가 눌러 붙었다 떨어진 것 같았어. 숨을 고르고 있는데 미영이 핸드폰 알람이 울렸어. 미영이, 아니 은호엄마는 벌써 깰 시간이구나. 깨우려고 손을 뻗다가 문득 은호 엄마 어깨가 당신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어. 더 자둬, 푹 좀 자, 미영아. 알람을 꺼버렸어. 여린 어깨선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어. 몇 분 안 지나 알람이 다시 울렸어. 이번엔 배터리를 빼버렸어. 드러난 미영이 어깨에 이불을 덮어줬어. 나는 씻으러 들어갔어. 꿈이었지만, 당신을 본 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어. 공연히 미영이 볼 낯이 없어서 씻고 또 씻었어. 생생한 그 끈끈한 느낌에 박박 문질러가며 꼼꼼히 씻었어.

머리를 세차게 털며 욕실에서 나왔어. 우리 아들, 차 조심해. 잘 다녀와. 미영이가 은호를 배웅하고 있었어. 잘 잤어? 모처럼 둘이 밥 먹을 생각에 나는 산뜻하게 물었어. 미영이가 핸드폰을 눈앞에서 흔들었어. 기어코 은호 혼자 학교에 보내니까 통쾌하니? 핸드폰을 침대로 던지며 말했어. 욕실로 들어간 미영이는 문을 소리 나게 닫았어. 은호는 날 때부터 몸이 약했어. 항상 또래보다 늦었어. 유치원에 가고 학교에 들어가니 덜 떨어진 구석이 더 눈에 띄었어. 걸핏하면 엄마를 찾았어. 은호가 좋아하는 반찬으로 아침을 차리고, 큰 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십 분 거리의 등굣길을 미영이는 매일 데려다줬어. 은호를 데려다주고 나서도 늘 무엇인가로 바빠서 아침을 거르기 일쑤였어. 잘 자놓고 성 내는 미영이가 야속했지만 어쨌거나 오랜만에 둘이 마주앉아 밥 먹을 생각에 들떠있었어. 머리를 마저 말리며 미영이가 어서 나오기만 기다렸어.

욕실에서 옷을 모두 챙겨 입고 나온 미영이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질끈 묶으려던 때였어. 전화가 왔어. 은호였어. 맨발? 엄마가 얼른 갈게. 미영이가 바쁘게 움직였어. 은호 실내화 가방을 낚아채고 운동화를 구겨 신을 때까지 지켜만 봤어. 밥 안 먹어? 식탁에 덩그러니 앉아 미영이에게 물었어. 외발로 콩콩대며 신발을 고쳐 신던 미영이가 흘러내린 머리를 넘기며 말했어. 그 사람이랑 백년 만년 살지 왜 나랑 결혼했니. 밥도 혼자 못 처먹니. 현관문이 아프게 닫혔어.

미영이가 은호에게 가고 혼자 남아 밥을 처먹었어. 애비가 돼놓고 은호가 미웠어. 네 엄마가 아니라 내 부인이야. 찬도 없이 밥만 퍼먹었어. 목이 메었어. 가슴이 메었어. 컵을 가지러 일어났어. 전화가 다시 울렸어. 아빠, 실내화 가져다 줘. 은호였어.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 밥덩이 때문에 명치 언저리를 문지르며 말했어. 기다릴 줄 모르고 사내새끼가. 기다려. 엄마 갔어. 벌컥 화를 내고 끊었어. 엄마 갔어. 엄마 갔어. 엄마 갔어. 입안에 계속 맴돌았어. 집에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었어. 여전히 명치 주변을 꾹꾹 눌러가며 미영이에게 전화를 걸었어. 침대 위 핸드폰이 울렸어. 속이 메스꺼웠어. 꾸역꾸역 밀어 넣은 밥덩이가 얹힌 게 분명했어. 혼자서는 밥덩이조차 삼킬 수 없었어.

한 시간쯤 지나 전화가 왔어. 병원이었어. 가슴 밑동이 뭉툭하게 잘려나가는 통보를 받았어.

당신도 교통사고라며. 바리바리 싸들고 면회 오는 길이었다며. 그러게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안 그래도 출소하면 보러가려고 했는데, 장례식장에서 부를 것까지 없었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미영이랑 잘 지내줘. 은호도 예뻐해 줘. 내가 잘 좀 부탁할게.

사실, 내가 당신이 필요해. 나는 어떡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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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 감사합니다 더 성실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 2013-08-21 17:04:10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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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엄청나네요 잘 봤습니다 처음부터 다시보니까 엄청 매끄럽게 이해가 되네요

    • 2013-08-16 20:42:4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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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엄청나네요 잘 봤습니다 처음부터 다시보니까 엄청 매끄럽게 이해가 되네요^^

    • 2013-08-16 20:34:18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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