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훈제인간

  • 작성자 최재혁
  • 작성일 2013-06-23
  • 조회수 192

훈제인간

형광복을 입었다는 건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토머스, 김영근. 둘은 고개도 똑바로 들지 못했다. 어업복을 입은 인부들은 형광복을 입은 자들을 노려보듯 했다. 형광복을 입은 자들은 쭈그려 앉고, 허리를 숙이고 걸어다녔다. 김영근은 창공을 올려다보았다. 흰 머리가 몇 가닥 는 것 같았다.

여기서 시월까지. 운 나쁘면 십이월까지. 노동감옥은 척박하고 더러웠다. 또 척박하고 메마른 우물이었다. 노르웨이의 찬바람은 팔월이라고 사그라지지 않았다. 한국보다야 훨씬 추웠다. 긴 코트를 입고 싶었지만, 형광복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얇은 천 쪼가리 하나로 버텨야 했다. 형광물질이 몸에 묻어 생을 달리할지도 모르겠다고 김영근은 혼자 중얼거렸다.

옆의 붉은 머리칼의 어린아이. 토머스는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어둡다. 깊다. 새카맣다. 기름띠가 있다. 거품이 있다. 해운대 바다보다도 더럽다. 팔의 흉터를 멋쩍게 긁으며 토머스는 옷의 먼지를 털었다. 여분의 옷이 없었다. 노동감옥은 필요악이라고, 결코 죄질이 깊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고 하는 것, 인류를 위한 헌신이라고 판사가 말하는 것을 떠올렸다.

모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선주가 크게 외쳤다. Avreise! 출발하라. 노젓는 이가 아닌 기계가 일했다. 배는 항구로부터 멀어져, 깊은 바다 중으로 항해해갔다.

 

어느 정도 가자 모터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선주는 긴 턱수염을 매만지며 헛기침을 했다. 모두가 통을 들었다. 마개를 열자, 역한 화학품 냄새가 났다. 선주만이 냄새에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그들 둘도 통을 열었다. 흰 가루가 가득 재어져 있었다. 선주가 친히 영어로 말해 주었다. 뿌려라.

일제히 스무 남짓한 이들이 가루를 바다에 뿌렸다.

노르웨이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시차에도 적응하지 못해 눈꺼풀을 감는 그들은 그 광경을 보고 놀랄 따름이었다. 샴푸를 물에 풀 때마냥, 거품이 가득 일었다. 냄새는 짠물을 타고 더 심하게 선체로 올라왔다. 김영근은 구토의 감정을 느꼈다. 심각한 토기가 몸을 비집고 올라오려 했다. 억누르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물고기들이, 연어들이 거품 사이로 비집고 올라왔다. 수면 위로 아가미를 뻐끔뻐끔 내밀고 눈깔을 까뒤집었다. 그러자 인부들은 그물을 챙겨 던졌다. 김영근과 토머스가 멍청히 있자 인부들이 그들의 머리통을 갈겼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일했다. 그물은 죽은 생선의 몸을 걷었다. 곧 썩을 것 같은 물고기들이 파닥였다. 등이 굽은 것들, 눈이 세 개인 것들이 파다했다. 그들은 비정상적인 연어들을 골라내 구석에 몰았다. 그나마 멀쩡한 물고기들. 이십 마리 정도 되었다. 선실에서 잡담을 하던 다른 자들이 연어 곁으로 갔다. 큰 칼을 들고 쭈그려 앉았다. 머리를 잘라내고, 내장을 뺀 뒤 통으로 썰어 기계를 켰다. 배의 모터였겠거니 여겨진 것은 훈제기였다. 안에 조각들을 펴서 놓았다. 굽는 냄새가 났다. 그나마 인간이 허용할 만한 향기가 뿜어졌다.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3분 정도가 지나고 훈제기가 열렸다. 훈제연어, 통에 그것들을 담았다. 약품의 냄새는 일절 나지 않았다. 그냥 시장 여기저기서 보이는 훈제연어였다. 노르웨이산 훈제연어.

인부가 토머스를 보고 말했다. 점심시간이다. 멍청이들아. 작은 빵과 술이 주어졌다. 토머스는 버린 연어를 향해 걸어갔다. 인부들이 연어의 배를 갈랐다. 회를 쳤다.

토머스가 김영근을 불렀다.

영근! 같이 먹어.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않았다. 그저 심각한 구토감만이 느껴졌을 뿐이다. 빵을 뜯어 삼키고 술을 마셨다. 김영근은 난간에 걸터앉아 한숨을 쉬었다. 너머로 병든 파돗소리와 인부의 고함소리가 섞여 귀에 들어왔다.

이게 뭐야!

배를 가르던 칼이 멈춰 있었다. 주변에 있던 이들의 얼굴도 편치 못했다. 연어의 살이 있어야 할 곳에는 엄지손톱만한 새끼연어들이 우글우글하게, 모여 있었다. 똥을 씹은 얼굴을 했다. 갑자기 인부 하나가 달려들었다. 큰 술잔에 술을 붓고, 새끼연어들을 손으로 잡아 술잔 안으로 뿌렸다. 죽은 유골가루를 뿌리듯이. 그리고 삼켰다.

그냥 이렇게 먹지.

머뭇거리다가 몇 명이 그렇게 했다. 형광복을 입은 자도, 술잔을 들었다. Skål! 건배. 잔을 말리자. 김영근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술을 진탕 마시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들은 다시 통을 뿌렸다. 죽은 물고기들을 건졌다. 선주의 눈빛이 달라졌다. 제대로 된 것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어림잡아도 백 마리는 될 지었다. 물고기를 손질하는 이들이 바빠졌다. 배가 가득 차 더 이상 잡이를 계속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든 인부들은 기쁜 표정으로 말들을 나누었다. 토머스까지, 그 대행에 끼어 있었다.

 

 

배는 돌아가고 있었다. 토머스가 취한 얼굴로 김영근에게로 왔다.

새 환경에 적응하는 게 어때? 제발 고고하게 굴지 말라고.

내가 언제? 미친 짓에 끼어드는 게? 너는 왜 내가 여기로 왔는지 몰라? 순전히…….

아, 됐어. 그만해. 나도 알아. 강도살인 혐의, 내가 술을 먹고, 너는 돈을 챙기고. 돈 어디 있어?

 

 

알의 변혁이 시작되었을 때, 배가 막 멈췄다. 노젓는 모터가 일을 그만두었다. 선주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미리 마련해 둔 돈을 나눠주었다. 김영근과 토머스에게도, 선주는 돈을 주었다. 자네들이 돈을 쓸 일은 없을 테지만, 출소하면 쓸 수 있을지도 모르니 받아둬.

선주는 포장된 훈제연어를 직접 옮겼다. 트럭이 그것들을 실었다. 크게 울리는 웃음을 뒤로 하고 그들은 항구 변(邊)으로 걸었다. 아까의 인부들이 다른 배를 찾고 있었다. 일찍 끝났으니 오징어잡이 배나 찾아볼까. 두 번 하기도 쉽지 않은데, 천운이야. 발을 놀려 오징어잡이 배를 향해 외쳤다. 거기, 자리 남아요? 부화 또한 천운이었다. 연어의 천운과 인간의 천운은 서로 충돌했다. 인간이 뒤집어졌다.

술을 마시자고 제안한 자가 피를 토했다. 핏물 안에는 꿈틀대는 연어가 있었다. 엄지손톱보다도 더 작은 것들. 곧 코와, 피부에서도 그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비명을 질렀다. 그 옆에 있던 인부들이 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다른 이들 또한 그렇게 될 터였다.

갑자기 눈구멍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듯, 연어 떼가 출몰했다. 놀라 바다 쪽을 보고 있던 이였다. 연어들이 바다로 되돌아갔다. 강이 고향이었지만은, 짠물에서도 그들은 잘 살았다. 약품 범벅이 되어 짠 기운을 못 느꼈으리라고도 해석되었다. 그 죽은 자는 연어를 쏟아내고는 바다로 몸을 감추었다. 모공에서, 입에서, 혀에서, 어찌 된 영문인지 손목에서도 연어는 부화했다. 순식간에 시쳇더미가 된 항구 변은 몰려온 사람으로 붐볐다. 토머스는 거의 질린 상태였다.

피를 쏟았다.

-개새끼야.-

김영근이 이런 상황 속에서 말했다.

-결국 이건, 네가 돈을 다 감아가서 생긴 일이야! 왜 술취한 이 몸을 받쳐주지 않고! 같이 칼로 쑤셔놓고 핸드백은 네가, 핏물은 내가 가진다고?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뭐? 내 말을 뭐로 알아들은 거야?-

-네가 말했지. 원어민 교사로 온 새끼들은 난폭자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분명히 도망쳐 나온 뒤 말했잖아.-

토머스는 붉은 머리카락에다가 피눈물 흐르는 얼굴을 가진 붉은 인간이 되었다. 코에서도 피가 나왔다.

-엑윽-

연어가 줄창 나왔다.

-강간까지 내가 흔적을 지워 주고, 최대한 너한테 피해가지 않게 내가 뒤집어 써 준다고. 핸드백도 내가 훔친 거로 치고, 넌 그냥 우발적으로 한 번 찌른 거라고 치자고, 말했잖아. 술에 떡이 돼서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에, 씨발!-

말을 마친 후, 보이는 것은 연어에 뒤범벅이 된 원어민 청년이었다. 김영근은 그를 발로 걷어찼다.

 

 

 

*

 

 

 

“그러니까, 연어가 몸속에서 나오고, 다 죽었다고요?”

“네.”

“무슨 허무맹랑한 소립니까. 당신이 노동감옥에서 총을 훔치고 탈옥해 다 쏴 죽였지 않습니까.”

“선주. 저기 있잖아요!”

“티르 커메인, 김의 말이 맞습니까?”

“아뇨. 저는 처…….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에헴.”

“정신착란, 그리고 무자비한 살해.”

“그러면 그 때 항구 변에 있던 구경꾼들은?”

“없었어요. 다 쏴 죽였잖아! 재판장님, 더 이상 말을 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내가 쓰러지기 전 들었던 트럭 소리와 사람 내리는 소리, 여러 군데서 들린 총성은요?”

“배심원 여러분, 이 재판을 계속할 가치가 있습니까?”

 

 

 

 

“내가 죽였다고요?”

“환자 A78, 이제 말할 시간도 없네요. 처치실로 안내하겠습니다.”

“무슨 재판이 삼십분 만에 끝나. 난 왜 감옥이 아니라 정신병원에 있는 거요?”

“아니오. 이제 말해주는 건데, 당신이 곧 연어요.”

“주사만 맞는다면.”

 

 

 

연어는 구토감을 느꼈다.

김영근은 구토감을 느꼈다.

연어는 이상스러운 복수감이 들어, 새끼연어들을 제 몸에 밴 것이다. 자궁이 있는 마냥, 꿈틀거리며 태동을 준비하는 태아들을 어루만지는 연어.

 

 

 

밤이 되자, 번쩍거리는 옷을 입은 이들이 그물을 던졌다.

 

 

김영근은 화학품 냄새를 맡고 구토했다.

최재혁
최재혁

추천 콘텐츠

어떤 극劇

[어떤 극劇]         나는 모른다   A(여자) : 그 사람들이 구덩이에 들어가 파묻힌 이후에, 그들을 추모하기 위한 상징이 생겨났어. 십자가 모양의 펜던트인데, 알다시피 십자가는 기독교를 상징하기 때문에 겹친다는 지적을 피하기 위해 십자가의 아래쪽에 있는 길쭉한 부분을 세 갈래로 나눴어. 신성히 추모한다는 뜻이야. 다른 종교적인 상징물에서 파생시킬 수도 있었지만 이 나라의 국교가 기독교이기 때문에, 그걸로 정했다는 모양이네.   여자는 자신의 목에 걸린 펜던트에 대해 설명했다. 한 참사에 대한 추모였다. 그 여자는 자신과 일면식 없는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꾸준히 연회장 대신 추모식에 참여했다. 흰 꽃을 바쳤다.   Z(남자) : 왜? 난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아. 펜던트, 반지. 장신구는 결국 쓸데없는 거야. 모든 사람들이, 때가 지나면 부끄러워하면서 내다 버릴 걸?   남자는 반박했다. 남자의 목과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는 결혼했으나 결혼반지를 맞추지 않았고 남자의 부인만 홀로 기념 반지를 맞춰 끼고 다녔다. 남자는 손사래를 쳤다. 애당초 그는 참사에 관심이 없었고, 그것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남자의 잘못은 아니었다. 남자의 주변에 있는 친구들, 그의 부모, 친척들이 질질 끄는 것을 싫어했으므로 남자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추모는 장례식처럼 사흘만, 하자는 것이 남자의 애초 생각이었다.   A(여자) : 전혀 그렇지 않아. 슬픔을 이끌어내자는 것은 꽤 중요해. 내재된 억압, 공포를 상징물로써 치환하는 것은 분노의 표출에 있어서 가장 평화로운 일이야. Z(남자) : 그런 걸 달고 다니는 사람들은 좀 때려야 해. 그리고 그걸 뺏어서 고물상에 팔아버리고. A(여자) : 왜 그렇게 생각하니? Z(남자) : 아, 몰라. A(여자) : 지적을 회피하는 태도는 잘못되었어, 미안하지만. Z(남자) : 응~ 알았어. 난 모르니까.   A(여자)는 모든 것을 모른다고 말하며 가 버린 남자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질을 싫어하는 모양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과학자였다. 철학적 본질과 과학적 본질은 서로 다를까? 여자는 질문을 던지고는 무대에서 퇴장했다. 관객은 술렁였으며 그것에 대해 토론하기 바빠 보였다. 다른 누군가가 무대에서 나타났다.   C(사람) : 이 이야기는 현실에 본질을 두었습니다. 가상으로 치닫았지만 현실에서 본질을 찾아야만 할 거예요. 가상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상징물로 추모한다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것과, 토론을 회피하는 과학자에 대해 할 말들이 많으실 겁니다. 하지만 이제 막을 내려야 하네요. 커튼이 내려왔고, 커튼콜이 열렸다.   그 남자, Z의 일생에 대한 편編   그는 남성으로써, 남성성에 대한 모든 의무를 가지고 태어났다. 씩씩함, 늠름함, 사나움, 정열적인 정신을 가지고 그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밖으로 나왔다. 그의 어머니는 숭배할 만한 모성애로

  • 최재혁
  • 2015-09-13
폭식의 하루

폭식의 하루   그는 가끔 새벽에 일어나곤 한다. 극히 드물지만, 그럴 때 그는 생각한다. 지금 아침밥을 먹어야 할까. 그의 통장 잔고에는 1만 4800원이 있다. 내일 월급이 들어오고, 돈이 정 부족하다면 비상금 20만원을 뽑아 써도 된다. 그는 편의점으로 향한다.   편의점의 문은 언제나 그렇듯이 활짝 열려 있다. 아르바이트생은 포스기 앞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그는 삼각김밥 2개와 작은 오렌지 주스 1개, 편의점 돈육불고기 도시락 1개와 일본식 볶음우동 팩 1개를 산다. ‘7900’이라는 글자가 화면에 뜨고, 그는 파란색 지폐 8장을 낸다. 100원을 거슬러 받는 사이 편의점 밖 사거리의 신호등이 바뀐다. 자동차 몇 대가 쏜살같이 지나가고, 정적이 흐르는 사이 그는 신호등이 녹색불로 바뀌는 것을 본다. 비닐봉지에 음식들을 담고 그는 횡단보도를 뛰어 건너간다. 새벽바람이 귀 뒤를 스친다. 그는 음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그는 물을 끓이고, 전자레인지의 입구를 연다. 도시락을 전자레인지 안으로 넣고, 머리카락을 오른쪽으로 매만진다. 물이 다 끓고 그는 볶음우동 봉지에 물을 넣는다. 1분 30초가 흐르고, 그는 각자 데워진 볶음우동과 도시락을 식탁에 둔다. 오렌지 주스의 뚜껑을 열고 삼각김밥의 포장을 뜯는다. 그는 웃으며 입에 도시락의 밥을 한 숟갈 넣는다. 흰 쌀밥은 침과 섞여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그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는다. 간장과 설탕을 위시한 조미료들이 어우러진, 자극적인 맛이 혀를 가득 채운다. 그는 삼각김밥 하나를 손에 쥐고 베어 문다. 삼각김밥은 두 개 모두 참치마요이다. 기름진 맛이 올라온다. 그는 한 입에 삼각김밥 한 개를 모두 집어넣는다. 빠른 속도로 씹고 나서 그는 볶음우동으로 젓가락을 향하게 한다. 데리야끼 맛이 났다. 굵은 면발이 혀를 감쌀 때, 그는 어금니를 한 번 쓴다. 면발이 끊어져 천천히 입 속으로 스며든다. 오렌지 주스는 자신의 절반을 그에게 내어 준다. 그는 도시락 구석에 있던 계란말이를 젓가락으로 집는다. 잘 구워진 계란말이는 달걀 특유의 비린내도 나지 않는다. 흰밥에 볶음김치를 올려 입에 넣는다. 매콤함과, 약간의 단맛이 쌀밥의 무無에 달라붙는다. 그는 만족한 듯 남은 음식들을 위장에 털어 넣듯 먹어치운다. 빈 일회용 용기와 나무젓가락, 비닐 포장은 그냥, 식탁 위에 잠들어 있다. 어제도, 그저께도 그랬으므로 그는 그것을 한 자연처럼 받아들였다.   해가 완연히 솟아오르고, 지면이 데워진 뒤 정오 무렵이 되면 그는 다시 음식의 향연에 사로잡힌다. 남은 돈은 6900원이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중국집에 전화를 건다. 반쯤 불친절한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겉돈다. 그는 말한다. 자장면 하나에, 단무지 조금만 더 주세요. 전화는 끊어진다. 그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잠시 본다. 코미디 프로가 그에게 헛웃음의 신을 보낸다. 조소를 띈 그의 얼굴은 가차 없다. 초인종이 울릴 때까지 그의 조소는 끊이지 않는다. 헛웃음은 그냥 공

  • 최재혁
  • 2015-09-06
날개 없는 천사

나는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천천히 땅 속으로 스며들고, 당신을 등 뒤에서부터 껴안아 줄 거예요. 당신은 모래사장을 거닙니다. 나는 당신에게 내 나랠 떼어다가 줍니다. 나는 당신의 우울, 광기입니다. 믿기지 않는 것을 기꺼이 눈앞에 보여줍니다. 신뢰의 방벽을 당신의 그 깊은 마음속에 쌓습니다. 당신은 먼지가 물컵 속으로 침전하듯이, 심연 속으로 가라앉으려 합니다. 물방울이 켜켜이 눈가의 눈그늘에 달라붙습니다. 나는 당신을 앞에서부터 껴안아 줄 거예요. 당신은 이유 모를 눈물을 흘립니다. 티끌이 눈가에 묻어서는 아닙니다. 그냥, 슬픈 일이 그 여린 심장에 부닥친 것이겠죠, 아마도. 당신의 옆구리에서는 피가 흐릅니다. 나는 나만의 푸른 손수건으로 붉은 피를 스치듯 닦습니다. 나는 당신을 슬프게 껴안아 줄 거예요. 종이와 깃펜 곁에는 양피지로 얼기설기 엮여 있는 시편詩篇이 있습니다. 진짜 시라고 불리는 것은 모두 바람에 날아가고, 그곳에는 검은 잉크 먹물만이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는 글자를 읽으며 당신은 다시 깃펜을 듭니다. 시를 엮는 것은 어려우면서도 쉬운. 쉬우면서도 어려운. 복잡하고 단순한. 그런 것입니다. 나는 한 손을 뻗어 당신의 머릿결을 쓰다듬습니다. 당신은 홀로 콧노래를 부르며 썩어 가는 나무판자 벽과 함께 생을 같이 합니다. 시편은 당신의 손으로 다시 정렬됩니다. 당신은, 그 업적을 애써 무시합니다. 검은 잉크로 쓰여진 시들은 결국 당신의 횃불로 활활 타오릅니다. 모든 인간들의 욕심과 생명이 담겨 있는 시는 그렇게, 당신에 의해 무너집니다. 당신을 껴안고 싶습니다. 나는 나래를 당신에게 주고, 눈물을 주고, 뛰고 있던 핏줄을 월계수 화환처럼 머리에 둘러 줍니다. 나는 천천히 땅 속으로 스며들고. 그 후 당신을 등 뒤에서부터 껴안아 줄 거예요.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당신에게 믿기지 않는 사랑을 기꺼이 눈앞에 보여줍니다. 당신은 사랑에 대해 씁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씁니다. 당신은 시편을 앞에 두고 깃펜을 잉크에 적십니다. 나는 땅 아래로, 심연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당신 대신에. 당신은 다시 한 줄을 씁니다. 시작합니다. 계속해서.

  • 최재혁
  • 2015-08-1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익명

    훈제인간! 정말 독특하고 매력적인 말이군요....훈제인간 훈제인생..

    • 2013-08-04 23:41:49
    익명
    0 /1500
    • 0 /1500
  • 익명

    부분 삭제되는 문제가 있어 6/24 오후 6시경에 수정하였습니다

    • 2013-06-24 18:09:12
    익명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