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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강아지발바닥냄새
  • 작성일 2012-12-28
  • 조회수 466

너에게 월하노인을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는 부부의 연을 맺어주는 중매인이었다. 서로 인연이 될 두 사람의 새끼손가락에 붉은 실로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내가 처음 월하노인을 알게 된 계기는 언젠가 본 만화책이었다. 오래전 읽었던 터라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만화책에서 누군가 그러기를, 월하노인이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의 인연을 맞닿게 해서 둘은 엮여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했다.

너는 느끼지 못했겠지만 나는 분명히 실의 이끌림을 느꼈다. 언젠가 너를 본 순간 새끼손가락의 끝이 저릿했다. 나의 손가락에 묶인 실이 상대방을 알아보고 나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 순간 나는 너의 새끼손가락을 내 손가락과 맞대고 싶었다. 그리고 입을 벌리려고 했다. 월하노인을 아니? 그가 엮어준 실의 이끌림이 느껴지지 않니? 하지만 너는 실의 이끌림은커녕 내 존재도 모르는 눈치였다.

너는 그 여자를 닮았다. 처음 너를 보았을 때 나는 네가 그 여자인 줄 알았다. 나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포 하나하나마저 다를 여자였다. 누가 봐도 여자가 나를 낳아줬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나는 여자를 닮은 구석이 없었다. 여자는 너처럼, 허리까지 내려오는 결 좋은 머리카락과 다른 사람들의 틈에 있어도 하얀 피부, 작고 마른 체구와 사근사근한 말씨와 항상 웃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었다. 나는 악성곱슬이라 풀고 다니면 굉장히 보기 싫은 머리가 되었다. 앞머리를 내리면 곱슬거리면서 위로 떠버리기 때문에 내리나마나였다. 매직 파마를 해도 금세 풀려버리기 일쑤였다. 언제나 또래보다 큰 키에 골격이 지나치게 커서 살집이 더 있어보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구석구석 자리 잡은 여드름 흉터는 나의 콤플렉스였다. 인상도 제법 날카롭고 음침하기까지 했다. 낯도 많이 가리고 말투도 무뚝뚝해서 간혹 다가오는 사람조차 다시 뒷걸음질 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여자와 나를 보면 가끔 나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어찌, 애가 아빠만 쏙 빼닮고 엄마는 하나도 안 닮았네. 엄마를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정말 예뻤을 텐데. 다들 앵무새처럼 같은 말들만 했다. 나중에는 그런 이야기가 진절머리 나서 여자와 같이 다니는 걸 죽도록 싫어했다. 여자는 내가 자신을 피한다는 걸 알고 굉장히 서운해 했다.

그 무렵, 여자의 낌새가 이상해졌다. 생전 바르지도 않던 화장품을 얼굴에 찍어 바르기 시작했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카락이 구불구불해지는 파마도 했다. 여자의 얼굴은 더 빛이 나기 시작했지만 아빠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카락이 구불거렸는지 어쨌는지, 짧았는지 길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다만, 밥상에 올라온 고등어가 덜 익은 것 같다던가 오늘따라 밥이 좀 질다는 것만 알았다.

하루 종일 집에서 집안일만 하던 여자는 점점 밖에 나가는 일이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점점 더 어려지는 듯 했다. 내가 여자를 멀리하면서 여자가 나에게 자주 걸던 말들도 점점 사라졌다. 다만 시종일관 웃는 낯으로 몸에 옷을 대보며 거울을 들여다봤다. 반찬의 가짓수는 줄어들었고 구석구석에는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마침내 화가 난 아빠가 여자에게 쏘아붙였다. 대체 요즘 무얼 하고 다니느냐고. 집안에 쌓이는 먼지는 뭐고 점점 성의 없어지는 반찬들은 다 뭐냐고. 설마, 바람이라도 난거냐고. 여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같이 화를 냈다. 자신은 매일 집구석에 틀어박혀 살림만 하는 여자냐고. 자기가 무슨 가정부냐고 소리쳤다. 나는 내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화가 난 음성은 안방을 넘어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름대로 꼼꼼히 빈틈없이 썼다고 생각한 이불을 비집고 들어와 내 귀에 파고들었다.

아빠는 동네에서 이상한 소문이 돈다고 했다. 외간남자와 팔짱을 끼고 달라붙어 가는 여자의 모습을 한 두 사람이 본 게 아니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한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이내 여자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자는 어눌한 발음으로 뭐라 뭐라 말했다. 잘못했다고 비는 것인지 나를 믿어달라고 말하는 것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여자를 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어 두려웠다. 아빠에게 달려가 이제 그만하라며 말하고 싶었지만 아빠가 나에게도 화를 낼까 두려웠다. 나는 이불을 더 푹 눌러썼다. 여자의 울음이 점점 사그라지는 듯했다.

그 날이 있은 후로 여자는 다시 집안일에 신경을 쓰는 듯 했다. 집안 구석구석에 쌓여갔던 먼지도 어느 틈엔가 없어지고 언젠가 생겨났던 거미줄도 사라졌다. 반찬의 가짓수도 전처럼 늘어났다. 고등어가 덜 익는 다던가 밥이 질어지는 일 따위는 다시없었다. 여자의 얼굴이 해쓱해지고 구불거리는 여자의 머리가 조금 푸석해진 듯싶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아빠가 다시 여자에게 화를 내서 여자를 볼 수 없게 되는 것보다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하루는 학교에서 무슨 행사가 있다며 오전 수업만 했었다. 담임선생님이 미리 말해준 적이 없었기에 집에다가도 따로 말한 적이 없었다. 여자가 밖에 나도는 일이 부쩍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여자가 집에 없으면 어쩌나 싶어 불안했다. 나에게는 열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밖에 있더라도 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하여 현관문을 열어보았다. 여자가 집에 있든 없든 잠겨있던 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여자가 집에 없는 사이 도둑이 든 것 같아 세차게 쿵쾅거리는 심장을 잡고 집으로 문을 열었다. 내 시야로 보이는 집안은 깨끗했다. 낯선 이의 침입을 알 수 없었다. 도둑이 든 것이 맞나, 그렇다면 현관문은 왜 열려있던 거지,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 때 안방에서 까르르거리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순간 안방 문을 벌컥 열어버렸다. 그 곳에선 여자가 낯익은 남자의 품에 안겨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남자는 언젠가 아빠가 집으로 데려왔던 아빠의 대학 후배였다. 그러고 보니 여자가 변하기 시작한 것도 남자가 집에 왔었던 날 직후였다. 그들은 둘만의 시간을 방해한 나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자의 모습은 처음 보는, 한없이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적막한 공기만이 집안에 가득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여자였다.

저기…, 그니까 다 오해야. 응?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여자의 말에 남자도 함께 동조했다.

그래, 오해하지 마. 너 아저씨 알잖아. 아저씨, 너희 아빠 후배야.

남자의 말에 아빠가 생각났다.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아빠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제가 생각하는 그런 게 뭔데요?

내 물음에 여자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남자는 서둘러 옷을 추슬렀다.

나는 방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고선 집을 나섰다. 마땅히 생각나는 갈 곳은 없었지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집에 있으면 안 되겠다, 였다. 나는 하릴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놀이터에 가서 그네를 타기도 했고 버스정류장에 가서 기다리지도 않는 버스를 기다리고 근처 마트에 가서 노란색 바구니에 이것저것들을 다 담고선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기도 했다. 내 놀이는 저녁 어스름이 낮게 깔렸을 때 멈췄다.

현관문은 이른 오후처럼 열려있었다. 문을 열자 남자와 있던 여자의 모습처럼 한껏 흐트러진 집안이 보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멍하니 서 있는 아빠가 있었다. 짙은 어둠이 아빠에게만 몰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밥을 먹었다. 여자가 전 날 해놨던 콩나물국과 시래기무침과 함께 먹었다. 식탁에 놓인 것들은 오늘 아침과 별반이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밥그릇과 국그릇이 한 개씩 줄어들었고 수저도 한 벌 덜 놓여있었다. 하지만 아빠는 처음부터 여자란 존재가 우리 집에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아하는 것 같았다. 다만, 아빠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시작했다. 언제나 함께일 것 같았던 여자는 그 이후 다시 볼 수 없었다.

아빠는 여자를 허망하게 놓치고 말았다. 아빠는 자신의 옆에서 여자가 사라지고 있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또한 여자를 잡지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다르다. 나는 너를 놓지 않을 것이다. 네가 사라지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아빠를 닮고 너는 여자를 닮았지만 우리는 그저 닮았을 뿐, 그들이 아니니까 말이다. 우리는 분명히 월하노인이 이어준 인연이다. 아빠와 여자는 월하노인이 이어준 것이 아니었다. 실의 이끌림을 느끼지 못했음에도 억지로 인연을 이어나가려고 해서 그렇게 어긋난 것이었다. 어쩌면 여자의 붉은 실과 연결된 인연의 끝은 아빠의 후배였는지도 모른다. 결국, 월하노인이 엮은 인연은 어떻게 해서든지 만나게 되는 법이었다. 그러니 넌 애초부터 도망칠 생각 따윈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며칠 간 너를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여자와 닮아서였다. 여자와 닮은 외양이 나의 눈길을 이끌어냈다. 그러다가 너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항상 자신감 넘치고 강단 있는 태도는 내 눈길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눈길도 잡았다. 그래서 인지 너의 주변에는 항상 아이들이 복작거렸다. 언제나 중심은 너였다.

어느 날은 언제나처럼 수업시간에 너를 바라보다가 너와 눈이 마주쳤다. 너를 바라본 이래 처음이었다. 나는 순간 손가락이 저릿했다. 특히 새끼손가락의 끝이 그랬다. 나는 월하노인이 생각났다. 월하노인, 실, 새끼손가락. 저릿거리는 느낌은 새끼손가락에서 팔을 타고 가슴으로 올라왔다. 쿵쾅쿵쾅 울리는 심장박동이 섬뜩하리만치 선명했다. 그제야 나는 우리가 운명인 것을 깨달았다. 너와 나는 월하노인이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붉은 실로 이어준 ‘인연’이었다.

나는 싱긋 웃어 보이려 했지만 원체 무표정을 하고 있는 터라 약간 어색하게 입 꼬리가 올라갔다. 너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뭐가 문제인가 싶어 생각해보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쉬는 시간이 되고 너는 너의 친구들과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나를 흘끗흘끗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이내 너는 너의 친구들과 함께 나에게 다가왔다. 뜻밖의 일이었다. 한 번도 네가 나에게 다가온 일은 없었다.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오를 만큼 기뻤다. 하지만 너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나를 싫어하니?

나는 너의 질문에 순간 멍하게 너를 바라보았다. 미간에 얕은 주름이 잡힌 너의 표정은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고민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너의 친구들이 나에게 물었다.

너 그러면 왜 자꾸 얘 쳐다봐?

나는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리만 굴렸다. 그 때 내 책상에 손을 올려놓았던 너와 손끝이 스쳤다. 여기서 내가 네가 그 여자와 닮은 것 같아서 그랬어, 하면 받게 될 그 질문들이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너도 그들처럼 질문을 던지고 나중에는 동정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게 분명했다. 너의 친구들과 너는 나에게 계속 대답을 재촉했다. 손끝만 만지작거리던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친해지고 싶어서.

나는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너는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나는 고개를 내려 너의 양쪽 새끼손가락을 보았다. 나와 같은 실이 감겨져 있을 너의 새끼손가락이 어디일지 궁금했다.

한참 멍하니 있던 너와 네 친구들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너와 그들이 나를 비웃는 건가 싶어서 잠시 가슴이 저릿했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 난 또 네가 나를 노려보기에 네가 날 싫어하는 줄 알았잖아.

너는 말을 하면서 눈을 곱게 접었다. 반달 같은 너의 눈은 나를 웃게 만들었다. 너는 다른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너의 말은 나의 마음에 잠깐 가시처럼 박혔다. 내가 너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니. 평소 눈매가 날카로운 탓에 그냥 바라봐도 노려보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자주 사곤 했다. 그런 의심을 너에게도 살줄은 몰랐다. 너는 내 눈매의 날카로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겨진 나의 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어쩌면 너는 나를 잘 알지 못하고 아직 실의 이끌림조차 느끼지 못한 상태니까 그런 것일 거라고 믿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언젠가 네가 느끼게 될 실의 이끌림은 나의 외면이 아닌 내면까지 볼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 다음부터 너는 나에게 인사를 걸기 시작했다. 너의 친구들도 가끔 나에게 인사를 해주었다.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숙제를 다 해왔냐, 오늘 급식으로 무엇이 나오는지 알고 있냐, 이번 수행평가는 조 활동이라던데 너는 누구와 조가 되었냐 등과 같은 아주 사소한 대화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아서 기분 좋은 설렘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나 말고도 다른 이들도 너를 사랑할까봐. 그리고 너도 그, 다른 이들을 사랑하게 될까봐. 나는 매 순간순간마다 네가 다른 이들에게 고백이나 눈짓이라도 받을까봐 가슴 졸였다. 이것들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내가 깨닫지 못한 사이에 이미 너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너와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다 다르니까.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한테 끌린다는 말이 그제야 마음속에 와 닿았다. 그래서 월하노인은 너와 나를 인연으로 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여자와 아빠의 사이를 엮어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우리를 엮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유이든 분명한 것은 너와 내가 인연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만나기까지 너무 돌고 돌아 멀리 왔다. 조금만 더 빨리 우리가 만났으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넌 지금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내가 직접 월하노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에게 내 손으로 실의 이끌림을 느끼게 해줄 생각이었다. 너에게 우리가 인연이라는 것도, 내가 널 얼마큼 사랑하는지 알려줄 요량이었다.

나는 아주 새빨간 실을 샀다. 내 키만 해질 목도리를 완성할 수 있을 만큼의 양이었다. 점점 더워지고 있는 날씨라 내가 목도리를 뜨는 것을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생각 따위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사람은 오직 너 하나뿐이었다. 내가 목도리의 길이만큼, 여기에 들어간 내 정성만큼, 아니 그보다 많이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네가 알았으면 하는 마음만 있었다.

나는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수십 번도 더 재생을 해서야 겨우 코를 하나 예쁘게 만들 수 있었다. 코를 다 만들고 나자 이제 본격적으로 뜨개질을 할 차례였다. 너를 위한 목도리를 만드는데 재미없게, 만들면 양 끝이 중간으로 말리는 민짜 목도리는 만들기 싫었다. 나는 또 다시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찾아 꽈배기 무늬를 넣는 법을 찾아 여러 번 재생을 했다.

나는 뜨개바늘을 쥔 손을 놀리며 무늬를 넣을 때마다 수없이 나의 바람을 담았다. 네가 내 맘을 알아주기를. 네가 내가 느낀 실의 이끌림을 그대로 느낄 수 있기를. 네가 나를 불안에 떨게 하지 않기를. 네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를. 다른 이들도 너를 사랑하지 않기를.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서로밖에 없기를.

중간고사가 보름 앞으로 다가오고 시간표가 발표 났다. 시험범위도 하나하나씩 칠판에 적혀나갔다. 다들 독서실이다 뭐다 공부할 장소를 찾느라 분주했다. 다들 조급한 표정이었다. 나는 너에게 너는 어디서 공부할 것이냐고 물었다. 너는 주말에 교실에서 공부할 것이라고 했다. 교실이 가장 적막하고 집중이 잘 되는 곳이라고 너는 덧붙였다. 내가 그럼 나도 주말에 교실 갈게, 같이 공부할래? 라고 말한 것은 순전히 충동이었다. 그런데 네가 설마 그렇게 밝은 얼굴로 반길지는 몰랐다.

우와, 잘됐다! 네가 같이 공부하자고 하면 나야 좋지. 다른 애들은 주말에 교실에서 같이 공부하자 하면 싫다고 학교까지 오기 귀찮다고 하거든.

너는 커다란 눈을 더욱 커다랗게 뜨며 내 손까지 잡았다. 나의 가슴은 더욱 쿵쾅거리며 너의 손길에 반응했다. 하지만 너는 너무나도 기뻐서 분명히 느껴졌을 실의 이끌림이 크게 와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주말도 너를 볼 수 있다는 행복감에 주말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문제집을 들고 학교에 갔다. 처음에는 단 둘이라 어색했던 사이는 내가 건넨 따뜻한 캔 커피에 금세 녹아버리고 말았다. 너는 언제나 아침 일찍부터 학교에 와서 나를 맞아주었다. 내가 모르는 문제를 질문할 때는 하나하나 차근차근 알려주었고 가끔은 이건 비밀인데, 하면서 시험에 꼭 나온다고 영단어나 문장들을 찝어주던 너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우리는 부쩍 친해졌고 서로 공부하다가 지칠 때면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네가 나에게 미소 지어주는 일도 늘어났고 내가 너에게 먼저 말을 거는 나날도 많아졌다.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목도리를 뜨는 일에 집중했다. 땀을 흘리며 목도리를 뜨면서 그날그날의 너의 모습을 생각하는 일은 하루 중의 중요한 일과였다. 이마에 흐르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모습이라던 지, 모르는 문제에 인상 써가며 고민하는 모습이라던 지, 졸리지 않느냐며 캔 커피를 건네는 모습들을 말이다. 그러면 목도리를 더 빠른 속도로 짤 수 있었고 손목도 아프지 않았다.

나는 어느 정도 이제 목도리를 뜨는 것에 대해 능숙해졌다. 목도리도 이제 마무리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펼치면 꼭 내 키만큼 오는 목도리는 탐스러워 보였고 따뜻해보였다. 물론 지금하면 목에 땀띠가 생길 것이다. 나는 너의 가느다랗고 하얀 목에 땀띠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겨울에, 칼바람이 너의 옷 속으로 들어갈 때, 그 때 목도리를 두른다면, 칭칭 감은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는 다면 너는 참 따뜻할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너는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다가 으레 그렇듯 베시시, 미소를 지을 것이다. 너의 그 미소가 다시 생각났다. 보는 사람마저 웃게 만드는 그 사랑스러움. 나는 그만 너를 상상하다가 웃고 말았다.

언제나처럼 주말이었다. 시험은 이제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학교에 가서 유난히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았다. 너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나를 반겨 주었지만 눈가에 쌓인 피로감은 감출 수가 없었다.

공부 엄청 열심히 했나보네.

어제 정해놓은 계획 지키느라 새벽 세 시에 자버렸어.

너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음 날 볼 과목들의 요점정리를 훑어보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 바라본 너는 잠시 잠이 들어있었다. 자는 너의 옆모습을 멍하니 보던 나는 너의 머리카락을 조금 쓸어보았다. 머리카락은 부드러웠다. 나는 코를 가까이 대 냄새도 맡아보았다. 좋은 향기가 났다. 너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다음 날이 시험이라는 것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실의 존재를 느낀 후로 너와 시선을 마주치는 것도 부끄러워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숱 많고 기다란 속눈썹은 눈 밑에 짙은 음영을 그려냈고 귀엽고 작은 코를 지나쳐 옅은 홍조를 띄는 두 뺨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내 시선이 멈춘 곳은 굳게 닫혀 살짝 쀼루퉁하게 나온 입술이었다. 가슴이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너의 숨결을 느끼며 살짝 입을 맞추었다. 너의 입술에 닿는 낯선 감촉에 네가 깰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너는 그런 내 마음을 알지 못하고 새근거리기까지 했다.

나는 목도리를 풀었다. 처음에는 너에게 목도리 그 자체를 주려고 했다. 빨간색 실로 짜인 목도리를 보고 네가 운명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나는 실의 끝을 너의 새끼손가락을 묶었다. 목도리에서 풀려나오는 실은 나의 머리카락처럼 구불거렸다. 나는 실로 너를 감기 시작했다. 칭칭. 네가 완성된 목도리를 감지 못하는 대신 그렇게나마 너와 실을 맞닿게 하고 싶었다. 실의 기운을, 실이 너에게 전해주는 이끌림을 보다 깊게 느끼게 하고 싶었다.

너는 어느 틈에 잠에서 깼고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너의 입까지 실로 감은 상태여서 너는 아무리 말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당황한 너는 그 하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발갛게 되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너는 눈으로 지금 무얼 하는 거냐고 묻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만 너를 향해 웃어주었다. 네가 나에게 그리 해주던 것처럼 눈을 곱게 접어 웃어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원체 움직이지 않던 근육이라 너처럼 눈을 접는 것이 힘들었다. 결국 나는 눈웃음을 짓는 것을 포기하고 마저 실을 감았다.

나는 너의 한참을 감아 팔꿈치까지 감았다. 너는 절반밖에 움직일 수 없는 팔을 힘차게 움직였다. 너는 마치 펭귄이 날개 짓을 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너의 그 모습은 나에게 귀엽게 느껴졌다. 하얗던 너의 피부는 금세 홍조보다 더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기껏 감았던 실을 끌어내리고 다시 너와 입 맞추고 싶었다. 이번에는 좀 더 깊게, 길게.

너는 어느 새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방울을 매달고 있었다. 나는 너의 입술에 입 맞추는 대신 너의 눈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너의 속눈썹이 내 입술에 닿고 눈물이 내 입술에 스며들었다. 입술을 떼고 너의 눈을 바라봤다. 너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나를 두려운 눈길로 바라봤다. 너는 그런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나는 너에게 단단히 빠진 것 같았다. 내가 월하노인이 되어 너에게 우리 사이를 깨우쳐 주려고 했던 것인데 반대로 내가 너에게 더 빠져버리는 상황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아마도 너의 입술이 자리 잡고 있을 그 곳에 내 입술을 가져다댔다. 내 입술에는 너의 따뜻한 입술 대신 약간 까칠한 실만이 닿았다. 너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내 볼까지 적셨지만 개의치 않았다. 너에게 어떻게든 우리가 인연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입술을 떼고 다시 너를 한참이나 칭칭 감고서야 나는 남은 실 꼬투리로 내 새끼손가락을 묶을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울다 지친 것인지 이제야 너의 상황을 파악한 건지 가만히 있는 너를 안았다. 너의 체온이 실을 타고 나에게 전해졌다. 나는 한참동안 너를 끌어안고 있다가 귀에 속삭였다. 오랫동안 너를 보면서 입 안에 담았던, 하지만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가볍게 말하기엔 거기에 담긴 내 마음이 너무나 커서 그러질 못하고 매일 깊은 고통으로 참아냈던 말이었다.

사랑해.

네가 내 품에서 무너지는 것이 느껴졌다.

강아지발바닥냄새
강아지발바닥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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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

* 우리 집 개가 새끼를 낳았다. 학원에서 돌아오니 동생 녀석은 내가 신발을 벗기도 전에 솜뭉치-우리 집 개 이름-가 다섯 마리나 낳았다며 마치 자신이 새끼를 낳은 양, 자랑스럽게 말했다. “누나, 누나. 하얀 개 네 마리에 알록달록 한 마리야!” “알록달록 이라니?” 나는 동생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나 했다. 솜뭉치도 말티즈 견이고 교배시킨 개도 말티즈 견이라 알고 있었는데, 그 둘 사이에 ‘알록달록’이 나올 리 없잖은가. 그 때, 안방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순종이라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점박이가 나올 수 있어요? …뭐라고요? 이것 보세요. 우리 집 개는 110만원이나 주고 산 순종이라고요!” 엄마의 목소리였다. 엄마의 목소리 톤이 저렇게 하이 톤이 되었는데도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통화중인 것 같았다. 아마, 교배시킨 개 주인이겠지. 엄마의 말을 들어보면 동생이 한 이야기도 마냥 헛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난 아직 눈도 못 떴을 새끼들을 보기 위해 조촐한 산실이 있을 서재로 갔다. 동생은 옆에서 조용히 하여야 한다며 검지를 지 입술 위에 올려놓고 내게 주의를 시켰다.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서재 문을 열었다. * 생전 처음으로 갓 태어난 생명들과 마주 앉았다. 눈도 못 뜨고, 털도 완전히 마르지 않고 핑크 빛 몸으로 꼬물거리는 생명들을 보자 가슴 한 구석이 간지러웠다. 만져보고 싶었지만 채 용기가 안 나 망설이고 있을 찰나, 동생이 속삭이며 한 녀석을 가리켰다. “누나, 쟤야. 알록달록.” 그 녀석은 제 엄마의 배 주변에서 꼬물거리는 제 형제들과 달리 머리맡에서 꼬물거렸다. 솜뭉치는 그 녀석을 끊임없이 핥아주었다. 녀석은 핑크빛 몸에 짙은 갈색의 반점이 있는 걸 제외하면 제 형제들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무늬는 동생의 말처럼 알록달록 하다기 보다는 얼룩덜룩했다. “엄마가 강아지들 주변에 가면 안 된대. 왜냐면 개들은 엄마가 되면 엄청 예민해져서 엄청 사납대.” 옆에서 동생이 끊임없이 작은 목소리로 떠들어댔지만 그런 게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갓 새끼를 낳은 개 주변에 가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나는 더 서재에 머무르는 것이 솜뭉치와 다섯 생명들에게 실례일 것 같아 동생을 일으켜 그 곳을 빠져나왔다. 안방에서 들려오던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사라져 있었다. 대신 부엌에서 찬물을 연신 마시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왔니?” “응.” “개들 봤어?” “방금.” “그럼 그 점박이도 봤겠네.” “응.” “그것 땜에 교배시킨 개 주인이랑도 싸웠어.” “왜 그랬어. 개가 점박이든 아니든 어떻다고.” 나는 엄마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개가 새끼를 낳았는

  • 강아지발바닥냄새
  • 2011-03-13
내가 음악을 듣는 이유

  - 짝!   짝!   한 학교의 복도에 커다란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복도에는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마른 체구에, 한 SF영화에 나오는 외계인처럼 배가 볼록 튀어나온 남자 선생이 얼굴이 벌게진 채로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선생의 앞에는 고개가 한 쪽으로 쏠린 한 남학생이 있었다. “너 고 3이야, 새끼야. 수업시간에 내가 노래 듣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어? 근데 오늘은 헤드폰을 쓰고 노래를 들어? 지금 노래 듣지 말라고 했다고 반항하는 거야? 아님 네가 천재야? 엉? 모의고사 점수가 200점 간신히 넘으면서 그 성적에 노래가 들려?” 선생은 화를 내며 몇 번 더 학생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쳤다. “가수가 될 것도 아니면서 왜 노래를 듣는 건데? 그 노래가 수능에 나와? 면접에 나온데? 아님 노래를 들으면 밥이 나와, 돈이 나와. 김 승재, 넌 대체 뭔 생각으로 사는 건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 선생의 잔소리에도 승재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승재는 다른 녀석들처럼 능청스럽게 징그러운 애교를 부리지도 않았다. 선생님이 때리면 맞고 잔소리하면 듣고, 서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교사지도 불이행이란 죄목에 괘씸죄가 더해져 벌점 15점과 반성문 5장이란 벌을 받게 되었다.   - “미친 새끼. 왜 그러고 산대냐?”   한 편, 승재가 벌을 한창 수행하고 있을 때, 그와 같은 반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그를 풍선껌처럼 씹고 있었다. 그 때 한 무리에서 어떤 여학생이 그 무리의 예쁘장한 여학생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예쁘장한 여학생의 교복에는 “민지희”, 어떤 여학생의 교복에는 “김지영”이라는 명찰이 붙어있었다.   “지희, 넌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김 승재 말이야. 너 좋아하잖아.” 지희는 얼굴이 굳은 채로 금방 울상이 되어버렸다. “야, 김 지영! 민 지희 울잖아.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다른 여학생이 지영을 비난하자 그녀는 당황하며 지희를 달랬다. “야, 야. 민 지희! 미안해~. 응? 마음 풀어. 뭐 그런 걸로 우냐?” “그래, 지희야. 그냥 장난친 거잖아.” 지영을 시작으로 그 무리의 여학생들이 지희를 달래주자 시끄럽던 교실에 갑자기 찬기가 돌았다. “민 지희, 왜 우냐.” 그 때 사납게 생긴 남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난… 그냥 장난친 건데 지희가 예민하게 받아들인 거야. 난 그냥 지희도 장난으로 받아들일 줄 알고…….” 지영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남학생은 무슨

  • 강아지발바닥냄새
  • 2010-08-13
인형의 꿈

집으로 가는 학원 차에 몸을 실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mp3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학원에서 숙제로 내준 영단어 프린트는 하릴없이 내 손에서 뒹굴고 있었다. mp3에서는 최근 컴백한 여성아이돌의 후속곡이 흘러나왔다. 신나는 음악소리에 버스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묻혔다. 버스 안에는 음악소리와 나만이 존재하는 듯 했다. 나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창 밖에는 어둑한 하늘과는 상관없이 화려한 밤거리를 연출하고 있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교복무리, 노출이 심한 아가씨, 비틀대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아저씨 등이 화려한 밤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반대차선에는 교복무리로 한 가득 배를 채운 시내버스가 힘겨워 보이는 뜀박질로 학원차를 지나쳤다. 그리고 화려한 밤거리를 뒤로하고 학원 차는 걸음을 재차 재촉한다. 어느 덧, 학원 차가 한 아파트 단지 앞에 세워지고 차 안을 반 절 가량 채우던 아이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도 차안에서 한껏 굽히고 앉아있던,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버스에서 내렸다.  ***   “성적표 갖고 안방으로 와.”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날카로운 엄마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엄마는 차가운 얼굴로 나를 쌩하니 지나지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방에 들어가 가방 속에서 하얀 종이를 들고 터덜터덜 안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앉은 엄마에게 하얀 종이를 내밀자 엄마는 종이를 거의 찢듯이 빼앗아 갔다. 나는 빈손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엄마의 점점 굳어가는 얼굴을 바라보기 겁나 고개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이걸 성적이라고 들고 온 거야?”언뜻 보이는 엄마가 쥐고 있는 하얀 종이 속 숫자들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엄마는 종이를 나한테 던졌고 종이는 나의 발 앞에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고등학교 갈 생각은 있니? 성적이 그게 뭐야! 것도 공부한 거라고 할 수 있어? 어떻게 된 애가 그 모양이야!”엄마는 나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50점대가 어떻게 나와, 어떻게!”지금 내 발 앞에서 형편없는 자세를 취하는 성적표에는 50점 대 과목이 둘이나 있었다. 수학과 미술. 엄마는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다 배운 거잖아, 배운 것. 수업시간에 딴 짓만 안 하면 다 맞을 수 있는 것들인데 왜 이 모양이야!”엄마 말은 맞았다.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엄마 말대로라면 전교생 중 올백성적표를 들지 않은 아이가 없을 것이다. 그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하지만 그 말을 한다면 엄마 옆에 있는 베개에 맞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말았다. “엄마가 너를 보면 억울해. 정말 억울해. 가난한 농사꾼 부모 둔 게 그렇게 한이 될 수 없어. 내가 너보고 김매고 밭메라, 시키디? 소죽 쑤라고 해? 빨래며 청소며 삼시세끼 꼬박꼬박 밥 멕여주고 깨끗한 옷 입혀주는데 뭐가 불편해서 성적이 이 모양이야, 이 모양이! 엄만 너만할 때 니 외삼촌 업어 키우고도 맨날 1등 했어. 맨날 상타오구 100점 맞고. 집에서 공부할 시간도 없어서 정말 수업하나만 열심히 들었어. 문제집하나 보지 않

  • 강아지발바닥냄새
  • 2009-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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