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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살, 영원히

  • 작성자 한 장의 날개
  • 작성일 2012-02-29
  • 조회수 577

열여덟 살, 영원히

  “그럼 마치자. 반장.”

  차렷, 경례 소리와 함께 나는 인사하는 동시에 책상위로 엎어졌다. 그러고서 참아왔던 긴 한숨을 터뜨렸다.

  “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학년 물리수업은 좀 아닌 것 같았다. 선생님 탓인지, 과목 탓인지는 몰라도 수업시간에 눈앞이 자꾸 흐려지고 수업 내용은 한 쪽 귀로 들어와서는 다른 쪽 귀로 분쇄되어 날아가 버렸다.

  “야, 매점 가자. 매점.”

  “그래. 뭐 먹을까?”

  “음…… 일단 가서 고르자. 물리 때문에 기운 다 빠진 것 같아. 단 게 쫌 땡기네.”

  “아, 물리. 그 쌤 쫌 짜증나지 않냐?”

  쉬는 시간의 교실은 수십 명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뒤섞여 그야말로 카오스 그 자체였다. 새 학년이 된지 3주 채 지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일명 그룹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한 마디로 그냥 친한 애들끼리, 말 좀 통하는 애들끼리 모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끼리 모여서 쉬는 시간에, 점심 저녁시간에 수다를 떤다.

  “미정아! 너도 같이 매점가자.”

  어우, 이 녀석들은 잠도 없는 모양이었다. 두 팔에 파묻혀있던 고개를 들자 한층 더 커진 소음이 들려왔다.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고 있었어?”

  보면 모르냐……

  “아, 시간 얼마 안 남았네. 에이, 다음에 가자.”

  희정이는 투덜거리고선 사물함 쪽으로 걸어갔다. 잠이 다 달아나버린 나는 방금 몇 분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팔짱을 끼고서 잠시 생각해보았다. 하나, 둘, 셋.

  “헐.”

  쉬는 시간동안 나는 한 마디도 안했는데 희정이는 세 마디 정도 했다. 그런데도 대화가 자연스럽게 끝났다. 사실, 어제 오늘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문득 그게 신기해지는 날이 있다.

  “보자, 다음시간이…… 수학이네!”

  오늘따라 시간표가 싫었다. 안 그래도 물리 수업 듣고 힘 다 뺐는데 수학이라니. 이과로 온 것이 진심으로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바보지. 바보야.”

  연신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서랍을 뒤졌다.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수많은 낯선 다른 반 애들이 우리 반을 점령하고 있는 것이 이제야 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내 옆 짝도 바뀌어있었다.

  “아, 수학은 수준별 이동수업이지.”

  오늘따라 내 상태가 왜 이런지 참. 한심하다 한심해.

  ‘보자, 행렬이 영, 일, 일, 이, 영…… 아, 잘못 썼네.’

  투덜거리며 필통을 뒤졌다. 그런데 지우개가 없었다. 쩝, 항상 필요할 때는 어디 가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혹시나 해서 책상 밑을 뒤져봤지만 역시나 종잇조각과 먼지만 굴러다녔다.

  ‘그럼, 옆의 쟤한테 빌려야하는데.’

  포스가 심상찮았다. 아, 힘 있어 보이는 그런 포스가 아니라 친해질 수 없는 포스였다. 아니, 이 표현도 좀 이상한데. 아무튼 나랑 좀 안 맞는 애 같았다. 머리카락은 마치 자를 대고 자른 것처럼 모두 일정한 길이의 단발머리였는데 머리카락들이 하나 같이 힘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입은 굳게 다물고 새카만 눈동자는 칠판위의 분필만 쫓고 있었다. 적고 있는 노트를 보니 꽤 열심이었다. 성적은…… 내가 C반이니까, 뭐, 나랑 비슷할 것 같았다.

  ‘그런데 꽤 열심히 하네. 곧 반 올라가겠다.’

  뚫어지게 보고 있던 그 애의 손이 갑자기 멈추었다. 그 갑작스런 변화에 고개를 들자 그 새카만 눈동자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뭘 봐?’였다.

  “어, 지우개 좀 빌려줄래?”

  까만 눈동자는 시선을 거두고 필통에서 지우개를 꺼내더니 나에게 주었다. 나는 속으로 다행이라 외치며 지우개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수학 책에 적힌 숫자들을 천천히 지우며 생각했다.

  ‘다음에는 고개도 돌리면 안 되겠다…….’

  상담은 10시 12분, 내 예상보다 훨씬 늦게 끝났다. 새 학기도 되었고 하니 시작된 담임과의 야자 시간에 시작한 상담은 내가 마지막 순서였다. 아…… 조금만 앞의 애들이 질질 끌어줬어도 다음 상담시간에 처음으로 상담을 시작하는 것이었지만, 진짜 운이 없다.

  “아, 너무 늦게 끝내버렸구나.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긴 한 건지. 담임은 나에게 늦었는데 통학버스나 시내버스를 놓친 거 아니냐는 말도 없이 자신의 물건들을 핸드백에 넣고는 종종 걸음으로 어두운 복도를 쌩하니 걸어가 버렸다.

  “뭐지, 불행한 2학년의 추억을 선사할 것만 같은 이번 담임은…….”

  나는 어두컴컴한 중앙 계단을 걸어 내려가서 신발을 신으며 투덜댔다.

  “에라이. 통학버스도 놓쳤는데 오늘은 그냥 멍하니 걸어 가야스겄다.”

  그래도 그냥 멍하니 걸어가는 것도 좀 그래서 아까 잠 때문에 못 갔던 매점으로 걸어갔다. 당연히 매점 문은 굳게 닫혀있었지만 게으르고 성깔 있는 매점 아줌마보다 부지런하고 점잖은 자판기가 풀로 돌고 있으니 상관없다.

  “딸깍”

  500원짜리 동전과 교환되어 굴러 내려온 캔 커피를 따자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모금 마시자 웬만한 주스만큼 달달한 커피가 입 안 가득 감쌌다.

  “이건 뭐 평생 먹을 커피를 고등학교 생활에 다 마신다.”

  한꺼번에 털어 넣어도 시원찮을 양이었지만 그러면 아쉬울까봐 조금씩 나누어마셨다. 그러다가 불이 켜져 있는 3, 4층 교실이 눈에 들어왔다. 야자. 3학년 선배들이 11시 30분까지 한다는 야자의 업그레이드판, 심야자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정말 대단하다싶어 그 불 켜진 교실을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불이 다 꺼진 1, 2층 교실과 급식실, 체육관, 그리고 아무도 없어 황량하기만한 운동장에 비해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3학년 선배들의 교실은 뭔가 생뚱맞다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쩝.”

  커피가 다 떨어졌다. 원래 걸어가면서 마시려고 했는데…….

  하나 더 뽑아야겠다, 고 생각하며 몸을 돌린 순간 나의 간과 심장이 미천한 길이의 다리를 따라 발끝까지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 시야에는 까만 머리에 3학년 교실의 불빛 때문인지 얼굴에 그늘이 진 한 여학생이 서 있었다.

  “뭐, 뭐……”

  나는 얼마 전에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농아처럼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넌, 뭐야.”

  귀신같이 서 있던 여학생이 말을 했다. 그런데 넌 뭐야, 라니.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어?”

  아무 말도 못하며 몸이 굳은 채 서 있던 나는 ‘넌 뭐야’라는 목소리가 낯이 익은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 뇌가 대략 11시간 전에 들었던 수학시간에 지우개를 빌리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이 앞의 여학생은 머리카락은 마치 자를 대고 자른 것처럼 일정한 길이인 데다가 힘이 없고 새카만 눈동자를 지닌 나랑 좀 안 맞는 애의 포스를 풍기던 옆에 앉았던 애다.

  “니가 왜…… 여기에 있어?”

  그 여학생은 내가 무슨 일을 하건, 무슨 말을 하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매우 신경이 쓰였다. 그러니까, 왜 날 따라 오느냐고.

  - 너도 혹시 대안아파트에 살아?

  라던가,

  - 아니면 그 근처에 살아?

  라고 하던가,

  - 커피, 너도 한 모금 마실래?

  라는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는 질문에 전부 노코멘트였다. 그러면서 힘 있는 시베리안 허스키의 목줄 잡은 주인마냥 내가 가는 방향으로 줄줄 따라온다.

  “너 정말 이 길로 가야하는 거 맞아? 왜 자꾸 날 따라오는 거야?”

  “그러게.”

  내가 미쳐. 아까 3학년 교실을 보면서 멍하게 있던 것이 후회가 된다. 커피를 뽑았던 것이 후회가 된다. 아니, 애초에 쟤한테 지우개를 빌렸던 것이 후회가 된다.

  “아니, 진짜 진지하게 대답해봐. 너 이 길로 가야하는 거 맞아?”

  “진지하게?”

  “진지하게.”

  “몰라.”

  “몰라?”

  “응.”

  꼭지가 돈다, 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오늘 확실하게 배운다. 아마 법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지금 당장 연쇄살인범 조디악에 빙의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아직 앞날이 창창한 나이만 꽃다운 18살이니까…….

  “에라 모르겠다. 따라오든지 말든지. 난 내 집에 간다.”

  하고 말하면서 걔를 보는데 뭐가 신기한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은 O자 모양으로 벌리고서 “오……”하며 나를 쳐다본다.

  “뭐여?”

  “너 같은 애는 처음인데…… 좋아. 따라와.”

  “뭐?”

  “따라오라니까.”

  여학생은 갑자기 180도를 돌더니 지금까지 온 방향의 반대방향으로 걸어간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치 내가 올 것을 알고 있다는 자세로.

  10분쯤 그 애를 따라 걸었다. 나는 걸으면서 내가 왜 따라가고 있는 거지, 하는 나에게 하는 추궁과 함께 저 애가 집에 초대하는 거라던가 하는 거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저 애 엄마가 있으면? 안녕하세요~ 하면서 친구에요 라고 해야 하나? 같은 쓸데없는 망상들로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15분쯤 지났을까. 내가 가본 적 없는 곳으로 여학생은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차라리 집에 초대를 해.’

  세상에. 여학생은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아파트의 뒷산으로 보이는 곳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야! 너 어디 가는 거야?”

  내가 소리를 지르자 여학생은 달리기 시작했다. 미친…… 이 오밤중에 산속을 달리면 어쩌자고.

  겨울동안의 찬바람에 말랐을 덤불을 헤치면서 따라가자 그 여학생이 보였다. 오늘따라 크고 둥근 보름달을 배경으로 삼아서 어느 커다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바위 바로 앞으로는 가파른, 그것도 떨어지면 무조건 즉사라고 봐야 할 절벽이 있었다.

  “조심해!”

  나는 손가락으로 절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하지만 여학생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절벽을 슥 하고 보더니 세상에서 가장 시크한 표정으로 바위에서 내려왔다.

  “따라왔네?”

  ‘따라왔네?’

  알지 못하는 새소리가 들리는 어두컴컴한 산속에 들어와 있어도 두려움보다는 궁금증만 커졌다. 머리카락은 마치 자를 대고 자른 것처럼 일정한 길이인 데다가 힘이 없고 새카만 눈동자를 지닌 나랑 좀 안 맞는 애의 포스를 풍기며 하교 시간에 자기 집 방향도 아니면서 내 뒤를 쫓다가 갑자기 뒤돌며 따라오라고 해놓고서 어두운 산속으로 달려서 들어가더니 절벽 위의 바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서 여기까지 따라 오라했다고 진짜 따라 올 줄은 몰랐다는 말투로 말을 하는 저 여학생의 정체는 뭘까? 하는 그런 궁금증……은 개뿔. 미친년이 틀림없다.

  “좋아.”

  여학생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선심을 쓴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너한테만 말해줄게.”

  사람의 마음이란 이 얼마나 간사한가. 방금 전까진 미친년이라고 마음속으로 단정해 놓고선 나한테만 말해주는 거라고 하니까 바로 귀를 쫑긋 기울이는 나라니.

  “나 2주일 뒤에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

  “아, 그래?”

  역시 미친 게 맞는 것 같다.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주고서 내려갈 길을 찾기 시작했다.

  “안 믿는 거야?”

  “아…… 믿어, 믿어.”

  그래, 그래. 믿는다고. 왠지 너라면 지금 당장 뛰어내려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아. 뛰어내려서 그 독특한 단발머리로 활강을 해서 저 큰 보름달 위에 앉는다 해도 말이야.

  “안 믿는 것 같은데…… 내 이름을 들으면 믿을 수 있을 걸? 최희우. 그게 내 이름이야.”

  “최희우?”

  내 머릿속의 메모리를 담당하는 기계가 열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까지. 결과는…… 없음.

  “몰라. 그게 니 이름이야? 오늘 처음 들었네……. 어?”

  잠깐. 메모리 담당 기계가 휴지통의 파일을 복원하듯 언젠가 버려졌던 기억 하나를 툭 하고 뱉어냈다.

  - 뭐야, 이거! 누가 던졌어?

  - 앗, 드러! 그거 맞았어?

  - 뭔데 이게. 생리대? 미친 누가 이걸 버려놨어.

  - 야, 니 어깨 이제 썩는다. 킥킥. 그거 최희우건데. 최희우건데. 최희우건데. 최희우건데.

  “니가 그럼 그 대안여중학교의……”

  “맞아. 대안여중 전교 왕따. 그리고 지금은 곧 초신여고 전교 왕따가 될 몸이지.”

  “……”

  그 여자애가 자신이 최희우라고 밝히고 무표정하게 팔을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자신이 갈 곳을 향해 갈 동안 나는 커다란 보름달로 일광욕을 하는 것도 아닌데 계속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암.”

  자야했다. 그러니까 자꾸 하품이 나오는 거겠지. 시계의 짧은 바늘도 벌써 3을 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까의 산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잘 수가 없었다. 엄마가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잔소리하는 것도 못 듣게 만들었던 그 일말이다.

  - 나 2주일 뒤에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

  아, 고년은 왜 그 말을 나한테 한 거냐고. 그것도 수학 시간에 지우개 빌려달라고 한 죄밖에 없는 나한테.

  나는 스탠드의 다 죽어가는 불빛 아래서 엎어졌다. 샤프를 책상에 빙글빙글 돌리며 낙서를 해댔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미칠 것만 같은 일들을 정리해 보았다.

  “이거 뭐 정리를 해봐도…… 당최 알 수가 없네.”

  샤프의 뒤쪽을 입안에 넣고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김전일이나 코난의 뉴런 한 조각만도 못한 내 추리력으로 보면 그 여자애…… 아니, 최희우는 아마 나를 중학교 때 봤을 것이고 깊게 기억하고 있든 얕게 기억하고 있든 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기가 최희우라는 것을 밝히면 내가 알거라고 말했겠지. 그리고 우연히도 내가 먼저 걔한테 접근했다. 그 망할 놈의 지우개 땜에. 내일 당장이라도 문구점에서 지우개를 묶음으로 사서 필통 배를 꽉꽉 채워줘야지, 순대처럼. 흠흠, 암튼 나보고 따라오라고 한 것부터는…… 진짜 탐정한테 의뢰를 해야 한다. 내 머리로는 자꾸 에러가 뜬다. 페이지를 표시할 수가 없다.

  “으아……”

  낙서를 하느라 쥐고 있던 샤프를 내던지고 온 몸의 근육을 늘려준다. 내가 지금 뭐하나 싶다. 아까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이 다 꿈같이 느껴져서 자고 일어나면 없었던 일이 되어버릴 것 같다. 하지만 아까 본 것들은 모두 현실. 그래서 더 몸이 무겁다.

  “걔는 진짜 죽으려는 건가?”

  2주일 뒤에 뛰어내리겠다는 말이 계속 생각이 났다. 다른 애들, 그러니까…… 우리 반에 희정이나 애은이 같은 애들이 그런 말을 했다면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걔는 아까 들은 것처럼 중학교때 전교 왕따였다. 그리고 이제는 예비 고등학교 전교 왕따란다. 엄청난 포스를 가지고 있는 그 최희우가 자신을 비관하면서 뛰어내린다는 것은 상상이 잘 되진 않지만 요즘 TV나 인터넷이나 청소년들이 왕따 때문에 비관 자살하는 것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마냥 미친년이 중얼거린 거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게다가 만약 진짜로 죽는다고 치면, 물론 아까 그 절벽을 생각하면 상상도 하기 싫지만, 나는 어떻게 되느냐 말이다. 2주일 전에 죽겠다는 말을 바로 앞에서 들어놓고 막지도 않은 그런 나쁜 년이 되지 않겠나? 방관죄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그 죄가 나에게 성립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 애가 죽는다면 덩달아 나까지도 죽는 거다. 만약 최희우가 나에게만 말했다하더라도 내가 못 버틸 것 같다. 안 그래 보여도 나, 나름 마음속은 연약하다고. 걔가 나한테만 말하고 죽어버리면 내가…… 내가…… 후…… 주제가 너무 무겁다. 물리, 수학만으로도 돌아버릴 나에게는 너무 힘겹다고.

  딸깍

  스탠드에도 불이 꺼지고 방안은 깜깜해졌다. 뻑뻑한 눈을 감자, 달고 있어 봐야 쓸데없는 내 머리는 아까의 그 장면들을 복원해낸다.

  - 나 2주일 뒤에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

  요 년이 나를 괴롭게했겄다? 그리고 뛰어내려? 그렇겐 안 되지. 살릴 거야. 내가 널 살릴 거라고. 최희우. 중학교 전교 왕따였는지 뭔지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예비 고등학교 전교 왕따라고 했나? 내가 그 예비 후보에서 탈락시켜주지. 그럼 자살할 이유도 없지? 안 그러냐? 최희우!

  나는 눈을 감고서 어디 있는지도 모를 최희우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아오 아파, 벽에 부딪혔네.

  “지이이잉

  나의 휴대폰은 아침부터 춤바람이 난 듯 온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안 열어봐도 뻔하다. 놀러가자는 약속을 오늘 해놨기 때문에. 오늘은 한 달에 유일하게 있는 놀토!

  “에이씨! 놀톤데.”

  그래, 놀토이긴 놀토인데, 일주일 전부터 약속을 잡아놓긴 잡아놓았는데…… 오늘은 피치 못 할 사정 땜에 못 간다고 문자를 돌린다. 이유는? 최희우 때문이지. 누구 때문이겄어. 어제 원치는 않았지만 벽이랑 주먹다짐하면서 머릿속으로 계획해뒀던 그 일들. 그 일을 실행하려면 오늘부터 시행해야 한다. 2주 뒤라고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2주도 아니지. 벌써 하루가 지났으니까.

  -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데

  - 아 그 조용한 애? 걔는 왜?

  - 걔.. 뭔가 좀 꼬롬하지 않아? 나 왠지 걔 싫음

  샤워하기 전에 보낸 문자의 답들은 모두 처참했다. 예비 왕따라는 말을 조금이나마 실감하게 되는 것도 같다. 나의 뛰어난 언변술로 ‘최희우 전화번호를 아느냐’라는 말을 빙빙 꼬아서 물어봤었다. 근데 답장들이 다 이 모양이다. 하긴 그 모양으로 그런 행동들을 하고 다니니 좋은 얘기들을 듣기는 글렀다.

  “그렇다면…… 결국 이 방법을 써야 하나?”

  나는 내 얼굴들은 둥그렇게 잘려있는 금단의 비서 ‘중학교 졸업앨범’을 책장에서 꺼내왔다. 한 장씩 넘기자 독특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리고 최희우의 얼굴도 보였다. 이건 뭐 무표정도 아니고 찡그린 표정도 아니고…… 그리고 머리스타일은 전혀 안 변했다. 맨 뒤로 넘겨서 결국 최희우의 집 번호를 알아냈다.

  “뚜루루루루

  제발 최희우가 받아라, 최희우가 받아라, 어머니가 받으면 안 된다, 안 된다…… 아.

  “여보세요?”

  낮은 중년의 목소리. 망할. 신이시여 나는 왜 이리 풀리는 일이 없을까예?

  “아, 안녕하세요? 저 정미정이라고 하는 데요. 최희우 집에 없나요?”

  내가 최희우를 찾자 최희우 어머니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면서 들뜬 목소리로 친구가 전화왔다! 라고 외치신다. 아, 친구는 아닌데. 너무 들뜬 목소리이시다. 맞다, 아마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좋아하시는 거겠지.

  “여보세요?”

  예의 그 독특한 음성이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최희우. 드디어 연결됐다. 그리고 이제 계획 실행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던가. 얘한테는 그 방법이 들어맞나 보다. 어제 최희우가 따라오라는 말만 해놓고 뒤돌아선 것처럼, 나도 2시까지 공원 정문으로 나와 라고 말만하고 끊어버렸다. 그랬더니 정말로 정각 2시가 되자 공원 정문으로 나와 있다. 좋았으! 얘를 다루는 법을 알아냈다.

  “시간에 딱 맞춰 왔네.”

  2시 전에 와서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나는 손을 흔들며 최희우 옆으로 갔다. 그런데 얘 좀 보게…… 인상 푹 쓰고 있는 건 둘째 치고, 이 화창한 봄날에 까만색 노스페이스 바람막이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푹 집어넣고 있다. 아무리 교육이 산으로 간다지만 여기는 학교가 아니잖아. 거기다 낡은 청바지를 입고, 원래 하얬을 운동화는 얼룩덜룩하다. 입술은 아무 것도 안 발랐는지 텄다. 그런데 또 신기하게 머리는 어제 그대로다. 이런 캐릭터는 어찌해야 할지……

  “왜 부른 거야?”

  별 수 없다. 2주 뒤에 죽을 거라는 얘기를 들은 이상, 나는 얘를 무조건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려면 기초공사부터 해두어야지. 인내심을 가지고. 돈을 들이더라도. 나는 사람 죽는 거 못 봐.

  “왜 불렀냐니까.”

  호오. 얘도 좀 짜증 낼 줄 아네. 지는 내가 뭐 물어봐도 무조건 노코멘트였으면서. 흠흠, 아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잠깐.”

  나는 검지를 세워서 입술로 갖다 댔다.

  “왜 불렀어?”

  “뭐?”

  “따라해 봐. 왜 불렀어?”

  “뭐 하는 거야?”

  “따라해. 왜 불렀어?”

  내가 자꾸 이러자 최희우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는다. 호오, 얘도 귀여운 구석이 있네.

  “해 보라니까. 손해 볼 거 없어. 왜 불렀어?”

  “왜…… 불렀어……?”

  결국 마지못해 중얼거리듯이 한다. 봐, 하면 되잖아.

  “좋아. 좋아. 좀 말하는 게 평범한 학생다워졌지? 자, 하는 김에 표정도 이렇게.”

  나는 눈썹을 조금 치켜세우고 눈 꼬리를 늘어뜨리며 입술 끝을 조금 올렸다. 그러자 최희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기야 갑자기 불러놓고 이유도 안 말해준채 말과 표정을 따라하라고 하니 미칠 노릇이겠지.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얘랑 뭔가 주고받고를 할 수 있다.

  “기왕 하는 거면 만나는 순간 손 흔들면서 웃어. 그리고 안녕이라고 말하는 거지.”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가 아니고…… 아, 아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혹시 밥 먹었어?”

  “……어.”

  참자. 아직 기초공사니까 힘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좋아. 그러면…… 따라와.”

  “……”

 

  따라오라고 해놓고 뒤돌아서면 따라올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였다. 이 방법 왠지 재밌는데? 아무튼 내가 발걸음을 옮긴 곳은 번화가에 있는 자주 가는 미용실이었다. 일단 오늘은 이 애의 외형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뜯어 고쳐줘야겠다.

  “……”

  미용실의 투명한 창문을 바라보고만 있는 최희우는 왠지 모르게 안절부절 못해 하는 것 같았다. 마치 미용실에 처음 와본 것처럼.

  “왜 이래. 미용실에 처음 와보는 사람처럼.”

  “……처음 와봐.”

  헐. 그런 사람도 있구나. 그럼 그 일정한 길이의 머리카락들은? 설마 집에서 자른 거야? 설마 이발소에서 자르지는 않았겠지. ……미용실에 못 가봤다는 얘기는 가난하다는 얘긴가? 그럼 내가 아픈 곳을 찌른 거야? 그러면 어쩌지? 침착하자. 내가 더 안절부절 못해서 어쩌자는 거야. 오늘은, 마음먹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내가 되어야 해!

  “구경하고 있지만 말고. 자, 빨리 들어가자.”

  최희우의 팔을 붙잡고 들어간 미용실은 뭐라 말로 형용하기 힘든 냄새로 가득했다. 그러니까 그냥 미용실 냄새, 라고 하면 다 알아 들을 냄새. 내가 들어가자 여러 번 얼굴을 마주쳐서 어느 정도 친해진 미용실 언니가 날 반겨준다.

  “어머. 몇 주 전에 왔었잖아. 또 커트하려고?”

  “아뇨. 얘가 하려고요.”

  내가 웃으면서 최희우를 가리키자 얘는 무슨 기겁하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버티고 서 있는 최희우를 나는 강한 팔 힘으로 빈자리에 앉힌다.

  “그럼 학생, 어떻게 하시겠어요?”

  미용실 언니가 천을 두르고 최희우에게 물어본다.

  “……”

  그럼 그렇지. 쟤가 어떻게 잘라달라는 말을 하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저…… 어떻게?”

  “……”

  미용실 언니는 거울로 최희우를 보고, 거울 밖의 최희우의 머리카락을 보고, 또 거울을 보고 하다가 아무 말도 없으니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나에게 눈빛을 준다. 저건 구원의 눈길. 내가 나서서 도와줘야지 뭐. 에휴……

  “얘가 이 헤어스타일에서 변한 적이 없거든요. 좀 지겨워해서. 얘한테 좀 어울릴만한 머리로 해주세요.”

  “아, 어울릴만한 머리로…… 괜찮으시겠어요?”

  최희우에게 묻자 무슨 곧 처형당할 사람처럼 체념하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그런데 좀 의외다. 이렇게 강제로 하게 했으면 발버둥 치면서 화내고 저항할 수도 있는데 내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 얌전하다. 뭐, 그러면 좋지.

  미용실 언니의 가위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최희우의 머리카락들이 조금씩 잘려나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최희우의 표정이 참 가관이다. 2주 뒤에 죽겠다던 그 때의 그 시크하고 당당하던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참……

  책상위에 있는 잡지를 한 장 한 장 슬슬 넘기면서 중학교 때를 한번 떠올려본다. 아무래도 최희우랑 같은 반이 된 적은 없다. 그건 확실하다. 그런데 1학년 때였나, 처음으로 최희우라는 이름을 애들이 말하는 걸 들은 적은 몇 번 있는 것 같다. 물론 좋지 않은 얘기였겠지. 3학년 졸업할 때까지 쟤는 왕따였을 것이다. 전교 왕따. 그걸 생각해 보면 내가 얼마나 학교생활을 설렁 설렁 했는지 알 수 있는 것 같다. 하, 맨날 학교에서 자기만 했으니……. 아니, 난 원래 평소에 뭐든 것에 시큰둥하고 무관심한 모습들을 보이는 것 같다. 아마 지금 우리 반에도 왕따, 혹은 그 비슷한 부류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들을 괴롭히는 부류의 애들도 존재하겠지. 그런데 나는 그런 애들의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른다. 그냥 우리 반 애들은 우리 반 애들이고, 나는 그냥 우리 반 애들이랑 두루두루 어색하지는 않게 인사하고 지낼 뿐이다. 아마 나랑 인사한 애중에는 최희우가 자살하게 한 원인을 제공한 애도 포함되어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뭔가 찝찝하다.

  ‘내가 잘못 살아왔나?’

  이런 회의감도 살짝 든다. 왕따 당한 애들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가 방관자들이라는데, 나는 어쩌면 방관자보다 더 심한 부류일지도 모른다. 아예 왕따인지 아닌지도 관심이 없는 자……

  “학생, 친구 머리 다 됐어. 이렇게 하니까 훨씬 낫네.”

  고개를 들자 미용실 언니가 최희우를 가리킨다. 최희우는 자신의 머리가 익숙하지 않은지 거울을 보며 만지작거린다. 근데, 오…… 역시 전에 하던 그 머리스타일은 안 하는 게 나았다. 지금의 최희우를 아까의 최희우라고 하기에는 괴리감마저 느껴졌다. 그래, 사람은 머리를 바꿔봐야 해.

  “어때?”

  “어……”

  “괜찮아. 원래 처음에는 쫌 어색한 거야.”

  계산을 하고서 쭈볏 쭈뼛하고 서 있는 최희우를 잡아끌고 밖으로 나왔다.

  원래 일요일까지 최희우와 만날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아침에 엄마 심부름으로 장을 보러 가는 길에 최희우와 마주쳤다.

  “……”

  “안녕? 어디가?”

  그래. 니가 먼저 인사해 줄 거라곤 발톱의 때만큼도 기대 안했어. 그렇지만 그렇게 우울한 표정으로 나를 맞아줄 거라고도 생각 못했지.

  “……”

  정말로 최희우의 표정은 우울해 보였다. 달라진 머리스타일 때문에 훨씬 예뻐진 것 같고, 밝아 보이는 이미지가 되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는 저 표정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저런 표정을 지을 수가 있지? 전쟁영화에서 피난 가는 애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면 분명히 캐스팅 될 수 있을 거야.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

  “……”

  그래. 그래. 더 이상 물어보면 내 인내심 자가진단을 할 뿐이지. 그런데…… 저 표정, 왠지……

  “그럼 잘가……”

  - 나 2주 뒤에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

  “잠깐만!”

  머릿속에서 불안한 생각이 계속되었다. 그 때 그 시크하고 당당하던 표정대신 저 우울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2주 뒤에 뛰어내릴 거라는 말이 무게감 있게 느껴졌다. 그래. 내가 너무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초공사부터 시작이라니. 2주도 짧은 시간이지만 꼭 2주 뒤에 죽을 것이라는 법도 없었다. 뭔가 급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다. 그래, 죽으면 안 돼. 살아있는 것은 행복한 거라고. 이 생각을 쟤 머릿속에 빨리 심어주어야 한다.

  “오늘 시간 돼? 아니, 오늘 놀이공원에 가자. 이 근처에 새로 생긴데 알지? 거기에 입구로 3시까지 와. 알았지?”

  나는 말을 하면서 뛰어갔다. 이 방법밖에는 없다. 그런데…… 무슨 콩트하나. 주위에서 보면 미친년인 줄 알겠네.

  “어흐, 창피해.”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시끌벅적한 놀이공원은 나도 오랜만에 와 보는 것이었다. 하얀 돌로 만든 길과 형형색색의 반짝이는 놀이기구들은 나를 초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간간히 불어오는 봄의 따뜻한 바람과 적당한 햇살은 이 상황의 화룡정점이었다. 아니지, 아직 용이 완성되려면 멀었다.

  “늦네……”

  시계는 3시가 넘었다고 알리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최희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4시……”

  입구 바로 앞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파르페 하나를 시켜서 입안에서 천천히 녹여 먹으면서 기다렸지만 최희우의 모습은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진짜 안 오려나.”

  오늘 오전부터 시작된 두려움이 조금씩 커졌다. 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떨어지면 무조건 즉사인 절벽을 지우느라 무진장 애를 썼다.

  “에이!”

  나는 카페에서 나와 놀이공원 밖에 있는 호숫가에 있는 벤치에 가서 앉았다. 바람이 불어오니 아까의 불길한 생각들도 조금씩 지워지는 것 같았다.

  “전교 왕따……”

  어쩌면 내가 그 애의 기분 같은 것들을 전혀 생각을 안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전혀 생각을 하지 않지. 못하니까. 평소에도 그런 애들한테 관심 같은 것은 가져본 적 없고 무심하게 지냈으니까. 어쩌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엄청나게 부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일 수도 있다.

  “그래도 어떡해.”

  난 걔가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내가 슈퍼맨처럼 빛의 속도로 날 수 있어서 떨어지는 최희우를 구할 수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걔의 죽고자하는 마음을, 환경을 바꾸어 놓으려는 나 나름의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게 나쁜 것일까.

  “푸드득.”

  새가 호수위에 물결을 일으키며 날아갔다. 물결은 석양의 붉은 빛을 바스러트렸다. 그리고 나는 벤치에 앉아 있던 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무래도 오늘의 작전은 실패다. 그럼 별 수 없지, 뭐…… 어?

  “악!”

  나는 내 바로 앞에 석양으로 얼굴이 발개진 사람의 얼굴을 보고서 놀라서 벤치에 다시 앉았다. 그런데 나를 놀래킨 사람을 확인하고서 다시 한 번 놀랬다.

  “너…… 넌, 사람 놀래키는 게 취미냐!”

  내 앞에는 최희우가 서 있었다.

  “너 시간도 안 지키고……”

  말을 하면서 최희우를 바라보다가 또 놀랬다. 얼굴은 최희우가 확실한데 다른 것은 모두 최희우가 아닌 것 같았다. 머리카락은 막 잘라서 붕 떠있던 어제와는 다르게 잘 정리되어 있고, 옷은 내가 사준 분홍색의 잠바를 입고 역시 내가 사준 치마에다 깨끗한 흰색의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그런 옵션들을 장착하자 정말 열여덟 살답게 되었다. 그런데…… 뭐지? 이 뿌듯한 감정은? 저 옵션들을 코디해준 사람이 누구였지? 후후.

  “니가 6시까지 오라며.”

  아, 나의 뿌듯한 감정을 깨버리는 저 다이아몬드도 부술 것 같은 딱딱한 말투와 목소리여. 하지만 뭐 괜찮다. 왔으니까. 절벽 위로 간 게 아니니까. 아마도 내가 달려가면서 말해서 잘못들은 것 같은데…… 잠깐만, 근데 어떻게 해야 3시와 6시를 혼동할 수가 있는 거지?

  “왜 여기로 부른 거야?”

  아, 신이시여. 내가 분명 어제 그렇게 가르쳤거늘. 그 정도면 강아지도 알아듣는다.

  “왜 불렀어, 라고 말하라 했지? 뭐, 그건 됐고. 뭐 하러 여기로 불렀냐니. 당연히 놀려고 불렀지. 좀 늦긴 하지만…… 야간 개장도 하니까.”

  나는 최희우의 팔을 잡고서 놀이공원 입구로 걸어갔다.

  “이거 타자. 나 꼭 이거 한번 타보고 싶었어.”

  내가 가리킨 것은 텔레비전만 틀면 광고로 나오던 높다랗고 구불구불한 롤러코스터였다. 그런데 내말을 들은 최희우의 표정은 뭔가 똥을 씹은 표정이다. 그것도 아주 구린 똥.

  “왜 그래. 이런 거 못 타?”

  “……멀미 날 것처럼 생겼어.”

  아, 그러세요. 2주 뒤에 높다란 절벽 위에서 떨어질 예정이신 최희우님? 정말이지 이런 캐릭터는 뭐지?

  “멀미 안 나. 타다 보면 익숙해지는 거야. 빨리 가자.”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섰다.

  “찰칵.”

  내 옆에 탄 최희우의 좌석벨트가 채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후후, 난 니가 올 거라고 예상했지.

안전 바가 내려오고 안내원의 출발한다는 소리와 함께 조금씩 바람이 느껴졌다.

  “후후후. 기대된다.”

  즐거운 나의 표정과는 달리 최희우는 정말로 죽으러가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표정 풀어. 괜찮아.”

  하지만 나의 운도 지지리 없는 위로는 서서히 위로 올라가는 상황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나는 될 되로 되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즐길 준비를 했다. 이제 곧…… 곧…… 이 세상에서 가장 짜릿한 느낌을 받으며 떨어진다!

  “꺄아 !”

  기구에 타고 있던 최희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른다. 너무 짜릿하니까!

  “와아아!”

  떨어진 기구가 옆으로 급회전을 하다가 다시 위로 올라갔다가 떨어진다. 그리고 다시 우회전! 좌회전!

  “와아!”

  “와아! 하하하!”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건 최희우 목소리? 힘들었지만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정말로 최희우가 바를 손으로 잡으면서 소리를 지르면서 웃고 있었다.

  “꺄아!”

  “와아아!”

  “와하하하!”

  여러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들 사이에서 유독 최희우의 소리만 귀에 크게 들렸다. 마치 주변의 풍경이 손으로 문지른 것처럼 보였다. 최희우의 소리를 제외한 다른 소리들도 점점 작아졌다.

  “와하하하!”

  내가 밥을 먹으러 가자고 말하고 걸어가자 최희우는 아무 말도 없이 따라왔다. 하지만 나는 이번의 침묵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쫌 쪽팔린 거지. 흐흐. 롤러코스터를 타고 난 후의 최희우는 외모뿐만 아니라 말하는 것, 표정까지도 내가 알고 있던 최희우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의 손을 이끌면서 이것타고 저것타고 재밌었던 것 또 타자고 하는 통에 오히려 내가 더 빨리 지쳤다.

  “이 집으로 들어가자.”

  최희우는 자신도 타는 것에 지쳤을 때 자신이 평소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뒤로 말이 없다.

  주문한 볶은밥이 나오고 최희우는 말없이 먹기만 했다. 나는 평소라면 밥을 입에 쓸어 담았을 테지만 오늘은 왠지 별로 손이 가지 않았다. 미칠 듯이 내장을 휘저어놓은 놀이기구 때문이기도 했지만, 오늘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니 뭔가 배를 행복하게 가득히 채워놓은 느낌이 들어서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것 같았다.

  ‘그래. 계속 오늘처럼.’

  “그럼 잘 가.”

  “……”

  으휴, 아직도 쪽팔린 거냐, 아니면 평소의 니 모습으로 완전히 되돌아 간 거냐. 하여간……

  “오늘 재밌었지? 또 가자.”

  “……”

  “언제가 좋을까?”

  “……”

  “우리 모의고사 치는 날 있잖아.”

  “……”

  “그래, 다음 주 금요일!”

  “……”

  “그때 만나!”

  나는 마지막 말을 하고서 잽싸게 뒤를 돌아서 갔다.

  내가 최희우의 죽음과 사투를 벌이든 말든 학교생활은 다시 시작되었다. 모두 놀토와 일요일의 환상적이지만 짧은 휴일을 보내고 피곤한가 보다, 라고 생각했으나 수업시간에 골골대던 녀석들이 쉬는 시간이 되자 벌떡 일어나 수다를 떠는 것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멍하니 교실을 보고 있는데 희정이가 내 앞에서 멈추었다. 희정이를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자 다짜고짜 나에게 따라 와보라며 말하고 교실 밖으로 나간다. 뭐야, 요즘 이런 게 유행인가?

  “너, 문자로 다른 애랑 약속 있다던 걸 까먹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는데, 그 애가 8반의 최희우 맞지?”

  아니 얘가 내가 안 보던 사이에 마법을 익혔나? 그건 그렇고 최희우 반이 8반이었구나.

  “말해봐. 맞지?”

  나는 딱히 죄지은 것도 아닌데 보일락 말락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토요일에 최희우랑 번화가에서 옷 사러 다닌 것도?”

  또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는 채. 그러자 희정이는 이걸 어찌하면 좋냐는 표정을 짓는다.

  “어떻게 안 거야? 그리고 그게 뭐?”

  “우리반 애들 중에 한 명이 니가 최희우랑 같이 다니는 걸 봤대. 난 니가 그 말에 신경도 안 쓰기에 그냥 애들이 거짓말한 걸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그렇고 그럼 토요일에 우리랑 못 논 것도 최희우랑 같이 있어서였어?”

  “……뭐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 걔랑 약속을 먼저 했었거든.”

  아, 나의 뛰어난 언변술도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구차한 변명밖에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말에 신경도 안 쓰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못 들은 것이었다. 하긴, 당사자에게 알려지도록 소문이 퍼지고 있었을 리가 없지.

  “그래…… 그건 뭐 그렇다고 쳐. 근데 왜 걔랑 같이 다니는 거야? 나도 걔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는 건 없지만, 애들이 말하는 거 보면 별로 좋은 말들이 들리는 것도 아니고. 그런 애랑 같이 다니면 너도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

  같이 다니는 이유. 그건 무덤 속으로 기어들어가 백골이 진토가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해도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희정이의 말을 듣고 있자니 가슴의 한 구석이 조금 이상하다. 뭔가 꾸물꾸물 한 것들이 올라오는 것 같은.

  “후아.”

  내 목구멍에서 올라온 숨은 진실 된 숨이었다. 5교시를 늦게 마친 생물 때문에 나의 장이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는 천국. 그런데 물을 내리는데 바로 옆 칸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그동안 돈 없다더니…… 요거, 요거, 머리도 잘랐네?”

  나는 살짝 얼어붙은 상태가 되었다. 다만 귀는 활짝 열려서 옆 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새로 산 잠바, 존나 좋아 보이더라? 그게 내가 입는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천국이었던 곳이 곧바로 지옥으로 바뀌었다. 나는 곧바로 문을 열고 뛰쳐나가는 것을 꾹 참고 있었다.

  “새끼야, 내가 물으면 쳐 말하라고! 그리고 뭘 야려, 이 새끼야. 눈 안 깔아!”

  문이 열리고 밀치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 안에 있던 애들이 긴장된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난 말이지. 너의 그 개썅년같은 눈까리가 마음에 안 들어. 눈 깔아라고 이 새끼야!”

  뭔가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참고 있던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야!”

  내가 화장실 문을 열고 부르자, 욕을 하던 애는 뭐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표정이 슥 하고 굳었다. 그러더니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뭐.”

  “걔한테 왜 그래? 빨리 걔한테서 떨어져.”

  그러자 욕을 하던 애는 이건 또 무슨 일이야,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리고 얘 잠바 손대지마. 없어지면 니 책임이다.”

  나의 마음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평소에는 어떤 사건이 벌어져도 나서기 싫어했었는데. 오늘은 용감해지기까지 했다. 욕을 하던 그 애는 욕을 낮게 지껄이더니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뭐 하러 이렇게 서있어? 빨리 가자. 종치겠다.”

  나는 멍하게 서있던 최희우의 등을 슬쩍 밀어주었다.

  “너,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싸웠다며.”

  “또 애들 사이의 소문이야?”

  아무래도 이런 애들의 사이에서 조용히 살기는 그른 것 같다.

  “싸운 게 아니고. 걔가 최희우한테 쌍욕질하고 협박하기에 그냥 하지 말라고 말했을 뿐이야.”

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소문은 희한하게 퍼질게 분명하다. 소문이라는 게 감기바이러스보다 돌연변이를 잘 일으킨다. 그리고 나는 소문을 감기바이러스보다 싫어하지.

  “강지수가 니가 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따랐다고?”

  아, 걔 이름이 강지수인가. 이름은 예쁜데 성격이 지랄같구만. 뭐, 아무렴 어때.

  “……너 왜 그렇게 최희우한테 집착하는 거야?”

  집착?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나도 같은 학생들끼리 서로 왕따시키고 하는 거, 안 좋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강지수 같은 애들은 일반적인 상식은 안 통하는 애들이야. 그런 애들 건드려봤자 좋을 건 없어.”

  “좋을 건 없어? 너도 참 웃기네. 왕따 안 좋게 생각하고 있다면서 니 몸은 사리는 거야? 물론 어떤 사건이 터지든 딱히 상관안하고 있었던 내가 말하는 것은 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너도 말을 그렇게 하는 건 아니야.”

  나는 말을 뱉어내고서 다음 시간 교과서를 챙기기 시작했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희정이에게 내가 물어보고 싶었다. 너는 팔짱끼고서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최희우한테 안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거야. 니가 강지수한테 뭐라고 말했다고 해서 뭐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 걔가 화장실에서는 그냥 넘어갔다고 쳐도, 교실에서는? 8반 교실에서는 걔가 왕이야. 걔 말이 곧 법인 미친 곳이라고. 아까 니가 하지 말라고 했을 때 걔는 아마 엄청 열 받았을 거야. 그럼? 당연히 최희우한테 분풀이를 하겠지. 어차피 지금 8반 교실에는 니가 없고, 강지수 아래에 있는 8반 애들만 있을 테니까. 당연히 그 애들한테는 그게 평범한 일상일거고, 평범한 일상이 소문이 돼서 우리 귀에 들어올 리도 없어.”

  희정이의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러면…… 그러면 나보고 어쩌라고.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고? ……최희우는 다음 주에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는데?

  저녁시간에 저녁을 먹지 않고 급식실 출구에서 서있었다. 그러자 최희우 혼자서 어슬렁어슬렁 급식실의 창백한 불빛을 배경으로 삼아 앞쪽으로는 어둠을 껴입고서 걸어 나왔다.

  최희우는 나를 보더니 잠시 멈칫하더니 나를 못 본척하며 지나가려고했다. 나는 그런 최희우의 어깨를 잡았다.

  “기분도 꿀꿀한데 밖에 좀 나가자. 따라와.”

  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홱 돌려서 걸었다. 그러자 뒤에서 따라오는 최희우의 그림자가 교실의 불빛 덕에 길게 늘여져서 내 시야에 들어왔다. 이것이 희우와 나의 의사소통.

  “마실래?”

  김이 조금씩 올라오는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자판기에서 꺼냈다. 참내, 처음 만났던 그 때를 떠올리게 하듯이 노코멘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희우의 손에 종이컵을 쥐어주었다.

  “후우……”

  나는 한숨을 내뱉으면서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면서 힐끗 힐끗 희우를 바라보았다. 머리 상태나 옷 상태로 봐서는 맞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사준 잠바도 그대로 입고 있다. 내 가슴속에 있던 무겁던 돌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너……”

  “앞으로 이러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평소라면 먼저 긴 말로 말한 희우를 보며 놀라야 하겠지만 왠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냥 아까 가벼워진 돌이 다시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무슨 말이야.”

  “아까 봤잖아. 나 확실하게 왕따당하는 거. 화장실에서 강지수가 그냥 넘어가기는 했지만 다음에는 너한테도 어떻게 할지 몰라.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말 걸지도 마.”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는 나를 뒤에 두고 희우는 무심한 표정으로 슥 돌아서가버렸다. 이것이 희우와 나의…… 의사…… 소통.

  “으아악!”

  나는 악몽을 꾸면서 일어났다. 벌써 몇 번짼지……. 아마…… 희우가 학교를 나오지 않은 날짜와 같을 것이다.

  그 때의 그 저녁시간 이후에 바로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나는 그 때의 그 상황에 대해 삐쳐서는 연락도 하지 않고 찾아가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소문. 그 소문 때문에 희우가 학교에 그날 이후부터 나오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화를 해보아도 꺼져있을 뿐이었다. 그 소문을 들었던 날, 나는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야자도 째면서 가방을 들쳐 매고 맨 처음 희우와 걸었던 그 길을 더듬더듬 기억해내며 주황빛 가로등으로 비추어지는 어두운 길을 뛰어갔었다.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안 돼. 정말로…… 정말로 떨어지려고 하는 거라면…… 안 돼!’

  속으로는 이렇게 외치면서. 숨이 차서 헐떡대며 가방이 열려 책들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는 채 달렸다.

  “어, 어디 갔지?”

  없었다. 아무리 찾아 봐도 없었다. 내 기억은 정확했다. 이 가로등에서 왼쪽으로 돌면 아파트가 나오고, 그 아파트 뒤에 그 때 희우가 달려서 들어갔었던 그 뒷산이 나온다. 그런데 없다. 아파트 뒤에 있는 것은 산이라고 하기 뭐한 황량한 낮은 언덕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불도저가 시동이 꺼진 채로 잠들어 있었다.

  나는 노란색 출입금지 테이프를 넘어서 언덕위로 올라갔다. 높다란 절벽도, 커다란 바위도, 알 수 없는 새소리도, 커다란 보름달도 없었다. 희우가 사라진 것처럼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최희우를 왕따에서 구해줄 거였지? 그럴 거였다면……”

  체육시간의 날씨는 내 기분과 어울리지 않게 햇살이 눈부셨다. 자유 시간을 받은 아이들은 모두 하나 같이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중에도 왕따란 것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 애를 괴롭히는 녀석들도.

  “더 일찍 그러지 그랬어. 일학년 때부터 말이야. 걔, 내가 알아보니까 일학년 2학기 시작될 때쯤 중학교 때 전교 왕따였다는 소문이 돌고 나서부터 그렇게 됐나봐. 그래, 또 소문이지.”

  희정이는 폰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그런데…… 그런 거였나. 그냥 중학교 때 왕따였으니 고등학교 와서도 왕따를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그런 논리가 적용이 될 수도 있는 건가. 몰랐다. 관심이 없었으니까. 아마 희정이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만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저 나는 외모만 바꾸어지면, 그 애의 성격과 말투, 행동만 바뀌어 지면 다 해결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가. 마치 왕따당하는 사람한테 너에게 잘못이 있으니 너 자신을 바꾸어 보라는 말과 같지 않나.

  그래, 내가 이런 사람이다. 누구에게도 관심도 없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사람. 희우와 가까이 지낸 것도 어쩌면 내가 힘들어 질까 봐,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이기적인 행동.

  “걔는 말도 안 통하는 그런 애라며. 내가 그래 봤자 별 소용없을 거라며.”

  “아니, 내 생각에 걔는 별 수 없이 니 말을 들을지도 몰라.”

  “그게 무슨 소리야?”

  “너 1학년 때 한번 싸웠던 적 있잖아.”

  희정이의 말에 1학년 초기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나의 무심함에 지금껏 잊혀 진 일. 그 때 나와 싸웠던 애는 최수나라는 애였다. 걔가 자꾸 시비를 걸기에 한번 싸웠던 것이다. 싸움은 의외로 나의 승. 그 때 이외에 그렇게 많은 피를 본 적은 없었다. 내 손이 최수나의 코로 향했었고, 결국 병원까지 갔었다. 나와 그 애의 부모님이 오시고, 여러 가지 시끄러웠지만 어떻게 나름 해결되었다. 최수나는 나와 같은 반이었는데, 그 후로 반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평소에도 그랬지만 그 후로 더욱 더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무관심해졌다. 그런데 내가 그 때 조금 놀랐던 것은 그 최수나라는 애가 1학년 중에서 싸움 좀 한다는 애였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냥 좀 놀랐을 뿐 무관심하게 그 말을 흘러 넘겼다.

  “그 때 그일 뒤로 너, 체구에 비해서 힘 장난 아닌 애라고 한창 떠들썩했었어. 물론 너는 몰랐겠지만. 강지수는 그 최수나라는 애보다 아래야. 아마 너하고 싸우기는 싫어서 최희우를 가만 내버려 뒀을지도 몰라.”

  그랬구나. 나에게 그런 이미지가 있는 줄은 몰랐다. 우리 반 애한테 부탁 좀 하면 잘 들어주고 무섭게 생긴 애들도 나랑 눈은 안 마주치기에 그냥 그러려니 했었는데 지금 희정이의 말을 듣고 나니 나의 시야가 달라졌다.

  ‘어쩌면……’

  나는 최희우보다 더 외톨이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얘기 하는 애도 희정이 하나. 그리고 나는 내 자신이 학교에서 어떤 애인지, 내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왕따인 사람 앞에서 구세주 역할을 하려고 했나?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다. 나 자신도 모르는 사람이…….

  오늘이 모의고사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웠다. 단순히 시험을 친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늘이…… 바로 그 2주 뒤인 것이다. 그 절벽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 지금 절벽에서 미리 기다리면서 희우를 막는 방법도 사라져버렸다. 지금 세상이 희우의 자살을 돕고 있는 것인가? 이런 망할.

  “종료시간 10분 전입니다.”

  시험 감독 선생이 10분 남았다고 말했지만 내 답안지와 시험지에는 연필 자국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시험지를 슥 한번 보고서는 내키는 대로 답안지에 마킹을 했다.

  내가 시험시간을 의식하고 있지 않자 시간은 미칠 듯이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그런 시간을 저주했다. 하지만 그런 나와 상관없이 수리 영역, 점심시간, 외국어 영역이 흘러가고 순식간에 탐구 영역 시간이 끝나자 청소시간이 시작되었다. 나의 청소 구역은 정문 앞이었다.

  “슥, 슥.”

  빗자루로 쓸고는 있었지만 쓰레기 때문에 쓰는 것이 아닌 그저 일정한 반복된 행동일 뿐이었다. 머릿속은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가 않았다. 무슨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머리만 아프고 생각은 만들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옆에서 빗자루를 쓸고 있던 애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서 나는 기계적인 행동을 멈추었다.

  “옆 반에 그 전따있잖아. 최희우인가? 걔 혹시 자살해버린 건 아니겠지?”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야, 그럼 우리 등수도 올라가나?”

  “설마. 아마 걔 평소에도 우리 밑이었을걸? 걔가 우리보다 잘할 리가 없잖아.”

  웃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목에서는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평소에 나는 우리 반 애들이나 그냥 만나는 애들마다 모두 두루 두루 친하게 지냈었다. 그냥 다 사람이고, 학생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이라 여기면서. 그런데 내 앞에 이런 썅것 같은 것을 농담이라고 웃고 있는 애들이 있다. 이런 애들 때문에 한 사람이 죽는 것도 모른 채 나도 그냥 따라 웃으면서 인사나 하면서 지냈다. 순간적으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가까스로 참아내자 이제는 분노가 밀려올라왔다. 나는 그 분노를 참지 못하고 웃고 있는 애를 밀었다. 갑자기 밀침을 당한 그 애는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악!”

  놓치지 않고 그 애 위에 올라탔다. 나는 무슨 일인지 몰라 공포에 질린 표정을 보았다. 동정심 대신 오히려 더 화가 났다. 마치 죄 없는 나한테 왜 이러냐는 것처럼 보여서.

  “사람 죽는 거 가지고 쳐 웃지마!”

  나는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쳐들었다. 그러자 그 애는 눈을 감았다.

  “헉! 헉!”

  거칠게 내뱉던 숨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들고 있었던 주먹을 풀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얗게 질려있는 애를 무시하고 뒤돌아서서는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툭!”

  빗자루는 날아가서는 풀숲으로 떨어졌다. 나는 천천히 교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마음은, 머릿속은 여전히 공허했다. 아까의 분노는 이제 다른 감정으로 변하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던 나는 처음으로 마음 놓고 큰 소리로 울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럼 마치자. 반장.”

  차렷, 경례 소리와 함께 나는 인사하는 동시에 가방을 메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한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눈을 뜨자 내가 갈 곳이 보이지가 않았다. 내가 지금 어디를 가고 싶어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맘 같아서는 그 절벽으로 뛰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갈 수가 없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전화가 왔지만 별로 받고 싶지가 않았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끈질기게 오는 전화의 진동을 느끼다가 무심코 휴대폰을 꺼내어 액정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액정을 본 순간 나는 허겁지겁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여보세요.”

  스피커에서는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어디야!”

  “그 절벽 위.”

  “……”

  결국. 결국 희우는 그 절벽위로 올라가 버린 것 같다. 나는 뭐라고 말하려 하지 않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어차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도 아니었다.

  “뛰어 내리려고?”

  “그래.”

  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길고 긴 침묵. 가능하다면 나는 이 침묵만이라도 길게 이어졌으면 하고 바랬다. 끊지는 말자. 끊지는 말자. 끊지는 말아. 제발.

  “그 동안 말은 못했는데…… 고마웠어.”

  “……”

  “사실 맨 처음 니가 전화해서 날 불러냈던 날. 그날. 니 행동을 보고 나는 알았어. 내가 진짜 2주 뒤에 죽을까 봐, 그럴까 봐 안 죽게 만들려고 머리도 잘라주고 옷도 코디 해주고 그랬다는 거. 그날…… 니가 진심으로 나를 친구로 생각하고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진짜 행복했어. 친구처럼 행동해주고 웃어주고 한 것 그런 상황들이 정말 꿈만 같았어.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친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바보같이. 정말 바보같은 소원이었지.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 다음날에 죽으러 가려고 했었어. 그런데 거짓말같이 니가 나타나서 나한테 말을 걸어준 거야. 3시에 놀러가자고 하면서. 그날 3시에, 절벽위에 올라가 있었어. 죽으려고. 그런데 뛰어내리기 전에 갑자기 고민이 되는 거야. 가고 싶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거였어. 누구랑 같이 미치도록 한 번 놀아보고 싶은 거. 그래서 헐레벌떡 뛰어갔어. 니가 가버렸을까 봐. 다른 사람이라면 갔겠지? 그런데 너는 있더라. 그날, 정말 최고로 행복했어.”

  희우의 말을 듣고 있자니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니가 강지수한테서 구해준 날, 그날 나는 어쩌면 내 바보 같은 소원이 이루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 때 문득 다른 생각도 들었어. 내가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나는 좋지만, 너에게는 좋을 것이 하나도 없을 거라는 그런 생각.”

  그래. 희정이도 그런 말을 했었다. 좋을 게 하나도 없을 거라는. 나는 묵묵히 희우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 고마웠어. 정말로 고마웠지만 절대 남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하고서 죽는 것도 폐를 끼치는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너의 고등학교 생활을 망치고 싶지는 않아.”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아, 나 힘도 엄청 세다고, 너 때문에 망칠일은 없어. 라고 하면서 농담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런 목소리는 만들어 지지도 않았다.

  “……어쨌든, 머리 고마웠어. 옷도, 잠바도, 신발도, 놀이공원에 데려가준 것도, 저녁 사준 것도…… 나 대신에 나서준 것도…… 그리고…… 그리고……”

  아까의 두근거리던 가슴은 이제 떨리기 시작했다. 왜일까. 왜일까. 왜…… 가슴이 고동치고 있을까.

  “……너한테 지우개 빌려줬던 그날,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나. 내가 미친 사람처럼 행동한 거, 그냥 니가 나를 수학시간에 이상하게 봐서 일부러 나한테 관심가지지 말라고 그런 거였는데…… 니 행동에 놀랐었어.”

  그래. 나도 기억이 난다. 그 때 지우개 빌렸던 것을 이제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럼.”

  “……”

  “정말로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었는데, 매일 매일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빌었었는데, 처음으로 너랑 있는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정적 속에서 나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었다.

  “……”

  “……”

  “나.”

  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떨리는 목소리. 나의 심장은 더 떨리기 시작했다.

  “못 뛰어내릴 것 같아……. 정말, 정말 학교생활이 끔찍한데,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못 뛰어내리겠어. 계속…… 계속 그 행복했던 기억만 떠올라서……”

  이제야 내 가슴이 왜 뛰었는지 알 것 같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행복해서 못 죽겠다는 말을 듣고 있는 지금, 나는 최고로 행복한 것 같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처음으로 입을 뗐다.

  “오늘 약속잡은 거 기억하고 있지? 그때 내가 말했던 시간, 6시까지 와. 3시가 아니야. 이번에는 잘못 듣지 마. 6시까지야.”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이제 희우는 올까, 하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다. 올 것이다. 이제는 올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래…… 좋아.”

  놀이공원에서 최고로 행복했다고 했던가. 그런 소소한 행복으로 최고로 행복했다고 말하면 쓰나. 내가 평생 기억에 남는 행복을 만들어 줄 것이다. 기억 안 하고는 못 베기도록.

  바람이 불어왔다. 어제도 그랬고, 그저께도 그랬고, 저번 주에도 그랬겠지만 따뜻하다. 나는 바람을 만끽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꽃다운 나이라는 말이 있다. 꽃은 저절로 피지는 않는다. 누군가가 물을 주고, 정성스레 가꾸어 주어야 꽃은 아름답게 피어난다. 아니면 시들거나 영원히 꽃봉오리일 뿐. 지금 어디선가 꽃이 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물도 주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시간아 멈추어다오, 하는 마법의 주문을 외는 소리만 들리면 된다. 멈추고 싶은 열여덟, 그런 생각이 들도록 만들고 싶다.

  그래, 열여덟 살이 영원하도록.

한 장의 날개
한 장의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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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

도피   “모르겠어…….”   나는 작게 소리 내어 말했다. 방안에 혼자 있는데다 엄마는 TV를 보고 있고, 아빠는 야근에다 창밖은 별 한 점 없이 컴컴했지만 어디선가 그거 하나 못 풀어서 대학 어떻게 가려고 그러냐는 소리가 들릴까봐 조용히 말한 것이다.   “후……”   샤프를 소리 없이 문제집 옆으로 굴려서 해방시켰다. 그리고 문제집을 째려보았다. ‘순간변화율’이란 놈이 ‘미분의 곱’, ‘도함수’ 친구들로는 모자랐는지 이젠 ‘전하량’까지 데리고 나왔다.   “어이! 학생. 이것도 못 풀어? 이걸 봐봐. 이걸. 별 3개짜리야. 이래가지고 대학……”   나는 계속 나불대던 문제집을 덮어버렸다. 닥치라고 하려던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도로 삼켜버렸다. 그리곤 문제집 더미 속에 끼어있던 공책을 꺼냈다. 몇 장을 슥슥 넘기자, 글자들이 빽빽하게 써져있었다. 소설. 그냥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막 휘갈겨놓은 것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건 나의 소설집이다. 단편도 있고, 장편도 있고, 구상만 잔뜩 써놓고 중간에 그만 둔 것도 몇 개 보였다. 이것들은……   “진훈아! 숙제 다 했어?”   엄마의 목소리는 두꺼운 문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뚫고 들어와서는 내 귀를 때렸다.   “어, 응.”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숙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공책을 꽂아놓고 덮어두었던 문제집을 다시 펼쳤다. 그러자 문제집이 또 나불대기 시작한다.   “여, 학생. 빨리 빨리 풀어야지. 안 그래? 학원에 있는 수학선생 무섭잖아. 안 풀어온 문제 하나당 한 대씩 패고. 그치? 그러니까 내 말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거야. 너도 잘 알잖아? 그 수학선생 힘세다는 거. 맞으면 아프잖아. 맞는 것 보단 지금 빨리 집중해서 다 푸는 게 낫지 않냐? 안 그래? 그리고……”   다시 문제집을 덮어 버렸다. 듣기 싫었지만 다 맞는 말이다. 안 풀면 맞는다. 그런데 왜?   “왜 일까?”   나는 왜 맞아야 할까? 내가 한 문제를 안 풀어오면 - 몰라서 못 풀었다 하더라도 - 나는 나보다 덩치가 두 배쯤은 커 보이는 수학선생에게 매를 맞는다. 이건 정당하지가 못하다. 엄마한테 말했더니 돈을 받았으니 어떻게 해서든 공부를 시켜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고, 자기 학원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두 가지 대답 모두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힘든 학원생활을 조금이라도

  • 한 장의 날개
  • 2012-02-10
지팡이소리

지팡이소리 1   “쯧쯧, 세상 말세야. 어떻게 경찰이……”   “그러게. 국민들을 지켜야할 경찰이 저렇게 되니까 이거 어디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뒤로 하고서 우신과 태준은 신발을 신고 장례식장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아직 태양이 완전히 지지 않아 주황빛과 노란빛으로 꽤나 아름다웠다.   칙       태준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서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마신 뒤 후, 하고 불자 연기가 공중에 엷게 퍼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서 우신은 미간을 찌푸렸다.   “끊는다며.”   우신의 말에 태준은 마치 자신이 담배를 핀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담배. 안 끊어지더라고.”   몇 모금 더 빨아 마시고서 아직 불이 붙은 담배를 쓰레기통에 비벼 꺼버리는 태준을 보며 우신은 그래도 이해가 간다고 생각을 했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형사라는 직업, 어떻게든 스트레스를 풀어야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 막 경찰관의 장례식장에서 나온 직후였다. 태준도 우신도 여러모로 심경이 복잡했다.   “이번 사건, 우리 담당 맞지?”   “맞지.”   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뭘 해야 하지?”   뭘 해야 하지? 이 질문에 우신은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그냥 평범한 살인사건이라면, 즉 범인이 잡히지 않은 상태라면 아주 할 일이 많았다. 증거 수집과 탐문 수사 등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별로 할 것이 없었다. 범인이, 사건 발생 한지 12시간 채 되지 않아 잡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엔 뭔가 이상한 게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이상한.   “일단 어제 범인이 잡혔으니까, 장례식도 다녀왔고, 이제 다시 한 번 사건현장에 가봐야지. 여기랑 가까운데. 범인 취조도 해야 하고.”   “사건 현장? 증거물 수색 다 끝났잖아. 그리고 취조도 이미 했고. 취조한 결과는 영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야지. 사건 현장에 다시 가보자고.”   그 말에 태준은 바지를 털면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하늘을 보자 오늘의 해가 곧 저물 기세였다. 매일 매일 꿋꿋이 오는 고단한 하루가 저 저무는 해처럼 빨리 지나가버리길 태준은 그렇게 빌었다.   “왜 그렇게 빨리 장례식을 시작 한 건지…… 단서가 더 있을지도 모르는데.”   “유족들이 빨리 시신을 돌려달라고 했잖아. 부검도 빨리 끝났고. 게다가 범인도 바로 잡혔잖아.

  • 한 장의 날개
  • 2011-12-20
폭풍

폭풍   저녁노을이 태워버린 듯한 검은빛 구름들이 걸린 붉은 하늘이 이학년 삼반 교실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왔다. 어느새 주황색이 되어버린 햇빛은 앙상한 빈 책상, 의자 다리들의 그림자를 길게 잡아 늘어뜨렸다. 그 그림자들이 학생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들을 유일하게 메워주었다.   “사각 사각.”   그림자위로 연필이 움직이는 소리가 합세하였다. 불 꺼진 교실 안, 왼쪽 창가 맨 뒤에 앉은 진우의 손은 종이 위에서 연필을 쥔 채 열심히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그리고 이따금씩 손이 아파와 팔을 흔들기도 했다.   “야! 다했어?”   뒷문이 벌컥 열리면서 붉은 햇살을 등진 기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진우는 그림자에 둘러싸인 기수의 모습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얼씨구.”   기수는 신발을 벗지 않고서 교실로 들어와 진우 쪽으로 뚜벅 뚜벅 발소리를 내면서 걸어갔다.   “아직 다 안 했지?”   기수가 진우 옆자리의 의자를 소리 나게 끌어당기고서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기수의 대답에 진우는 엷게 웃으며 또 한 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얼만큼 쓴 거야? 우와, 많이도 썼네.”   진우 앞에 놓인 열 장의 에이 포 용지에는 ‘다시는 지각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단어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지각…… 야, 그러니까 쌤한테 말하라니까? 쌤도 너희 집에 어떤 일이 있는 줄 알면……”   “미라랑 주연이는 어디서 기다리고 있어?”   진우는 기수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채며 물었다. 진우의 눈은 어느새 가늘어져 있었다.   “둘 다 운동장에서 기다리고 있어. 당최 왜 맨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빨리 써줘. 해지기 전에 축구 한판은 땅겨야지.”   기수는 진우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순간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진우는 자신의 집안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내가 괜한 말을 했지.’   기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자신을 책망했다.   “그럼 운동장에서 기다릴게. 빨리나와.”   기수의 말에 진우는 손만 위로 들고서 흔들었다. 그러자 진우의 손이 햇빛을 가려 진우의 모습이 더 어둡게 보였다. 기수는 그런 진우를 보며 뒷문을 열었다.   “검은 고양이 네로 네로 네로. 귀여운 나의 친구는 검은 고양이.”   반짝이는 노을빛으로 물든 둥근 운동장 주변에 있는 그네 위에서 미라는 땅을 발로 차면서 쉼 없이 삐걱거리는 그네를 앞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 한 장의 날개
  • 2011-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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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우와...미정이같은 애가 진짜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글틴에서의 마지막 글이라니 아쉽네요ㅠㅠ 잘 읽었습니다!

    • 2012-03-04 20:39:4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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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장의 날개

    감사합니다. 이제 글틴에 글 올리는 것은 마지막인데 오랜만에 덧글이 달려있어서 놀랬네요ㅎㅎ

    • 2012-03-04 14:44:17
    한 장의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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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1500
  • 천사의 날개

    뭐라해야되나. 왠지 모르겠지만 위로가 되는 그런 글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 2012-03-03 21:45:28
    천사의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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