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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한 장의 날개
  • 작성일 2012-02-10
  • 조회수 436

도피

  “모르겠어…….”

  나는 작게 소리 내어 말했다. 방안에 혼자 있는데다 엄마는 TV를 보고 있고, 아빠는 야근에다 창밖은 별 한 점 없이 컴컴했지만 어디선가 그거 하나 못 풀어서 대학 어떻게 가려고 그러냐는 소리가 들릴까봐 조용히 말한 것이다.

  “후……”

  샤프를 소리 없이 문제집 옆으로 굴려서 해방시켰다. 그리고 문제집을 째려보았다. ‘순간변화율’이란 놈이 ‘미분의 곱’, ‘도함수’ 친구들로는 모자랐는지 이젠 ‘전하량’까지 데리고 나왔다.

  “어이! 학생. 이것도 못 풀어? 이걸 봐봐. 이걸. 별 3개짜리야. 이래가지고 대학……”

  나는 계속 나불대던 문제집을 덮어버렸다. 닥치라고 하려던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도로 삼켜버렸다. 그리곤 문제집 더미 속에 끼어있던 공책을 꺼냈다. 몇 장을 슥슥 넘기자, 글자들이 빽빽하게 써져있었다. 소설. 그냥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막 휘갈겨놓은 것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건 나의 소설집이다. 단편도 있고, 장편도 있고, 구상만 잔뜩 써놓고 중간에 그만 둔 것도 몇 개 보였다. 이것들은……

  “진훈아! 숙제 다 했어?”

  엄마의 목소리는 두꺼운 문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뚫고 들어와서는 내 귀를 때렸다.

  “어, 응.”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숙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공책을 꽂아놓고 덮어두었던 문제집을 다시 펼쳤다. 그러자 문제집이 또 나불대기 시작한다.

  “여, 학생. 빨리 빨리 풀어야지. 안 그래? 학원에 있는 수학선생 무섭잖아. 안 풀어온 문제 하나당 한 대씩 패고. 그치? 그러니까 내 말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거야. 너도 잘 알잖아? 그 수학선생 힘세다는 거. 맞으면 아프잖아. 맞는 것 보단 지금 빨리 집중해서 다 푸는 게 낫지 않냐? 안 그래? 그리고……”

  다시 문제집을 덮어 버렸다. 듣기 싫었지만 다 맞는 말이다. 안 풀면 맞는다. 그런데 왜?

  “왜 일까?”

  나는 왜 맞아야 할까? 내가 한 문제를 안 풀어오면 - 몰라서 못 풀었다 하더라도 - 나는 나보다 덩치가 두 배쯤은 커 보이는 수학선생에게 매를 맞는다. 이건 정당하지가 못하다. 엄마한테 말했더니 돈을 받았으니 어떻게 해서든 공부를 시켜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고, 자기 학원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두 가지 대답 모두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힘든 학원생활을 조금이라도 도피하려고 선택한 것이 책읽기였고, 그것으로 발전해 온 것이 내가 직접 소설을 써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게 잘한 일이었을까?’

  요즘 들어 자꾸 드는 생각이었다. 회의감. 아까도 말했듯 나에게 책읽기는 단순한 피난처였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단순한 피난처였던 것이 요즘엔 없으면 허전해질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동시에 불안감도 나를 찾아왔다. 마치 내가 잠시 피하려고 판 굴인데 그곳이 너무 편안해서 계속 땅속에 파고들고 있는 것만 같아 불안했다.

  ‘도피, 탈출이 아닌 일시적인 도피.’

  게다가 문제해결은 할 생각도 않고 문제를 외면하고만 있었다. 항상 학교, 학원을 비난하지만 구체적인 해결방법은 생각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남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만을 바랬다.

  “난, 글을 쓸 자격이 있는가?”

  샤프를 굴리면서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말했다. 누군가가 대답해주길 바라며. 누구라도, 어떤 말이라도……

  “난, 글을 쓸 자격이 있는가?”

  “있을…… 아니, 있어.”

  "있어? 왜?"

  “……”

  그는 대답은 하지 않고 배낭에 달린 물통을 꺼내 물을 연거푸 들이켰다. 나도 그를 따라 배낭에서 물통을 꺼내어 물을 마셨다. 물 자체는 시원하지 않았지만 갈증은 해소되어 상쾌했다. 때마침 바람도 불어 목을 타고 내려오고 있던 땀방울들을 식혀주었다.

  “그럼 내가 한 번 물어보자.”

  그는 배낭에 물통을 넣고 말했다.

  “넌 왜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입시의 압박, 이런 공부를 왜 하나 하는 회의감, 학원에 대한 공포,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한 없이 되풀이 되는 것에 대한 역겨움. 글쓰기는 이러한 것에 대해 신물이 난 나에게 그저 도피수단이었다.

  “내가 글 쓰는 의도는…… 뭐랄까, 순수하지 못하달까?”

  그는 왜 순수하지 못하냐는 말 대신 가드레일 너머에 흐르고 있는 계곡을 바라보았다.

  그의 이름은 성준이다. 성은 모른다. 이름도 닉네임일지도 모른다. 어쨌건 나는 성준이를 인터넷상에서 만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만난 적은 없다. 성준이가 카페 게시 글에다 글을 올렸고, 내가 거기에 댓글 하나를 올렸을 뿐이니까.

  오랜만에 컴퓨터를 켰는데도 할 게 없었다. 딱히 재밌는 소식도 없고, 재밌는 게임도 없고, 다운 받을 음악이나 영화도 없다. 꼭 학교에 있으면 컴퓨터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으면서도 막상 컴퓨터를 켜면 할 게 없는 내가 한심해 보였다.

  “왜 이렇게 할 게 없냐…… 어?”

  무심코 즐겨찾기를 눌렀는데 지운 줄로 만 알았던 카페가 버젓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옛날에 인터넷 강의 때문에 가입한 카페였는데, 조금 이용하다가 말아서 지금은 그냥 유령회원이다.

  그 카페 제목을 지우려다가 그냥 한 번 볼까, 하는 마음으로 눌렀다. 여전히 가입자 수는 엄청났다. 전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았다. 마우스를 움직여 자유게시판을 눌렀다. 그런데 분명히 자유게시판인데 잡담 같은 건 없고 누군가가 질문을 하면 댓글이 수십 개씩 달리면서 그 질문에 답해주었다. 물론 질문은 입시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야, 정말 대단들 하시구만.”

  나는 스크롤바를 내리면서 감탄을 했다. 컴퓨터 켜서까지 이런 거 하고 싶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그때 독특한 제목이 눈에 띄었다.

  「산」

  “산?”

  산이라는 그 제목은 기다란 위와 아래의 제목들 때문에 더 짧아보였다. 나는 호기심에 그 짧은 제목을 클릭했다.

  「저와 함께 산에 오를 사람을 찾습니다.」

  “산에 올라?”

  스크롤바를 더 내리자 산 이름, 위치, 챙겨올 물건 등이 쓰여 있었고 선착순 1명이라고도 쓰여 있었다.

  ‘선착순 1명?’

  댓글 수를 보니 벌써 28명을 돌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댓글에는 ‘제가 갈게요.’라든가, 하다못해 ‘저요.’라는 말도 없었다. 대신 화학에 나오는 ‘산’인 줄 알았다거나, 지리 문제인 줄 알았다는 글들이 빼곡했고, 그 글에 공감하는 댓글들도 많았다. 그리고 하나 같이 이런 낚시글 같은 건 올리지 말라며 비난하고 있었다.

  ‘낚시글?’

  그 글들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낚시글? 대체 누가 누구를 낚았다는 말인지. 아니, 애초에 낚싯바늘과 미끼가 있는지? 이 게시판은 자유게시판이다.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할 수 있는 곳이란 말이다.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카페를 나가버렸다. 그리고 예전에 접었던 게임을 불러내어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별 흥미가 없었다. 게임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아 그런 것도 있었지만, 왜인지는 모르게 아까 본 게시물이 자꾸 머릿속에서 떠올라서 게임에 대한 집중을 방해하고 있었다.

  「저와 함께 산에 오를 사람을 찾습니다.」

  ‘산. 산이라……’

  그러고 보니 등산한지가 꽤 되었다. 최근에 여행 갔을 때 차를 타고 산에 난 길을 따라서 간 적은 있었지만 등산은 언제 갔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렸다.

  다시 즐겨찾기를 클릭했다. 그리고서 아까 그 글을 다시 보았다.

  「선착순 1명.」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아니, 스스로 손이 키보드 위에 올라갔다.

  “산.”

  일부러 소리 내어 말했다. 일종의 선전포고다. 항상 내 말을 들을까 봐 겁냈던 어떤 존재에게 난 여기서 탈출해 산으로 갈 것이라는 선전포고.

  초콜릿 바를 다 먹으니 시외 고속버스가 도착했다. 버스표를 건네고 버스에 올라타자 시트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버스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냥 들떠서 그저 모든 것들이 새롭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버스는 계속 달렸다. 창밖을 보니 나무들이 점점 많아지고 건물들은 적어졌다.

  스피커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깜빡 잠이 들었었나보다. 허둥지둥 배낭을 챙겨서는 사람들을 뒤따라 내렸다.

  “후아.”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익숙해져있던 내 피부는 후덥지근하고 습한 날씨를 못 견뎌했다.

  “보자, 이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나는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조금 떨어진 조그만 버스정류장 앞에서 서성였다. 물론 만나기로 한 것은 아니고, 게시물에 여기가 만나는 장소라 쓰여 있었던 거지만.

  ‘오랜만에 등산을 하면 어떤 느낌일까.’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일단 무지 더울 것이다. 지금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땀이 비 오듯 하는 날씨니까. 그리고 다리도 아프겠지. 오랜 만에 걷는 거니까. 거기다……

  “당신인가요?”

  약간 굵직한 목소리가 내 생각을 잘라먹었다. 나는 뒤를 돌아서 아마 나를 보고 말했을 그 사내를 보았다. 키는 나보다 조금 크고, 오랜 시간 햇볕에 그을린 듯한 피부색을 가진 남자가 생전 보기도 힘든 커다란 배낭을 메고 카메라를 목에 걸친 채 서있었다. 나이는, 아마 나보다 한두 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준이고 이제 고2입니다.”

  아, 나랑 나이가 똑같다. 그런데 이 애는 내 생각을 잘라먹는 능력을 가진 것 같다.

  “반갑습…… 아니, 반가워. 나도 고2인데, 이름은 최진훈.”

  상대방도 나와 나이가 같다는 걸 듣고는 놀라는 듯 하면서도 약간 마음이 놓인 듯 보였다. 하긴, 나이 때문에 서로 존댓말 하는 건 좀 불편할 테니까.

  성준은 나를 이끌고 산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그리고 걸은 지 얼마 안 돼서 꽤 큰 산이 보였다. 성준이는 손을 들어서 저 곳이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카메라를 들어서 그 산을 찍어댔다.

  “챙겨올 건 다 챙겨왔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방을 열었다. 게시판에 올라온 글처럼 비상식량, 옷가지, 모자, 선크림, 장갑, 수건 등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음, 거의 다 챙겼는데, 물이랑 지팡이는?”

  아차 싶었다. 지팡이는 둘째치고서라도 제일 중요한 물을 들고 오는 것을 잊은 것이었다. 아침에 너무 급하게 출발하는 바람에 냉동실에 얼려놓은 물을 챙기고 오지 못했다.

  “다른 건 몰라도 물은 사서 가면 되지. 근처 슈퍼에 들렀다 가자.”

  알았다고 답하고 배낭을 둘러맸다. 그리고 높은 산을 바라보며 왠지 쉽지 않은 등산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흠.”

  꽤 경치가 좋았다. 주위를 둘러봐도 나무, 풀, 바위, 또 나무 밖에 없었지만 전혀 지겹지는 않았다.

  “도시하고는 좀 다르지?”

  “다르네. 이렇게 나무도 많……”

  “오늘은 꽤 괜찮은 날이야. 사람도 별로 없고.”

  내말을 잘라먹었다. 그리고서는 휙 돌아서서는 걷기 시작했다. 참 독특한 녀석이다. 자기 할 말은 다하고, 남의 생각이랑 말은 다 잘라먹는 비상한 재주를 가진 녀석.

  “후욱…… 후.”

  한 시간 정도 걷자 숨이 점점 차기 시작했다. 평소에 운동을 소홀히 한 결과다. 성준은 산을 많이 올라봤는지 숨소리조차 고요했다.

  “콜록! 콜록!”

  두 시간 쯤 지났을까. 경치는 이제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웬 나무계단이 나와서는 나의 다리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성준이가 힘들 거라면서 자신의 등산용 지팡이를 나에게 주었지만 별로 도움은 안 되는 듯 했다. 이건 뭐 내가 지팡이를 짚는 건지, 아니면 지팡이가 나를 짚고 가는 건지도 헷갈렸다. 숨이 가빠서 의식은 몽롱했고 높은 곳이라 그런지 점점 듬성듬성해져가는 나무 때문에 그늘도 사라져 햇볕이 너무 따가웠다.

  “성준아! 조금만…… 쉬다가자.”

  나는 말을 토해내고서 뜨거운 나무 계단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땀은 비 오듯 흘렀다. 종아리는 핫 팩을 붙인 것 마냥 후끈거렸고 목구멍은 평소보다 두 배로 좁아진 듯 쌕쌕거리는 소리를 냈다.

  “괜찮아?”

  “아니, 별로 안 괜찮아.”

  무릎을 굽히고 지팡이를 짚은 채 손을 휘저으며 말하는 나를 보고 성준이는 살짝 웃었다. 아마 비웃음일 것이다. 하긴, 내가 봐도 한심했다. 비웃음 받을 만 했다.

  호흡이 좀 진정되자 나는 곧바로 나무 계단 옆 그늘 아래로 피신했다. 성준은 물을 조금 마셨다.

  “정상에는 갈 수 있겠냐?”

  성준은 약간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표정에 나는 약간 욱함을 느꼈지만 사실 올라갈 수 있을지 없을지 내 자신에게 확신이 없었다.

  “글쎄다. 야, 근데 정상은 왜 이렇게 멀어. 아까부터 보이던 저게 정상 아니야?”

  나는 나무가 전혀 없고 위로는 하늘 밖에 보이지 않는 꽤 멀리 있어서 흐릿하게 보이는 바위 덩어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맞아. 저기가 정상이지.”

  “근데 저거 아까부터 보이기 시작했는데 왜 아직도 도착을 못하는 거지? 마치 신기루 같애. 다가서면 계속 멀어지는.”

  “큭. 그 표현 괜찮네. 신기루. 근데 저 정상은 진짜란다. 그러니까 정상 탓하지는 말고. 원래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힘들어지는 법이야.”

  그렇게 말하는 성준이는 마치 등산에 통달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정 걷기 힘들다면 저리로 갈래?”

  나는 성준이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냥 올라오면서도 봤고 앞으로도 계속 볼 것만 같은 나무들이 우거진 곳이었다.

  “저기 가면 뭐가 나오는데? 나무 밖에 안 보이는데?”

  “저기로 가면 다른 길이 나와.”

  “다른 길?”

  그때 형광색 등산복을 입은 등산객 3명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려갔다. 내려가는 사람들은 올라가는 사람들에 비해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좀 더 가면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나와. 차들이 다니는 길이라 해도 가드레일에 달라붙어서 가면 안 위험해. 게다가 오늘은 사람도 적으니까 괜찮아. 거기로 갈래?”

  “아스팔트? 더 뜨거울 텐데?”

  “너한테 지금 중요한 건 뜨거운 게 아니라 이 나무계단들이잖아. 거기에는 차가 다니는 도로라서 완만하거든. 니 상태로 봐서는 거기가 좀 더 편할 것 같다. 물론 완전 쉽다는 건 보장 못하지만. 자, 가자.”

  ‘편한 길. 편한 길이라.’

  나는 편평한 길로 가면 좀 더 편할 것이라는 생각만으로 버텼다. 성준이는 시간이 없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지금 시간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 위에는 계속 태양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을 뿐이고, 이 길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 괴로웠다.

  ‘이 산에 온 거…… 잘한 걸까?’

  잘한 일일 것이다. 아니, 잘한 일이어야만 한다. 원래라면 토요일 날엔 학원에서 보충수업이 있어 반드시 가야하지만, 아침에 아주 일찍 일어나 몰래 나온 것이었다. 물론 휴대폰도 집에 두고 말이다.

  “다 왔어.”

  다 왔다고? 나는 빨리 걸어서 멀리 있던 성준에게 다가갔다.

  “저기야.”

  성준이가 가리킨 곳을 보니 과연 아스팔트도로가 보였고 조그만 가게도 보였다. 다만, 아직 조금 더 가야한다는 것이 힘을 빠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힘들어?”

  성준이는 헉헉거리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대답할 힙도 별로 없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픽.”

  아스팔트도로를 보며 웃는 성준이를 나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스팔트도로라고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딱딱한 바닥 때문에 발이 점점 아파오고 발목도 비명을 질러댔다. 성준이가 내 모습을 보더니 잠시 쉬자고 하며 가드레일 밑 풀 위로 걸터앉았다. 나는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았다가 뜨거움을 못 참고 일어서서 성준이 옆에 앉았다.

  “너는 왜 이런 산을 오르려는 거야?”

  나는 햇빛에 인상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진짜 왜 이런 고통을 일부러 겪으려는 것일까.

  “재밌잖아. 정상에 오르면 상쾌하고. 니 주위에 있는 등산하는 사람들한테 물어봐라. 다 이렇게 대답할걸? 오를 때는 괴롭지만 오르고 나서 느끼는 그 쾌감 때문에 산을 찾는다고.”

  “흠…… 그래?”

  “그럼 넌? 넌 왜 내 게시글에다가 댓글을 단 거야? 이건 여담이지만 내 게시글에 가겠다고 댓글 단 사람은 니가 처음이다.”

  “왜 달았냐면…… 글쎄다, 짧게 말하면 그냥 본능적으로 키보드에 손이 올라갔다고 할 수 있고, 길게 말하면 몇 시간을 말해도 모자랄걸?”

  “이야. 듣고 싶네. 그런데 들으려면 걸으면서 말해야겠어. 서두르지 않으면 해진다.”

  성준이는 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나는 더 쉬고 싶었지만 해가 진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일어섰다. 이 산에 밤까지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글 쓰는 의도는…… 뭐랄까, 순수하지 못하달까?”

  나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면서 성준이에게 말을 했다. 성준이도 말을 듣기 위해서 나와 속도를 맞추었다. 입시, 학원, 숙제, 되풀이 되는 일상에 대한 염증, 소설, 그리고 나의 회의감. 나는 모든 것을 말했다. 몇 시간이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말하고 나니 의외로 이십분 채 걸리지 않았다.

  성준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이따금씩 가드레일 바로 뒤에서 자라고 있는 기다란 강아지풀들을 뜯기도 했다.

  “그래서 산에 오르려고 하는 구나? 평소에 하는 것들이 너무 싫고 지루해서.”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네.”

  “그럼 잘 왔어. 적어도 여기는 지루하진 않을 테니까.”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는 것을 보니 살짝 불안해졌다. 해가 멀리 있는 작은 산과 충돌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상은 아직 멀었다. 조금 더 가야한다.

  “……그렇다면 니 꿈은 소설가가 되는 거겠네.”

  “글쎄. 그런가. 그렇게 되나? 사실 소설가가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

  내 말에 성준이는 약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했다. 소설을 그렇게 좋아하고 쓰는 것도 좋아하면서 막상 꿈이 소설가냐는 말에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상식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두렵냐?”

  “응?”

  “소설가가 꿈이라고 말하는 게 두려워?”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했잖아. 내가 글 쓰는 의도는 순수하지 못하다고.”

  “그래. 니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라……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명백한 사실이다. 적어도 우리 반에서 그림이 좋아서 예술대를 희망하는 애들이나 시 같은 것들이 좋다고 문과로 가는 애들에게서 보이는 희열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에게서 보이는 것은 그냥, 공부에 대한 반작용. 공부를 안 하면 하는 것. 그뿐이었다. 그래서 두렵다. 공부가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나의 공책 더미들도 사라질까봐.

  “넌 뭘 하고 싶어?”

  내가 성준에게 물었을 때 하늘은 온통 붉은 색이었다. 태양이 장렬하게 전사하고 있다는 증거. 그 증거를 향해 성준은 카메라를 들어 찰칵 찰칵 소리를 내며 찍어댔다. 하긴 내가 봐도 놓칠 수 없는 멋진 피사체였다.

  “나……? 뭘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애?”

  성준이는 질문을 하면서도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산에 오르기 시작할 때부터 목에 걸려있던 저 카메라를 쉴새없이 셔터를 눌렀다.

  “사진작가? 사진으로 예술하는 뭐 그런 거?”

  “사진이라.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모습을 보고 대체 뭘 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봤다. 얜 뭘 하고 싶은 걸까.

  “나 사진 찍는 거 좋아해. 그러니까 아까부터 계속 사진을 찍고 있지.”

  “음. 그런 거 같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성준이는 찍힌 사진을 확인하고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버튼들을 조작하느라 바빴다.

  “또 뭘 좋아하는 거 같애?”

  “……산?”

  나의 말에 성준이는 카메라에 눈을 대고 초점을 잡으면서 웃었다. 그러더니 또 연방 버튼을 눌러댔다. 찰칵. 찰칵. 찰칵.

  “맞아. 너 나에 대해서 잘 아네!”

  성준이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날 쳐다봤다. 난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응수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미소뿐이었다.

  “그걸 모르는 인간이 어디 있냐.”

  “있어.”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성준은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이번에는 산으로 둘러싸인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을 찍으려했다.

  “사실 내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하고 산을 좋아하는 걸 아는 사람은 거짓말 쪼금 더 보태서 우리 가족이랑 너 밖에 없어.”

  찰칵. 찰칵. 찰칵.

  “……왜?”

  “왜라…… 그야 이런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내가 아까 너한테 말했지? 내가 올린 게시글에 가겠다고 댓글 단 사람은 너가 처음이라고.”

  키보드에 손이 저절로 올라가던 날이 생각났다. 같이 가겠다던가, 힘내 라던가 하는 댓글들이 아닌 공부모임 카페에 이게 무슨 글이냐, 낚시글은 자삭해라, 라는 댓글들도 생각났다.

  “아까 니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말을 했잖아.”

  찍힌 사진을 확인하는 성준이의 표정은 아까와는 달리 진지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니가 글 쓰는 거에 대해 말할 때 니 표정은 순수하지 못한 그런 표정이 아니었어. 그리고…… 니가 순수하지 못하다면 나도 순수하지 못한 거야. 그러니까 그런 생각들은 버려.”

성준이는 카메라를 돌려 아스팔트, 가드레일, 강아지풀들을 찍어댔다.

  “너 지금 얘가 뭔 말하나…… 그런 생각하고 있지?”

  “……”

  “속이 다 비치는 애라니까.”

  사진을 찍으며 큭큭 웃어대는 성준이를 나는 멍하게 바라보았다.

  “나 사실 퇴학했어.”

  나의 멍하던 얼굴은 놀라는 얼굴로 변했다. 퇴학? 아까 고등학교 2학년 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나랑 동갑인 건 맞는데. 그 나이에 퇴학?

  “산에 오르기 전에 내가 고2라고 했지? 그건 그냥 나이는 18살이라고 하는 건 좀 이상해서 그렇게 말한 거야. 아, 이상하게 생각하진 마. 나쁜 짓해서 강제로 퇴학당한 건 아니니까. 그냥 자퇴로 해두지. 자진퇴학.”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

  “그렇게 할 수 있냐니? 고등학교라는 체제에서 그런 게 가능하냐고 묻는 거야, 아니면 대한민국의 한 어머니의 아들로써, 고등학생으로써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거야?”

  “뭐…… 둘 다.”

  “중학교는 모르겠지만 고등학교는 맘만 먹으면 안 갈 수 있어. 의무교육이 아니거든. 다만 대한민국의 한 어머니의 아들로 안 가는 게 힘들지.”

  성준이가 말하는 것을 듣는 내 표정을 성준이의 카메라로 찍는 다면 아마 성준이는 그 사진을 평생 소장하지 않을까? 우울할 때마다 꺼내서 보고 웃으려고.

  “어쨌든 그럼 넌 지금 학교에 안 다닌다는 거잖아. 집에서 어떻게 허락해 준거야?”

  말도 안 된다. 자퇴라니. 자퇴하고서 산에 오르면서 사진을 찍으면서 하루를 보내다니. 나는 학원을 째면서 엄마, 아빠한테 맞아죽을 각오로 여기에 왔는데.

  “집에서 허락? 그게 말이 되냐? 아들이 학교 가기 싫고 산에 오르려는 이유가 전국의 고등학생이 겪고 있는 반복되는 생활, 구속된 생활, 눈을 비비면서 가야하는 학원 때문이라는 데 세상에 어느 부모가 허락해 주겠어?”

  “그럼……”

  “어떻게 자퇴했냐고? 그냥 집을 나왔어. 물론 엄마 아빠한테는 미안했지만 그냥 가출했지. 한 며칠 전화도 안 받고 나가있다가 들어오니까 아빠의 주먹이 나를 반기더라고. 그다음 끈질긴 대화를 했지. 담임과도 대화를 했어. 학교를 안 다니면 뭐하고 살 거냐고 묻더라. 그래서 대답했지, 산에서 사진 찍으면서 살고 싶다고. 마치 이런 미친놈은 처음 본다는 표정을 짓더라.”

  그랬을 것이다. 만약 나 같은 산에서 만난 친구가 아니라 오랜 소꿉친구라도 그런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래. 아까 니가 난 뭘 할 거냐고 물었지? 내 대답은 이거야. 산을 오르면서 사진을 찍을 거야. 그게 내 꿈이야. ~사, ~가, ~원 같은 말이 붙는 직업들만 꿈이라고 알고, 그것들만 말하고, 그거 아니면 꿈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절대 이해 못할, 안할 꿈.”

  성준은 말을 뱉어내듯 말하고 배낭 옆에 달려있는 물통을 빼서 물을 마셨다.

  “아빠는 내가 뜻을 절대 굽히지 않으니까 한번 그렇게 살아보라면서 집을 나가라고 했어. 홧김에 한 말일 테고 언젠가는 내가, 내가 한 일들을 후회하면서 돌아올 거라는 아빠의 생각이 포함된 말이었겠지. 그래서 옷가지랑 노트북을 가지고 집을 나가고, 알바를 하고, 지금은 저기서 살아.”

  성준이가 말하면서 뻗은 손의 끝에는 아까 찍어대던 마을이 있었다. 도시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한적한 시골의 분위기. 이제 해도 거의 다 넘어가서 마을은 산의 그림자가 만들어낸 군청색으로 뒤덮여가고 있었다.

  “집은 나왔지만 마땅히 잘 곳이 없어서 방황하던 차에 발견했어. 농사일들을 도와주면 방값도 없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친절하시지. 좀 괴팍한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런 말을 하는 성준이의 얼굴은 마치 지금 해가 지는 것이 아닌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는 것 같았다.

  “순수하지 못해. 그렇지? 너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그저 도피를 한 것일 뿐이야. 하지만 이건 알아줬으면 좋겠어. 도피란 마주친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잠시 이탈을 하고 제자리에 돌아오는 거야.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한번 이탈을 맛 본 사람은 도피로 끝내진 않아. 난…… 가족들과 친구들이 보고 싶긴 하지만 돌아가진 않을 거야. 여기에 있으면 내 꿈이 계속 이루어지니까. 자퇴를 하고 집에서 나온 건 그냥…… 그래, 그냥 일시적인 궤도 이탈일 뿐이었어. 하지만 나는 그 이탈된 궤도 위에 머물러 있을 거야. 그러고 있으면 언젠가는 나만의 길, 나만의 궤도를 만들면서 예전의 궤도와는 멀어지고, 결국은 도피가 아닌 탈출, 완벽한 이탈을 할 수 있겠지.”

  이제 산에 부딪히면서 하늘에 무수히 번졌던 붉은색과 노란색의 태양의 파편들도 모습을 감추었다. 푸른색과 보라색이 하늘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거 도착은 하는 거지?”

  지팡이 짚는 소리가 들리고, 거친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헉헉대는 숨소리가 들리고,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눈부신 헤드라이트를 켜면서 내려오고 올라가는 자동차의 소리가 들렸다.

  “니가 너무 느려서 도착하려나 모르겠다.”

  성준이는 멈춰서 나를 보더니 팔을 벌리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 짜증나. 저 여유로운 표정과 나는 힘들지 않으니 전부 다 니 잘못이라는 듯한 말투와 제스처라니.

  “벌써 깜깜한 밤이잖아.”

  나는 지팡이로 하늘을 가리켰다. 이제 청색 계열의 색들은 자신들을 잡아먹는 검은색으로부터 달아나듯 산의 끝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밤? 저녁이겠지.”

  성준이는 자신의 팔에 착용한 야광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산은 해가 빨리 져. 주위에 높다란 바위들과 나무들이 많아서 그래.”

  “그럼 어떻게 해?”

  내 질문에 성준이는 팔짱을 끼고서 고민했다. 아니 고민하는 척을 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지금은 좀 보이지만 조금만 있으면 한치 앞도 안 보일거야. 그렇다고 다시 내려갈 수도 없고…… 별 수 없다. 따라와.”

  가드레일 옆에 있던 성준은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 확인한 후 도로를 건너서 나무가 울창한 숲 쪽으로 갔다.

  “뭐야. 어디로 가는……”

  “그냥 따라와.”

  참 내말을 잘 잘라먹는 녀석.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도로를 건넜다.

  “어우, 어두워.”

  “조심해. 발을 헛디뎌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아, 와…… 야, 하늘은 우릴 버릴 생각이 없나봐.”

  성준이 감탄하는 곳에는 나무가 별로 없고 평평한 바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저게 왜……

  “텐트치기 좋은 곳이야.”

  아. 그래서 감탄을 했구나. 텐트치기 좋은 곳이라서…… 뭐?

  “올라와.”

  “야,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텐트?”

  “응. 원래라면 평지가 좋지만 여긴 좀 나무가 빽빽하네. 그리고 여기 위라면 불 피워도 되니까.”

  정말, 정말…… 뭐라고 단정 짓기 힘든 놈이다.

  “텐트라니.”

  “여기 안에 있지.”

  성준은 보기에도 내 배낭의 두 배 정도는 넘을 만한 배낭을 풀었다. 등산용 텐트. 깔개. 뭐가 들었기에 그렇게 배낭이 큰 가 했더니……

  “수고했어.”

  내 키보다 약간 낮은 바위 위에 일인용 등산 텐트가 만들어졌다. 성준이는 배낭 안에서 소형 버너와 소형 일인용 코펠을 꺼냈다. 세상에 저걸 다 짊어지고 이 산에 오른 거야?

  “물 있지?”

  배낭 안에 있던 생수 병 하나를 건네주었다.

  “라면이나 끓여먹자. 저녁시간인데.”

  찰칵. 버너에 불이 켜졌다.

  라면은 국물까지 순식간에 비워졌다. 성준이는 휴지를 꺼내서는 정성스레 코펠을 닦았다.

  “세상에……”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나무가 가리지 않는 바위 위의 검은 하늘은 별들의 무대였다.

  “내가 산에서 텐트치고 자다니.”

  “나도 이럴 줄은 몰랐어.”

  그러고선 낄낄거리며 웃어댄다.

  “거짓말 하지 마. 너 이러려고 아스팔트길로 걷자고 했지?”

  성준은 웃음을 멈추지 않고 라면의 기름기가 잔뜩 묻은 휴지를 비닐봉지 안에 넣었다.

  “솔직히 말해 봐. 니가 가자고 한 그 길이 사실은 더 멀리 돌아가는 길 맞지?”

  내 말 끝에는 대답대신 웃음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한숨을 쉬며 신발을 벗고 바위 위에 누웠다. 시원한 바위의 냉기가 뒤통수부터 발뒤꿈치까지 전해진다. 덥고 습기 있는 여름 바람이 발가락 끝부터 이마까지 훑고 지나간다. 좋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 느낌.

  “……일어나.”

  눈을 떠보니 성준이었다. 내가 깜빡 잠들었던 것 같다.

  “이렇게 자면 감기 걸려. 모기들도 달려드니까 자려면 텐트 안에 들어가서 자.”

  그러면서 성준이는 내 옆에 누웠다.

  “좋지?”

  “……”

  “난 이 맛에 텐트랑 코펠 들고 산에 오른다.”

  성준이가 말을 마치자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들어본 것 같다. 그리고 이 기분은…… 그리운 기분인가? 이 소리를 듣고 싶었다는 그런 기분?

  “아까 니 질문에 대답하자면…… 맞아. 큭큭큭. 일부러 쫌 힘든 길로 돌아왔다.”

  “왠지 힘들어 죽겠더라!”

  나는 인상을 쓰면서 성준이의 목을 졸랐다. 성준이는 켁켁거리며 항복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왜 그랬어?”

  “글쎄. 왜 그랬을까.”

  하늘엔 별들이 유치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정말 쏟아지고 있었다.

  “그냥…… 재밌잖아? 재밌지 않아? 왠지 너는 이런 거 안 해본 것 같아서 재밌어 할 줄 알았는데. 그리고…… 정상에 가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다.”

  팔짱을 끼고 진지한 척 말하는 성준의 모습에 화질 나쁜 중국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에게 비기를 전수해주는 스승의 모습이 겹쳐졌다.

  “별 많다. 이런 건 처음 봐. 책에서만 보던 건데.”

  “그지? 구름 껴서 잘 안 보이는 날도 많은데 오늘은 잘 보이네.”

  이렇게 바위 위에 텐트치고 누워서 세기도 힘든 별들을 바라보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상상했다 하더라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할까. 비현실. 불가능. 지금처럼 이렇게 누워있는 것은 그런 엄청난 단어들을 거느릴 정도로 힘든 일이 아닌데.

  “내가 아까 했던 말…… 기억나?”

  누워있던 성준이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래도 똑똑히 귀에 들어온다.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난 이곳에서는 풀벌레 소리가 유일한 큰소리. 큰소리여도 소음은 아닌.

  “그래. 기억나.”

  자신의 꿈을 말하며 눈을 반짝였었다. 태양의 붉은 빛이 눈에 반사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너도 소설가라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그냥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해.”

  “그게…… 그거잖아.”

  “후후후. 그런가?”

  나도 모르게 들리지 않는 한숨을 쉬었다. 왜 한숨이 나왔을까. 이렇게 좋은 풀벌레 소리와 예쁜 밤하늘이 있는데.

  “하늘에서 쏟아지는 일억 개의 별이었던가, 그 일본드라마 제목이 생각나네.”

  성준의 중얼거림.

  “그러네. 그 제목 좋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일억 개의 별.”

  좋다. 뭐든 것이. 지금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이 모두 좋다. 그런데…… 뭔가 자꾸 뱃속에서 한숨을 만든다.

  ‘왜 이럴까. ……이진훈! 지금 뭐하는 거야. 눈앞에 있는 저 별들을 보고 정신 좀 차리란 말이야!’

  “아, 진짜 죽을 것 같아.”

  나는 사람이 짜낼 수 있는 최대한의 일그러짐을 얼굴에 담았다. 물론 일부러 그런 표정을 지은 건 아니고. 일어나보니 어제의 장시간의 노동에 다리 근육들이 파업을 하듯 고통의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너무하긴 했다.

  “그러게 자기 전에 다리 좀 주물러 주고 자라니깐.”

  “이건 그 정도로는 풀리지 않게 뭉친 거야.”

  “그야 니가 평소에 운동을 안 한 거고.”

  어쩜 저리 말을 얄밉게도 하는지. 하지만 평소의 운동부족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참았다.

  “빨리 와. 이제 진짜 정상이야.”

  “몇 시간 좀 더 쉬었다가 가면 어때서.”

  이렇게 투덜거리면서 지팡이에 체중을 실으며 일어섰다. 성준이는 이제 4시가 다 되어갈 때 나를 깨웠다. 내가 비몽사몽 할 동안 텐트가 정리되고 바로 걸었다. 수면부족에다 딱딱한 바위위에서 자서 그런지 허리까지 아팠다. 다리가 아픈 건 말할 것도 없고.

  “조금만 더 빨리.”

  성준이는 성큼성큼 걸어가다가도 내가 뒤쳐진다 싶으면 돌아와서 나를 재촉했다. 그때마다 손을 저으면서 먼저 가라고 했지만 부질없었다.

  “헉. 헉. 이제 한계라니까.”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쪼-금만.”

  진짜 쪼-금만 벌어져 있는 성준이의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봐도 전혀 기운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저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건지. 신빈성이 없잖아.

  “빨리 일어나. 빨리. 자꾸 쉬면 더 힘들어져.”

  “아, 알았어, 알았어.”

  결국 걷는다. 별 수 없다. 걷고. 걷고. 걷고. 지루함이라는 것이 결코 들어올 틈이 없을 반복된 움직임. 아직 해도 뜨기 전이라 그런지 하늘은 짙은 청색이고 나머지도 하늘의 색깔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다 왔어.”

  내 생각을 잘라먹고 성준이가 소리치는 곳 바로 위에는 반갑게도, 정말로 반갑게도 그 짙은 청색 밖에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그곳을 향해 내 다리가 지금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으로 달려갔다.

  “축하해.”

  내가 발을 들여놓고 쓰러지자 성준이가 물을 주면서 말한다.

  “성준이가 추천한 지옥의 루트 등반 최초 완료와 더불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성준이가 살짝 몸을 튼다.

  “생애 최초로 산에서의 일출을 보는 것 말이야.”

  나는 잠시 눈을 찡그렸다가 감았다. 그리고 다시 뜬다. 작긴 하지만 보인다. 태양이. 어제 성준이와 걸을 때는 죽음을 보이던 태양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 생겨나고 있다.

  “장관이지?”

  새벽이라서 산 밑쪽으로는 안개가 보이고 앞쪽의 마을을 감싸는 작은 두 개의 산 사이에서 밝은 빛이 조금씩 뿜어져 나온다.

  “와, 이건 진짜……”

  “진짜 뭐?”

  나에게 말을 하는 성준이의 표정은 내가 왜 재촉했는지 이젠 알겠어? 하는 표정이었다.

  “아니다. 내 마음 속에 진짜 멋진 말들이 가득한데 내 입으로 나오면 더러워지면서 나올까 봐 안 말하련다.”

  “현명하네.”

  물을 마신다. 물맛이 이렇게 좋았던가? 새로 생겨나고 있는 햇빛이 페트병을 통과해 스며들고 있다.

  찰칵. 찰칵. 찰칵.

  “와, 벌써 물이 바닥났네. 너 얼마나 마셔댄 거냐?”

  성준이의 손에 잡혀 뒤집어진 페트병의 주둥이는 몇 방울의 물을 조금씩 떨어뜨리고 있었다.

  “너의 지옥의 루트를 등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어. ……어 이제 아침이네.”

  청색의 하늘은 이제 태양의 반대편에만 조그맣게 존재하고 있었다. 이제는 태양의 세계. 태양의 세계. 태양의 세계…… 뿌연…… 태양의 세계……

  “날씨가 좀 이상하네. 아까까지만 해도 맑았는데. 구름이 어디서 나타난 거야?”

  성준이가 배낭을 둘러매며 중얼거렸다. 뿌연 태양. 엷은 구름들이 태양의 존재를 방해하고 있었다.

  “다 쉬었으면 빨리 내려가자.”

  “……그래.”

  내려가는 길은 힘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나의 착각이었다. 한창 파업을 하고 있는 다리 근육을 깜빡했다. 나의 운동을 즐길 줄 모르는 근육들은 내리막의 바위들을 짚을 때마다 아프다고 난리였다.

  “다와 간다. 조금만 참아.”

  “벌써? 어제랑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너무 무리하면 안 되니까. 어제는 내가 일부러 빙빙 돌아서 간 거였지만 지금은 제일 빠른 길로 가는 거야. 조금만 참아.”

  웬일로 성준이가 친절하다. 뭐, 덕분에 내 다리는 더 손쓸 수도 없기 전에 구제할 수 있을 것 같다.

  푸드득!

  나무 틈 사이에서 이름 모를 새한마리가 날아오른다. 저 새는 다리가 뭉치지 않겠지. 날갯짓만으로도 산 정상을 금방 오를 것이다. 성준이의 지옥의 루트도 문제없을 것이고. 아마 정해져 있는 루트 따윈 개나 줘버리라면서 자신의 날개로 마음 내키는 곳으로 힘껏 날아다니겠지.

  “뭐해? 빨리 와.”

  “아, 알았어! 잔소리 좀 그만해.”

  내려가는 길은 힘들다. 다리가 아픈 걸까? 걸을 때마다 계속 한숨이 나온다. 산 안내 표지판이 나왔을 때, 내 마음속은 돌덩이로 변한 것 마냥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먹구름이 있다. 새로운 친구를 알게 되었고, 멋진 말들을 들었고, 가슴 속 고민을 속 시원히 털어놓았고, 빠져들고 싶은 별무더기도 봤고, 새로 태어나는 태양도 봤고, 지금은 따뜻한 온돌방 위에서 모시 이불 덮고 편히 누워 있지만…… 먹구름이 있다.

  성준이는 산에서 로봇처럼 완벽하게 움직이더니 지금은 그 로봇의 연료가 바닥이 난 듯 이불 위에 쓰러져서 코를 골며 잔다. 아마 등산의 초보 중의 생초보를 데리고 다니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타닥. 타닥.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성준이가 사는 자그마한 집의 슬레이트 지붕을 두드린다.

  “생각보다 많이 내리네.”

  걱정스런 눈으로 문을 열고 하늘을 내다본다. 두텁지는 않지만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아까 새로 태어나던 햇살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인상을 쓰면서 문을 닫는다.

  “어제 노을이 졌으면 오늘은 맑아야 하는 것 아닌가?”

  지구과학 시간에는 그렇게 배운 듯하지만…… 세상이 뭐 교과서대로만 흘러가던가. 한숨을 쉬면서 다시 이불을 덮고 눕는다.

  “지이이잉

  휴대폰 진동소리가 느껴져서 급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다시 뺀다. 바보. 휴대폰은 이미 집에서 몰래 빠져 나올 때 두고 왔잖아.

  “지이이잉

  계속 들린다. 성준이 건가? 아니다. 내가 어제 휴대폰 번호를 물었을 때 머리를 긁으면서 폰은 없다고 했다.

  “지이이잉

  그럼 이 진동은 뭘까.

  “지이이잉

  알고 있잖아.

  “지이이잉

  시치미 떼지 마.

  “지이이잉

  오늘은 일요일이고.

  “지이이잉

  내일은 월요일이지.

  “지이이잉

  그게.

  “지이이잉

  뭘 뜻하는 지.

  “지이이잉

  알지?

  “지이이잉

  온다. 계속 문자가 온다. 아마 먹구름도 같이 몰고 왔나 보다. 받기 싫은데 계속 문자가 온다. 보기 싫은데 먹구름도 같이 왔다. 온다. 계속 문자가 온다. 아마 먹구름도 같이 몰고 왔나 보다. 받기 싫은데 계속 문자가 온다. 보기 싫은데 먹구름도 같이 왔다. 온다. 계속 문자가 온다. 아마 먹구름도 같이 몰고 왔나 보다. 받기 싫은데 계속 문자가 온다. 보기 싫은데 먹구름도 같이 왔다. 온다. 계속 문자가 온다. 아마 먹구름도 같이 몰고 왔나 보다…………

  “지이이잉

  “경치 진짜 죽였지?”

  산에서 내려와 성준이와 처음 만났던 그 장소에 도착한 뒤, 성준이가 찍은 사진을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찍었던 따가운 햇살을 받고 있는 산의 전경이며, 숲속의 나무들, 다람쥐, 새, 꽃, 붉게 물든 노을, 밤하늘, 그리고 아까 본 일출까지 있었다.

  “어? 야, 나도 찍었냐?”

  자그마한 액정 화면에는 힘들어서 죽으려고 하고 있는 내 모습들도 찍혀져 있었다.

  “내 특별히 이건 소장용으로 해주지. 가끔 힘들 때마다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오겠어. 요 표정 봐라.”

  웃겨 죽겠다는 성준이를 따라 나도 웃었다. 내가 저런 표정을 지으면서 산에 올랐구나. 표정 참…… 가관이네.

  “내가 사는 곳에 가서 좀 쉬었다 갈래?”

  벤치에 앉아서 연방 하품을 하는 내 모습을 보며 성준이가 물었다.

  “글쎄……”

  “어차피 버스는 많으니까 좀 쉬었다 가. 늦긴 하지만 아침밥도 좀 먹고.”

  “그럴까. 어디야? 멀어?”

  내 말에 성준이는 조금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설마 또 멀리 돌아서 가는 건 아니겠지? 이제 성준 내비게이션은 못 미더워서 말이지.”

  “아니야. 지금은 나도 힘들어서 쉬고 싶어.”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일어서서는 걷는다. 나도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배낭을 다시 어깨에 멘다.

  “그럼 오늘 가겠네?”

  살짝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성준이가 묻는다. 그래서 쉬다 가라고 했을까.

  “그래야지.”

  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리고 시선은 군데군데 낮게 설치되어 있는 가로등과 얼기설기 엉켜져 있는 전선들을 바라본다.

  “또 같이 산에 오를 생각 없어?”

  “……”

  이번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성준이도 그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실 다시 같이 산에 오를 거냐는 물음 보다는 오늘 가냐는 물음만 대답할 수 있을 만큼 크게 들렸다.

  ‘오늘 가네……’

  화가 나서 유리컵을 던져 박살내기는 쉬워도 이성을 되찾고서 그 유리컵을 바라보면 한숨만 나올 것이다. 내가 지금 그런 상황인가? ‘산’이라는 게시글을 봤고, 신기하게 손이 저절로 올라갔고, 흥분된 기분으로 등산용 물품을 몰래 사고, 휴대폰도 내던져 둔 채 아침 버스를 타고서 여기까지 왔지만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기쁨의 심장 박동 수 증가라기보다는 공포에 의한 증가가 나의 몸을 지배하고 있다.

  ‘너 왜 학원에 안 나왔어?’

  이렇게 묻는 학원 원장한테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학원에 같이 다니는 친한 친구들한테는? 아니, 이것보다 더 한 게 있지.

  ‘너 미쳤어? 휴대폰도 놓고 가고, 지금 뭐하는 거야 이게! 어!’

  아빠의 고함과 날아올 몽둥이가 눈앞에 그려진다. 엄마의 반응이야 지금 중요한 시기가 어쩌구 저쩌구…… 아빠와 반응이 똑같을 거고. 동생의 반응도 나이 먹고 저게 뭐하는 것인가, 하는 눈빛만 보낼 것이다.

  “흐음……”

  깊은 한숨이 저절로 쉬어졌다.

  “……”

  내 한숨소리를 듣고 성준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맛있어?”

  “응.”

  작은 탁자 위에는 거친 밥과 풀 밖에 없었지만 어제 먹은 것이 빈약했던 데다가 하루 종일 등산을 했더니 내 위장은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뭐라도 집어넣어 라고 난리였다.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네.”

  밥을 깨끗이 다 비운 후 자리에 드러누운 성준이가 바깥을 보면서 말했다.

  “그러네.”

  나는 대답을 하면서도 하늘은 보지도 않았다.

  ‘내일 1교시가 뭐였더라. HR이던가. 자습이니까 잠 좀 보충하고. 그럼 2교시가 생물? 좀 애매한데. 3교시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속으로 계속 중얼댔다. 내일은 월요일이다. 오늘 최대한 컨디션을 좋게 해서 대비해야 한다. 월요일이 무너지면 나머지 요일이 무너지는 거야 불 보듯 뻔한 거니까.

  ‘8교시 보충이 지구과학. 9교시가…… 아, 문학이네. 그 다음은 야자. 흠. 아, 맞다 학원 숙제 덜했으니까 야자 시간에 하면 되겠다.’

  따뜻한 바닥에 낙서를 하던 손가락이 슬슬 느려진다.

  ‘숙제가 뭐였지. 월요일이니까 수학이네. 몇 페이지까지 풀어오라고 했더라……’

  손가락이 멈추었다.

  ‘그래…… 89페이지였지. 수학 선생이 그렇게 강조를 했으니……’

  멈춘 손가락은 이제 살짝 떨었다.

  ‘……그러고 보니 학교에도 숙제가 있었네……. ……본문 해석이던가…….’

  떨던 손가락을 들고 입을 막았다. 위장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급하게 일어서서는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우웨에엑!”

  아까 급하게 먹었던 음식물들이 쏟아진다. 누워있던 성준이가 놀라 달려와서는 알아듣지 못하게 뭐라고 말을 한다.

  “괜찮아. 괜찮아.”

  등을 두드려주는 성준이에게 손을 흔든다. 성준이는 걱정되는 얼굴로 물을 가지러 간다. 토악질을 너무 심하게 한 탓일까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타닥. 타닥.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타닥. 타닥.

  비가 오기 시작하나 보다. 먹구름 사이에서 빗방울들이 떨어져 지붕에 부딪히나 보다.

  “가는 거야?”

  “응.”

  성준이와 나는 커다랗고 기다란 시외버스를 향해 걸어갔다. 내 손에는 버스표가 들려있었다.

  “내가 찍은 사진 메일로 보내줄게.”

  “고마워.”

  “열심히 해.”

  “뭐?”

  “아니, 아니다. 빨리 타. 버스 출발하겠네.”

  나는 성준이에게 가볍게 손짓 인사를 하고는 버스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시트냄새가 나를 껴안았다. 여기 올 때도 이런 눅눅한 냄새가 났던가.

  버스기사의 버스표 검사가 끝나고 버스는 출발했다. 간줄 알았던 성준이의 모습이 버스 창 너머 보였다. 입을 굳게 다문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버스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다. 조금씩 흔들리는 느낌이 불쾌하게 나를 감싼다.

  내가 힘들게 올랐던 산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자세를 바꿔가며 본다. 시야에서 사라지자 머리를 의자에 기댄다. 몸에 힘이 빠진다.

  ‘성준.’

  아마 평생 다시 못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일은 월요일이지.’

  아마 저 산도 평생 다시 못 오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 같이 산에 오를 생각 없어?’

  이 질문에 나는 왜 대답을 하지 못 했을까. 그냥, ‘그래’ 이 한 마디만 하면 됐는데. 그렇게 학원 원장이 무섭던가? 주위의 눈치가 무섭던가? 엄마, 아빠가 무섭던가? 학교가 무섭던가?

  그렇게 산에 오르면 뭐하나. 나 자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싫다면서, 그 싫은 것들을 결국 나는 스스로 다시 생각해 내고 만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 평화로웠던 시간 속에서 나 스스로 생각해 내버렸다. 그리고 스스로 그 평화를 깼다.

  “지이이잉

  문자를 보지 않는다. 안 봐도 안다. 뻔한 내용이다. 그리고 그 발신자는 나일 것이다. 아마, 떠났던 그날 지금의 나에게 도착하도록 예약 설정을 해놓았겠지.

  “쯧쯧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항상 두려워하고 피했던 목소리.

  “쯧쯧쯧……”

  안타깝고 안쓰럽다는 목소리로 나를 위로한다. 아니, 위로가 아닌 것 같다. 어차피 이렇게 다시 돌아올 것을 뭐 하러 그런 개고생을 했냐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흑……”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건가? 정말 내 소설은 순수하지 못한 건가? 아직도 모르겠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토악질한 것도 아닌데.

  “흑흑……”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웅성댄다. 저들끼리 뭐라고 말해댄다. 신경 쓰지 않는다. 눈물은 계속 떨어진다.

  ‘난 왜 탈출하지 못한 거지?’

  고개를 돌려서 아까의 그 산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보이는 것은 회색의 아파트들뿐이었다.

  ‘난 왜 빠져나가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오는 거지?’

  힘들게 산을 오르면서도, 텐트를 치면서도, 사진을 찍으면서도, 집을 나오고 퇴학을 했다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 웃고 있던 성준이가 떠올랐다.

  ‘넌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야?’

  내 입김으로 뿌옇게 된 창문을 만진다. 여름이라 차가울 리가 없을 텐데 차갑다.

  - ……나는 그 이탈된 궤도 위에 머물러 있을 거야. 그러고 있으면 언젠가는 나만의 길, 나만의 궤도를 만들면서 예전의 궤도와는 멀어지고, 결국은 도피가 아닌 탈출, 완벽한 이탈을 할 수 있겠지……

  성준이가 이렇게 말했었다. 그렇다면 나는 성준이와 같아 질 수 없는 존재인가? 이탈된 궤도 위에도 머물 수 없는 존재. 부메랑 같은, 요요 같은. 던져도 날려도 계속해서 되돌아 오는, 그런 존재.

  부우우웅.

  집을 향해가는 버스의 엔진소리. 단조로운 음의 기계소리가 나의 물음을 대신하듯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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