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지팡이소리

  • 작성자 한 장의 날개
  • 작성일 2011-12-20
  • 조회수 682

지팡이소리

1

  “쯧쯧, 세상 말세야. 어떻게 경찰이……”

  “그러게. 국민들을 지켜야할 경찰이 저렇게 되니까 이거 어디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뒤로 하고서 우신과 태준은 신발을 신고 장례식장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아직 태양이 완전히 지지 않아 주황빛과 노란빛으로 꽤나 아름다웠다.

  칙    

  태준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서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마신 뒤 후, 하고 불자 연기가 공중에 엷게 퍼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서 우신은 미간을 찌푸렸다.

  “끊는다며.”

  우신의 말에 태준은 마치 자신이 담배를 핀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담배. 안 끊어지더라고.”

  몇 모금 더 빨아 마시고서 아직 불이 붙은 담배를 쓰레기통에 비벼 꺼버리는 태준을 보며 우신은 그래도 이해가 간다고 생각을 했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형사라는 직업, 어떻게든 스트레스를 풀어야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 막 경찰관의 장례식장에서 나온 직후였다. 태준도 우신도 여러모로 심경이 복잡했다.

  “이번 사건, 우리 담당 맞지?”

  “맞지.”

  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뭘 해야 하지?”

  뭘 해야 하지? 이 질문에 우신은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그냥 평범한 살인사건이라면, 즉 범인이 잡히지 않은 상태라면 아주 할 일이 많았다. 증거 수집과 탐문 수사 등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별로 할 것이 없었다. 범인이, 사건 발생 한지 12시간 채 되지 않아 잡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엔 뭔가 이상한 게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이상한.

  “일단 어제 범인이 잡혔으니까, 장례식도 다녀왔고, 이제 다시 한 번 사건현장에 가봐야지. 여기랑 가까운데. 범인 취조도 해야 하고.”

  “사건 현장? 증거물 수색 다 끝났잖아. 그리고 취조도 이미 했고. 취조한 결과는 영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야지. 사건 현장에 다시 가보자고.”

  그 말에 태준은 바지를 털면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하늘을 보자 오늘의 해가 곧 저물 기세였다. 매일 매일 꿋꿋이 오는 고단한 하루가 저 저무는 해처럼 빨리 지나가버리길 태준은 그렇게 빌었다.

  “왜 그렇게 빨리 장례식을 시작 한 건지…… 단서가 더 있을지도 모르는데.”

  “유족들이 빨리 시신을 돌려달라고 했잖아. 부검도 빨리 끝났고. 게다가 범인도 바로 잡혔잖아.”

  우신은 태준의 말을 들으며 열심히 사진들을 뒤적거렸다. 신고 접수를 받고 감식반들과 태준, 우신이 바로 출동해서 찍은 시신과 여러 증거물들 사진이었다.

  “다 왔다.”

  우신과 태준이 멈춰선 곳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도로변이었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진 곳에는 사거리와 육교가 있었고 어느 곳에나 노란색과 빨간색의 자동차 불빛들이 번쩍였다. 가끔씩 클랙슨 소리도 들려왔다. 그 사이에서 이물질처럼 이질감을 풍기면서 둘러쳐져 있는 출입금지 테이프와 그곳을 지키고 서 있는 경찰관이 우신의 머릿속에 물음표를 만들었다. 전, 혀, 범죄를 일으키기에 이상적인 공간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범인은 여기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지.”

  우신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하얀색 테이프가 시신이 쓰러져 있던 자세를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피가 튀어있던 자리를 표시하는 하얀색 동그라미도 눈에 들어왔다. 빨간불 때문에 정차한 운전자들은 이것들을 한번 씩 신기하다는 듯 보더니 파란불이 켜지자 다시 운전대를 잡고 슥 빠르게 지나쳐갔다.

  “한 번 보긴 했지만 그땐 슬쩍 본 것 정도였고. 어차피 범인도 잡혔으니까 느긋하게 다시 한 번 점검해보자고. 피해자가 어떤 상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

  우신의 물음에 태준은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기억나기는 하지만 다시 말해달라는 제스처였다. 그 몸짓에 우신은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검시관에 의하면 대걸레로 이마를 3번 맞았대. 팔은 골절. 아마 한번 맞고서는 바로 기절하듯 쓰러지려고 했을 거야. 그리고 두 번째에는 막으려고 팔을 들었겠지만, 사람의 뼈가 단단한 막대기를 막기란 무리였겠지.”

  “그리고 확실하게 하기위해서 두 번 더 때렸고.”

  “그렇다고 봐야겠지. 범인은 발견 당시에 옷에 피가 묻어있었는데, 조사 결과 피해자의 키 정도 높이에서 뿜어져 나간 피자국과 동일했대. 혈액은 피해자 것과 일치. 바로 저기 나무 밑에서 발견된 대걸레에서 피해자의 혈액이 검출됐고, 범인의 지문도 발견됐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기 저 CCTV에 피해자가 지나가는 게 찍히고 8초 뒤에 대걸레 막대기를 들고 가는 범인이 찍혔어. 이건 거의 뭐, 결정적인 증거물이지. 게다가 엄청난 수의 길을 지나가던 목격자. 그들의 증언은 대부분 너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말리지도 못하고 경찰에 신고도 못했대. 그 사이에 범인은 달아났고. 하지만 하루도 되지 않아 집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벌벌 떨고 있던 범인을 발견 했지.”

  줄줄 외듯이 말하는 우신의 말을 들으며 태준은 이번 사건에는 정말로 딱히 할 일이 없을 것 같다고 느꼈다. 사건을 맡았을 때 해결해야 할 두 가지, ‘어떻게?’와 ‘왜?’ 중 ‘어떻게?’가 이미 풀렸다. 이제 범인을 찾아가 ‘왜?’만 해결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럼 이제 범인만 만나서 왜 죽였는지만 물어보면 되겠네.”

  태준은 가려고 자세를 취했지만 우신은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서 움직이질 않았다.

  “왜 그래? 증거물은 이미 다 확인했잖아. 가야지.”

  “……근데 범인이 잡혔을 때부터 느낀 거였는데 말이야……. 이상하지 않냐?”

  “그래, 너 오늘 좀 이상한 것 같다. 빨리 가자. 잠 온다.”

  “아니, 그게 아니고. 이 사건 현장, 이 사건 말이야. 너도 이상하다고 느꼈을 텐데? 굳이 이 현장을 범인이 선택한 게 좀 이상하잖아.”

  사람들이 흘끔거리면서 발걸음을 옮기는 주변을 슥 하고 둘러보더니 태준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도 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사실 아주 냉정하고 똑똑한 범인이 아니고서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 이성을 잃고 이런 공공장소에서도 범행을 지르는 일이 많잖아. 그런 사건 현장을 니가 좀 많이 못 봐서 그런 거 같은데?”

  “이성을 잃은 사람이 20분 동안이나 사람을 쫓아서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우신의 말에 태준은 살짝 움찔했다.

  “그게 아니면 뭔데?”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고. 난 이게 좀 많이 걸려. 김반장님도 그러셨지만, 왜 피해자는 이마를 맞고 죽었을까. 즉 왜 피해자를 막아보지도 못하고 죽었을까.”

  태준은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앞. 뒤가 아니라 앞. 보통 사람은 범행을 저지를 때 뒤를 노린다. 앞을 노리고 달려들면 상대방이 저항할 수도 있으니까 저항을 못하게 하고 자신이 선점을 하기 위해서 뒤를 노리는 것이다. 그리고 만화나 소설에서만 나올 것만 같은 다잉메세지를 쓰지 못하게 하려고 뒤를 노리기도 한다. 뒤에서 공격을 하면 그만큼 자신의 모습을 볼 확률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피해자는 이마를 맞고 죽었다.

  “혹시, 뒤에서 불러서 일부러 돌아보게 한 건 아닐까? 내가 담당했던 사건 중에서도 그런 범인이 있었어. 반드시 자신에 의해 죽어가는 사람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봐야 직성이 풀린다던 사이코. 게다가 범인은 막대기를 가지고 있었잖아. 자신이 우세하다고 확신하고 그랬을 수도 있지. 아, 바로 뒤에서 때렸을 수도 있고. 그러면 아무리 경찰이라도 피하기는 힘들었겠지.”

  “음, 그럴 듯해. 만약 죽어가는 경찰의 모습이 보고 싶어서 이마를 때렸다면 범인은 이 경찰에게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 있어야겠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성립 안 될 것 같아……”

우신은 말을 하다가 조금 뜸을 들였다.

  “피하려고 했다면 약간 비켜가듯 맞아야 정상이지. 거기다 만약 니 말대로 범인이 부르고 피해자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맞았다면 그것도 역시 비켜 맞아야 해. 내 의견만이 아니고 부검의도 비슷한 의견이었어. 그런데 이 경찰은 이마의 정면을 제대로 맞았어. 당황해서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40살이 되었어도 경찰들 중 체력이 우수한 경찰이었어. 그게 아니라고 치더라도 사람의 몸은 생각보다 빨라. 막대기를 피하는 것은 못했다한들 고개를 움츠리는 것은 가능해. 공포영화를 볼 때 놀라는 장면이 나오면 우리의 몸이 빠르게 움츠리는 것처럼. 만약 이 경찰이 움츠리기라도 했다면 그런 상처가 나올 수는 없어.”

  우신의 말을 들으면서 태준은 뭔가 오싹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차가워지는 가을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기다 막대기의 끝에만 피가 묻어있었어. 바로 뒤에서 때렸다면 막대기의 중간에 피가 묻어있었겠지.”

  바람이 불어와서 출입금지 테이프를 흔들었다. 부시럭 하는 테이프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 웃음소리, 자동차 바퀴소리, 클랙슨소리 등이 들려왔다.

  “나도 처음에는 심각하게 생각 안했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갑자기 심각해지네. 그런데 진짜로 생각해 보면 이상하잖아? 피해자는 경찰이야. 경험이 풍부한 경찰관이라고. 많은 사건들을 경험했을 텐데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막대기를 피해보려고 하지도 않았어. CCTV에 찍혔으면 확인해보겠지만 저 멀리 보이는 주유소 근처의 CCTV에서 여기까지는 카메라가 하나도 없어. 하지만 카메라가 없어도 여러 가지 정보들을 조합해보면…… 뭔가 이상해.”

  태준은 고개를 들어서 이제 완전히 저물어 가는 하늘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기지개를 켰다.

  “그래. 이상하네. 역시 이 유태준의 하루는 이렇게 고달프고 머리 아파야지. 자, 그럼 증거물은 이미 다 나와 있으니까 정말로 범인한테 가 봐야지. 도대체 왜,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살해했는지 단서를 잡으러.”

  픽 하고 웃으며 우신도 일어났다.

2

  ‘어떻게 저렇게 착하게 생길 수가 있지?’

  자신이 체포할 때도 봤고 체포한 다음 취조할 때도 봤지만 태준이 문을 열고 범인을 보았을 때 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생긴 것으로 범인을 판단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었다. 평범하게 생긴 사람도 범죄를 저지른다. 평범하게 생긴 사람들은 이 세상을 차지하는 사람들의 대다수이고, 그 대다수의 사람들 사이에는 범인이 있으니까.

  우신이 자리에 앉자 범인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색 긴 머리에 피부색은 약간 갈색이었다. 전체적으로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서류에 적힌 32세 보다는 어려 보인다. 태준은 앉지 않고 우신 뒤에 서서 이렇게 판단을 내렸다.

  “또 뭘 물어볼 건가요? 전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요.”

  기운이 전혀 없는 가냘픈 목소리였다.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였는데 그것 때문에 더욱 힘들어 하는 것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래요? 사람을 죽였는데 반성하는 말도 없나요? 그리고 힘든 척 하지 마세요. 사람 죽여 놓고 힘들어 하는 척 한다고 해서 감싸 줄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태준의 말에 범인은 슬쩍 노려보았고, 우신은 손을 들어서 태준을 제지했다.

  “그만해. 아, 이 친구가 입이 좀 거칠죠. 하지만 당신이 임진현, 네, 경찰관 이름이 임진현입니다. 임진현 경찰관을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 증거물들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고, 당신이 저희에게 직접 시인했고요. 제 얘기가 맞지요?”

  범인은 우신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이더니 살짝 끄덕였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고개를 끄덕였다고 믿을 수 없을 움직임이었다.

  “당신은…… 아, 계속 당신이라고 말하기는 그러니까 이름을 불러드리죠.”

  비웃는 듯한 웃음을 흘리는 태준.

  “최지영. 최지영씨는 확실히 임진현 형사를 죽였습니다. 혹시 그가 경찰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다시 고개의 약한 움직임.

  “그럼, 이렇게 말해보죠. 그 임진현 경찰관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습니까?”

  “개, 인, 적으로?”

  “그러니까, 연락도 하는 그런 사이였냐 이거죠.”

  “연락, 같은 거는 요즘 같은 세상에는 조금만 조사하면 다 알지 않나요? 문자로 무슨 내용을 주고받았는지도 경찰에서 수사에 필요하다고 하면 다 알 수 있는 걸로 아는데요.”

  최지영의 말에 우신은 헛기침을 하고 태준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 개인적으로 아느냐고 물으셨죠. 형사님께서 물으신 그런 개인적으로 아느냐, 그건 아니네요. 전 알지만, 그 인간은 절 알려나 모르겠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진짜 많이 들으셨을 테지만, 한 번 더 묻죠. 도대체 왜 범행을 저지른 겁니까? 말씀하시는 걸로 봐선 원한관계가 될 수는 없는데요. 이전에 물었을 때는 아무런 말도 안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살인을 했다는 증거도 있는데 계속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면 손해를 볼 수도 있으니까요.”

  칙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이 맴돌았다. 침묵 속에서 태준은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이상하다. 이상한 사건이야.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한 사건이야.

  “왜…… 죽였냐고요?”

  긴 침묵의 시간을 깨고 이 말을 하면서 최지영의 입고리가 약간 올라갔다. 미소, 혹은 일그러짐.

  “죽어야 했으니까.”

  우신은 서류를 뒤적이다가 지영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태준은 담배를 새로 물다가 멈칫했다.

  “죽어야 했어. 당연했어. 형사님들도 조심하세요. 혹시 알아요? 푸흐흐흐…… 흐흐흐흐……”

  “미친 새끼.”

  담배를 내던지고서 달려들려고 하는 태준을 우신이 겨우 막아 세웠다.

  “그만해! 참아.”

  “시발. 넌 화도 안나? 저 미친년이 계속 쪼개잖아!”

  태준이 다시 몸에 힘을 주자 우신이 소리를 질렀다.

  “그만!”

  결국 우신은 태준을 데리고서 취조실 밖으로 나갔다.

  “흐흐흐흐……”

  최지영의 단조로운 음의 웃음소리가 취조실 안에서 메아리쳤다. 길고 길게. 짧고도 길게 여운을 남기면서.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

  차문을 닫으면서 우신이 아직 화가 난 듯 인상을 쓰고 있는 태준에게 물었다.

  “화는 무슨. 그런 사람들 한두 명 보나. 그건 벌써 잊었고, 그나저나 여기가 그 범인의 집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우신은 참 편할 수도 있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태준이 주장하는 자신의 성격대로라면 말이다. 하지만 우신은 아직 태준의 마음은 아까 취조실에서 들었던 범인의 긴 웃음소리를 다시, 계속 듣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범인의 신원. 다시 한 번 싹 불러줘?”

  우신이 아파트 계단을 오르면서 서류파일을 들어 태준 앞에다 대고 흔들었다.

  “그거 좋지. 난 그런 거 안 외워서 벌써 다 까먹었다. 그리고 니가 한번 싹 읽어줘야 내 머릿속에서 정리가 돼.”

  태준이 대답하면서 아파트 문을 열었다. 그러자 일반적인 아파트의 녹슨 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신발장 쪽에는 출입금지 테이프 자국이 남아있었고, 여러 가지 증거물들을 닥치는 대로 수집하려고 했는지 여러 물건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태준과 우신은 조심스레 신발을 벗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이름은 아까 들었듯이 최지영이고. 나이는 32세야. 그런데 중학생 딸이 있었어.”

  “벌써? 아, 맞다. 서류에서 봤던 게 기억나네.”

  태준은 신발장 위에 놓인 다정한 모습으로 찍힌 모녀의 사진액자를 보았다. 사진에 찍힌 최지영의 딸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최지영의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아서인지 둘이 꽤나 닮아보였다.

  “그래. 딸의 이름은 이수현. 나이는 14세, 중학교 1학년이지.”

  “쉽게 말해서…… 사고 쳤다는 말인가?”

  “속되게 말하자면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남편인 이승수와 1살 차이가 나는데, 고등학교 때 만나서 우여곡절 끝에 독립해서는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대.”

  “그리고?”

  “그런데 안타깝게도 남편인 이승수씨가 3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어. 뺑소니지. 급하게 응급실로 실려 갔지만 안타깝게도 과다출혈로 사망.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새벽이라 신고가 너무 늦었어. 나름 열심히 직장생활을 해서 살림이 좀 나아지려고 할 때쯤 그런 사고를 당해서 최지영의 상태가 말도 아니었다고 이웃 주민이 말했어.”

  “드라마 뺨치는 각본이네.”

  서류 종이가 부스럭대는 소리를 들으며 태준은 집안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감식반들이 와서 여기저기 뒤져본다고 어지럽혀 놓은 것도 있겠지만 본래 아마 정리가 잘 되지 않은 집이었을 거라고 태준은 짐작했다. 우신의 말을 듣지 않아도 집안 자체에서 고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것이 께름칙했다.

  “그리고…… 이게 중요한데. 바로 7개월 전에 최지영의 딸이 자살했어.”

  우신의 말에 태준은 굽혔던 허리를 바로 펴고 우신을 바라보았다. 중학생 1학년의 자살, 그 소식이 태준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나도 얼핏 듣긴 했는데. 왜 자살 한 거야?”

  “그때 출동한 경찰들도 알아내지 못했어. 유서도 없었고. 뛰어내렸지만 바로 죽지는 못했어. 베란다에서 머리부터 수직으로 떨어졌는데도……”

  태준은 베란다 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6층이지만, 높다. 적어도 중학교를 한창 다닐 여학생이 충동적으로 뛰어 내릴 만한 높이는 아니었다.

  “떨어지다가 니가 지금 보고 있는 나무에 한번 걸렸어. 그다음 떨어져서 그나마 충격이 덜했지. 뭔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주민의 신고를 받고 경찰과 구급차가 바로 출동했고, 입원해서 수술도 했지만 결국 이틀 뒤에 숨졌지. 쯧…… 도대체 얼마나 힘들었으면 여기서 뛰어내릴 생각을 했을까.”

  베란다 문에 기대어 있던 태준은 윗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물다가 뒤를 돌아 거실을 한번 훑어보고는 다시 담배를 집어넣었다.

  “꽤나 활발한 아이였다고 이 아파트 주민 거의 전체가 증언했어. 대단해. 그런데 그런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몇 달이 안 되어 우울해졌대. 이것도 주민들의 증언이고. 그 당시 그 자살사건을 맡았던 형사도 증거부족으로 해결 못했다고 기록했어.”

  “꽤나……”

  태준이 베란다에서 나와서는 거실에 있는 검은색 가죽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신이 보기에 태준은 너무나도 피곤해보였다.

  “콩가루 같은 집안이네. 그 남편의 뺑소니 사건은?”

  우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사건 역시 해결되지 못했다. 목격자도 없고, CCTV에도 찍힌 것이 없고, 자수한 사람도 없는 그야말로 완전범죄였다.

  “충분히 정신이 나갈 만도 하지만, 그래도 살인은 살인이지. 그런데 이번 범인은 정신이 나간 건 아니야.”

  “정신과 검진을 받아봤는데 정상이라고 나왔어.”

  “그런 걸 뜻하는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이유가 있는 살인이라는 거야?”

  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평수가 좁아서인지 태준이 산만하다고 우신은 잠시 느꼈다.

  “모든 살인자들에게는 이유가 있지. 자신의 범행을 합리화 시키는 이유.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번 사건은 진짜 이유를 알고 싶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젊은 어머니가 왜 아무 연관도 없는 경찰관을 살해했는지.”

  “나도 그래.”

  우신은 서류파일을 소파위에 던지면서 말했다. 그리고 방안을 다시 새삼스럽게 둘러보았다. 범인의 집이라지만 좀 치우고 가주지 하는 마음이 살짝 들게 만들만큼 지저분했다. 우신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앨범은 주워서 펼쳐보았다. 행복해 보이는 추억의 단편들이 색깔 펜에 갇힌 그날의 느낀 점들과 함께 불규칙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이런 걸 볼 때 새삼 살인자도 우리주위에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낀다.’

  우신은 이렇게 생각하며 앨범을 원래 자리였을 선반위에 놓아두었다.

  ‘아직 가족이라는 온기가 남아있어. 이 집안의 가장은 3년 전에, 새싹은 7개월 전에 떠났지만, 그리고 어머니는 살인자가 되었지만 아직 여기는 가정의 냄새가 나. 그런 곳을 우리가 멋대로 뒤지고 어지럽혀도 될까.’

  마치 액자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이 자신을 노려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신은 그 시선을 애써 피한 채 여기 저기 널려있는 물건들을 정리했다.

3

  “너 임진현 경찰, 잘 알아?”

  불은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서 태준은 커피를 마시고 있는 우신에게 물었다.

  “아, 이번 피해자? 잘 몰라. 몇 번 마주친 것 같긴 한데…… 야, 근데 니가 더 오래 여기에 있었잖아. 그럼 니가 더 잘 알겠네.”

  “나야 원채 인간관계가 좁아서.”

  “자랑이다.”

  모처럼 햇살 좋은 아침이었다. 하지만 두 형사는 온몸이 쑤셨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정보를 모으며 이 사건이 일어난 이유를 추리해봤지만 전혀 성과가 없었다. 결국 서에서 숙식만 한 꼴이 되고 말았다.

우신은 그것 때문에 머릿속과 마음이 엉망이었다. 뭔가 전혀 풀리지 않아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았다.

  “니가 좀 임진현 형사에 대해서 정보를 되는 대로 다 찾아봐 주면 안 될까?”

  “뭐? 안 될 거야 없겠다만, 피해자의 정보…… 나름대로 다 찾아봤지 않나?”

  “그건 신상 정보였고. 수사 기록 같은 것들 말이야. 한마디로 임진현 형사의 파일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음표 두 개를 두 눈에 달고 있는 우신에게 태준은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진짜 웬만한 건 다 찾아봤잖아. 범인의 아파트 주민들도 다 조사하고 탐문도 해보고, 딸 학교까지 찾아가고 남편 직장까지 찾아가보고, 모든 증거물들 재검토해보고, 해볼 건 다 해봤잖아. 그런데 이제 딱 조사 안 해본 게 있지.”

  “그게 니가 말한 그거다? ……좋아. 포기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잘됐네. 그런데 좀 오래 걸릴 걸. 그리고 그걸 우리가 볼 수 있는지도 한번 확인해 봐야 하고.”

  “고마워. 아, 우리가 직접 안 본 게 또 있네.”

  “뭔데?”

  “CCTV.”

  어느 정도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요란한 색을 한 플라스틱 미끄럼틀이 흙먼지가 날리는 모래 위에 세워져 있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안이라 그런지 햇빛은 잘 들어오지 않았다.

  태준은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관리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닫혀 있는 문을 손으로 두들겼다.

  끼익    

  “누구십니까.”

  황토색 비슷한 옷을 입은 흰머리의 중년 남성이 나왔다. 관리소장이지만 전형적인 경비원처럼 생겼다, 라고 태준은 생각했다.

  “형사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태준은 경찰신분증을 들고 유리창 안으로 손짓을 했다. 소장은 얼굴이 잠시 굳더니 들어오라고 했다.

  “연락도 없이 와서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기 아파트 104동의 경찰관이 살해당한 건 아시죠? 기자들도 많이 찾아왔을 텐데요.”

  소장은 아, 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 기자들이 몰려온 날을 기억해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지독한 기자양반들.”

  “하하. 기자라는 사람들이 원래 좀 끈질기죠. 그런데…… 여기 아파트 단지에는 CCTV가 몇 대나 설치되어 있죠?”

  “보자, 바로 저 앞의 놀이터에 하나. 아파트 입구, 엘리베이터마다 하나. 정문에 하나. 후문에 하나. 그리고…… 지하 주차장에 각 층 모서리마다 하나씩 있습니다.”

  태준의 물음에 소장은 손으로 여기저기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럼 지금 보관하고 있는 녹화 자료는 며칠 전까지 기록이 되어 있죠?”

  “아마, 3주 전까지 정도는 기록되어 있을 겁니다. 한 달 정도까지는 보관하라는 말이 떨어져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컴퓨터로 저장되죠?”

  “네.”

  “좀 볼 수 있을까요?”

  소장은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태준이 들어가자 소장은 몇 대의 컴퓨터를 보여주었다.

  “이겁니다.”

  컴퓨터에 불이 환하게 들어왔고 몇 개의 분할 된 화면들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것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감시는 경비실에서 하고, 여기 관리사무소에서 그 영상들을 저장합니다. 3주나 4주정도 지나면 용량이 부족해서 예전 것들을 오래된 순으로 지워나갑니다.”

  “그렇군요. 그럼, 녹화된 것들 좀 가져가겠습니다.”

  “가져가는 건 좋은데…… 너무 유심히는 보지 마세요.”

  “네?”

  “아니, 아닙니다. 다 가져가신다고요?”

  “그래서, 다 들고 와서는 지금 다 보려고 하고 있냐? 니가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우신은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상자 속에는 임진현 경찰에 대한 모든 기록이 인쇄되어 있는 종이 묶음들이 그득했다.

  “설마 다 보겠냐? 임진현 형사가 언제 나가고 들어오는지 뭘 하는지 그거만 보면 되지. 그리고 빨리 돌려보니까 그리 오래는 안 걸려.”

  “퍽이나. 하긴 경찰들은 주로 집에서 밖으로 들락날락하지는 않으니까 니 말대로 오래 걸리진 않겠다.”

  종이가 펄럭이는 소리가 나고 텔레비전의 나지막한 진동소리가 났다. 종이뭉치를 한참을 뒤져보다가 우신이 입을 뗐다.

  “오, 임진현 경찰관이 한 일이 꽤 많네.”

  태준은 노트북으로 화면을 멈추고 우신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 나도 다른 형사들한테 물어봤는데 매사 적극적이어서 해결하는 것도 많았대. 그래서 모두들 이번에 살해당한 걸 아쉬워하는 눈치더라고.”

  “그럼 그만한 능력이 된다는 소린데.…… 야, 잠깐 이것 좀 봐봐.”

  “뭔데?”

  “이번 사건 범인의 딸의 자살사건의 현장에 임진현 경찰이 가장 먼저 출동했는데 수사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어. 수사가 막 진행되려고 할 때 가벼운 현기증을 보이면서 쓰러졌었대나 봐. 병원에서는 딱히 병이라고 할 만한 것이 발견되지 않아서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으로 처리했대.”

  “뭐야?”

  의자에 앉아 있던 태준은 급하게 의자에서 일어서 우신에게 다가갔다. 뭔가 사건이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말로 형용하기가 불가능한 기분이 드네. 눈 빠지도록 CCTV를 봐야겠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의심하면서 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지만……”

  “어, 근데 아파트 CCTV만 보는 거 아니었어?”

  약간 흐릿하게 나오는 텔레비전에는 주황색 가로등불이 켜져 있는 도로변을 찍은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범인이 찍힌 CCTV만 봤지 경찰이 찍힌 건 자세히 안 봤잖아? 어, 저기 가네.”

  화면 속에서의 임진현 경찰은 시체가 발견된 그때 입고 있던 검은색 재킷을 입고 양 옆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태준은 죽은 사람이 화면 속에서 걸어 다니자 뭔가 오묘한 감정이 들었다.

  “진짜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그것만 찍혀있으면 참 좋을 텐데. 하필이면 그 장소에는 또 CCTV가 없어요. 봐, 저렇게 양 옆을 두리번거리면서 걷는데 어떻게 살인을 당한 거야?”

  우신은 투덜거리면서 다시 종이묶음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우신이 눈길을 돌리고서 몇 줄을 읽고 있자 태준이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왜 그래?”

  “임진현 경찰이 그날 누구랑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는 거, 우리가 들은 적이 있었던가?”

  “……아니. 그런 건 들은 적이 없어. 분명 통화기록으로도 최근 몇 주간 그런 약속을 주고받고 한 건 전혀 없었어. 왜?”

  “물론 꼭 약속을 전화나 문자를 통해야만 잡을 수 있는 건 아니지…… 그럼 그건 그렇다고 치고……”

  태준은 텔레비전에 연결된 노트북으로 화면을 10초 전으로 되감았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대체 누구지?”

  “이제는 정말로 당신의 말이 필요합니다. 아주 제대로 된 말이요. 최지영씨. 도대체 어떻게 죽인 겁니까? 이제 재판일도 다 와갑니다. 그냥 아주 다 비밀로 부치고 감옥에 들어가시려고요?”

  약간 격양된 우신의 음성이 방안을 울렸다.

  “감시 카메라로 다 보셨을 텐데요. 그때도 저보고 대걸레를 들고 가는 제 모습이 찍혔다고, 그게 확실한 증거라고 하셨잖아요. 근데 이제 와서 뭐가 더 필요해요?”

  힘없는 최지영의 목소리에 태준은 책상위에 쾅 소리 나게 손을 올려놓았다.

  “이제 왜 죽였냐는 말은 신물 나서 못 물어보겠고, 우리가 묻고 싶은 건 이제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당신이 그 경찰관을 죽일 수 있었느냐 하는 것.”

  “……대걸레로 그 인간의 머리를 내리쳤어요. 살금살금 뒤로 걸어가서요. 됐어요?”

  그 말에 태준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인쇄된 칼라 사진을 봉투에서 꺼내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자꾸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군요.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당신에게 이익이 간다고 생각할 수는 없고. 그럼 진실을 말하면 뭔가 당신에게 안 좋습니까? ……그건 어떻든 상관없습니다. 다 필요 없고, 궁금한 건 이겁니다.”

  태준은 사진을 지영 쪽으로 내밀었다.

  “어떻게, 당신은, 그 경찰관을 죽일 수가 있었던 거죠? 솔직히 이 질문은 우리가 수사를 할 때부터 계속 해왔던 질문입니다. 비록 40대이지만 경찰관을 정면에서 때릴 수가 있었느냐, 그것도 멀리서 다가오면서 때릴 수가 있었느냐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질문은 아직까지 유효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발견한 도로 옆 감시카메라에서 발견된 이 영상 때문에 우리의 질문이 더 복잡해진 겁니다.”

  밤이어서 어둡게 나온 사진에는 여러명의 사람들, 그리고 한가운데는 임진현 경찰관이 걸어가고 있는 영상을 포착한 장면이 담겨있었다. 태준이 내민 그 사진을 지영이 들어보였다.

  “당신도 봤겠죠. 그 풍경을. 그 영상이 나오고 20초 뒤에 대걸레를 든 당신의 모습이 나왔으니까. 그 사진을 자세히 보세요. 임진현 경찰관 근처에 있는 빨간색 스웨터를 입고 목도리를 한 남자가 보이겠죠.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

  “없나요? 그럴 리가 없을 텐에요.”

  태준은 커다란 종이봉투에서 또 다른 사진들을 꺼내었다. 그리고 지영이 볼 수 있도록 내밀었다. 사진은 2번부터 14번까지 번호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사진 밑에는 지영만 찍힌 사진이 스테이플러로 찍혀져있었다.

  “번호대로 한번 보세요. 아, 들추지는 말고. 2번에는 아주 잘 나온 당신의 사진이 있을 텝니다. 밑에 있는 사진도 똑같아요. 그리고 그 근처에는 아마도 임진현 경찰이 있었겠죠. 그리고 그 같은 시각 근처의 또 다른 여러 대의 감시카메라에 찍힌 그 빨간색 스웨터 남자가 보이겠죠. 3번부터 8번까지 연속된 그림으로 생각해보면 빨간색 스웨터 남자가 맨 앞, 그리고 임진현 경찰관이 빨간색 스웨터를 만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걸어가는 게 보입니다. 아마 대화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죠. 그리고 밑에 스테이플러로 찍혀진 당신의 사진이 찍힌 시간을 계산을 해보면 당신은 그들을 따라가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여기 10번에서 뭔가 다른 움직임이 생깁니다. 이 빨간색 스웨터의 남자가 뒤로 쳐지는 겁니다. 임진현 경찰관의 뒤로요. 왜 그랬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자연스럽게 헤어지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13번부터는 임진현 경찰과 당신의 모습은 나오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못 나온 거겠죠. 이 12번에서 13번 사이가 찍힌 시간은 당신이 살인을 저지른 시간과 동일한 시간입니다. 그 증거로 이 영상이 찍힌 시간 뒤에 달려가는 당신의 모습이 찍힌 다른 영상이 있습니다.”

  ‘살인’이라는 말에 지영이 침이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태준은나란히 펼쳐진 사진들 중에서 두 장의 사진만 뽑았다.

  “다른 것들은 그렇다 치고요. 바로 이 두 장의 사진이 저희들을 골치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이 12번, 즉 당신이 살인을 저지르기 직전이라고 봐도 좋을 사진에는, 이 정체불명의 빨간색 스웨터 남자가 임진현 경찰관의 뒤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남자는 CCTV의 화면으로 볼 때 아마 살인이 일어났던 현장 근처에 있던 횡단보도로 빠졌었겠죠. ……이제 말씀해 주세요. 어떻게 죽인 겁니까?”

  “……꼭 말해야 해요? 어차피 저는 말하나 안하나 감옥에 가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여기서 말해봤자 저에게 득 될 것은 전혀 없어요.”

  사진을 든 채로 태준은 할 말을 잃었다. 범인의 말이 맞았다. 범인이 어떤 방식으로 살인을 하느냐를 말하는 것은 범인에게는 아무 이득이 없다. 하지만 태준과 우신에게는 이 이상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을 기회였다. 갑자기 나타난 빨간색 스웨터. 범인을 잡는 것에만 급급해서 못 보고, 그저 지나가는 행인으로만 생각했던 빨간색 스웨터가 이번의 사건에 관련이 있느냐 없느냐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이 범인이 자신의 살해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물론 범인이 말한다 한들 만약 공범이 있다면, 그리고 그 공범을 감싸줄 마음이 있다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신과 태준은 범인에게 직접 물어보자는 것에 서로 동의를 했다. 아니면 별 다른 방법도 없었다.

  “푸흐흐흐……”

  조용하던 방안에서 갑자기 범인이 웃음을 터뜨렸고 우신과 태준은 잠시 굳은 채로 범인만 바라보았다.

  “정말 형사 맞아요? 무슨 추리가 그래요?”

  “저희는 아무런 추리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우신이 약간 인상을 쓴 얼굴로 말했다.

  “아니긴요. 지금 저를,”

  범인이 빨간색 스웨터를 입은 남자가 찍힌 사진을 들었다.

  “이 사람이랑 공범인지 아닌지 의심하고 있잖아요.”

  또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조용히 째깍거리는 소리를 흘려보내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태준은 속으로 꽤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형사라는 직업을 가진 남자를 두 명이나 마주보고 취조를 당하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모두 떨게 되어 있는데 이 범인은 별로 떨지도 않고 자신들의 말을 들으면서 우신과 태준이 말하는 의도까지 파학 한 것이다.

  ‘꽤 냉정한데……’

  범인의 그런 태도를 보고 태준은 범인이 다른 곳에서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그런 장소에서 죽인 게 아닐까 하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날 어떤 일들이 있었냐만 말씀해 드리면 되나요? 아니, 그것만 말할게요.”

  약간의 체념 섞인 목소리로 범인이 말했다. 우신은 긴장한 표정으로 녹음기를 꺼냈다.

4

  “딸깍.”

  녹음기가 재생되었다. 태준과 우신은 차안에서 아무 말 없이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 ……네 그것만이라도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우신의 목소리.

  - 큼큼. 그날…… 꽤 흐렸죠. 아침에는 꽤 비가 왔고. 일어나니까 몸이 꽤 아프더군요. 잘 때 몸이 안 좋아졌었나 봐요. 꿈에서 죽은 제 딸이 나왔었거든요. 어쨌든 아픈 몸을 이끌고 아파트 청소를 하러 나갔어요. 제가 아플 때 힘낼 거라고 볼 제 딸의 목걸이를 바지에 넣고. 제가 아파트 청소부 일을 구했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 네. 알고 있습니다.

  태준의 목소리.

  - 비로 얼룩진 복도를 청소하고 있었는데, 날이 흐려서 그런지 그날따라 기분이 안 좋았어요. 그런데 제 손에 잡고 있던 대걸레가 들어오더군요.

  - 그걸 흉기로 사용하겠다는 생각이 드신 겁니까?

  약간 격양된 태준의 목소리.

  - ……그렇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 다음엔 제가 어떤 생각을,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요. 아니, 아마 애초부터 계획 같은 건 없었을 거예요. 그냥 그 경찰이 퇴근할 밤이 되자 그 경찰의 집 앞 복도에 대걸레를 들고 청소하는 척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경철의 집에 가는 길에 멀리서 그 경찰이 나오는 것을 봤어요. 솔직히 당황했어요. 너무 급하게 걷는 바람에. 저도 그래서 따라갔어요. 그런데…… 아까 보여준 사진에 나온 그 빨간색 스웨터를 입은 남자가 나오더군요. 경찰보다는 조금 젊어 보이는. 그 남자가 경찰에게 접근하더군요. 당신들이 추측한 건 맞았어요. 대화를 했을 거라는. 저도 한번 들어보려고 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사람들이 많아서 안 되더군요. 이 뒤로는 정말 기억이 희미해요.

  - 희미하다는 건?

  약간 의심이 된다는 듯한 우신의 목소리.

  - 기억이 불분명하다는 거죠 뭐. 믿을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어요. 아무튼 그 스웨터 입은 남자와 경찰은 걸어가면서 얘기하더니 스웨터 입은 남자가 뒤로 슬쩍 빠졌어요. 아마 자연스럽게 헤어졌던 거겠죠. 당신들 말처럼. 그런데 그 스웨터 입은 남자가 경찰을 가리더군요. 그래서 제가 살짝 옆으로 비켜서 걸었어요. 근데…… 그 남자가 절 보더군요. 유심히 본 건 아니고…… 그냥 스쳐봤어요. 그런데 눈을 좀 크게 뜨더니 깜빡 거리는 초록불이 켜진 신호등을 보고 횡단보도로 달려갔어요. 그리고…… 그때였죠. 제가 그 경찰에게 달려간 시점이. 솔직히 저는 제가 실패할 줄 알았어요. 상대는 덩치가 큰 경찰. 제가 아무리 대걸레를 들었다고 해도 안 될 것 같았죠. 솔직히 말할게요. 살금살금 다가가서 내리쳤다는 것은 거짓말 이에요. 달려갔어요. 그래서 제 발자국 소리 때문에 그 경찰은 돌아봤어요. 제가 슬리퍼를 신고 있어서 소리가 컸으니까. 그래서 저는 틀렸다고 생각했죠. 경찰이 돌아본 건 그 경찰과 저와의 거리가 어느 정도 피할 정도는 됐거든요.

  - 임진현 경찰이 돌아봤다고요?

  우신의 목소리.

  - 네……

  - ……

  - ……

  5분 정도의 정적과 녹음기의 잡음.

  - ……그렇다면 어떻게 그 경찰을 대걸레로 내리쳤죠?

  - ……

  다시 2분 정도의 정적과 녹음기의 잡음.

  - 최지영씨?

  재촉하는 태준의 목소리.

  - 더 이상 말 못하겠어요. 말 못해. 말 못해! 으아아아아!

  - 진정하세요!

  최지영이 우는 소리. 우신이 말리는 소리와 태준이 한숨을 쉬는 소리. 녹음기 끝.

  “골 때린다. 그지?”

태준이 중얼거리며 자동차 창문을 내렸다. 정말 말 그대로 골 때리는 사건이었다. 범인의 살인 방법은 밝혀졌다. 하지만 별로 해결된 것은 없었다. 만약 범인의 말이 백 퍼센트 진실이라면 이상하던 사건이 더 이상해질 뿐이었다. 보통 범인들은 형사들이 모르는 사건의 내용에 대해 거의 다 알고 있다. 당연하다. 범인들이 사건을 일으키니까. 하지만 이번 범인은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는 듯 했다. 흉기로 내려치려고 했는데 경찰은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범인도 모른다.

  “하…… 미치겠다.”

  “그래도, 하나 건졌잖아.”

  우신이 자동차 시동을 끄면서 말했다.

  “그렇긴 하지.”

  자동차 문이 열리면서 두 형사가 내렸다. 이번 사건에서 CCTV에 찍힌 인물들 중 하나인 빨간색 스웨터를 입고 있던 남자 ‘김홍칠’을 만나러 온 것이다.

  ‘김홍칠이라……’

  태준은 속에서 뭔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김홍칠은 8년 전 법원에서 성폭행 혐의로 재판을 받은 적이 있었다. 피해자는 김홍칠의 자택 근처에 위치한 중학교의 3학년 여학생. 당연히 무거운 형을 당할 것이라고 모두들 예상했지만, 김홍칠의 변호사는 병원에서 받은 정신이상 진단서를 대면서 형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이없게도 이 주장은 받아들여져 제대로 된 형은 거의 받지 않고 김홍칠은 석방되었다. 그리고 그 여학생은 한 달 뒤에 자살했다. 당시 방송 매체는 말 그대로 뒤집어졌었다. 김홍칠이 돈을 썼다는 얘기도 나돌았고, 재판을 다시 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법원에 대한 맹렬한 비난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미 끝난 재판을 다시 할 수는 없었고, 그 사건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서서히 잊혀져갔다.

  그런데 그런 김홍칠이 형사들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많은 의문점과 함께.

  “범인이 빨간색 스웨터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야.”

  “그것보단 이자식이 얼굴에 있는 흉터랑 금이빨을 아직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지.”

  최지영은 빨간색 스웨터의 남자 얼굴이 기억나지 않느냐는 우신의 질문에 코에 난 흉터와 가로등 불빛 때문에 반짝였던 금이빨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밤인데다가 잠시 스쳐봤기 때문에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다고 답했다. 금이빨도 놀랄 때 벌어진 입을 보고 발견했다고 했다. 그 범인의 외형과 나타난 지점을 토대로 인물 대조 수사가 벌어졌다. 하지만 생각보단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굴의 흉터, 금이빨 그것만으로도 사람을 추려나가기는 충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 그 사람이 김홍칠이었다.

  “물어볼 것은 많겠지?”

  태준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우신은 약간 긴장된 얼굴로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스피커로 낯선 남자에 대해 극도로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찰에서 나왔습니다.”

  “전…… 아무것도 잘못 한 것이 없습니다.”

  “그냥 문 여세요.”

  우신과 태준은 식탁에 앉았다. 김홍칠은 아무 말도 없이 담배를 피워댔다.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왜, 왜 찾아온 거요?”

  담배를 반쯤 태우던 김홍칠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다시 담뱃갑에서 하나를 꺼냈다.

  “임진현 경찰을 알고 있죠?”

  우신의 말에 김홍칠의 라이터에서 불길이 나오려다가 말았다. 김홍칠은 인상을 조금 쓰더니 다시 힘을 주어 불을 붙였다.

  “다 알고 왔습니다. 증거물까지 있어요.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하십시오.”

  “이미 죽은 사람을 왜 저한테……”

  “그냥 대답하세요.”

  김홍칠은 뭔가 말하려다가 말더니 피던 담배를 비벼 끄지도 않고 재떨이에 던졌다. 손을 떨던 김홍칠은 다리까지 떨기 시작했다.

  “임진현…… 네. 압니다. 알아요.”

  “어떻게 알고 계신 거죠? 직장동료라고는 말할 수 없겠고요. 그냥 친구인가요?”

  “어떻게 하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물 좀 마시겠습니다.”

  김홍칠이 물을 따라서 마시는 동안 태준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전과로 보나 감시카메라의 영상으로 보나 김홍칠이 이번 사건에 연관되어 있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너무 생뚱맞았다. 왜? 왜 김홍칠이 임진현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을지 전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연결고리는 있었다.

  자살.

  성폭행을 당했던 여학생의 자살에는 김홍칠이 연관되어 있고, 7개월 전 범인의 딸의 자살은 임진현 경찰이 출동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이 감시카메라에 잡혔다. 그것뿐이었다.

  ‘왜 만났을까.’

  왜 만났는지. 그리고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면 이 사건도 해결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해결의 끝에는 뭔가 좋지 않은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라고 말씀해주셨는데 그런 것으로는 곤란합니다. 정확하게 어떻게 만나게 되어서 어떤 계기로 친해졌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친한 사이는 아니고. 내가, 어, 그러니까 옛날에 경찰서에 자주 들락거렸으니까, 거기다 집도 서로 가깝고 해서 그냥 만나면 인사나 하고, 술을 한두 번 마신 사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김홍칠은 머리를 긁어대며 말했다. 태준은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임진현 경찰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강간범과 같이 술까지 마셨다고?’

  이상했다. 아무리 과거였다고는 하지만 강간범과 술을 기울였다니. 태준의 상식선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강간범이라고 하면 교도소에서도 말종으로 취급하는 존재다. 거기다 피해자에 대한 정보나 얼굴, 이름을 몰라도 뉴스에 나온 그런 소식들을 들은 일반인들도 분노를 느낀다. 거기다 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받지 않은 채 교묘히 피했다. 그런데 경찰이라는 사람이 멀리하기는커녕 만나면 인사를 하고 술을 같이 마셨다.

  ‘왜지?’

  김홍칠의 말이 사실이어도 이상했고 거짓이어도 이상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임진현 경찰이 전과자, 그것도 악성 전과자와 친하게 지내왔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반대로 거짓이라고 생각해도 말이 되지가 않았다. 김홍칠이 임진현 경찰을 자신과 술을 마시는 사이라고 하면서 까지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굳이 거짓말을 한다면 차라리 그냥 우연히 몇 번 마주쳤었다, 정도만 했을 것이다.

  “정말인가요?”

  질문을 하는 우신의 표정도 당황한 표정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제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요? 정말입니다. 자, 이, 이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된 것 같은데요. 더 없다면 이만……”

  “아니요.”

  태준이 고개를 흔들었다.

  “최근에 임진현 경찰을 한번 만난 적이 있었지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큰 길의 인도에서. 만났을 때 무슨 말을 했습니까?”

  물을 조금 마시던 김홍칠의 눈이 조금 커졌다. 태준은 그런 태도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질문을 더 했다.

  “만약 무슨 말을 했는지 자세히, 그리고 사실대로만 말씀해 주신다면 저희들이 다시 여기에 찾아올 일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커다란 종이봉투에 손을 집어넣고 사진을 몇 장 꺼냈다. 최지영이 찍힌 사진이었다.

  “이 사람을 만났을 텝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당신이 이 사람을 보고 상당히 놀라면서 도망쳤다고 진술하더군요. 이건 어떻게 된 건지도 설명해 주시죠.”

  쳉그랑!

  물 잔이 물을 쏟으며 식탁 아래로 떨어졌다. 김홍칠은 당황하면서 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제정신이 아닌 목소리로 중얼대었다.

  “이, 임진현 경찰을 마, 만났을 때는 별말 안 했습니다. 아, 아까 말한 것처럼 그냥 인사만 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그런 별 의미 없는 인사. 그, 그, 그리고 그 여자는 모르는 여자네요. 그날에 이 앞집 슈퍼 아줌마랑 싸웠었는데 그 아줌마인줄 알고 도망쳤던 거 같습니다. 부, 부끄럽지만 제가 잘못한 걸 알고 있어서. 이제 됐습니까? 지금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습니다.”

두 형사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가해자와 연관된 게 아니라 피해자와 연관됐으니까 이정도로 끝냈지. 어후……”

  태준은 한숨을 쉬며 아까 김홍칠이 말한 슈퍼로 향했다. 우신도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확실히 김홍칠은 최지영을 알고 있어.”

  우신도 태준의 말에 동의했다. 사실 그 누가 봐도 김홍칠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5

  밤인데도 불구하고 서 안에서도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우신은 지친 듯 엎드려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고 태준은 김홍칠과 임진현에 대한 파일들을 검토한 후 CCTV를 몇 번이고 돌려보고 있었다. 딱히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아까 김홍칠 집 앞에 있는 슈퍼 아줌마의 말로 봤을 때 김홍칠과 싸운 것은 사실로 판단되었다. 하지만 시간대가 달랐다. 김홍칠이 최지영과 마주친 시각은 대략 밤 8시 12분에서 13분 사이. 하지만 슈퍼로 가서 소동을 벌인 것은 8시 21분이었다. 만난 직후 바로 갔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CCTV화면속의 김홍칠은 확실히 최지영을 만나고 난 뒤 걸음걸이가 좀 빨라진 것 같았다. 자신을 보고 놀랐다는 최지영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거기다 7시 35분쯤 자신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초조하게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임진현 경찰의 모습으로 보아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는 말도 사실인 것 같았다.

  ‘왜 초조하게 기다렸지?’

  이렇게 생각하며 태준은 계속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듯이 조금 웃었다. 범인의 말을 믿고 그 말을 토대로 피해자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어?’

  태준이 편의점 앞을 지나고 있는 김홍칠을 보고 있을 때 화면 안에서 넘어지는 사람을 보았다. 조금 아플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를 한번 쳐다보더니 그냥 지나갔다. 넘어진 남자는 부끄러움이 아픔보다 컸는지 재빨리 일어난 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봤는지 두리번거리며 호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 장면을 본 태준은 픽 하고 웃다가 갑자기 얼마 전 임진현 경찰의 아파트 단지 관리사무소에 갔을 때 들었던 말이 기억이 났다.

  - 가져가는 건 좋은데…… 너무 유심히는 보지 마세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조금 이해가 갈 것 같았다. CCTV를 계속 보다보니 특정 인물의 사생활을 보기로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볼 수가 있었다. 편의점에서 무엇을 사는지, 어떤 건물에 들어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심지어 엘리베이터 안에 달려있는 CCTV를 보다가 화장을 고치고, 코까지 파는 사람을 본 적도 있었다.

  ‘그런 것까지는 생각을 못했네……’

  게다가 휴대전화의 통화 기록을 볼 수 있고, 메시지는 어떤 내용인지 직접 볼 수도 있었다. CCTV, 통화 기록, 메시지 등을 확인할 때 마다 ‘수사’라고 생각은 했지만 뭔가 찝찝했었다.

  ‘경찰이 착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태준은 화면을 끄고 우신보고 편히 자라고 말하려고 일어섰다. 그러다가 잠깐 하며 다시 앉았다.

  ‘착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태준은 다시 급하게 의자를 넘어뜨리며 일어섰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우신이 깼다.

  “나가보자!”

  “어…… 어딜?”

  “아니다. 나 혼자 다녀올게.”

  점퍼를 걸치면서 태준은 급하게 정문을 빠져나와 차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임진현 경찰의 아파트 주변이었다.

  “김홍칠 지금 집에서 나왔는데 몇 시에 다시 들어오지?”

  “몰라.”

  구석진 골목길에 주차해 놓은 차 안에서 우신은 태준과 연락을 하며 내릴 준비를 했다.

  “밤새 CCTV확인 하더니 그것도 몰라? 아, 맞다. 어제 임진현 경찰 아파트 근처에 갔다며. 설마 그 시간에 주민들 깨워서 탐문한 건 아니겠지? 그건 실례라고.”

  “그건 나도 알아. 나갈 때 너무 늦은 밤이란 걸 생각 못하고 나갔을 뿐이야. 그리고 나 어제 차 안에서 웅크리며 자서 피곤하니까 말 너무 많이 시키지 마라.”

  태준은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참나. 그럼 뭔가 발견하면 연락하는 거야. 근데 왜 내가 이런 위험한 일을 해야 하는 거야? 넌 피해자 집이라서 그냥 임진현 경찰 어머니한테 허락받고 들어가면 되지만 난 수색영장 없이 들어가면 안 되는 거란 말이야.”

  “아, 거 되게 말 많네. 그냥 내가 임진현 경찰 아파트 앞에 있으니까 그런 거야. 싫으면 하지 말던가.”

  끊어진 휴대폰을 보며 우신은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고개를 흔들고 김홍칠의 집 앞으로 뛰어갔다.

  ‘비상열쇠는 여기였던가.’

  대문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 붉은색 벽돌담벼락에 난 구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역시 그 안에 열쇠가 있었다. CCTV로 이미 확인을 했다. CCTV가 참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하다는 것과 아직도 이렇게 열쇠를 숨겨놓는 사람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우신은 열쇠로 문을 열었다.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방안의 풍경이 보였다. 딱히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평범한 방이었다. 태준은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았다.

  우선 장갑을 손에 꼈다. 그리고 뭔가 나올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책상 위의 책들과 두꺼운 공책부터 살펴보았다.

  ‘임진현, 이 경찰도 분명히 깨끗한 인간은 아닐 거다.’

태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 아침 아파트 단지 주위의 사람들을 한명 한명씩 찾아가보며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는 물음이 아닌 어떤 사람을 주로 만났느냐는 질문을 했다. 임진현이 사건이 일어난 당일만이 아닌 다른 날에도 김홍칠을 만났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기도 했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태준이 원한 답을 얻은 것은 이제 막 점심식사를 하려고 하던 수선가게에서였다.

  “그 경찰 아저씨, 알아요.”

  그 가게 주인의 딸이었다. 약간의 지체장애가 있는. 주인의 말로는 딸이 아파트 주위에서 자주 논다고 했다. 가게에서 멀지도 않은 곳이라 마음 편히 보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자주 봤어요.”

  주인의 딸 말로는 임진현 경찰이 남에게 꽤 친절했다고 했다. 특히 그녀가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특히 더 친절하고 잘 해대주었다고 했다. 태준이 임진현 경찰이 만나는 사람을 본적이 있느냐고 묻자 몇 달 전에 어떤 중학생 정도 되 보이는 여자애를 경찰차에 태우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얼핏 보기에 연행하는 것인 줄 알고 깜짝 놀라서 기억하고 있다고. 주인의 딸은 그 여학생의 외모와 입고 있던 교복이 어떤 학교의 교복인지 말해 주었다.

  ‘틀림없어.’

  태준은 공책을 하나하나 뒤적이며 생각했다.

  ‘임진현 경찰은 최지영 딸이 자살했을 때 그 딸을 그때 처음 본 게 아니야.’

  혹시나 일기를 써 놓았을 까봐 펼친 공책에는 딱히 단서가 될 만한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김홍칠과도 그냥 자주 만났던 것이 아닐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태준의 마음이 조금씩 무거워져 갔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최지영의 살인. 유서도 없이 죽은 누구보다 활발하던 그녀의 딸. 그 살인과 자살의 이유가 확실하게 짐작이 갔다. 그리고 그 짐작이 틀리길 빌었다. 그러면 안 되었다.

  - 착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이런 곳에서 뭘 찾으라는 거야.”

  우신이 들어간 김홍칠의 방안은 퀘퀘한 담배냄새와 술 냄새로 가득했다. 그리고 온갖 잡동사니들이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책상 위를 뒤져보았지만 책 같은 것은 없었고 필기구도 없었다. 거실도 다른 작은 방도 뒤져 보았지만 발견되는 것은 없다고 보면 되었다. 이 방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이 방을 뒤지면서도 딱히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가전제품을 담아두었던 박스를 뒤지고 바닥에 떨어져있던 옷가지들을 치웠다.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가 마지막인가.”

  옷장을 열자 신기하게도 옷들은 깔끔하게 다려져서 잘 포개어져 있었다. 벌레가 생기지 않게 하려고 했는지 나프탈렌 냄새도 났다. 바깥에서의 자기 모습만 철저히 신경 쓰는 타입이라고 우신은 생각했다.

옷장을 뒤적이자 CCTV에서 많이 본 빨간색 스웨터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김홍칠이 자주 입는 옷일 것이었다.

  “이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야?”

  우신이 이렇게 말하는 순간 스웨터가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급히 스웨터를 집으려던 우신의 눈에 옷장 아래 깊숙이 있었을 먼지뭉치들이 보였다. 아까 떨어졌던 스웨터의 바람 때문에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들 중에 뭔가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 이상한 것을 조심스레 손에 집어 들어 올린 우신은 알 듯 모를 듯한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우신은 허리를 굽혀서 다른 것들을 더 찾기 시작했다. 김홍칠은 자신의 집을 별로 치우지 않는다. 그것이 우신의 심장을 고동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책상과 책장 사이에 쌓여있던 몇 개의 신문지를 치우자 이번에는 이빨이 보이도록 미소를 지었다. 영장 없는 위험을 감수하고 들어온 보람이 있었다.

  “이럴 때 뭐라고 외치더라? 체크메이트?”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살피던 태준은 한숨을 쉬었다. 너무 청소를 깨끗이 해놓았다. 피해자의 집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고 임진현 경찰의 어머니를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어서서 침대 밑을 뒤지려던 태준의 눈에 경찰복이 들어왔다.

  ‘옷.’

  태준은 붙박이장으로 달려갔다.

  ‘그래. 혹시 어쩌면.’

  붙박이장을 열자 어두운 계통의 옷들이 많았다.

  “어머니!”

  태준이 임진현의 어머니를 부르자 밖에서 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차를 끓이다가 대답했을 것이다. 그리고 휠체어를 타고 있어서 대답만 하는 것이리라.

  “아드님이 퇴근해서 들어오면 거의 같이 계시죠?”

  밖에서 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먼지가 쌓인 붙박이장을 보며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6

  김홍칠은 취조실에 앉아서 다리를 계속 떨고 있었다. 태준은 담배를 피고 있었고 우신은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김 반장을 비롯해서 다른 형사들도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는 유리창 뒤에서 스피커에 귀를 기울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끝난 사건을 너무 오래 재수사해서 그만 끝내라고 할 때쯤 김홍칠이 잡힌 것이었다. 서 내에서는 꽤 큰 이슈였다.

  “이제는 정신장애라고 하면서 빼지도 못하겠네. 정신장애도 두 번은 안 되는 거 알고 있지?”

  태준은 담배 연기를 뱉으면서 말을 했다.

  “이제 그만 모든 걸 말해.”

  강압적인 말투였다. 김홍칠은 입을 우물쭈물 하며 손만 계속 매만지고 다리는 아까보다 더 자주, 세게 떨었다.

  김홍칠의 방에 있던 신문지 아래에서 발견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만한 가느다란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에 대한 분석이 끝나고 김홍칠은 구속되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방 안 곳곳에는 지우지 못한 아니, 않은 지문들이 여러 개 발견 되었다. 그리고 그 지문들은 모두 최지영의 딸 이수현의 지문과 일치했다.

  “임진현과 같이 범죄를 저질렀는데, 임진현은 왜 범죄를 너랑 같이 저지른 거지?”

  김홍칠의 옷장아래 먼지뭉치 사이에 있던 이상한 것은 콘돔포장을 뜯은 껍질 조각이었다. 그 물건을 찾았을 때 우신은 김홍칠에게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김홍칠이 8년 전 잡혔을 때 서 내는 발칵 뒤집혔었다. 누군가가 김홍칠이 ‘콘돔을 쓰지 않고 해야 느낌이 좋다.’라고 말한 것을 들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법정의 증거물로 쓰이기에는 불충분했지만 이번 사건에서는 충분했다. 김홍칠에게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고 판단한 우신은 그 안에 있는 모든 콘돔에 묻은 지문을 본떴고 그 지문들은 조각나 있었지만 임진현의 지문과 거의 일치한다고 판명되었다.

  “증거물은 다 봤겠지. 니가 이제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그러니까 그냥 다 불어. 계속 그렇게 입쳐다물고 있어봤자 너한테 좋을 건 없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김홍칠은 약간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 하,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김홍칠은 약간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더듬거렸고 우신은 인상을 쓴 얼굴로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그, 그 이수현이라는 애, 주, 죽은 게 확실하죠? 그런 거죠?”

  우신도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태준을 쳐다보았다. 태준은 갑자기 인상을 확 쓰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 자살했지. 아마 너 새끼 때문에 죽은 걸 거다. 니 한테 당한 것 때문에!”

  태준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리고 또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주, 주, 죽은 게 확실하다면……”

  녹음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김홍칠은 마른 침을 꿀떡 삼켰다.

  “지금까지 말하고 싶었던 거 다 말하겠습니다. 그, 그래야 감옥에 들어가도 좀 편하게 들어가지 시발!”

  김홍칠은 이렇게 말하며 울먹거렸다.

  “임진현, 그 새끼는 경찰도 아니에요. 그런 새끼가 뭔 경찰이야.”

  뭔가 예상대로 흘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태준은 눈을 감았다. 김홍칠이 말하려는 대로 여러 가지 증거물들이 말해주는 임진현은 경찰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임진현의 방 붙박이장에서는 김홍칠의 방과 마찬가지로 이수현 학생의 머리카락과 특이하게도 세포조직이 나왔다. 아마 임진현은 경찰로서의 경험을 이용해서 모든 흔적을 지우려고 그날 입은 옷을 빨리 빨려고 했을 것이다. 다만, 집에 들어간 직후 바로 빨지는 못했다. 자신을 보고 있는 어머니의 눈. 혹시나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이 평소와는 다르게 바로 세탁기를 돌리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 바로 빨지 못하고 잠시, 아주 잠시 붙박이장에 옷을 걸어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잠시라도 옷에 묻어있던 머리카락과 세포조직이 떨어지기는 충분하다. 그리고 머리카락과 세포조직, 특히 세포조직이 옷에 묻어 있는 것은 이상하게 볼만했다. 세포조직은 피부가 그 옷과 직접, 세게 맞대 여야 묻는다. 즉, 임진현이 이수현에게 범죄를 저질렀다. 그렇게 밖에 볼 수가 없었다. 김홍칠의 집에 나온 임진현의 지문. 결정적이었다.

  “당신들이 생각해낸 것처럼 그 여자애는 우리 집에 들어온 적이 있어요. 아니, 아니, 아니, 납치가 됐다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 임진현 그 새끼가 그 여자애를 납치해서 우리 집에 들어왔어요.”

  “같이 범죄를 저질렀나요?”

  우신이 담담한 척을 하며 질문을 했다. 하지만 종이를 잡은 손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

  김홍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습관은 사라지기 힘들다. 한번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아무리 감옥에서 살다가 나와도 다시 한 번 범죄를 저지르기가 쉽다. 그런데 김홍칠은 감옥에도 가지 않았다. 그 유혹을 뿌리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임진현이 무슨 말을 했는지 겁만 먹고 저항은 안 하는 상태였어요. 임진현의 말로는 우리 얼굴을 봐도 제대로 기억도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 새끼는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하고 있더군요. 저도 급하게 마스크를 했습니다. 그러고선 임진현이 당신들이 발견한 그 콘돔을 꺼냈어요. 저는 바지를 내리다가 급하게 다시 올렸습니다. 갑자기 취조를 받고, 법원에서 재판을 받던 것이 기억나더라고요. 어떤 정신으로 참고 바지를 올렸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다만 법정에서 증거물로 내 정액이 나왔다는 것. 아마 그것을 떠올리면서 참았을 겁니다. 임진현은 괜찮다고 하면서 콘돔을 내밀더군요. 전 됐다고 했습니다.”

  “거짓말치지마 이 새끼야.”

  태준은 차가운 목소리로 김홍칠을 노려보며 말했다.

  “믿지 않아도 좋아요! 어쨌든 임진현은 콘돔을 쓰더군요. 그러더니 그 여자애에게 안대를 씌우고 차에 태우고 집 앞에 내려 주겠다며 갔어요. 아마 그때가 밤 10시 좀 넘었을 때였을 겁니다.”

  “……그럼 왜 임진현은 당신과 범죄를 저질렀나요?”

  “후……”

  깊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임진현을 만나기 전에 한 번 더 성추행을 할 뻔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경찰차가 나타나서 급히 도망쳤는데, 붙잡혔지요. 그때 절 붙잡은 경찰이 임진현이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절 이용해먹으려고 한 게. 그 새끼는 여자애가 자기가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경찰에 신고를 해도 저만 잡혀 들어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제 집을 이용했겠죠. 그 여자애가 기억하는 것은 희미하지만 우리 집의 구조. 그러면 저만 체포될 것이고 제가 아무리 임진현이 공범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듣지도 않겠죠. 말이 되냐고, 임진현은 아주 뛰어난 경찰인데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냐고. 그리고 저는 전과가 있는 사람이죠. 거기다 성추행 미수의 현장을 그 새끼가 목격했으니…… 전 싫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최지영을 보고서 넌 놀라며 달아났다. 그것도 이 사건과 관련있는 거겠지. 최지영과 이수현 학생. 참 많이 닮았어. 그지? 하기야 엄마라고 하기에는 좀 많이 젊어서 착각했을 수도 있겠지. 거기다 시간은 어두운 저녁. 그런데…… 임진현도 꽤 많이 놀란 모양이더군. 그 착각 때문에 죽었으니까. 날만 조금 밝았더라면, 그리고 최지영을 한 번이라도 봤었더라면 안 죽었을 지도 모르는 게 되어 버리는 군.”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태준은 이제 사건이 거의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과연 이 김홍칠은 이번에는 어떤 판결을 받을지도 생각했다. 그런데 김홍칠의 얼굴을 보자 김홍칠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임진현이…… 그 여자애 엄마를 못 보다니요?”

  “뭐?”

  태준은 물고 있던 담배를 뗐다.

  “임진현은 분명히 그 여자애 엄마를 봤습니다. 나는 못 봤지만. 임진현은 차로 집 근처 골목길까지 그 여자애를 데려다 줬습니다. 그리고는 그 애 엄마가 걱정하며 아파트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 여자애랑 같이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했다고 나한테 말했습니다.”

  “그럼 임진현은 왜 놀랜거지?”

  “그게…… 그 일이 있었던 후, 그러니까 그 여자애가 자살한 후에 임진현이 좀 이상해지더군요. 경찰서 안에서 제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었다면서 자주 저를 불러서 술을 마셨어요. 물론 임진현은 자신을 알아 볼 수 없게 꾸미고. 그런데 만날 때마다 알 수 없는 말들을 지껄였어요. 자꾸 이상한 귀신이 보인다면서.”

  “귀……신?”

  “네. 아마 그 여자애의 환상, 이었던 거 같아요. 아마도…… 죄책감 때문이었겠죠.”

자신도 똑같은 범죄를 저질렀었지만 그런 환상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이상했는지 말꼬리를 흐렸다.

  “임진현이 죽은 그날에도 절 불렀어요. 전화를 받으니 목소리가 급하더라고요. 집안에서 그 여자애 귀신을 봤다면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찌나 급하게 나왔었는지 숨을 헉헉대더군요. 저는 귀신같은 건 없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잊혀 질 거다 하는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지껄여 주고서 자연스럽게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뒤돌아보고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는 그 여자애 엄마인지 몰랐어요. 그냥…… 진짜 임진현이 말하던 귀신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도망쳤습니다. 한동안 무서웠어요. 귀신이라니. 아니라는 것은 이제 알지만, 솔직히 무섭습니다.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아서……”

  ‘그래서 술술 털어놓는 건가. 아니면 귀신이 화나서 잡아갈까봐?’

  태준은 속으로 비꼰 뒤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범인은 잡혔습니다.”

한창 재판을 준비 중인 최지영의 얼굴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퀭했다. 여러 가지로 힘들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범인이 잡혔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다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결국 당신은 이미 당신의 딸이 왜 자살했는지 알고 있었군요.”

  “……”

  “왜 말씀 안 하셨습니까?”

  태준이 질문을 했지만 최지영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태준은 최지영이 속으로 어떤 말을 생각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에요?’

  “그냥 말 하셔도 됩니다. 이젠 입장이 조금 다르지 않습니까.”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했다. 처음 보이는 미소였다. 최지영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웃을 줄도 아시네요.”

  “저도 인간입니다만.”

  “그래요…… 하기야 임진현 그 인간 보다야 훨씬 인간이겠죠. 물론 사람을 죽인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좀 이상하지만.”

  최지영의 얼굴에는 약간의 회의감이 비쳤다. 태준은 그 얼굴을 보며 지금 그 때 대걸레를 내리치던 그 순간을 회상하며 후회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임진현이 내 딸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아느냐고 물으셨죠?”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어이없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엄마가 되면 자식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대충 느낌이 와요. 그리고 불안해지기 시작하고, 계속 자식에게 대화를 걸죠. 느낌은 있는데 증거가 없으니까. 그런데 전 그 증거를 발견했어요. 편지.”

  “편지?”

  “네. 편지. 유언장이라고…… 해야 되나. 그 편지를 읽고 그 임진현이란 경찰이…… 그랬구나, 한 걸 알 수 있었어요. 그 경찰…… 딸이 알고 있는 유일한 경찰. 옛날에 학교가 늦어서 발만 구르고 있을 때 자기를 학교까지 태워줬다며 너무 친절한 경찰이라며 떠들어 댔던 그 경찰. 근데 너무 늦었죠. 제가 그 편지에 대해서 말하려고 마음먹었던 그 날 저녁식사 후. 제 딸이 낼 수 있는 모든 용기를 쥐어짜냈어요. 그리고 그 편지도 사라졌어요.”

  “사라져요?”

  “딸이 어디로 숨겼겠죠. 아니면 제 딸이 날 때 같이 어디론가 날아갔을지……”

  최지영은 말을 하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자신의 딸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 편지이야기, 왜 아무한테도 말씀 안 하셨습니까?”

  자신이 말을 꺼내고도 바보 같다고 태준은 자신을 책망했다. 누가 믿어줄 것인가. 사람들은 민중의 지팡이를 굳게 믿고 있는데. 그 지팡이가 흉기가 되어 자신을 때렸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누가 믿어주겠는가.

  “말 안하는 게 나았어요. 아마 그게 경찰이 아니었더라고 해도 아마 전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마 직접 찾아갔겠죠. 그러다 또 돌아오고, 또 갔다가 또 돌아오고.”

  “임진현을…… 여러 번 찾아갔었습니까?”

  “찾아갔었어요. 처음에는 가서 무작정 니가 죽였다고 말하려고 했고, 두 번째에는 빌어라고 말하려 했고,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샐 수 없을 정도로 아무 생각도 없이 찾아갔었어요. 그런데 번번이 다시 돌아왔죠. 아침에 비가 왔었던 그날은…… 그냥 제 딸 생각이 가장 많이 났던 날이었습니다. 그것뿐이에요. 그리고 만약이지만 경찰이 아니었다 해도…… 똑같아요. 말해봤자 아무도 안 믿죠. 증거가 없잖아요. 당신들은 그렇게 증거를 좋아하는데.”

  태준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말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7

  “드디어 끝인가……”

  우신은 법원 근처에 있는 돌계단에 털썩 걸터앉으며 법원입구를 보았다. 수십 명의 기자들이 몸으로 반원을 만들며 카메라 플래시를 눈부시게 터트려댔다.

  “그렇지. 끝이지.”

  마이크를 들이대는 풍경을 보면서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이상한 사건이야. 한 가지 아직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말을 멈춘 후 우신은 계단 옆에 길게 자라난 풀을 뜯었다. 그리고 입으로 후 불어서 풀들을 멀리 날려 보냈다.

  “이수현이라는 그 학생은 왜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비밀을 지키고 뛰어내렸느냐는 것. 그리고 그 편지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로 갔느냐 하는 것이겠군.”

  “그게 궁금해?”

  태준은 한 개비 밖에 남지 않은 담배 갑을 꺼내며 말했다. 태준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피곤한 눈이었다.

  “임진현은 경찰이 직업이었지. 성범죄자들, 그리고 성범죄자들한테 당한 피해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생각하는지 아마 오랜 경험을 통해 다 알고 있었을 거야.”

  마지막 남은 담배를 입에 물며 불을 느리게 붙였다.

  “만약 한 마을에 성범죄자 10명이 돌아다닌다고 치면…… 그 마을의 경찰서에 신고를 하러 오는 피해자는 2명밖에 안 돼.”

  하늘로 날아오르는 담배 연기를 태준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임진현은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었어. 그리고 이수현에게 접근하면서 그 애의 성격도 파악했을 거야. 그리고 자신이 성폭행을 당했음에도 침묵을 지키는 유형의 피해자들 성격과 대조해봤겠지. 얘는 아마 성폭행을 당해도 주변에 피해를 주기 싫어서 속으로 삭히면서 살아갈 애다…… 그렇게 판단했을 거야.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딱 맞아 떨어졌어. 무서울 정도로.”

  우신은 범원의 재판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면 법원에서 한창 집행이 진행 중일 것이었다.

  “경찰이기에 가능했을지도 몰라. 경찰이기에……”

  “그럴지도 모르지.”

  시간이 꽤 지난 뒤 담배를 다 태운 것을 본 우신은 일어서면서 바지를 탁탁 털었다. 그리고 태준의 어깨를 툭 쳤다.

  “자, 가자.”

  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끄러워진 법원 쪽을 보았다. 김홍칠이 유죄를 받았다는 소식이 밖으로 새나간 것 같았다.

Epilogue : 사건발생 16분후

  “헉헉……”

  심장과 폐가 터질 듯이 아파왔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현관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수현아.’

  신발장 위에 놓여있는 수현이가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수현이의 목걸이를 꺼내었다.

  - 우와…… 이거 정말 나한테 선물로 주는 거야?

  - 그럼.

  - 엄마 고마워!

  - 그렇게 좋아?

  - 응. 정말 좋아. 이제 앞으로 이걸 나라고 생각할거야.

  - 풋.

  - 웃지 마.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할거란 말이야. 이제 앞으로 이건 나야. 여기에는 내가 들어있을 거라고.

  목걸이를 피가 나올 것만큼 아프게 쥐었다. 목걸이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경찰에는 어차피 잡힌다. 변장을 한 것도 아니고, 사각지대만을 골라서 다닌 것도 아니다. 나는 유죄다. 살인자다. 아마 평생 그럴 것이다.

  - 악!

  짧은 비명소리. 그리고 둔탁하게 막대기가 머리에 부딪히는 소리. 날 바라보는 눈. 공포에 질린 눈. 왜 그랬을까. 왜 그 경찰은 피하지 않았을까. 피할 수 있었는데 피하지 않았다. 혹시……

  나는 손에 들려있는 목걸이를 쳐다보았다.

  - 이제 앞으로 이건 나야. 여기에는 내가 들어있을 거라고.

  ‘설마……’

  가슴속에 먹구름처럼 피어오르던 생각을 옆으로 밀었다. 아니다. 내 딸이 그 경찰을 죽게 만든 것이 아니다. 내가 죽인 것이다. 내가 죽인 것. 내가…… 내가 딸의 복수를 한 거야.

  하지만 내 딸이 죽기 전에 남긴 편지는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경찰…… 용서 안 할 거야. 절대로 용서 못 해. 엄마, 나 먼저 갈지도 몰라. 미안해. 하지만……

  머리를 흔들었다. 그 편지는 그냥…… 머릿속에서 흔들어 지워버렸다.

한 장의 날개
한 장의 날개

추천 콘텐츠

열여덟 살, 영원히

열여덟 살, 영원히   “그럼 마치자. 반장.”   차렷, 경례 소리와 함께 나는 인사하는 동시에 책상위로 엎어졌다. 그러고서 참아왔던 긴 한숨을 터뜨렸다.   “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학년 물리수업은 좀 아닌 것 같았다. 선생님 탓인지, 과목 탓인지는 몰라도 수업시간에 눈앞이 자꾸 흐려지고 수업 내용은 한 쪽 귀로 들어와서는 다른 쪽 귀로 분쇄되어 날아가 버렸다.   “야, 매점 가자. 매점.”   “그래. 뭐 먹을까?”   “음…… 일단 가서 고르자. 물리 때문에 기운 다 빠진 것 같아. 단 게 쫌 땡기네.”   “아, 물리. 그 쌤 쫌 짜증나지 않냐?”   쉬는 시간의 교실은 수십 명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뒤섞여 그야말로 카오스 그 자체였다. 새 학년이 된지 3주 채 지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일명 그룹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한 마디로 그냥 친한 애들끼리, 말 좀 통하는 애들끼리 모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끼리 모여서 쉬는 시간에, 점심 저녁시간에 수다를 떤다.   “미정아! 너도 같이 매점가자.”   어우, 이 녀석들은 잠도 없는 모양이었다. 두 팔에 파묻혀있던 고개를 들자 한층 더 커진 소음이 들려왔다.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고 있었어?”   보면 모르냐……   “아, 시간 얼마 안 남았네. 에이, 다음에 가자.”   희정이는 투덜거리고선 사물함 쪽으로 걸어갔다. 잠이 다 달아나버린 나는 방금 몇 분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팔짱을 끼고서 잠시 생각해보았다. 하나, 둘, 셋.   “헐.”   쉬는 시간동안 나는 한 마디도 안했는데 희정이는 세 마디 정도 했다. 그런데도 대화가 자연스럽게 끝났다. 사실, 어제 오늘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문득 그게 신기해지는 날이 있다.   “보자, 다음시간이…… 수학이네!”   오늘따라 시간표가 싫었다. 안 그래도 물리 수업 듣고 힘 다 뺐는데 수학이라니. 이과로 온 것이 진심으로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바보지. 바보야.”   연신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서랍을 뒤졌다.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수많은 낯선 다른 반 애들이 우리 반을 점령하고 있는 것이 이제야 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내 옆 짝도 바뀌어있었다.   “아, 수학은 수준별 이동수업이지.”   오늘따라 내 상태가 왜 이런지 참. 한심하다 한심해.   ‘보자, 행렬이 영, 일, 일, 이, 영…… 아

  • 한 장의 날개
  • 2012-02-29
도피

도피   “모르겠어…….”   나는 작게 소리 내어 말했다. 방안에 혼자 있는데다 엄마는 TV를 보고 있고, 아빠는 야근에다 창밖은 별 한 점 없이 컴컴했지만 어디선가 그거 하나 못 풀어서 대학 어떻게 가려고 그러냐는 소리가 들릴까봐 조용히 말한 것이다.   “후……”   샤프를 소리 없이 문제집 옆으로 굴려서 해방시켰다. 그리고 문제집을 째려보았다. ‘순간변화율’이란 놈이 ‘미분의 곱’, ‘도함수’ 친구들로는 모자랐는지 이젠 ‘전하량’까지 데리고 나왔다.   “어이! 학생. 이것도 못 풀어? 이걸 봐봐. 이걸. 별 3개짜리야. 이래가지고 대학……”   나는 계속 나불대던 문제집을 덮어버렸다. 닥치라고 하려던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도로 삼켜버렸다. 그리곤 문제집 더미 속에 끼어있던 공책을 꺼냈다. 몇 장을 슥슥 넘기자, 글자들이 빽빽하게 써져있었다. 소설. 그냥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막 휘갈겨놓은 것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건 나의 소설집이다. 단편도 있고, 장편도 있고, 구상만 잔뜩 써놓고 중간에 그만 둔 것도 몇 개 보였다. 이것들은……   “진훈아! 숙제 다 했어?”   엄마의 목소리는 두꺼운 문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뚫고 들어와서는 내 귀를 때렸다.   “어, 응.”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숙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공책을 꽂아놓고 덮어두었던 문제집을 다시 펼쳤다. 그러자 문제집이 또 나불대기 시작한다.   “여, 학생. 빨리 빨리 풀어야지. 안 그래? 학원에 있는 수학선생 무섭잖아. 안 풀어온 문제 하나당 한 대씩 패고. 그치? 그러니까 내 말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거야. 너도 잘 알잖아? 그 수학선생 힘세다는 거. 맞으면 아프잖아. 맞는 것 보단 지금 빨리 집중해서 다 푸는 게 낫지 않냐? 안 그래? 그리고……”   다시 문제집을 덮어 버렸다. 듣기 싫었지만 다 맞는 말이다. 안 풀면 맞는다. 그런데 왜?   “왜 일까?”   나는 왜 맞아야 할까? 내가 한 문제를 안 풀어오면 - 몰라서 못 풀었다 하더라도 - 나는 나보다 덩치가 두 배쯤은 커 보이는 수학선생에게 매를 맞는다. 이건 정당하지가 못하다. 엄마한테 말했더니 돈을 받았으니 어떻게 해서든 공부를 시켜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고, 자기 학원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두 가지 대답 모두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힘든 학원생활을 조금이라도

  • 한 장의 날개
  • 2012-02-10
폭풍

폭풍   저녁노을이 태워버린 듯한 검은빛 구름들이 걸린 붉은 하늘이 이학년 삼반 교실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왔다. 어느새 주황색이 되어버린 햇빛은 앙상한 빈 책상, 의자 다리들의 그림자를 길게 잡아 늘어뜨렸다. 그 그림자들이 학생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들을 유일하게 메워주었다.   “사각 사각.”   그림자위로 연필이 움직이는 소리가 합세하였다. 불 꺼진 교실 안, 왼쪽 창가 맨 뒤에 앉은 진우의 손은 종이 위에서 연필을 쥔 채 열심히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그리고 이따금씩 손이 아파와 팔을 흔들기도 했다.   “야! 다했어?”   뒷문이 벌컥 열리면서 붉은 햇살을 등진 기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진우는 그림자에 둘러싸인 기수의 모습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얼씨구.”   기수는 신발을 벗지 않고서 교실로 들어와 진우 쪽으로 뚜벅 뚜벅 발소리를 내면서 걸어갔다.   “아직 다 안 했지?”   기수가 진우 옆자리의 의자를 소리 나게 끌어당기고서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기수의 대답에 진우는 엷게 웃으며 또 한 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얼만큼 쓴 거야? 우와, 많이도 썼네.”   진우 앞에 놓인 열 장의 에이 포 용지에는 ‘다시는 지각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단어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지각…… 야, 그러니까 쌤한테 말하라니까? 쌤도 너희 집에 어떤 일이 있는 줄 알면……”   “미라랑 주연이는 어디서 기다리고 있어?”   진우는 기수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채며 물었다. 진우의 눈은 어느새 가늘어져 있었다.   “둘 다 운동장에서 기다리고 있어. 당최 왜 맨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빨리 써줘. 해지기 전에 축구 한판은 땅겨야지.”   기수는 진우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순간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진우는 자신의 집안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내가 괜한 말을 했지.’   기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자신을 책망했다.   “그럼 운동장에서 기다릴게. 빨리나와.”   기수의 말에 진우는 손만 위로 들고서 흔들었다. 그러자 진우의 손이 햇빛을 가려 진우의 모습이 더 어둡게 보였다. 기수는 그런 진우를 보며 뒷문을 열었다.   “검은 고양이 네로 네로 네로. 귀여운 나의 친구는 검은 고양이.”   반짝이는 노을빛으로 물든 둥근 운동장 주변에 있는 그네 위에서 미라는 땅을 발로 차면서 쉼 없이 삐걱거리는 그네를 앞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 한 장의 날개
  • 2011-08-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